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딛고 선 땅이 답답하고 지칠 때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잠시 ‘영혼에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다. 상상만으로 그러한데 두 발 열심히 굴려 진짜 다른 세상에 발 딛고 서면 어떨지. 시들었던 영혼은 방금 씻은 아이 얼굴처럼 말갛게 피어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행을 꿈꾼다. 여행을 떠난다. 길 위에서, 끊임없이 길 위에서 다른 나를 경험한다.
이제는 ‘여행 작가’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손미나. 이번에는 페루였다. 그의 페루는 ‘치유’의 장소, “세계의 배꼽”, 깨달음을 준 곳, 그 모든 것이었다. 아프고, 바빴던 시간에 페루가 떠오른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만큼 간절한 일이었다. 페루에서의 한 달, 페루를 알게 된 손미나와 그렇지 않았던 손미나는 전혀 달랐다. 이제 그는 “마치 월급에서 저축할 돈을 떼놓고 사용하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휴식하는 시간을 만든다. “내 삶 전체에 대한 그림을 생각할 여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가는 주사”를 페루에서 맞고 왔다며 그는 맑게 웃었다.
이야기 나눌 의무
책을 내면 종종 “이거 정말 사실이야? 지어낸 얘기 아니야?”라는 말을 듣는다고요. 그럴 만한 이야기들이에요. 아무리 여행지라도 특별한 일이 매번 일어나진 않잖아요.
네, 맞아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질까 생각할 때도 있어요. 처음 책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이런 행운을 나 혼자 겪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 의무를 운명으로 갖고 태어난 걸까, 생각했었어요. 내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쓸 때 많았거든요. 그래서 대학 시절 이야기를 꼭 포함시키고 싶었고, 책이 그렇게 된 건데요. 그 운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행할 때마다 항상 그런 좋은 분들을 만난 거예요. 가끔은 신기할 정도로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가오고요. 굳이 조르거나 애원하지 않아도 자기 인생 얘기를 털어놓으니까 정말 신기해요. 그런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페루에서도 역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런 것들에 정말 감사해요. 하여튼 뭔가 제가 이 삶에서 행해야 하는 임무 중 하나 같아요.(웃음)
특별한 사건들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는 것이 참 운명적으로 느껴지네요.
또 그런 것들이 쌓여서 저라는 사람을 또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거겠죠? 소명이라고까지 한다면 거창하지만 어쨌든 그런 운이 따르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걸 혼자 독식하기는 싫고요. 사람들에게 세상에 이렇게 생각보다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것도 얻을 수 있다, 내 삶의 양식으로 삼고 성장할 수 있다, 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책을 쓰면서 인생이란 이렇고, 이래야 한다는 그 틀을 깨고 싶었어요. ‘인생학교’ 프로젝트도 마찬가진데요. 이렇게 사는 게 인생의 전부 같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안데스에 이런 사람들도 있고,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싶어요. 마음이 열리고, 사고가 열리고, 영혼이 열리는 경험을 나누고 싶은 거죠. 그런 일을 하라고 자꾸 그런 행운이 따르는 것 같아요.
생각만으로 사고가 열리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죠. 다른 삶에 대해 구체적인 모습으로 알게 된다면 훨씬 다른 삶을 상상하기는 쉬워지겠고요.
맞아요. 심지어 몇 백 년 전에 있던 유명한 철학자의 말도 지금 우리 현실과 맞추기는 어려워요. 현재 실제로 살고 있는 나와 다른, 그러나 나와 또 같은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만큼 설득력 있고 호소력 있는 게 없거든요. 내 환경이나 배경, 높낮이를 다 떠나 완전히 내려놓고, 마주하고,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는 건 여행자 신분으로 떠나는 일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압권은 그레고리와의 인연이거든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인연이었는데 다시 만나기 위해 애를 써요. 저자에게는 특별한 사건을 만드는 능력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좀 적극적인 면이 있죠. 맞아요, 그것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제가 그냥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건 아니고요. 저도 보고 어떤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다가가죠. 사실 쿠스코를 다시 가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다시 가도 굳이 그 여행사에 가서 그레고리를 다시 만나겠다고 안 했을 수도 있고, 전화 기다리고 이런 것을 안 했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아니까 그도 움직였을 테죠. 상호작용이 있어야 해요.
그레고리를 다시 만난 것도 굳이 설명을 하자면 어느 동네에 묵고 있다는 정도는 말을 했지만 그 시간에 교회에 있을 거라고는 말한 적이 없고, 다른 데 가려다 숨이 차서 그곳에 있던 것이고, 소나기가 내릴 것 같아 어정쩡하게 서 있던 건데 거기서 마주쳤어요. 정말 신기하죠.
『스페인 너는 자유다』,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등 다른 여행기에서도 특별한 만남은 계속 있었잖아요. 책에 담지 못한 추억이 있다면 하나만 들려주세요.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에는 쓰지 않았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만남들이 많았어요. 에피소드로 책에 담기에는 다른 스토리가 없어서 담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아르헨티나에서 큰 길에 서 있는데요. 제 앞에 택시가 멈췄는데 그 안에서 아는 사람이 내린 거예요. 그것도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요. 너무 놀랐어요. 알고 보니 그녀도 갑자기 티켓 프로모션이 있어서 계획하지 않고 그냥 비행기 표를 샀고,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님 마음대로 내려주세요, 했는데 제 앞에 내려줬다는 거예요. 진짜 그런 식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다 만나는 것 같아요.
페루도 마찬가지였죠. 친구 이야도 그곳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과테말라에서 시간 많이 보내는 애고, 자기 인생 흐름에 따라 프랑스에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 시기에 그곳에서 만난 거죠. 그랬기 때문에 친구의 할머니나 가족에게서 좋은 얘기도 들을 수 있었고, 정말 특별한 마추픽추 여행을 할 수도 있었어요. 가이드나 길에서 만난 상인들조차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 번 씩 각자의 삶에서 교차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 걸 놓치지 않고 눈 여겨 보려고 하는 편이죠.
세린디피티(serendipity)라고, 여행에서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행운 같은 것들을 믿게 되는 것 같아요.
네, 맞아요.
그리움을 안고 떠난 페루
콘도르 장면은 정말 경이로운 순간이었어요. 자연마저도 특별한 행운을 안겨 주던 걸요.
정말 놀라웠어요. 우주 비행체처럼 유영하잖아요. 날갯짓을 하지 않고 날아요. 연처럼 나는 모습이 정말 신기해요.
책 제목을 수식하는 ‘그리움을 안고 떠난’은 콘도르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 그 그리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롤로그에 적은 것처럼 아버지는 페루 여행의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됐어요. 짐을 꾸리기까지, 너무 바쁘고 사실 쉽게 움직일 수 없었던 여행길인데 그걸 가능하게 한 거죠. 콜카캐니언에서 콘도르 보고, 하는 여행은 흥미진진하다기보다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고, 운이 따라줘야 하죠. 찰나의 순간이 몇 달, 며칠의 기다림을 지배하고 보상하는 순간인 거잖아요. 인내심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제가 말한 ‘그리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죠. 간절함이 없으면 갈 수 없는 장소들인 거예요. 결국 여행의 확실한 동기도 됐고, 여행의 재료도 됐고, 에너지였고, 여행의 이유와 목적이기도 했어요. 결국은 그 전부 다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그리움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안정된 빛깔이 되어서 제 마음에 담겨 돌아온 거죠.
좀 더 평화로운 상태의 그리움인 거네요.
어차피 성인들은 모든 걸 다 떨쳐내고 아기가 태어났을 때처럼 해맑은 얼굴로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 없어요. 자기가 겪는 여러 경험들 중 괴로운 것, 고민하는 것, 슬픈 것, 좋은 것,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잘 품고 에너지 삼아 살아가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어떤 사람은 그걸 잘 살아나갈 수 있는 밑거름으로 승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걸로 인해 파괴되고 좌절해서 어긋나는 경우도 있죠. 그런 걸 다스리기 위해 가끔은 한 템포 쉬어주고, 여행지에서 마음을 정화하는 게 중요해요. 페루 여행이 좋은 게 그렇게 멈출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주거든요. 콘도를 보기 위해 숨죽이고 있던 며칠, 몇 시간, 그런 것들이 진짜 사람을 깨끗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진짜 영혼에 바람을 불어넣는 느낌이 들었어요.
왜 페루였는지 질문하며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저자가 나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해 사색하는 부분이 눈에 띄더라고요. 다른 여행지와 페루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다양성이죠. 페루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있잖아요. 한 가지 색을 보고 가기에는 일단 지역적으로도 다른 곳과는 다르죠. 광활해요. 생각보다 굉장히 넓은 땅이거든요. 사람은 또 적고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정말 많은 것을 초월한 것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집합체 같은 그런 나라예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볼 수 있는 장소죠. 고산지대, 아마존, 사막지대처럼요. 그렇지만 고생스럽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려움을 이겨낼 때 한 번 쯤 밟아야 하는 과정인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극한의 슬픔이나 괴로움,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체력적인 한계를 뛰어넘거나 음악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해요. 페루는 다만 육체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 아마존에 있는 나보다 더 큰 나뭇잎을 보면서 존재의 한계를 알게 되잖아요. 나무가 웬만하면 몇 천 년이 됐대요.(웃음) 그런 것들 앞에서 나를 겸손하게 하죠.
페루의 독특하고 유서 깊은 문화도 크게 한 몫 하는 것 같아요.
그곳은 음악, 악기, 춤, 문화 이런 것들이 공기 중에 녹아있어요. 짧은 역사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인데요. 진짜 음악을 매개로 신과 소통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에요. 자연과 문화, 이 두 가지가 치유의 힘을 발휘하는 나라 같아요. 아르헨티나만 해도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기 때문에 같은 남미라 해도 조금 역사가 달라요. 페루와 대적할 곳은 멕시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외의 다른 곳과는 깊이가 조금 다르죠. 세계의 배꼽이라는 표현을 했잖아요? 딱 중심 같은 느낌이에요. 지금 세계의 수도는 파리다, 뉴욕이다 하지만 사실 인류 역사를 모두 놓고 봤을 때 중심, 배꼽의 역할을 한 건 페루였던 것 같아요. 인류 역사의 보물 상자 같은 곳이라 한 번 다녀오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자궁 안처럼 평화로웠다
페루에서의 감정에 대해 종종 ‘완벽에 가까운 평화로운 행복’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게 과연 어떤 걸까 궁금하면서 직접 들어보고 싶었어요.
엄청난 규모 앞에서 특히 그랬어요. 돌 하나가 몇 백 톤이고(웃음),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광활함에, 도인에 가까운 사람들의 말까지 그랬죠. 하늘도 다르고요. 쿠스코가 하늘과 굉장히 가까운 느낌의 도시예요. 광활함과 푸르름의 깊이가 말로 표현이 안 돼요. 그런 것들에서 마치 엄마의 자궁 안에 다시 들어간 것처럼 평화로웠어요. 걸어가고 있지만 잡음, 잡생각 없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자궁 안에 유유히 떠 있는 듯, 그런 편안함이 있었어요. 뭔가가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느낌이요. 인류 역사의 고향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편안함이 있었어요. 다 괜찮다고 위로하는, 그런 치유의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것들이 그랬어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아주머니, 행복하세요?”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내 손을 꼭 쥔 채로 이렇게 말했다.
“젊은 아가씨, 우리의 땀이 곧 우리의 삶이에요. 인생은 그런 거지요. 어디에서 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아요. 중요한 건 가슴에,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있죠.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당신도 부디 행복하세요.”(92쪽)
시기적으로 ‘지금’ 이 사회에 살면서 페루라는 공간에 눈을 돌리는 것이 또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워낙 바쁘고, 다들 힘들어하는 사회니까요.
그러니까요. 사람들이 너무 스트레스와 분노가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아무리 조절하려고 해도 점점 바빠져요. 내리막길을 달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발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런 상태가 됐어요. 지나친 경쟁, 스트레스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줄 방법이 별로 없죠. 그렇지만 그것은 나라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명의 멘토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 스스로 치유해야 해요.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조금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그런 분이 계신다면 정말 다행이고요.
페루에 가기 전의 나와 다녀온 후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나마 저에 대한 생각을 좀 바꿀 수 있게 됐어요. 브레이크를 조금 걸고 살아도 되는데 왜 이랬을까 하는 자기반성도 하게 되고요. 다녀온 후로 노력을 해요. 마치 월급에서 저축할 돈을 떼놓고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축할 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진짜 없는 게 아니고 돈을 다 쓴 다음 나머지를 저축하려니까 없다고 하는 거잖아요. 휴식도 마찬가지죠. 내게 주어진 시간에서 얼마만큼 휴식에 쓸 건지 원칙을 정하는 거예요. 이 시간만큼은 무조건 가족과 보낸다, 이때는 일하지 않는다, 이걸 정해놓고 나머지 시간을 조율해요. 회사를 만든 게 얼마 안 됐는데요. 페루 가기 전에는 어딜 가든 일을 안고 다녔어요. 지금은 주말에는 무조건 일을 놓고 가버리니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스스로 그런 장치를 만들어야 해요. 성인이 되면 아무도 해주지 않잖아요. 사실 80% 이상의 한국 사람들은 일중독에 빠져있을 텐데요. 내 삶 전체에 대한 그림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일 거예요. 이번 달, 올해 당장 이뤄야 할 목표만 있잖아요. 승진, 월급 인상 같은 것만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인생을 길게 보고, 그 안에서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거죠. 페루 같은 여행지가 그런 깨달음을 줬어요. 확실히 주사를 맞고 온 거죠.(웃음) 천천히 가는 주사를 말이에요.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케노피 투어를 결국 하게 됐어요. 그 외에 여행지에서 한 특히 나답지 않은 행동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어떻게든 안 되는 것도 해보고 그래요. 안 된다면 더 해보고 싶죠. 정말 호기심이 많아서 참지를 못해요. 모험적이라 남들이 안 하는 것, 위험하다는 것 해보는 걸 좋아해요. 정말 못하는 건 번지점프 같이 높은 곳에서 하는 건데 케노피 투어를 하게 됐죠.(웃음)
치차(전통 방식으로 발효시킨 페루 서민 술)는 어땠어요?
치차도 실체를 알고 나서는 먹기가 힘들었는데 결국 마셨잖아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이 책을 쓰고 있을 때였는데요. 할머니가 그걸 어떻게 입에 넣고 씹는지 클로즈업으로 나오는 거예요. 안 보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들의 전통적인 것이니까 비아냥거리거나 폄하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생각이 들었죠.(웃음)
내가 가야하는 길
활발하게 아나운서 활동을 하다가 변신을 시도한 순간에 지금의 손미나를 얼마나 예상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어떤 건 꼭 이루고 싶었던 목표였고, 어떤 건 하다보니 해야 할 일이구나 싶은 게 있는데요. 가령 ‘인생학교’의 경우 2008년 알랭 드 보통에게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제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돕긴 했었는데요. 요즘 하는 표현으로는 내 운명의 파트너를 모르고 자꾸 내 친구를 소개시켜주려 했던 거라고 하고 있어요.(웃음) 알고 보니 내 짝이었던 거죠.<허핑턴포스트>는 사실 제가 저널리즘 쪽으로 다시 돌아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것은 그냥 저널리즘이라고 하기엔 뉴미디어고, 국내 매체도 아니잖아요. 제게는 글로벌 프로젝트라는 것에서 오는 매력이 있었어요. 이런 것들이 다른 일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세상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일이기도 하죠.
작가로서의 활동은 어떤가요?
책 쓰는 일은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에 회사 그만둘 때도 앞으로 10권의 책을 쓰겠다고 했었어요. 여행기로는 이번이 다섯 번째고요. 어쨌든 중도 포기하지 않고 가고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기쁘게 생각해요. 아나운서 시절 제 동기들 말을 빌리면 “나는 10년 정도 열심히 하고 그만 둘 거야”라는 말을 가끔 했다고 하더라고요. 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던 것 같아요.
손미나라는 사람의 색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잘 닦인 길을 가기도 하지만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만들어보려는 의지도 보이고요.
고집이 세서 그래요.(웃음) 좋게 말하면 주관이 확실한 거고요. 다른 사람들 말에 잘 흔들리지 않아요. 페루도 <꽃보다 청춘>이 가서 간 게 아니라 제가 3년 전부터 너무 가고 싶어 했는데 희한하게도 영석PD가 갔더라고요. 그것도 좋았고요. 내가 가야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두렵고, 실패할 가능성이 있어도 저는 가는 편이에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못하고요.
앞으로 어느 곳에 가고, 어느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세요?
뉴욕은 그냥 대도시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있는 곳 같아서 가보고 싶어요. <허핑턴포스트> 일을 하면서 매력을 더 느꼈고요. 뉴욕이란 도시는 내가 누구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진대요. 저는 <허핑턴포스트>일로 뉴욕을 가서 그런지 그렇게 멋있는 도시가 없더라고요. 그 경험을 담은 책을 빠른 시일 내에 쓰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도 한 번 쓰고 싶고요. 중남미를 한 번 더 가서 머물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멕시코를 쓰고 싶어요.
소설도 쓰셨는데, 소설가로서의 꿈은 또 다르겠죠?
나중에는 정말 소설을 쓰며 살고 싶어요. 좋은 소설을 써보고 싶고요. 처음 쓴 소설이 초보다보니 겁이 많아서 안전하고, 착한 소설이 됐어요. 필명을 써서라도 파격적인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긴 해요. 사이코패스 이야기나 아주 진한 사랑 이야기도 써보고 싶죠. 진짜 스케일이 큰 가족사 이야기도 써보고 싶고요.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이상하잖아요. 근본적인 면을 파고들어보고 싶어요. 첫 소설도 완벽하지 못한 현실 때문에 갈등을 겪는 모습을 넣고 싶었던 건데요. 또 쓴다면 완벽하지 못한 면에 대한 고찰을 하고 싶어요. 사람이 갖고 있는 이상한 면이 극에 달했을 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관찰해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을 만나니까요. 책에는 좋은 사람들 이야기만 쓰지만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어서요.(웃음)
명함에 ‘교장선생님’이라고 적혀있는데요. 교장선생님이 그리는 ‘인생학교’의 모습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2008년 2월에 알랭 드 보통을 인터뷰하러 한 잡지사와 런던에 갔어요. 한 시간 약속한 인터뷰였는데 세 시간을 했어요. 너무 얘기가 잘 통했어요. 두 가지 테마를 얘기했는데요. 주요한 테마가 인생에 대한 것이었어요. 알고 보면 캠브리지를 졸업한 사람이나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나 인생에서 하는 질문은 같고, 고민도 같아요. 똑같이 어렵잖아요. 박사 학위를 땄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고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늙는 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외로움은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죠. 알랭 드 보통이 이런 것들이 답답해서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데 제가 박수를 친 거죠. 이후 교류를 하면서 ‘인생학교’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는 그 무렵 회사를 만들고, 알랭 드 보통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파트너를 찾고 있단 소식을 듣고 정식으로 제안을 했고, 결국 저희가 된 거죠.
사람의 마인드를 바꾼다는 건 어느 곳에 고속도로를 뚫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잖아요.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건 인문학 강의가 아니고요. ‘영혼의 찜질방’이라는 표현을 해요. 일상이 아무리 안정돼 있어도 빈곤한 구석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을 위한 장소라고 보시면 돼요. 영혼을 시원하게 찜질해줄 수 있는 곳이니까요. 이곳이 사회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면 좋겠고, 그런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손미나 저 | 예담
일생에 꼭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 신이 숨겨둔 마지막 여행지, 열대 우림과 사막, 바다와 고산 등 세상의 거의 모든 자연환경이 어우러져 있는 특별한 장소. 페루를 수식하는 말은 다양하지만 단순히 낯선 나라를 넘어 진짜 페루의 모습이 궁금한 사람들한테는 늘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자연과 삶 본연의 모습이 살아 숨 쉬는 페루, 그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반가운 여행 에세이가 예담에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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