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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 “트렁크, 사실 버려도 되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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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김려령의 첫 성인소설 『너를 봤어』를 읽은 독자라면, 필시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을 손꼽아 기다렸다. 청소년소설을 썼던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김려령의 소설은 강렬했다. 누구는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의 색깔이 사라져서 아쉽다고 했지만, 작가는 달라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폭력을 말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김려령 작가의 두 번째 성인소설 『트렁크』는 기간제 결혼을 한 29살 여자, 노인지가 주인공이다. 인지는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비밀 자회사인 NM(new marriage) VIP팀에서 6년차 차장이다. 회원에게 선택을 받으면 일정 기간 동안 회원의 기간제 부인인 FW(field wife)가 되어주는 게 인지의 업무다. NM에서는 계약 결혼을 하는 직원들을 두고 ‘출장’을 간다고 말한다. 인지의 계약 결혼은 철저히 비밀로 부쳐진다. 인지가 사랑했던 남자를 멸시했던 엄마, 인지를 몰래 사랑하고 있는 단짝친구 시정, 인지와 소개팅을 하는 남자 엄태성 등 아무도 모른다. 인지는 네 번째 결혼을 마친 시점에 작곡가인 전 남편으로부터 재결합 신청을 받고 다섯 번째 결혼을 시작한다. NM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사랑에 빠진 건 아니다. 단지, 인지가 트렁크를 다시 풀었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은 늘 내가 만나는 사람만 중요시했을 뿐, 행복하니? 하는 질문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당연 내 불행 따위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요,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어쩌면 그런 무심함에 화가 났던 것도 같다. 괜히 버럭버럭 화를 내서 나만 더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벌써 서른이다. (210쪽)

 

『트렁크』는 김려령 소설답다. 폭력을 말하는데 사랑이 보이고,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삶이 보인다. 김려령은 주인공 인지에게 철저하게 거리감을 뒀다. 기간제 결혼을 선택했다고 구차한 합리화도 연민도 하지 않는다. 다만, 주변인들에게 속삭인다. “가만두면 자생적으로 예뻐질 세상을 자꾸 훼손하지 말라고.”

 

 

자기를 내쫓아서 하는 결혼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약간은 『너를 봤어』의 연장선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뒀으면 잘 살아갈 사람인데, 왜 자꾸 건드릴까”하는 작가의 마음이『트렁크』에서도 읽혔습니다.


저한테 항상 그런 게 있어요. 동화를 쓸 때도 성인소설을 쓸 때도 마찬가지에요. ‘가만히 뒀으면 현재보다 더 예쁘게 살아갔을 사람인데, 왜 그럴까’ 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훈수사회? 어떤 경우에서도 한 마디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대의가 확실해서 반박할 수는 없는데, 그 소리를 듣는 당사자는 속으로 무너지는 거예요. 현학적인 말들을 끊임없이 해대니까. 장기를 둘 때 꼭 옆에서 한 마디를 하면서 끼어들면 되게 밉잖아요. ‘아, 저런 말 하고 싶을 때, 한 번만 참으면 되는데’ 그런 생각들이 저한테는 항상 있었어요. 살다 보면 스스로 깨닫고 바뀌고 그럴 텐데, 그 사람의 어디까지를 보길래 저런 말을 함부로 할까. 그런 게 항상 쌓여있었어요.

 

불친절한 시선인 것 같아요. 말하는 사람만 친절하다고 착각하는.


그래서 저는 “너 그렇게 하지마”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 옆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한 명 한 명이 다 옥죄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배경, 다른 사연을 쓰지만 늘 옆 사람한테 시선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본인만 친절하다고 느끼는 그 시선 몇 개만 거두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왜 다들 한마디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지.

 

『트렁크』에서는 인지의 소개팅남 ‘엄태성’이 그런 것 같은데요. 듣는 사람의 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만 해대는.


살다 보면 불현듯 닥치는 불행이란 게 있잖아요. 제어하려고 해도 끊임없이 달라붙는 불행. 엄태성은 인지에게 불행의 상징인 것 같아요. 의도하지 않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불행.

 

소설 제목이 처음부터 ‘트렁크’였나요?


초고는 ‘트렁크’였고, 중간에는 서정적이고 짠한 제목이 있었어요. ‘사랑이 남았다면’이라고 지었다가 막 왔다 갔다 했는데 다시 ‘트렁크’로 온 거예요. 사는 게 긴 여정, 긴 여행이잖아요. 보통 트렁크를 쌀 때 잘 싸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상당히 짐이 될 때가 많아요. 여행 중에 버리고 싶을 때도 많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는데 그게 또 사실은 버려도 되는 거예요. 백팩 하나만 메도 되잖아요. 트렁크가 어쩌면 버려도 되는 운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 저한테 착 중첩됐어요. 처음에는 너무 대놓고 상징적이지 않나 싶었는데, 쓰다 보니 ‘트렁크’가 제게  제목으로 왔어요.

 

2007년 데뷔 후 줄곧 청소년소설만 발표하셨는데, 2년 전 『너를 봤어』를 펴내면서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처음부터 청소년, 성인소설 구분하지 않았고 『너를 봤어』도 오랫동안 애착을 갖고 쓴 작품이라고 하셨는데, 『트렁크』는 언제 출발한 작품인가요.


꽤 오래 전에 어느 정도의 기틀은 잡아 놓은 상태였어요. 6,7년 동안 동화, 청소년소설을 발표하면서 중간중간에 썼던 작품들이 꽤 있어요. 그런데 막상 발표를 하려니까 맥만 그대로 가지고 왔지, 완전히 새로 써야 하는 상황이 되더라고요. 시대적 배경도 달라지고, 그 사이에 신조어도 많이 생기고. 그 때 썼던 단어들이 다 낡아 보이는 거예요. 마치 쭉정이를 골라내는 키에다 작품을 쏟아놓고 막 치는 느낌이었어요. 거기에서 남은 걸로만 쓴 거예요.

 

‘기간제 결혼’이라는 소재는 처음부터 갖고 간 설정인가요?


어떤 단어랑 이야기가 쇼트처럼 지나갈 때가 있어요. 그 때 미친 듯이 쓴 작품이 모 아니면 도인데, 『트렁크』도 그래요. 나 혼자 미쳐서 쓴 글인데, 미쳤기 때문에 써보고서 놀래요. (웃음) 기간제 결혼을 선택한 건, 일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사랑이 실제로는 빈번하게 예쁜 모습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소수자의 사랑이 소수이기 때문에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행복과 사랑을 말하기 전에 존엄이라는 걸 생각해봤어요. 그건 다수, 소수냐에 관계 없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거든요. 비슷한 맥락에서 결혼이라는 건, 존엄만큼이나 큰 제도이자 관습이잖아요. 어느 통념적 대의가 너무 크면, 그것을 취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박탈 당할 수밖에 없어요. 다수가 오랫동안 맞다고 했기 때문에 더 압박 당하는 거예요. 저는 결혼반대주의자가 아니에요. 연애주의자가 맞지만 결혼반대주의자는 아니에요.

 

비혼주의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요.


요즘은 젊은 사람들한테 결혼을 하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말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걸 못해주잖아요. 직장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 비정규직이니 결혼을 생각할 여력이 없어요. 외부에서 결혼하라는 것도 압박이지만, 잘 살펴보면 무의식 속에 ‘내가 결혼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이 결혼하는 걸 보면, 자기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거죠.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결혼을 안 했다는 사실 만으로. 긴 세월 동안 결혼이라는 게 유전적으로 박힌 것 같아요.

 

결혼반대주의자가 아닌 이유는요?


결혼 자체로만 놓고 보면 이것처럼 예쁜 모습이 없어요. 어떤 사랑하는 사람이 딱 만나서 합이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촌스럽지만, 두 개의 쪼개진 하트가 겹쳐질 때 예쁘잖아요. 그 순간만큼 빛나는 순간이 없어요. 다만 쫓기면서 하지는 말자는 거예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무엇 때문에 헤어지지도 말고, 주변의 압박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쫓기는 결혼은 하지 말자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내쫓아서 하는 결혼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작가님은 결혼을 한 상태에서 이 작품을 쓰셨는데.


이 소설의 콘셉트를 잡았을 때는 제가 어렸을 때였어요. 결혼은 한 상황이었지만, 당사자 입장에 더 가까운 거예요. 어른들한테 ‘니들이 세상 이렇게 만들어놨잖아’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까운 거예요. 그런데 지금 중년이 되고 보니까 거기에서 오는 미안함이 있어요. 그 존재가 나였구나, 싶은 거예요. 젊은 세대에게 미안함이 있어요. 세상은 “탓만 하지 말라”고 하는데, 젊은 친구들이 기성세대를 탓해야 하는 시대에요. 우리가 잘 다지지 못해서, 애들이 막힌 거예요. 우리 세대는 위로할 자격도 없다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 앞 세대, 386세대는 희생정신이 있었는데, 우리 세대는 그런 게 없었어요. 발전 없이 한량처럼 사는 건 나쁘지만, 탓도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 할 수 있잖아요. 미운 건 밉다고 이야기해도 되는 것 같아요.

 

“탓하라”는 조언이 낯설게 다가옵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더 하고 싶은 말씀은.


젊은 친구들한테 더 이상 얹힐 말이 없어요. 힘내라고 하기도 미안하고. 지금 젊은 친구들처럼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이 없어요. 저 때만해도 비정규직이 없었고. 부부 중 한 사람만 일해도 월세에서 10년 살면 전세, 전세로 10년 살면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니까요. 자꾸 제 아래 친구들이 예뻐 보이는데. 미안한 감정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제 딸이 스물 둘이고, 아들은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얘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내가 참 해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모세대가 됐는데 해준 게 되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젊은 세대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기성 세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은데요.


소설가의 여러 가지 직무 중 하나가 대신 말해주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다 이야기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옳은 소리를 함으로 인해 받게 되는 불이익이 있으니까. 작가에게는 목에 걸려 있는 말들을 대신 해주는 역할도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위로를 받는 거죠. ‘내가 한 생각을 저 사람도 했어’하고 혼자 심정적으로 먼 거리에서 공감하는 것, 그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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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가 예쁜 건, 선함이 있기 때문


주인공 인지는 행복하게 살려고 바득바득 노력하는 성격은 아닌데, 불행이 연달아 왔어요. 큰 욕심을 갖고 있지도 않은데 말이죠.


예전에 어른들이 “사는 게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면 자기변명처럼 들렸어요. 그런데 제가 마흔을 넘기고 어느 정도 경험을 해보니까, 쭉 행복만 오는 것도 아니고 불행만 오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불행이 연속으로 탁탁탁 치고 올 때는 정말 견디기 어려워요.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행복한 것 같지가 않아요. 언제부턴가 개개인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너무 팍팍해졌어요. 내 삶이 팍팍하면 옆을 볼 수 없잖아요. 내가 가진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니까, 내가 아프면 당장 내 아픔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견제해버려요. 그 아픔이랑 내 아픔이 섞이면 그 아픔의 파이가 너무 커지니까요. 그래서 꿈꾸는 것 같아요. 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행복한 소수가 있지만, 행복이라는 단어가 이제 되게 추상적이에요. 행복, 사랑이 이제 현실적이지 않아요. 문학에서도 값싸게 들어오는 단어로 여겨져요. 그걸 현실에서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누구한테 했더니, “너 죽을 때가 됐냐? 네 나이 때 하는 이야기가 아닌데” 하더라고요. (웃음)

 

인지의 소개팅남 ‘엄태성’ 이야기를 좀 묻고 싶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참 멀쩡해 보이고 사람 좋아 보이는데, 인지가 거절을 하는데도 계속 나타나요. 인지가 하는 말은 안 듣고, 그냥 자기 말만 해대는 거죠. ‘연극적 쾌활함’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어요. 정말 짜증나고 답답한 캐릭터인데,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님이 엄태성을 되게 미워하는구나, 싫어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티 났나요? 『트렁크』를 쓸 때, 정말 오랜 기간 엄태성이 너무 미웠어요. 악인을 데리고 와도 작가는 그 사람이 되게 매력이 있으니까 쓰는 거거든요. 그런데 엄태성은 너무 미운 거예요. 나마저 그 사람을 내치면 안 되는데, 심지어 내가 끌고 온 인물인데 너무 미운 거예요. 어쩌면 이렇게 징글 징글하게 계속 인지 앞에 나타나는지. 엄태성은 자기 세계 안에만 있는 사람이에요. 계속 남의 말을 헛듣는 거예요.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자기가 생각한 거에 딱 넣어버려요. 타인의 말을 자기 말에 소화시키고 쑥 배설하고. 자기 감정, 자기 이야기만 하니까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그렇게 싫으면 엄태성을 빼버릴 생각은 안 하셨나요?


제가 사랑할 수 없는 인물이라서 빼보기도 했는데, 뭔가 팍 파인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게 딱 합리적으로 얘기할 수 없는 거예요. 내 무의식에서 튀어나온 사람, 내가 너무 싫어하는 분류의 사람인 거거든요. 폭력에서 언어 폭력, 신체적 폭력이 있는데요. 엄태성 입장에서는 “내가 뭘 했는데?”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같은 장소에 똑같이 나타나는 거,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끔찍한 거예요. 또 다른 방식의 끔찍함이에요. 한 사람의 인생이 기구해질 때, 어느 하나만 갖고 탁 무너지지 않아요. 여러 곳에서 옥죄다가 결정타로 하나가 탁 터졌을 때, 무너지는 거예요.

 

인지 입장에서는 엄태성이 결정타였네요.


탁 터진 거죠. 사람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를 꾸역꾸역 참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낯선 불행이 튀어나서 딱 붙어 버린 거예요. 우리는 항상 대상을 필요로 하잖아요. 그 사람이 실제 얼마만큼 잘못했나 보다, 지금 내 분노의 수치가 어디까지 와있는지가 더 큰 영향을 미치죠. 당사자는 억울할 수 있는데, 그걸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딱 온 거예요.

 

그런데 결국 인지가 NM로부터 감금 당한 엄태성을 구해주잖아요.


그건 인지가 갖고 있는 선함이에요. 인지가 끝내 밉지 않은 건, 걔 안에 선함이 있어요. 저는 선을 믿거든요. 내가 사회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 할 경우가 있을 때, 끝내 위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힘은 선이에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선이죠. 선을 선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선한 자가 바보가 되곤 하지만. 아무리 칼을 열 명에게 주면서 “몇 시부터 몇 시까지의 살인은 용서해줄게”라고 말해도,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요. 절대 못 찌르는 사람이 있어요. 인지가 갖고 있는 선이 그래요. 인지가 가진 선을 앞으로 탁 빼놓지 않고 숨겨 놨는데, 그게 참 예뻐요.

 

『우아한 거짓말』도 그렇고, 『너를 봤어』도 그렇고. 주인공 혹은 주변인의 자살이 작품 속에 계속 등장해요. 『트렁크』에서도 인지의 친구이자, 시정을 사랑했던 ‘혜영’이 자살을 했어요. 계속 작품 속에서 죽음을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죽더라도 온전하게 맞는 죽음을 맞았으면 해서요. 아프게 죽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안고 싶은 거예요.

 

인지가 만약 엄마로부터 자신의 남자친구가 거절 당하지 않고, 친구의 자살도 없었더라면. 일반적인 결혼을 했을까요?


평탄하게 살지는 못했을 거라고 봐요. 뭔가를 가정하고 보면 여러 가지 결말이 나오는데. 제가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어떤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어떤 결혼을 택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타고난 것, 습득되어간 철학이 그 어떤 길로 향하게 하는 것 같아요. 인지는 피해간다고, 도피한다고 말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과감하게 부딪히면서 사는 애에요. 우리가 어떤 걸 선택할 때, 그게 떳떳하지 않고 암묵적이거나 지하세계에 있는 것들일 때는 스스로에게도 핑계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덜 비참하잖아요. 인지가 취직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뭐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하냐”고 말하잖아요. 보통 사람들이 “너 그 일 왜 하니?”라고 질문할 때가 있는데,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하겠어요. 사람들이 작가들에게 “왜 글을 쓰나요?”라고 많이들 묻는데, 단순한 거예요. 쓰고 싶으니까요.

 

인지와 함께 NM에서 일하는 ‘유 대리’ 이야기도 좀 듣고 싶어요. 인지가 유 대리의 성격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슬펐던 대목이에요.


유 대리를 생각하면 아파요. 되게 아파요. 제가 비슷한 캐릭터를 알아요. 소설에는 완전히 변형시켜놨지만요. 그냥 서로 조용히 바라만 봐주고 그러는 관계에요. 유 대리가 팍 터져서 울고 저한테 엎어졌다면, 제가 안고 울었겠죠. 유 대리는 “살 집이 없다”는 문장이 있잖아요. 그 문장을 쓰고 나서 한동안 진짜 뒷문장을 못 썼어요. 애가 너무 가여워서. 내 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머물 집이 없다는 거니까.

 

“NW에서 유 대리가 노를 할 회원은 없는 거였다”(76쪽)는 문장도 아팠어요.


얘 꿈이 너무 소박한 거예요. 그런데 그 소박함도 채워주지 못하는 세상이에요. 얘 꿈이 뭐가 그렇게 거창하다고 그것도 못 이루는지. 정말 그 자체로 예쁘고, 정말 목련같이 톡 하고 살아난 예쁜 꽃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보면 인지의 친구이자 동성애자인 ‘시정’이 가장 평범하게 무난하게 평탄하게 사는 것으로 보여졌어요.


실제로 동성애자 몇몇을 알고 있는데, 여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분들은 평범해요. 티가 전혀 안 나요. 단지 사랑하는 대상이 동성일 뿐인데, 특이한 제스처를 취한다던가, 독특한 취향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대부분은 눈치챌 수가 없어요. 시정은 아주 평범한 아이에요. 옆에 그렇게 붙어 있는 친구인 시정이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요. 인지가 매력이 있지만 단점은 자기가 본 것만 딱 본다는 거예요. 그 순간 거기에 올인하니까, 옆이 안 보여요. 인지는 부모조차도 거리를 두고 보잖아요. 인지와 시정이는 굉장히 가까운 사이지만, 시정이 고백하기 전까지는 몰랐죠. 같은 동성일 때 더 눈치를 못 챌 수 있어요. 여자라면 더 그래요. 제가 고등학생 때 걸스카웃을 했는데, 교통 안내를 하고 있으면 후배들이 와서 “선배님” 이러면서 바지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주고 갔어요. 그러면서 자기네들끼리 깔깔대고 가는데, 되게 예뻤어요. 인지도 시정이의 사랑을 그 정도로 본 것 같아요.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당연히 자기랑 같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시정이 인지를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말했을 때, 인지의 반응이 더 놀라웠어요.


인지가 예쁜 건, 앞만 보고 가지만 선입견이 없어요. 처음 마주친 거에 대해서 자기 임의대로 나누는, 그런 게 없어요. 엄태성 같은 경우는 본능적으로 싫은 거예요. 본능적으로 자기랑 맞지 않는 뭔가가 부싯돌처럼 탁 부딪힌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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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


인지는 “NM 바깥세상에서 만나는 별종은 참기 힘들다”고 했어요.


NM은 직업이니까요. 감정노동자이면서 육체노동자인데, 여기서는 그걸 참으면 보수가 오잖아요. 직업인으로 철학도 있겠죠. 어떤 것도 노련하게 받아주니까. 하지만 아닐 경우에는 탁 치죠.

 

작가님이 참기 힘든 별종은 어떤 사람인가요.


엄태성인 것 같아요. 상대방의 감정은 요만큼도 읽지 못하는 사람. 내 감정이 우선인 게 아니라, 그냥 자기 감정이 당연한 사람. 엄태성이 잘생겼잖아요. 잘생겨서 더 싫은 거예요. 못생겼으면 안쓰럽기라도 한데. 되게 애매한 말이긴 한데, 호감이 안 가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호감은 내 감정과 상대의 무엇이 탁 하고, 어떤 설명 없이 마주치는 거예요. 외모, 학벌, 재산 그런 게 아니고. 지하철에 탔을 때, 내가 어디에 앉을까를 생각할 때 ‘아 저 사람 옆에 앉아야지’ 생각하잖아요. 같은 옆자리라도 선택을 하게 되는데, 엄태성한테는 그런 감정이 요만큼도 없는 거예요. 싫어하는 걸 다 몰아준 것 같아요.

 

인지에게 재결합을 요청한 작곡가 남편은 10년 전, 인지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이었어요.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쩌면 이런 사람이 인지에게 딱 맞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어요. 타인에게는 냉정해 보이지만 인지가 정말 필요할 때, 적당히 도움을 주고. 거리감을 유지하고.


캐릭터라는 게, 나이와 외모, 소양 정도만 가닥을 잡고 시작하는데요. 자기 개성은 자기가 찾아가요. 이 책을 쓰면서 저도 느꼈어요. 어느 순간, 남편이 너무 멋있어진 거예요. 이렇게 깔끔한 관계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이잖아요. 인지가 “플라토닉 너나 해라”고 말했지만, 몸을 섞었다고 해서 다 사랑하는 관계는 아니거든요. 인지가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직업적 결혼생활을 했는데, 다섯 번째 남편과 만났어도 성관계에서 오는 느낌을 모르고 있거든요. 그런데 마지막 날, 둘의 무엇인가가 딱 결합하면서 이제야 몸이 딱 열리는데 헤어져야 하는 거죠.

 

얼마 전에 놀란 게 피임약 광고를 하는데 카피가 ‘스무 살의 사랑’이더라고요. 우리 딸이랑 그걸 보면서 “이거 극장에서 하는 광고 아니었어요?”라고 했어요. 어느 순간, 내가 아들을 단속하게 되는 때가 온 거예요. 그게 걔 여자친구를 지켜주는 게 돼버리니까요. 섹스가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몸과 몸이 기뻐할 때 정신적인 것도 통해야 한다는 거죠. 인지가 안타까운 게 그거에요. 헤어짐 앞에서 몸이 딱 열려버렸으니. 한 번은 우연히 다시 만날 수 있지만, 두 사람이 또 만나진 못할 것 같아요. 인지의 남편이 “다음에 또 만나면 그냥 같이 살자”고 했는데, 전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쓴 대목이에요.

 

마지막에 엄태성이 다시 나타나서 인지에게 케잌을 두고 가요. 섬뜩했어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거예요. 사실 인지가 엄태성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끝나는 버전도 썼었어요. 자판기 할머니가 인지한테 “못질 많이 하면 초상난다”고 했잖아요. 인지가 “엄마가 사람들한테 목 박는 이야기 많이 하고 다녔잖아.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못질을 너무 많이 했어”라고 쓰기도 했어요. 그런데 너무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 같아서. 그런 추측은 독자들이 하길 바랐어요. 실제 그 대목을 보여주지 않았어도 죽는 거라고 보는 사람이 있어요. 직접적으로 목숨을 위협 받는 건, 이제 인지인 거죠. 그렇게 열어놓고 소설을 딱 닫았는데, 이 결론이 훨씬 낫던 것 같아요.

 

작품에서 ‘폭력’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장 무서운 폭력은 어떤 폭력인가요.


심리적 폭력인 것 같아요. 물리적 폭력은 증거라도 제시하고 동정심이라고 받을 수 있잖아요.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볼 수 있는데, 심리적으로 끊임없이 압박하는 건 정말 더 괴로워요. 요즘은 인터넷에서 대면하지 않은 상태의 폭력들이 굉장히 난폭해요. 딱히 대처할 수 없는 폭력인 거예요. 그걸 설득하려면 되게 피곤한 자료를 만들어야 해요. 고통을 보상받으려면 정신과치료를 받았는지 증명을 해야 해요.

 

“왜 너만 유난을 떨면서 더 아파하냐”는 시선도 있어요. 그냥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면서.


모든 종류의 폭력은 나쁘다고 생각해요. 더 가슴 아픈 게, 심리적으로 안으로 표현할 수 없는 정신 상태를 말살시키는 거예요. 『우아한 거짓말』에서 요즘 친구들한테 말하고 싶었던 것도 마찬가지에요. 심리적으로 옥죄어 버리는 거. “뭐 이 정도로 그래?”라는 거, 정말 무서운 거예요. 정신을 말살시키는 폭력 앞에 놓이면 내가 미치지 않고는 벗어나지 못해요.

 

노인지라는 이름이, NO 認知(인지) 라는 뜻 맞나요? 『너를 봤어』를 썼을 때, 서영재 라는 이름을 작가님 팬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밝혔는데.


맞아요. 어떤 분이 “서영재로 소설 하나 써주면 소원이 없겠다”는 이야기를 인터넷에 쓰신 걸 보고, ‘그래? 영재 괜찮은데? 서영재 더 괜찮은데? 완전 작가 이름인데? 내가 소원 들어드립니다’하고 썼어요. (웃음) 그런데 이번 소설은 너무 아파서 아는 사람 이름을 일부러 쓰지 않았어요. 가끔 작가와의 만남 같은 행사를 할 때, 사인을 하다 보면 탐나는 이름이 되게 많아요. 그럴 때, 나중에 이 이름 써도 되냐고 여쭤봐요. 괜찮다고 하시면 메모해놓고. (웃음) 『트렁크』는 내가 너무 소설에 푹 빠지지 않고. 독자들과 같은 리듬으로 가고 싶었어요. 거리감이 너무 없을까봐,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비슷한 이름들을 다 뺐어요.

 

『우아한 거짓말』에서 천지에게 “너 되게 귀한 애야”라고 말해주셨는데, 『트렁크』의 인지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예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존재만으로도 예쁜 사람이라고. 전 인지가 예뻤어요. 내 친구였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항상 사랑은 많이 하는 쪽이 불리해요. 인지는 시정이한테 “나 뭐 먹고 싶다”고 말하는데, ‘지가 해먹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밉지 않아요. 시정이의 사랑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인지는 한 번도 자기 존재와 시정이를 떼어놓고 생각해보지 않은 친구에요. 사실 사랑과 우정이라는 게, 종이 한 장 차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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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저 | 창비
‘한국문학의 새로운 활력’, ‘비범한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김려령 작가가 흡인력 강한 소설로 다시 독자들을 찾아왔다. 신작 장편 『트렁크』에서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과 리얼리티 넘치는 명쾌한 화법으로 인간관계와 사랑의 맨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심리 전개 대신 재치 있는 대화와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이야기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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