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립선염에 걸린 대기업 부장이자 기러기 아빠인 이 부장이 치료 과정에서 알게 된 드라이 오르가슴. 바로 이것이 사건이었다. 이 부장은 욕구불만이 무엇이었던가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 삶이 무척 풍요로워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뭔가 불안하다. 그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수학 공식을 씹어 먹을 듯 외웠던 것처럼 이 기쁨에도 해답이 있길 바랐다. 정석을 찾아야 했다.
이해 가능한 세계의 풍경이 넓어지며 이 부장은 멀미를 느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예정되지 않은 대로 움직이는 세상. 그것은 이 부장에게 두려움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원했던 것은 확실한 약속이나 분명한 보장, 혹은 거창한 미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보상은 오르가슴으로 충분했다. 다만 이 낯선 새로운 세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부장에겐 정석이 필요한 것이었다.(101쪽~102쪽)
이 부장은 정석을 찾았을까? 혹 소설에서 답을 기대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고 했다. 맞다, 임성순의 소설을 읽으면 언제나 질문이 생겼다. 『자기 개발의 정석』도 마찬가지다. 중년 남성의 고독한 삶, 발병과 치료 과정에서 발견한 의외의 기쁨, 기러기 아빠의 외로움을 따라가다 보면 가족이란 무엇인가, 어떤 삶이 가능한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뻗치는 것이다.
작가 임성순은 ‘회사 3부작’(『컨설턴트』, 『문근영은 위험해』,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과『극해』등으로 예측 불가능한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줬다. 아직 임성순을 읽지 않았다면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자기 개발의 정석』으로 임성순을 처음 읽은 독자라면 꼭 다른 책을 찾아 읽어보길 권한다. 같은 작가의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아주 흥미진진한 세계를 만나게 될 테니까.
자기계발 의무, 일종의 불안
주인공이 ‘이 부장’ 이죠. 이름이 없어요. 네이버 출간 전 연재 당시에도 공감된다는 댓글이 많이 달렸거든요. 세상 모든 이 부장을 생각하게 하기도 하는데, 이 호칭이 주는 대표성에 대해 먼저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가장 흔한 성 씨가 ‘김’, ‘이’, ‘박’이잖아요. 그중 하나를 골랐어요.(웃음) 거기에 더해 ‘부장’이라는 것이 중년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죠. 중년 남성은 가장, 아버지라든가 자기 믿음을 갖고 있다든가 하는 것보다 오히려 직장의 직급으로 대표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직급이 들어간 이름을 해야지, 생각해서 쓰게 된 게 ‘이 부장’이라는 캐릭터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캐릭터들도 가능하면 이름이 안 나오게 해야겠다고 해서 이름 없이 모두 특징들로 호칭을 붙여서 만들었어요.
‘여드름’처럼요.(웃음)
네, ‘수염’이라든가.(웃음)
그런가 하면 이 부장은 ‘정석’이 필요한 사람이잖아요. 결정되지 않은 것을 불안해하죠. 이 점도 주목하게 되거든요. 이를 테면 지금 사람들의 심리죠.
개인적인 생각이긴 한데요. 자기계발서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르긴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같은 것도 당시 비극을 쓰는 극작가를 위한 일종의 실용서였거든요. 그런 것 자체가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람들이 너무 과하게 자기계발 의무에 시달리는 것을 일종의 불안이라고 봐요. 왜냐하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을 계속 시대에 뒤처지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거든요, 가만히 있으면요. 그래서 재테크도 해야 되고, 자기계발도 해야 해요. 나쁘게 말하면 노동력을 착취하는 거고, 좋게 말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웃음) 채찍질을 하는 그런 사회인데요. 어쨌거나 그런 것 때문에 불안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불안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반대로 욕구를 억압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방향에서 작품을 쓰게 된 거죠.
극단적인 대비예요. 가장 사적인 영역, 가장 내밀한 것조차 방법이나 정석을 알아내고 싶어 하는 심리라는 것 말이에요.
그렇죠, 한국 사회에서 그런 방향의 사람이 되는 게 굉장히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는 것 같아요. 대놓고 교육하진 않지만 경쟁에서 지면 안 되고, 언제나 틀리면 안 되고, 어디에 들어가서도 최선을 다해라, 요즘 하는 말로 ‘노오력’을 해라(웃음),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 하잖아요. 이 부장은 그런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화시켜서 성장한 한국인의 전형 같은 거라고 생각해서요. 그 부분에 있어 늘 정석을 찾고, 늘 바른길을 찾고, 그럼으로써 안정감을 얻는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지식마저도 소비되는 경향이 너무 많잖아요.
지식뿐 아니라 요새는 진정성도 소비되는 걸요.(웃음)
재미있게만 읽었다면 다행
자기 ‘개발’이라는 제목도 그렇고, 소제목이 재미있어요.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차용했어요.
작품을 완성하고 챕터 제목을 붙여야 하는데 고민을 하다가 자기계발서 제목을 붙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부장이 읽었을 만한 책이 뭐가 있을까, 라고 생각해서 챕터를 끌어 왔는데 배치를 하니까 의외로 잘 맞아서 약간 분량만 조정하고 그대로 가져와서 쓰게 된 거거든요. 그런 걸로 소소한 재미랄까 아이러니랄까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법칙을 그대로 적용한 듯한 챕터가 진행되는 전개가 독자들한테 어떤 재미를 주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아이러니라면 특별히 어떤 것을 비꼬는 장치라고도 생각했던 건가요?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자기계발서의 특징이 항상 옳은 말만 하고, 단지 지키기가 힘들 뿐이고 그렇죠. 그래서 지킨다고 해도 바람직한 사람이 되는지 사실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렇지만 만약 이 부장이 그런 삶을 살아왔다면 지금 닥친 이 상황도 자기계발서의 한 챕터처럼 느끼겠구나, 그렇게 행동하겠구나, 하는 것을 바닥에 깔고 보여주는 장치였어요. 그런 규칙으로 이 부장이 움직이고 있다면 자기계발서가 있으면 좋을 텐데, 해서 고민했던 게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랑 몇 가지가 있었어요.(웃음) 그중에 이 부장이 가장 열심히 읽고, 이 책을 피와 살로 삼아야지 생각했을 법한 게 딱 보니까 스티븐 코비 책일 것 같아서 그걸 챕터 제목으로 쓰게 됐죠. 개인적으로 그 자료를 찾아보면서 재미있는 것도 많았어요.
인터뷰 준비하다가 눈에 띄는 리뷰를 발견했어요. 한 줄인데요. 읽어드릴게요. ‘본격 전립선오르가슴다단계개망신 소설’(웃음) 이거 어떤가요?
그렇게 읽으실 수도 있죠.(웃음) 사실 『극해』랑『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가 굉장히 진지하고 무겁잖아요. 그걸 본 어떤 분과 차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이 제 책을 많이 안 읽는 걸 굉장히 안타까워 하시면서(웃음)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본인 생각에도 실제 사는 세상이 이렇게 힘든데『극해』 같이 꿀꿀한 소설 읽고 있으면 기분이 더 안 좋아진다, 사실 네가 독자를 약간 고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요. 그래서 다음에는 정말 읽기 쉬운 소설을 한 번 써봐야지, 해서 이 소설을 쓰게 된 거예요. 쓸 때는 이런저런 의미나 상징을 생각하고 쓰긴 했지만 그냥 코미디 장르로써 재미있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에서 썼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본격 전립선...’(웃음) 그렇게 보셨더라도 저는 재미있게만 보셨다면 되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의 무게감이나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쉽게 읽히는 소설이라고 쉽게 쓰이는 건 아니잖아요. 워낙 묘사도 많고 한데 쓰기 힘든 점은 없었나요?
아니요, 구성 자체는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더니즘 소설을 그대로 따랐어요. 캐릭터가 있고, 캐릭터가 전이를 하죠. 돌아다니면서 다른 캐릭터들을 하나씩 만나고, 마지막에는 모더니즘 소설론에서 늘 배우는 ‘에피퍼니(epiphany, 단순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를 하는데요. 그 형태 그대로예요. 단지 에피퍼니 끝에 약간 엔딩을 비틀었을 뿐이죠. 그런 식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구성 자체는 힘들진 않았고요. 처음 구상할 때 엔딩부분은 정해놓았거든요. 그렇다면 블랙코미디로 가고, 모더니즘 소설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야겠다, 한 거예요. 이것이 현대사회에 대한 내용이니까 모더니즘 소설을 공부할 때 배우는 대표적인 영미의 모더니즘 소설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서 써야겠다 했던 거죠.
읽어보시는 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취재 시간을 훨씬 더 많이 썼어요.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것도 누가 인터넷에 올린 전립선 치료 경험을 보고 찾아보면서였거든요. 의외로 많더라고요. 또 책에 나오는 그런 제품들을 파는 사이트에 가면 경험담이 엄청나게 많아요.(웃음) 그것들을 다 받아서 정리해서 쓰게 된 거였거든요. 의외로 취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 같아요.
모더니즘 소설 구조 역시 ‘정석’이네요.
네, 정석인 거죠. 이를 테면 모더니즘 문학의 정석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 거죠.
본격적으로 쓰는 데는 얼마나 걸렸나요?
자료 찾는 시간이 오래 걸려 그렇지 쓰는 데는 석 달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제일 빨리 쓴 소설에 속해요. 예전 인터뷰에서 차기작이라고 했던 SF는 아직도 쓰는 중이거든요. (웃음) 먹고 살려고 시나리오 쓰느라 1년에 6개월 정도밖에 소설을 못 써요. 많이 못 쓰긴 하는데 그건 아직도 3고까지 쓰고 4고 작업을 위해서 기다리고 있요. 이건 의외로 무척 빨리 끝났어요.
해피엔딩이라고 본다
마지막 장면 말인데요. 이 부장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은 장면이죠. 부부 간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건인데, 말하자면 소통의 부재가 문제였어요.
저는 나름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고 쓴 거였거든요. 물론 독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웃음)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가 저는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던 것처럼요. 이것도 일종의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가족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문제고 그것에 대해 가족 모두가 서로 불편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인 소통의 부재를 겪은 거죠. 그것을 생각하면 피차 불편해지니까 그 부분은 일정 부분 접고 지금 상황에서 최선이라 생각하는 쪽을 가게 됐는데요. 어쨌거나 모든 가족 구성원이 문제를 정면으로 인식하게 된 거잖아요.(웃음) 그런 의미에서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해피엔딩이라는 데 이견은 있을 수 있겠지만요.
특히 해피엔딩이라면, 그러면 딸은 빼줘야 하지 않느냐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가족 구성원으로서 딸이 배제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이 소설이 가부장적이고 윤리적인 엄숙주의를 비꼰다는 측면에서 반대편에 있는 소설이라고 한다면요. 그렇다면 딸을 빼면 그 의미가 약간 희석될 것 같아서 딸이 꼭 봐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작가의 그런 의도를 막연하게나마 짐작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 장면을 덮고, 그러면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봤거든요. 그랬을 때 이제야 비로소 이 가족이 이 문제를 서로 이야기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겠다는 상상을 했어요.
그렇죠,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죠. 물론 많은 뒷부분은 생략하겠지만(웃음) 어쨌든 앓고 있는 병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말하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병 자체, 전립선염이라는 것보다는 기러기 아빠라는 게 더 문제예요. 우리 사회의 어떤 단면을 볼 수 있는 현실인 동시에 가족으로서는 굉장히 비정상적인 거잖아요. 그런 문제를 보게 됐다는 점에서 저는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요.
쓰면서 독자 생각도 했을 것 같거든요.
그냥 여러 가지 측면에서 최대한 많은 의미를 담으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이 소설 애초의 의도에도 굉장히 부합하는 거고요. 『자기 개발의 정석』을 자기계발서의 정반대에 있다고 생각하며 썼는데 막 이 소설의 의미가 뭐고, 이런 생각을 하면 자기계발서랑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그냥 재미있게 읽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재미있게 읽으시면 좋겠어요. 제가 생각했던 주제나 의미나 여러 가지를 떠올리는 건 부차적인 문제라 생각하거든요.
솔직히 읽는 독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저는 모르잖아요. 작가도 여러 가지를 걸고 열심히 쓰는 거긴 하지만 독자도 독자 나름의 삶이 있고, 그 삶 속에서 책을 읽는 거잖아요. 사실 불쾌할 수도 있어요. 어떤 분들은 의미 있게 느낄 수도 있는데 그걸 제가 일일이 이렇게 읽어야 한다, 이게 맞다, 너는 이 책을 읽었으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의도하는 건 약간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최대한 제가 생각하는 선에서 완성도 있게 쓰고, 최대한 책값에 부합하는 재미를 드리려고 노력해서 썼죠.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몫이고요. 독자들이 제 의도에 부합하게 읽었다면 저로서는 감사한 일이고, 그렇게 읽지 않으셨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죠.
다른 작품들과 확실히 다른 느낌이거든요. 특히 가장 최근에 나온 장편 『극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예요. 변화의 이유가 있었을까요?
작품마다 색깔이 약간씩 다른데요. 사실 제가 작가로서 아직 완성됐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가능하면 개인적으로는 작품을 쓸 때마다 안 해봤던 것을 해보고 다른 형태로 시도해보려고 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이 색깔도 다 다르고 문체도 미묘하게 다 다르고 이야기하는 주제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형식이나 기법도 조금씩 다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최대한 안 해봤던 걸 많이 해보고 싶어서 다르게 쓰는데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필모그래피(filmography) 관리를 개판으로 한다고요.(웃음) 그래서 고정 독자층이 안 생기는 거라고요. 사실 작가가 문체도 일정하고 작품색도 비슷해야 브랜드로서의 작가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데 그걸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아직은 최대한 많이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요. 그걸 독자들에게 판다는 게 약간 미안하긴 하지만요.(웃음)
우리나라에선 문체라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저는 그 작품에 적합한 문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의식적으로 작품에 따라 문체를 달리 해요. 예를 들어 『극해』 같은 경우 굉장히 하드보일드하고, 문장도 압축적으로 건조하게 썼고요. 『자기 개발의 정석』같은 경우는 최대한 심리 묘사에 충실하게 썼어요. 그런 것도 작품에 따라 독자들이 읽는 데 더 좋은 쪽으로 맞춰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다르게 쓰는 거예요.
그것은 계속 새로운 도전이었을 텐데요. 그중에서도 작가가 지향하는 글쓰기나 편안하게 썼다고 하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글쎄요. 그나마 『자기 개발의 정석』이 가이드가 충분히 있었으니까요. 모더니즘 소설의 정석대로(웃음) 쉽게 쓴 편이긴 한데요. 쉽게 써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매번 쓸 때마다 약간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죠. 그래서 작품 쓸 때마다 여러 고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써가면서 ‘이런 방향으로 써야겠다’ 생각하고, 엎고 다시 쓰고 하니까요. 굉장히 비생산적이죠.
작가의 작품을 읽고 팬이 되어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그러는 것이 작가로서 독자를 배려하고 충실한 거겠죠. 그런데 제가 독자들이 제 소설을 어떻게 읽는지 간섭 안 하는 것처럼(웃음) 저도 독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좋은 작가는 못 되는 거죠. 제가 독자에게 좋은 독자이길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저도 좋은 작가는 못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이라는 게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 같아요. ‘회사 3부작’으로 자본주의와 구조 안의 개인을 이야기했다면, 『극해』역시 외부에 의해 결정되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죠. 이번 작품도 굉장히 개인에 집중하게 되는 작품인데요. 그렇게 본다면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읽히기도 하거든요.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어지는지 궁금해요.
공통적으로 굳이 얘기하자면 구조 속에 있는 어떤 개인의 실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측면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그 형태가 다 다르긴 하죠. 넓게 얘기하자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솔직히 ‘구조 속 개인의 실존’(웃음) 이라면 거의 모든 인간에 대한 이야기나 마찬가지라 이걸 묶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이를 테면 지금 쓰고 있는 SF 같은 경우는 자본주의에 대한 얘기가 거의 안 나올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꼭 반자본주의 소설 쓴다거나 이런 건 아니고요. 그냥 인간이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지고, 사람이라는 게 뭔가, 이런 것에 대한 얘기를 하는 편이긴 하죠. 그렇지만 얘기했듯이 이게 무엇이라고 얘기하기에는 굉장히 넓은 주제라서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면 사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쓸 수 없는 거겠죠.
그렇죠. 작가가 되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작가가 되는 것보다 작가로서 계속 작품을 써나가는 게 더 힘들 거란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최대한 뭔가 방향을 정해놓고 어떤 것을 파는 작가가 되기보다는 열어놓고 최대한 가능성을 많이 모색해보자, 그러는 편이 오히려 더 많은 걸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선지 쓸 얘기가 떨어져서 못 쓴다기보다 시간이 없어서 못 쓰는 좀 행복한 작가 축에 들거든요.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일부러 그때 생각했던 것대로 지금 최대한 열어두고 작업을 해가려고요. 그러다보니 늘 고정된 독자층이 생길만 하면 배신을 하고(웃음) 말죠. 가령 『컨설턴트』를 보고 굉장히 장르와 순문학 중간의 그런 작품을 써줄 거라고 기대하고 『문근영은 위험해』를 봤더니 ‘이건 뭐야?’하는 거죠. 『문근영은 위험해』를 보고 코믹한, 키치적인 작품을 쓰는구나 생각했는데『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로 또 한 번 독자들을 쫓아내고요. 이런 식이었던 것 같아요. 아마 다음에 나올 SF도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다를 거예요.
그 SF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나요?
1고, 2고, 3고가 완전히 다 달라서 뭐라고 말씀 드리기가 그런데요. 처음에는 SF 장르에 충실한 형태로 쓰기 시작했는데 점점 산으로 가고 있습니다.(웃음) 점점 애초에 구상했던 것과 다른 얘기가 되고 있어서 저도 뭐가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보르헤스 소설과도 비슷하게 가고 있고, 그러면서도 굉장히 골치 아픈 과학 이론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어서요. 이대로는 읽기 힘든 소설이 될 것 같은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수정하고 있는 중인데 뭐가 나올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언제 탈고하려고 기한을 두고 있는 거예요?
어차피 걸려있는 계약이 없기 때문에 언제 써도 상관이 없긴 한데요. 가능하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원고를 탈고해서 내년 하반기에는 책이 나오게 하고 싶어요. 그렇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먹고 살려고 다른 일을 해야 하니까 시간이 빠듯해서요.
시나리오 작업 말씀하시는 거죠?
네, 시나리오 쓰고 다음 달은 소설 쓰고 이런 식으로 번갈아가며 작업하고 있어요.
소설가 임성순, 시나리오 작가 임성순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도 소설을 쓰는 이유는 뭘까요?
소설 쓰는 게 재미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물론 힘들긴 한데요. 제가 되게 게으른 사람이거든요. 숨 쉬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요.(웃음) 글 쓰는 건 재미있어요. 힘들고 괴롭긴 한데 그래도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쓰는 것도 있고요. 시나리오 작업은 굉장히 대중적이고 여러 제약에 맞춰 써야 하거든요. 그러다보니 반대급부로 마음껏 쓰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그런 걸 소설에서 해볼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도 두 작업을 병행하는 게 은근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영화화된 소설은 다시 관심을 받고 널리 읽히기도 하잖아요. 마음껏 상상을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 소설이라면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작업은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할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제 소설들은 다 영화화하기 굉장히 어려워요. 물론 영화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굉장히 영화적이다 혹은 영화로 만들기 쉽겠다고 하시는데요. 예산 측면이라든가 엔딩이 상업적이지 않다거나 배우 캐스팅이 힘들거나 영화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 때문에 사실 영화화하기 굉장히 힘든 소설들이죠. 그래서 아직 영화화된 게 없을 거예요.(웃음)
욕심도 있지 않나요?
그런데, 영화화하고 싶다고 그런 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시나리오를 쓰면 되니까요. 물론 소설로도 쓰고 싶고, 영화화도 좋겠다는 얘기가 떠오르면 그렇게 작업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냥 소설 쓸 때는 마음대로 쓰고 싶어요. 그 두 가지가 우연히 겹치지 않는 이상은 아마 영화화하기 좋은 소설을 쓰는 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다음 나오는 소설도 아마 100% 영화화는 불가능할 거예요.
『극해』는 영화 이야기가 있지 않았나요?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예산이 엄청나게 필요한 소설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손익 분기점을 넘기기가 쉽지 않아서 영화화하기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배가 나오니까 짐벌(움직임에 관계없이 카메라를 일정한 기울기로 유지시키는 장치)이 있어야 하고, 남극 비슷한 곳에서 현지 촬영도 해야 하고, 필리핀 해전이야 어떻게 CG로 넘어간다 해도 그런 식으로 돈 들어갈 게 굉장히 많아서요. 물론 영화와 관련된 얘기가 많이 나오긴 했었어요. 영화사에서 몇 번 문의가 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이유에서 쉽지 않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세요?
아마 예의상 질문을 안 하셨겠지만 가장 궁금해 하실 부분이 이 얘기일 것 같아요. 경험담이냐(웃음). 사실은 그것에 대해 할 얘기가 굉장히 많은데 노코멘트라고 답하는 게 책을 파는 데 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자기 개발의 정석임성순 저 | 민음사
동시대적인 소재, 대담하고 독창적인 서사, 흡입력 강한 문장으로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작가 임성순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자기 개발의 정석』이 출간되었다. 상황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와 긴장감 넘치는 상황은 영화적 재미를 극대화하며 소설과 매력적으로 조화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