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경리단길에서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보석길’이라는 예쁜 동네가 있다. 새로운 골목 문화를 만들어가는 그 곳에 ‘한국술집 안씨막걸리’가 있다. 갤러리인가? 카페인가? 착각하게 만드는 이 곳은 요리사 안주원 씨가 ‘주모’를 맡고 있는 곳이다. 최근 『구글보다 요리였어』를 펴내자 사람들이 그녀를 신기하게 보고 있다. 왜 신의 직장인 구글에서 나와 혹독한 주방을 선택했는지,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 않은지, 자꾸만 곁눈질을 한다.
『구글보다 요리였어』의 저자 안주원은 중학교 2학년 때 미국 유학길에 올라 10년 가까이 캘리포니아, 로드아일랜드, 뉴욕 등지를 오가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2007년 코넬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구글코리아에 입사했다가 2년 6개월 만에 사표를 썼다. 수 차례의 딴짓 끝에 요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복지 혜택이 좋기로 유명한 글로벌 IT기업 구글을 떠난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돈이 얼마나 많으면 신부수업을 받으러 외국 요리학교에 입학해?” 오랜 갈등 끝에 결정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야기는 흘려 보낼 수 있었다. 미국 존슨앤웨일즈의 조리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미슐랭 원스타 레스토랑 SPQR에서 인턴과정을 거쳤다. 물론 한국 영어카페에서 커피도 만들고 베이글도 구웠다. 서울 정식당에서 일하다 진짜 만들고 싶은 한국 음식을 소개하기 위해 8개월 전, ‘한국술집 안씨막걸리’에 주모로 취직했다.
안씨막걸리에서는 콩을 갈아 두부도 만들고, 김치도 직접 담근다. 막걸리, 계란 등 각종 식재료들은 모두 최상품으로 사용한다. 가격이 비싼 재료가 최상품이 아니다. 정직하게 키우고 자란 것이 최상품이다. 한 때는 유학생, 취업준비생, 구글러, 무급 인턴 요리사였던 안주원 씨를 한국술집 안씨막걸리에서 만났다.
신의 직장? 구글도 회사다
『구글보다 요리였어』, 제목이 독자들을 확 당깁니다. 직접 지은 제목인가요?
출판사의 의견이었어요. 구글이라는 걸,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알았는데. 그동안 구글이라는 타이틀을 벗으려고 노력했던 게 다 물거품이 되는 건가 싶더라고요. 사실 하고 싶은 제목이 딱히 없어서 힘들었어요. 만약 뭔가가 있었다면 출판사에게 딴지를 걸면서 제안했을 텐데. 이게 순수문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랑살랑한 감성 에세이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이야기니까, 그냥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현재 이태원에 있는 ‘한국술집 안씨막걸리’에서 일하고 있는데, 식당 이야기는 전혀 안 나오더라고요.
만약 안씨막걸리에서 2, 3년간 일을 하고 있었으면 자연스럽게 책에 녹아졌을 텐데 여기 온지가 이제 4달이 됐거든요. 제 이야기를 하고자 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코넬, 구글, 정식당 이야기가 들어갔지만, 사실 하고 싶은 건 그 안에 있는 내면적인 이야기였어요. 저는 20대 때 그런 불만이 되게 많았거든요. 책에도 썼지만 ‘구글러’라고 하면 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거예요. 단지 구글에 다니는 사람일 뿐인 거죠.
구글러이기 때문에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겠네요.
“쟤 구글러래”라고 이름이 붙어버리면 끝이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정말 솔직하게 다 썼어요.
무척 적나라하게 써서 놀랐어요. 구글의 현실을 볼 수 있었는데, 구글도 회사는 회사더군요.
그렇죠. 똑같은 게 많죠. 책을 쓰는데 8개월이 걸렸는데 구글 부분만 쓰는데 3개월이 걸렸어요. 너무 어려운 거예요. 제 이야기를 쓰고 싶으니까 당연히 구글 이야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조심스러웠죠. 회사에 누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요. 저라는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서 겪은 갈등을 얘기하려고 쓴 건데, 핵심이 다르게 전달될 까봐 걱정도 됐고요. 쓰기가 참 어려웠는데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구글 부분을 되게 재밌게 읽으시더라고요. 분명 구글이 다른 회사들에 비해 굉장히 장점이 많은데, 그만큼 되게 업무 성과를 빨리 빨리 내야 하는 것도 있고요. 자유로운 만큼 또 해야 할 일도 있는 거죠.
구글코리아에 입사하고 벌어진 일이나 존슨앤웨일즈에서 요리 공부를 한 에피소드는 정말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칙릿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사진도 직접 찍었던데요.
요리 부분은 워낙 강렬한 기억들이 많았고 블로그를 계속 해오면서 기록을 해왔으니까요. 제가 정말 좋아하고 중요한 일이다 보니까 기록을 남기고 싶었어요. 구글 이야기는 지메일을 다 샅샅이 찾아보면서 기억을 되살리니까 생각이 나더라고요. (웃음) 사진도 제가 한동안 카메라 덕후였는데, 그 때는 정말 사진 찍고 블로그를 하는 게 낙이었어요.
안씨막걸리에서 ‘주모’ 역할을 하신다고요. 요즘은 음식점만 차리면 모두들 자칭 타칭 ‘셰프’라고 부르는데요.
제가 셰프라는 단어에 알러지가 있어요. 너무 남용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요리사가 셰프인 거고 셰프가 요리사일 수 도 있지만, 어원을 따져보면 외국에서 온 거잖아요. 셰프라는 타이틀을 달려면 정말 조리사로서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요즘은 요리만 하면 다들 셰프라고 해요. 그래서 저는 입버릇처럼 “나는 요리사다. 주모다”라고 말하고 다녀요.
미술랭 원스타 레스토랑 SPQR에서 인턴과정을 거치고, 서울의 정식당에서도 일했는데요. ‘한국술집 안씨막걸리’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되신 건가요?
안씨막걸리는 안상현 씨가 사업자를 낸지 1년이 넘은 가게인데요. 인테리어를 끝낸 건 8개월 정도 됐어요. ‘끼니’라는 수업을 같이 듣다가 만나게 됐는데, 음식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랑 되게 비슷했어요. 마침 저도 정식당을 나왔던 때라 요리사로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아시겠지만 요리사가 박봉이잖아요. 돈도 좀 벌어야 하는데, 제 사업을 하기엔 아직 모자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때라 타이밍이 잘 맞았죠. 처음에는 저도 잘할 수 있을지 되게 걱정됐는데, 저를 무조건 믿어줬어요.
『구글보다 요리였어』덕분에 손님이 좀 늘었겠어요.
기사가 조금 나가니까 연령층이 좀 넓어졌어요. 원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손님들이 많았는데, 대학생들이나 어르신 분들도 종종 오세요. 제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 생계형 요리사이긴 한데, 돈을 벌기 위해 타협을 해서 트렌디한 음식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제 꿈은 신념을 갖고 맛있는 한국 음식을 만드는 거예요. 한국적인 멋, 한국적인 맛이 뭘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요. 트렌디하고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그런 음식이 아니라, 정말 무엇을 알리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저희 가게에서는 방짜수저도 하나에 10만 원짜리에요. 손으로 두드려 만든 거거든요. 가게에서 쓰기엔 정말 비싼 제품이지만 손님들이 또 그걸 알아보시더라고요. 이걸 모두 쓰시라는 게 아니라, 이런 것도 있다는 거예요. 약간 한가한 시간에 음식에 관심이 많은 손님이 오시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드려요.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나요?
제가 오리 육수를 내서 수제비탕을 끓여드리는데, 어떤 젊은 손님이 친구들이랑 와서 술을 먹다가 ‘엄마랑 먹고 싶은 맛’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아 내가 드디어 이걸 달성했구나’ 싶었어요. 저는 누구랑 와도 맛있는 음식을 하고 싶거든요. 그게 큰 응원이 됐고, 제 진짜 VIP 손님은 2살짜리 아기에요. 병윤이. (웃음) 가끔 오시는 구글러 부부의 아들인데, 평소에 외식을 잘 못하니까 아이가 여기에 와서 과식을 한 거예요. 제 음식을 엄청 맛있게 먹더라고요. 안씨막걸리에서는 두부랑 김치를 직접 담그는데, 원래 양념을 적게 하기도 하지만 아이가 김치를 그렇게 잘 먹더라고요. 메뉴 두 개를 시켰다가 아이가 잘 먹으니까, 부모가 하나를 더 시켰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두 팔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거예요. 애기들은 거짓말을 못하잖아요. 정말 양손으로 두부를 먹더라고요. 그때 정말 감동했어요. (웃음)
공부만 하던 고상한 누나가 얼마나 버티겠어?
요즘은 어떤 고민을 많이 하나요.
진부한 말이지만, 할머니 세대가 돌아가시면 이제 저희 세대는 회사에서 만든 장을 먹어야 되는 거잖아요. 저는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사람이 있는 음식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네 김치, 누구네 장. 이런 게 사실은 정말 훌륭한 음식 문화 아닐까 싶어요. 그래야 맛있는 패스트 푸드도 나올 수 있는 거잖아요. 요즘 한국은 뿌리는 점점 약해지고 거품은 많아져서 화려해지는 느낌만 들어요. 물론 저도 요리 공부를 할 때 그런 면이 없진 않았는데, 꼭 그래야만 요리를 오래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자꾸 화려하고 새로운 걸 찾으려고 하는데, 옛날에 계속 해오던 것에서도 답이 있다고 봐요.
한식에 대한 열망이 대단해요. 미국에서 10년 이상 살아서 더 그리웠던 걸까요.
다양한 음식을 접했지만, 할머니의 북한식 순대, 엄마의 시원한 배추김치가 전해주는 마음의 위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어요. 어렸을 때 먹고 자란 음식에 가족이라는 정서가 얽혀 있어서 그런지, 제 생각과 감성을 풀어낼 수 있는 음식은 한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리를 하면서부터는 한국 음식이 그냥 찌개에 구닥다리로 치부되는 게 너무 싫더라고요. 한국에서 한국 사람으로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음식은 결국 한국 음식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들 너무 새로운 것, 유행하는 것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볼 때는 아쉬워요. 외롭기도 하고요. 분명 저 같은 생각을 하는 요리사들도 분명 있겠죠. 책을 내고 생긴 소망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요리사들과 함께 장도 담그고 여행도 하면서 한국 전통음식을 잊지 않는 거예요. 이탈리아의 햄과 치즈가 몇 백 년 동안 맥을 이어오면서 칭송을 받는 것처럼, 우리나라 음식도 인정 받았으면 좋겠어요. 안씨막걸리에 오면서부터는 정말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나하나 펼쳐나가는 것 같아서 정말 행복하죠.
요즘 훈남 셰프가 대세잖아요. 조금 잘생기고 언론에 노출되면 금방 스타가 되는데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진짜 요리를 하는 요리사들이 오히려 빛을 못 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요리라는 게 정말 제대로 시작하면 힘들잖아요. 어땠나요?
좋아서 시작했고 구글을 관두고 요리를 택한 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지만. 힘들긴 했어요. 여전히 요리가 좋지만 그게 현실이 되고 일상이 됐을 때, 견뎌야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페이스북을 보고 있으면 제 친구들은 다 예쁜 옷 입고 결혼도 하고, 이제 좀 연차가 돼서 돈도 좀 버니까 여행도 다니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저는 추리닝 입고 출근하고 있으니까요. 대부분 요리사들이 조리대를 나와서 쭉 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늦게 시작한 타입이니까 처음에 이방인 보듯이 많이 했죠. 공부만 하던 고상한 누나가 얼마나 버티겠어? 그런 시선도 많았고요.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일할 때는 정말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월급도 박봉이니까 돈을 쓸 수도 없고. 예전에 구글에 다닐 때는 핫한 레스토랑도 가고 정식당에 손님으로도 갔는데, 요리를 하면서부터는 컵라면 먹으면서 일했으니까요. 그걸 견디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구글에서 일이 맞지 않아 갈등했을 때보다 더 힘들었나요?
그 때는 정신적인 갈등만 있었던 것 같아요. 요리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육체적으로도 힘드니까 뭔가 되게 서럽고. 후회는 안 했지만, 그동안 누렸던 걸 아직 못 버렸던 거죠. 내가 20년 동안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미국 생활을 버티고 구글에 들어갔으니까. 그렇게까지 했는데 주방에서 서러움을 겪고 있다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다 못 비워냈던 거죠. 막 행주 빨다가 너무 서러워서 울고 그랬어요.
방송계도 그렇고 외식계도 그렇고 ‘열정 페이’라고들 하잖아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박봉을 견뎌야 한다는 걸, 현실로 맞닥뜨리면 열정만으로 이겨내긴 어렵죠.
외국도 그렇거든요. 제가 처음에 요리를 한다고 하니까, 다들 호텔 식당에서 월급 500. 600만 원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되게 많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좋아하는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데요.
생각만 한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다들 처음에는 부럽다고 하세요. 어떻게 찾았냐고. 그런데 끊임 없이 자기를 관찰해야 하거든요. 막연히 책상머리에 앉아서 ‘난 이 직업이 안 맞는데, 뭐할까?’ 생각만 하다 보면 스트레스만 늘어요. 자꾸만 부딪혀 보면서 ‘아 그럼 나는 이런 게 더 잘 맞나?’ 생각하면서 자꾸 고쳐 나가야죠.
남의 시선을 생각하다 보면, 자기 판단이 어렵게 돼요.
사실 그래요. 저는 성향상 원하는 걸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제가 디자인을 못한 게, 저는 피드백이 빨리 빨리 오는 프로젝트를 해야 하거든요. 열정과 그때 그때의 집중은 굉장히 잘하는데 마라톤은 잘 못 뛰는 거죠. 그런데 디자인 프로젝트는 3,4년짜리도 있으니까 그걸 못 버틴 거예요. 저는 한 달도 힘들어요. 요리가 제게 맞는 게, 몇 분 만에 그 날 안에 나오잖아요.
고추장, 된장 같은 건 더 긴 시간이 필요한데요? (웃음)
아, 그래도 요리니까. 하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웃음) 정말 딴짓을 많이 해보고 알게 된 거에요. 복합적으로 쌓여서 요리를 선택하게 된 건데,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본인에 대해 더 많이 부딪혀 봐야 알게 돼요. 해봐야 안다고들 하잖아요.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검색만 하면서 ‘이런 직업이 맞을까?’ 생각하는 것과 현실에 나가보는 거랑은 정말 달라요. 저는 그렇다고 소위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말하는 일을 선택하는 걸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거든요. 본인이 원하는 삶을 그려봤을 때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는 거잖아요. 저도 요리하면서 포기한 거 많아요. 대신 좋아하는 일을 택했을 때의 희열을 얻은 거죠. 포기하는 것 대신 얻는 것도 있는 거고요. 자신에 대한 고찰 없이 ‘아 그냥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해. 근데 난 불행해’라고 생각하고 앉아있는 건 잘못된 거죠. 자신에게 뭐가 필요한지를 자꾸만 돌아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삶의 속도가 느려질 때, 기다려 보자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어떤 걸 가장 먼저 생각하나요?
어렸을 때는 욕심이 많아서 다 끌어안고 가다가 터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다 완벽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래 버려도 좀 괜찮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내가 집중해서 잘할 수 있는 거라면 택해요. 그게 결국 내가 관심을 가장 많이 가질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선택을 못할 것 같을 때는 그냥 기다려요. 기다리는 것도 미덕이 돼요. 그러다 보면 대부분 가닥이 잡히더라고요. 물론 아직도 잘 못하긴 해요. 책에도 썼지만, 삶의 속도가 느려질 때 그걸 잘 못 견뎠어요. 항상 뭔가 달리고 있어야 했는데. 제 멘토 중의 한 분이 “그래도 괜찮다. 진정하고 물 한 잔 마시고, 삶을 제3자로 바라봐라. 그렇게 기다리면 또 괜찮아질 거야”라고 했어요.
명문대에 나온 딸이 신의 직장을 버리고 요리사를 선택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요.
걱정을 많이 하셨겠죠. 그런데 별 말 안 하고 “그냥 해봐라”라고 말씀하신 건, 제가 처음 미국에서 10년 유학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너무 우울해 한 걸 보셨거든요. 미국에서 취업을 못하고 들어오니까 유학 갔다 와서 퇴보한 것 같고. 정말 미국에서 성공하려고 적응하려고, 미친듯이 노력했거든요. 그랬는데도 미국에서 저를 받아주질 않더라고요. 문화가 다르니까. 쟤는 쿨하지 않고 재미 없는 한국 애. 그래서 한국 음악도 안 듣고 한국적인 걸 다 버려야 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때는 다들 저를 교포라고 오해했어요. 그런 상태에서 한국에 들어왔으니까, 다시 한국에 적응하기가 너무 싫었던 거죠. 다시 되돌려 놔야 하니까. 구글에 들어간 것도 약간 도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여기에 가면 다시 미국적인 사람이 될 수 있어, 하는. (웃음) 하지만 결국 한국에서 사는 거고 한국회사였으니까요.
유학은 왜 갔나요?
어렸을 때 추첨해서 학교를 들어가서 국립초등학교를 졸업했거든요. 아무래도 시설도 좋고 행사도 많고 그랬는데, 일반 중학교에 가니까 엄청 삭막한 거예요. 진짜 모래밭 운동장에 벽돌 건물 딱 하나 있고. 점점 예체능 과목도 빠지고. 그래서 엄마가 1년만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하시고 무리해서 저를 유학을 보내셨어요. 근데 제가 좋아하니까 IMF가 터졌는데도 고생하면서 학비를 보내신 거예요. 엄마가 어릴 때 학습지 선생님이 숙제를 20장 내주고 가면, 3장 이상 못 풀게 하셨거든요. 얘가 집중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하라고 선생님이랑 막 싸웠어요. 질리게 안 해주신 거, 그 부분에 늘 감사해요. 그래서 미국에서 더 열심히 해서 효도하고 좋은 대학 가야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점수를 잘 받는다고 절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20대 초반 젊은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얼마 전에 대학생 몇 명을 만났는데, “좋아하는 게 뭐니?”라고 물었더니 아무도 대답을 못하는 거예요. 되고 싶은 걸 말하라는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게 뭔지 전혀 모르고 사니까 30,40대 때 약간 사춘기처럼 방황하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게 되게 불행한 거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 재밌는 사람들이 많아야 살기 좋은 문화가 될 것 같은데 말이에요.
학부모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저도 자식을 낳으면, ‘이 학원 보내야 하지 않나?’ 이런 고민을 하겠지만, 조금 용기를 내서 좀 재밌는 걸 시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부모님들도 많이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 ‘구글’이라는 타이틀이 없었다면 이 책이 크게 주목 받지는 못했을 텐데요.
맞아요. 구글 때문에 화제가 됐고 당연히 혜택을 보고 있긴 한데요.. 제가 구글을 ‘should’라고 표현했잖아요. 구글이 해야 할 것 같은 일을 상징한다면, 요리는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에요. 그렇게 생각하고 읽어봐 주시는 독자들이 많지만 어떤 분들은 아예 안 읽겠죠. 그냥 ‘과거 팔아서 음식 판다’고 생각하겠죠. 옛날에는 구글 나와서 요리학교 간다고 했을 때, “아 집에 돈이 많으니까 신부수업을 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웃음) 그때 ‘아 사람은 어떻게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구나’ 싶었죠.
최근에 안씨막걸리 페이스북에 들어갔는데 직원을 구하더라고요. 그런데 ‘동료를 구한다’고 표현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저희 대표가 그런 거에 굉장히 민감해요. 저도 이왕이면 좀 더 좋은 표현을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보통 주방, 홀 이렇게들 말하는데, 저희는 객장이라는 표현을 써요. 한국적인 멋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이왕이면 한국어를 많이 쓰자, 그런 자잘한 것부터 시작할 수 있잖아요.
『구글보다 요리였어』를 읽고 취업 준비생이나 대학생은 물론, 직장인, 학부모들이 읽어도 재밌겠다 싶었어요. 좋을 것 같고.
책을 읽고 꿈을 찾고 그런 것도 좋지만, 음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우리가 맨날 먹는 거잖아요. 음식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어떻게 보면 가장 큰 바람인 것 같아요.
어렵게 원하는 길을 찾게 됐지만, 30대에 꿈을 찾은 것도 정말 행운이잖아요. 지금 꾸는 꿈은 뭔가요?
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밥 해먹는 거예요. 사실 직장인이나 맞벌이 부부들이 음식을 해먹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거든요. 저도 자취를 오랫동안 해봤으니까요. 제가 외식업을 하고 있지만, 진짜 꿈은 집밥 먹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거예요. 저는 일요일 점심만큼은 엄마랑 동생이랑 꼭 집에서 밥을 먹어요. 가족들이 한 밥상에 둘러앉아서 밥을 먹는 게, 그 때는 투닥거리고 싸워도 가족끼리의 유대감을 유지시켜주는 되게 중요한 시간이거든요. 보통 딸이랑 아버지랑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고 자랐겠어요. 저희 아버지도 대화를 잘하는 분이 아니었는데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셔서 제가 요리를 하게 됐을 때, 아빠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어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힘들었지만, 아빠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드렸던 기억들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어요.
후속작은 요리책일 것 같은데요.
만약 쓰게 된다면 새로운 느낌의 한식을 소개하고 싶어요. 저희 가게에서는 마늘을 일주일에 한 열 개 정도만 쓰나? 갖은 양념을 안 써요. 식초도 조금, 참기름도 거의 안 쓰고. 맛간장 같은 걸 다양하게 내서 장아찌를 담그는 식이에요. 보통 한국 음식이 양념이 많아야 맛있다는 생각 때문에 어려워하잖아요. 나물 하나를 무쳐도 간장, 설탕, 파, 마늘, 고추, 이런 게 다 들어가야 하니까요. 양념이 없어도 맛있는 한식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도 재밌지 않을까 싶어요.
구글보다 요리였어안주원 저 | 브레인스토어(BRAINstore)
우리는 흔히 성공의 척도를 돈과 명예에 두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평범한 직장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은 누구나 알 만한 명문대를 나와 좋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 이 책의 저자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의 명문대를 졸업했고,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구글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모두가 말하는 ‘성공적인 삶’을 뒤로하고 어느 날 갑자기 혹독한 주방에서의 삶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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