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클』에는 ‘신경림 시인이 가려 뽑은 인간적으로 좋은 글’ 40편이 실려 있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가슴에 와서 쾅 닿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글들”의 모음이다. 일상에 대한 고백과 성찰로,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으로, 치열한 예술혼으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40편의 수필은 각기 다른 이유로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이상, 정지용, 박목월, 김소월부터 최인호, 류시화, 박민규, 함민복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학계의 버팀목이 되어준 작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중섭, 이어령, 장영희, 신영복, 손석희 등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의 글을 한 데 모았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의 수필에서는 삶을 끌어안는 뜨거운 마음이 느껴진다.
시인은 말을 아꼈다. 이처럼 눈부신 작품들을 어떤 순간에 만나게 됐는지, 그 안의 무엇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는지,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는 자꾸만 시인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지금의 자신을 이루는 글들, 혹은 한 때의 나를 지탱해 주었던 글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그렇게 한 사람의 독자에게서 시작된 ‘반추의 작업’은 점점 더 많은 독자들에게 퍼져나간다. 『뭉클』은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라 할 만하다.
가슴에 와서 쾅 닿았던 글들이에요
『뭉클』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강렬하게 다가오면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것 같아요. 제목은 직접 지으셨나요?
읽을 때 ‘뭉클’하고 제 가슴에 와 닿았던 글들을 모은 것이니까, 그런 뜻에서 제목을 짓게 된 거죠.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뭉클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문학적이거나 강압적인 것도 아니고, 뭔가 가슴에 와서 쾅 닿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글들이었죠.
그런 글들을 만날 때는 어떻게 하세요? 필사를 하시거나 책장에 표시를 해 두시나요?
따로 모아둔 건 하나도 없어요. 제목만 기억했다가 찾은 거죠. 이 책에 실린 글 중에도 어렸을 때 읽고 나서 처음 대하는 글들도 많아요. ‘아, 그 글을 찾아야겠다’ 해서 찾은 작품들도 있고요.
책의 서문에서 출간 이유를 밝히셨어요. “시라면 좋은 선집이 많이 나와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꺼내 읽을 수가 있지만, 산문은 그렇지 못해 늘 아쉬웠다”고요.
나 자신도 이런 글을 다시 찾아보려고 하면 어디서 찾아야 될지 모르니까 못 찾고 있거든요. 이렇게 엮으면 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좋은 글을 대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책을 만들기까지 젊은 시인들이 많은 도움을 줬어요. 제 기억 속에 있던 글들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줬죠.
그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막상 찾고 나면 실제 글과 기억 속의 글이 다른 경우도 없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책 속에 들어가지 않은 글도 있고요. (끝내) 못 찾은 글도 없지 않아 있죠. 어릴 때 읽는 것이 반드시 올바로 읽은 건 아니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대체로 그때 감동을 받았던 글들은 지금도 뭉클해요. 받아들이는 감성은 그때와 지금이 다르기는 하겠지만요.
“글을 선選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문학적’이 아니고 ‘뭉클’임은 말할 것도 없다”고 쓰셨습니다.
문학적이라는 게 기준이 된 건 절대 아니죠. 그냥 문학 공부를 하는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로서 읽은 거니까요. 문학적인 기준과는 상관없죠.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문학적인 것과 기준이 같을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어리석은 질문입니다만, ‘그렇다면 문학적인 것은 무엇인가’ 궁금해집니다. 문학에서 부수적인 것들을 다 덜어내고 나면 최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문학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 마디로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정서만 가지고 문학을 하는 건 아니고요. 문학이라는 건 껍데기가 같이 있는 거죠. 알맹이만 덜어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죠.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 자체도 문학적 본질이에요.
우문현답입니다(웃음). 선생님께서는 이 수필들을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대개 중고등학교 때 읽은 글들이에요. 대학 들어와서 읽은 글도 몇 편 있지만 대체로 고등학교 때 읽은 글들이에요.
그래서인지 『뭉클』에 실린 글 가운데에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나신 분들의 작품이 많아요.
그런 분들이 남긴 글 가운데 좋은 글들이 참 많잖아요. 흘려 보내기가 너무 아깝죠. 이런 글들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책이기도 해요. 우리 손주들한테도 그런 글들을 콕 짚어서 ‘이 글은 꼭 읽어 봐라’ 이렇게 말해요.
좋은 글의 감동을 시간을 뛰어넘는다
청춘 시절에 읽으셨던 작품들이 많다고 하셨는데요. 다시 보시면서 그 시절이 그리워지지는 않으셨어요?
그 시절이 그립다기보다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감동스러운 글들이 참 많아요.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글을 대하는 감성은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돼요. 좋은 글은 언제나 감동을 주죠. 금방 와 닿고 유행처럼 돌아다니는 글들은 오래 가지 않잖아요. 진짜 좋은 글이 주는 감동은 시간을 뛰어넘어서 오래도록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인의 마음은 다를 것 같습니다만, 보통 사람들은 젊었을 때의 민감했던 감성이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니까 슬픈 것 같아요.
시인도 당연히 그렇죠. 무뎌지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다만 늙으면 늙는 대로, 젊을 때와는 다른 또 하나의 감성이 있는 거죠. 젊을 때는 가지거나 느끼지 못했던 감성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거니까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는 거고요. 젊을 때의 빼어난 감성만 옳은 게 아니잖아요. 나이 들어서 둔해진 감성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눈 또한 훌륭한 데가 많죠.
책에 실린 수필 중에서 최인호 소설가의 「나의 소중한 금생今生」, 박목월 시인의 「평생을 나는 서서 살았다」에는 나이 듦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어요. 다시 읽으시면서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어떠셨어요?
‘역시 그 나름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물론 나하고 시각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그 나름으로 호소력도 있고 재미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취향하고 일치해야만 좋은 글이 아니잖아요. 세상을 보는 눈이 나와 달라도 다 좋은 글들이죠.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재밌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좋은 글들을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나가는가, 어떻게 아름다운 감정들을 섞으며 살아가는가’ 하는 생각도 들죠.
『뭉클』에 수록된 작품들은 서로 다른 요소로써 뭉클함을 안겨주는 것 같아요.
그렇죠. 다 다르죠. 그게 글의 매력이죠. 뭉클하게 해주는 요소가 똑같다면 재미없잖아요. 이렇게 뭉클하게 해주고 저렇게 뭉클하게 해주고, 그렇게 다 다르면서 사람이 사는 것도 보여줘요. 거기에서 오는 뭉클함이 있죠. 문장이 아름다워서 뭉클한 작품도 있지만 어느 한 대목만 가지고 뭉클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전체적으로 주는 느낌이 뭉클한 글들이 많죠. 그러니까 우리가 옛날 산문들도 빠트리지 말고 읽어야 되는 것 같아요. 외국에서는 아이들한테 문장을 가르칠 때 옛날 글들을 읽게 하거든요. 우리가 살아온 삶의 결 같은 것이 묻어있으니까요. 우리가 잊어버린 작가들의 글도 다시 찾아서 읽어 보고 ‘그 글에서 좋은 건 무엇인가, 우리가 얻을 것은 없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첫 번째로 실린 작품이 김유정 소설가의 「필승 전前」인데요. 곤궁한 처지에 놓인 작가가 쓴 편지글이에요. 읽으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가슴 아프죠. 절실하잖아요.
이런 아픔에 공감하셨어요?
그렇죠. 가슴이 아파서 뭉클했죠. 슬프기도 하고요. 이렇게 치열하게 산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보여지잖아요.
절망에 사로잡혀도, 살아가야죠
『뭉클』은 산문을 엮은 책인데요. 요즘 사람들은 긴 글을 읽는 걸 피로해하는 것 같아요. SNS에서 짧은 문장들로 소통하는 데 익숙하고요.
짧은 문장만 선호하는 건 참 안 좋은 것 같아요. 우리 생활에서 문학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거예요.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여하간 우리의 삶에서 큰 손실이라고 생각해요.
주로 어떤 시간에 시를 쓰시는지 궁금해요. 집필하시는 시간이 정해져 있나요?
그렇지 못해요.
그러면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하세요?
아니요. 그냥 머릿속에 메모하고 잊어버리면 안 써요. 잊어버리면 그건 쓸 만한 가치가 없는 거니까요. 그리고 한 번 쓰려고 했다가 잊어버리면 언젠가 생각이 나요. 그것이 차거나 보이면 거의 대부분 새벽에 일어나서 서너 시간씩 쓰는 게 습관이 됐죠. 그때 머리가 제일 맑으니까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는 조금 게을러졌죠.
다음 시집을 준비하고 계세요? 언제쯤 출간이 될까요?
당장 계획은 없고요. 제가 시집을 내는 주기가 대개 4~5년 정도인데, 지난번에 낸 시집(『사진관집 이층』)이 2년 전쯤이니까요. 한 2년은 더 있어야 될 거예요.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해 오신 만큼 미발표작도 많을 것 같습니다.
미발표작은 없어요. 처음에는 발표 안 된 작품이 많았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 (시를) 써달라는 데가 여러 군데 있으니까 미발표 작품을 남겨놓기가 쉽지 않죠.
최근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망이 가득한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문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렇죠. 그러나 사람이 절망에 사로잡혔다고 해서 안 살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살아가야죠.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우리 시대가 행복한 시대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늘 자기가 사는 시대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죠. 우리나라도 일제시대 때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얼마나 고통 받았어요. 그리고 가난했죠. 해방 후에도 정치적 혼란과 가난이 이어졌고, 그때는 자유도 없었죠. 언론 자유도 없었던 때니까 지금 같은 이야기를 하면 잡아갔죠. 우리가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건데, 그때에 비하면 좋은 세상이 됐죠. 지금은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더 절망적이지만, 이것도 극복이 되겠죠.
지난 1월에 출간된 『천만 촛불 시집』에도 참여하셨어요. 촛불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셨나요?
촛불을 보면서 ‘정말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런 어려움을 국민들의 의지로 이겨낸 나라가 얼마나 되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촛불이라는 데에 너무 끌려가서 마치 촛불 자체가 우리의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되겠죠. 앞으로의 일이 더 많잖아요. 촛불집회는 지금까지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방해물들을 치워준 거고, 이제는 망망대해와 비슷한 거예요. 거기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거죠.
요즘 청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도 드시겠어요.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부러운 마음이 많이 들죠. 안타까운 건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안타깝죠. 물론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는 일자리가 더 없었죠. 그러나 지금과 그때는 달라요. 그때는 다 없었던 거고, 지금은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은 대기업 같은 데 들어가서 돈을 많이 벌잖아요.
시를 너무 어렵게 쓰는 건 문제라고 생각해요
최근 주목하고 계신 젊은 시인이나 시집이 있을까요?
별로 많이 안 읽기는 했는데, 김성규 시인의 작품도 좋았고요. 일일이 이름을 이야기하지는 않더라도 좋은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이 많죠.
선생님께서 젊은 시절 시를 쓰시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세요?
많이 달라졌죠. 뭔가 어렵게 쓴다고 할까요. 너무 어렵게 쓰는 건 문제라고 생각해요. 시도 소통인데 조금 알게 써야죠. 시도 남한테 뭔가를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점점 시와 멀어진다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닌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시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시를 안 읽는다고 말하는 건 예전에도 그랬어요. 제가 처음 문단에 나올 때도 ‘요즘 시인들이 너무 시를 안 읽는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시라는 건 옛날부터 소수의 사람들이, 언어적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거였죠. 온 국민이 다 읽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시가 전 국민한테 읽혀서 시인이 영웅처럼 떠받들리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시 자체가 외로운 작업이고, 시를 읽는 것은 외로운 자들끼리의 대화거든요.
지난 몇 년간 문학계가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표절 논란도 있었고 성폭력 논란도 있었는데요. 지켜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나도 문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지만 정말 문학하는 사람들이 대오각성 해야 된다고 봐요. 옛날부터 알게 모르게 성폭력적인 것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냥 적당히 넘어가거나 ‘시 쓰는 사람들이니까 조금 보통 사람들하고 달라’ 하고 생각했던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용납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지켜야 될 건 지켜야 되죠. 그리고 문학하는 사람들에게는 시인, 소설가, 작가이기 전에 시민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돼요. 시민으로서 탈선은 결코 용납이 안 된다는 거죠. 표절에 대해서는, 어디까지가 표절이고 어디까지가 영향을 받아서 쓴 것이냐 하는 문제가 항상 있어왔지만, 표절은 본질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문제죠.
이런 논란들이 문학에 대한 대중의 애정을 식게 만든 것 같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은 숭고하고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깨우침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잖아요.
일반인들도 ‘문학인은 보통 사람들하고 다르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똑같은 거죠. 문학인들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성폭력적인 분위기가 용납됐던 거잖아요. 용납돼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요. 문학인을 똑같은 눈, 똑같은 잣대로 봐줘야 돼요. 어떤 때에는 ‘문인들은 이래도 된다’고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문학인이 왜 그래?’라고 하면 안 되죠.
『뭉클』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세요?
좋은 글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글을 즐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좋은 글은 10년 전에 쓴 거나 100년 전에 쓴 거나 요새 쓴 거나, 다 큰 기쁨을 주고 위안도 주고 힘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좋은 글을 많이 찾아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럼으로써 좋은 글과 좋지 않은 글을 분간하는 힘도 스스로 생기는 거니까요. 글을 선택해서 읽는 힘은 자기 스스로 얻게 되는 것이지 누가 해주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읽어서 생기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