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나 잘난 것 없는 시장 떡집 아들 안석뽕(안석진)이 어느 날, 전교회장 선거에 출마한다. 본인의 뜻은 아니었으나 순댓국집 손자 조조(조지호)와 건어물집 아들 기무라(김을하), 단 두 명의 친구의 부추김에 의해 덜컥 마음을 먹는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석뽕이는 선거운동을 하는 내내 스스로가 정말 회장을 하고 싶은지, 마음을 살핀다. 당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얼떨결에 선거 유세를 시작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 돈 없는 집 아이들을 대변하기에 이른다. 석뽕이가 아이들에게 내건 공약은 단 세 가지. 수학 시간을 줄이자, 수학여행은 싼 데로 가자, 1학년 엄마들한테 급식 도우미 좀 시키지 말자. 회장에 당선되면 햄버거를 쏘겠다는 유력후보 기호1번 고경태, 엄마가 회장선거에 나가면 게임기를 사준다는 약속 때문에 선거에 나온 기호2번 방민규. 그리고 반장 한 번 못해본 처지의 기호3번 안석뽕. 과연 아이들을 누구를 회장으로 뽑을까? 기상천외한 선거운동을 펼치는 석뽕이에게 표를 던지는 친구는 있을까?
제목만 읽어도 코믹성이 엿보인다. ‘기호3번’이라는 타이틀에 붙어있는 이름은 ‘안석뽕’. 서예가 한석봉의 후예인가? 라는 오해를 할 찰나, 석뽕이네 집이 시장에서 떡집을 한다는 힌트가 보인다. 초등학생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동화를 어른이 읽어본 소감은? “자녀가 있다면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주고 싶네.” 왜냐, 첫째로 재미있고 둘째로 생각할 거리를 주기 때문. 그렇다면 뻔한 교훈적인 이야기냐고? 오해 마시라. 세상의 어른들이 주는 케케묵은 조언 따위, 애당초 작가에게 없었다. 첫 데뷔작 『기호3번 안석뽕』으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고학년 부문 대상을 수상한 진형민 작가는 책 표지에 상세한 프로필을 적지 않았다. 무슨 대학 무슨 과, 이런 작가 소개가 실리면 어린이 독자가 ‘아, 이런 과를 나와야 작가가 되는구나’하고 선입견을 갖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게 협조를 구해 작가 사진도 실지 않았다. 중성적인 이름 탓에 ‘남성 작가’로 착각하고 인터뷰 장소에 나온 필자에게 “그걸 노렸어요”라며 뿌듯해하는 진형민 작가. <채널예스> 덕분에(?) 성별이 밝혀지게 됐지만 이왕 공개된 것, 한껏 웃으며 사진 촬영에 응했다. 진형민 작가는 1년 동안 세 딸들과 함께한 아시아 여행기를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연재하기도 한, 평범하지만은 않은 엄마다. 적어도 세상이 보는 시각에서 평범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특이한 엄마’. 동화를 쓰게 된 계기를 묻자, 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기준, 관념이 맞는 거야? 이런 의심을 가져보라고 아이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보고 싶었어요.” 무색무취 평범한 모범생으로 자녀를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라면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궁금해하는 자녀의 성장기를 보고 싶다면 『기호3번 안석뽕』을 펼쳐도 좋겠다.
학교가 정한 틀 안에서 평범해진 아이들
소재가 재밌으면서도 현실적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전교회장 선거, 그리고 재래시장 앞에 들어선 대형마트 이야기 등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현재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 특별한 이유가 있나?
평범하지만 은근히 속 깊은 주인공 안석뽕(안석진)부터 석뽕이를 회장 선거에 내세우는 친구 조조(조지호)와 기무라(김을하), 슈퍼집 딸 백발마녀(백보리), 부잣집 아들 반장 고경태 등 캐릭터들이 모두 애정이 간다. 사고뭉치지만 하나하나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어떻게 구상했나?
처음부터 뚜렷하게 캐릭터를 만든 건 아니었다. 쓰고 또 쓰면서 ‘이 아이는 이런 녀석일 거 같네’라는 예측으로 살을 입혔다. 대안학교에서 5년 동안 교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초등학교 아이들이랑 생활했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책을 쓰면서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진 않았고 늘 봐 왔던 아이들의 여러 캐릭터를 결합했다. 누가 하나 예쁘지 않은 캐릭터가 없다. 내가 딸이 세 명인데, 첫째 딸은 이래서 예쁘고 둘째, 셋째 딸은 또 다른 면 때문에 예쁘다. 토탈해서 점수를 낼 수 없다. 『기호3번 안석뽕』이 일인칭 화자로 서술되기 때문에 각 인물들이 이름으로 불러지느냐, 별명으로 불러지느냐에 따라 거리의 차이는 있겠다. 동화 속 석뽕이가 느끼기에는 거리감이 있는 저만치의 아이들이라고 해도, 독자들 각자는 그렇게 읽히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현실에서는 안석뽕 같이 평범한 아이가 전교회장 선거에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모범생도 아니고 부모의 지원도 없다. 하지만 동화 속 독백을 보면, 사뭇 진지하고 또 속도 깊다. 이렇게 평범한 캐릭터를 주인공을 삼은 데는 작가의 뜻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평범하다는 평가는 학교라는 체제 안에 들어갔을 때 평범해지는 게 아닐까. 학교에서 인정하는 영역, 즉 공부나 예체능에 뚜렷한 실력이 없으니까 평범하게 묻혀버리는 거다. 학교라는 공간은 어떤 다른 걸 가지고 있어도 평범하게 묻혀지는 곳이기도 하다. 평범한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평범한 건데 말이다. 학교에서 판단하는 잣대로 아이들이 계속해서 평가 받는다면, ‘난 평범해’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안석뽕을 떡집 아들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종종 그런 질문을 받곤 하는데,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출발한 건 아니다. 동네 재래시장에서 떡도 먹고 순대국도 먹고 시장을 왔다갔다하면서, 여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어느 가게 아이들로 할까’ 훑어 보면서, 이야깃거리가 따끈따끈하게 나올 공간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 중에서 선별된 가게들이 책 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가게다. 실제로는 책에서만큼 시장에 아이들이 많이 없다. 동네 떡집에서 종종 떡을 해먹는데,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이 아이들이 떡집에 들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님 직업란에도 ‘떡집’이라고 잘 쓰지 않는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부모가 일하는 공간, 시장에 있지는 않지만 주위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글을 썼다. 아무래도 떡집 아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떡집에 자주 가서 가래떡, 시루떡 만드는 걸 곰곰이 살펴보기도 했다. 이 책을 쓰면서 떡을 하도 많이 사오니까 아이들이 ‘엄마 또 떡 사왔어?’라고 말하더라(웃음).
위트가 남다르다. 어른들도 킥킥대면서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이 무척 많다. 파출소에 잠깐 다녀온 친구한테 두부 대신 ‘두유’를 선물하는 장면이라든가, 떡집 아들이기 때문에 가래떡으로 춤을 추면서 선거운동을 한다는 설정도 매우 입체적으로 표현됐다.
내 유머코드가 대중적일까? 나 혼자만 재미있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웃음). 겉으로 보기에는 재밌어 보이진 않는 캐릭터인데 숨겨진 본능이 있는 거 같다. 평소에 ‘어떻게 웃길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재밌는 글에 대한 욕구가 늘 컸다. 대학 때 연극 동아리에 올인 한 적이 있었다. 저학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연기도 하고 고학년이 돼서는 연출을 했다. 사실 학업보다 연극 활동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대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연극을 한 일이다.
결말이 현실적이면서도 또 비현실적이다. 어린이 독자들을 위해 좀 더 해피엔딩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아이들이 읽는 책이니까 긍정적이고 판타지적으로 마무리를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기운차게 끝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은 늘 있는 것 같다. 어두침침하게 끝나거나 너무 열려져 있는 절망을 건네기는 마음이 아프니까. 하지만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거나 기운을 줄 때는 그 밑에 정확한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로만 건네는 위로는 더 서먹할 수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기운찬 결말이지 않았나, 싶다(웃음).
대안학교에 대한 선입견, 버렸으면 좋겠다
『기호3번 안석뽕』이 첫 소설인데 큰 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방송국, 책방, 학교, 출판사를 오가며 일을 해왔지만 소설을 쓴 적은 없다고 했다. 어린이 장편동화를 쓰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나?
작년 1월부터 6개월동안 한겨레 아동문화작가학교에서 동화를 공부했다. 그동안 글 작업을 꾸준히 하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형태로 어린이책과 가까이 지내긴 했다. 대안학교에서 일하기 전에 잠깐 어린이서점에서도 일을 했었다. 일산에 ‘동화나라’라는 어린이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동화를 한참 읽을 나이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책을 접했다. 그리고 나서 대안학교에 가서 전 학년 국어과 수업을 맡게 됐는데, 교과목은 ‘우리말과 글’이었지만 대안학교의 특성상 교사들의 자율성에 따라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한 학기에는 오로지 시만 공부한 적도 있고, 신화를 가지고 그림자극, 인형극 등을 하면서 발표회를 진행한 적도 있다. 아이들과 책에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겁내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대안학교 교사의 경험이 어린이 동화를 쓰는데 도움이 되었나? 자녀들도 모두 대안학교에서 공부했는지 궁금하다.
대안학교나 대안교육의 현장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안교육이 공교육을 배척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답답한 건 교육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다. 공교육만이 정답이 아닌데, 다른 형태의 교육을 배척하는 현실이 문제다. 홈스쿨링이나 작은 공동체에서의 다양한 실험적인 교육 형태가 공존할 수 있다면, 서로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청소년기에 있는 세 아이가 있는데, 모두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지만 공교육을 받고 싶다고 해서 다시 돌아간 아이도 있다. 대안학교가 가지는 장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의 고유함도 있고 여러 가지 변수들도 있기 때문에 ‘대안학교 아이들은 이렇다’하는 정의를 내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보면서 대안학교로부터 받은 수혜가 있다면, 여전히 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뭔가 하고 싶은 의지가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부모로서 아이들을 양육할 때, 특별한 문화체험을 공유한 경험이 있나.
아이들의 학교를 휴학하고 1년 동안 아시아 9개국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여행기 ‘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을 연재하기도 했다. 여섯 나라는 좀 길게 살아봤고 세 나라는 배낭여행 하듯이 거쳐 갔다. 아이들이 길 위에서 성장했을까, 키가 한 뼘씩 자란 것 말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교육의 기치를 가지고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대신 같이 걸었던 길목들과 우리 집 삼았던 숙소들과 새 친구들을 만났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가르침을 주기보다 ‘너도 한번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봐’ 이런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기호3번 안석뽕』이 매우 재밌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처럼.
부모나 교사에게는 수행해야 할 만한 역할이 분명히 있다. 부모 같은 경우에는 그 사회가 가진 도덕, 관습을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한다. 각자의 방식이 있겠지만 아이들이 부모의 방식대로 한가지 흐름을 가지고 쭉 성장하는 것보다 주변에서 누군가 아이들을 흔들 수 있는 여지도 남겨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책이 될 수도 어른이 될 수도 있다. 다사다난한 세상 속에서 ‘너를 보호해줄게’가 아니라, 방황하고 고민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 부모의 삶이 아니니 부모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일 아닌가.
학습서를 주로 사주는 부모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누구나 책 속에서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건 아이가 게을러서도 부모가 열의가 없어서도 아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너무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원하든 원치 않든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쉽지 않게 된 거 같다. 책뿐만이 아니라 여타의 학습과 무관하다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되는 걸 볼 때 안타깝다. 그렇다고 부모들을 비난할 수도 없고 아이들에게 열심을 강요하면서 책을 읽으라고 말할 수도 없다. 더 본질적인 것, 심심함 속에서 책을 찾고 그러면서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사실 심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펼쳐진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아이들을 심심하게 만드는 정책과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심심함을 굳이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 활동, 놀이들을 통해서 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른들의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합의하고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 기호 3번 안석뽕진형민 글/한지선 그림 | 창비
유치원 영어반에서 ‘제임스’로 불리던 주인공 안석진은 아버지가 퇴직하고 시장에서 떡집을 시작하자 ‘떡집 안석뽕’으로 불리면서 하루아침에 인생이 급커브를 그리게 된다. 같은 시장 순댓국집 손자 조조, 건어물집 아들 기무라와 어울려 다니면서 여자애들에게 교실 구석에 세워 둔 대걸레 같은 취급을 받으며 반장 한 번 못 해 본 처지인 안석뽕. 기무라의 ‘배 째라’ 정신에 휘말려 얼떨결에 전교 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빠른 속도와 경쾌한 분위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사건이 전개되는 내내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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