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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펴낸 윤석남, 한성옥 “모성은 다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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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를 보다 문득 시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얀 백설기 같은 표지에는 꼬부랑 할머니가 그려져 있다. 허리가 90도로 구부러진 할머니 등에는 무당벌레, 거미, 개미가 기어가고, 머리에는 나비와 참새가 사이좋게 앉아 있다. 할머니의 팔은 너무도 가늘지만, 위태로운 느낌은 없다. 오히려 굉장히 안정적인 모습이다. 또 할머니는 허리에 가느다란 끈을 달았다. 무엇을 끌고 가는 것일까. 독자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는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Dear 그림책이다. 설치와 조각, 회화를 넘나드는 서양화가 윤석남의 드로잉을 그림책작가 한성옥이 아트디렉터를 맡아 완성했다. 윤석남에게는 첫 그림책, 한성옥에게는 여섯 번째 그림책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두 번 다시는 만들 수 없는 그림책인 것 같아요.”

 

다정 씨는 누구길래 ‘다정해서 다정한’ 사람일까. 두 작가가 그림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감정은 ‘모성’이었다. 한없이 다정해서 때로는 미안하고 안쓰럽고 아득한 ‘모성’. 가장 그리고 싶은 존재였던 ‘어머니’를 그리면서 나이 마흔에 화가가 된 윤석남은 간결한 드로잉과 차분한 필치로 독자들의 마음에 말간 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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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윤석남과 그림책작가 한성옥(오른쪽)


어머니를 ‘다정’이라는 단어로 담자

 

그림책을 보고 한동안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림을 보고 또 봤는데, 볼 때마다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윤석남책이 나오기 전에 가제본을 받았어요. 책 더미라고도 하죠?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아, 이거 너무 좋다’ 싶었어요. 내 작품 같지가 않고 굉장히 객관적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표지를 열면 줄이 하나 나오잖아요. 다음 장에는 줄이 두 개 나오고, 그 줄이 그네가 되고요. 내 작품으로 만든 책인데도 읽고 또 읽고 그랬어요. 한성옥 작가가 아트디렉터를 맡았는데, 정말 잘 만났다 싶었어요. 아주 운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책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한성옥작년에 윤석남 선생님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SeMA 그린(Green): 윤석남 심장> 전을 열었을 때, 얼굴을 처음으로 뵀어요. 예전에 선생님의 작품 <어머니의 눈>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어요. 저희 어머니가 환갑 전에 돌아가셔서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각별했는데, 선생님의 작품을 보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허전함 같은 마음이 훅 들어왔어요. 마음으로만 오랫동안 흠모했는데, 전시장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인사하게 됐어요.

 

전시장에서 그림책 출간 제안을 하신 건가요?

 

한성옥전시장 입구에 선생님의 드로잉 108점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제가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특히 눈 여겨 봤죠. 선생님과 여러 질문과 답을 이어가다, 이 드로잉으로 그림책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어요. 아직까지 그림책 독자는 어린이 위주잖아요.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면서 성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그림책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어요. 윤석남 선생님의 작품을 성인 독자에게 그림책으로 소개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선생님도 평소 그림책에 관심이 많으신 편이라 흔쾌히 수락하셨어요. 재밌는 에피소드도 있어요. 선생님의 프로필을 읽다 보니, 어머니 성함이 ‘원정숙’이더라고요. 저희 시어머님 성함도 ‘원정숙’이거든요. (웃음) 저희 외할머니 성함은 ‘윤순남’이고요. 선생님과의 인연은 정말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윤석남한성옥 작가와 이야기를 하던 중 숀 탠의 『도착』이 떠올랐어요. 참 좋게 읽은 그림책이었거든요. 『도착』을 펴낸 출판사가 사계절인데, 한 작가가 그러면 사계절에서 내도 좋겠다고 했어요. 참 재밌는 인연으로 만들어진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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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라는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요?

 

한성옥윤석남 선생님의 모든 작품은 모성을 기반으로 해요. 200점이 넘는 드로잉 작품에서 32점을 골라내면서 든 감정이 ‘다정’이이었어요. 우리에게 어머니라는 모성이 뭘까? 생각해보니, 다정함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를 ‘다정’이라는 단어로 담자 싶었어요.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개인적인 자아 안에 있는 갈등, 그리고 어머니, 남편, 딸과의 관계가 바깥 세상으로 확대돼요. 그림책을 보면 세 가지로 나눠지는데요.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예요. 세가지 테마로 그림책을 보시면, 더 가깝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림을 보다 글을 읽다, 또 그림을 보게 되는 책이에요.

 

윤석남드로잉을 할 때, 그림 밑에 적어놓았던 글이에요. 한성옥 작가님이 조금 다듬어준 문장도 있고요. 그런데 완성된 책을 보고 있으니 구분이 안 갔어요. 다 내 글인 줄 알았어요.(웃음)

 

표지 그림만 보면 ‘이게 어떤 그림책일까?’ 잘 상상이 안 돼요.

 

한성옥선생님의 <공생>이란 작품인데요. ‘다정함의 에센셜’이라고 생각했어요. ‘모성은 왜 다정한가’를 생각해보면, 엄마라는 존재 안에 생명에 대한 공생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게 다정으로 표출되는 거고요. 허리가 구부정하지만 다양한 미물에 몸을 내어주잖아요. 얼마나 다정해요. 또 엄마의 허리에는 끈이 하나 있어요. 처음에는 이 끈은 뭘 상징할까? 잘 몰랐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드로잉을 몇 십 개 보다 보니, 이건 ‘짐꾼의 끈’이었어요. 제가 해석한 엄마 다정씨는 이렇게 이해됐어요.

 

윤석남이 드로잉은 약수터에 갔을 때 봤던 장면을 그린 거예요. 꼬부랑 할머니가 약수통을 끌고 가는데, 제 눈길을 확 사로잡았어요. 너무 늙었는데 표정은 너무 다정한 거예요. 물론, 할머니 허리에 거미, 무당벌레가 기어가진 않았죠. 이 장면은 외할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렸어요. 어릴 때부터 엄마의 부엌일을 자주 도왔는데, 어느 날 제가 뜨거운 물을 하수구에 버리니까 외할머니가 갑자기 화를 내시는 거예요. “땅바닥에 살아 있는 생물이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함부로 뜨거운 물을 버리냐”고요. 그 시절 할머니들은 다 이러셨던 것 같아요. 미생물 하나도 절대 함부로 죽이지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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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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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꼭 자기 방을 찾아야 해요

 

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드로잉이 있어요. 여자가 엄마를 한 손으로 안고 있는 모습이에요. “너무 가벼워서 답삭 안아 올렸더니 난데없이 눈물 한 방울 투투둑”이라고 쓰셨어요.

 

윤석남 저희 어머니가 동네에서 키가 제일 컸어요. 그런데 점점 작아지더니 저보다 작아지셨어요. 마치 어린 아이처럼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자주 그랬어요. “엄마, 너무 작아졌어. 음식 좀 많이 드시라”고요. 그랬더니 “이제는 안 먹어도 된다. 걱정하지마. 난 살만큼 살았어요”라고 하셨어요.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일 수도 있고, 인생이 이러하기도 해요.

 

작가님 어머님께서 95세까지 장수하셨다고 들었어요. 하늘에서 이 그림책을 보고 계실 텐데요. 어떻게 감상하셨을까요?

 

윤석남아마 흐뭇해하지 않았을까요? ‘내 딸이 나를 알아줬구나’ 하셨을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저는 엄마랑 참 잘 통했어요. 자랑하는 것 같지만, 우리 딸아이에게도 엄마가 늘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네 엄마 때문에 살았어”라고요.

 

남편과 손을 잡고 있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중년 부부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은데요.

 

윤석남이 그림을 그렸을 때가 2000년이니까, 15년 전쯤 이야기예요. 제가 얼마 있으면 여든이 되는데, 지금 남편을 바라보는 시각은 또 달라졌어요. 남편이 있어서 참 고맙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마 지금 드로잉을 새롭게 그리면 또 다른 부부상이 나올지 몰라요.

 

한성옥지금 제가 그래요. 결혼한지 32년째가 됐는데 남편만큼 참 좋은 친구가 없는 것 같아요. 최고의 친구예요. 남편과 동갑내기 친구라서 그런지 결혼했을 때부터 반말을 하는 사이였거든요. 너 그랬니? 라고 물을 정도로 허물 없는 친구예요.

 

윤석남난 60대 때는 그걸 못 느꼈어요. (웃음) 우리 부부도 고등학교 동창인데, 60대 때만해도 자기 일에 바빠서 서로 보살필 시간이 없었어요. 이제는 피차 같이 늙어가는 처지잖아요. 남편이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다정해서’ 편에는 작가 윤석남의 이야기가, ‘다정한’ 편에는 남편과 딸, 엄마와의 관계, ‘다정씨’ 편에는 세상 이야기를 담았어요. 작가의 ‘방’ 이야기부터 시작되는데요. 여자에게 ‘내 방’이라는 공간은 드물고 귀한 것 같아요. 윤석남 선생님은 오래 전부터 「핑크 룸」, 「블루 룸」 등 ‘룸 시리즈’ 작품을 선보이셨어요.

 

윤석남지금 제 방은 커요. 하지만 내 방을 갖게 된 건 마흔이 넘어서예요. 그 전까지 내 방은 식탁의자였어요. 시어머님방도 있고 딸 방도 있는데, 내 방은 부엌에 있는 식탁의자였어요. 의자에 앉아 책도 읽고 편지도 쓰고 했으니까요. 제가 미술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거예요. 하지만 무엇이 됐든 간에 모든 여성이 자기만의 길을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느질을 좋아한다면 바느질을 꾸준히 했으면 좋겠어요.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장소라면, 그것이 내 방이 될 수 있고요.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 있는데 꼭 자기 방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뭐 그냥 이렇게 살지’ 이러지 말고, 무슨 일이든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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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런 그림책을 만들자고 하면, 겁날 것 같아요

 

이 책을 두고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평한 리뷰를 보았습니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모든 이야기 속에 ‘모성’이 느껴지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성옥맞아요. 윤석남 선생님의 작품은 모성이 본 세계, 모성이 가는 길을 아울러요. 모성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 진화하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결핍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모성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저 역시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의 자리를 제대로 볼 수 있었으니까요.

 

윤석남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남의 자식까지 포옹할 수 있어야 진정한 ‘모성’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저희 어머니 세대는 요즘 젊은 엄마들과는 달랐던 것 같아요. 학교에 가서 맞고 돌아왔을 때 “왜 너만 맞았냐. 너도 때려라”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어요. 하수구에 뜨거운 물을 버리지 못하게 한 할머니 세대도 그래요. 작은 생명도 바라볼 수 있는 게 사랑이잖아요. 이게 모성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전세계에 여성 정치가가 많아지면 전쟁이 없어질 거야.” 그랬더니 남편이 “웃기지 마. 여자들이 더 잘 싸워”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여자들은 자기 자식을 품어 봤잖아요. 모성은 많은 걸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은 아직도 모성을 희생 정신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지만, 모성애의 진정한 뜻은 희생이 아니에요. 항상 희생만 하고 양보만 하고 참다 보면, 언젠가 독이 나올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는 성찰이 필요해요.

 

드로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고독감도 많이 느껴져요. 여자의 손은 때때로 가시가 돋아 있어요.

 

한성옥선생님 작품을 보면 늘 어느 한 쪽 부분은 비쭉비쭉 가시가 나있기도 하고, 뭔가 불완전해요. 온전함으로 있지 못하는 쓸쓸한 한 부분이 머뭇거리고 있어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다 그렇잖아요. 어떤 것을 지향하지만 항상 머뭇거리게 하는 부분이 있죠. 이런 감정을 찾고 느껴보는 것도 좋은 그림책 감상이라고 생각해요.

 

윤석남여자의 팔을 보면 굉장히 길어요. 어딘가로 가고 싶은 욕망이에요. 도달하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아쉬움, 주저함을 팔을 통해 표현했어요. 그래서 손에 가시가 돋았어요. 여기엔 약간의 독도 들어가 있어요. 욕망, 욕심이니까요.

 

그림책을 보고 주변 또래 여성들에게 소개했어요. 굉장히 공감하더라고요.

 

한성옥아무래도 여성 독자들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엄마가 된 사람, 모성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특히 더 공감할 거고요. 책을 만들면서 출판사 편집팀장과 “이 책은 정말 한 번 만들 그림책이다. 그러니까 진짜 집중해야 한다”고 했어요.

 

드로잉 그림책을 또 펴낼 계획은 없으신가요?

 

윤석남다시 이런 그림책을 만들어보자고 하면, 겁날 것 같아요. 자신도 없고 재미도 없을 것 같아요. 자신이 없다는 게 재미가 없다는 뜻일 텐데요. 나는 새롭지 않은 건 못하는 성질이라서요. 이런 종류의 책이 또 나오기는 힘들 것 같아요.

 

“소장 욕구가 생기는 그림책”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도 좋지만, 나를 위해 선물하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특히 어떤 독자들이『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를 보면 좋을까요?

 

윤석남 30대 이후 가정 주부들이 많이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여자들이 자기한테 이 정도는 투자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엄마들이 자녀를 위한 책을 많이들 사지만 본인을 위한 투자는 잘 안 하잖아요. 좀 이기적으로라도 나를 위한 투자를 했으면 좋겠어요. 책이 많이 팔렸으면 하는 소망보다도 그래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한성옥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하잖아요. 육체도 건강해야 하지만 정신도 건강해야 하는데, 브런치 먹는 횟수를 조금만 줄여 책을 봤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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