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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훈 교수“옳은 것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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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빚은 도자 그릇에 쌀 몇 톨이 외로이 흩어져 있다. 희미하게 그림자가 드리운 듯도 하고, 곁에서 내쉬는 누군가의 한숨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담담하고, 서글프고, 단정한 장면이다. 사진가 조성연의 사진 한 장이 『가장의 근심』이라는 책 제목과 만나니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한참이나 표지를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글로 들어간다. 사진을 꼭 닮은, 서글프고 단정한 글이 가득하다. 꽤나 두툼한 책인데 밀도가 상당하다. 『심미주의 선언』으로 문학과 철학, 미학을 탐색하며 삶의 심미성을 성찰했던 충북대 독문과 문광훈 교수는 이번 책에서도 음악과 책, 회화, 여행에서 찾은 앎의 기쁨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모든 장면에서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인간다운 삶을 깊이 고민한다. 제인 오스틴, 바흐, 윤동주 등 여러 삶과 작품을 만나고 그와 “영혼의 친밀성”을 느끼는 저자의 사유가 놀랍다. 결국 가장의 근심이란 밥벌이에 대한 근심에만 그치지 않는, 삶 자체에 대한 근심과 관심을 모두 포함하는 것일 터다. 

 

“삶이 훨씬 중요해요. 진선미의 추구도 삶에 복무해야 해요. 삶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것을 제대로 한다면 평화도 나오죠.”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문광훈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고양을 평생에 걸쳐 성찰해온 사람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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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관심 너머까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


표지 사진을 봅니다. 몇 톨의 쌀이 담긴 그릇이에요. 이를 테면 ‘가장의 근심’이란 밥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겠지요?

 

‘가장’이라고 하면 우선 한국 사회에서는 밥벌이를 해야 하죠. 생계에 책임을 져야 하고, 아이를 키워야 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들과 만나야 해요. 사회적인 여러 요구에 부응하는 일인데요. 사실은 가장의 근심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죠. 이 모든 활동에 보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의미도 있어야 할 것이고요. 말하자면 삶의 질적 고양에 대한 관심이에요. 때문에 가장의 근심에는 사회적 관심에 더해 초월적 관심, 형이상학적 관심이 다 들어가 있어요. 학자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것은 모든 사람이 삶을 살면서 가져야 하는 너무나도 자명한 요구 아니겠습니까. 가장의 근심을 사회적 관심 너머까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이런 게 필요할 것 같아요. 그게 중요해요.

 

‘가장의 근심’이라는 말에 덧씌워진 이미지가 분명 있잖아요. 밥벌이, 가족 부양 등이 그것인데 그뿐 만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거군요.


보람이나 의미를 추구한다 해도 그 바탕은 생계예요. 그러니까 생업의 근본성, 바탕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데요,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릴게요. 그러나 생업을 넘어서는 차원을 동시에 생각하는 문화도 중요해요. 지금 한국 사회는 물질적, 경제적 수준에 비해 삶의 질적 성격이 너무나 낙후되어 있어요. 이런 사회는 없을 거예요. 성실하게 사는 건 중요해요. 그걸 질타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성실성이나 근면성은 산업사회의 덕목이죠. 우리는 그 이상의 덕목이 필요한 사회 발전 단계에 들어섰어요. 그런데 덕성의 질, 성격을 고려하는 면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죠. 말하자면 정직성, 양심, 삶의 보편적 가치 말이에요. 평등, 자유, 관대함, 이런 것도 동시에 생각하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이야말로 선진사회잖아요.

 

한국은 경제 수준이 무색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곤궁한 삶을 살고 있어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렇습니다.


거기에도 여러 이유가 있죠. 그런데 그렇다고 성실성, 근면성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여러 차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여러 정치, 경제적 요인이나 역사적 요인 등의 면에서 어려운 점을 많이 겪었죠. 지리적 요인도 그렇고요. 너무 좁은 사회에 많은 사람들이 살잖아요. 거칠 수밖에 없어요.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있기 때문에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요. 분명한 것은 삶의 보람이나 의미의 추구, 사람 간의 관대와 신뢰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의 근심이라 했을 때 이 근심을 여러 차원에서 고려하는 게 좋고요. 다시 돌아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바탕은 생계라는 것, 이 사실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생계와 삶의 의미 추구 중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라고 거듭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플라톤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한 우리는 동물을 벗어나기 어렵다’라고 했잖아요. 플라톤이 아니더라도 지금 여기를 넘어서는 차원에 대한 관심, 이데아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 번뿐인 삶이 조금은 ‘할 만한 삶이었군’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번 산문집을 선생님의 음악론, 인생론, 독서론 혹은 여행기 등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도 같을 거예요.

 

그렇죠,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한 가지죠. 삶으로 수렴되어야 해요.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면 이와 관련한 사회 담론의 수준은 너무 앙상하지 않은가, 싶어져요.


잘 지적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성에 대한 담론은요, 피상적이고 일차원적입니다. 사회적인 것의 자원이 한국 사회만큼 얄팍하고, 피상적이고, 거친 데가 없어요. 어떤 것과 관련된 이외의 사람들을 전부 강요하고, 속박해서 한쪽으로 몰아가려 하죠. 사회적이라는 것은 비사회적인 측면까지 포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음악이나 독서,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삶의 일부로써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오래 가는 것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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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가 절대적으로 혼자다


책에도 학생들에게 ‘네 삶을 살아라’라고 말씀하신다는 대목이 나와요. 자기 삶을 진지하게 성찰한 사람만이 진정한 자기만의 삶을 사는 것일 테죠.


오늘날 대부분의 삶은 모방된 삶 아니겠습니까. 이미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외적으로 강제된 또는 선전된 삶을 우리가 반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행을 하고, 호소력이 있으니까 또 대중의 요구가 있으니까 그렇게 사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에요. 때문에 깊게 고민하지 않은 삶이죠. 되돌아 본, 곱씹어 본 삶은 아닌 겁니다. 비(非)반성적 삶인 거죠. 우리는 스스로 외롭게 결정한 것만을 책임지거든요. 외롭게 결정하지 않은 삶을 어떻게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한 번뿐인 삶에 대한 너무나 큰 불충실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은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유일무이함 때문에라도 각자가 아주 외롭게 고민 속에서 밤잠을 설치면서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을 살기 위해 외롭게 결정해야 한다는 말씀이 크게 닿습니다.


어제까지는 아니었는데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자기 삶을 산다, 이건 불가능하겠죠. 자기 삶을 살기 위해서도 엄청난 고민과 자기 단련, 외로움이 필요합니다. 그저 주어지지 않아요. 릴케는 ‘모든 진실하고 중요한 일에 있어서 인간은 이름 없는 혼자다’라는 말을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했습니다. 사랑도 그렇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도 인간은 혼자죠. 사랑 때문에 밤 새워서 고민할 때 혼자서 앓죠. 물론 친구와 이야기는 해요. 조언을 듣지만 결정은 혼자 하는 것이죠. 친구와 늦도록 이야기하고 혼자 들어올 때, 얼마나 공허합니까. 할 이야기를 다 못했기 때문이거든요. 가장 진실하고 중요한 일에 있어서 인간은요, 모두가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겁니다. 홀로 감당해야 해요. 더구나 가장 중요한 일은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죠. 아주 외롭고 쓸쓸하게, 두려움 속에서 말이에요.

 

너무 무겁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회피하고 싶어져요.


자기 직시는 용기가 필요해요. 신이 아닌 한 인간은 허술하고요. 어리석고, 욕심이 많죠. 욕심을 다 없애라는 말이 아니에요. 욕심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문제예요. 모든 걸 가질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해요. 그렇다면 포기할 것도 선택해야 하잖아요. 포기하는 건 아쉬운 거죠. 그러나 아쉬움에 대한 훈련도 해야죠. 각자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다고 한다면 각자의 적정선도 있을 거거든요. 그것을 알려면 자기를 알아야 하죠.


회화에서 자신을 정면으로 직시한 자화상을 그린 게 독일 화가 뒤러가 처음이거든요. 1,500년, 정확히 나옵니다. 근대의 탄생과 관련이 있죠. 이전에 그런 그림이 없는 이유는 왜일까요. 왕, 성직자, 예수, 이 정도가 등장하는데요. 그만큼 보통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직시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자기 직시의 삶을 못해서 되풀이의 삶, 껍데기로서의 삶을 살죠. 유령이죠. 가면으로서의 삶이에요. 너무나 뼈아프죠.

 

‘중고품으로서의 삶’을 말씀하기도 하셨죠. 이것을 항상 경계하고 자각해야 할 거예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만을 갖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거든요.


대부분의 삶이 껍데기의 삶이라고 한다면 그만한 불성실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한편 생각해보면 오늘날은 사실 근본적으로 상품 사회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소비자로서의 가장 깊은 정체성을 느끼게 되죠. 그런데 소비하는 인간만이 인간의 유형은 아니지요. 생각하고, 느끼고, 교제하는 감정의 인간이기도 하죠. 인간 자체가 스펙트럼으로 있어요. 우리의 생활이 소비에 있다고 해서 인간 삶의 가능성을 그렇게만 제한한다면 그것 역시 인간에 대한 몰지각이라 할까요.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중고품이 아닌 삶을 산다는 것도 갈수록 어려울 것 같아요. 이런 경쟁 사회에서 자기를 잃지 않는 것, 자기 가치와 기준을 지키고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사실 손해 보는 삶이거든요.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손해 볼 용의가 조금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손해 볼 용의요.


이익을 포기할 수는 없죠. 그러나 인간의 모든 관계가 이해와 수익의 관계만은 아니죠. 그것은 인간 가능성에 대한 너무나도 얄팍한 접근 아니겠습니까. 저로서는 자기를 잃지 않는 것,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 것, 이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는 게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두 번의 수업이나 교양강좌를 듣고 혹은 책을 읽고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평생을 거쳐 만들어가야 하는 과정이죠. 만드는 과정을 독일어로 ‘bildungsprozess’라고 합니다. ‘bildung’은 ‘교양’이라는 뜻이에요. 말하자면 ‘Life as building process’죠. 평생 노력해야 하는 거예요. 퇴계 이황 선생도 말씀하셨어요. ‘잠구묵완(潛求默玩)’이 ‘종신사업(終身事業)’이라고요. 깊게 물속에 들어가 구하면서 조용하게 실행하는 것을 몸이 다하도록 행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정말 맞는 이야기죠. 

 

교육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데요. 최소한 삶을 대할 때 이와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 정도는 더 일찍 교육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시민교육, 교양교육 말이에요. 저만 해도 이런 내용에 대한 교육적 감화를 받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

 
없습니다, 저도 없고요. 우리 교육 시스템의 부재라고 할 수 있죠. 당연히 모든 문제, 교양뿐 아니라 문화, 사회, 개인성 문제 등이 전부 다 일종의 그물망 속에 있어요. 구조적 요인이라는 말이에요.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여러 조언을 줄 수 있겠죠. 이것이 가능하고, 이것은 좋은 점이 이것이고, 안 좋은 점이 이것이다, 라고요. 그러나 선택은 네가 해라, 라고 하는 바로 이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결정을 부모가 해서 주면요, 그때부터 망가집니다. 책임을 안지거든요. 내가 결정을 안 하는데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데요. 결정의 외로움과 책임의 의무, 이 두 가지가 반드시 들어와야 건전한 자아가 만들어집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라고요. 어떤 일이든 두세 번 고민하라고요. 이건 정말 중요해요. 말하자면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하는 겁니다.

 

‘문화’에 대해 쓰신 글의 부제가 ‘마음의 밭갈이’죠.


한국은 지적, 문화적, 정신적 전통이 약하기 때문에 세련된 이론이 있으면 한꺼번에 몰려와서 우리를 다 집어 삼켜버려요. 문화론도 그래요. 문화라는 것이 삶의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이 참 없더라고요. 인간의 활동 가운데 의미 있는 활동을 문화라고 하죠. 결국 각 삶을 질적으로 고양시키는 데 기여해야 해요. 문화론은 문화 이론의 탐구나 추구가 아니에요. 문화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지금 나의 삶의 고양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것이죠. 결국에는 자기 삶을 경작하는 일이어야 해요. 그런데 너무 무책임하고 공허한 문화론이 많아요.

 

 

염정자수(恬靜自守)


책에서 언급한 여러 인물들의 공통된 특징이 읽힙니다. 조용함, 성찰하는 자세, 헤아림, 신중하고도 밝은 마음, 고요한 쾌활성 등이 그것인데요. 그렇다면 이것들은 선생님의 자기 탐구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하나의 모델이 될 만하지 않나 싶어요. 소포클레스를 읽었을 때 그것이 확연히 드러나요. 소포클레스를 읽으며 헤겔이 『미학』에서 고요의 쾌활성(die Heiterkeit der Ruhe)을 짚어냈어요. 어수선할 때는 어떤 것에도 성실하기 어렵죠. 우선은 차분해져야 해요. 그러나 차분만 있으면 재미가 없죠. 삶의 생기를 잃을 가능성이 있어요. 한편 쾌활함만 있으면 깊이를 획득하기 어려워요. 두 개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공재(恭齋) 윤두서 선생의 글에 ‘염정자수(恬靜自守, 평온하고 고요한 가운데 자신을 지킨다)’라고 했거든요. 윤두서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아들이 행장(行狀,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 그렇게 적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자기를 지키면서 사셨다고요. 그 구절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은 퇴계 이황 선생도 그랬다고 해요. 논어에도 그런 글이 나오고요.

 

여러 해 쓰신 글들인데 틈틈이 한국 사회의 여러 장면을 다루고 괴로움을 말씀하셨어요. ‘규범의 전적 망실 상태’라고도 하셨는데요. 특히 요즘, 많은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것 같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시나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경제발전을 ‘압축 성장’이라 한다면, 오늘날의 갈등도 ‘압축적’이라 해야 할 겁니다. 어떤 사건이든, 한두 가지 요인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오랜 병리적 결과일 거예요. 확실한 것은 지금의 정치사회적 불안이나 파행이 어떠하건, 우리 사회가 앞으로 오랫동안 불공평과 특권을 줄여가면서 더 투명하고 너그러운 공동체 구조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무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대우 받거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해요. 여기에서 핵심적 가치는 ‘주권재민’이나 법의 지배, 공직자의 윤리, 그리고 노동의 가치에 대한 존중 등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 삶에 정치적 차원을 넘어가는 더 넓고 더 높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 예술이나 문화의 작업은 바로 이 미지의 차원에 관계하지요. 매일 매일의 인간 삶은 몇 가지 개념이나 술어로 고갈될 수 없는, 어떤 고결함과 신비 그리고 존엄성의 영역입니다.

불안감도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한국 사회의 합리성 수준이 높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전보다 제도가 많이 구비되어 있잖아요. 제도를 기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일 겁니다. 그렇다면 가장 작게 이야기해서 스스로가 정직한 말과 생각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죠. 거짓말을 두려워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 하고, 어떤 점에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양심상 하지 않겠다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야 해요. 그런 사람 자체가 이미 시민 아니겠어요. 가장 소극적 의미에서 시민이라는 것은 자기의 일을 남이 보건 보지 않건 거짓 없이 행하는 사람일 겁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남이 보든 안 보든 삼가는 것,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쉽나요? 어렵습니다. 사회의 대다수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한 것은 이것 같아요. 제자리에서의 직업적 성실성, 정직성이 윤리의 출발이라는 거죠.

 

시민이 되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이란 반성적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 훈련을 하는 게 교양훈련이고요. 문화나 인문학의 방향도 결국 그쪽으로 가야하지 않나 싶어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금 여기로부터, 자기 기쁨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하고요. 이기적이거나 자폐적이 되라는 게 아닙니다. 자기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의 기쁨을 늘 주의하고 돌아본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삶은 아닐 겁니다. 바른 의미에서의 개인성의 역사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서구 근대 사회를 추동시킨 것은 각성한 자유 개인의 역사거든요. 그게 시민이고요. 우리 사회는 그 개인을 너무 간단하게 보고 있고, 개인성의 역사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부족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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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를 울리는 삶


제인 오스틴에게서 세 가지 측면, 따뜻한/명료한/손상되지 않은, 을 읽으셨습니다. 선생님의 세 가지 측면을 꼽는다면 어떤 면모일까요?


저는 물론 따뜻하지 않고요.(웃음) 언어의 명료성은 추구하죠. 상투적이라면 중단한다는 원칙은 있는데요. 삶의 손상은 불가피합니다. 감각이나 사고나 사람에 대한 관계에 갈등은 불가피한 것 같아요. 받아들여야죠. 삶은 시간이 갈수록 닳죠. 뼈아프죠. 그러나 상처 속에서도 삶에 대한 느낌을 아이 때처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권장할 만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손상은 불가피하지만 자신을 여린 형태로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를 넘어서는 점에 대해서는 체념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나 자신은 진선미를 향해, 조금 더 진실하고, 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아름다운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쉽지는 않지만 놓치지 않으려는 고민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삶의 모델이 될 만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메아리를 울리는 것 같아요.

 

글을 쓰는 일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문학을 해서 그런지, 비관적이어서 그런지, 삶은 기본적으로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생각해요. 글을 쓰는 이유는 정직하게 말하면 부질없음과 헛됨, 허황됨을 이겨내는 방식이죠.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풍화되잖아요. 거창하게 말하면 시간의 풍화를 견디는 방식이에요.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꿈꾸고 그리워하잖아요. 시간 속에서 시간 밖을 꿈꾸고 상상하고 그리워하는 행위가 글 쓰는 일이죠. 그래서 이 삶을 견디죠. 그렇지 않으면 사실은 심각하게 말하면 저는 별로 살 이유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에요. 그런 점에서 근본주의자죠. 인간 삶의 근본적인 소멸성에 대한 의식, 그것을 넘어서는 가능성과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지평에 대한 꿈꾸기, 그런 것이에요.

 

독자가 이 책에서 단 한 가지, 이것만큼은 꼭 가져갔으면 하는 내용이 있을까요?


진선미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깊게 생각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데 있다는 말인데요. 이 책 어느 쪽을 펼쳐도 제 고민이 녹아있기 때문에 그런 속에서 삶이란 이런 거구나, 나날의 일상 혹은 풍경이 이런 거구나, 제인 오스틴이나 바흐는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죠. 어제까지와는 다르게 오늘 새롭게 감각의 신선함을 잠시 경험했다면 저로서는 기쁠 거예요. 삶의 생기를 느끼는 데 기여하고 싶은 거죠. 우리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풍요로워요. 한국의 전체적 구조가 이렇게 낙후되고 사람을 실망시키고 화나게 하잖아요. 그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만해요. 그런데 그 이전에 우리 삶 하나만 봐도 삶은 경이로운 겁니다. 우리가 살아서 얘기하고, 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 아니겠습니까. 한국의 담론은 너무나 거창하고, 너무 사회적이고, 너무 강제된 형식이 많아요. 저는 불편해요. 그건 얕은 사회죠. 옳은 것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옳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곁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야 합니다. 훨씬 더 깊은 설득력이죠.


 

 

가장의 근심문광훈 저 | 에피파니
이 책을 읽다 보면 우선 방대한 인문학적?예술적 지식들을 간접 체험하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어렵지 않고 전혀 지루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상쾌하고 재미있다. 무엇보다 『가장의 근심』의 저자는 지식을 뽐내지 않는다. 설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정갈한 문장으로, 다만 나지막하게 속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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