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가수가 컴백을 하는 것은 팬으로서 벅찬 일이다. 1972년 스물 셋의 나이로 데뷔한 정미조가 37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70년대 디바'의 컴백은 '반가움'을 넘어 '새로움'과 '도전'이라는 큰 의미를 던진다. 그는 '왕년'이나 '명성'에 머물지 않고 '지금'에 발맞추는 앨범을 내놓은 것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갔지만 그는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소녀 같은 표정과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관록은 대화 내내 감탄과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정미조의 삶과 세월을 그대로 담은 <37년>. 그는 LP세대였기 때문에 본인의 이름으로 나오는 CD는 처음이라고 한다. 지난 4월에는 생애 첫 단독공연을 열었고 라이브클럽데이 공연도 참여하며 정열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정미조, 그리고 그의 오랜 잠을 깨우고 음반 제작과 작사를 한 JNH뮤직 이주엽 대표와 함께 했다.
37년만의 앨범 발매를 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어떤가요?
정미조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 행복합니다. 주변의 제 나이 또래 분들은 최근에 이런 노래 듣기가 어려웠는데 잘 들었다고 말씀해주시고요. 인터넷에 보면 젊은이들도 '새삼스럽게 나이든 사람이 나왔어' 이런 글들이 아니라 긍정적인 댓글이 달려서 진짠가 싶기도 합니다. 계속 긍정적인 반응들을 접하다 보니 용기가 나고 정말 행복해요! 평론가분들도 변화된 정미조 좋다고 해주셔서 너무 좋아요.
은퇴 선언 이후 오랫동안 미술 쪽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음악으로 돌아온 계기가 무엇인가요?
정미조 저에게 노래란 너무 신나고 행복한 일이에요. 예전에는 누구나 보는 국민 쇼프로그램 TBC의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제가 거기에 우연히 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부른 「My way」라는 곡으로 저의 가수 생활이 시작된 거죠. 그 때도 돈이나 성공이나 이런 생각 없이 노래가 좋고 신이 나서 가수를 했어요. 한 7년 정도 노래를 실컷 하다 보니까 이제 내 전공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불어를 배우고 프랑스로 미술 공부를 하러 가게 된 거죠. 유감없이 떠났지만 음악을 잊고 산 건 아니에요. 항상 음악에 대한 건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쇼쇼쇼>에서 듀엣으로 인연을 맺었던 최백호 선생님을 미술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나 교류를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분께 앨범 제작자인 이주엽 대표님을 소개받았고요. 저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다시 노래를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해요.
앨범 <37년>, 재즈 아티스트 손성제 씨가 작곡을 맡았습니다.
이주엽 사실 그 전에 다른 분과 함께 아프로 큐반(Afro-Cuban)스타일의 데모를 만들어봤는데요. 정미조 선생님과는 음악 색이 잘 안 맞았어요. 한동안은 대안도 없어 고민만 하고 있는데 한 페스티벌에서 성제 씨가 연주하는 걸 보게 된 거예요. 손성제 씨가 <누보 송(Nouveau Son)> 앨범을 어레인지한 것도 알고 있었고 팝과 재즈의 감각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적임자이다 싶어 주선을 하게 되었어요.
오랜만에 앨범 녹음을 해보셨을 텐데 어떠했나요?
정미조 내가 제대로 노래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연습을 해야 하는데 하필 감기가 지독하게 걸렸어요. 녹음 날짜는 다가오지 잠도 잘 안 오더라고요. 그리고서는 첫 녹음 날,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미안한 마음으로 녹음을 한 곡 딱 했는데 손성제 씨하고 이 대표님이 박수를 막 치더라구요. '아 괜찮은 건가?'하고 녹음한 걸 들어봤더니 '어머 그래도 괜찮구나'하고 안심이 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순조롭게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몇 번을 더 불러보며 녹음을 하고 싶었는데 많이는 못 부르게 하는 거예요. 거의 원 테이크로 작업을 했고 열심히 불러봐도 처음 부른 걸 거의 쓰시더라고요.
1950년생이잖아요. 그런데 목소리가 나이에 비해, 그리고 예전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 같아요.
정미조 내 목소리를 창고 속에 집어넣고 37년 만에 꺼내 먼지도 털고 기름칠하고 가동을 시켜보니 옛날처럼 써지는 게 신기해요.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잠에서 깬 것처럼 옛날 그대로의 기억, 경험이 살아나는 거죠. 어쩌면 몇 십 년 동안 계속 노래를 했으면 지금의 소리가 신선함을 가지진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마모되어서 말이죠. 어떤 면에서는 계속 갈고 닦은 분들에게는 미안한 부분도 큽니다. 잘난 것도 하나 없는 사람인데 노래한답시고 나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렇게 좋은 환경과 사람들과 노래를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여러모로 미안하기도 합니다.
보컬에 행복함이 묻어나기도 하고요. 음악 자체도 은은한 향긋함이 느껴집니다.
정미조 행복이라고 하면, 어쩌면 굉장히 정확히 봤어요. 「7번 국도」를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젊은 풍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대표님이 그러지 말고 일단 한 번 불러보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는 음악 따라 어리게 불렀더니 계속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몇 주 후에 결국은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노래를 불러봤어요. 어떤 느낌으로 불렀냐면요. 교수가 사실 정년퇴임하고 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원래의 생활 리듬이 깨져버려서 건강이나 활기가 확 수그러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24년 동안 수원대학교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학교를 퇴직하니까 마음이 홀가분했어요. 내 의무를 다하고 학생들 잘 가르치고 이제 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거잖아요. 너무 행복한 거예요(웃음) 노래도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아서 즐거운 내 기분, 내 목소리대로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니까 한 번에 오케이가 되더군요(웃음)
음악 스타일은 예전과 비교해봤을 때 많이 달라졌습니다. 작업은 어떠했나요?
정미조 맞아요. 음악 스타일은 많이 달라졌어요. 손성제 작곡가 기반에 재즈가 깔려 있기도 하고요. 「7번 국도」의 경우는 쌈바 리듬을 저 나름대로 해석을 하니 또 다른 질감이 나는 음악이 나왔어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곡도 고상지 씨의 반도네온 연주가 받쳐주니까 저 같은 사람도 라틴 풍의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고요.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만으로 분위기가 딱 잡히잖아요. 처음에는 그 소리가 너무 맛깔나고 힘 있잖아요. 그래서 연주자가 멋진 남자가 아닐까 했는데 알고 봤더니 젊고 아주 예쁜 여인이더라고요. (웃음)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작업을 하니까 저 혼자는 할 수 없는 어떤 변화가 생기더라고요. 최고의 뮤지션 분들과 함께할 수 있게 해주셔서 소속사 대표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개여울」이나 「휘파람이 부네요」를 이번에 다시 불렀잖아요. 이 노래들을 통해 예전과의 차이를 가장 많이 느꼈을 것 같아요.
정미조 그렇죠. 그동안 제가 「개여울」을 얼마나 많이 불렀겠어요. 예전엔 악기들이 정말 가득차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정말 개여울에 앉아 노래를 하는 소박한 시골아낙의 느낌으로 불렀어요. 그래서 악기도 아주 심플해요. 피아노와 베이스, 클라리넷만 편성해서 담백한 느낌으로 갔어요. 저는 이번 버전에 대해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가사는 이주엽 대표의 작품입니다. 작업 방식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이주엽 정미조 선생님을 화자로 제가 스토리텔링을 했어요. '37년'이란 세월을 앨범으로 담으면 어떤 느낌일까 고민을 했습니다. 「귀로」같은 경우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끝내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선생님의 인생 오디세이를 쓰는 기분이었어요. 다행히 가곡같이 아주 심플한 테마와 어울리는 곡을 만나 가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정미조 저는 「귀로」와 「인생은 아름다워」 가사가 유독 좋아요. 「귀로」 가사를 보면서 어릴 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한테 야단맞고 창가에 기대서 울먹였던 기억이 떠올라요. 아버지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마음이 아파 연습을 못할 정도였어요. 가슴이 참 먹먹하더라고요. 「인생은 아름다워」는 '나는 다시 노래를 하고 아직도 노래를 하네'라는 가사가 좋아요. 아니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아는지 참 신기하더라고요.
녹음 하면서 시스템의 차이도 많이 느꼈을 것 같아요.
정미조 정말 많이 달라졌죠. 예전에는 릴테이프 녹음을 했어요. 그래서 한 채널은 반주, 한 채널은 가수로 녹음을 해서 큰 스튜디오에 모두 모여서 악기 연주와 함께 녹음했어요. 그래서 녹음할 때는 절대 틀리면 안 되죠. 녹음 날이면 컨디션 좋게 하려고 노력을 하다가 그게 또 부담이 되어 더 안 좋아지고 결국 녹음 못 하는 경우도 생겼어요. 그런데 그게 연주자들, 녹음하시는 분들께 얼마나 미안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안 되니까 정신을 정말 바짝 차렸죠. 어떻게 보면 이번 녹음도 예전 마음 그대로 노래를 부른 것 같아요. 지금은 연주자들이 함께 하지는 않지만요. 한 마디 한 마디 쉬어가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쭉 원테이크로 노래를 했어요. 물론 지금은 수정이 가능하니까 심적으로 굉장히 편안하긴 했어요. 예전엔 LP로 다 녹음을 했는데 이번에는 CD가 나왔잖아요. 몇 년 전에 LP에서 곡들을 추출한 편집 앨범 한 장 빼고는 정미조 이름으로 CD를 낸 건 처음이죠.
이번 앨범이 어떠한 의미로 남길 바라나요?
정미조 '정미조'하면 어떤 가수구나 하고 정리가 되는 앨범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어떤 시대의 누구다 이런 추억이 아니라 정미조하면 '아! 어떤 가수다'하고 남길 바래요. 이번 앨범이 그것을 만드는 첫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앨범 커버의 사진은 어떤 의미인가요?
정미조 삼십년을 넘게 손으로 그림 작업했으니 제 손에 삶이 묻어나 있어요. 제 손이 제 인생을 다 얘기하죠.
그림을 평생 그렸잖아요. 미술과 음악은 굉장히 다른 작업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정미조 미술과 음악은 다르긴 하지만 사실 표현하는 방식이나 감각만 다르지 저에겐 같아요. 음악은 소리로 표현하고 그림은 물감으로 표현할 뿐이지 결과적으론 같아서 이렇게 넘나 들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색을 넣는 것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어떠한 조합을 이루느냐에 따라 완성되는 색의 향연이기 때문에 음악도 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죠.
예술가로서 '나이'는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나요?
정미조 사실 저는 나이를 잘 못 느껴요. 지금도 사람들이 나보고 나이가 많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항상 젊은 학생들과 지내서 그런지 몰라도 항상 학생보다는 조금 더 많다는 생각으로 머물러 있어요. 지금도 파리에서 공부했던 친구들과 만나면 서로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은 자꾸 내가 나이가 많다고 하는데 저는 한 40대 후반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에요. 아마도 보통사람들과는 환경이 달라서 그런 거겠죠. (웃음)
요즘 발매되는 음악들, 뮤지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정미조 시장 규모로 따지면 엄청나죠. 요즘엔 K-POP으로 세계적 히트를 치니까 기업화되고 상품화되었죠. 변화가 있고 그에 맞춰 발전하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노래 잘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아요. 그런데 시스템에 맞추다 보니 소리도 정형화된 것 같기는 해요. 요즘엔 소프트하고 달콤하게 잘 부르는 사람들이 참 많잖아요. 아마 제 목소리를 처음 들으시는 분들은 '와!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도 있구나'했던 거 같아요. 요즘과는 색이 달라서 관심을 가져준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고요.
젊은 아티스트들 중에 마음에 가장 와 닿은 뮤지션은 누구일까요?
정미조 빅뱅은 가수뿐만 아니라 엔터테이너로 사람들 시선을 확 잡아끌더라고요. 노래면 노래, 패션이면 패션 정말 멋있어요. 샤이니도 좋고요. 나름 열심히 앨범도 듣고 텔레비전도 보는데 기억을 잘 못해서 다른 가수들은 더는 생각이 안 나네요. (웃음) 번외로 최근 조용필 씨 「Bounce」 나왔을 때 좋더라고요. 역시 노장은 건재하구나 느꼈어요.
끝으로 정미조의 베스트 음악 3개만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미조 안네 소피 폰 오터(Anne Sofie von Otter)의 「G?ttingen」 너무 좋더라고요. 또 이브 몽땅(Yves Montand)이 있겠고, 패티김의 「초우」도 좋아합니다.
인터뷰 : 김반야, 현민형
정리 : 현민형
사진 : JNH 제공
[관련 기사]
- 곽정은 “사랑, 행복한 만큼 힘들어질 수 있어”
- 이기호 “우리는 왜,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을까?”
- 장호연 “번역가는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는 사람”
- ‘국민 주치의’ 오한진 박사의 건강 노하우, 호르몬을 알자
- 강헌구 “1등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