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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령 “드라마 는 애증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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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속에 막을 내린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가 동명의 소설로 다시 찾아왔다. 박은령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손현경 작가의 각색이 더해져 탄생한 『사임당 빛의 일기』는 드라마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제작 여건상 수정이나 생략이 불가피했던 부분들까지 고스란히 살려낸 것이다. 사건의 내막과 인물들의 심리가 세세하게 묘사된 덕분에 독자들은 한층 더 견고하게 매듭지어진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원작자인 박은령 작가로서는 드라마에서 다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드라마 <앞집 여자>, <두 번째 프러포즈>, <인생이여 고마워요>, <고봉실 아줌마 구하기>를 통해 여성의 삶을 섬세한 시각으로 그려냈던 박은령 작가는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살아가는 여성’, ‘조선의 워킹맘’으로서 신사임당을 조명한다. 작품 속에서 사임당과 ‘엇갈린 뫼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서지윤 역시 이러한 여성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 속에는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여성의 열정, 그녀들 앞에 버티고 서있는 현실의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달 7일, 종영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박은령 작가를 만났다. 그는 ‘애증의 작품’을 떠나보내는 복잡 미묘한 감정과 소설에 담긴 ‘오리지널 스토리’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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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스토리’를 담았다

 

원작을 바탕으로 손현경 작가님이 각색을 한 소설입니다. 두 작가님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지금 드라마로 방영되는 것 외에도 굉장히 많은 수정고 버전들이 있었어요. 드라마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 것이다 보니까 제 뜻대로 제작되지 못하는 부분들도 있는데, 그런 면에서 원작 소설이 있는 게 굉장히 만족스러워요. 다른 드라마 작가들도 부러워해요. 작가가 쓴 것과는 달리 방송되는 부분들도 많고, 때로는 그로 인한 비난도 뒤집어써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는 그렇게 쓰지 않았었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원작 소설에는 감정선이 상당히 잘 살아 있고, 제가 원했던 오리지널 스토리가 담겨 있으니까 만족도가 높아요.

 

웹소설 <사임당, the Herstory>도 연재하고 계시죠?


이번 작품을 하면서 굉장히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수많은 수정을 거쳐서 드라마를 썼고, 원작 소설도 출간했고, 웹소설도 연재 중인데요.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입체적으로 복습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같은 이야기이지만 조금씩 달라요.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더 부각해야 되는 면이 있고 더 잘 사는 부분이 있고요. 소설은 소설대로의 맛이 있어서 감정의 결 같은 건 훨씬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사실 원작을 능가하는 영상물이 별로 없잖아요.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과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 다른 경우가 있죠. 지금은 CG 기술도 많이 발달해서 그 간극이 전보다는 훨씬 더 좁아진 것 같기는 한데요. 어쨌든 문자가 갖는 특유의 힘이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굉장히 만족스러웠어요.

 

작가님의 드라마가 소설로 각색된 건 『사임당 빛의 일기』가 처음인데요. 드라마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럼요. 이전에도 관심은 있었어요. 웹소설 같은 경우에는, 네이버 측에서도 드라마를 웹소설로 연재하는 작업에 계속 관심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실시간으로 방송이 되는 상황에서는 드라마 작가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냥 숨 쉬기도 너무 힘들고 바쁘고,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 상황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동시에 두 가지 작업을 한다는 게 불가능한데, 이번 드라마는 사전 제작이다 보니까 가능했던 거죠. 한 번 해보니까, 웹소설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나름 재미가 있어요. 함께 작업한 팀들과 손발이 잘 맞았고요. 상황이 된다면 계속 해보고 싶어요. 재밌는 것 같아요.

 

드라마 작업보다 더 좋은 점이 있나요?


작가의 원작을 온전히 살릴 수 있잖아요. 드라마는 협업이니까 현장에서 잘려버린 씬도 있고, 현장 상황에 따라서 ‘왜 이렇게 됐지?’ 싶은 부분들도 있어요. 소설에서는 편집이 되거나 촬영할 때 누락되는 부분이 없으니까, 그게 좋아요.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아쉬웠던 장면도 있으셨겠죠?


운평사 소녀에게 그림을 주는 장면이 있는데, 원작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아요. 아이가 그림을 빤히 쳐다보니까, 사임당이 그 먹먹한 눈빛에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서 귤도 주고 그림도 주는 거거든요. 그 아이는 태어나서 아름다움을 처음 본 거예요. 유민으로만 떠돌다가 아름다움이라는 걸 처음 보고 매혹된 거죠. 그런데 드라마에는 그런 부분 없이 뚝 잘렸어요. 그냥 그림을 둘둘 말아서 냅다 줘버리더라고요. 그러면서 졸지에 민폐 여주가 되고 연기력 논란도 생기고 그랬죠.

 

서지윤이 사임당의 일기와 미인도를 손에 넣게 되는 과정도 드라마와 다르더라고요.


소설에서는 지윤이 자전거와 부딪혀서 넘어지면서 책상을 엎어서 물웅덩이에 떨어진 책들이 젖어요. 변상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미안하다고 울면서 돈을 건네주니까 주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그래도 지윤은 미안하니까 돈을 놓고 가거든요. 주인은 돈만 받을 수 없으니까 젖은 책을 조금 싸줘요. 그 안에 사임당의 <수진방 일기>가 끼어있는 거죠.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갑자기 주인이 혼자만 마구 떠들더니 느닷없이 지윤에게 책을 막 떠안기더라고요. 그렇게 다 그려지지 못한 부분들이 있는데 원작 소설에는 고스란히 다 실려 있어요. 소설을 읽으시면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작가님의 목소리가 더 많이 담겼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다음에는 소설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다음 작품을 할 때도 가능하면 원작 소설이 있으면 좋겠어요. 요즘에는 방송사도 원작이 확보된 걸 선호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시놉시스를 두껍게 쓴다고 해도 수십 장에 그치잖아요. 중간 중간의 디테일이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있는 이야기들, 감정들을 작가는 알지만 배우, 감독, 방송사는 몰라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질문하고 끊임없이 설명해 줘야 되죠. 그러다 보니까 안에서 쓰고 있는 작가와 밖에서 촬영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원작이 있으면 어떤 정서인지 확실히 전달할 수 있으니까 어긋남의 폭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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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빛의 일기>는 애증의 작품


웹소설 작업은 어떠셨어요?


저는 대중 작가이기 때문에 문체가 너무 어렵거나 읽는 데 덜컥 걸리면 별로 안 좋아하고, 무조건 재밌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빌 브라이슨의 글처럼 유머러스하면서도 막힘 없이 읽히고, 그 안에서 인문학적 깊이감도 발견되는 작품들이 좋아요. 제가 그렇게 썼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웃음), 어쨌든 쉽고 빨리 읽히는 글이 좋은데요. 그런 점에서 가독성은 괜찮다고 생각해요. 웹소설을 연재하면서 가독성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기도 해요. 정말 작법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처음에는 많이 헤맸는데 이제는 자리를 좀 잡은 것 같아요. 구독자 수를 보면, 이겸과 사임당이 헤어진 후에 사임당이 이원수와 결혼을 하니까 구독수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독자들의 반응을 작품에 반영하실 계획인가요?


그런 생각을 하죠. 그렇지만 대전제는 변할 수 없잖아요. 사실 드라마는 시청자들 반응에 빠르게 반응하는 맛이 있거든요. 그런데 웹소설은 배워가는 중이에요. 한 가지 대원칙이 있다면 잘 읽혀야 된다는 거예요. 읽히면서 걸리적거리면 안 되거든요. 배워가는 재미는 있어요. 이 작품을 하기 위해서 워낙 준비를 많이 했거든요. 그림, 한학, 중국 고전에 대한 공부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런데 드라마는 휘발돼서 날아가 버린다는 아쉬움이 있거든요. 요즘은 다시보기를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기는 하지만, 아무리 명작이라 해도 6개월 정도 지나고 나면 잊히잖아요. 저한테 <사임당 빛의 일기>는 참 애증의 작품인데, 징글징글해서 빨리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요. 후속작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마음이 묘하기도 해요. 굉장히 복잡한 마음이에요.

 

징글징글하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뭔가요(웃음)? 드라마가 방영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기 때문인가요?


우여곡절도 당연히 많았고요. 너무 오래 걸렸잖아요. 작업실에 들어갈 때면 마치 사임당 사당에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몇 년 동안 감방에 살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에요. 원래 드라마 작가들이 그렇기는 한데, 이번 작품은 워낙 준비 기간도 길었고 그만큼 시청률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어제(4월 6일)는 시청률 1위를 기록했는데요.


동시간에 방영되는 작품들의 시청률이 조금 하락하면서 1위를 하게 된 거죠. 사실 저는 지난주부터 마음을 비웠어요. 시청률 9%, 10%를 가능하게 해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요즘 같은 세상에 이만큼 봐주시는 게 어디냐’ 싶어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잖아요. 특히 엔터테인먼트 쪽은 더 그렇죠. 그런데 3년 전 작품을 가지고 지금 다시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요. 사실 3년 전에 입었던 옷을 지금 꺼내 입으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잖아요(웃음).

 

지금은 시청률이 크게 오르기 힘든 상황이 아닐까 싶어요. 종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새로 유입되는 시청자를 기대하기 어렵겠죠. 


그렇죠. 지금까지 시청해주신 분들만 잘 봐주셔도 좋다고 생각해요. 어제(4월 6일) 회차에 나왔던 이야기들은 유리천장에 대한 거고 억울하면 남자로 태어나지 그랬냐는 건데, 사실 우리 여자들이 살면서 그 말 안 들어본 사람 있나요? 제가 대단한 페미니스트는 아닌데 그냥 여자 이야기, 여자 심리를 말한 거예요. 이겸도 제가 연애하고 싶은 가장 멋진 남자를 그려 넣은 거거든요(웃음).

 

여성의 삶과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품들을 써오셨잖아요. 페미니스트가 아니실까 생각했었는데, 섣부른 짐작이었네요(웃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의문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희 세대까지만 해도 그것에 대해서 크게 의문을 제기하면 돌 맞는 분위기였거든요. 저는 여성의 문제를 화두로 삼아서 작품을 쓰겠다거나 제가 페미니스트라는 생각은 해본 적은 없어요. 자연스럽게 저한테서 나오는 이야기를 쓰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거죠. 제가 여자라서 그런 것 같아요. 여자가 남자 이야기를 잘 쓰는 건 조금 어려운 일이에요. 반대로 남자 작가가 여자 이야기를 잘 쓰기도 어려운 일이고요. 그냥 제가 살면서 느꼈던 것들, 제 안에 쌓여있던 것들을 제가 아는 이야기와 정서로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이번 작품에서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살아가는 여성’, ‘조선의 워킹맘’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예술 활동을 하는 워킹맘이라는 점에서, 사임당과 작가님의 삶이 맞닿는 지점도 있지 않나요?


그런가요? 사임당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임당의 모습이 실제와 일치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보통 사임당이라고 하면 대한민국 1등 엄마, 율곡 엄마라고 생각하잖아요.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작품 수가 너무 많고, 물론 사임당의 작품이 아니라고 이야기되는 작품들도 많지만, 문헌 같은 데 보면 당대에 사임당이 산수화와 포도 그림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사임당의 산수화는 찾아보기도 어렵고, 우리는 「초충도」만 알고 있잖아요. 저도 글을 쓰지만, 좋은 엄마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멋진 엄마이기는 할 거예요. 그런데 보통 아이들이 생각하는 기준에서의 좋은 엄마이기는 참 어렵거든요. 일단 1번이 일이니까요. 저는 1번이 아이들은 아니란 말이에요. 절대 그렇지는 않아요.

 

어쩌면 용기 있는 고백일지 모르겠어요. 많은 여성들이 ‘좋은 엄마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좋은 엄마가 되고 좋은 아내가 돼? 내가 불행한데?’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어렸을 때 그게 되게 싫었어요, 사과 같은 거 깎으면 엄마는 남은 부분을 드시잖아요. 생선도 대가리만 드시고요. 그런 게 너무 싫었어요. 저희 엄마 세대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인 건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들하고 똑같이 먹었고 엄마는 허접한 거 먹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지 않았어요. 아이들한테는 제가 이기적인 엄마겠죠. 가끔 아이들이 엄마 성격 진짜 이상하다고 말하기도 해요(웃음).

 

엄마의 1순위가 자신이 아닌 일이라는 점에서, 아이들이 상처를 받지는 않던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딸이 울면서 집에 온 기억이 나요. 과제물로 엄마에 대해서 조사해 오는 게 있었는데, 그 중에 ‘엄마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였나요?’라는 질문이 있었거든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발리 여행 갔을 때’라고 대답했어요. 아이를 낳고 몇 년 후에 크리스마스 때 발리로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수영장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너무 행복했거든요. 그런데 딸이 다음 날 울면서 왔더라고요. ‘엄마는 왜 그래?’ 하면서요. 다른 아이들이 발표하는 걸 들어보니까 다른 엄마들은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제일 행복했다고 대답했대요. 그래서 충격을 받은 거죠. 그때 제가 했던 대답이 지금은 이상하지 않을지 몰라도, 20여 년 전에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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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세상을 좀 살아본 사람들이 쓰는 장르


결혼하신 후 10년 동안 일을 멈추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다시 일을 시작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결혼 이후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일터로 돌아오기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인데, 당시는 더 그랬겠죠.


10년 동안 완전히 글을 놓은 건 아니고요. 글짓기 교사 일을 했어요. 그런데 한 번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놓은 적이 없어요.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엄마들한테도 저는 작가가 될 건데 지금은 아이도 낳고 해서 잠깐 쉬고 있는 중이고, 그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제 커리어를 말할 필요가 있기도 했지만, 제 스스로 세뇌시켰던 거죠. 사실 그때는 굉장히 막막했는데, 만 번을 이야기하면 이루어진다는 인디언 속담을 듣고 저녁마다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했죠. 너는 꼭 드라마 작가가 될 거야, 라고 이야기했어요.

 

결혼 전에는 <장학퀴즈>의 구성 작가로 일하셨었죠? 드라마 작가의 길로 접어드신 계기가 있었나요?


구성 작가를 그만두게 된 후에 자연스럽게 기회가 됐어요. 같은 방에 계시던 감독님이 드라마국으로 옮기게 됐고, 저더러 보조 작가를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정하연 선생님께서 미국에 오래 계시다가 귀국하셔서 다시 작품을 쓰시는데 <사랑의 종말>이라고 법정물 비슷한 작품이었어요. 그때 (보조 작가로) 변호사들을 만나서 질문하고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일을 했어요. 그것도 재밌더라고요. 그 작품이 끝나면서 감독님이 작품을 하나 써오라고 하셨는데, 쓰려고 하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안 써지는 거예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안 써지는 게 너무 당연하죠.

 

이유가 궁금한데요?


그때 제가 스물다섯 밖에 안 됐었는데, 무슨 세상을 알겠어요. 드라마라는 건 세상을 좀 살아본 사람들이 쓰는 장르가 아닐까 싶어요. 장르물 같은 건 조금 다를 수 있을 거예요. 퍼즐 조각을 짜 맞추는 거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희로애락이 들어가 있고 감정선이 굴곡 있는 드라마는 인생을 조금 살아봐야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조금 파란만장하게 살아본 사람일수록 유리하죠.

 

<여명의 눈동자>를 보고 드라마 작가를 꿈꾸게 되셨다고요.


엔딩 대사를 보면서 정말 가슴을 쳤어요. 너무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옥이가 지리산 위에서 “그들은 가고 난 남았다. 남은 자에겐 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는데,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때는 송지나 작가를 보면서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송지나 키드’가 많았죠.

 

좋아하시는 드라마 작가와 작품이 궁금합니다.


계속 변하는 것 같은데요. 기본적으로 저한테 고전인 작품은 송지나 작가님의 <여명의 눈동자> 하고 제 스승님이신 김정수 선생님의 <그대 그리고 나>예요. 이금림 선생님의 <옥이 이모>도 있고, 김운경 선생님의 <파랑새는 있다>는 최고죠. 지금도 그 작품에 나오는 몇 개의 대사들을 기억해요. 요새는 박경수 작가의 작품을 정말 좋아해요. 매회 정말 쫀득쫀득하게 진행되면서 진짜 재밌더라고요. 사실 저는 압박하는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임당 빛의 일기>를 숨구멍이 많은 이야기로 쓴 것 같기도 한데요. 너무 조여 오는 이야기는 보는 게 힘들어요. 현실이 각박하고 힘이 드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스트레스 받고 싶지는 않아요. 저한테는 드라마를 보는 게 힐링이고 조금 편하게 봤으면 좋겠거든요.

 

최근의 젊은 시청자들은 어떤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 같으세요?


지난 학기에 추계예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드라마를 소비하는 혹은 시청하는 형태가 굉장히 많이 다르더라고요. 20대들은 굉장히 많은 떡밥을 전반부에 뿌리고 ‘그 떡밥들이 얼마나 쫄깃쫄깃하게 회수가 되며 그 퍼즐이 얼마나 잘 맞아들어가는가’에서 굉장한 쾌감을 느끼더라고요. 그 재미로 드라마를 보고요. 저는 그런 작품을 잘 쓸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지금 <사임당 빛의 일기>도 현대 장면이 어설프다거나 고리가 안 맞는다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사실 고리를 안 맞춰 써놓은 작품은 아니거든요. 원작에서는 다 맞아있어요. 그런데 촬영하고 편집하고 여러 사람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덜어지고 잘라지는 부분이 생기니까 아귀가 이상하게 뒤틀려 버린 거죠. 그게 온전히 작가의 몫처럼 되어버렸는데, 그런 점에서 소설이 위안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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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조 있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서지윤과 사임당의 이야기가 계속 교차되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 시대가 변했어도 워킹맘으로 사는 고단함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요. 저도 글 쓰는 사람이고 엄마이지만, 작가라는 사람들이 가족으로는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점이 딸들한테 미안해요. 그런데 사임당은, 우리한테 박제된 그녀의 모습은 흐트러짐 한 올 없는 사람인데, 정말 그랬을까 싶어요. 실제로 사임당은 7명의 아이들과 남편을 건사하면서, 집안 경제도 자신이 이끌어가면서, 자기 예술혼도 불태웠거든요. 얼마나 힘들어요. 그리고 지금 워킹맘들의 삶과 그렇게 다를까,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은 거죠.

 

어제(4월 6일) 방송에서 사임당과 딸 매창이 나눈 대화가 떠오르네요.


엄마는 행복하냐고 물으니까 사임당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잖아요. 저는 그 연기가 정말 좋았거든요. 그리고 ‘나는 정말 행복한가’에 대해서 대답을 못하잖아요. 그리고 달래죠. 네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 딸이 딸을 낳을 때쯤 되면 세상이 조금 바뀌어 있지 않겠느냐고요. 그러니까 매창이 ‘그럼 나는요? 나의 행복은 누가 책임지나요?’라고 하는 거죠.

 

역사적 인물, 사건을 토대로 창작된 작품들은 종종 왜곡 논란에 휘말리잖아요. 그래서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서 자료를 조사하셨을 것 같아요. 어떠셨나요?


저보고 취재를 너무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렇게까지 샅샅이 조사 안 해도 되는데, 너무 시간과 품이 많이 든다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빙산의 일각이라는 건, 그 아래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부분 중에서 꼭대기에 있는 조금만 보이는 거잖아요. 밑에 잠겨있는 부분을 다 아는 상태에서 조금만 보여주는 것과, 위로 드러난 작은 부분만 알고 그걸 잘 포장해서 보여주는 건 다르다고 생각해요.

 

율곡이 남긴 사임당에 대한 기록도 보셨죠? 어떤 생각이 드시던가요?


‘선비행장’이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추억하면서 쓴 글이 있어요. 어머니 사임당이 강릉의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새벽까지 방에서 소리 죽여 우는 날이 자주 있었다고 쓰여 있는데, 그건 아들의 생각이죠. 사임당이 자식 키우기 너무 힘들어서, 아니면 결혼 생활이 너무 불행해서, 혹은 두고 간 첫사랑 때문에 울었을 지도 모르는 거잖아요(웃음). 그건 엄마 마음이잖아요. 그걸 율곡이 어떻게 알겠어요(웃음). 작가들은 항상 남들과 다르게 보면서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또 다른 생각이 뻗어나가는 거긴 한데요. 율곡의 ‘선비행장’을 봤을 때도 저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엄마는 언제 제일 행복했어요?’라는 질문을 받고 ‘발리에 혼자 여행 갔을 때’라고 답한 것과 같은 지점이겠죠(웃음).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소재가 ‘그림’과 ‘시’예요. 특히 시는 사임당과 이겸의 마음을 더 애틋하게 드러내 주는 것 같아요.


격조가 있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제가 써왔던 드라마에서 몹시 중요하게 여겼던 게 ‘놓아주는 사랑’이에요. <고봉실 아줌마 구하기>에서도 그랬고 <두 번째 프러포즈>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놓아주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저를 자극해요. 사실은 움켜쥐고 싶잖아요. 내 걸로 갖고 싶고, 어떻게든 못 가게 하고 싶고, 내 안에 놓고 싶잖아요. 그런 점에서 놔줄 수 있는 사랑이란 뭘까, 생각해 보면 정말 나보다 저 사람을 온전히 더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랑인 거잖아요. 그리고 정신적으로 굉장히 많이 결속되는 거죠.

 

소설 『사임당 빛의 일기』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세요?


일단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서 생략됐던 감정 선들을 책 속에서 보시고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여주시는 게 제가 제일 바라는 거예요. 그렇게 제 작품을 보고 호응해주시고, 어떤 위안을 느끼시고 행복해하시면 좋겠어요. 일단 재밌어야 되겠죠. 재미가 없는데 위안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임당 빛의 일기 박은령 원작/손현경 각색 | 비채
화제를 모으며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가 드디어 소설로 출간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속도감 넘치는 구성, 주인공 신사임당과 이겸의 예술혼을 고스란히 담아낸 영상, 개성 넘치는 캐릭터, 이야기 곳곳에 보석처럼 숨은 시(詩)와 옛 이야기…. 원작자인 박은령 작가와 정식 계약한 유일한 소설이며 일본 ‘신쇼칸’과 대만 ‘인류지고’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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