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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 기자야말로 ‘프로불편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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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불편러’는 어떤 상황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나 불평등을 이유로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보통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군다는 부정적인 말로 쓰인다. 그러나 <아이즈> 취재팀장 위근우는 오히려 프로불편러라는 말을 불합리함과 부담함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에 대한 자기 긍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프로불편러 일기』는 <아이즈>에 실린 기사 중 그의 시각이 여실히 드러난 글을 엮은 책이다. 대중문화를 다루는 잡지의 기자이지만, 대중문화라고 해서 언제나 하하 호호 웃고 즐거울 수만은 없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문화 영역을 누구보다 빨리 이슈를 짚어내고 공론화시켰다는 점에서 위근우는 분명 훌륭한 기자다.


“기자라는 직업은 필연적인 프로불편러여야 한다. 세상에 대한 기자의 문제의식이란 예민함의 다른 말이다. 기자는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의 실체를 논리적으로 실증적으로 검증하고 그 검증의 과정을 정돈된 언어로 재구성해 세상에 피드백할 수 있어야 한다.”
- 5쪽

 

위근우_셀렉 (1).jpg

 

기자라는 직업의 사회적 책임


제목을 신조어로 써서 강렬하다 싶었습니다. 제목을 이렇게 짓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제까지 쓴 글을 모아 놓고 보니 불편하다고, 이건 좀 아니라고 말한 글이 많더라고요. 현상이나 사람, 방송 프로그램도 많이 비판했고요.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작업이 ‘프로불편러’의 시각으로 쓴 건 아니에요. 하지만 기자란 직업이 불편한 일을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적어도 이제까지 제 작업이 ‘프로불편러’와 동떨어진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었죠.


말씀하신 대로 비판한 글이 많았잖아요. 반발하는 반응은 없었나요?

 

생각해보면 책에 처음부터 나오는 게 일베예요. 당연히 일베 쪽에서는 안 좋아했던 거로 알고요. 메갈리아4 티셔츠 이야기하면서 ‘오늘의유머’ 사이트를 비판하기도 했어요. 댓글이나 SNS로 욕을 많이 먹었죠. 당사자의 반발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진중권 씨나 이동진 씨한테도 어느 정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요.


두려움까진 아니었겠지만, 글을 쓰면서 파장을 예상한 적도 있나요?


글은 파장이 있으면 좋죠. 하지만 우선 제가 성의 있게 비판한다면 저쪽에서도 성의 있게 반론할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선의라고 할 수 있죠. 비판하는 대상이 마음이 상하거나, 그분들의 반론에 제가 마음이 상할 수는 있겠지만 비판자와 비판 대상의 감정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이러저러한 점이 기분 나쁘다고 말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어떤 점을 비판적으로 보는지 쓰는 사람이잖아요. 제 의견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담론이 부딪치는 걸 보면서 숙고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보면 대립은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글의 파장이 클수록 기자도 주목받죠.


전 직장인 <텐아시아>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엔터테인먼트 관련 글을 썼는데, 그때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아이즈>에서 2015년 이후부터는 그 생각을 버린 것 같아요. 그 마음으로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졌어요.


세 가지 이슈가 기자라는 직업의 사회적 책임에 고민한 계기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첫 번째로 정치가 엔터테인먼트 형태로 소비되면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은 다른 맥락이지 않나요?

 

최근 들어 흔히 말하는 피씨함(politically correct:정치적 올바름)이 생활의 영역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있지만, 사실 정치 분야야말로 가장 정치적 올바름이 추구되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정치는 옳고 그름이라는 게 너무나 중요하잖아요. 가령 한 사람의 과격한 호모포빅한 발언보다는 차별금지법이 시기상조라는 정치인의 점잖은 한 마디가 더욱 그릇된 효과를 가져오죠. 예의 바르냐 아니냐, 재밌냐 아니냐, 솔직하냐 아니냐 같은 범주로는 정치인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어요. 만일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라면, 웃고 떠들면서 친숙하게 만드는 방식이 옳은 방식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겠죠.


대중문화를 표방하는 잡지에서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도 독자들 입장에서는 새로울 수 있겠어요.


<텐아시아> 때도 웹툰을 많이 다뤘던 이유가 TV만큼이나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 영역이 됐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어느 순간 정치가 엔터테인먼트가 됐어요. 그 전에도 <나꼼수>가 있었지만, 정치가 엔터테인먼트화 된 데에는 <썰전>이 컸다고 생각해요. 일차적으로는 사람들이 재밌어하는데 안 다룰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함부로 다루면 큰일 나죠. 당장 지지자들이 분노할 수도 있고요. 만일 분노가 일어났을 때 정말 내가 떳떳할 만큼 비판하려면, 정치적 올바름은 필연적으로 고민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사회적 책임을 고민한 계기 중 두 번째가 세월호였어요. 나보다 어린 세대를 위해서 기자로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이 드셨다고 했는데, 그 전까지는 기자님 세대를 어린 쪽에 두고 계셨던 건가요?


지금도 제 나이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아요. 기성세대를 까는 건 쉬워요. 나는 피해 세대고, 저 낡은 무리가 내 기득권을 뺏어 갔다고 손가락질하기 좋은 포지션이죠. 기존에 제가 가진 비판적인 입장의 기사도 어쩌면 그랬을 수 있고요.


물론 10대 친구들이 배에 탄 건 우연이겠지만, 세월호가 그렇게 되고 나서 국가가 손을 놓고 이렇게까지 유족이 원하는 바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 자체가 너무 이해가 안 됐어요. 제가 비록 조그마한 매체의 기자지만 10대나 20대에게는 그만한 발화 공간도 별로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제일 열심히 하는 기자들이 다 제 또래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이미 꽤 자리 잡은 상황에서, 우리 세대가 뭘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겠구나 싶었어요. 기성세대 비판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제는 제가 가진 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대중문화 기자라는 입장이 특이할 것 같아요. 언론의 책임이나 기자의 책임을 묻는 건 시사 쪽 기자인 경우가 많잖아요.


국정농단이 일어났을 때 흔히 언론은 뭐했냐고 비판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 대중문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거나 저열해졌을 때 언론은 뭘 했냐고 물어야 해요. 연예 매체 기자들을 ‘기레기들’이라고 하는데, 분노의 표현으로 이해는 해요. 하지만 너무 당연히 연예 매체에는 딱히 기대할 게 없다고 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시사 문제에서 언론은 뭐 하고 있었냐고 묻는다는 건 언론이 계속해서 감시할 필요가 있고, 그런 게 좋은 언론이라는 합의가 깔려있잖아요. 하지만 대중문화 쪽에서는 ‘너희가 그렇지 뭐’ 정도 밖에 안 나오거든요. 그보다는 조금 더 유의미한 생산적인 피드백이 있어야 좋은 기사를 쓰고자 하는 동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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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페미니스트는…….


마지막 계기를 온라인 기반의 대중적인 페미니즘의 부흥으로 꼽아주셨는데요. 농담으로 ‘남성 페미니스트는 유니콘보다 귀하다’는 말이 있어요.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위치가 특이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적긴 적겠죠. 가부장제가 체화된 나라라서 그런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고, 자기가 페미니스트인지 모르는 페미니스트도 있어요. 또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에 동의할지언정 발언하는 건 뜨거운 문제가 됐고요.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으로 주로 문장을 시작하죠.


그런 발언도 많고요. 확실히 트위터에서 페미니즘 이슈를 놓고 치고박는 걸 보면 남자 페미니스트에 대해 반발도 많은 것 같기는 해요. 그것과는 별개로 불필요할 정도의 애정과 과대평가도 받아요. 잘 인식해서 받아들여야죠.


남자 페미니스트가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에 끼칠 수 있는 ‘실천적’ 해악에 대해 발언하신 적도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의 해악이에요. 기본적으로 남자 페미니스트가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입장이거든요. 페미니즘 이슈에서의 당사자성을 볼 때마다 느껴요. 제가 미처 몰랐던 것들이 너무 많아요. 가령 여성들이 당하는 추행이 얼마나 많은지를 진짜 모르는 거예요. 남자 페미니스트는 여자들이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면서 느끼는 불안감과 공포가 짐작도 불가능한 거라는 건 알고 있어야 해요. 그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언하면 어떤 부류의 여성을 지울 수 있어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여전히 남성중심주의적인 선에서 구성되어 있었다는 걸 느끼고 나서는 확실히 발언을 줄이고 더 많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억울해하기도 해요.


소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한남들은 다 닥쳐’ 하는데 서운해하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있어요. 되게 부질없는 것 같아요. 여성들이 한국 남자, 특히 진보나 페미니스트를 표방하는 남자에게 실망하거나 불신하는 건 그들의 경험을 종합해 볼 때 합리적이거든요. 그렇다면 남자 페미니스트들은 왜 우리를 안 믿어주냐고 할 게 아니라 묵묵히 페미니스트로서 노력하면 돼요. 누구한테 사랑받으려고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페미니즘은 옳은 거예요. 한국 사회는 분명 여성들에게 불평등하고, 잘못된 걸 고치자고 말하는 건 별다른 논증이 필요 없거든요. 억울해할 필요도 툴툴댈 필요도 없어요.


페미니즘이 여자 대 남자 대결 구도가 되는 것도 우려하게 됩니다.

 

가령 담론장이라는 게 제로섬 게임도 아니고, 남자가 발화한다고 해서 여자의 발언권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지 않냐는 이야기가 있어요. 줄어드는 게 맞아요. 왜냐하면 제가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면 유니콘 취급을 받으니까요. (웃음) 유니콘 취급을 받으면 인터뷰를 한 번 더 할 수도 있겠죠. 당장 발언들이야 한 마디 더 했다고 해서 여성들의 발언이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지면을 제안받거나 강의를 하면 그 순간 제로섬 게임이 돼요. 그런 유혹에서 남자들은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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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의 방향


엔터테인먼트계, 대중문화계에서도 페미니즘 이슈가 계속 중요해질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적지 않은 문화 소비자층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됐어요. 그들은 계속해서 많은 걸 불편해할 거고 피드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없는 것처럼 취급할 수는 없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대중문화를 다룬다고 했을 때 기준을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그렇죠. 사실 지금 다루는 내용도 엄청 커졌어요. 그래서 오지랖 넓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고요.


<아이즈>의 범위는 어디까지가 되는 건가요?


매체는 독자가 원하는 것과 독자가 알 필요 있는 것, 두 가지를 늘 충족해야 합니다. 핫한 주제는 분명 있어요. 정치 이슈나 페미니즘 이슈는 기사를 내면 실제로 조회수랑 반응도 많이 나오죠. 그런 민감한 주제에 관해 기자가 얼마나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느냐는 중요한 한계기는 해요. 기자가 실제 연구자만큼 전문적으로 쓸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을 올바르게 다루는 게 독자들에게 필요한 문제라는 건 편집장 이하 내부에서는 다 공유된 것 같아요. 대중적인 어법 안에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 판단하고 할 수 있겠다 싶은 걸 쓰는 거죠.


굽시니스트와 장도리를 비교하면서 ‘이겨내는 것’과 ‘견뎌내는 것’의 차이를 말씀해 주셨는데, 지금 <아이즈> 방향과 맞닿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아이즈>가 나가서 싸우자는 운동 매체는 아니잖아요. 오히려 견뎌내기 위해 즐거움을 주자는 입장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향이 맞는데, 많이 못 했어요. 당장 페미니즘 이슈만 해도 즐겁게 다루고 싶은데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로는 즐겁게 다룰 수가 없어요. 그걸 어떻게 즐겁게 다룰 수 있겠어요. 즐겁게 만들고 싶은데 못 그럴 일이 너무 많아요. 세월호 이후로는 뭘 해도 어렵고요.


다른 매체에 비해서 자본의 영향을 더 받는 매체로 보이거든요. 편집권이 독립된 게 가장 크기도 하고요. 지원을 받는 곳이 있나요?


모기업이 편집권에 대해서는 상당히 독립을 보장해주고 있어요. 다만 지금 상태로 매체를 유지할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민하고 있어요.


모여 있는 필진도 ‘프로불편러’의 시각이 뚜렷해요. 개개인의 능력이 주목받는 매체인 것 같아요.


취재팀장으로서 중간에 퇴사한 친구들이 몇 있어서 아쉬워요. 기존부터 같이 일했던 상당히 검증된 기자 외에 새로 온 사람들의 능력치를 끌어올리는 부분에서 제가 선배로서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특별한 예민함은 아닌 것 같아요


‘프로불편러’의 시각이 자신에게도 적용되나요? 자아 성찰이라든지요.


불편하다고 느낀다면 둘 중 하나예요. 본인이 틀렸거나 남이 틀렸거나. 그러려면 당연히 자기 걸 한 번 더 봐야 하죠. 자기가 가진 인식적 틀이 옳은가? 결국 제가 불편함을 느끼는 인식적 토대를 읽어내야 전문적인 ‘불편러’로서 어느 정도 제가 틀린 게 아니고 저게 잘못됐다는 확신으로 이야기를 해나갈 수 있겠죠.


어떤 사건이나 사회적 현상에 예민함을 가지는 기준이 있나요?


성격적인 부분이 확실히 중요한 것 같아요. 신념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사실 상당 부분 성격의 문제더라고요. 제 성격이, 불편한 걸 못 봐주는 거예요. 하지만 저만 유별나게 불편한 내용이었다면 책을 내지 않았겠죠.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이라면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다 동의할 거예요. 어떤 특정한 성이기에 더 많이 범죄에 노출되는 불평등이 벌어져요. 생득적인 이유로 누군가가 더 많은 불의를 감수하면 안 되잖아요. 이런 부분에서 ‘쟤는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반응할 부분이 없지 않나요? 그게 특별한 예민함은 아닌 것 같아요. 평균적으로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 게 정말 보편적인 가치를 담보하고 있는가, 이 정도로만 질문하는 거죠.


성격이 예민한 편이라면 남들보다 힘들 것 같아요. 불편한 것들이 자주 보이잖아요.


멘탈이 예전보다는 많이 강해진 것 같아요. 재밌는 것도 많아졌어요. 전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들으면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가 아프면서도 웃기기도 하고요.


불편한 이슈들을 빨리 찾아서 기사화하는 것도 큰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보거든요.


그렇죠, 남들 쓰기 전에 이슈를 짚어내는 게 중요해요. 속도 경쟁에서 숙고할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주간지는 속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매체거든요. 무언가 새로 나온 이슈에 사실 많은 함의가 있다면 우야무야 놓쳐서는 안 되는 거죠.


기삿거리나 기획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방법이 있나요? 트위터를 자주 보신다던가요.


사회 이슈는 아무래도 확실히 트위터가 빠르니까요. 엄청나게 빠르죠. 오늘 아침에 누군가 추앙받으면서 알티(리트윗) 되다가 오후쯤 조리돌림 당하는 곳이잖아요. 빠른 것도 있고, 확실히 미처 생각지 못했던 관점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TV 프로그램도 자주 보시는 편이죠?


첫 방송 하면 바로 봐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아요. 사람들 반응을 살피고 보는 편이에요. 많이 보긴 봐야 하는데, 그때마다 예능 프로그램이 재밌게 보기 어렵더라고요. 지금은 불편한 게 많아요.


SNS의 짧은 뉴스 동영상 같은 새로운 매체도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편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열심히 보지는 않아요. 확실히 저는 여전히 글이라는 방법으로 담론을 만들어내는 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글은 생각을 정리해서 발화하는 데 명확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우선은 거기에 집중하고 싶어요.

 

위근우 (6).jpg

 

세상을 보는 눈


‘생업에 바쁜 이들을 대신해 성실하게 담론을 구성하고 역동적인 공론장을 여는 것’(98쪽)이 지식인과 언론의 역할이라고 하셨어요.


계몽 같은 걸 이야기할 때마다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들어요. 저는 지식인의 역할이 우월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분업이라고 보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어떤 직업의 당위라는 건 사회적 분업의 결과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들 생업에 바쁘고 상황만 봐서는 안에 있는 것들을 판단하기 어렵단 말이죠. 가령 파업이 일어나요. 그냥 보면 저 사람들은 내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잖아요. 저들이 왜 여기 나왔는지 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보려면 자료 조사도 해야 하고 전문가 멘트도 들어봐야 하고 오래 걸리겠죠. 기자는 그런 걸 대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넘어서서 독자들이 자신의 불편함을 인식하고 독자들도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도 쓰셨어요.


불편함이 왜 일어난 것인가, 이것은 온당한가 하는 질문을 분업 차원에서 고민하고 정제된 언어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일차적인 ‘프로불편러’의 역할이라면, 그다음으로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불편해지는 게 있겠죠. 미처 몰랐던 것들을 더 많이 알게 되면 세상 보는 눈이 많이 달라질 것 같아요.


방송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감수성이 중요한 재능이라고 하셨는데요.


정치적 올바름과 재미의 문제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걸 보고 웃긴 어려울 것 같아요. 가령 <마음의 소리>의 팬이고 지금도 계속 보지만, 얼마 전 에피소드에서 형 캐릭터가 여자친구 머리를 때리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게 조석 작가의 장르적 문법이라는 걸 알지만 문법이라고 넘어가는 게 맞는 걸까, 불편하고 찜찜한 거죠. 마음 놓고 웃을 수 없는 부분을 계속 안고 있어요.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의 대상화 문제도 찜찜한 영역 중 하나일 것 같아요.


쇼비즈니스에서 어느 정도 대상화는 분명 있어요. 불편함의 상당 부분은 실제로 쇼비즈니스를 지탱하는 규칙이기는 해요. 하지만 합의된 규칙이니 넘어가야 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강연 시장에서 힐링이 사고파는 재화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쇼 비즈니스에서는 아이돌이 주는 환희, 귀여움, 잘생김, 섹시함, 열정 등등이 재화로 판매됩니다. 넓게는 인간적인 가치의 상품화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서로 거래를 통해 얻고 싶은 걸 얻고 딱히 피해 보는 사람이 없다면 허용 가능한 범위를 모색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니’라는 기준을 고민하고 있어요. 대상에 대한 요구가 모순적이라거나, 인격에 대한 모욕이 되거나, 롤리타 콘셉트처럼 해당 대상을 넘어선 특정 다수에 대한 실천적 해악을 끼치는 것들에 대해서요.

 
계속 ‘프로불편러’로서 기사를 쓰신다면, 앞으로 쓰고 싶은 내용이 있나요?


지식 셀럽 관련해 쓰고 싶었는데 최근에 썼어요. 그분들이 가진 역할은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데, 학자들의 전문 분야가 있고 대중적 지식인이 할 수 있는 범위가 있어요. 어느 순간 역할을 넘어설 때 가짜 지식이 유통되는 게 더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정보는 엄청나게 쏟아지는데 여기서 진짜와 가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해 내는 게 중요해졌어요. 그걸 수용자한테만 맡길 수는 없으니 전달하는 미디어에서 조심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옆에 있는 매체에서 계속 딴죽을 걸어야겠죠.


책을 누가 읽었으면 하나요?


‘나만 불편한가?’ 싶은 사람들이요. 명절에 친척들을 만났는데 나는 도저히 웃을 수 없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다들 웃고 있을 때, 윗사람의 농담이나 잔소리를 들었을 때 굉장히 불쾌한데 나만 불쾌한 것 같을 때, 평소에는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인데 페미니즘 이슈가 나오자마자 메갈이냐고 묻는 친구들 때문에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로불편러 일기위근우 저 | 한울
여성혐오와 일상의 폭력이 난무하고 “여전히 전근대적인 정치의식이 지배력을 발휘하고 반지성적 선동이 소위 정치적 진보 진영 안에서도 등장”하는 지금 이곳이 불편하지 않은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기자라는 직업은 필연적인 프로불편러”여야 한다고 말하는 웹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위근우가 섬세하고 치열하게 3년 반 동안 써온 글 85개를 선별하여 『프로불편러 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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