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커피로 완벽해지는 순간이 있다. 한 잔의 커피로 엉망이 되는 하루도 있다. 『커피 한잔 할까요?』는 그 모든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2대커피’를 운영하는 바리스타 박석은 손님들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다. 무명의 만화가에게 건네는 과테말라 안티구아에는 위로가 녹아있다. “한 잔 커피에 담긴 위로의 양은 평등하지만 그걸 마시는 사람들의 상처는 결코 똑같지 않지”라는 말로 창작의 외로움을 다독인다. 긴 겨울을 지나 봄날을 맞이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커피는 ‘케나AA’. 그는 정성으로 로스팅한 원두 속에 “버텨줘서 참으로 고맙다”는 마음을 감춰두었다.
그러나 박석이 제자로 맞아들인 청년 강고비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 한 잔 내리지 못하고 밤새 고전하는 그는, 단골손님으로부터 “자기 때문에 내 하루의 행복이 엉망이 됐어요!” “자기가 뭔데 내 행복을 뺏어가는 거야?”라는 원망 아닌 원망을 듣는 처지다. 이제 막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박석의 곁에서 “에스프레소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아가고, 한 잔의 커피에 담긴 바리스타의 ‘정성과 살핌의 시간’을 배워가는 중이다.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는 『커피 한잔 할까요?』는 익숙한 듯 낯선 질문을 품게 한다. ‘커피가 뭐라고, 그 한 잔에서 찰나의 행복과 스치는 우울을 경험하는 걸까’하고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도통 커피의 매력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나 들을 법한 질문 같지만, 이미 커피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커피 한 잔 여유롭게 마실 시간도 없이 쫓기듯 하루를 보내다 맛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이유를, 원두를 삶아낸 물처럼 싱거운 커피를 마주했을 때 시무룩해져버리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한 가지. “악마같이 검지만 천사같이 순수하고 지옥같이 뜨겁고 키스처럼 달콤”한 이 음식에는 분명 마력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허영만 작가와 “커피 한잔 할까요?”
허영만 만화가와 만난 순간에도 우리 사이에는 커피가 있었다. 많은 순간 그것은 이야기의 주제가 되었고, 때때로 다른 이야기로 건너가는 소재가 되었다. 커피를 매개로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 커피 잔 너머에 늘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커피에 매료되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커피 한잔 할까요?』에서 작가가 커피의 이야기만큼이나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을 들인 이유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날 모인 사람들 중 커피를 마음껏 즐길 수 없는 이는 허영만 작가뿐이었다는 것이다. 『커피 한잔 할까요?』의 연재를 시작하며 밝혔듯, 작가는 카페인에 민감해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자지 못해서, 오전에만 조금 마셔요. 하루는 커피나 녹차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잠이 안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날 족발을 먹었더라고. 족발을 삶을 때 냄새를 없애고 색을 내기 위해서 커피를 넣는 집도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잠이 안 왔던 모양이에요. 나한테 커피는 ‘사랑할 수 없는 여인’인 거지(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카페를 찾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또 다른 허형만(허영만 작가의 본명은 허형만이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바리스타인 그와의 만남은 『커피 한잔 할까요?』를 위한 취재의 연장선으로 봐도 무방했다.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빈틈없는 취재로 유명한 만큼, 작가는 허형만 바리스타의 한 마디 말도 놓치지 않았다.
“허형만 바리스타와는 전시회(허영만 전-창작의 비밀)에서 처음 만났는데, 카페 ‘허형만 커피’는 그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나하고 이름이 같다 보니까, 주변 사람들이 카페도 차렸냐고 물어보더라고(웃음).”
작가는 허형만 바리스타의 조언에 따라 직접 핸드드립을 하고, 커피에 대한 그의 철학에 귀 기울였다. “마시고 났을 때 한 잔 더 먹고 싶은 커피가 맛있는 커피”라는 허형만 씨의 말에 “2편이 기다려지는 만화가 좋은 만화”라고 응수하며 미소 짓다가도 진지한 표정으로 메모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맛있는 커피는 마시고 났을 때 개운하고, 목 넘김이 편하고, 식었을 때도 맛있다” “좋은 술과 좋은 사람과 좋은 커피의 공통점은 부드럽고, 뒤끝이 개운하고, 향기가 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작가의 손을 바삐 움직이게 했다.
“지금은 커피에 재미를 붙여가는 중이죠. 그리는 사람이 재미있어야 독자가 재미있어요. ‘오늘은 재미없게 그렸다’ 싶으면 독자들이 즉각 반응한다고.『커피 한잔 할까요?』를 그리면서도 전문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면 내가 재미가 없어요. 이 만화는 커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거예요. 다만 주제가 커피일 뿐이지. 지문도 너무 많으면 재미가 없어요.『식객』 때도 지문이 많았는데, 그에 비하면 『커피 한잔 할까요?』는 굉장히 적은 거지. 그림체가 단순해졌다는 이야기도 듣는데, 나이 들어서 복잡해지면 안돼요(웃음).”
“슈퍼맨 이야기는 감동적이지 않으니까”
『커피 한잔 할까요?』의 연재를 시작한 올 해, 허영만 만화가는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특별한 순간을 기념하는 작품인 만큼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작가는 손을 내저었다. “하다보면 40년 되고 50년 되는 거지” 별다를 게 있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계절 식재료에 대한 만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아들한테 이야기 했더니 커피를 소재로 그리시는 게 어떠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죠. 요즘에는 커피가 트렌드이기도 하니까. 한편으로는 『식객』의 이야기를 그냥 커피로 바꾼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것 때문에 고민이에요. 주인공과 배경만 다른 게 아닌가 싶은 건데, 사실 그렇게 따지면 다 똑같겠지. 심야식당도 똑같고(웃음).”
‘나는 아직도 진화하고 있다’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는 작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 속에 갇힐까 염려하며, 냉철할 만큼 객관적인 시선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기 복제에 대한 고민 끝에서 찾은 해답은 무엇일까.
“이럴 때는 주인공을 죽여야 되는데(웃음). 그렇게는 안 되니까, 지금 있는 상황에서 최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죠. 감동이라는 건 형식을 달리 한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에 있는 거니까.”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감동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순간에서 길어 올리는 그 감동은 격정적이기보다는 잔잔하고,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위안과 위로를 얻는다. 희망을 발견한다. 작가 역시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만화는 슈퍼맨이 없습니다. 항상 주위에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 주인공이죠”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때로는 초인적인 인물에 기대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지 않을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작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슈퍼맨이 나오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항상 더 센 놈을 만들어야 되는 거죠. 그게 머리 아프잖아요(웃음). 슈퍼맨 같은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가 더 재미있어요. 액션이 들어가야 되는데, 만화로 열심히 그려도 그만큼의 효과를 얻기 힘들거든요. 그리고 슈퍼맨 이야기 같은 건 감동적이지 않아요. 우디 앨런의 영화가 훨씬 더 감동적이지. 나한테 ‘슈퍼맨 같은 만화를 그릴래, 우디 앨런 영화 같은 만화를 그릴래’하고 물어보면 난 우디 앨런 쪽이에요. 그리는 내가 재미있어야지, 처음부터 인상 빡빡 쓰면서 긴장감 있게 가는 건 내가 못해. 중간에 막 장난치고 싶어(웃음).”
어머니 같은 만화를 그리고 싶다
데뷔 40주년 작품으로 『커피 한잔 할까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작가로부터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 돌아오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한 바였다. 그에게 있어 40년이라는 ‘지나간’ 시간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막을 내린 ‘허영만 전-창작의 비밀’에서도 그 사실은 어김없이 드러났다. 전시회를 준비하며 작가가 큐레이터에게 건넨 첫 마디는 “회고전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정형탁 큐레이터는 “허영만 만화가는 과거에 만족하고 정리하는 느낌의 전시회는 싫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그 결과 이번 전시회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세계를 그대로 옮기는데 집중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화가 허영만에게는 자신이 고군분투하며 쌓아올린 작품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허영만 전-창작의 비밀’이 우리 만화계화 후배들에게 미칠 영향이었다. 그는 “내 전시가 성공해야 다른 만화가 후배들도 계속 이곳에서 전시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전시회를 준비하며 큰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번 전시회는 예술의전당에서 처음으로 한국 만화를 초대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예술의전당은 ‘지브리 원화 전’ ‘픽사 20주년 전’ 등 해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주인공으로 전시회를 기획한 적은 있었지만, 국내 만화가를 위해 자리를 마련한 바는 없었다.
“이번 전시회는 사건이었죠. 예전에도 소소하게 전시회가 있었지만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적은 없었잖아요. 예술의전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만화를 인정했다는 얘긴데, 의미가 있었죠. 내가 예술의전당 사장님한테 만화를 선택한 이유를 물어본 적도 있어요.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취임한 후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예술의전당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나라 전시회를 몇 번이나 했나’ 싶더래요. 그때 마침 만화 전시회 이야기를 듣고 결정해줬다는 거예요. 만화에 관심 있는 시민들이 전시회를 많이 찾아와 주면 만화를 예술로써 인정해준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번 성공을 계기로 제2 제3의 만화 전시회가 열릴 수도 있는 거니까, 많은 기대를 했죠. 그런대 메르스 여파가 있어서 단체 관람이 취소되는 일도 있었고… 아쉬움이 남아요.”
‘허영만 전-창작의 비밀’은 작가의 작품 속에 녹아든 모든 순간들을 조명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낳기까지 치밀하게 조사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혼을 담아 획 하나하나를 그려나갔던 순간들이 응집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작가가 일상의 순간들을 기록해온 ‘만화 일기’ 역시 전시회를 통해 공개됐다. 전시회가 끝난 지금 어디에서도 구해볼 수 없는 ‘만화 일기’의 단행본을 그는 취재진 앞에 펼쳐보였다.
“예전에 고은 선생의 『바람의 사상』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누구를 만나서 술을 마시고, 누구를 면회 가고, 그런 이야기들인데. 그때가 유신 때니까 상황을 짐작하면서 읽었죠. 고은 선생은 글을 잘 쓰시니까 일기를 쓰신 건데, 그러면 나는 만화로 일기를 쓰면 되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게 지금 23권 째 쓰고 있어요. 일기장에 바로 그리니까 그림이 좀 부실해서, 메모해 뒀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일기장에 옮겨 그려요.”
일기 속에는『커피 한잔 할까요?』가 남긴 흔적도 있었다. 작품을 위해 (좀처럼 친해질 수 없는) 커피를 향해 한 발작 떼었던 순간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24일부터 커피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오전에만. 괜찮다. 정신이 맑아지고 약간 긴장한다” 또 다른 날의 기억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다.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던 어머니”가 그리웠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작가는 고백하듯 읊조렸다. 그런 어머니와 같은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은 사람, 말없이 응원을 보내주고 가만히 등을 토닥여줄 것 같은 사람, 허영만 만화가의 작품은 이미 대중에게 그런 존재일 지도 모른다. 『각시탈』『오! 한강』 『미스터 손』 『아스팔트 사나이』 『비트』 『타짜』『식객』『꼴』『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그 어떤 작품으로든 만화가 허영만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다. 늘 독자들의 곁에서 함께 성장해 온 그이기에 『커피 한잔 할까요?』로 기록될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커피 한잔 할까요? 1 허영만 글,그림/이호준 글 | 예담
서울의 어느 작은 골목, 커피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2대커피〉의 주인장 박석은 언제나 한결같은 커피 맛으로 많은 단골손님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의 커피 철학을 배우기 위해 매일 카페 문밖으로 출근하는 강고비는 우연한 기회에 〈2대커피〉 박석의 수제자로 입성하게 된다. 《커피 한잔 할까요?》 1권에는 수제자가 된 강고비가 커피를 배워나가며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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