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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배경으로 골 때리는 개그만화 구상 중 - 메가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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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部族)을 이루면 부족(不足)하지 않단다. 언어 유희를 즐기는 만화가 메가쑈킹은 재미있게 놀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요상한 궁리를 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지금은 웹툰시대’라고 말할 만큼, 웹툰이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동료 만화가들한테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냐고 물으니, “매일 아침, 쫄깃센타에서 메뚜기죽을 끓이는 게 훨씬 재밌다”고 말한다. 메뚜기죽? 이건 뭐 새로 나온 제주 향토음식인가? 틀렸다. 정답은 ‘메가쑈킹이 직접 끓인 X뚜기 인스턴트 수프’다. 비록 인스턴트 수프지만 제주산 감자, 양파, 마늘을 듬뿍 넣어 영양가도 있고 무엇보다 속이 든든하단다. 최근엔 쫄깃쫄깃한 마카로니를 삶아 넣으면서 그 맛과 식감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고. 메가쑈킹은 말한다. “메뚜기 수프를 끓이는 건 내게 일종의 놀이다. 매일 새벽 기분 좋게 메뚜기 수프를 끓이고, 수프 먹는 분들의 행복한 표정을 훔쳐보는 건 이제 내게 크나큰 즐거움이 되었다”고.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니까 ‘우리는 쫄패’

“힘 내”라는 말 보다는 “힘 빼”라는 말을 한다. 억지로 힘내며 살기보다 적당히 힘 빼고 사는 게 행복하다는 것. 메가쑈킹은 작년 7월부터 제주도 쫄깃센타에 거주하고 있다. ‘쫄깃센타’는 또 무엇인가? 쫄깃쫄깃한 회를 파는 횟집인가? 또 틀렸다. 제주도 바닷가 마을 협재리에 자리한 메가쑈킹표 게스트하우스 이름이다.




“난 쫄깃센타가 무엇이든 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었으면 했다. 와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곳보다는 무엇을 버리려고 오는 곳이었으면 했다. 각양각색의 다른 이들과 옹기종기 어울리면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쫄깃센타는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난 결말이 나는 게 싫다. 과정을 즐긴다.”(p.7)

질문

‘쫄깃’이라는 단어를 무척 애용한다. 메가쑈킹 만화에도 자주 나오던 대사인데, 도대체 어떤 뜻인가?

답변

‘염통이 쫄깃해질 것 같아’에서 따온 단어다. “어차피 단 한 번뿐인 인생, 너무 딱딱하게도 너무 무르게도 말고 적당히 탄력있고 재미있는 상태로 행복하게 살자”라는 의미다. 센터를 센터라고 표기한 것은 ‘센터’는 살짝 정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싼 티, 빈 티가 팍팍 나는 게 내 스타일이라서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쫄깃센타’로 지었다. 낄낄낄.

질문

쫄깃센타를 지으면서 이런 에세이를 낼 생각도 했나? 사실 독자들은 메가쑈킹의 만화를 기다렸을텐데.

답변

개인적으로 눈앞의 재미를 추구하는 스타일이라서 쫄깃센타를 짓는 거 자체가 우선이었다. 쫄깃 패밀리들과 함께 만드는 학교 교지 같은 형식의 책은 생각해보았는데 이렇게 에세이로 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온 거 보니까 뿌듯하다. 글은 내가 썼지만 그림은 정육군이 그렸다. 왠지 내가 그리면 책이 잘 안 팔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느낌을 내야 하는데, 내 그림은 그렇지 않으니까. 하하하. 메가쑈킹의 독자들? 음. 그들에게 귀여운 배신감을 선물하고 싶었다. 하하하. 지금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는 골 때리고 야한 사차원 개그만화를 구상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무 실망은 말았으면 좋겠다.

질문

쫄깃센타가 2011년 7월에 오픈했으니, 이제 1년이 좀 넘었다. 예상했던 대로 잘 굴러가고 있나? 수익은 어떤지도 궁금하다.

답변

수익은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 없는 부분이고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짭짤’이다. 쫄깃센타의 외관은 게스트하우스이지만 원래 내가 생각한 모습은 복합문화공간 같은 곳이었다. 쫄깃 안에서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협재리 안에서 영화축제, 음악축제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우리도 재밌고 남들도 재밌게 해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지금 현재로서는 게스트하우스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다양한 문화축제를 열 계획이다.

질문

메가쑈킹은 ‘재미주의자’인데, 그래도 쫄깃센타는 사업이기도 하지 않나. 운영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

답변

스스로는 대체적으로 재미있다. 살짝 힘든 것은 돈 문제 같은 건데, 다 잘 해결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힘들었다’ 그런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다들 재밌게 쫄깃하게 만들어왔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마을 어르신 분들과 어울리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많이 친해졌다. 내가 만화가라는 소문이 퍼진 이후, ‘저 사람이 단순히 장사치는 아니구나’라고 생각해주시는 것 같다.

질문

쫄깃센타를 다른 일꾼들을 쓰지 않고, 쫄깃패밀리를 모집해 직접 지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왔나? 패밀리 구인광고 경쟁률은 치열했나?

답변

쫄깃센터를 지으려고 다짐하면서부터 꿈꿔왔던 야심찬 계획이 함께 힘을 모아 쫄깃센타를 지을 쫄깃패밀리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같은 배 ‘쫄깃호’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힘을 모아 노를 저어 갈 수 있는 직종이 ‘믿음직’한 친구들이 필요했다. 함께 제주생활에 뛰어들기로 한 친구 위너니와 브루스에게 내 계획을 처음 말했을 때는 역시 냉담했다. 그 힘든 막노동을 한 달 반 동안 무급으로 해야 하는데 도대체 누가 지원을 하겠냐는 것이었다. 난 걱정하지 말고 일단 날 믿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트위터와 블로그에 공고를 올렸다. 내용은 ‘공사기간 동안 숙식 무료 제공, 맛있는 제주막걸리 무한 제공, 쫄깃센타 평생 무료 숙박권 제공, 제주도에 정착하려는 쫄패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제공’이었다. 멋지지 않나? 경쟁률은 10:1 정도였다. 처음 4명을 뽑을 때 40, 50명이 지원했다. 여자는 뽑지 않는다고 했는데 의외로 여자들의 지원이 많았다. 장미란 보다 힘 세다는 여성 분들도 몇 명 있었다. 여자들이 제주도에 대한 로망이 더 많은 것 같다.

질문

어떤 사람들이 쫄깃패밀리가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답변

지원서를 읽고 땡기는 사람 네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연히 네 명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설렘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다들 괜찮은 사람이었다. 네 명 모두 제주도 정착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건 아니다. 두 명의 친구만 현재 쫄깃센타에 정착했고 한 명은 서울에 다시 복귀했고, 다른 한 명은 제주도에서 건축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여자 쫄패들도 모집하고 있는데, 3개월에 한 번씩 뽑고 있다.



“하루는 일용직으로 고용되어 미장 일을 하시던 인부 아저씨가 내게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게 무보수로 와서 일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종교단체는 아니냐고 물었다. 아이쿠! 그렇지 않아도 술자리에서 쫄패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넉 달 동안 무보수로 일하는데 전혀 불만이 없냐고. 그때 막내 민기가 했던 말이 아직까지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아마 돈을 줬더라면 우린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숙소를 하나로 합치면서 우리 쫄패의 관계는 더욱 단단해졌다. 비록 집은 더 좁아졌지만 서로를 위한 각자의 마음은 예전보다 넓어졌다.”(p.115)

계속 심심하고 계속 진지한 만화가 메가쑈킹

쫄깃센타의 운영은 다소 무모한 마인드로 시작됐다. 메가쑈킹 말에 의하면 “내가 충분히 재미를 느낀다면 비록 돈을 벌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이란다. 사실 처음 쫄깃센타의 목표는 홍대 쪽에 멋진 아지트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대가 너무 비싸고 콧대가 높아, 얼떨결에(?) 제주도로 행선지를 바꿨다. 물론 메가쑈킹의 염통 속에 막연한 제주도에 대한 로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메가쑈킹이 제주도에 내려가서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산다기에 처음엔 “이 자식, 또 심심해졌구나. 언제 철들래?” 했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쫄깃센타가 완공되었다. 내 친구 메가는 그런 녀석이다. 심심해서 저지르는 일을 진지하게 하고야 마는. 물론, 철들려면 멀었다. 계속 심심하고 계속 진지해지겠지.”-강풀 만화가, 메가쑈킹의 10년 불알친구

질문

쫄깃센타에는 어떤 손님들이 오나? 메가쇼킹 팬들도 많이 올 것 같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누구인가?

답변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쫄깃』에도 나오는 자찾생이다. 자찾생은 ‘자아를 찾으러 온 중학생’의 줄임말인데, 머리에 혈액이 덜 응고된 중학교 2학년생이 쫄깃센타에는 왜 왔냐고 물었더니, ‘자아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사실 자찾생의 어머니가 예전부터 트위터를 통해 쫄깃센타가 지어지는 과정을 주의 깊게 보다가, 학교가 아닌 게임방에서 소중한 학창시절을 불태우려는 아들을 보다 못해 정신개조 좀 시키려고 억지로 귀양을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자찾생은 쫄깃센타에 오자마자 PC방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트위터에 녀석의 행동을 하나하나 관찰해서 올렸었는데 반응이 뜨거워서, 쫄깃센타에 오는 손님들이 모두 자찾생을 찾을 지경이었다. 또 선생님들이 쫄깃센타에 많이 오셨다.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장기적으로 묶고 가셨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손님은 부산에서 색소폰을 부시는 75세 할아버지였는데 내가 도인인 줄 알고 깨달음을 달라고 하셔서,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다. 나한테 말을 높이면서 ‘메가 선생님’이라고 부르셨다. 정말 쇼킹했다.

질문

강풀 작가랑도 친하지 않나? 다들 한 번씩 놀러 왔을 것 같은데.

답변

물론 왔다. 『신과 함께』주호민 작가도 왔고 보드카레인, 오지은, 가을방학 정바비 씨,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베이스 치는 정중엽 씨도 왔었다. 강풀 작가는 덩치가 너무 커서 땀을 많이 흘렀다. 그가 쓴 침구를 불태우려고 하다가 겨우 참았다. 강풀 작가나 뮤지션이 손님으로 올 때면 다른 손님들이 조금 신기해하긴 했다. 나는 안 신기했지만!

질문

인터뷰를 해보니, 만화에서 느낀 이미지보다 진지한 면이 많은 것 같다. 평소 즐겨 읽는 책들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요즘 인기 있는 웹툰도 보는지?

답변

웹툰은 자주 보지 않고 오히려 그냥 일반 서적을 많이 읽고 있다. 최근에 재밌게 읽은 책은 『카우치서핑으로 여행하기』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더 김규항 씨가 쓴 『B급 좌파』라는 책을 읽었다.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 좋다.

질문

쫄깃센타에 서재? 북카페 같은 공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책은 선별해서 배치해놓은 것인가?

답변

분야별, 작가별로 나누고 싶은데 지금 선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책의 1/5 정도는 내가 가져온 것들이고 4/5 정도는 트위터에서 책 기증을 받았다. 자신이 재밌게 읽었던 책들을 보내달라고 트윗을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보내 주셨다. 1,300권 정도 되는 것 같다. 서재가 노란색으로 꾸며져 있는데 제주도 유채꽃 분위기를 내려고 했다.

질문

손님들로부터 들은 쫄깃센타에 대한 최고의 칭찬은 무엇인가?

답변

“쫄깃센타에 왔더니 책이 술술 잘 읽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좋았다. 지하에 영화관이 있는데 재밌는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분도 있었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사람들끼리 친해져서 서울에 가서도 모임을 갖는 분들도 종종 있다.

질문

메가쑈킹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답변

아침에 일어나 식사준비를 할 때 행복하다. ‘내가 만든 아침을 먹으러 손님들이 드글드글 모이겠구나’ 그런 기대감이 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밤에 쫄패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도 행복하다. 쫄깃센타에서는 오로지 내 시간들이 많다. 책도 많이 읽고 바다 구경도 많이 하고,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하고. 그런 것들이 나에게 행복이다.



“내가 누리고픈 삶은 노는 게 일하는 거고 일하는 게 노는 삶. 남은 인생 그런 삶을 누리는 게 목표다. 돈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닌 진심으로 내가 마음이 동해서 하는, 신나게 달리다 보면 적당한 수입이 생기고, 뭐 굳이 생기지 않아도 즐겁게 놀았으니 상관없는, 그런 삶을 누리고 싶다. 적어도 돈 때문에 치사해지고 싶지 않다.”(p.166)

오늘을 살자, 정답은 없다, 고인 물은 섞는다

‘좌빈둥 우빈둥’. 쫄깃센타의 수칙이 있냐고 물었더니, 메가쑈킹에게서 나온 말이다. 큰 맘 먹고 제주도에 왔으니 반드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쫄깃센타는 뭘 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며, 다른 게스트들과 함께 알콩달콩 지내면서 자기 자신을 찾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고인 물이 썩고 고인 입이 썩는다. 실없는 얘기일지라도 대화를 나눠야 한다. 침묵에서 모든 오해가 싹을 틔우게 되고 재크의 콩나무마냥 걷잡을 수 없이 쑥쑥 자란다. 결국 모두 함께 사는 이 세상, 홀로 도를 닦을 목적이 아닌 이상 침묵은 더 이상 금이 아니라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드는 것이다. 언제나 왁.자.지.껄 대화가 넘치는, 그런 쫄깃센타가 되었으면 좋겠다.”(p.205)

질문

책 출간을 기념해서 쫄패들과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팔도유람을 하고 있다. 제주도에만 있다가 서울에 오면 어떤가. 답답한 기운을 느낄 것도 같은데.

답변

제주도에 있다가 서울에 오면 확실히 공기가 안 좋다. 그리고 막히는 도로를 보면서 ‘내가 왜 여기를 또 왔지’한다. 하지만 서울에 오면 예쁜 여자들이 많지 않나.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다.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생각해보면 오로지 제주도가 좋은 게 아니라 어디든 재밌고 좋은 것 같다. 바닷가나 산 속에 사는 것도 좋고 따뜻한 물이 콸콸 잘 나오는 아파트에 사는 것도 좋다. 제주도가 섬이지만 결국엔 사람 사는 곳이다.

질문

메가쑈킹이 생각하는 답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답변

이도 저도 아닌 사람, 정말 답답하다. 그리고 ‘일단 먹고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사람. 먹고 사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그거를 입에 달고 사는 거, 정말 답답하지 않나. 일단, 모든 생각의 중심을 ‘논다’는 쪽으로 맞췄으면 좋겠다. 꼭 돈을 들여서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양식이 되는 책을 많이 읽는다던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던가, 두 사람이 모여도 일을 벌일 수 있지 않나. ‘놀기 위해서 일하고, 놀기 위해서 산다’라는 마인드가 있었으면 좋겠다. 외국인 가이드가 한 번 묻더라. 한국은 휴가가 얼마 동안이냐고. 2주라고 이야기했더니 엄청 놀라더라. 외국은 6주 정도 휴가가 있지 않나. 우리나라가 정말 문제가 있긴 한 것 같다. 일을 대충대충 하자는 게 아니고 놀기 위해서 일을 하자는 것이다. 회사에 헌신하는 것이 나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 쓸데 없는 웃기는 소리다.

질문

지금 쫄깃센타를 짓지 않았으면 메가쑈킹은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

답변

만화를 그리고 있겠지. 통장도 메꾸고 국민연금도 내야 하니까. 우선 기본적인 건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이 만화를 쉬고 있으면 감 떨어진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내 만화 자체가 용이 날라 다니거나 엄청난 정밀묘사가 있는 만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안 한다. 손이 굳었다면 풀릴 때 그리면 되는 것이고.

질문

웹툰 시장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정작 만화가들은 무료 웹툰에 대한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답변

정말 잘 버는 친구들은 잘 벌지만 수익이 어려운 친구들은 정말 어렵다. 구조적으로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나는 “진짜 재밌고 정말 재밌고 가슴을 움직이는 만화는 팔리게 돼있다”고 생각하는데,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이 되는 말일 수도 있다. 많은 만화가들이 골고루 연재하고 잘 살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질문

메가쑈킹의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 내년의 계획은 정해 놓았나.

답변

자전거를 다시 타고 싶다. 제주도 해안가만 도는 게 아니라 중산간 지역을 돌아보며 캠핑도 하고 싶다. 내년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전부터 하고 싶었던 영화축제, 음악축제 같은 다양한 문화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은 싫다. 절대로 돈 때문에, 돈에 쫓기며 일하지 말자. 마음이 동해서 몸이 움직이는 그런 일을 하자. 나랑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똘똘 뭉치자. 쫄깃센타 운영이 바로 그런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만화 그리는 일도 쉬고 있다. 지금은 만화를 그리고 싶지 않다. 쫄깃센타를 운영하는 게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염통 가득히 만화가 그리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을 때, 난 또 다시 펜을 들고 커피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만화를 그릴 것이다.”


☞ YES24 블로그(http://blog.yes24.com/chungaram1)에서 메가쇼킹의 따꼼한 제주 정착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쫄깃』이 11월 30일부터 1월 4일까지 매주 화,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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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쫄깃메가쑈킹&쫄깃패밀리 저 | 청어람미디어
이 책에서 메가쑈킹은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조금 더 ‘쫄깃’하게 살아보자고 끊임없이 ‘꼬드긴다’. 과연 그가 말하는 쫄깃한 삶이란 무엇일까. 제주의 풍광이 그대로 살아 있는 다양한 사진을 감상하며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동안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쫄깃하게 살고 싶은 가벼운 충동이 일 것이다. 힘내는 대신 힘 빼고 사는 법을, 다양한 사람과 함께 전주비빔밥처럼 어울려 사는 법을 메가쑈킹 특유의 쫄깃한 어법으로 풀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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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로큰롤 밴드! - 롤링 스톤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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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로큰롤 밴드’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의 밴드 롤링 스톤스가 올해로 결성 50주년을 맞았다. 활동 반세기에 맞춰 그들의 대표곡 50곡을 엄선한 베스트 앨범 < GRRR! >도 막 발표되었다. 이 인터뷰는 유니버설 레코드사 주선으로 올해 10월 영국 런던에서 멤버 개별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인터뷰어는 영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출판인, 방송진행자인 마크 엘렌(Mark Ellen)이다. 롤링 스톤스의 축이자 명콤비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의 인터뷰 내용이다.


믹 재거(Mick Jagger)

질문

새 베스트 앨범 < GRRR! >에 수록되는 신곡 「Doom and gloom」을 만들었다. 모두 함께 녹음실에 다시 모였을 때 밴드를 이끌어주는 주요 원동력은 어떤 것인가.

답변

모두가 같은 템포로 함께 연주해야 하는데, (원동력은) 음악이다 - 내가 연주해야 하고, 또 모두 함께 연주해야 하며, 열정적으로 연주해야 하고, 노래를 익혀야 한다. 모두가 자신의 파트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일단 그렇게 하고 나면, 녹음은 일종의 인공적인 수단이어서, 영화와 비슷하다. 텔레비전과는 다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지금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또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단 곡이 준비되면, 그것을 가지고 이것저것 해볼 수도 있고, 또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볼 수 있다. 물론 막 녹음한 것과 흡사하게 들리도록 해야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을 필요는 없다. 실제로 그럴 수도 없고.

처음 녹음했던 이후로 늘 그랬다. 레코딩 스튜디오는 그저 거대하고 훌륭한 도구일 뿐이다. 뮤지션이 연주를 아주 잘 하고, 다른 멤버들과도 잘 협연하고, 모든 것에 있어 합의점에 문제없이 도달하는 것이 중요한데, 롤링 스톤스는 오랜 기간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상당히 쉽다. 항상 함께 창출해내던 그루브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 후에는 각자의 오버더빙을 녹음해 넣어야 하기 때문에 한 번에 확 해치우고 바로 끝내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질문

롤링 스톤스를 오랫동안 유지해 온 비결은 무엇인가.

답변

아주 좋은 질문이지만 결코 내가 대답할 수 없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한 가지 대답은-꽤 합리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는데-롤링 스톤스는 출범 이후 상당히 성공적인 밴드의 자리를 유지해 왔으며, 물론 다사다난하기도 했지만, 아주 성공적이고 인기 있는 밴드로 존재해 왔다. 만약 롤링 톤스가 매우 인기 있는 밴드가 아니었다면, 지금 존재하지도 않을 거라 확신한다. 또 중요한 다른 한 부분은 아주 충실한 팬들이다.

질문

항상 시대에 뒤쳐지지 않는 트렌디함을 유지해 왔다. 처음 밴드를 시작했을 때 당신들은 어떤 것을 상징했고, 지금은 어떤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린, 한가한 화요일에 대학생들을 상대로 연주하는 블루스 밴드로 출발했다. 대학생들에게 우리가 상징했던 것은 새롭고 재미있는 어떤 것이었다. 아트스쿨 학생들 앞에서도 연주했다. 마치 ‘컬리지 밴드’ 같았다. 블루스를 연주했고, 리듬 앤 블루스도 약간, 로큰롤도 약간 연주했다. 하지만 주된 장르는 블루스였다. 인기가 더 많아진 후에는 그 모습은 과거가 되어 전혀 다른 모습의 밴드가 되었는데, 아이돌 밴드(teenybop band)가 되었다. 오랫동안, 록음악에 심취한 10대 소녀 팬들을 위한 아이돌 밴드였고, 그리고는 다시 컬리지 밴드가 되었다. (웃음)

우린 많은 다른 모습을 지녀왔다. (지금 내 대답이)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대답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웃음) 하지만 우린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게 다른 모습의 밴드로 다가갔다. 영국에서 우리를 따라다녔던 15, 16, 17세의 소녀 팬들을 만났는데, 우리 공연에 왔었고, 그들에게 사인도 해주었었다. 『데일리 미러』지에 실렸던 꽤 유명한 사진 때문에 희미하게나마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몇 주 전 소머셋 하우스에서 우리가 가졌던 사진전에서 그들이 다가와 “우리 기억 안나요?”라고 해서, “기억하는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우리가 사인한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우린 아이돌 밴드였다. 그 소녀 팬들이 우리를 ‘반체제적’이라 여겼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린 그저 10대 소녀 팬들의 아이돌이었다.

질문

「Let's spend the night together」와 같은 문제작들을 발표한 후로 사람들의 태도가 변화해 왔다. 그 변화에 있어 스톤스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롤링 스톤스가, 분명히, 당시 유행했던 감미로운 조미료(사카린) 같은 음악들보다, 팝음악 전반에 더 솔직하게 접근하는 무리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었고, 가사적으로도 더 직설적이고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더 잘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직접적인 면은블루스에서 단서를 얻었다. 블루스를 아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직설화법과 우리가 택했던 보다 세속적인 주제들은, 우리가 블루스 음악에서 들었던 것들, 밥 딜런과 같은 영향력 있는 작사가들과 많은 연관이 있다.

또한 우리의 동의 아래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영화 < 크로스파이어 허리케인(Crossfire Hurricane) >에 담겨 있어,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두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롤링 스톤스와 다른 밴드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반감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으로선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20대의 청년이 그런 야단법석(fuss)의 극히 일부라도,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웠고, 자신을 그 시대에 맞추는 것 또한 어려웠다. 그 시대에 나를 맞추는 것은 나에게도 매우 어려웠다. 그 모든 분노가 왜 존재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왜 그렇게 많은 야단법석이 있어야 했는지를, 노래를 듣고 겉모습을 보고 이해하는 것도 정말 어렵다. 그렇다, 몇몇 사건들이 있었지만, 우린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행동이 상당히 다른 방식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젠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개방적이다. 모든 종류의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질문

당신들이 성공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을 이야기해본다면…

답변

우리가 첫 번째 싱글을 만들었을 때, 드디어 해냈다고 생각했다. 싱글이 차트 하위권에 진입했을 때,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고, 그 때가 우리가 마침내 해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영국 콘서트 투어를 다닌 것, 주로 극장에서 공연 포스터 아래에 우리 이름이 들어갔던 것도 ‘성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그 전에는 우리를 보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200석의 작은 클럽들에서 공연했었기 때문에, 상당히 단시간에 이뤄낸 크고 거대한 도약이었다. 그래서 우린 곧바로 우리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도 더 큰 밴드가 될 거란 사실은 그 땐 몰랐지만,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었다.

질문

50년 동안 계속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는지.

답변

아니다,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마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거다. (웃음)

질문

만약 당신이 20살의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떤 충고를 건네고 싶은가.

답변

“계속해. 넌 잘 해낼 거야. 살아남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웃음)

질문

롤링 스톤스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답변

늘 비난을 당해왔다! < 크로스파이어 허리케인(Crossfire Hurricane) >과 같은 영화를 볼 때,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인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난 여기에서 어떤 기록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 매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과거는 잃어버린, 또 아주 잊혀진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왜곡시키는데, 대개 자신에게 이로운 쪽으로 그렇게 한다.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이고, 그런 기억에는 오점이 아주 많다. 그래서 모두가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침대 밖으로 나오자마자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해도, 서로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열 명의 사람들이 영화 속의 교통사고를 보고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실험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매 번, 완전히, 전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니까 그것을 인생 전체에 반영한다고 상상해 보라.

질문

권력층과 수차례 충돌해왔다. 감옥에 가기도 했고, TV에서 주교에게 심문도 받았다. 낡은 가치와 가장 크게 충돌했던 사건은 무엇인가.

답변

석쇠에 구운 주교(grilled bishop)를 좋아한다. 약간의 올리브 오일과 함께 요리해야 한다. 레드랜즈(Redlands)에서의 마약 단속 사건은 과장된 것이었다. 이젠 사라져 버린 < 뉴스 오브 더 월드 >는 당시엔 루퍼트 머독의 소유가 아니었지만, 상당히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다. 사건의 실체는, 아무런 해도 없는 주말 파티였을 뿐이다. 보헤미안적인 부분이 있긴 했지만 뭘 기대했던 건가? 그 파티는 약간 보헤미안 성향이었지만, 확신컨대, 세계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 충격적인 불법행위로 변질되었지만, 사실은 그저 문화적인 주말이었을 뿐이다! 우리가 사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인 것처럼 비춰졌지만, 실제로 우린 교외에서 조용하고 기분 좋은 주말을 보내고 있었을 뿐이다. 완전히 왜곡된 사건이었다. 대형 체포 사건이었는데, 이상했던 것은 <타임스(The Times)>였다. 당시 타임스지는 기성 체제의 대들보와 같았다. 다른 신문들과 달랐고, 우리가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미국의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와 비슷한, 공식적인 신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옹호했던 것이 ‘타임스’지였다. 그것은 꽤나 기이한 전환점이었다. 하급 언론들은 마음대로 떠들어대기 바빴던 반면에, 기성 체제의 대들보였던 타임스지가 우리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질문

당신과 키스 리처드의 관계는 ‘결혼’에 비유되어 왔다. 현재 결혼 생활은 어떤가.

답변

사람들은 자주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이 질문이 바로 그 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소리 중 하나다. (우리 관계는) 결혼이랑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키스와 함께 일하고 있고, 또 그를 오랜 시간 동안 알아왔다.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결혼과는 전혀 다르다. 결혼을 해봤기 때문에 분명히 말하는데, 전혀 결혼과 같지 않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키스와 나는 함께 일하는 관계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는 어려움이 있을 때도 있고, 때로 상대방이 아주 난감하게 굴거나 화를 낼 때도 있다. 하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질문

아무리 연주해도 지겹지 않은 한 곡을 꼽는다면.

답변

없다. 때때로 매일 밤 공연하다 보면, 모든 노래가 지겨워진다! 그래서 세트 리스트를 바꿔주어야 한다. 20곡의 세트리스트에서, 여섯 곡 정도만 바꿔주면, 별로 연주하고 싶지 않은 곡이 있더라도 괜찮다.

질문

가장 의미 있는 한 곡을 꼽아 달라.

답변

없다. 언제나 최근 곡들이 가장 좋다.

질문

롤링 스톤스 공연에 필적할 만한 다른 로큰롤 공연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많은 로큰롤 공연들을 봐왔는데, 롤링스톤스 공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적절한 심사위원이 아니지 않은가! (웃음) 좋은 공연들이 아주 많다. 롤링 스톤스 공연도 좋고. 우린 최선을 다해서 좋은 공연을 펼치려 한다. 하지만 다른 좋은 공연들도 너무나 많다. 과거에 정말 좋은 공연들에 갔었는데, 앞으로도 (좋은 공연들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질문

60주년 계획을 말한다면.

답변

60주년이라…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웃음) 없을 것 같은데! 아주 불확실하다. 보류해 두겠다.


키스 리차드(Keith Richards)

질문

새 베스트 앨범 < GRRR! >에 수록되는 신곡 「Doom and gloom」을 만들었다. 모두 함께 녹음실에 다시 모였을 때 밴드를 이끌어주는 주요 원동력은 어떤 것인가

답변

노래의 에너지의 많은 부분이, 단지 우리가 한동안 함께 작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5년 동안 투어를 하지 않았음을 직면하고, 불안해졌었다. 믹 재거와 나는 몇 가지 노래를 생각해 냈는데, 「Doom and gloom」에 대해 나는 처음에는 “믹, 50주년 기념으로 이건 좀 이상한데!”라고 말했다. 하지만 롤링 스톤스가 어떤 밴드인가! 언제나 통념에 반하는 밴드였지 않은가. 우리가 만든 노랜 훌륭했고, 가사도 좋은, 사실은 아주 재미있는 노래였다. 한 달 전쯤에 파리에서 「Doom and gloom」과 「One more shot」을 연주했다. 롤링스톤스가 예전에는 그렇게 빨리 노래를 완성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3번의 테이크가 다였다. 서로를 쳐다보며 다른 거 더 있나 라고 했을 정도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고, 롤링 스톤스는 그런 면에서 대단하다. 함께 있을 때의 케미스트리와 에너지란 측면에서.

롤링 스톤스의 어려운 부분은 멤버들을 한데 모으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일단 한 공간에 모아 각자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하면, 찰리 와츠는 드럼 뒤에 앉고, 또 두 대의 기타가 있으면 된다. 이 모든 시간이 지난 후임에도, 여전히 엄청나게 좋은 기분이 된다. 마치 그 공간 안에 다른 누군가가 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여기에 믹이 있고, 내가 있고, 찰리와 론 우드가 있다”고 하지만, 추진력을 주는 어떤 다른 개체가 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든!

질문

롤링스톤스를 오랫동안 유지해 온 비결은 무엇인가?

답변

우리가 너무나 잘하기 때문이고(we're damn good), 또 우리 일을 순수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일할 뿐, 다른 어떤 목적도 없다. 금전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물론 돈을 버는 것을 마다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이 밴드의 배후에서 밴드를 이끄는 추진력은 아니다. 나는 가끔 “키스,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가 궁금해진다. 집에 앉아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찰리 와츠, 믹, 로니와 함께 연주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어떤 자석 같은 힘이 있다. 어떤 면에선 그것이 이 질문에대한 답이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힘이다.

딘 마틴(Dean Martin)이 1964년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당신들을 시큰둥하게 소개하며 “그들은 아마도 무대 뒤에서 서로에게 붙은 벼룩을 떼어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이든 보수층으로부터 받은 그런 식의 대우가 당신들에게 자극을 주었나 어떤 면에선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디노(Deano)는 사랑스러운 녀석이고 대단한 술고래다(Deano라고 부른 것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비꼬는 투). 그에겐 하고 싶은 말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의 프로그램 아닌가. 그가 벼룩을 몇 마리나 떼어내야 했는지 궁금하다. 나라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을 거다. 당시에 스스로도 상당히 아마추어였던 나였지만, 그의 발언이 프로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우린 이제 막 시작한 상태였고…

질문

롤링 스톤스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나.

답변

실패한 적은 없다. 꽤 긴 징역을 선고 받을 뻔했지만, 그 사건이 오히려 내 행동을 깨끗이 정리하게 만들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였던 것 같은데, 그 때 난 이 실험이 너무 길어져 버려서 이젠 실험실을 닫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모두들 ‘와 심지어 저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라고 했다. 가치 있는 경험이었지만, 내가 ‘파멸과 어둠(Doom and gloom)’을 목격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질문

밴드의 다른 멤버들이 롤링 스톤스에게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답변

설명하기도, 말로 표현하기도 아주 어려운데, 우리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은, 마이크 및 악기들과 함께 멤버들을 한 공간에 넣어두면 뭔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우린 권총으로 협박당하며 강요당하고 있다!

질문

만약 당신이 20살의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떤 충고를 건네고 싶은가?

답변

다신 하지 말라고 말할 거다!

질문

롤링 스톤스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답변

이 밴드의 강점 중의 하나는 아마도 우리가 아주 알기 쉽다는 점일 거라 생각한다. 오해는 없다. 모두들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말이다. 난 지금 다른 멤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 내 자랑을 하지는 않는다. 우린 서로를 발견했고, 뛰어난 축구팀이나 멋진 컬렉션과도 같다. 맞는 집단을 찾아내면 기적이 일어난다. 개인으로서의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된다.

질문

롤링 스톤스 공연에 필적할 만한 다른 로큰롤 공연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리틀 리차드(Little Richard)와 보 디들리(Bo Diddly)를 봤다 - 그렇다, 그것이 로큰롤이다! (Yeah, that's the rock and roll baby!) 난 이들을 보고 함께 일할 수 있을 만큼 특권을 누렸다. 뮤지션은, 누구든 간에, 심지어 모차르트라 해도, 자신보다 이전에 존재했던 사람이 되는 꿈을 꾼다. 그 인물처럼 연주하고 싶고, 그 인물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를 능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어떤 측면에선 경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많은 자극을 주는 어떤 것에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것에 다가가는 것이니까. 세월이 흘러 결국 그를 능가하게 되고 더 유명해지거나 한다면… 척 베리(Chuck Berry)를 그의 전성기에 무대에서 보는 것. 그런 것이 로큰롤이란 얘기다.

질문

키스 리차드를 아버지로 둔 자녀들에게 반항은 어려운 일이었나.

답변

그 질문은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더 좋겠다. 그들이 반항할 것이 뭐였을까, 아버지를 봐라! 집에서 나는 특별히 반항아로 여겨지지 않았다. 난 그저 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규칙과 존중에 대해 가르쳤다. 내가 배운 것들을 가르쳤다. 다가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너무 무례하지 않도록. 하지만 동시에 투어를 할 때는 이 규칙의 일부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사회를 향해선, 무례하게 “네 자신을 봐라, 이 자학적인 멍청이들아!”라고 외치는 걸 좋아한다. 왜냐하면 우린 다 미쳤으니까. 이 세상을 한 번 보라. (투어, 공연 외의) 다른 경우라면 공평하게 해야 한다.

질문

8만 명의 관객의 박수갈채만큼 멋진 소리도 없다고 들었다. 라이브공연은 중독성이 있는가.

답변

그보다 더 멋진 유일한 것은 10만 명의 관객이다. 살면서 여러 가지 것들에 나도 모르게 한두 번은 빠져봤지만,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롤링 스톤스와 연주하는 것이다.

질문

당신과 믹 재거의 관계는 ‘결혼’에 비유되어 왔다. 현재 결혼 생활은 어떤가.

답변

다사다난하다, 그렇다, 물론 5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흔히들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두 명의 아주 변덕스러운 남자가 있는데, 일생 동안 아주 많은 일들을 겪어왔다. 그리고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여전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넌 뭐가 뭔지 알고 있고, 난 뭐가 뭔지 알고 있어. 서두르자.” 우리를 이끄는 무언가가 있다. 때로는 난 그를 싫어하지만 또 때로는 그를 너무나 사랑한다. 마치 형제와 같다, 나에겐 형제가 없어서 그가 내 형제다. 그런 식이다. 그의 마음에 축복을!

질문

< GRRR! >앨범에서 라이브로 아무리 연주해도 지겹지 않은 한 곡을 꼽는다면.

답변

「Jumpin' Jack Flash」는 아무리 연주해도 지겹지 않다. 내 생각에 이 곡은-내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해도, 너무 내 자랑을 하고 싶진 않다-이제까지 쓰인 가장 훌륭한 로큰롤 노래 중 하나일 것이다. 믹 재거과 나는 함께 마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 두 대의 기타를 가지고 둘러 앉아 “내게 아이디어가 있어”라고 하고는, 둘이서 그것을 연주해 보고 “그냥 소박한 연주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Satisfaction”, 내가 곡을 쓰는 이상적인 방법은 자면서도 곡을 쓰는 거다. 정말 쉽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 건 한 번뿐이었다.

질문

롤링 스톤스의 투어는 늘 기록을 깨곤 한다. 아직 깰 기록이 남아 있는지.

답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들이 이제 막 이 기록을 깼어요, 또는 저 기록을 깼어요!”라고 말하면 난 “기록? 난 기록을 깨고 싶지 않은데. 기록을 세우려고 노력한다고!”라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더 많은 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보기 보다는, 우린 그저 함께 있고 함께 연주할 수 있어, 우리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할 뿐이다. 난 그것이 놀랍다.

질문

10대들이 롤링스톤스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은가.

답변

모르겠다. 그들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삶엔 무엇이 존재하는가? 숨을 쉬는 공기가 있고, 먹는 음식이 있다. 그들에겐 롤링 스톤스가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롤링 스톤스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롤링 스톤스가 없는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다.

질문

지난 50년 간 죽 당신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은 밴드를 어떻게 생각할까.

답변

그들의 마음에 축복을 빌어드리고 싶다. 그 분들 모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던 것을, 우리가 대신할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 같은 것이다.

질문

60주년 계획은 무엇인가.

답변

60주년은 아직 꽤 남아 있다. 50주년은, 이 모든 ‘0’들은, 30, 40, 50으로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60이 있으면 안 될 이유는 없다. 60주년을 맞이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세상을 떠나버렸거나.




< Rolling Stones - (I Can't Get No) Satsfaction (Live) >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허영만 “역사극 그리면서 후회… 만화가 대신 소설가 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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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고 실수하고 깨질 때, 한 걸음 발전한다.” “고리타분한 스토리 위주의 만화에서 벗어나라! 파격적인 발상,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 무모함도 필요하다. 자! 덤비자 싸우자.”허영만의 선명한 필체가 작업실 벽 곳곳에 눈에 띈다. 메모광 허영만은 문하생들을 위해 짧은 단상들을 벽에 자주 붙여 놓는다. 또 건강에 대한 이슈나 하루의 계획표를 걸어 놓기도 한다. 만화에 대한 열정, 일상에 대한 애정이 여지없이 묻어난다. “스마트폰 세상이라고 하지만 수기보다 빠른 건 없습니다. 여전히 메모를 즐겨 하죠. 최근에 휴대폰을 바꿨는데 또 숙달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습니다.”아직도 허영만은 휴대폰보다 수첩이 편하고, 터치보다 메모가 쉽다. “만화가라면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정석을 끝까지 유지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칭기스 칸은 ‘창작의 여지가 많은 인물’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다음 웹툰에서 2년 동안 연재한 작품이다. 10년에 걸친 사료 조사와 20,000km의 현장 고증을 거쳐, 칭기스 칸의 탄생부터 몽골 제국의 군주가 되기까지의 일생을 담았다. 오래 전부터 칭기스 칸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허영만은 마지막 역사극을 쓴다는 마음으로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그렸다. 자료수집을 위해 수많은 책을 읽었고, 몽골 초원을 그리기 위해 몽골을 세 차례 방문했다. 역사극은 현대극 보다 손이 더 많이 탄다. 1만 명이 싸우는 전투 장면을 그릴 때 최소 100명은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허영만은『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그리면서 “소설가가 될 걸 왜 만화가가 됐을까 후회했다. 소설가는 대사 한 줄이면 되지 않나”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수년 전 『식객』연재 중 머리도 식히고 구상 중인 작품 ‘칭기스 칸’ 취재를 겸해서 겨울 몽골을 방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몽골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던 터라 기본적인 정보 수집을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니,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가지 마”. 이유는 추위와 황무지, 두 가지로 압축됐다. 몽골의 겨울은 영하 25도는 우습게 생각될 만큼 강추위가 계속되고, 폭설로 인해 초원이 하얗게 변하는 탓에 울란바토르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동의 어려움도 문제라고 했다. 작품에 들어가면 몽골의 4계절을 그려야 하므로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결국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나기로 했다. 그것이 고생의 시작이었다.”(허영만의 몽골일기 中)

질문

10년 전부터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기획한 걸로 안다.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인가.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에 어떤 매력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답변

칭기스 칸 이야기는 굉장히 완벽한 드라마다. 예전부터 칭기스 칸 이야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 조금씩 자료를 모으다가 『식객』이 끝나기 직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칭기스 칸의 매력은 ‘작은 몸집인데도 어떻게 서양인에게 맞설 수 있었을까’하는 점과 ‘통신기능이 없었던 때에 어떻게 그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에서다. 전쟁하는 과정에서 말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며,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일이 일어났을 텐데 어떻게 정복이 가능했을까. 또 땅이 워낙 넓으니 통치도 제대로 안 됐을 텐데, 반항을 하면 싹 다 죽여버리고 항복을 하면 그 사람들의 종교와 문화까지 모두 인정하는 유화정책을 펼친 점이 인상적이었다.

질문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몽골을 세 차례 방문했다. 몽골의 겨울은 무척 춥기로 유명한데 취재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부분은 없었나.

답변

몽골의 겨울 날씨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다. 내가 웬만한 산악지대의 추위도 잘 이겨냈는데 몽골에서는 정말 발이 너무 시렸다. 한국에서 좋은 등산화를 신고 왔는데 소용이 없어서, 몽골 사람들이 신는 긴 부츠를 사 신었다. 몽골의 초원을 봤을 때는 정말 변한 것이 별로 없어, 과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시대를 증명해줄 유물을 찾는 건 정말 어려웠다. 칭기스 칸 박물관에 갔는데 말 발굽 하나 있지 않았다. 상당히 큰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외관에 칭기스 칸 동상 하나 걸려있을 뿐, 제대로 된 지도조차 찾기 힘들었다. 아무리 유목민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남겨 놓은 게 없을 수 있나, 뭘 어떻게 그려야 할 지 막연했다. 몽골에서는 사진집을 50권 정도 샀고 자료집은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샀다. 그 옛날 복식문화를 알 수 없으니 중간 시대의 복식 사진을 보면서 추정을 해 그림을 그렸다.

질문

몽골을 여행하는 동안 ‘게르’에서도 생활했나?

답변

물론 게르에서 잠을 잤다. 처음에 우리가 간 게르는 너무 현대적으로 꾸며 놓은 곳이라서 정말 초원 속 게르에서 잠을 자고 싶다고 말해, 다른 게르로 갔다. 그런데 현지 가이드가 예약을 하지 않고 무작정 가자는 게 아닌가. 우리가 예약을 하자고 하니, 그냥 따라오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따라갔는데, 정말 숙식이 가능했다. 유목민이었던 전통 탓인지 몽골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외부인에게 거리낌없이 제공한다고 하더라. 우리에게 침대에서 자라고 해서 일행 한 명과 침대에 누웠는데, 집 주인인 아버지와 아들이 바닥에 눕더라. 괜히 민망해서 밖으로 나와 별을 보다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우리의 침대에 누웠더라(웃음). 그래서 우리는 비닐을 깐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질문

몽골인들의 주식인 양고기도 많이 먹었나? 말에 대한 추억도 있을 것 같다.

답변

양고기는 처음에는 구수해서 먹을만했는데, 두 세끼는 못 먹겠더라.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간 밑반찬을 먹다가 몽골 사람들에게 맛 보라고 해서 줬더니 잘 먹었다. 말도 타러 갔었는데, 말이 처음엔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갑자기 속력을 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풀밭이었지만 뾰족뾰족한 돌들이 가득한 땅이었는데 떨어지면 바로 머리 깨지는 거였다.

질문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한 작품이니 만큼, 칭기스 칸 전문가가 됐을 것 같다. 칭기스 칸의 장단점을 어떻게 파악했나.

답변

단점은 겁이 많다는 것이다. 개를 무서워서 항상 내 옆에 개를 두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에 비해서는 굉장히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듣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 부인이 밖에서 낳은 자식을 장남으로 받아준 것을 보면 관용이 큰 사람이다.

질문

제목을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로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칭기스 칸에 대한 책을 읽다가, “칭기스 칸은 평생 전쟁을 하면서 전쟁터를 떠나본 적이 없다. 평생 말에서 내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한 줄이 뇌리에 꽂혔다. 이거다 싶었다. 책 제목에 칭기스 칸이라는 이름을 넣으면 독자들이 무슨 이야기인지는 쉽게 파악하겠지만, 책을 집을 것 같진 않았다. 지금까지 칭기스 칸에 대한 수없이 많은 책과 영화가 나왔는데 재탕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로 지었다. 인터넷에서는 ‘말무사’로 이름을 아예 정해버린 것 같다.

질문

국내 도서 중에도 칭기스 칸을 다룬 책이 많은데, 도움을 받은 책이 있나.

답변

김종래 씨가 쓴 『CEO 칭기스 칸』도움을 많이 받았다. 칭기스 칸 이전 시대까지는 글이 없었으니 전부 구전되어 기록된 거라 역사책을 보면 년도가 안 맞는다. 역사극을 쓸 때는 고증이 필수인데, 칭기스 칸의 경우에는 기록된 역사가 적어 만화가들이 창작의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이야깃거리를 보는 눈, 찾는 눈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화실 문하생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연재가 불가능했던 작품이다. 무엇보다 칭기스 칸 생의 대부분이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활동 범위가 지극히 넓은 탓에 배경과 등장인물이 자주 바뀌는 문제가 큰 부담이 됐다. 이를 예상하고 연재 전 합숙 훈련을 하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으나 연재가 거듭되면 될수록 화실 문하생들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심리적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다. 인물 잉크 작업을 하는 정세진 군은 손가락에 이상이 생겨 수술까지 받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대규모 전투 장면에 등장하는 말과 군사들을 일일이 손으로 그려야 하는 탓에 펜을 쥔 손가락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작품 후기 中)

질문

이번 작품은 『각시탈』, 『쇠풍소』 이후 30년 만에 내놓은 역사만화다. 역사극은 쉽게 선택할 소재가 아니다. 취재 기간도 현대극에 비해서 훨씬 길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도 역사극을 쓸 계획이 있나.

답변

칭기스 칸 이야기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소재이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그리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현대물도 그릴 거 많으니까 역사극은 다시 안 그릴 작정이다(웃음).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그리면서 소설가가 될 걸 하고 후회했다. 만화는 1만 명이 싸운 전투를 그릴 때 적어도 최소 100명 정도는 그려야 한다. 하지만 소설은 그냥 1만 명이 싸웠다고 쓰면 그만 아닌가. 역사극은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역사를 고증해야 하니 젓가락, 숟가락 하나를 그릴 때도 조심 해야 한다. 머리 아프고 신경 쓰인다. 문하생 네 명이 이번 작업을 함께했는데, 인물 그리는 친구만 매일 늦게까지 남았다. 매일 밤 ‘이 친구가 내일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결국 류마티스관절염에 걸리고 치질까지 도졌다. 나중에는 미치려고 하더라. 맛있는 거 사주면서 조금만 더 참자고 했다. 그게 참 힘들었다.

질문

힘든 만큼 뿌듯한 마음이 두 배가 되지 않나.

답변

물론 뿌듯함도 있다. 애쓰는 만큼 독자들이 만화를 보면서 ‘장관이다’라고 감탄을 해주면 기분 좋다. 하지만 그리는 공에 비해서 효과가 적은 것 같다. 영화는 등장인물이나 사물이 움직이지 않나, 만화는 정적이고…. 만화는 영화보다 감동을 주기가 어려운 매체다.

질문

문하생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무엇인가.

답변

사극을 그릴 때는 칼에 닿으면 막 베일 것 같은 기분이 들게 그리고, 전쟁만화를 그릴 때는 총을 잘 그려야 하고, 음식만화를 그릴 땐 정말 먹고 싶게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예전부터 말을 많이 그렸는데, 요즘 아이들은 말을 그려본 적이 없다. 네 다리를 가진 동물 하나만 잘 그릴 줄 알면, 뼈 구조를 조금만 바꿔 기린, 코끼리 다 그릴 수 있다.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말 그리는 작업만 4개월 동안 했다. 말을 타고 전쟁하는 만화니까 말을 잘 그려야 한다. 말을 못 그리는 작가들은 맨날 앞모습만 그린다. 그 밑은 못 그리니까 가슴 위만 그리는 거다.

질문

문하생이었던 작가 윤태호가 『미생』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제자의 성공을 봤을 때 뿌듯하겠다.

답변

물론이다. 인기 많아서 기분 좋다. 『미생』은 한꺼번에 몰아서 봤다. 재밌더라. 한 달에 한 번씩 화실 출신 제자들을 만난다. 그 전에는 맨날 내가 술값을 내야 했는데 요즘엔 애들이 걷어서 낸다. 그거 굉장히 기분 좋다(웃음).

질문

허영만의 만화는 드라마와 영화의 원작으로 많이 사용됐다. 『식객』, 『타짜』, 『비트』, 『미스터Q』등을 비롯해 최근에는 『각시탈』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원작 제안이 올 때, 어떤 기준으로 제작사를 선택하는지 궁금하다.

답변

우선, 이 사람이 제대로 작품을 골랐는지 파악한다. 최근에 『꼴』을 제작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꼴』은 드라마 거리가 안 되는데, 이 사람은 작가 말만 믿고 무턱대고 잘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몇 차례 찾아오고 설득하더니 안 오더라. 지금도 수많은 제작사가 오늘 생겼다가 내일 사라지고 수도 없이 명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 없이 처음으로 하겠다는 사람에게는 작품을 잘 안 준다. 잡지에 만화를 연재할 때도 창간호라고 하면 가급적 안 한다. 왜냐면 아끼는 원고를 가지고 연재하는데 3,4회 나가다 잡지가 없어지면 이건 말짱 도루묵이다. 제작사가 탄탄한지를 보고, 그 다음에 누가 연출하는지, 그리고 원작료를 얼마나 주는지 본다. 원작료부터 아끼는 회사면 재정이 정말 열악한 회사일 테니까.

질문

원작으로 사용된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무엇인가.

답변

오래 전에 방송됐던 <아스팔트 사나이>와 <미스터Q>가 괜찮았다. 가장 최근에 방송된 <각시탈>도 괜찮았다. 가끔 방송국 PD들이랑 만나면 불만을 토로한다. 왜 꼭 인물의 삼각관계가 들어가야 하는지 나는 그게 불만이다. PD들은 기본 시청률 확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데, 좀 더 발전하려면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하지 않나. 안 그러면 그 자리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야망의 전설> 같은 드라마를 보면 삼각관계가 없어도 그렇게 재밌었다. 그 땐 드라마 방영시간에는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드라마 보려고 집에 있어서. 현 상태를 유지하려고 제자리걸음을 걸으면, 지금은 당장 똑같은 것 같아도 결국 퇴보하게 된다.


그릴 게 너무 많다. 소재의 한계는 없다

『꼴』, 『식객』, 『타짜』, 『비트』, 『미스터Q』, 『각시탈』등 허영만의 작품 이야기를 끝내려면 일주일도 모자라다. 태껸, 권투, 골프, 바둑, 야구, 관상, 음식, 패션 등 그의 펜에서는 늘 새로운 이야기가 창조된다. 허영만은 아직도 “그릴 게 너무 많다. 소재는 한계가 없다”고 말한다.

질문

지금 구상하고 있는 소재는 있나.

답변

『식객』을 다시 쓸 거고 ‘동의보감’을 소재로 한 작품을 구상 중이다. 지난 봄부터 한의사 세 명이랑 준비하고 있다. 『식객』『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하기 전에 끝나서 3년을 소비했는데 이야기를 안 한 게 너무 많다. 음식만한 소재가 없다. 작가가 연필을 놓을 때까지 제대로 무엇을 했냐고 물었을 때, 몇 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작가다. 『식객』이 그 중 하나가 아니겠나 싶다. 완성을 짓고 싶다.

질문

웹툰 연재로 독자를 만나는 것과 단행본으로 만나는 것은 기분이 조금 다를 것 같다.

답변

일단 ‘말무사’는 아쉽게도 여자 독자들이 많지 않다. 『식객』은 남녀노소 다 좋아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여자 독자들이 중요해서 그리고 싶은 걸 안 그릴 순 없지 않나. 웹툰에서 연재하면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한 커트씩 잘라서 올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온오프 같이 가는 시대니까 내가 적응하는 게 맞다. 인쇄 매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흐름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웹툰은 컴퓨터로 작업을 하니까 파일 말고는 남는 게 없다. 파일이 깨지면 날라가 버리는 거다. 아직도 만화가 종이에 남지 않는다는 게 인정하기가 어렵다.

질문

요즘은 전자책 시장도 활발하고 만화는 점차 웹툰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현대만화의 1세대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답변

웹툰의 장점은 무료라는 점이다. 일단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언제든지 쉽게 볼 수 있다는 것, 저변이 넓은 게 장점이다. 하지만 웹툰은 만화가 무료라는 인식을 만들게 해서 과금을 하면 독자들이 만화를 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만화가의 원고료가 형편 없어진다. 이게 빨리 해결이 되어야 공존할 수 있다. 만화가들이 내 이름으로 만화를 독자들에게 선보인다는 기쁨에 웹툰 연재를 시작하는데, 생활고를 겪게 되면 투지가 줄어든다. 포털사이트와 만화가가 함께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질문

후배 만화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답변

예전에 우리는 정말 그림을 잘 그리려고 애를 썼는데, 요즘 작가들을 보면 붓펜으로 쓱쓱 끄적거리고 만다. 그런 걸 볼 땐 화가 난다. 컴퓨터로 장난하는 게 자기 실력인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단행본이 나왔을 때 읽히는 만화가 돼야 한다. 화실 문하생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정확한 데생을 할 수 있어야 잘 그리는 시대는 지나갔다. 표현을 재밌게 해서 독자들이 알기 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질문

국민 만화가로 불리는데 욕심 나는 타이틀은 또 없나.

답변

‘국민 만화가’ 소리를 들으면 국민배우 안성기가 생각난다. 그 사람 참 모범적이고 활동적이다. 난 아직까지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불러주는 거 자체에 고마움을 느낀다. 지금 65세인데 지금 할 일이 있고 목적이 있다는 게 기쁘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 이상 어떤 게 행복이겠나(웃음).




그의 서재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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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허영만 글,그림/이호준 글/김장구 감수 | 월드김영사
국민적 반향을 얻은 『식객』 이후, 허영만 화백이 수 년에 걸친 준비 끝에 집필한 역작. 1974년 데뷔 이래 쉼 없는 창작 활동을 계속해온 허영만 화백은 『식객』 이후 작품의 주인공으로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의 지배자 ‘칭기스 칸’을 선택했다. 칭기스 칸 시대에 몽골인이 집필한 〈몽골비사〉를 바탕으로 수많은 사료들을 조사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꼼꼼한 현장 고증을 거쳐, 광활한 대지를 누비는 칭기스 칸의 모습을 허영만만의 느낌으로 재구성하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나 홀로 떠난 유럽 배낭여행, 인간 김범수를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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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무한도전> ‘못친소(못생긴 친구를 소개해드립니다)’ 파티에 VVVIP로 초대된 김범수. 왠지 빠지면 아쉬울 것 같았는데 역시나 탁월한 예능 감각을 발휘했다. 며칠 전에는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데프콘과의 단일화’를 거부하며 사퇴를 선언했다. 이유인즉, <무한도전> 공식 홈페이지에서 진행 중인 ‘F1(Face1)’ 네티즌 투표에서 김범수가 2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1위 조정치(신치림)를 이기려면 ‘데프콘과의 단일화가 시급하다’는 한 청취자의 의견에 “오늘부로 사퇴하겠다”고 밝힌 것. 김범수의 야권단일화 패러디에 청취자들은 폭소했다.

김범수는 지난해 MBC <나는 가수다>를 통해 ‘얼굴 없는 가수’에서 ‘비주얼 가수’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 말한다. “얼굴과 외모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늘 시달려 왔는데, 그 잘나지 못한 외모 덕에 더욱 주목 받는 가수가 됐다”고. 김범수는 “가장 좋지 않은 상황이 가장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걸 누가 알았을까”라며 막다른 길에서도 준비하며 기다리면 언제든 길이 생긴다고 말한다. 김범수는 패티김처럼 일흔까지 노래하고 멋지게 은퇴하는 것이 꿈이다.


마음은 풍족했지만 몸은 지쳤다


“2012년 3월.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고 기대 이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13년 동안 얼굴 없는 가수로 살면서 내 안의 모든 응어리가 프로그램 하나로 완벽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나는 보여줄 수 없는 가수였으니까. 길고 긴 시간 갈고 닦은 실력을 무대에서 펼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좋아해 주었다. 인지도가 올라가니 노래도 덩달아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내 공연장을 찾아 주고 함께 즐기는 맛이 생겼다. 대중적이라는 매력이 이런 거구나. 그래서 가수에게 인기가 필요한 거구나. 마음은 풍족했지만 몸은 많이 지쳤다. 연말 공연까지 끊임없이 달려온 나 자신에게 휴식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 때문이었다. 욕심만 낸 탓에 건강한 성대에도 조금씩 무리가 가기 시작했고, 대책 없이 그냥 앞으로 내달리기만 했던 거다. 그래서 40일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김범수가 나 홀로 유럽으로 향했다. 40일 동안 9개국 21개 도시. 벼르고 벼르던 유럽 여행이라 도시 하나라도 더 돌아보기 위해 빡빡한 스케줄을 짰다. 김범수는 유럽의 낡은 건물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붐비는 레스토랑과 거리에서 가득한 낯선 음악을 느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나는 가수다> 이후 너무 지쳐있었으니까요. 친구들과 함께 갈 수도 있었지만 혼자 갔어요. 지쳐서 떠난 여행이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르셀로나의 해변이에요. 그 곳의 풍광이 정말 잊히지 않아요. 원래 반나절 일정이었는데 하루 내내 있었어요. 번잡한 도시에만 있다가 한적한 곳을 가니까 마음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어요. 다른 도시에서는 이것저것 열심히 했는데 여기선 아무 것도 안 했어요.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오랜 기간 혼자서, 낯선 땅에, 그것도 몸집보다 더 큰 배낭 두 개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김범수는 연예인 아닌가. 여행 중에 동행인이 정말 없었을까 물으니, 그는 “정말 혼자 다녀왔어요”라며 싱겁게 웃었다.


“그냥 가까운 나라에 가서 며칠 푹 쉬다 오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도 있었지만, 제대하고 복귀하기 전에 유럽여행을 가지 못한 게 늘 아쉬움으로 남았어요. 카메라만 들이대면 어디든 그림이 된다는 스페인은 정말 가보고 싶었고요. 오래된 맛집에 가서 하염없이 기다려도 보고, 안 되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우여곡절 끝에 잃어버린 짐도 찾았어요. 혼자 떠난 여행이었기에 더 많은 풍경을 보고 더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온 것 같아요.”

『나는 미남이다』를 처음 기획했을 때는 여행 에세이로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하는 동안 스스로를 되돌아볼 시간이 많았다. 이왕 책을 낼 거면, 가수 김범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흔한 유럽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김범수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담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책 내용이 엄청 솔직해요. 꾸며서 쓰는 건 싫었거든요. 내 어두운 부분까지도 털어놓아야 많은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글을 잘 쓰지 못해 수려한 문장도 없고 어색한 부분도 많지만 뭔가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들, 꿈을 꾸려는 드리머(Dreamer)들에게 용기가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김범수도 했는데, 당신은 더 잘할 수 있어요


“고된 일정으로 하루를 보낸 어느 날이었다. 늦은 밤 지친 몸을 기차에 겨우 싣고 다음 여행지 일정표를 펼쳤다. 너무 힘이 들어 잠조차 제대로 오지 않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게 뭐지? 쉬려고 온 거 아니었나?’ 싶었다. 짜디짠 프리첼과 에비앙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돌아다니지 말고 가만히 있는, 여유와 쉼의 여행이어야 했나?’하는 잠깐의 후회가 스쳤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그 고생스럽던 여행이 돌이켜 보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유럽 돌길을 걸으며 다리가 끊어질 만큼 아프기도 했고, 함께 나눌 동행이 없어 미치도록 외롭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정리하며 한 장 한 장 지난 사진을 넘겨보는 동안 ‘와, 내 여행 꽤 괜찮았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유럽여행을 하는 중에 <나는 가수다>를 열심히 봤다는 외국인들도 만나고, KPOP, 아이돌그룹을 좋아한다는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성수기를 피해서 떠난 여행이었기에 적당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영국에도 한류가 많이 퍼져있더라고요. 사실 유럽에 가서 한국 사람 말고, 나를 알아볼 사람이 몇 있을까 했는데 놀랬어요. 런던에서는 공연을 많이 봤는데, 원래 <라이언 킹>만 보려고 했는데 너무 감동을 받아서 다음날 도미니언 시어터에서 상시 공연하는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도 보러 갔어요. 퀸의 음악을 가지고 만든 뮤지컬인데 정말 대단했어요. 우리나라도 소프트웨어는 참 좋으니까, 특색 있는 공연이 많이 늘어나고 그에 걸맞은 극장이 늘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나는 가수다> 무대 준비를 하면서 참 힘들지만 행복했다. 그리고 유럽 배낭여행 역시 ‘이렇게 고생스러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 그립다. 김범수는 ‘열망’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당시에는 고되고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그게 모두 열망의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써 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오랫동안 고민했다. 아직 인생을 깊이, 많이 살아 본 것도 아닌데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책을 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겸손이 아니고 사실이니까. 김범수는 에세이를 준비하면서 평소에 잘 읽지도 않았던 책을 여러 권 꺼내 읽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이병률의 『끌림』. 요즘에는 이병률의 신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고 있다고 한다.

“책을 쓰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오히려 이런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래, 김범수도 했는데 나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보다 더 많은 걸 가지고 인생의 출발점에 선 사람들이라면, 더 큰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는 미남이다』를 읽다 보면, 재미있는 페이지가 있다. 가수 박선주, 윤도현, 박정현, 심수봉, 신승훈, 인순이, 작곡가 윤일상, 김영희 PD가 김범수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썼다. 단순한 추천사가 아닌 자신이 느낀 김범수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박선주는 ‘지독한 연습벌레’라고 김범수를 표현했고, 박정현은 ‘음원이 아까운 가수’, 윤일상은 ‘참을성 있는 가수’, 김영희 PD는 ‘가짜가 아닌 진짜 가수’, 윤도현은 ‘느낌 없음’이라고 말했다. 김범수에게 물었다. 가장 자신을 잘 표현한 사람은 누구이냐고.


“윤도현 형이 제 첫인상이 솔직히 느낌 없었대요. 아주 촌스러워 보였고 샛노란 염색 머리에 날카로운 선글라스, 색 바랜 블랙진을 입고 있었다며(웃음). 지인 분들한테 짧은 글을 부탁했는데 도현 형은 ‘김범수, 느낌 없음’ 이렇게 써줬어요. 정말 웃기지 않아요? 도현 형은 정말 꾸밈 없이 솔직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죠.”

김범수는 <나는 가수다>를 통해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쳤고, 가수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변하고 싶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변하는 모습도 있겠지만 늘 초심, ‘얼굴 없는 가수’ 시절을 기억하려고 한다. 대중들과 새롭게 만나기 위해 책을 냈지만, 어떻게 보면 스스로를 더 깊이 만나본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김범수에게 평소 좋아하는 글귀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겸손이 최고의 자신감이다”라는 말을 꺼냈다.

“늘 가슴 속에 품고 다니는 말이에요. 부족하면 더 포장하고 꾸미려고 하잖아요.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이미 멋있거든요. 자신감으로 저를 채워서 그것을 겸손하게 표현하고 싶어요.”

김범수는 “노래를 잘하는 법? 그런 방법 따위는 애초에 없다”고 말한다. 12년을 사랑한 사람과 이별하고 나서 ‘끝사랑’을 녹음했을 때. 정말 끝사랑을 경험했기에 음정, 박자, 고음 처리만 신경 쓰던 과거의 노래와는 확실히 달랐다고 고백한다. “노래를 하려면 아파도 보고 아프게도 해봐야지, 이런 삶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슨 감동을 줄 수 있겠나.”김범수는 말한다. “노래를 많이 불러 보면 안다. 인생처럼 부르다 보면 언젠가는 내 인생이 담긴 내 노래로 만들어진 순간이 온다”고. 그렇다. 여기에 김범수가 노래를 잘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꽤 꼼꼼한 성격이라서 평생의 계획을 세워 놓았다. 20대의 계획은 가수가 되는 거였다. 30대부터는 좀 더 발전한 가수, 좀 더 알려진 가수가 되어 10년 안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것, 그리고 일흔까지 쉬지 않고 노래하는 것. 은퇴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콘서트도 하고 많은 무대에 오르는 게 나의 목표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본다면 패티김 선생님처럼 살고 싶은 거다. 일흔이 되어서도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하고, 세대를 아우르는 노래와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가수다 되고 싶다. 1960년대에도, 1970년대에도, 지금도 선생님의 노래는 여전히 인기니까. 그리고 54주년이 되는 어느 날 은퇴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멋지게 마무리하겠다고 생각한다.”(p.218)

“나보다 더 많은 걸 가지고 인생의 출발점에 선 당신들,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줄 수 있다면 좋겠구나,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녀온 긴 여행, 그 속에서 건져낸 보석이 되길 소원한다.”(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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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나는 미남이다김범수 저 | 스타일북스
가수 김범수가 유럽 여행을 떠났다. 모차르트의 도시 빈, 프레디 머큐리가 마지막 생을 살았다는 몽트뢰, 비틀즈의 런던과 물랑루즈의 파리. 40일 동안 삶에 쉼표를 찍으며 지나간 추억, 그리고 인생을 되짚어본다. 스무살에 노래를 처음 알았고, 좋은 목소리 하나로 가수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13년이 흘렀다. 무모할 만큼 미련하게 보낸 연습생 시절. 음치, 박치를 극복하고 가수가 되기까지의 여정. 그리고 얼굴 없는 가수로 보낸 수많은 세월들. ‘비주얼 가수’로 반전의 이미지를 선보이며 대중의 인기를 얻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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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소설이 거짓말의 대명사가 되었나” - 황석영 『여울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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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삶이 투영된다. 자신의 경험을 녹이고 색깔을 입혀 주인공을 만들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시대가 다르고 표현이 달라도 작가가 창조한 인물은 어떤 면에서 ‘작가의 아바타’가 된다. 독자들은 작가에게 늘 궁금하다.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 속에 작가가 얼만큼 닿아 있는지. 황석영은 말한다. “작품은 작가에게 분신과 같다”고. 많은 이들이 『여울물 소리』를 두고 황석영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황석영에겐 그 어떤 소설도 ‘자전적 작품’이 아닌 적이 없었다.

문학을 좋아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문학을 만드는 사람의 인생은 어떠하랴. 대한민국 문단을 이야기할 때, 황석영을 논하지 않으면 매우 지루할 것이다. 한국 근대사를 온 몸으로 경험한 이야기꾼 황석영은 어린 시절부터 작가를 꿈 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피난 갔던 이야기를 쓴 작문이 전국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고, 고등학생 재학 당시, 《사상계》의 신인문학상에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월남, 한국전쟁, 베트남전, 방북, 투옥을 겪으며 현실주의 중단편 『객지』, 『삼포 가는 길』등을 발표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등 장편소설을 주로 집필했다. 그리고 등단 50주년을 맞은 지금, 그의 신작이 나오면 독자들은 무의식적으로 황석영의 작품을 손에 든다. 1974년 『장길산』을 무려 10년간 신문 연재한 그의 근성은 최근 『여울물 소리』를 비롯해, 『강남몽』, 『개밥바라기별』, 『바리데기』등을 꾸준히 집필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남다른 인생을 살았기에 작가 황석영은 풀어놓을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아직도 품에서 꺼내 놓지 못한 소재들이 서로 먼저 나오겠다고 아우성이다. 문학을 좋아해서 인생이 꼬일 대로 꼬였지만(?), 황석영은 쓸 거리가 많은 부자 작가가 됐다. 등단 50주년이면 자서전을 써도 민망하지 않을 때지만, 황석영은 자전적 소설을 들고 독자들을 찾았다. 그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위로하는 소설, 사람을 위로하는 여울물 소리


“이야기꾼 이야기를 쓰겠다고 작정하고, 처음에는 19세기쯤에 갖다 놓고 그냥 허황한 민담조의 서사를 쓰려고 했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우리네 그맘때의 현실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올해는 대선까지 있어서 더욱 실감할 수 있지만, 돌이켜보면 ‘근대적 상처’의 잔재가 지금도 우리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작가의 말 中)

『여울물 소리』는 격변의 19세기 말, 박연옥이라는 여인이 연정을 품은 전기수(이야기꾼) 이신통의 행적을 쫓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소설은 연옥의 입을 통해 모자이크 벽화처럼 이신통의 자취가 드러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서얼의 서자로 태어나 전기수, 강담사, 재담꾼, 광대물주, 연희 대본가, 나중에는 천지도에 입도하여 혁명에 참가하는 이신통의 삶은 혼란스러웠던 조선 후기의 모습을 그대로 증언한다. 황석영은 ‘수상한 중인층’인 이야기꾼 신통을 통해 이야기는 왜 존재하며 이야기꾼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질문

등단 50주년을 기념하여 낸 작품이 『여울물 소리』다. 평론가들이 황석영 문학을 볼 때, 보통 방북 전과 이후를 두고 평가하는데, 『여울물 소리』는 어떤 흐름 속에 집필한 소설인가.

답변

내 작품을 전기문학과 후기문학으로 나눈다면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장길산』, 『무기의 그늘』이 전기라고 볼 수 있는데, 리얼리즘의 원칙들을 지켜나가면서 현실과 치열하게 맞섰다. 망명 후 투옥 이후의 후기 소설은 과거의 한정된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자기확장을 통해 세계 보편적 현실을 담아 새로운 산문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오래된 정원』이 산문을 해체하고 고백체, 내지 내면소설로 인칭과 인칭을 넘나든 소설인데, 이것이 시작이었다. 연이어서 『심청』, 『손님』, 『바리데기』등이 그 궤를 같이 하고, 『여울물 소리』는 후기 작품 중 가장 정점을 이루는 소설이라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이제부터는 만년문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울물 소리』는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기 전, 방점을 찍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여향의 미학을 펼치고 싶다.

질문

이야기꾼을 소재로 사용한 것은 황석영을 투영한 것인가.

답변

올해로 칠순을 맞았다. 자서전이나 자전적 작품을 쓰는 것 보다는 작가 일생을 19세기라는 배경에 갖다 놓고 이야기해본다면, 나에게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질문

초창기에는 남성적인 작품을 주로 쓰다가 후기로 가면서 화자가 여성인 작품을 집필했다. 『여울물 소리』도 여성 연옥이 화자로 등장하는데, 어떤 연유인가.

답변

과거 20세기 전에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상처를 주고 억압을 주는 세계였다면, 이제 여성들의 역할이 바뀌어가고 있다. 여성이 화자로 등장하는 것은 남성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서다. 우리 시대가 포스트모던 시대로 들어온 것 같지만, 사실 내용을 보면 아직 근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신통은 장길산처럼 영웅도 아니고 특출한 권력이나 힘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연옥의 해설을 통해 신통의 삶을 추적하는 것은 이신통의 여러 편모를 보기 위해서다. 『여울물 소리』는 과거 『장길산』과 다르게 역사가 전면으로 등장하지 않고 배경으로 등장한다. 동학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다루지만 작은 에피소드로 처리하고, 전면에는 주인공의 자잘한 일상들을 그렸다. 시대를 배경으로 입히면 주인공의 삶이 이해될 수 있다.

“까무룩하게 잠이 들었다가 얼마나 잤는지 문득 깨었다.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눈 감고 있을 때는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다가 눈을 뜨면 멀찍이 물러서서 아주 작아졌다. 가만히 숨죽이고 그 소리를 들었다. 여울물 소리는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고 흐느끼다 또는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는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러갔다.”(p.488)

질문

이야기꾼의 일생을 담은 소설의 제목을 『여울물 소리』로 지은 까닭은 무엇인가.

답변

소설에서 연옥이 잠결에 여울물 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산사에서 여울물 소리를 종종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물소리라는 것이 보통 때는 잘 안 들린다. 하지만 정적이 흐를 때, 멀리서 들리는 소리인데도 갑자기 생생하게 들릴 때가 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재깔재깔 웃는 것 같고, 또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독자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렵고 고단한 세월 속에서 흐르는 물처럼 무심하게 살더라.” 물소리가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했다.

질문

『개밥바라기별』과 같이 『여울물 소리』도 인터넷으로 연재한 작품이다. 연재를 하면서 쓰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의 차이가 있나.

답변

거의 다르지 않다. 연재에 맞게 소설을 바꾼 적이 없다. 『손님』이나 『바리데기』는 앞뒤로 들락날락하고 판타지가 나왔다가 현실이 나왔다 하니까 어떤 면에서 어려운 소설이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데, 독자들이 제법 잘 따라와 몰아서 읽기도 하고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연재하는 것과 그냥 전작으로 쓰는 거랑 차이를 두지 않는다.

질문

『여울물 소리』를 읽어보면 대하소설로 써도 될 법한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리즈로 집필한 생각은 없었나.

답변

대하소설은 19세기 매체다. 다른 매체나 미디어가 없고 생활의 오락이 많지 않았을 때의 양식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1970년대 경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신문이나 잡지에 대하소설을 연재하는 것이 추세였다.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썼고 그 다음에 내가 『장길산』, 그 다음에 김주영의 『객주』, 최명희의 『혼불』,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이어졌다. 대하소설은 서구에서는 이미 없어진 양식이다. 점점 소설이 짧아진다. 이제 경단편이라고 해서 1천 매 이내의 소설이 나오고, 심지어 중편이라고 했던 400,500매도 장편으로 치는 추세다. 지금은 일상이 복잡하고 할 일도 많고 다른 매체도 많기 때문에 굳이 책만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미디어가 전자화가 되면서 소설의 양식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묘사적 양식보다는 장면에서 장면으로 전환되는 마치 영상적인 흐름이 주가 될 것이다. 시나리오를 보면 문장 한 줄, 대사 한 줄에 장면이 훅 가버린다. 그런 식의 압축된 소설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생겨나나,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어떤 것이 남고 어떤 것이 사라지나, 다른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만든 이들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들이 당대를 어떻게 살아냈으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 길은 없으나 이들이 남긴 수백 종의 언패 소설과 판소리 대본과 민담, 민요 등등은 눈보라 속을 걷는 나에게 먼저 간 이가 남긴 발자취와도 같았다. 이들과 단절되어 제국주의의 침입과 함께 이식문화로 시작된 한국 근현대문학의 원류를 더듬어 이제 울창한 우리네 서사의 숲에 들어선 느낌이다.”


어느 순간이 문학이 당신에게 말을 걸 것이다

황석영은 올해 초까지 KBS <이야기쇼 두드림> MC를 맡았다. 평상시 트위터와 댓글로 독자들과 소통을 즐기는 그이지만, 다소 뜻밖의 등장이었다. 그는 제작진에게 직접 제안해, 서울 소년원에서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사는 것이다’라는 주제로 교도소 독방수감 5년의 경험과 자살시도를 했던 청년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황석영은 인터뷰 시작 전, 『여울물 소리』가 어렵지 않냐?”며 젊은이들이 읽기에 어떠냐며 젊은 독자층의 반응을 궁금해했다. 그는 언제나 소통하는 작가다. 독자와의 만남, 인터넷 연재 댓글 달기는 그에게 청년들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통로다.

질문

요즘 청년들을 위로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베스트셀러도 에세이가 주를 이루는 추세인데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답변

세상살이에 지쳐있는 사람들이 몇 줄의 이야기에서 위안을 받고, 자기가 혼자서 풀 수 없는 문제들을 책에 나오는 문장에 의미를 부여해 용기를 얻는 것 같다. 대한민국이 한 때 세계 7위의 출판대국이었는데 지금은 부진해서 몇 위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대형서점에 가면 인문서적의 반이 자기계발서이고, 학습서만 잔뜩 쌓여 있다. 사람들이 지쳐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걸로 풀 게 아니라 본격적인 고전이나 문학을 통해 자기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눈 앞에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좋고 위안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근시안적인 독서만 한다면 언 발에 오줌 누기가 된다. 결국에는 동상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질문

작가로서 걱정스러운 마음과 함께 서운한 감정도 들겠다.

답변

에세이 같은 책을 즐겨 읽다가 본격적인 문학으로 오면 좋은데, 다만 섭섭한 것은 언제부턴가 소설이 거짓말의 대명사가 됐다는 거다. 요즘 툭 하면 하는 이야기가 “소설 쓰지마”, 거짓말 하지 말라는 소리다. 그것도 정치인들이 제일 많이 한다. 어느 나라도 문학을 사회 교양의 주축으로 보고 굉장히 존중하는데, 우리나라는 소설을 거짓말의 대명사라며, 그것도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폭언을 한다. 답답하다.

질문

지금 이 시대의 독서 문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답변

가장 안타까운 건 가벼운 책, 쉬운 책만 읽으려 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이면 플라톤, 공맹자면 공맹자, 어려워도 오리지널 즉 원본을 읽어서 스스로 양식화해야 자기 사고가 발전하는데, 지루하고 어렵다고 곁다리로 해설서나 축약판만 읽고 있다. 요새 경향이 가볍다고 무조건 따라가면 발전이 없다. 힘들어도 오리지널, 고전을 읽는 습관을 가져야 발전할 수 있다.

질문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답변

작품을 쓰는 것에 대해 신비화를 경계해야 한다. 영감은 하늘에서 벼락처럼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일상적으로 책을 열심히 읽으며 차분차분 구축해 가는 것이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근육을 키우려면 가벼운 운동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근육이 붙는다는 이야기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다. 글 쓰는 재간에 대한 신비화는 좋지 않다. 심지어 문학을 잊고 열심히 살다 보면, 성숙화된 문학이 어느 순간 네 등을 두드릴 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나 아직 어디 가지 않았다’고 문학이 네게 말을 걸 것이다.

질문

어떤 사람이 작가가 되면 좋을까.

답변

신춘문예 심사를 해보면, 이런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대개 보면 10여 년 동안 보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무난한 작품이 올라온다. 구성의 방법, 인물의 설정 이런 것들이 대개 비슷비슷하다. 정말 흠 잡을 수없이 무난하다. 아쉬운 건 조금 서투르다 해도 기발한, 눈에 번쩍 뜨는, ‘어떻게 이런 시각으로 다뤘지?’ 하는 것들이 드물다는 거다. 작가는 작법, 문장력 보다 중요한 것이 창의적으로 이야깃거리를 잡아채는 관점을 갖는 게 중요하다. 누구나 동시대 속에 섞여 살면서 많은 상황이나 조건을 겪는데, 작가는 그 속에서 이야깃거리를 잡아채는 사람이다. ‘어떤 것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냐’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작가다.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

질문

작가가 어떤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것 같다.

답변

사람은 성장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 인간을 보는 눈이 생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관이다. 세계관을 자기 안에서 세워야 하는데, 연령이나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당대에 한 작가가 어떤 세계관 갖느냐에 따라 관점이 다양해질 수 있다. 문장 수련, 구성의 방법, 문체 이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작가적 관점이다. 이건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다. 직접 체험을 많이 하면서 그것이 자산이 될 수도 있고, 굳이 모험을 안 한다고 해도 취재를 통해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 작가라면 다양한 체험, 노력을 통해 자산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뚜렷한 관점이 생길 수 있다.

질문

90세까지 작품활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작품세계는 어떻게 달라지나.

답변

중단편을 쓰면서, 당대의 이 현실과 밀착해 작품을 다룰 것이다. 대한민국의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지금도 선거 때가 되면 이데올로기 문제가 나오고 근대의 상처가 드러난다. 앞으로도 현실의 모순을 더 파고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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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저 | 자음과모음
『여울물 소리』는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자신을 돌아보며 19세기의 ‘이야기꾼’에 대해 집필한 자전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미 인터넷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기도 했다. 『여울물 소리』는 외세와 신문물이 들이치며 봉건적 신분 질서가 무너져가던 격변의 19세기를 배경으로 이야기꾼 ‘이신통’의 일생을 뒤쫓는 내용으로 동학과 증산도, 이야기꾼이라는 존재를 큰 축으로 하고 있다…






황석영 작가의 저서들

[ 삼포가는 길 ]
[ 장길산 ]
[ 바리데기 ]
[ 개밥바라기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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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아프면 뭐 청춘이 아닌가요? - 이지형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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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조 얼터너티브 록 밴드 위퍼(Weeper)로 대표되는 인디 1세대 뮤지션이자 여성 팬들이라면 한 번쯤 마음이 흔들렸을 꽃미남 가수 이지형이 젊은 날을 회고하는 어른이 되었다. 패기 있는 젊은 뮤지션과 로망을 꿈꾸게 하는 오빠보다는 이제 40대를 준비하는 선배 가수나 또는 가족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의 모습 더욱 어울릴 위치에 서 있다. 젊음의 고속도로를 달려왔던 그가 청춘을 되돌아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청춘마끼아또 >라는 앨범과 함께 돌아온 어른 이지형이 그 이유를 밝혔다.

질문

요즘은 정규 앨범 한 장도 나오기 힘든 환경인데 더블 앨범을 발표했다.

답변

안 좋죠. (더블 앨범을 발표할) 필요가 없죠. 작업하다 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서 곡을 세어봤더니 분량이 처음에는 70곡이었어요. 이후에 50곡으로, 또 20곡으로 줄이고. 이제는 더 이상 줄일 수 없게 되었는데 사실 20여 트랙이면 CD 한 장에 수록할 수는 없잖아요. 이걸 다 담을 수 있는 포맷이 무엇일까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제야 내가 더블 앨범을 제작하게 되는 건가 생각이 들었어요. 이전부터 로망이기는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인으로서 버킷 리스트가 있거든요. ‘저 사람이랑 협연하고 싶다’ 혹은 ‘저 무대에 서고 싶어’, ‘이런 앨범을 만들고 싶어’와 같은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가 비틀즈나, 핑크 플로이드처럼 더블 앨범 한 번 만들고 싶다는 게 중학교 때부터 갖고 있었던 꿈이었어요. (더블 앨범의 형식을 발매한다는 것이) 지금이랑은 물론 되게 안 맞는 일이기는 하죠. 뭐가 어떻게 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앞으로는 CD라는 하드웨어 자체가 없어질 것같이 보이거든요.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했죠.

질문

예전에도 그렇고 커피에 관련된 앨범을 많이 발표한 것 같다.

답변

네. 커피에 관한 앨범을 낸 적이 있었고 곡도 있었고. 공연 움직임도 관련이 있었고요. 지금처럼 홍대에 카페가 많지 않았던 7년 전쯤에도 카페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었거든요. 정해진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공연하는 게 편했었어요. 저를 좋아하시는 분들한테는 ‘이지형=커피’ 라는 인식이 많은데 “이번에 앨범이 <청춘마끼아또 >입니다”라고 회사 트위터에 올리니까 “이제는 커피를 아주 작정하고 끝을 보려고 그러냐”, “저 사람은 커피 밖에 할 말이 없나?” 같은 안 좋은 댓글들도 올라오더라고요. “이제 그 커피와 관련된 이미지 좀 벗지?”라는 말도 있고. 사실 이번 앨범은 커피와는 상관이 없는데 (웃음)

질문

마끼아또라는 단어 자체가 커피를 떠올리긴 한다.

답변

네. 그런데 마끼아또는 얼룩지다라는 의미에요. 사실 저도 뜻을 안지는 얼마 안 됐어요. 얼룩진 청춘으로 제목을 지었을 때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하지 라고 고민을 했는데 ‘마끼아또’ 어감이 너무 좋았어요. 리듬감도 있고. 왠지 뜻을 알고 나니까 저는 커피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질문

첫 곡을 뭐라고 읽어야 하나.

답변

저도 잘 모르겠는데 이 기호가 파이래요. 얕은 대답일 수도 있는데 그냥 인트로에요. 그런데 인트로라는 제목을 쓰기는 싫고, 어떻게 보면 프롤로그도 아니고 너무 억지로 제목을 붙이려니 이 기호가 보였던 거죠. 파이는 여러 의미가 있어요. 음악 레코딩할 때 쓰는 용어기도 하고, 마침 검색해보니 핏자국을 뜻하는 그리스 상형문자래요. 상처가 난 자국이라서 핏자국, 얼룩, 상처라는 뜻이 있더라고요. 그냥 한 번 그 모양을 넣어볼까 생각했는데 의미까지 일치되면서 우연찮게 얻어 걸린거죠.

질문

<청춘마끼아또 >앨범의 일부 곡들은 위퍼 시절부터 만들려고 한 노래라고 하던데.

답변

멜로디와 편곡 만요. 그 곡들은 위퍼(Weeper) 때 만들었는데 멤버들이 안 좋아했고, (웃음) 그래서 한 두 번 합주하다가 중단하고. 이지형으로 데뷔해서도 내 앨범에 써볼까라는 마음은 들었는데 뭐랄까 저 조차도 제대로 된 완성품 같은 느낌이 매번 안 들었어요. 그래서 더 멋있게 만들려고 편곡도 바꿔보고 멜로디도 바꿔보고 그러다보니 순간 아예 다른 곡으로 바뀌어 있었어요. 눈엣가시 같았죠. 애착은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될까 싶은 애물단지처럼 곡이 17년 동안 묵혀있었죠.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서 그 당시의 느낌을 담아 이번 앨범에 실었어요.

질문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만들었던 곡을 다시 완성하면서 이지형의 청춘 또한 완성한 게 아닌가라는 느낌이 든다.

답변

물론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지금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 만들 수는 있겠지만, 위퍼가 제 20대 초반의 느낌이 있어서 지금보다는 러프함이 더 있는 것 같아요. 이제는 힘들고. (웃음) 어렸을 때는 그런 음악이 쉬웠는데.

질문

앨범들이 마치 컨셉 앨범 같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답변

원래 1, 2집도 그렇고 컨셉 앨범의 방식으로 곡 작업을 한 적은 없었어요. 1집 이후에 만든 음악이 2집이고, 2집 이후에 만든 음악이 3집인 이런 형식이지, 패션이나 사운드의 컬러에 컨셉은 있는데 정서적인 주제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앨범을 만든 적은 없었거든요. 많은 아티스트 분들이 그러실 거에요. 그런데 3집 <봄의 기적 >앨범부터 한 컨셉 잡고 하나의 앨범을 만드는데서 정말 매력을 많이 느꼈어요. 그리고 그 때부터 컨셉 앨범에 대해 의미를 많이 부여하게 되었죠. 게다가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싱글 싸움의 시대로 변했잖아요. 더욱더 앨범에 가치를 부여를 하고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컨셉으로 가는 게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질문

어떤 주제를 담아내었는가.

답변

청춘이죠 청춘. 청춘이라는 이야기는, 물론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20대의 스토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런데 흔히들 생각하게 되는 청춘의 밝고 아름답고 멋있고 그런 이야기들보다는 그늘과 얼룩지고 어두운 반대의 이야기들로만 채우려 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런 게 제 20대의 내면이었던 것 같아요. 누구나 비슷했을 것 같고 저만 특별했던 건 아니었을 것 같고요.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숨기고 싶은 이야기, 지우고 싶은 이야기, 애써 고백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들을 이때 아니면 말하지 못하겠다 싶어서 20대를 정리하는 일을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질문

구성의 측면에서 첫 번째 CD는 밝은 느낌이라면 마지막 트랙 「악취」가 귀에 좀 걸리더라. 복선 같기도 하고 의도한 결과인가.

답변

사운드를 의도한 거는 굳이 따지자면 욕설을 굉장히 아름답게 하고 싶었어요. 더러워. 너는 더럽고, 수상한 향기가 나고, 더러운 향기가 나고 역겹고 그런 가사를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언뜻 들으면 편안한 포크 송인데 가사를 파고 들어가면 “어? 왜 이런 가사가 있지?” 그런 느낌을 연출하고 싶었는데. 어렸을 때는 이런 느낌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반항심인지 날이 서 있었던 건지 모르겠는데. 부모님을 보고 그런 감정을 느꼈던 적도 있었고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면 안 됐었는데.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매 순간이 이랬던 것 같아요. 싸울 자신이 없었어요. 저 혼자서 자위하고 혼자 스스로 뒷담화 하고. 하지만 그 사람을 이기려는 용기는 없었거든요. 그냥 혼자서 일기장에다 쓰는 거였죠 뭐. 그 사람 앞에서는 착한 척, 듣는 척, 하지만 내심 심장은 괴로워하고 안에서는 이를 갈고 있고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바보 같았어요.

제 20대를 돌아봤을 때 나름 멋있어있을 줄 알았거든요. 기억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그냥 멀뚱히 앉아서 기억하고 써볼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런 기억은 오랜 시간에 걸쳐 미화된 기억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부모님 집에 가서 제 정리함이 있어요. 성적표, 교과서, 연애편지, 친구들한테 받은 편지, 크리스마스카드 그런 게 있는 함이 있는데 가지고 와서 다 펼쳐봤거든요. 사진 안에 이 말도 안 되는 패션은 뭐지? (웃음) 성적표에 낙서되어있던 이 그림은 뭐지? 도색 잡지에서 접어놨던 이 페이지는 도대체 무슨 의미지? 그것부터 알리바이를 파헤치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나니 미화되지 않은 본연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더라고요.

질문

첫 경험의 순간들은 「열아홉 밤공기」에 담았나?

답변

열아홉이 아니고 열일곱이었는데, 열일곱으로 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아서. 열아홉이 어떻게 보면 성인의 경계에 있는 선이잖아요. “우린 달콤한 선을 밟고 있어”라는 가사가 있는데 그 선이라면 열일곱보다는 열아홉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어요. 열일곱은 너무 발랑 까진 것 같아서 (웃음) 이런 거짓말을 했고요. (웃음)

질문

첫 경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한건가.

답변

기타를 배운 것은 중학교 1학년이었고요 밴드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요. 그 때 밴드는 학교 친구들과 했던 거고요. 위퍼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결성했어요.

질문

위퍼도 학교 밴드인가?

답변

처음에는 친구들끼리 만든 밴드였어요. 학교 밴드는 따로 있었고. 학교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밴드들 있잖아요. 그런데 학교 밴드 안에 있는 애들이 너무 유치해서 (웃음) 못 섞이겠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멋있는 음악 하자고 해서 친구들끼리 따로 만든 밴드가 위퍼였죠.

질문

멋있는 밴드이지 않았나.

답변

멋있지는 않았고요 너바나(Nirvana) 카피 밴드였어요 (웃음) 그 당시에 얼터너티브를 좋아하는 애들이 별로 없었고 순전히 메탈리카(Metallica), 메가데스(Megadeth), 스키드 로우(Skid Row) 이런 거 좋아했으니까요. 얼터너티브는 이제 막 시작했을 때라서 당시에는 인기가 별로 없었죠.

질문

당시 좋아했던 커트 코베인(Kurt Cobain)과 지금 마음속에 있는 커트 코베인의 이미지가 변하지는 않았나. 이번 앨범에도 커트 코베인과 관련된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이라는 노래가 있던데?

답변

20대 중반까지 커트 코베인은 이지형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가장 많이 흔든 존재였어요. 영웅이죠. 종교였고, 성경이었고. 그러다가 정신병이 들 정도로 제가 커트 코베인인줄 알았어요. 모든 걸 따라했어요. 뮤직비디오나 잡지를 보고 이태원에 가서 똑같은 옷, 똑같은 신발 사고. 노래를 만들어도 코베인이 쓸 법한 코드로 작곡하고, 퍼포먼스도 따라하려고 그러고, 머리도 기르고, 그리고 머리를 잘 안 감았죠. 그래서 제가 두 달 동안 머리를 안 감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금발은 두 달 동안 머리를 안 감아도 예쁜 머리가 나오는데. 검은 머리는 하루 이틀 안 감으면 멋있는 떡진 머리가 안 나와요. 정말 거지 같아요. (웃음)

또 제가 공부를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외국 잡지들에서 나오는 커트 코베인 인터뷰를 다 해석했어요. 사전보고. 그리고 이 사람은 이런 말은 왜 하고, 이런 질문을 하면 이렇게 대답하는구나 하고 외우고 다녔어요. 커트 코베인이 되려고 표정도 연습했고 말도 안 했고. 제가 커트 코베인을 따라한 것 중에서 안 한거는 마약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마약은 우리나라에서 할 수가 없으니까. (웃음) 다행히 커트 코베인이 성적으로 문란하지는 않은 사람이라서, 마약과 환상과 자아 밖에 없던 사람이라서. 무대에 올라가서는 내가 커트 코베인이야 하고 빙의를 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드럭 클럽에는 전체 관객들의 절반이었을 정도로 미군들이 많이 왔었어요. 그 미군들이 제가 너바나 카피하는 공연들을 보고 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렸어요. 저한테 항상 커트 코베인이라고 해주고요. 그 당시에 너바나를 카피했던 수많은 밴드 중에서 위퍼하고 코코어(Cocore)가 있었는데. 거기서 노래하던 (이)우성이형이 진짜 커트 코베인이냐, 이지형이 진짜 커트 코베인이냐 항상 논쟁을 했었어요.

질문

너바나는 인생 자체였던 것 같다.

답변

너바나의 새 멤버로 영입되는 상상을 했을 정도였어요. 항상 그런 기대를 했어요. 데이브 그롤(Dave Grohl)이 한국에 여행하러 오는 일이 있을 것 같긴 한데. 지나가다 나를 만나서 인사를 해서 “너 커트 코베인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우리 팀에 들어올래?”라는 제안을 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문제로 3일 정도를 고민하고. 위퍼 멤버들한테는 뭐라고 말을 하지? 또 미국 가면 스타가 되는데 몇 년간 부모님이랑 떨어져야 하는 걸 또 뭐라고 말씀을 드리지? 그런 고민들을 정말 많이 했었어요. 굉장히 진지하게. 그 정도로 미쳐 있었죠.

질문

솔로 활동을 돌이켜보면 아무래도 토이의 「뜨거운 안녕」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유희열과의 만남이 이승환 때문에 성사되었다는 말이 있던데.

답변

네. 이승환 선배랑 저희 대표님(이종현) 하고도 되게 친해요. 이렇게 셋이 다 친해서. 희열이 형이 「뜨거운 안녕」 보컬 구할 때 오디션을 본 가수들이 한 30명 정도 되었다고 해요. 저는 안 봤는데 기존에 다 앨범을 냈던 가수들이었던 거예요. 그랬다가 마스터링 1주일 전인가 (부를 사람이)없고 없고 해서 수소문 끝에 승환이 형이 “얘 요즘 홍대에서 ‘핫’하다는데”(웃음)라며 소개시켜줬죠. 그런데 희열이 형이 승환이 형의 상업적인 감을 존중해요. ‘디테일한 화성과 보이싱, 테크니컬한 면은 잘 모르겠지만 상업적인 감은 있는 사람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만나볼 필요는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표님한테 전화를 했죠. “(이지형이) 종현씨 회사의 수석 가수라면서요?”라며 제가 있는 회사에 직접 오셨어요. 그러고는 다음 날 바로 녹음.

질문

녹음이 조금 달랐나. 원래 하던 방식과 비슷한 느낌이었나.

답변

저는 유희열하면 미친 천재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부스에 들어가면 가수들 죽이는. 혼내기도 하고 정말 디테일한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소문도 그래요. 그래서 엄청 준비하고 갔죠. 전날에 소고기 먹고. 그런데 막상 가니까 별 이야기도 없고 집중도 안 해요. (웃음) 그런데 무사히 잘 끝나서. 원래는 앨범에 「크리스마스 카드」라는 곡이 있어요. 그 곡이 제가 불러야 했던 노래였고. 「뜨거운 안녕」을 (김)형중이 형이 불렀어야 했는데 형중이형이 뜨거운 안녕 녹음하는 날 극심한 감기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갔어요. 그래서 녹음 날 펑크를 낸 거예요. 그래서 지형씨가 부르라고 해서 부른 거고. 형중이 형은 이틀 있다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불렀어요.

질문

요새 싸이 앨범에서 성시경도 그렇고 슈퍼스타 케이의 홍대광도 「뜨거운 안녕」을 불렀는데 원곡을 부른 당사자로서 어떻게 들었나.

답변

성시경씨는 제가 좋아하는 목소리라서 성시경 스타일대로 정말 잘 부르시더라고요. 정말 부드럽고 밀키하게. 역시 성시경은 뭘 불러도 자기 노래처럼 잘 부르는구나라고 느꼈어요. 홍대광씨 버전은 제가 아직 다 못 들어봤거든요. 지나가다 누가 컴퓨터 펼쳐놓고 플레이하는 걸 살짝 들었는데 맨 처음에는 “어? (김)연우형이 「뜨거운 안녕」 부르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소리 알맹이 스타일이 약간 연우형과 비슷한 게 있어가지고 그런 거 같아요. 얼마 전에 인터뷰할 때도 정말 잘 들었다고 밝힌 적이 있었는데 기사가 나기를 ‘이지형 극찬’이라고 나와서 (웃음)

질문

가수에게는 늘 대표곡이 있는데 이지형의 경우에는 토이의 「뜨거운 안녕」이 되어버려서 속상하지는 않나.

답변

별로 속상하지는 않아요. 언젠가 대표곡이 만들어졌겠죠. 저는 제 인생의 정점이 어디라고 생각을 별로 안 해서요. 어렸을 때는 생각을 많이 하긴 했죠. 난 언제 톱스타가 되나, 난 언제 떡볶이 집에서 떡볶이 먹다가 사람들이 달려와서 싸인 해달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면 제가 표현하고 싶은 음악 열심히 연구해서 수많은 사람과 소재를 어떻게 음악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인가가 목표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정점이 찾아올 수도 있는 거고. 그 안에서 이지형을 대표할 수 있는 곡이 나올 수도 있는 거고. 「뜨거운 안녕」같은 곡은 저에게 정말 고마운 노래죠. 재미있는 노래고. 감사해야할 노래고. 저는 대중감성에 딱 맞는 곡을 만드는 재주가 별로 없어요. 대중의 구미를 완벽히 맞출 수 있는 재능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걸 탓하지는 않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많이 버렸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 음악 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돼요. 저는 창작을 스트레스가 아니라 재미있게 하고 싶어요. 그게 저의 목표죠.

질문

최근 득남을 했다.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닐 텐데 음악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답변

이 앨범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얼룩진 청춘 이야기에요. 전 아버지와 소통이 없던 편이었어요. 다 똑같을 거라고 생각는데, 명절이나 중요한 가족 행사 때 집에 가면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열 개 남짓이에요. 아버지께서 대학교 때 누구랑 싸웠던 이야기 몇 천 번 듣고, 엄마랑 결혼했을 때 이야기 한 3만 번 듣고, 옆집 아저씨랑 술 마시다가 홀연히 속초 갔다는 이야기 또 한 3천 번 듣고 매번 똑같은 이야기밖에 없는 거에요. 너무 지겹잖아요. 말릴 수도 없고. 그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부모님에게도 1분 1초 반짝였던 순간들이 분명 나처럼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왜 우리 아버지는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사시는지 전 정말 불만이었어요. 제가 연구해본 결과 기억력의 용량에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아들에게 굳이 아버지의 얼룩진 그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았거든요. 진취적이고 좋고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아들에게 아버지의 비겁했던 모습과 찌질하고 거지같은 이야기를 들려줄 용기는 저도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듣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언제 찌질했는지, 아버지는 언제 첫 경험을 했는지, 아버지가 언제 비겁했던 적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물어보지도 않았고 말씀해주시지도 않았죠. 저도 뭐 아들에게 2~30년 후에 이 아이가 성장을 해서 저도 그렇게 얼룩진 이야기를 면전에서 들려주고 싶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사각지대에서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그것을 궁금해 할 거예요. 그래서 기록을 남겨야겠다. 나중에 아이가 청춘이라고 불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항상 힘세고 돈 많이 벌어오고 우리 집안의 아빠도 이렇게 바보스러운 순간이 있었다니, 이런 방황을 했다니 혹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했었다니, 이런 용기 없는 겁쟁이였다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앨범 부클릿 마지막에 아들에게 쓴 것이 그래서 Thanks to인 거예요. 저는 뭐 이 시대 젊은 친구들에게 가르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닌 제 완벽한 고백을 하고 싶었고, 제 아이가 청년이 되어 들었을 때 아빠의 경우를 살펴서 시행착오를 겪지 말고 너는 잘 살아라 식의 이야기가 아닌 나도 아빠처럼 비슷한 경험을 했구나와 같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그걸 앨범에 담았어요.

질문

멋진 아버지인 것 같다.

답변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아요. 아이가 80일이 되었는데 아직까지는 제가 잘 케어를 해서.

질문

재킷은 어떤 의미인가. 야자수 사진인데.

답변

앨범 디자인을 할 때 제일 고민을 했던 게 사진으로 할까 그림으로 할까 일러스트로 할까였어요. 계속 생각했어요. 좋은 정장 입고 사진을 찍을까, 이지형 얼굴을 들이대서 찍을까. 얼룩진 청춘에 제일 잘 맞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생각을 하다가 로모 사진기의 질감이 제일 청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척 거칠고 모호하고 초점 안 맞고 왜곡된 질감 자체가 어떻게 보면 되게 예뻐 보이잖아요. 아 청춘은 로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모 코리아에 제가 직접 찾아가서 브리핑도 직접 했어요. 거기 계신 분들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죠. 로모 유저들한테 사진 부탁하고 그리고 오피셜 사이트에 들어가면 전 세계 로모 유저들이 찍은 사진들이 있어요. 몇 만장의 사진들이 있거든요. 다 보고 괜찮다고 생각한 사진을 찍은 분들에게 직접 이 메일을 보내서 “저는 이지형이라고 하는 한국의 가수입니다. 이러저러한 앨범을 만들고 싶은데 당시의 사진이 아름다워서 앨범 부클릿에 쓰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어요. 그 중에 허락을 맡은 사진을 앨범 재킷에 쓴 것이죠. 또 제가 로모로 찍은 사진도 삽입되어 있고요. 이 앨범 메인 재킷에 쓰인 야자수 사진은 러시아 분이 찍은 거예요.

질문

그래서 사진마다 이름이 다 다른 거였나.

답변

네. 그래서 로모 크레디트도 따로 만들고 싶었어요. 기종이 무엇이며 언제, 누가 찍었는지 등의 정보를 담은. 탤런트 추소영씨랑 코요테 빽가씨 사진도 있고. 이 의미를 커버로 생각한 것은 야자수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오아시스나 휴양지의 느낌이 있는데 그 위에 떠있는 낙하산을 타고 있는 남자가 위태로워 보였어요. 「청춘 표류기」 같은 곡의 가사 같은 느낌이 있어서 쓰게 되었죠. 로모는 보면 항상 아마추어 같잖아요. 거칠지만 대충 찍어도 뭔가 잘 찍은 것 같고. 그게 청춘인 것 같기도 해요. 필름과 카메라에 따라서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기도 하고요. 어느 하나 계산된 작품이 나올 수 없거든요.

질문

이번 앨범이 상처를 다독여준다, 힐링을 받는다는 피드백이 많았는데.

답변

물론 그렇게 들어주시면 저에게는 정말 감사한 일이긴 한데요, 제가 생각하는 힐링의 첫 번째는 자기 고백인 것 같아요. 멘토의 것도 아니고, 좋은 도서나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는 없거든요. 잠시는 좋을 수도 있어요. 커피 한 잔의 여유처럼 잠시 여유와 즐거움은 생길 수 있는데 청춘과 자아 발견은 그 어떤 멘토와 선배의 이야기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잖아요. 그 과정 중에서 첫 번째는 완벽한 자기고백이지 않을까 싶어요. 거울을 보든, 벽을 보든 아니면 이불 속에서, 머릿속에서 그냥 이래저래 하나라도 정리하는 것이 저는 힐링의 최소한 반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특별한 인생과 삶을 산 사람이 아니면 스무 트랙이 모두 제 이야기 때문에 한 두 개씩은 같은 경험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저 같은 경우에도 어렸을 때를 되돌아보면 난 지금 기분이 굉장히 더러운데 “다 필요 없어. 너 지금 괜찮아. 힘들어 하지마” 이런 선배들의 조언보다 앞에 있는 친구가 “그치? 나도 지금 엿 같거든”이라고 해주었을 때가 더 후련했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왜들 그리 선생님을 찾는지 모르겠어요.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연치유 능력도 대단한 것이 청춘이거든요. 그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에너지를 존중할 수밖에 없어요. 요즘 실패하기 싫은지 올바른 길로만 가려고 하는지 선생님들만 찾는 게 아쉽기도 해요.

질문

이 시대 청춘에게 정말 필요한 메시지인 것 같다.

답변

청춘 마케팅이 나오면서 청춘 본연의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왜 계속 아프라고 하죠. 안 아프면 뭐 청춘이 아닌가요? (웃음) 특별한 뭔가를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에너지를 강요하고. 어련히 알아서들 잘 사는데. 그리고는 결국 자기 이야기는 안 해요. 자기 혼자 아프지 왜 남들보고 아프라고 그래. 특정 인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고 그거에 휩쓸려가는 현상이 싫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나이트를 가서 부킹을 하는 게 낫고 술을 더 마시는 게 낫고 차라리 못된 짓을 하나 해서 자아성찰의 기회로 삼는 게 낫지. 이 앨범 내고 인터뷰 같은 데서 “이 시대 청춘들에게 한 마디!” 같은 질문들이 들어오는데 “내 청춘 이야기를 한 거라서 별로 할 말이 없다”고 그래요.

질문

이지형을 성장시킨 앨범을 꼽아보자면?

답변

저는 뭐 너바나의 < Nevermind >. 그게 제일 좋아요. 「Smells like teen spirit」가 제일 좋죠. (웃음) 뒤돌아 생각해보니. 커트 코베인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이 노래가 제일 잘 빠진 곡이지”라고 (웃음) 그거하고 동물원. 동물원은 방황했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저를 다독여주면서 잡아준 음악이 동물원이고. 앨범 중에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수록된 앨범 있잖아요. 그 앨범으로 그냥 인생을 들은 것 같아요. 김광석은 모든 앨범이 다 좋고요. 아 비틀즈도 좋고요.


인터뷰 : 홍혁의, 김반야, 이수호
사진 : 이한수
정리 : 김반야, 이수호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외국인들이 더 좋아하는 한국악기, 대금 아세요?” - 대금연주가 박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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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야든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을 때는 그만큼 모든 것을 쏟아 부었음을 의미한다. 중견 연주자로서 조금은 늦게 자신의 첫 정규앨범을 발표한 박상은의 <박상은의 대금-바람에 젖다>가 그렇다. 따지고 보면 완전한 첫 앨범은 아니다. 박상은은 “과거 <은혜에 둘러싸여>라는 앨범을 발표한 바가 있다”고 고백하며 살포시 미소 짓는다. 하지만 CCM 앨범인 <은혜에 둘러싸여>가 그녀의 신앙을 담은 것이라면 <박상은의 대금-바람에 젖다>는 오롯이 그녀, 박상은만의 대금 연주를 보여주는 첫 앨범임에 분명하다.

KBS국악관현악단 단원이자 라디오 국악프로그램 ‘프레이즈 인 국악’의 진행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지난 수년간 무대 위에서 연주해왔던 곡들 중 청중과 자신이 공감한 곡들을 선별해 하나의 앨범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단 한곡도 허투루 연주하지 않았고, 녹음 과정에서도 인위적 인 편집이나 사운드의 가감을 최대한 배제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르고 연주한 곡이 모두 다섯 곡이다. 심혈을 기울여 선별한 만큼 각각의 곡마다 사연도 적지 않다. 앨범 타이틀곡인 「상주아리랑」은 1950년대 김소희 명창이 작창(作唱)한 곡으로, 이번 앨범에서는 대금과 피아노곡으로 다시 태어났다. 「파랑새」는 전래동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대금과 재즈보컬 말로의 음색, 가야금이라는 앙상블로 재해석했다. 현악4중주와 함께 연주 된 정악곡 「경풍년」을 비롯해 화려한 3악장의 대금 연주가 일품인 「타래」의 감동 역시도 다른 연주에 비해 덜하지 않다. 그렇게 정수만을 뽑아 만든 앨범이 세상에 나오자 원로 음악평론가 이상만 선생은 “한국 음악의 진로에 시사하는 바가 큰 걸작”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주는 인생을 풀어 넣는 과정

앨범을 사이에 두고 조용한 카페에 마주한 그녀는 그런 평가를 뒤로 한 채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후회는 없다”고 한다. 충분히 고민했고, 모든 것을 담았기에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터뷰는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간간히 유쾌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질문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첫 앨범을 발매한 소감은 어떠세요.

답변

음, 감회가 새롭죠. 굉장히 신중했기도 했고 좋은 것만 넣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제작기간도 길었어요. 곡의 콘셉트를 정하는 데도 2~3년이 걸렸죠. 사실, 녹음과정도 한곡하고 한동안 쉬면서 충전하고 또 한곡 하는 식이었어요. 그렇다고 녹음을 많이 한 것은 아니에요. 한곡 당 2번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거든요. 그 이상 하게 되면 억지로 짜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죠. 부족하고 아쉽고 그런 감정은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

국악, 그 중에서도 대금이라는 악기에 대해서 솔직히 일반인들의 인식은 막연하기만 합니다. 어떤 특징을 가진 악기인지요.

답변

국악 안에서 대금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악기에요. 멜로디를 구성하는 악기가 보통 피리와 대금 정도거든요. 그리고 국악기 중에서 어떤 악기는 민속악에 주로 쓰이고 어떤 악기는 궁중악에 주로 쓰이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대금 같은 경우는 두 가지 모두에 쓰임이 많아요. 하지만 그에 비해 대중들에게 그다지 어필하지 못한 악기이기도 하죠(웃음). 이제까지 연주자들이 그런 노력은 많이 안했던 것 같아요. 사실 대금만한 음색은 드물어요. 두꺼운 쌍골죽의 관을 타고 흘러나온 소리기 때문에 깊으면서도 바람소리가 섞인 음색이 나죠. 그리고 다른 악기와 구분되는 대표적인 것이 ‘청소리’에요. 대금의 청공에 청이라는 얇은 막을 붙이는데, 약간 높은음이나 강조할 부분에는 부드러움 가운데서도 날카로운 음색이 우러나오거든요. 그런 음색을 가진 악기가 세계에 별로 없어요. 외국인들은 그런 소리 때문에 대금을 신기해하고 좋아하죠. 저 역시 그런 대금의 음색 때문에 이 길을 선택했고요.

질문

앨범에 들어가는 곡들을 연주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에피소드가 있다면?

답변

다른 음반들은 기획을 하거나 콘셉트를 맞춰 곡을 받거나 하는데, 저는 몇 년간 관객들의 반응과 음악적 깊이 등을 고려해 선택했어요. 그리고 곡마다 전통과 현대를 구분하지 않고 버무렸죠. 사실, 그것을 통합하기가 힘들긴 했어요(웃음). 어떤 것은 전통, 어떤 것은 크로스오버, 어떤 것은 현대적인 연주라고 할 수 있죠. 이게 무슨 장르냐 했을 때는 딱히 어디에 속한다고 꼬집어 말하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단지 대금으로서만 들려줄 수 있는 곡을 넣겠다는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곡이지만 ‘인생으로 풀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모든 곡을 해석할 때 ‘이 부분은 인생의 어느 부분을 보여줘야지’라는 식으로 스토리를 만들어서 통일감을 줬죠.


대금에 빠진 열다섯 소녀

그녀가 대금과 처음 만난 것은 열다섯, 중학생 시절이었다고 한다. 대개는 팝송이나 대중가요가 전부였을 사춘기 어린 소녀가 어떻게 대금에 매료된 것일까. ‘운명’은 이런 순간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질문

많은 연주자들이 어린 나이에 음악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열다섯이란 나이는 다소 늦은 편이었을 듯 한데요.

답변

그때는 아니었어요. 요즘은 국악고등학교 들어가려면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한다고 하지만, 저희 때는 대체적으로 중ㆍ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한 경우가 많았어요. 물론 가야금 같은 경우 어렸을 때부터 많이 했고 대금도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었으니 빠른 것도 아니었죠. 중학교 때 우연히 대금 연주를 처음 듣고는 막연히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배울 길을 모색했으니까요. 그 전까지는 합창단이나 성가대 활동을 하는 정도였지 악기는 전혀 다뤄보지 못했거든요(웃음). 그저 사춘기 어린 마음에 막연히 첼로 같은 악기 하나를 배우고 싶어 했던 상황에서 우연히 대금을 만나게 된 거죠.

질문

대금의 어떤 점에 마음을 뺏겼는지 궁금한데요. 평소 국악에 관심이 있었는지요.

답변

사실 국악을 잘 몰랐어요. 저 역시도 TV에 국악채널 나오면 으레 다른 채널로 바꾸곤 했으니까요(웃음). 그런 제가 국악계에 몸을 담게 된 것은 대금 하나만 보고 접근한 덕분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연히 대금 소리를 실제로 들었는데, ‘내가 저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그 몇 초 안이었어요. 어떻게 그런 음색이 나는지 너무나 신기했죠. 그러다보니 대금을 불게 됐고요. 국악은 국악고등학교 들어가서야 제대로 접했는데 생각보다 멋진 음악이 너무 많더군요. 물론 지금도 그 국악 안에는 저하고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국악에도 종류가 너무 많으니까요. 어쨌든 대금을 통해 국악을 알게 됐고 지금은 ‘이런 멋있는 음악이 한국에 있구나,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안도하고 있어요.

질문

수련 기간 동안 대금 연주를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하네요. 스승에게 사사 받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는데요.

답변

제 경우는 달랐어요. 중학교 때 아무리 수소문을 해봐도 주변에 국악고등학교를 가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어요. 선생님께도 국악고에 갈 거라고 하니까 ‘네가 알아봐라’는 말 뿐이었죠. 국악고가 국립인데도 그 정도 인식이었어요. 전국에서 딱 100명을 뽑던 시절이었는데 관심 있는 사람만 알던 시절이었죠. 우여곡절 끝에 국악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대금을 하겠다고 하니 손가락도 짧고 몸이 말라서 안 된다며 다른 악기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자퇴한다고 했어요(웃음). 그때만 해도 ‘나는 대금을 배우러왔는데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결국엔 제 의지 때문에 대금을 하게 됐어요.

하고 싶은 대금 연주를 배울 수 있었지만 사실, 당시 그녀의 집안환경은 음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하고 싶으면 하라”는 부모님의 생각이었다. 실력 향상을 위해 레슨을 받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녀는 수업만으로 해내겠다는 오기로 대금에 빠져들었다.

질문

실제로 학교에서 처음 했던 말처럼 신체적인 한계가 대금을 배우는데 장애가 됐나요.

답변

처음에는 되게 힘들더라고요. 손가락도 짧고, 폐활량도 못 받쳐주니까요. 처음 테스트를 할 때도 호흡이 달렸음에도 제가 하겠다고 고집 피워 한 건데 힘들긴 했어요. 조금만 많이 불면 손가락이 저려왔죠. 그런데 역시 사람은 적응을 하게 되더라고요. 연습량이 많으니까 되더군요. 친구들끼리 누가 먼저 연습하나, 학교 문을 누가 먼저 여나 경쟁했어요. 심지어 수위 아저씨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 누가 남아 있는지를 내기하기도 했죠(웃음). 그렇게 열정적으로 해서 그런지, 그 이후로 소리가 약하다는 평은 못 들어봤어요.

질문

훈련을 통해서 핸디캡을 극복한 경우군요.

답변

그렇죠(웃음). 남자 부럽지 않은 톤을 갖고 있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는 뿌듯했죠.

질문

처음 대금에 입문했을 당시부터 수련 기간을 거치시는 동안 대금과 자신이 하나 되는 과정에서 각각의 단계가 있었을 듯한데요. 연주자로서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단계가 많이 있었죠. 사실은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 자신만만했어요. 내가 대금을 좋아하는 만큼 잘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KBS국악관현악단에 들어가고 나서 한 3년간 슬럼프를 겪었어요. 이정도 하면 잘하는 줄 알았는데 더 잘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깨달았죠. 그 후로 ‘내가 해야 하는 게 너무나 많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공부하는 심정으로 연주하고 있어요.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깨닫는 것도 많았던 것 같고요.

질문

연주자가 완성되기 까지는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만의 감성을 만드는 것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답변

다양한 예술 분야를 좋아했어요. 한동안 대금을 하면서도 재즈음악에 빠져본 적도 있고, 또 오빠가 미술을 했거든요. 그래서 미술관을 다닐 기회도 많았고요. 집에서 자취할 때는 벽에다 그림을 그려놓고 감당을 못했지만, 그래도 그런 걸 좋아했어요. 글도 써보고, 책도 좋아하고, 그런 부분에서 되게 도움을 많이 받아요.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책 읽고 전시회 다니며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해요. 저는 그런 경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음악에도 스토리가 있어야 하니까요.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연주에 녹아들게 마련이죠.


한평생 연주자로서 살아가고 싶어

연주자로서 고민은 지금도 끝이 없다. 대중들과 소통하는 방식부터 시작해 스스로 연주의 깊이를 더하는 것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연주자의 삶에 힘을 더해주는 것은 역시 가족이다. 연주자로서 그녀의 바람을 듣다가 문득 가족에 대해 묻자, 진지했던 표정에 순간 미소가 머금어졌다.

질문

연주자로서 목표 설정은 계속 될 듯한데요.

답변

요즘 고민을 많이 해요. 앨범이 나오니까 고민이 더 되더라고요.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그것으로 소통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제는 나이 50~60세까지 대금을 잘 불수 있을지를 고민해요. 앨범이 나오고 기량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제 2의 인생은 대금과 연관된 어떤 다른 것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고요. 끝까지 좋은 연주자로 최선을 다하지만 다른 부분으로 소통을 하는 방법이 없을까를 모색하기도 해요.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저런 교훈도 생기고 인생에 있어 노련해지면서 대금과 연관해 이야기로 풀 수 있는 콘텐츠를 구상하기도 하고요. 남편과도 그런 이야기를 종종 나누죠.

질문

갑자기 남편께서는 어떤 분인지 궁금하네요. 예술을 하는 분들에게 배우자의 역할은 꽤 중요할 듯한데요.

답변

전혀 다른 분야에 일을 하고 있어요. 직업을 떠나서 인품이 좋아요. 잘 만났죠. 왜냐하면 음악 하는 사람들은 좀 예민하잖아요(웃음). 또 남편은 책을 굉장히 좋아해요. 제가 그것 때문에 반했죠. 제가 너무 바쁜 와중에 ‘어떤 그런 느낌이 필요하다’ 그러면 필요한 책을 권해주기도 하고요. 힘이 되는 조력자죠. 그리고 언제나 소통하는 것이 장점이에요. 우리 남편은 음악도 잘 모르고 국악 하는 사람도 모르고 아무튼, 이쪽 세계를 몰라요. 그럼에도 발이 넓어서 대중들이 생각하는 시각을 이야기해주기도 하죠.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조언해주고, 넓은 시야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질문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답변

7살 딸, 4살 아들, 정신없어요(웃음).

질문

아이들도 어렴풋 엄마가 연주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것 같은데요.

답변

국악 중에 가곡이라는 게 있는데 대금으로 불기가 힘들어요. 그걸 아침마다 톤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불고 나가요. 제 스스로의 관리차원이죠. 아이들은 어떨 때는 ‘아 좋다’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시끄럽다’고 할 때도 있어요. 음반 틀어놓을 때는 흥얼거리면서 따라 하기도 하죠(웃음).

질문

어린 시절부터 국악을 접하는 것이 정서에도 긍정적으로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답변

네, 그렇죠. 음악 중에서도 국악의 깊이 있는 곡들 접하게 하는 것이 좋아요. 부모들이 몰라서 못하시는 부분이 큰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아침에 가곡하는 것도 아이들이 일어나서 멍할 때 들려주기 위해서예요. 물론 본격적으로 연주자가 된다면, 글쎄요. 말릴지도 모르겠지만(웃음)…….

질문

전통적인 음악이지만 시대에 맞는 새로움도 추구하실 듯 한데요. 이번 앨범도 그렇지만, 연주자로서 본인은 어떤 시도를 하고 있나요.

답변

요즘 크로스오버가 많아요. 개중에는 ‘우리도 이런 음악 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국악의 깊이 있는 곡들이 대중에게 어렵다면 좀 더 연구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는 대금 연주자로서 대금의 깊이 있는 것들을 정성껏 제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노력한 만큼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국악도 좋은 음반들이 많아요. 대금 역시도 중심을 잡아가며 대금만 할 수 있는 것들, 좋은 것들만 보여줘도 정말 너무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천천히 보여주고 싶죠.

질문

그 시대의 음악은 당대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우리나라 국악이 그렇지 못한 상황이 꽤 오래된 것 같네요. 무엇이 문제였다고 보시나요.

답변

사실 요즘에는 국악계도 대중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굉장히 많이 만들고 있어요. 개중에는 가요인지 판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파격적인 것도 있죠. 지금 노력을 하는 과도기적 시기에요. 바람이 있다면 접근을 다양하게 했으면 한다는 거예요. 국악에도 정말 여러 분야가 있거든요. 서양악도 시대적으로 구분해서 듣는 마니아들이 있잖아요. 국악 역시도 그런 접근이 필요한 것 같아요. 국악인들이 노력을 많이 해야죠. 연주장도 반드시 국악전용 연주장이 아니라도 다른 음악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도도 해봐야하고요. 저의 경우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질문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시는지 바람을 말씀해주신다면?

답변

마음이 움직인다는 소리를 듣는 연주자이길 바라요. 그런 것을 염두하고 연주를 하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연주가 되려면 저 스스로도 마음이 동해야 되요. 그런 열정을 많이 채워서, 무슨 연주를 하던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자로 다가가길 바라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직장 이야기만 하면 여자가 좋아하겠어?" - 조영남ㆍ김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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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화제가 됐던 KBS1 <명작 스캔들>은 지난해 제 16회 아시안 TV 어워즈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 부문 수상에 이어 2012년 세계공영방송 우수 프로그램시사회 인풋 초청 우수프로그램, 유럽방송연맹 선정 ‘세븐 베스트 포맷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 각국을 둘러봐도 이전까지 명작을 이렇게 유쾌하고도 즐겁게 접근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송을 기획한 민승식 프로듀서는 일찍이 <클래식 오디세이>로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남다른 기획력을 과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백미를 꼽자면 역시 진행을 맡은 조영남ㆍ김정운 콤비가 아니었을까.

가수이자 화가로서 남다른 문화적 직관력의 소유자인 조영남과 직설화법과 더불어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온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조합은 사실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의 호흡을 과시했고, 기억에 남을 만한 말들을 많이 남겼다. 지난 5월을 끝으로 일단 시즌1이 마무리 된 상황에서 최근 프로그램에서 못 다한 명작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책이 출간됐다. 바로 프로그램과 같은 제목의 『KBS 명작 스캔들』이 그것이다. 책 표지에는 방송과 같이 조영남ㆍ김정운 콤비가 자리하고 있다. 책의 부제 또한 그 성격을 말해주는 듯 ‘도도한 명작의 발칙하고 은밀한 이야기’다. 출간에 즈음해 『KBS 명작 스캔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두 사람을 만났다. 유쾌하면서도 엉뚱한 두 사람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이다.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달변일 뿐 아니라 명쾌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다. 그렇게 말 잘하는 두 사람의 조합은 사실 어울리지 않았다. 한 사람이 기세등등하면 한 사람은 자칫 빛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우려가 편견임을 증명해보였다. <명작 스캔들>로 이어진 인연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질문

<명작 스캔들>이 처음 만들어지면서 섭외를 했을 당시, 서로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지, 그리고 실제 진행을 하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한데요.

답변

김정운(이하 김):저는 개인적으로 조영남 형님 어렸을 때부터 너무 존경하고 좋아했어요. 같이 하는 것에 대해서 솔직히 영광이었죠.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은 영남이 형님 그늘에 가려서 어떻게 하려 그러냐는 걱정을 많이 하긴 했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이야기해보면 너무 재미있으세요. 사람들은 모르는데 천재 같기도 해요. 보이는 것과는 틀려요(웃음). 이야기가 잘 맞아떨어져서 재미있고 즐거웠어요.

조영남(이하 조):나는 이 양반 하는 몇몇 채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어, 참 재미있는 사람이 나타났다’하고 호기심이 만발했죠. 같은 프로그램을 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드디어 내가 보고 싶었던 사람과 만난다는 기대감이 있었어요. 막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굉장히 말 속에는 정리가 돼 있고 뼈대가 있잖아요. <명작 스캔들>을 같이 한다고 해서 나한테도 그런 기회가 오는 구나 싶었는데, 첫날 만나면서 호형호제하게 됐어요. 나이 들어서 그렇게 되기 힘든데, 명작 스캔들 덕분에 지금까지 친구사이로 잘 지내고 있죠.

질문

<명작 스캔들>은 기획 당시부터 기존 같은 장르의 프로그램과는 차별화를 추구했습니다. 진지함과 유쾌함을 넘나드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싶은데, 두 분이 진행을 하면서 느꼈던 소감은 어떠했는지요.

답변

:개인적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방송을 하면서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하면서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제가 나온 지도 벌써 1년이 됐지만, 오늘 아침에도 예전 방송을 다시 보니까 우리가 정말 재미있게 잘했다 싶더라고요. 우아하고 폼 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풀었다는 자부심이 생기더군요.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고급이라고 하고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마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중들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문화예술에 대해 자기 의견과 생각,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렸다고 봐요. 저변을 확대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죠.

:나는 우리나라에서 미술, 음악 등의 명작을 대표로 나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인물이 나하고 김정운 밖에 없다는 사실에 비감함을 느껴, 이렇게 인물이 없는가(웃음). 그런데 하면서 보니까 이게 영국 BBC나 미국에서도 못 본 프로그램이더라고요. 우리만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이라는 것, 그러니까 얼마 전에 유럽방송연맹에서도 상 받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잘했구나 하는 걸 뒤늦게 느꼈어요.


[제공: KBS]

질문

두 분 모두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하신데, 혹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내심 감정이 상했던 순간은 없으셨는지, 또 다양한 명작을 두고 서로의 작품 평가 중에 무릎이 쳐질 정도로 절묘했던 말을 꼽는다면?

답변

:제가 방송에서 영남이 형님 말을 끊고 하니까 작가들이 “교수님 그러셔도 되요?”라며 걱정하긴 했어요. 그런데 한날은 함께 식사하면서 “야, 네가 날 더 씹어야 돼. 그래야 프로그램이 더 재미있어”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영남이 형님 말씀 중에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어요. 슈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슈만과 클라라의 관계가 알려진 것과 달리 내가 봤을 때는 클라라가 굉장히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슈만을 유명하게 만든 것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영남 형님이 “어떻게 행복하고 불행이 따로 있는 걸로 생각을 하느냐. 사는 것은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는 거다. 따로 생각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야 대단한 통찰인데’싶었어요. 역시 많은 여자들로부터 단련을 받으시니까 이런 통찰이 가능하구나(웃음). 암튼 그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나요. 우리는 행복한 시기가 따로 있고 불행한 시기가 따로 있다고 착각을 하는데,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보면 행복과 불행이 항상 맞물려 있었고 거기에서 창조적인 에너지가 나온다는 거죠.

서정적인 슈만의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낭만성을 분출하는 작품 <교향곡 제4번>. 이 곡이 열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슈만의 뮤즈이자 영원한 사랑이었던 클라라와 관련이 있기 때문인데 바로 <교향곡 제4번>이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 찬가라는 것이다. 슈만의 생애에서 클라라와 결혼한 이듬해인 1841년은 ‘교향곡의 해’로 일컬어진다. 이 해에 슈만은 두 편의 교향곡과 하나의 작은 교향곡 등 관현악곡들을 집중적으로 작곡하는데, 클라라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을 얻었던 것이다. (후략)-『KBS 명작 스캔들』中》

:이 친구는 무한 도전자에요. 감당 못할 정도로 도전해요. 지금도 일본에 가서 사는 모습을 보면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도전을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자기가 나하고 <향수>를 이중창을 부르겠다고 해요. 엄청난 도전이야. 그런데 그 도전을 어떻게든 성사시켜요. 거기에 감동을 받죠.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이 사람은 미술과 다른 심리학전문인데 (미술)공부를 하기 시작하고. 말끝마다 나한테 시비 걸고, 그게 얼마나 재미있어요(웃음). 대화라는 것은 시비하고 치고받고 하면서 더 격렬하게 해야 했는데 그게 아쉬울 뿐이죠.


명작,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다

『KBS 명작 스캔들』의 표지를 장식한 두 사람의 이미지가 정겹다. 프로그램에서처럼 책에 대한 두 사람의 관심 또한 남다르다. 분야는 달랐지만, 프로그램 덕분에 공부하게 됐고, 새로운 깨달음도 얻었다. 책으로 소개 된 『KBS 명작 스캔들』을 두고 두 사람의 바람과 충고를 들어봤다.


[제공: KBS]

질문

두 분에게도 <명작 스캔들>은 새로운 관점에서 예술 작품들을 접한 계기였다고 생각되는데요.

답변

:저는 심리학자니까 심리학적인 주제들을 많이 다뤘는데. 내가 가진 심리학적 지식들이 문화예술을 해석하는데 이렇게 쓰일 수도 있다는, 나름대로의 흥미로운 경험을 했어요. 지금도 새로운 책을 준비 중인데 이 프로그램을 했던 경험이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어요. 문화예술 속에 숨어있는 문화적 변동에 과정들에 대한 통찰을 배웠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죠. 같이 일했던 제작진들에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공부하는 것도 많았다”고 이야기했거든요. 프로그램을 앞두고 매일 읽어야 하는 것이 보통은 100페이지, 때론 200페이지가까이 됐거든요. 어떤 때보다도 열심히 공부했어요. 지금 제가 일본에서 디자인 전문대학에 학생으로 입학을 했는데 아마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데 역시 <명작 스캔들>을 진행했던 경험이 강한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예술은 문화잖아요. 말로만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하는데, 사실상 예술은 어렵고 문턱은 높아요. 그런 가운데 예술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었다는 데 긍지를 느꼈죠. 그러기 위해서는 나 역시 공부를 많이 했어야 했고 큰 보람을 가졌어요. 사람들에게 예술이란 게 따지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 구나를 느끼게 했다는 것, 그게 자랑스러워요.


예술은 삶을 즐겁게 한다

프로그램에 이어 책을 기획한 민승식 프로듀서는 “소위 고급문화라는 울타리에 구멍을 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라고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고급문화라는 표현 자체에 오류가 있다. 그 반대는 저급문화가 되어 버리는 탓이다. 과연 고급문화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또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 일까. 이런 몇 가지 물음은 두 사람이 쏟아놓은 말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질문

민승식 프로듀서는 고급문화를 ‘그들만의 리그’라고도 표현했는데요. 최근 사회지도층의 행태를 보면 우리나라에 진정한 고급문화가 존재할까 싶기도 합니다.

답변

:그것은 어차피 우리가 너무 빨리 발전을 했기 때문에, 격어야 할 부분이에요. 저는 한국 상황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아요. 지금은 일본에 살고 있는데, 일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한국은 정말 정신적인 면이 깊으면서도 성장해가고 또 역동적이고 행복한 사회에요. 재미있는 사회죠. 물론 글로벌한 수준에서 최고 그룹의 문화수준과 비교했을 때 당연히 좀 허점이 있어요. 지금은 그런 것을 채워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명작 스캔들>이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자부심이 있어요. 저는 한국 문화수준에 대해 섣부른 비판을 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해요. 생각해보세요. 서구에서 300~400년간 이룬 근대화 과정을 우리는 40~50년간 해치운 나라인데 당연히 허점이 있죠.

:문화라는 것은 항상 고급과 저급이 섞여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는 개국 이래 가장 고급문화가 성행한다고 봐야지. 우리 역할은 고급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거예요. 책도 그런 맥락이죠. 밑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의욕이 있어요. 그런 와중에 있는 거죠.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이분법이 사실은 더 온당치 않은 거예요. ‘문화적 다양성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이냐’, 했을 때 지금 한국의 문화상황이라는 것이 TV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일반 아이돌 중심의 대중문화가 대부분이잖아요. 물론 그런 문화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문화적 다양성을 담보하는데 있어서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명작의 관심들, 또 우리문화에서 명작으로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을 이야기하는 기회가 된 점에서 『KBS 명작 스캔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예술을 외면하는 대중들 중에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 교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접해야한다고 하셨고요. 사실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세계 최고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삶이 재미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과연 삶이 재미있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관심을 다양하게 가져야해요. 물론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어요. 그런데 평생 그렇게 살다갈건 아니잖아요. 어려운 과정에서도 내 삶의 관심사를 다양하게 가지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행복이라는 것은 자기 내면의 이야기가 풍요로워야 행복인거에요. 아기 키우는 엄마들이 아기에 대해 얼마나 말이 많아요. 그런 것처럼 내 삶의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가 많아야 되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문화 예술의 가치거든요.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데 참 중요한, 그리고 너무 쉬운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밥 먹고 일 안하는 시간에 사람 만나야 할 것 아니에요. 여자도 사귀어야 하고요. 여자한테 뭘 이야기하겠어요. 자기 직장에서 있었던 일만 이야기하면 여자가 좋아하겠어? 영화 본 것, 그림에 대한 것들, 이런 것을 이야기를 할 줄 알면 그 관계가 더욱 윤택해진다는 거죠(웃음). 우리가 끊임없이 시간이 나면 문화를 접할 필요가 있어요. 써먹기 위해서……. 왜 날 더러 어떻게 그리 여자 친구가 많냐고 하는데, 계속 이야기하니까, 재미있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내 주위에 여자들이 많은 거죠. 문화를 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죠.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지. 김 교수 같은 친구하고도 재미있게 하는 방법은 심리학, 철학이 아니거든요. 그냥 별거 아닌 이야기들 그렇지만 내가 뒤에서 배운 것들을 섞어서 풀어놓으면 그것 때문에 친구가 되는 거지. 열심히 문화를 공부해야하고 그럴 필요가 있어요. 공부 안하면 재미없어. 평생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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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명작 스캔들한지원 글/민승식 기획/김정운,조영남 진행/이강훈 일러스트 | 페이퍼스토리
책장을 넘기는 순간, KBS 문화예술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명작 스캔들〉에서도 고르고 고른 명작들만 모았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이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버리는 시간을 갖을 수 있다. 엉뚱하고 발랄하면서도 유쾌한 시선들은 명작은 '갖고 노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전문가의 쉽고 재미있는 해설을 통해서 우리 안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일깨우고 더욱 더 즐거운 클래식의 세계에 성큼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헤어져야 더 행복하다면 그게 맞는 거죠 - 김영희 『엄마를 졸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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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종이 예술의 독창적인 길을 걸어오고 있는 작가 김영희. 1992년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녀는 이후에도 『뮌헨의 노란 민들레』, 『눈이 작은 아이들』, 『책 읽어주는 엄마』등으로 독자들과 만나왔다. 그녀가 펴낸 책을 살펴보면 유독 아이들 이야기가 많다. 제목만 봐도 ‘아이, 엄마’라는 단어가 눈에 자주 띈다. 인형작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독일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70여 차례 전시회를 열며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녀이지만, ‘작가 김영희’ 앞에는 늘 ‘엄마’라는 타이틀이 먼저였다.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아서일까, 14세 연하의 독일 남자와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김영희는 온전히 엄마, 아내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작가 김영희’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리고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드디어 ‘엄마 졸업’을 선언했다.


엄마를 졸업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여자로서의 책임을 벗은 이 시절이 찬란하게 내 앞에 다가온 것이 꿈만 같습니다. 집안일에 대한 부담도,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책임, 초조함도 버리고, 안간힘을 쓰며 달려온 엄마로서의 삶을 졸업함으로써 새 출발을 한 것이니까요.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날개를 달고 세상에 날아다니는 기분입니다. 이제야 인생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지요. 진정한 여성으로, 또 진정한 예술가로 다시 태어난 나를 거울에 비추어 보며 ‘아 아름답다!’ 거침없이 외칩니다. 그렇게 외치고 나면, 얼기설기 짜인 지난 세월도 비단결처럼 햇빛 속에 찬란히 빛나고, 다가올 미래는 더욱 화려하게 느껴집니다.”
엄마를 졸업했다니. 다섯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걸까. 아니면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는 걸까. 작가 김영희가 엄마를 졸업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무심코 대한민국 부모의 사고로 해석했다. 김영희는 요즘, 살아 생전 어머니가 했던 말씀 “늙으면 좋다”는 말이 자주 떠오른다. 그리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생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나는 새 봄을 맞았다”고 소리친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어요. 엄마를 졸업하려고요. 부모와 자식 관계라는 게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이 걱정하고 참견하게 되잖아요.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부담이 되죠. 제가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이제 젊은 사람들 세계에는 들어갈 수 없어요. 엄마를 졸업하고 인간 김영희, 작가 김영희로 떳떳하게 살아가는 게 아이들한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는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알 거에요. 자기 엄마가 엄마를 졸업했다는 걸.”

김영희는 닥종이인형작가라는 타이틀 뒤에 다섯 아이의 엄마로, 14살 연하의 독일인 남편과의 두 번째 결혼으로 유명하다. 사별 후, 아이 셋을 데리고 독일행을 감행한 용감한 여자 김영희. 그녀는 유진, 윤수, 장수, 봄누리, 프란츠의 엄마로, 어린 남편의 아내로 긴 시간을 보냈다. 신작 『엄마를 졸업하다』를 읽으면, 그간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남편 토마스와의 결별도 담담히 고백한다. “싱글벙글 늘 즐거운 대학교 2학년생 큰 소년은 남편이라는 명패를 달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라는 자리에 설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며, 솔직히 털어놓았다.

“작가는 본연에 들어갈 수 있는 직업 아니겠어요. 순수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죠. 세 명의 아이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을 했어요. 글을 쓴다면 보통 자랑을 하고 싶죠. 나의 성공, 자녀의 성공, 그리고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전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게 그 뿐 만이겠어요? 슬픈 일도 많고 괴로운 일도 많죠. 그게 인간이죠. 힘든 건 힘들 일로, 어려웠던 건 어려웠던 일로 포장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화장 안 한 인간 김영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처음에는 껄끄러워도 나중에는 더 쉬워요. 깨끗해져요. 속임수라면 스트레스 받을 수밖에 없어요. 남들이 몰락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몰락할 수밖에 없죠.”


그녀는 책을 통해 다섯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파산한 기업의 법정관리 전문 변호사로 성공한 큰딸 유진, 사설 음악학교를 운영하며 나름의 예술 영역을 개척해 가는 윤수, 자연의학 전문가를 준비하고 있는 장수, 미혼모가 된 봄누리, 마흔 넘어 낳은 늦둥이 프란츠까지. 일찍이 철이 들어 마음을 아프게 했던 기억부터 어느덧 장성해서 손자를 안겨주며 할머니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지금의 삶을 기록했다.

“며느리나 딸이 아기 봐달라는 말을 못 하게 하는 한국 어머니들의 비법을 들은 적이 있어요. 자신이 입에 넣고 씹은 음식을 손자에게 먹이기, 방 닦던 걸레로 손자의 입과 코를 쓱 닦아 주기(웃음). 그러면 다시는 아기 봐달라는 소리를 안 한다는 거였죠. 저 역시, 다섯 아이를 키웠으니 아이 보는 걸 달가워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요즘 달라졌어요. 가끔 손자를 보면서, ‘내가 이 기회에 많이 배운다’고 생각해요. 감동하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아이들이 제게 던져 주기 때문이에요.”

“할머니, 저 꽃 좀 봐”, “할머니, 저 오리 둘은 싸웠나 봐”라며 손자가 소리칠 때, 그녀는 아이들의 어릴 적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힘과 상상력을 주었나.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호기심, 그 많은 시어와 동화들이 나의 예술적 나래를 펼쳐 준 것은 아닐까’하고.

“안정된 서울의 삶을 버리고 독일로 떠날 때,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 한국에 다시 오지 않는다. 독일에서 집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절대 서울에 오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운명이면 살아남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 같아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환경을 주는 것만 것 과연 아이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걸까요. 엄마로서 좋은 것만 해주고 싶지만 결국 아이의 인생은 제 뜻대로 되지 않아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공부 못하는 아이가 더 잘되는 경우가 많듯이, 중요한 건 바탕이 활발하고 아이디어가 많고 어떤 일에도 겁 없이 뛰어들 수 있는 용기에요. 많은 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건, ‘운명이라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받아들여야 행복해져요.”


하지만 나는 내 인생에 감사한다




“사실 두 번의 결혼 상대 모두 내가 꿈꾸던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 엄숙한 약속인 결혼을 두 번이나 했던가? 첫 번째 결혼 상대는 사별했으므로, 그 운명이 오지 않았다면 그와 영원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이 살았을 것이다. 나는 남자의 칭찬에 약해서, 그 청혼을 거절하면 기회가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뛰어난 미인인 내 친구가 바람기 때문에 결혼생활에 풍파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나는 운명의 틀 안에서 잘 살고 싶었다. 이렇게 글로 자화상을 스케치하다 보니, 운명 탓으로 돌리며 합리화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에 감사한다.”(p.137)
당시 흔치 않았던 국제결혼, 그리고 14세 라는 나이 차이.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은 결혼이었지만 김영희는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도 뜨겁게 사랑했던 때를 기억하고 전 남편을 존경한다. 성격 차이로 문화관의 차이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지만, 좋은 것만 잘했던 것만 기억한다.

“헤어져야 할 때가 돼서 헤어진 거죠. 헤어져야 더 행복하다면 그게 맞는 거죠. 독일은 여자들이 이혼을 하면 우울증에 빠져서 밥을 많이 먹어서 뚱뚱해져요. 겉으로는 쿨한 척 하면서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하죠. 하지만 상처를 받아요. 항상 찌꺼기가 남아서 힘들어해요. 상대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질투하고 궁금해하죠. 전 한국식이에요.”


늙으면서 더 아름다워지는 여자




“요즘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볼 때 주름진 부분보다 주름 없는 부분을 먼저 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대신 가진 것을 확인하며 행복을 찾자’라는 것이 내 평생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장수가 내게 말했다. “엄마, 늙으면서 더 아름다워지는 여자가 있어. 그 주름살이 마치 산하를 담고 있는 것 같아 존경스러웠어요.” 그래서 나는 주름을 사랑하기로 했다.”(p.148)
김영희는 일흔에도 미니스커트를 입는 여자, 하이힐을 신는 여자다. 대학 시절, 파격적인 미니스커트 패션이 유행했고 주저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앞장서서 초미니를 입었다. 오빠들은 그녀의 차림이 부끄러웠는지 어머니께 자제시켜 달라고 부탁했는데, 오히려 어머니는 ‘실컷 입다 보면 물릴 때가 있다”며 그녀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억세게 일만 하며 나들이 한 번 안 다니셨지만, 한 번씩 옷을 장만해 장롱에 가득하게 채우셨어요. 방학 때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는 제일 먼저 천을 내밀면서 ‘입성이 똑발라야 한다. 좀 갖추고 다녀라’면서 멋지고 아름다운 천을 골라주셨죠. 그런 어머니에게 배워서 그런지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이미 유럽에서는 고가의 명품 옷은 흥미가 떨어진 지 오래다. 아시아 관광객들이 명품 옷을 싹쓸이하여 가방 그득 담고 있는 것을 보면, 독일인들은 부러움이 아니라 조소를 보낸다. 독일인은 옷 한 벌 장만할 때도 심사숙고해서 지출을 하고 디자인도 심각하게 본다.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는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디자인의 옷을 입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아들 장수가 한동안 제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준 적이 있어요. 함께 천을 고르고 저만을 위한 디자인을 스케치해줬죠. 동양적인 것을 선호해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디자인을 접고 다른 길로 가는 바람에 제 호강은 끝이 났죠(웃음).”

독일 뮌헨에서 생활하는 그녀는 가끔 한국에 올 때마다 한국 여성들의 모습에 놀라곤 한다. 외국 사람들은 그녀에게 “한국 사람들이 더 서양인 같아”라며 큰 눈과 높은 코에 호기심을 갖는다. 오랫동안 짧은 생머리와 짙은 아이라인을 고수하고 있는 김영희에게 한국 여성의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자기만족으로 살아야 콤플렉스가 없잖아요. 성형에 대해 반대하진 않아요. 늙은 사람들이 주름살 때문에 우울하면 지워야죠. 다만 전 화가니까 내추럴한 게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의사들이 말하길 ‘피부에서 인텔리전트가 드러난다’고 해요. 주름을 인공적으로 지워버리면, 그 안에 담긴 세월의 깊이도 지워지는 거죠. 난 실력이 있고 경험이 있는데 없어져 버리는 거죠. 전 성형수술 할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겠어요.”

중년의 우울증에는 산책이 최고라고 한다. 그녀는 단출한 옷차림으로 동네 산책을 나갈 때, 행복을 느낀다. 꽃을 볼 때는 꽃이 너무 아름다워 행복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기분이 좋아져 행복하다. 순간순간의 일상에 몰입하니, 세상만사가 없다.



“큰 아들 윤수에게 초대받아 음악회에 가면 그는 늘 첫마디를 이렇게 던진다. “엄마, 예쁘네.” 집에서 늘 보던 ‘노동자’의 변신이 경이로운가 보다. “…예쁘기는.” 멋쩍게 대답하지만 예쁘다는 그의 말을 나는 정말로 믿는다. 내가 나를 칭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만큼 사는 동안 남에게 상처 주는 말 삼가며 살았고, 일부 유명인사들처럼 돈 욕심, 권력 욕심, 정욕을 자제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일도 없었으니 이만하면 제법 잘 살아온 것 아닌가? 또 어린 것들 세상에 떨어뜨려놓고 밥 안 굶기고 키웠으니 장하고 아름다운 여자 아닌가? 늙으면 그 세월이 거울에 비치는 것은 물론 마음에도 나타난다는데, 나는 내 칭찬거리를 무궁무진하게 찾아 속속 꺼내 보며 행복해한다. 예쁜 꽃만 뽑아 꽃바구니를 만들 듯 그동안 잘한 일들만 뽑아서 내 마음의 방을 한껏 장식한다.”(p.179)
“아이들을 키우면서 칭찬을 많이 해줬어요. 존재 만으로도 예쁘잖아요. 다만 설거지를 안 하고 방을 안 치우면 화를 내죠. 노동은 어릴 때부터 해야 해요. 그래야 커서 자연스러워요. 자기가 엘리트라고 해도 비서나 아줌마들 모두 존경하면서 살아요. 그렇게 살아야 자기도 행복하고 사랑이 풍부해요. 이익이 되는 사람들만 만나는 사람은 외로워요. 전 주변 사람들이 모두 예뻐요. 사랑스러워요. 그래서 전 행복한 사람이에요.”


12월 25일까지 부산 수가화랑에서 ‘김영희 회화와 종이 조형전’을 열고 그녀는 다시 뮌헨으로 돌아간다. 아내를 졸업하고 엄마도 졸업했으니,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물으니, “한국에 올 때마다, 여기서 그냥 살아 버릴까?”고민한단다.

“아줌마들이 김장하는 모습을 볼 때, 부산의 복국이 생각날 때, 고등어조림이 먹고 싶을 때마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화실이 내 고향인데, 창고에 있는 작품들을 다 옮길 수가 없어요. 부수적인 것에 신경을 쓰다 보면 본업에 소홀해지잖아요. 이제 엄마를 졸업했으니 작가 김영희에게 더 충실해야죠. 한국은 이제 오고 싶을 때, 마음대로 올래요.”

‘오늘이 가장 맛있는 날’이라고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작가 김영희. ‘아 많이 늙었구나’가 아니라 ‘아! 나는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인간 김영희. 그녀의 앞길이 또 다시 궁금해진다.



그녀의 서재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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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졸업하다김영희 저 | 샘터
집안일에 대한 부담도,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책임, 초조함도 버리고, 안간힘을 쓰며 달려온 엄마로서의 삶을 졸업한 '여자' 김영희의 새로운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담백한 에세이로 출간되었다. 일흔의 여울에 쓰여진 글들은 솔직하고 가을볕을 받아 오히려 뜨겁게 느껴진다. 유진, 윤수, 장수, 본누리, 프란츠… 그녀의 다섯 아이들은 어느 새 변호사, 예술가, 자연의학 전문가 등으로 무럭무럭 자라 자신들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아이들의 빛나는 청춘을 보여줌과 동시에 마음이 아린 자신의 속앓이 역시 솔직하게 담아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규수 박사, “북한 로켓, 전쟁 나면 남북이 1대 1로 붙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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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로켓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북한에서 장거리로켓(미사일)을 개발하지만 않았더라도 우리는 로켓에 대해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가공할 무기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로켓, 정확히 로켓에 탄도를 탑재한 탄도미사일은 실재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탄도미사일이란 가깝게는 수십km에서 멀게는 1만km 밖의 표적을 강타할 수 있는 로켓 무기를 말한다. 북한의 위성발사가 두려운 것은 탄도미사일에 사용하는 로켓과 위성발사에 사용하는 로켓에 직접적인 상관관계 때문이다. 둘의 목적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무방하다. 엄청난 무게의 탄도 혹은 인공위성을 멀리 쏴 보내는 것은 같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은 두 차례의 핵실험도 강행한 바 있다. 이제까지 언론 보도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핵탄두의 소형화, 경량화 연구까지 병행하고 있다. 이쯤 되면 로켓에 대한 북한의 집착이 과연 우주개발을 위해서 인지 아리송해진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둘러 싼 중국과 러시아, 일본은 이미 오래전 ICBM(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대륙간 탄도미사일, 이하 ICBM) 개발과 핵폭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거나 언제라도 개발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 상황이다.



[ ICBM, 그리고 한반도 ]
[ 로켓, 꿈을 쏘다 ]
[ ICBM, 악마의 유혹 ]
이런 상황을 미리 분석한 책이 바로 정규수 박사의 『ICBM, 그리고 한반도』이다. 정 박사는 오래전 서울대학교 문리과학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그가 몸담은 곳은 국방과학연구소(ADD: Agency Defense Development) 였다. 이후 30여 년을 한국 국방과학기술 선진화에 힘쓴 그는 은퇴 이후에도 몇 년 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로켓과 우주개발에 대한 세미나를 주관해 왔다. 몇 년 전부터 일반인을 위한 로켓 이야기를 쉽게 풀어쓰기 시작한 그는 『로켓, 꿈을 쏘다』를 시작으로 최근 『ICBM, 악마의 유혹』등의 저서를 연이어 발표하기도 햇다. 그 안에는 우주 시대를 향한 인류의 노력과 2차 세계대전에서 시작해 냉전시대를 거치며 탄생한 ICBM의 역사, 북한과 주변 열강 사이에 있는 한반도의 상황에 대한 놀라운 사실과 심도 있는 분석이 담겨있다.


충격적인 ICBM의 진실

차 한 잔을 놓고 마주한 백발의 정규수 박사는 온화한 미소를 띄며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물리학자로서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평생을 보낸 그는 최근 ICBM과 관련된 저서 『ICBM, 악마의 유혹』을 새롭게 발표했다. 전작인 『ICBM, 그리고 한반도』의 2탄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출간에 즈음에 공교롭게도 우리나라를 둘러싼 북한과 다른 주변 강대국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 내막을 알고 보면 바로 ‘ICBM’이 중심에 있다.

질문

쉽지 않은 주제인데요. 어떻게 이런 책들을 쓰시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국방과학연구소에 1976년도에 들어가서 2006년에 정년퇴직을 했어요. 물론 연구소에서 하는 일들은 어차피 내가 이야기할 수 없는(기밀) 들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일들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어 2010년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죠.

질문

집필을 이어가시는 의도가 있을 듯 합니다. 대중들의 인식을 환기시킬 목적인가요?

답변

맞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관심이 없어요. 중국, 북한, 일본 전부 다 초긴장상태가 이어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태평이라고요. 영어로 된 책들은 많이 나와 있는데 한글로 된 책은 없기도 했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로켓과 탄도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쓴 거죠.

질문

우리나라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아무래도 북한의 영향이 제일 컸다고 봅니다.

답변

사실 북한은 직접적으로 ICBM을 우리나라에 쏠 수가 없습니다. 미사일에는 최소 사거리라는 것이 있는데 장거리미사일의 경우는 최소사거리에 우리나라가 들어가지 못하죠. 단 스커드 미사일같이 사거리가 300km 밖에 안 되는 것은 우리나라 직접 타격이 가능하죠. 실제로 스커드B와 C, 북한에서는 화성5, 6호라고 하는 것이 제주도까지를 사거리고 하고 있어요. 북한이 ICBM을 개발하는 것은 전쟁이 날 경우 우방인 미국과 일본이 도울 수 없게 하기 위한 목적이에요. 사실 일본도 북한의 ICBM에서는 어느 정도 안전한데 또 일본을 가격할 목적으로 두어 가지의 미사일을 이미 개발해 놨거든요. 게다가 중국이 갖고 있는 중거리 미사일이 우리나라를 사정거리에 두고 있죠. 그러니까 북한의 ICBM은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겁니다. 전쟁이 나면 우방의 지원을 받지 말고 1대 1로 붙자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미사일이 별로 없고 북한은 잔뜩 만들어 놓은 상황이죠. 사정이 이런데 국민들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질문

북한이 발사한 은하3호는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는데요. 인공위성 발사체와 미사일 발사체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나요.

답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죠. 보통은 다른 나라도 ICBM이나 장거리 탄도탄 발사체로 처음에 인공위성을 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무기로 배치를 했다가 신무기로 대체하거나 군축회담에서 군비축소를 하기로 한 경우 남는 로켓의 탄두를 떼고 인공위성 발사에 사용을 하고 있어요. 특히 소련의 경우가 그렇죠. 하지만 최근에 와서 군사용으로 쓰는 것은 페이로드, 싣고 갈수 있는 한도가 작기 때문에 무거운 실용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해서는 우주발사체용을 새로 개발하는 추세에요. 뭐, 그렇다고 우주발사체로 개발한 로켓을 탄도탄으로 쓸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질문

나로호와 은하3호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나요.

답변

군사적으로 효용가치가 있으려면 즉각적으로 발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나로호 같은 경우는 액체산소를 산화제로 쓰고 있어요. 액체산소라는 게 영하 183도라서 주입하는데 실온에서 압력이 생겨요. 그래서 조금씩 집어넣고 기체를 빼면서 냉각시켜가며 주입해야하죠. 그 과정이 몇 시간씩 걸린다고요. 탄도탄용으로 쓰겠다고 몇 시간을 주유하고 있으면 공격받기 십상이죠. 우리 나로호 같은 경우는 무기로 쓰고 싶어도 못 써요. 그런데 북한의 경우는 액체산소를 안 써요. 실온에서 액체 상태로 있는 연료를 미리 주유를 해놓죠. 소련의 경우 기술이 발달해 7년이 지나도 괜찮아요. 또 30년이 지나도 쏘니까 올라가거든요. 그걸 저장가능추진제라고 하는데, 북한이 쓰고 있는 게 바로 그 추진제에요. 소련이나 중국이 ICBM으로 갖고 있는 로켓에 사용되는 추진제와 같은 종류죠. 미리 다 넣어놨으니까 발사명령만 내리면 단시간 내로 쏠 수 있으니까 무기로 전용을 할 수 있는 거죠. 일부 진보성향의 사람들이 “나로호나 북한 은하3호나 같은 인공위성을 쏘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하는데 그 내막을 알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네요. 기술적으로 봤을 때나 위험성으로 봤을 때 두 로켓은 완전히 틀립니다. 같은 인공위성이라고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고 국민을 오도하는 것이에요.


언론에 따르면 북한의 미사일 수준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이미 ‘미사일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또 북한은 매월 4∼5발의 스커드 미사일 생산이 가능하며 현재도 사정거리 500㎞ 이내인 스커드B와 C형 미사일 600여 기, 노동미사일 200기, 중거리 미사일 10∼12기를 이미 작전 배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질문

현재 북한의 미사일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답변

참 애매한 것이 ICBM가 개발된 것이 1957년도에 소련에서 첫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부터거든요. 근 60여 년이 지났는데 북한은 당시 것을 답습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시작점으로 보면 성공했다 치더라도 북한이 하고 있다는 것이 1960년대 초 수준이라고 봐야하거든요. 미국 일본, 러시아 하고 비교하면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고 봅니다.

질문

책에서는 일단 탄도탄 기술이 어느 수준만 도달하면 피해를 미치는 것은 차이가 없다고 하셨는데요.

답변

맞아요. 피해는 똑같아요. 예를 들어 북한이 핵탄두까지 개발을 했고 발사체로 완성했다고 했을 때 50%는 목표에 도달하고 50%는 중간에 바다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는 입장이죠. 죽기 아니면 살기니까요. 굉장한 긴장과 공포를 야기하는 거죠.

질문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답변

최소한 우리나라도 북한과 같은 수준의 공격력을 갖춰야하죠. 북한이 우리나라 주요지역을 속속들이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만큼 우리도 그 정도 또는 그 이상의 화력을 갖춰놓고 있어야 되죠. 그래서 북한도 자신들이 공격을 했을 때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되죠. 억지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한반도를 둘러싼 일촉즉발의 위기상황

우리나라가 정체돼 있는 상태에서 주변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의 상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이미 오래전 핵무기를 보유했으며 ICBM도 적지 않은 양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항공모함까지 보유하며 재래식 무기 첨단화를 서두르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북한의 로켓 발사에 히스테릭할 정도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일본이다. 최근 우경화 분위기와 맞물려 헌법을 바꿔 자위대를 국군으로 만들고 재무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이미 기술력은 확보 한 상황에서 재무장에 돌입한다면 단숨에 세계 정상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거기에는 탄도탄도 포함돼 있다.


질문

강대국이 둘러싼 한반도의 상황에서 북한이 자칫 무모한 도발을 했을 때 한반도가 전쟁터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중국과 미국의 힘이 충돌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답변

물론 그렇죠. 중국은 사실 10년 전만해도 대만을 흡수하는 문제가 외교와 국방의 거의 전부였어요.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미 7함대가 항공모함 한 두 척 보내면 상황은 종료됐죠. 거기에 맞서 싸울 무기가 없어요. 그런데 최근에 하나 항공모함을 하나 장만했죠. 잠수함도 굉장히 많이 만들었고. 전투기도 소련 최신식 기종을 복제해서 대량생산하는 중이에요. 미국 최신예기와 질적으로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하드웨어가 좋다고 해서 금방 전투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항공모함 하나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전쟁에서 써먹으려면 10~20년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미국에서 지금도 가장 위험한 직종이 항공모함 갑판 근무에요. 활주로에서 작전을 할 때 어떤 나라도 밤에는 작전을 안 해요. 무전도 못하죠. 공격의 목표가 되니까요. 깜깜한 밤중에 무전도 끄고 불도 끄고 전투기가 떴다가 다시 항공모함에 내리려고 하면 얼마나 어렵겠어요. 온갖 사고가 계속 나면서 보완하는 거듭하고, 맹훈련을 시켜 수십 년 노하우가 생겨야 그게 전투력이 되죠.

중국은 앞으로도 항공모함을 여러 척 만들겠지만 그게 직접적으로 미국에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중국이 지상에서 쏘는 탄도탄으로 움직이는 배를 침몰 시킬 수 있는 대함 탄도탄을 개발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국하고 중국은 절대 핵전쟁은 안 해요. 공멸하니까요. 중국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전쟁이 나도 인구의 반은 산다는 식이었는데 지금은 경제가 개발되면서 반이 죽으면 중국이 망하거든요. 미국도 마찬가지고요. 서로가 도시 공격을 하면 두 국가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겁니다. 그러나 대만이나 우리나라 문제로 충돌이 생기면 국부적인 재래식 전쟁은 있을 수 있죠.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든다고 하는데, 사실 중국은 신경 안 씁니다. 단지 미국에 순차적으로 대응하는 전력을 만드는 것에 몰두할 뿐이죠.

질문

북한의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히스테릭한 반응 보이는 것이 일본입니다.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데요.

답변

나는 그걸 (일본 내부에서) 부추긴다고 보고 있거든요. 자위대를 국군으로 만들기 위한 빌미가 필요한 것이죠. 실제 성공했어요. 한일, 중일 영토분쟁 이후 일본인들의 한국, 중국에 대한 인식이 급격하게 부정적으로 바뀌었죠. 일본 국민들은 긴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고립무원이란 생각에 미국만 믿고 헌법을 바꾸고 무장을 하고 급기야 탄도탄을 보유하겠다고 할 수도 있죠.

질문

일본의 경우 기술력은 미국에 버금간다고 하셨는데, 실제 어느 정도인가요.

답변

동경대 소속으로 돼 있던 우주항공연구소에서 이미 고체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제일 처음 쐈어요. 미국의 기술을 다 흡수를 하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로켓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 H2에요. 탈 미국을 노리고 개발한 로켓이죠. 앞으로 미국으로부터 간섭을 안 받겠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1단 로켓을 액체 수소와 산소를 썼죠. 그것도 목적이 있었어요. 액체 수소 산소 엔진이 굉장히 효율적이긴 한데 밀도가 낮아서 등치가 커지고 취급이 까다롭고 위험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발사체가 안 뜨니까 고체연료로켓을 옆에서 부친 거예요. 교묘하게 상용을 강조하면서 고체로켓을 쓴 셈이죠. 자연스럽게 합리화했는데, 어찌 보면 치밀하게 계획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체연료로켓은 즉각적으로 ICBM 활용 가능)


실패는 계속해야 한다

1980년대 말부터 첨단 기술 육성을 목적으로 우주개발 계획을 수립한 우리나라는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가 1992년 8월 11일 프랑스에서 발사된 이래로 방송통신위성인 무궁화호, 다목적실용위성인 아리랑호 등을 쏘아 올렸다. 나로호는 100kg급의 인공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는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다. 그러나 군사적 사용에는 한계가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과 북한에 대응하는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어느 정도일까.

질문

나로호 발사는 결국 올해 안에 불가능한 것으로 결정됐는데, 나로호로 보는 우리나라 기술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답변

우리별1호에서 시작해 외국에서 전수받은 인공위성 기술은 지금은 완전히 독자적인 인공위성 회사가 생겨났을 정도예요. 과학위성을 만들고 컨트롤 하는 것은 기반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상용위성도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실력을 쌓고 있고요. 어쨌든 현재 우리나라 인공위성 수준은 아마도 필요한 것을 머릿속에서 그려서 부품은 사오더라도 우리 목적에 맞는 것을 언제든지 만들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았나 싶어요. 또 발사체에 대한기술은 로켓이 군사적으로 당장 쓰이는지 여부를 떠나 계속 연마하고 경험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10~20년 후에 사태가 급변해서 생존이 걸린 문제에 도달하게 되면 그땐 우리도 만들어야 할 상황이 생갈 수 있어요. 준비 없이는 안 되거든요. 그리고 군사위성 같은 것도 쏠 필요가 있고요. 왜냐하면 일본은 이미 우리를 샅샅이 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선명도와 정확도는 놀라울 정도라는 군요. 다 만들어 놓고 공개를 안 하는 것뿐이죠. 그런데 군사위성을 발사할 때 하면 남의 로켓을 쓰려면 그 위성의 성능이나 재원을 다 내놓으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발사체 개발은 군사적으로도 필요하기도 해요.

질문

우리나라는 장기적으로도 자체기술을 계속 쌓는 수밖에 없네요.

답변

결국 그래요. 저는 나로호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지금부터 기술을 축적하는 수밖에 없다고 봐요. 왜냐하면 그 기술은 아무도 안 알려 주거든요. 우리나라 하려고 하면 몇 십 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기술이 상당히 공개가 됐고, 방법은 안다고 할 수 있죠.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단 실패는 계속해야 되요. 실패를 안 하면 배울게 없거든요. 역사적으로도 그래왔어요. 시간과 돈에 쫓기며 실패해가면서도 부분 보완을 이어가며 발달해 왔어요. 1천만 달러짜리 부품이 고장나서 실패하는 거나, 5백 원짜리 나사가 풀려 떨어지는 거나 실패는 마찬가지에요. 모든 부품이 다 실패할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실패하고 나야 나사를 제대로 조이고 점검 노하우가 생기는 것이죠. 실패를 누가 더 많이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느냐가 성공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역설적으로는 냉전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로켓이 개발된 것이죠. 상대보다 더 나은 로켓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이 가능했고, 무조건 만들라는 식이었으니까요. 수십 개를 계속 실패하면서 실패 할 때 마다 전체를 점검하고 보완할 수 있었고요.

질문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답변

제가 책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어떤 형편에 놓여있는지 생각하면서 살자는 거예요. 침착하고 담담하게 사는 것은 좋은데 알고나 담담하게 살자는 거죠. 우리가 행복한 삶을 영유하려면 나라는 지켜야 하잖아요. 원래 이 책을 쓸 때, 정치외교하시는 분들이 읽어봤으면 하는 생각이었어요. 지금 기술자들을 위한 책을 또 쓰고 있어요. 로켓은 그것으로 끝내려고 해요. 그 다음에는 물리학과 관련 된 책을 써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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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BM, 악마의 유혹
정규수 저 | 지성사
대한민국 최고의 로켓 전문가로 불리는 정규수 선생이 로켓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SLBM(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과 그 기술 발전에 관한 이야기를 ICBM의 종주국인 미국과 소련의 탄도탄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설명한 책이다. 탄도미사일과 관련된 기술과 성능 등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이 책의 제목에 대해 저자는, 전 세계 어디든 30~40분이면 탄두를 운반할 수 있고 속도가 빨라 방어수단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탄도미사일은 상대보다 수백 기만 먼저 배치하면 전략적으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처음 데뷔할 때 만화가로서 결격 사유 많았죠” - 만화가 강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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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강풀. 사람들은 그를 웹툰 1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뛰어난 스토리텔러라 부른다. 2003년 발표한 『순정만화』를 시작으로 데뷔 10년 동안 발표한 10편의 작품 모두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그 중 6편이 영화로 제작되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마음을 훔친 그의 비결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 번이라도 그의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감정의 결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날 그를 웹툰의 대명사, 가장 사랑받는 만화작가로 만든 힘이다.

모든 창작가에게 현실은 중요하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에게 벌어지는 사건과 감정들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는 것에서부터 창작은 시작된다. 강풀 역시 그동안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아픔, 문제와 공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안에서 작가와 독자들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고민을 나누고 위로를 건넸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궁금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 그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고마워졌다. 그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의미에서 『26년』은 작가에게도,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남다른 작품이다. ‘광주민주화항쟁’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을 두고 강풀 작가는 ‘가장 많은 관심을 받기를 바라는 작품’으로 첫 손에 꼽았다.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이 잊히지 않기를, 그 비극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각인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처음 기획단계에서 작품의 제목이 ‘23년’이었을 만큼 오랫동안 공 들여 탄생시킨 작품이었고, 독자들은 그 노고와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아울러 그가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그 안의 문제들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그가 그리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그 작품이 영화로 재탄생했다. 영화 <26년>은 2008년도에 처음 제작 논의가 시작된 후, 두 차례의 무산될 위기를 겪으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많은 이들이 우려한 대로 투자금 확보에 난항을 겪었으나 시민 모금 형식의 제작비 모금 운동 ‘제작 두레’를 통해 비로소 영화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약 만 오천여 명의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제작비를 기부했다. 매번 자신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될 때마다 선물을 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던 강풀 작가에게 영화 <26년>은 아마도 가장 특별한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화 된 작품이 개봉될 때마다 지원 사격을 아끼지 않는 강풀 작가의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대선을 앞두고 개봉된 까닭에 영화 『26년』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26년>은 탄생만으로 감사한 작품

질문

영화 <26년>은 어떠셨나요.

답변

이전에도 영화를 몇 번 해보기는 했지만 <26년>의 경우에는 정말 힘들게 나온 영화거든요. 그래서 이 영화는 나온 것 자체가 감사해요. 이 영화가 좋다, 나쁘다, 라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요. 정말 이 영화 못 나오는 줄 알았거든요. 저는 사실 영화화된 작품의 흥행에는 큰 관심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정말 잘 되기를 바랐어요. 만화 『26년』을 그릴 때 1980년 5월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컸어요. 만화도 물론 파급력이 있지만 영화는 파급력이 굉장히 크잖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봐 주시길 바랐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80년 5월 광주가 오르내리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굉장히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흥행도 생각보다 아주 잘 되고 있어서 기분 좋습니다.

질문

영화 <26년>의 개봉시기를 두고 프로파간다(선전)로 비춰지는 것에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하지만 기대하시는 긍정적인 영향은 있을 것 같은데요.

답변

대선을 3주 정도 앞두고 개봉이 됐는데,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 영화가 대선용 영화로 비춰지는 게 싫어요. 광주 5ㆍ18 이라는 이야기가 대선을 앞두고 프로파간다처럼 비춰지는 걸 원하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대선과 상관없이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에요. 사람들은 대선의 표를 위해서 이용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 그런 생각이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일단 결과적으로는 대선 전에 개봉을 했기 때문에 부인할 수는 없는데, 사실 이 영화는 대선 전에 개봉하려고 계획한 영화가 아니거든요. 이미 몇 차례 제작이 중단돼서 여기까지 오다가 개봉된 거예요. 기왕 이렇게 됐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지난 역사를 한 번쯤은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것만으로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질문

작품의 영화화 제의를 받았을 때 흔쾌히 허락하시는 편인가요. 선택의 기준은 어떤 것인가요.

답변

쉽게 결정하지 않아요. 굉장히 까다롭게 골라요. 가장 첫 번째 기준은 이 영화 제작사가 정말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가,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떤 제작사들은 일단 콘텐츠를 확보하는 데 의미를 두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제작사가 이 영화를 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이 첫 번째에요. 두 번째는 ‘어떻게 만들려고 하는가’죠. 거기에는 굉장히 중요하게 차지하는 게 감독님이에요. 몇 번 (영화화)해보니까 만화는 만화가의 것이지만 결국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더라고요. 어떤 감독이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동안에도 사실 감독님을 가장 먼저 누가할까를 중요하게 생각했었고, 앞으로도 감독님을 더 중요하게 먼저 생각할 것 같아요.

질문

예상보다 흥행이 잘 되지 않았던 영화도 있을 텐데요. 관객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신가요.

답변

아니요, 결과에 만족합니다. 저는 정말로 대중의 눈을 믿어요. 대중이 그 정도로 좋아하고 그 정도로 보신 거죠. 대중은 정직한 것 같아요.

질문

기대와는 다르게 대중이 외면했다 하더라도 아쉬움은 없으신 건가요.

답변

네. 그게 맞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운 좋게 영화가 잘 되는 경우도 없는 것 같고 운 좋게 만화가 더 많이 읽히는 경우도 없는 것 같아요. 대중에게 창작물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면 안 좋은 결과에도 승복해야 하는 거고, 좋은 결과라면 기분 좋아하면 되는 거죠.

질문

평소에도 SNS를 통해 솔직하게 정치적 견해를 밝히시는데요. 유명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에 대한 입장이 확실하게 정리되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답변

제가 이름이 알려진 만화가이지만 정치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못할 건 또 뭐 있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도 트위터에 썼지만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말이 제일 정치적인 얘기거든요. 전 그렇게 생각을 해요. 저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고 누구라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면 정치적인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뭔가 특별한 사람,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는데 그건 옳지 않다고 보거든요. 왜냐하면 정치는 우리 일상과 가장 밀접한 거예요. 그것을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야 하고 오히려 더 나아가서 누구나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 생활하고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 하겠고요. 앞으로도 계속 할 거예요. 내가 이 나라에 살고 있는데 이 나라에 대해서 얘기를 못 할 것은 뭐가 있는가, 생각이 들고요. 만화로 그런 내용을 그리는 것은 저는 만화가니까요. 제가 말 잘하는 사람이면 말로 했겠죠. 노래를 하는 사람은 노래로 하듯이. 그런데 저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니까 만화로 하는 것뿐이고요. 그냥 내가 살면서 느끼는 걸 얘기할 뿐이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 같습니다.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린 만화 『26년』

질문

웹툰 『26년』의 후기에서도 밝히셨다시피 이전 작품들보다 그림체에 욕심을 내신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림체와 관련해서 고민하신 부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답변

『26년』전과 후로 그림체가 많이 바뀌었어요. 『26년』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5등신이고, 6등신이고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그렸었는데요. 『26년』은 팩션이잖아요. 팩트에 픽션이 붙은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물론 그렇게 해도 능력의 한계로 인해 그림이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현실감 있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26년』을 그릴 때는 주 2회 업데이트였는데도 마지막 화가 거의 2주 동안 펑크가 났어요. 그만큼 공을 들였던 것 같아요. 부족한 능력 가운데에서도 최대치를 발휘하려고 하다 보니까 마감이 많이 늦어졌죠. 솔직히 지금 보면 그림이 조금 어색하고 안타까운 부분이 많이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해요. 그 때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해도 이 정도까지 밖에는 안 될 것 같아요. 만족합니다.

질문

작품 분위기의 측면에서 기존의 캐릭터 보다 조금 더 무거운 느낌으로 그려야 한다는 고민도 있으셨나요.

답변

역으로 저는 『26년』이 무겁지 않게 보이게 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광주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건넨다고 하면, 어느 정도 광주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무겁게 받아들이거든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만화를 그리지만 그 의미를 강요한다면 만화가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만화는 재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재미가 있어서 읽힌 다음에 의미가 전달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26년』은 오히려 다른 만화보다 더 재미에 치중을 했죠. 저는 어린 친구들한테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이 만화를 그렸거든요. 너희들이 잊으면 안 된다, 여러분 잊으면 안돼요, 하면서 무거운 이야기를 계속 건네면 사람들이 보다가 지치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죠. 사실 극중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이 곽진배라는 조직폭력배잖아요. 만화 그리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던 것이 저는 조폭 미화가 싫거든요. 그런데 주인공이 제일 멋있게 나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캐릭터를 그렇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26년』은 오히려 그 어떤 만화보다도 재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질문

취재를 위해 광주에 가셨을 때 유가족을 실제로 만나거나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답변

연재하기 전에 광주에 2주 정도 내려가서 숙소를 잡고 취재를 다녔거든요. 후기에 나오는 망월동 묘역 사진도 제가 직접 찍은 것이고 유가족 분들도 만났죠. 그리고 시민군이었던 분도 실제로 만나 뵙고 인터뷰를 했죠. 당시에 제가 느꼈던 건 ‘많이 잊히고 있구나, 심지어 광주에서 조차도’라는 것이었어요.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 분들도 학생회 활동을 하기 때문에 많이 알았었던 것 같고요. 광주에서조차도 기억 속에 흘러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저는 이것은 기억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그래서 만화를 그렸죠.

처음에는 정말 단순 논리로 ‘광주를 알리자’라는 마음으로 광주를 찾았다가, 구 도청과 망월동에 갔을 때는 정말 너무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정말 대충 대충 하면 안 되는 거구나 싶었어요. 원래도 열심히 하려는 마음으로 광주까지 내려갔지만 마음이 더 무거워졌어요. 그래서 오히려 마음을 비우는 데 힘을 썼죠. 만화니까 내 무거운 마음이 드러나지 않아야 된다, 재밌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광주에 가자마자 망월동에 갔었고 떠나는 날 한 번 더 망월동에 갔었거든요. 가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재미있게 그리겠습니다. 더 재미있게 그려서 더 많이 기억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왔었죠.


웹툰이 공짜라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질문

지금까지 모든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간됐습니다. 온라인에서 작품을 만날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을까요.

답변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가 완전히 소유했다는 느낌과 들고 다니면서 볼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죠. 물론 요즘 스마트폰 같은 휴대용 전자매체들이 많이 있지만, 책은 그것 하고는 다른 질감이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을 봤을 때 누구나 다 그것을 소유하고 싶잖아요. 그걸 해줄 수 있는 게 책이라고 생각을 해요. 어떻게 보면 제 만화도 『26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만화를 인터넷으로 볼 수가 있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책을 사주시고 소유하고 계신 분은 정말로 고마워요. 소유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만화를 좋아해주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감사하죠.

질문

얼마 전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주호민 작가님께서는 단행본 출간을 위해 부록을 새로 그리기도 한다고 하셨는데요. 작가님께서도 추가 작업을 하시나요.

답변

저는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주호민 작가의 생각이 옳다고도 보는데 생각이 약간 다를 뿐이고요. 웹툰을 그릴 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기 때문에 더 덧붙일 게 없다고 봅니다. 제가 잘나서 만화를 더 그리지 않겠다는 건 아니고요(웃음). 가끔 그런 제안도 받아요. 책으로 나올 때 뭔가 플러스 되는 요인, 팁이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더 넣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죠. 그런데 넣을 게 없어요. 저는 제가 완전히 만족하는 이야기를 웹툰으로 그리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할 것 같아요. 다만 웹에서 책으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넘어올 때 편집에 더 신경을 쓰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질문

웹툰을 제공하는 포털 사이트와 웹툰 작가들이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 개선되어야 할 환경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답변

웹툰은 현재 포털 사이트에 많이 기대어 있어요. 양대 포털 사이트에서 만화들이 성장을 하고 있는데, 이제는 조금씩 유의미한 방법이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웹툰에서의 만화가 얼마 전부터 유료화 되기 시작했거든요. 처음에 허영만 선생님께서 시작을 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지금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는, 만화가 연재되는 기간 동안에는 무료고 연재가 끝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유료화로 돌려요. 그것은 앞으로 좀 더 확장될 것이고, 확장 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가장 좋은 것은, 저는 웹툰이 공짜라는 인식이 바뀌어야 된다고 보거든요. 또 그것은 작가들한테만 유리한 것이 아니라 독자 분들한테도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만화가들은 고료로만 생활을 하잖아요, 특히 신인작가들 같은 경우에는. 그렇기 때문에 만화가 끝나고 나면 당장 수입이 끊겨서 직업인으로서 만화를 하기가 힘든 거죠. 그렇기 때문에 만화가들은 연재 중인 만화가 끝나고 나면, 자신이 조금 덜 준비가 되었거나 아직 부족해도 바로 만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요. 만화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게 되는 거죠. 충분히 준비를 하고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고 난 다음에 만화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에라도 고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만화를 시작한다면, 그것이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영위가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좋지 않은 만화가 나올 수 있거든요.

작가가 정말 자기 마음에 들고 독자들한테 자신 있게 내보일 수 있는 만화가 나올 때까지 버텨줄 수 있는 것이 웹툰의 유료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다음’뿐만 아니라 ‘네이버’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이것은 작가들의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연재 기간 동안 열심히 그려내고 그때는 고료를 받고, 독자 분들은 연재 기간 때 보시면 되는 거죠. 후배 작가들에게도 이것이 차츰 차츰 적용이 되겠지만, 더 넓고 빨리 적용이 되어서 안정적인 환경에서 만화를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전체적으로 더 좋은 만화가 나올 수 있을 것이고, 독자 분들한테도 더 좋은 작업물을 보여드릴 수 있겠죠.

질문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작업환경은 어떤 것입니까.

답변

그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환경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은 못하겠는데요. 저는 제가 하고 있는 방식이 있거든요. 제가 지난 10년 동안 10편의 장편만화를 냈는데, 저한테 맞는 작업방식인 것 같아서 저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 방식을 고수할 것 같아요. 사실 10년에 10편이라고 하면 굉장히 다작이거든요. 다작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1년에 5개월만 연재를 하고 나머지 기간 동안 충분히 준비를 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작가들이 다음 작품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의 휴식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휴식하고 말 그대로 재충전할 수 있는 시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래서 저는 작가들이 자기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기간을 충분히 갖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작가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고료라든지 처우가 개선이 되고 유료화 부분이 확대가 되어야겠죠. 사실 어느 작가나 한 번에 2~3군데에 연재하고 싶어 하지는 않거든요. 저는 지금까지 계속 한 번에 한 군데, 한 번에 한 작품만 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런 것이 이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나의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작품 하나를 끝내고 나서 휴식기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만화는 언제나 하고 싶은 일

질문

흔히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림을 뛰어나게 잘 그리지는 않지만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작가님에게 만화는 잘할 수 있는 일이었나요, 하고 싶은 일이었나요?

답변

솔직히 처음에는 하고 싶은 일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 마음이 더 강하고, 만화는 저에게 하고 싶은 일이죠. 다시 다른 직업을 택하라고 하면 저는 할 만한 다른 직업이 없어요. 유치하게 말하면 다시 태어나도 만화가가 될 것 같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었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우기지만(웃음), 사실 저는 처음 데뷔할 때 만화가로서의 결격 사유가 많았죠. 일단 그림이 제대로 안 됐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보니까 욕심이 나고, 자꾸 더 열심히 하다 보니까 잘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하고 싶은 일이라는 마음이 먼저 중요한 것 같아요.

질문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답변

사람이 다 똑같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제가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건 그거에요. 강연을 다니거나 메일을 보면 굉장히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인데요.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 있는데 직업으로 삼았다가 싫어지면 어떡하죠’ 라는 질문이에요. 그건 아직 어린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싫어지는 게 두렵다면, 안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더 힘들어요.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나마 버틸 수가 있는 것이거든요. 일단 좋아한다면 나중에 싫어질까봐 무섭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냥 하는 게 맞다고 생각을 해요. 능력에 대한 부분은 정말 소질이 안 맞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싫어도 해라, 하면 된다,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하면 된다”라는 건 사실 거짓말이거든요. 안 될 수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하면 될 수도 있다, 라고 얘기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질문

작가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좌파 성향의 작가라는 일부 시선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그으셨죠.

답변

제가 좌파인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하도 좌파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진짜로. 피하기 위해서 대답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좌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냥 상식적인 거라고 생각할 뿐이에요. 저는 제가 가운데 어디쯤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너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왼쪽에 있는 걸로 보이겠죠. 제가 원하는 세상은요,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죠(웃음). 진짜에요. 그 어떤 돈과 물질, 그런 것보다도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가장 좋은 거죠. 그리고 평등했으면 좋겠어요. 기회가 평등했으면 좋겠어요. 인권이 지켜지고요. 제가 원하는 건 기본적인 인권과 평등이 지켜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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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강풀 글,그림 | 재미주의
어느 날 대기업 회장인 김갑세는 말기 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는다. 이를 계기로 그는 80년 5월에 계엄군으로 투입되었던 젊은 시절 이후 평생을 준비해온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고, 광주에 내려가 5ㆍ18 민중항쟁에서 부모를 잃은 이들을 한 명씩 만난다. 건달 곽진배, 국가대표 사격 선수 심미진, 흉상 조각가 이치영, 현직 경찰 권정혁, 광주 오월의 아이들인 이들은 사죄도 단죄도 이뤄지지 않아 그저 깊숙이 묻어둔 채 살아야 했던 울분을 되새기며 김 회장의 계획에 동참한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만화가 강풀의 작품들

[ 순정만화 ]
[ 아파트 ]
[ 일쌍다반사 ]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아버지가 왜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초등학생도 있었어요” - 황선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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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가까운 나이에 국비장학생으로 스웨덴 유학길에 오른 황선준 박사. 그 스스로도 스웨덴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파란 눈을 가진 페미니스트 아내를 만나 결혼할 줄이라고는 상상이나 했을까. 황선준 박사는 “남녀평등에 대해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아내가 경상도 남자인 나에게는 언제나 큰 도전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자라고 공부하며 몸에 배인 경쟁과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은 스웨덴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공부시키며, 또 사회생활 속에서 많은 갈등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도전과 갈등이 지금의 황선준 박사를 만들었다. 그는 “우리 아이들은 두말할 것 없이 스웨덴 교육에 있어 나의 훌륭한 스승”이라고 말한다.


왜 목수가 되라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을까


‘스웨덴 교육통’으로 불리는 황선준 박사가 『금발 여자 경상도 남자』을 펴냈다. 그는 스웨덴 국립교육청 국장으로 일하다 지난해 귀국해 현재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황선준 박사는 스톡홀름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만약 스웨덴에서 태어났으면 일찍이 재능을 발견해 목수가 됐을 거라고 한다. 늘 “너는 커서 장군이 되라”, “대통령이 되어라”는 소리만 들었지, 한 번도 심각하게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고민하며 행동에 옮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가 7살이 되던 해, 스톡홀름 근교에 있는 집을 한 채 사고 수리를 하면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목수의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기가 막히게 연장을 잘 다루는 자신을 보면서 학문할 때와는 다른 성취감을 느꼈다.

“스웨덴 국립 교육청에 근무하며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소나무 향기가 가득한 학교 목공실을 봤어요. 제가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필경 목수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죠. 여가시간에 요트를 즐기고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로 나가는 대신, 오후 3시 반이면 그날 일을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목수를 보며, 나는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도 힘든 박사학위 공부를 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어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사는 사회, 열심히 일하면서 언제나 가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 우리는 언제 그런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저 자신에게 수없이 했죠.”

황선준 박사는 26년간 스웨덴에서 살면서도 끝내 한국 여권만을 고집했다. 아마도 스웨덴 생활에서 배우고 느낀 모든 것들을 언젠가는 한국 교육계에 전파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금발 여자 경상도 남자』를 통해 경쟁 위주의 ‘걸러내기’ 교육을 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국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핀란드와 함께 세계 1,2위를 다투지만 자신감과 행복감은 OECD 국가 중 최하, 청소년 자살률과 학교폭력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또 민주주의에 대한 학생들의 이론적 지식은 최고지만, 민주주의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측면에서 한국 아이들의 모습은 꼴찌에 가깝다. PISA 순위는 중위권이지만 자신감은 최고인 스웨덴 학생들은 어떠한 이유에서 일까. 황선준 박사는 “스웨덴 교육의 핵심은 소수 정예 엘리트 만들기가 아니라 사회에서 낙오할 가능성이 많은 학생들을 감싸 안는, 경쟁이 아닌 ‘협동’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잔소리를 하지 않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밥상머리 소통’이 지금 한국 교육에 있어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 학생들이 ‘사실’을 ‘많이 외우는 것’을 공부라고 여기고 있을 때, 스웨덴 학생들은 ‘문제 중심의 연구’를 중고교에서의 공부라 여긴다.”(p.179)

“언어는 어른이 되어서도 배울 수 있지만, 창의력은 어릴 때 잘라버리면 다시 싹 틔우기 어렵다. 그리고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난 나의 선택에 만족한다.”(p.199)


질문

스웨덴으로 유학을 갔을 당시, 가장 충격을 받았던 문화는 무엇인가요?

답변

우선 스웨덴은 몹시 추웠습니다. 영하 15~25도를 오르내렸죠. 그런데 날씨만큼이나 추운 게 스웨덴 사람이라 느껴졌습니다. 한국에서 살 때는 내일이 시험이라도 친구가 오면 술잔을 기울이며 신세한탄을 하곤 했는데, 그곳 사람들은 냉정했어요. 한번은 하도 외로워 옆방 친구와 강당에서 농구나 같이 할까 해서 의사를 물었더니, 달력을 꺼내며 며칠 후에나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즉흥적으로 하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무척 답답했죠. 세월이 흐르며 그런 것에도 적응이 됐어요. 지금은 나부터도 달력이 없으면 너무 불편해요.

질문

지금은 다시 한국에 귀국하셔서 현재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장으로 일하고 계신데, 한국의 변화가 피부로 느껴질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답변

물질적으로 엄청나게 변했어요. 정말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양극화가 심화된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우리들의 정신, 의식세계에서는 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어요. 예전보다는 좀 나아졌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가정에서의 위치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젊은 층에서는 변화가 많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들도 여전히 가사는 여자가 할 일인데 이를 남자가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죠. 물론 도와주는 것이 안 도와주는 것보다는 좋습니다. 그러나 가사가 남자 자신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길 때, 가정에서 여성의 위치가 변합니다. 물론 맞벌이 부부를 가정하고 한 이야기입니다.

질문

한국의 일상에서 어려운 부분은 없나요?

답변

일상 중에 가장 힘든 것은 ‘소음’입니다. 자동차 소리, 사람 소리…. 어딜 가도 조용한 곳이 없어요. 음식점은 말할 것도 없고, 좀 조용히 산책하고 싶어 산에 가면 그곳에도 사람이 붐비고 일부는 심지어 고함을 지르기도 해요. 제가 사는 곳이 교통량이 많은 남부순환도로 근처예요. 지하철에서 내려 20분가량 걸어가야 하는데, 매연과 자동차 소리 때문에 무척 힘들어요. 조용한 스웨덴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 봐요. 또 하나 힘든 것은 담배 연기예요. 담배 알레르기가 심해 길에서 앞에 가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뛰어서 앞질러 가요. 음식점에서도 아직 담배 피우는 곳이 많아요. 맥주집은 더 심하고요. 그래서 저녁에 맥주집을 못 가요. 실내에서는 절대금연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햇빛이 많아서 그 점은 참 좋습니다. 스웨덴은 겨울이 한국보다 춥고, 어둡고, 무척 깁니다. 그러나 한국은 추워도 햇빛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질문

한국 가정의 문화에 대해서는 변화를 체감하시나요?

답변

양육과 아이들 교육에서도 큰 차이가 없어요. 끊임없이 공부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만 하지, 자녀와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은 하지 않고 있어요. 아마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비율은 30년 전보다 지금이 훨씬 적을 거예요. 소통할 시간조차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것을 한국 가정의 ‘절대적 위기’라고 부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변화, 사회적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질문

세 자녀들은 어린 시절, 각기 다른 국적의 부모를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답변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런 것을 아예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는 언제나 부모죠.. 그러나 크면서, 학교에 다니는 나이가 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나이가 되면서 자신의 부모가 다른 아이들의 부모와 다르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니면 자신의 피부와 머리카락 색깔이 다른 아이들과 왜 다른가 고민하겠죠. 그러나 한 번도 왜 자기 머리카락 색깔이 까맣느냐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어요. 아버지가 나름대로 많은 교육을 받았고 사회적 지위가 있다는 것을 이웃이나 다른 친구들로부터 들어서겠죠. 또 아버지로 인해 한국과 아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을 거고요. 예를 들어, 우리 아이들은 월드컵 때 스웨덴 아니면 한국을 응원합니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러는 것을 볼 때면 눈시울이 젖곤 해요. 물론 내가 스웨덴 사람이 아니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응할 때가 있어 당혹감을 느낄 때도 있겠죠. 아이들이 축구나 아이스하키 경기를 할 때 고함을 지른다거나 하면 말이죠.

질문

첫째 아이가 한국에서 유학을 했는데, 어떤 계기로 한국에 오게 되었나요?

답변

스웨덴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약 대학에 간다면 진학 전에 대체로 1, 2년 쉬어요. 외국여행을 하며 자신의 나라와 다른 나라에 대해 많이 배우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어떻게 살 것인지도 고민합니다. 큰 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호주에 가서 1년 일하며 살고 싶다고 했을 때, 그럼 차라리 한국에 가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는 게 어떠냐고 아내가 제안했어요. 아이도 좋다고 했고요. 그래서 내가 한국에 식당 설거지 일도 찾아봤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어요. 마침 한국에 정부장학금 제도가 있는 것을 대사관을 통해 알고 신청해서, 언어공부와 대학 학부공부를 하게 되었죠. 큰애가 한국을 좋아하는가 봐요. 대학 졸업하고 이제 실무 경력을 쌓고 싶다며 직장을 구하는 중이죠.

질문

책을 통해 언어보다 창의력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현재 대한민국은 아직도 언어교육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초등교육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답변

스웨덴과 한국의 상황이 달라 정확한 비교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가 어릴 때 토요한국학교를 보냈어요. 사과를 그리라고 해서 아이가 까만 사과를 그렸대요. 그런데 한국 선생님이 ‘틀렸다’며 빨간색이나 초록색으로 칠하라고 해서 아이가 화가 나 수업시간에 창 밖만 내다보고 있더군요. 그날 이후로 한국학교를 보내지 않았어요. 제가 한국에서 그런 식의 교육(사과는 빨간색 아니면 초록색이라는)을 받고 자랐잖아요? 그런데 스웨덴은 전혀 달라요. ‘사실을 많이 외우고 정답이 정해져 있는’ 공부가 아니라, 문제를 중심으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서로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는 식의 공부를 해요. 비판적 시각을 키워주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런데 사과는 언제나 빨간색 아니면 초록색으로 칠해야 한다는 식의 ‘정답’이 있는 교육은 아이를 오히려 망칩니다. 그래서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게 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질문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으셨나요?

답변

제 아이들은 한국어를 한국에 와서 지금 배웁니다. 언어는 성인이 된 후에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창의력이 잘려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국제화 시대에 외국과 소통하려면 영어는 필수죠. 그렇다고는 해도 창의력을 자르면서까지 외국어를 배워서는 안 됩니다. ‘창의력을 키우는 영어공부’를 해야 합니다. 영어뿐만이 아니라 모든 과목이 그런 점에서는 똑같아요.

질문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교육방법은 무엇인가요?

답변

토론식 수업과 비판적 사고로 에세이(작문)를 많이 작성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려면 학력평가 방식에 혁신이 일어나야 하죠. 지금의 사지선다형, 오지선다형 시험은 창의력을 자릅니다. 교실에서 가르칠 때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많이 해야 돼요. 즉, 자기 강의에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사 혼자 강의하고 아이들은 수동적으로 듣고 필기만 하는 방식으로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울 수가 없어요. 토론 주제를 주고 아이들이 토론하도록 해야 합니다. 당연히 아이들이 무슨 대답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경청해야 합니다. 어른이니까, 교사니까 옳다는 생각은 버려야 해요.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무런 흥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회적 문제들은 어떤 시각에서 보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요. 이런 훈련을 잘 시켜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보며, 이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도록 교수ㆍ학습 방법을 바꾸어야 해요.

질문

자녀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점은 무엇인가요? 자녀들에게 가장 많이 하신 말씀 혹은 가훈 같은 것이 있나요?

답변

가훈은 없습니다.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무엇이 돼라,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는 모두 부질없습니다. 단, 아이들이 건강하고, 정직하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했습니다. 잔소리가 도움이 안 된다는 건 다들 잘 알잖아요? 둘째 아이가 머리는 좋은데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기에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를 했어요. 그랬더니 하루는 아이가 “아버지는 공부 열심히 해서 박사도 되고 고위 공무원도 됐는데,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라고 대꾸했죠. ‘이 아이가 세상을 꿰뚫어보고 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행복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고요. 그 이후로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질문

한국 부모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많이 하시는 걸로 압니다. 한국 부모들은 어떤 질문을 가장 많이 하나요?

답변

대체로 제 이야기에 동의를 하면서도, 한국에서 그게 실현 가능하냐는 질문을 많이 하세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대학 입시 때문에 초ㆍ중등교육이 많은 수난을 겪고 있지요. 과열된 대학 입시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에 기인합니다. 즉, 계층간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게 원인이죠. 계층 간의 차이를 줄여나가야 해요. 복지정책의 확대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똑같이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질문

스칸디 대디가 과연, 한국문화에서 가능할 것으로 보이시나요? 한국 아빠들에게 가장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답변

쉬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스칸디 대디가 무슨 뜻인지가 우선 중요하지요. 아이들과 가정을 가장 중요시하고, 이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함으로써 행복을 느낀다는 의미에서의 스칸디 대디라면 아마 모두가 동의하겠지요.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고, 밥을 먹이고, 울고불고하며 같이 키우다 보니 이보다 행복한 일도 없다고 느꼈어요. 직접 그렇게 해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현실이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거고요. (그런 아버지들은) 아마 아이들을 위해, 가정을 위해 밤 늦게까지 일한다고 말하겠죠. 우리의 아버지들이 대부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문화와 생각을 조금씩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아버지가 왜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초등학생도 있었어요. 아버지라는 존재가 자신과 재미있게 놀아주는 강아지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사회적이나 가정적, 개인의 의식적 차원에서 하나하나 바꿔나가야 해요. 그래서 만사 제쳐두고 집에 일찍 들어가 밥도 짓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소통해야 합니다.

질문

한국 엄마들에게 가장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답변

우선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경제적 의존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야기해요. 여성이 직장을 다니면서 살아가는 데 불편한 점이 있다면 국가에 시정을 요구해야 합니다. 유급 육아휴직, 아동수당, 저렴한 양질의 공립유아교육 등을 요구해야 하지요. 이런 분야에 대해 지금까지 ‘사적 분야’라며 국가가 개입하지 않았는데, 사실은 사적 분야가 아니에요. 모두 아이를 낳고 키우기 때문이죠.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러니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가정에서, 사회에서 꼭 찾아야 합니다. 또한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을 가져야 해요. 초ㆍ중등교육, 대학교육에 걸쳐 남자보다 여자가 성적이 더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여성이 줄어드는 경향이 강하지요. 이런 점도 개선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어렵게 하는 가부장적 문화와 제도, 인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성들이 자신감을 갖고 싸워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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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 여자 경상도 남자
황선준 저 | 한언
‘스웨덴 교육통’으로 불리는 황선준 박사는, 고집스런 시골 소년으로 자란 과거 이야기부터 가부장적 경상도 남자가 페미니스트인 금발 아내를 만나 남녀평등과 자녀 교육 문제로 숱하게 부딪히며 지내온 지난 시간을 책에 솔직하고 담백하게 기술한다. 현재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의 원장인 황선준 박사는, 스톡홀름대학교 강의교수를 거쳐 스웨덴 국립교육청 간부를 지낸 경험과 아이들을 키우면서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스웨덴 교육과 한국 교육의 차이를 보여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혼 소송, 최악의 사례는 남편이 수십 년간… - 이혼전문변호사 이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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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사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이혼율은 OECD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난히 행복지수가 떨어지고 있는 요즘 한국 사회에서 각종 불명예스러운 1위가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특히 이혼율은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통계청이 발표한 최근 자료를 볼 때도 2012년 7월 기준 이혼건수는 1만 200건으로 전년 동월 대비 700건이 증가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혼공화국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혼을 결심하기까지 이유는 꽤나 고전적인 것에서부터 시대가 변하며 나타나는 새로운 트렌드까지 다양하다. 고전적인 것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폭력과 배우자의 부정, 고부갈등 등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이혼 유형에는 고부갈등이 아닌 장서(장모와 사위) 갈등, 사실혼 이혼 등이 있다. 이중에는 정말 이혼을 해야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결혼 생활에 심각한 위기를 겪으며 이혼을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이혼 전문 변호사이다.


이인철 변호사는 요즘 가장 뜨고 있는(?) 스타 변호사다. MBC <생방송 오늘 아침>, <세바퀴>를 비롯해 MBN <황금알> 등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보다 ‘웬만하면 이혼하지 마라’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좀 특이한 이혼 전문 변호사다. 큰 키에 미남형의 외모는 물론, 입담까지 여느 연예인 못지않다. 그런 그가 최근 방송 활동에 이어 책까지 출간했다. 제목도 『여자들은 매일 이혼을 꿈꾼다』로, 아주 직접적이고 리얼하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리 거부감이 드는 것도 아니다. 요즘 시쳇말로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 땅에 많은 부부 중 이혼 한번 떠올려보지 않은 이들은 없을 테니까. 책을 통해 그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다양한 이혼 사례를 소개하며 ‘가급적 이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중을 내비친다. 그러나 정말 이혼을 해야 하는 경우, 불행한 결혼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그런 이들을 위한 법률적인 조언과 팁도 빼놓지 않았다. 누구나 이혼의 실체와 과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행복한 부부에게는 지금의 행복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운명을 개척 할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이혼 전문 변호사, 오해와 진실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이인철 변호사에게 편안함이 느껴진다. 망설임 끝에 혹은 깊은 상처를 받고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고민을 들어주는 데 꽤나 익숙한 듯했다. 최근에는 본업인 변호사일 외에도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그간 많은 이들이 속으로만 앓아왔던 결혼생활의 고민을 명쾌한 조언으로 풀어주는 것이다. 남다른 입담과 타고난(?) 예능감 덕분에 그는 요즘 남녀 문제, 부부관계를 다루는 프로그램 캐스팅 1순위로 꼽히고 있다.

질문

최근 방송활동이 굉장히 활발하신데요. 변호사라는 직업 외에 전혀 다른 환경일 것 같은데 어색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평소에도 그런 예능감이 있으신 편인가요.

답변

아니에요(웃음). 평소에는 무뚝뚝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내성적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나름대로 열정이 있어서 방송에서 많이 쏟아내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어요.

질문

방송활동을 하면서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들의 결혼생활과 관련된 고민도 많이 접하셨을 듯 한데요?

답변

그렇죠. 그런데 사람 사는 것은 비슷비슷해요. 가끔 연예인들이나 지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시는 경우가 있죠. 또 방송관계자 분들도 종종 상담을 요청하시는데, 큰 차이는 없어요. 오히려 연예인이나 방송인 분들은 나름대로 힘든 점이 있잖아요. 그것을 가정 내에서 잘 극복하고 이해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외려 갈등이 더 커지는 경우가 있어요.

질문

이혼 전문 변호사로 알려져 계신데, 솔직히 어감이 좋은 것 같진 않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은 거부감도 있을 듯 한데요.

답변

(웃음) 썩 좋지는 않죠. 손해도 많이 보고 있어요. 무조건 이혼만 조장하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아니고요. 정말 꼭 필요한 경우 도움을 드리는 것이죠. 예를 들어 부인이 매일 맞고 살고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큰다면 폭력이 아이들에게도 대물림 될 수가 있거든요. 아주 안 좋은 환경에 있으니 그런 경우 빨리 정리를 하는 편이 낫죠. 또 반대로 이혼이 필요하지 않는 분들이나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분들 변호해서 이혼을 막기도 하고 재결합을 돕기도 하거든요. 이혼만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들은 이혼을 시키고 아니면 가정을 지키게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요.


세상의 모든 부부는 잠재적 이혼 당사자

이인철 변호사의 책 제목처럼 굳이 여성이 아니더라도 결혼을 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이혼을 떠올릴 수 있다. 모 드라마에서 나왔듯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이혼 당사자’라는 것이 이 변호사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혼을 ‘결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고 한다. 인륜지대사라는 말이 결혼에 붙는 것처럼 이혼 역시 그에 못지않은 심사숙고의 대상이란 말이다.

질문

이혼 전문 변호사라는 것 때문에 주위 지인들 중에서도 고민 상담을 해 오는 분들이 적지 않을 듯 한데요.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채시지 않나요.

답변

그렇죠. 친구들 만나도 자기 가정 이야기를 하게 되요. 동창 모임이라든지 다른 모임을 가도 다같이 있을 때는 이야기를 못하는데 따로 조용히 말 할 때는 가정생활에 힘든 점을 털어놓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결혼생활에서 어려움 겪고 계신 분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아요. 겉으로는 잘 모르잖아요. 다 잘살고 있는 줄 아는데 실질적으로 내막을 보면 많이들 힘들어하고 있죠. 정말 남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혼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문제에요. 저 역시도 그렇고, 모두가 마찬가지죠.

질문

변호사님 입장에서는 아무리 일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고민만 계속 들어야 하는데, 스트레스는 없으신가요.

답변

스트레스 받죠. 제가 옛날에 한번은 귓병까지 났었어요. 병원에서 하시는 말씀이 좋은 말을 들어야 한대요. 항상 나쁜 말만 듣다보니 귀가 안 좋아졌다고 하는데, 그게 되나요. 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숙명이라고 받아들여야죠.

질문

이혼을 결심하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지만 실제 그렇게 확고하게 결심하는 경우는 드물 것 같습니다. 심각한 이유가 아닐 경우 변호사님께서는 어떤 입장이신지요.

답변

맞아요. 의외로 망설이는 상태에서 오는 분이 많아요. 저도 첨에는 좀 의아해했는데 와서 저한테 첫 질문이 ‘저 이혼 할까요, 말까요’ 하는 경우가 많아요. 본인도 확고하게 결정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고 싶은 분들이 많은 거예요. 이런 자신의 상황에서 이혼을 하는 게 합당한 선택인지를 자문 받고 싶은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어보고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싶으면 ‘다시 한 번 노력해보시라’ 하고 부부 상담을 권해드리기도 해요. 상담을 받아 과연 부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다시 재결합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거든요. 실제 법원에서도 그것을 많이 권해요. 이혼 신청해서 바로 ‘이혼해라’가 아니라 여러 가지 좋은 절차가 생겼어요. 부부 상담과 조정 등 그 과정을 거쳐 다시 재결합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질문

최근에 꼽을 수 있는 특이한 사례는 어떤 게 있을까요.

답변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어요. 남편에게 성적으로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거죠. 요즘 많이 문제가 되고 있거든요. 부부관계가 잘 안되는 것을 두고 아내가 ‘이건 나를 속인 거 아니냐’는 식으로 이혼을 원하는 거죠. 사실 그건 일단 치료를 해봐야 되요. 치료를 해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면 이혼 사유도 안 되고 사실 행복하게 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치료도 안 해보고 무조건 이혼하겠다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젊은 부부들이 그런 게 많아요. 상대에게 조그만 하자나 흠이 있으면 그걸 핑계 삼아 이혼해야 한다고 오시는데 저는 그런 경우 대부분 돌려보내고 노력을 해보라고 하거든요. 정 안되고 상대방도 개선의 의지가 없는 경우 다시 오라라고 하죠. 그렇게 돌아가시는 분들이 꽤 있어요.

질문

법정까지 가는 경우와 조정을 하는 경우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편인가요.

답변

조정이 더 많아요. 실제로 재판을 가면 판결까지 가는 경우보다 조정으로 끝나는 경우가 과반수 이상이에요. 또 법원에서도 조정을 많이 권유를 해요. 조정이라는 것은 양 당사자가 합의해서 원만하게 끝내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거죠. 판결까지 가게 되면 아무래도 감정이 극한으로 치닫고 서로에게나 자녀에게도 더 안 좋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조정하는 것이 나아요.

질문

이제까지 가장 결과가 좋았던 건과 가장 최악의 건을 꼽자면?

답변

재결합해서 잘사시는 분들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죠. 연세가 지긋하신 부부의 사례인데, 남편이 수십 년 동안 폭행과 외도를 반복했고, 어떻게 해도 안 고쳐져서 최후 수단으로 아내께서 이혼 소송을 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정말 뒤늦게 위기감을 느끼고 앞으로 잘하겠다며 용서를 빌었는데 이미 마음이 돌아 선 상태였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남편이 너무나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살아보시라고 권하면서 조정을 했어요. 대신 남편의 재산이 꽤 많았는데 일부 재산을 받고 지켜보는 것으로 했는데, 진짜로 남편이 고치더라고요. 그건 정말 백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경우거든요. 그 후로 부부사이도 좋아지고 가끔은 같이 오셔서 고맙다고 하세요. 반면 남편과 정말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남편이 수십 년 동안 아주 심각한 폭행을 하고 스토킹까지 해서 부인을 안 놔주는 경우거든요. 그때는 남편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보상을 받게 하고 괴롭힘을 안당하게 해드려야 했죠.

질문

오히려 이혼의 원인이 되는 잘못을 한 사람인데 적반하장 식으로 의뢰를 요청해 올 때는 갈등이 되시지 않나요.

답변

의사가 살인범이 다쳐서 왔을 때 치료해야하는 경우랑 비슷해요. 나쁜 사람, 살인범도 변호사에게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까요. 물론 변호사 본인의 양심상 ‘나는 도저히 이 사람 못 맡겠다’ 하면 거부할 수는 있죠.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면 그런 분들이 모두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니까 변호사의 본분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게 되요. 결국은 정말 심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변론을 하게 되죠. 저도 맡기 싫은 사건이 있어요.

질문

혹시 거부해보신 적은 있나요.

답변

사실 저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두 가지 경우죠. 하나는 사건이 안 되는 경우에요. 도저히 이혼 소송까지 갈 사건이 아니라서 안 맡는 경우가 있어요. 또 하나는 저희도 궁합이라고 표현하는데 의뢰인하고 변호사하고도 궁합이 맞아야하거든요. 궁합이 안 맞는 경우에는 가급적 안 맡으려고 하죠. 그런데 꼭 그런 분들이 더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난감하죠.

질문

특히 변호사님의 경우는 감정적인 부분에 대한 공감이 필요할 듯 한데요. 의뢰인들이 감정적이나, 심리적으로도 안정돼 있지 않는 경우도 많을 듯 한데요. 그런 경우 변호사님만의 노하우가 있나요.

답변

쉽게 밝히는 거 아닌데(웃음). 일단 많이 들어주는 게 좋아요. 왜냐하면 그분들 같은 경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너무 없었어요. 배우자와는 대화가 단절이 돼 있고 그렇다고 자녀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기는 부끄럽거든요. 그래서 여기 와서 말씀을 하시는데 어떤 분들은 심지어 몇 시간 동안 말할 기세에요. 물론 다 들어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는 없고, 다른 사건도 많기 때문에 보통은 30분에서 1시간 정도 들어드리면 고마워하시죠. 우시는 분도 많고요. 우선은 충분히 듣는 게 중요하고 그 다음에 적절한 자문을 해드리곤 해요. 법률적인 것은 물론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모두 이야기를 해드리죠.

질문

요즘 재혼도 빈번한데, 한 사람의 의뢰인이 두 번의 이혼을 의뢰한 경우는 없으셨나요?

답변

(웃음) 아직 그런 것은 없어요. 다만, 이혼하고 나서 재혼하신 분이 다시 오셔서 상담은 해드린 적이 있어요. 또 힘들다는 이야기죠.

질문

그런 것 보면 초혼이든 재혼이든 결혼생활은 역시 만만치 않네요.

답변

이혼이 결혼보다 더 힘들죠. 제가 느끼기에도 초혼해서 이혼하기보다 재혼해서 이혼하는 빈도수가 훨씬 많고 쉬워요. 삼혼은 더 그렇고요. 왜 그러냐하면 초혼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기 때문이죠. 초혼에서 이혼을 했을 때 사람들은 보통 ‘나는 잘못이 없고 상대가 잘못해서 이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이혼이 부부 한쪽에 100% 다 잘못이겠어요. 조금씩 잘못이 있을 수 있는데 자신의 잘못은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결혼을 해요. 그리고 똑같이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죠. 배우자도 또 비슷한 사람을 만나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같은 이유로 헤어지는 거죠.


이혼에도 새로운 패턴이 있다

이혼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외도나 폭행, 고부갈등 등의 고전적인 사례도 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유형의 이혼도 등장하고 있다. 다양한 사례들이 있지만 이인철 변호사는 적어도 ‘폭력’에 있어서만은 관대한 편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폭력으로 이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현실은 씁쓸할 따름이다.

질문

가급적 말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정말 이혼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더 낫다는 경우도 있을 텐데, 변호사님도 주저 않고 이혼을 도와주시는 대표적인 경우는 무엇인가요.

답변

폭력이죠. 저는 무조건 폭력의 경우 이혼을 권해요. 상대방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거든요. 또 자녀에게도 아주 나쁜 영향을 주거든요. 물론 실수로 한 번 폭력을 행사했다고 이혼하라는 말은 아니에요. 아주 상습적인 경우를 말하는 건데, 대개는 정신질환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치료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 폭력의 가해자는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해요. ‘내가 무슨 정신병자냐’고 반문하죠. 그런 경우에는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고치지 못할 바에는 이혼하는 게 낫다고 하죠. 그 외에 것은 가급적 이혼하지 않는 게 낫다고 말씀드려요. 특히 한 번의 실수 같은 외도의 경우 잘 따져봐야겠죠. 폭력에는 단호한 대신 그런 경우 기회를 주는 것이 낫다고 봐요. 법원에서 그렇게 하고 있고요.

질문

부부관계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정말 드라마 같은 상황을 많이 접하신다고 하셨는데요.

답변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많죠. 어떤 여성은 신혼 때부터 결혼 30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폭력을 당한 경우가 있어요. 왜 참는 지 이해가 안 되는데, 폭력의 패턴 때문이었어요. 남자가 술을 먹고 들어와서 막 때려요. 그다음엔 그렇게 잘해준다는군요. 장미꽃을 선물하고 무릎 꿇고 잘못을 빌죠. 그렇게 조금 잘하다가 그 다음날 와서 또 때리고 또 사과하고… 계속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예요. 그런데 자녀 때문에 참고 살았다는 거죠. 정말 눈물 없이 못 듣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많아요.

질문

결혼 5년 내에 이혼하는 빈도가 높다고 하는데 젊은 부부들의 특징적인 이혼 유형이 있나요.

답변

요즘 하나의 새로운 패턴은 사실혼이 많다는 거예요.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안 하는 거죠. 왜 안하냐고 물으면 다시 되돌아갈 다리를 만들어 둔다는 거예요. 혼인신고를 하면 기록에 남기 때문에 얘 낳기 전까지 혼인신고를 안 하고 있다가 헤어지는 부부가 많아요. 그런 이혼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사실혼까지 포함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혼 보다 신혼부부의 이혼율이 훨씬 높아요. 요즘에는 그게 트렌드에요. 그리고 혼수 갈등 때문에도 많이 다투다 이혼하고요.

질문

혼수나 고부갈등은 오래 전부터 이혼 사유인데요. 요즘 새로운 이유는 없나요.

답변

요즘에는 신 고부갈등이라고 해서 장서 갈등, 장모와 사위 간 갈등이 많아졌어요. 미국에는 고부갈등이 없데요. 대부분이 장서 갈등이라더군요. 원래 여권이 세서 그렇다는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가 된 거죠. 맞벌이부부도 많아지고 여권도 신장되고 하다 보니 처가와 접촉이 많아지고 장서 갈등도 생기게 되는 거 같아요.

질문

크고 작은 문제들을 극복하고 잘 사는 부부도 있는데,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을 원하는 부부의 경우 공통된 특징이 있을 듯 한데요.

답변

일단 폭력과 같이 정말 심각한 경우는 누구라도 이혼을 생각할 수 있겠죠. 그렇지 않고 사소한 경우에는 결국 개인의 성향과 가족구성원의 성향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이혼에 대해서 좀 쉽게 접근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든지 형제 중에 이혼을 한 경우에는 아무래도 이혼을 쉽게 결정하는 경향이 있어요. 또 친한 친구가 있는데 거기서 한명 이혼하면 도미노처럼 번지는 경우도 있고요. 반면 우리집안에 이혼은 없다. 내 친구들 역시 아무리 어려워도 이혼하지 않고 산다. 하면 본인도 주저하고 다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죠.

질문

오히려 주변 분위기, 동조자들이 있는 경우가 있고 막는 사람이 있는 것이 차이군요.

답변

그렇죠. 옛날에는 딸이 이혼한다고 하면 부모님이 말리잖아요. 요즘에는 먼저 오세요. 하나 밖에 없는 딸인데 사위가 고생시킨다고 먼저 이혼을 시키려고 해요.

질문

요즘에는 부모가 간섭을 안 하는 것이 더 도와주는 게 아닌가 싶네요.

답변

맞아요. 부모가 간섭할수록 오히려 부부관계는 나빠지고 이혼은 쉽게 되요.

질문

자녀에 대한 배려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몇 년 전부터 오히려 아이 양육을 양쪽에서 거부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하는데요. 직접 경험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답변

아직까지는 없어요. 그런 사례가 있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자녀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서로 키운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혹시 아예 서로 미루는 경우가 있어도 문제가 안 되는 것이 아예 재판이 중지되거든요. 재판이 성립이 아예 안 되는 거예요. 결국은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한명이 키워야 하죠.

질문

소송까지 가게 되면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부부 사이에만 공유하던 서로의 치부를 건드리는 경우도 많을 듯합니다. 꼭 해야 할 경우라면, 단단히 각오하는 것도 필요할 듯 한데요.

답변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해야 해요. 이혼소송은 어떻게 보면 제일 힘든 소송이에요. 일반 민사나 형사 같은 경우는 해당하는 쟁점만 다투면 되는데 이것은 그것 뿐 아니라 상대에 대해 감정이 개입이 되요. 그래서 두 배 세배 힘들 수도 있죠.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부부는 서로 간에 치부를 다 아는데 재판 중에 그것을 꼭 드러내거든요. 성적인 문제를 거론하면 상대가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어요. 심지어 범죄행위까지 고발하는 경우도 있죠. 공무원인 남편이 ‘뇌물을 받았다. 탈세를 했다’는 것도 다 이야기하거든요. 결과적으로 완전히 감정이 멀어질 수밖에 없죠. 제 생각에는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이에서 그렇게까지 할게 뭐있나 싶어요.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해서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서로 감정만 더 나빠질 뿐이죠. 물론 상대방이 잘못했으면 위자로 1~2천만 원 정도 더 받겠지만 재산분할에는 영향을 안 미쳐요. 또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서로가 아이의 엄마, 아빠잖아요. ‘너희 엄마가 나쁜 사람,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아이가 어떻게 되겠어요.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안 좋은 모습은 안 보이는 것이 좋죠. 또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혼 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고요. 합의가 안 될 때는 법원에서 법과 판례대로 따르면 되는 거예요.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헤어질 때 잘 헤어지는 것도 중요해요.


이혼하지 않고 사는 방법

아직 미혼일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 이지만 이인철 변호사 또한 교사인 아내를 가진 결혼 9년차의 가장이다. 대학시절 미팅으로 만난 아내와 5년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 한 후 딸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진 아빠라며 웃는다. 이혼을 권하지 않는 이혼 전문 변호사의 결혼 생활은 어떨까. 어쩜 그의 방식에서 이혼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질문

방송에 출연해 다양한 조언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변호사님은 부부싸움을 안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답변

왜 안 해요. 많이 해요(웃음). 그런데 제가 보는 많은 사례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죠. 워낙 그런 사례를 많이 보니까 조심하는 편이죠. 또 싸우면 제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편이에요. 제가 유일하게 세상에서 못이기는 사람이 제 와이프거든요(웃음).

질문

이혼 전문 변호사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이혼하지 않고 잘 살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나 싶어요. 결혼생활에 가장 중요한 덕목을 꼽아 주신다면?

답변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것 같아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 하는 것. 일단 결혼하기 전에는 다 잘 보이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결혼하면 그렇지 않잖아요. 상대방의 잘못도 보이고 치사한 것도 보이고 단점도 보이게 되는데 대부분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일단 고치려고 해요. 그런 잘못된 방식이에요. 정말 이혼할 거 아니면 그 자체를 이해하고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아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30년 넘게 이렇게 살았구나’하고요. 그걸 고치려 하다보니 계속 갈등이 생기거든요. 정말 고쳐야하는데 못 고칠 거면 이혼해야죠. 그런데 참고 살려면 아예 이해하는 게 나아요. 남녀 간에 열정적인 사랑이란 보통 1년 이상 안가잖아요. 다 이해하면서 친구처럼 지내는 것이 제일 좋아요.

질문

이혼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한데, 지금 이혼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이혼을 왜 하는가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결국은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거잖아요. 본인과 자녀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거죠. 이혼을 한다면 본인이나 자녀가 더 행복해질 수 잇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만약 이혼했을 때 둘 중 한명이라도 불행해진다면 이혼은 다시 생각해봐야죠. 그 사유가 특히 폭력의 경우 이혼했을 때 나와 자녀가 더 나은 삶을 살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과감하게 이혼을 결단해야겠죠. 그리고 결단했으면 그 과정이 중요해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진흙탕 싸움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합리적으로 원만하게 갈 것이냐를 놓고 봤을 때는 당연히 후자가 좋죠. 이혼하고 나서도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자녀가 있기 때문에 저 사람하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할게 아니라 협조자의 관계로, 한때 사랑했던 사이로, 아이의 엄마와 아빠로서 서로 이해하고 살아간다면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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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매일 이혼을 꿈꾼다이인철 저 | 북라이프
다양한 방송 활동을 하며 이혼 전문 변호사로 각광받고 있는 저자가 수많은 이혼 상담과 재판의 경험을 토대로 '가장 솔직하고 가장 도움 되는' 이혼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우리나라의 전체 이혼자 수는 160만 명, 작년 한 해만 11만 쌍이 넘는 사람들이 갈라서면서 이혼은 더 이상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와 관련된 법적, 정서적 문제점도 속출하게 되었다. 이혼을 둘러싼 고민들을 해소시켜주는 이 책은, 부부 관계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나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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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떠나는 나영석 PD, 그가 이적을 한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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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는 안 되겠다 ‘서울을 뜨자’


PD는 프로그램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인터뷰 대상자가 되어도 주제는 언제나 프로그램, 개인적인 소견 보다는 제작진을 대표하는 입장으로 설 때가 많다. 하지만 스타PD가 되면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대중들은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을 제작자인 PD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한다. KBS <1박2일>의 수장이었던 나영석 PD도 그 중 한 명이다. 강호동, 이수근과 복불복 게임을 두고 신경전을 펼쳤던 나영석 PD는 종종 TV에 등장하며, 어느새 시청자들에게 무척 친근한 PD가 되었다. 그는 지난 2월 26일, <1박2일> 시즌1 마지막 방송을 끝내고 마치 말년 병장이 제대를 하듯, 방송사 문을 박차고 나왔다. 속마음은 “오 하느님, 드디어 오늘이 왔군요. 땡큐, 땡큐”였다. 그리고 다음 날, 쏟아지는 인터뷰 세례와 지인들의 연락을 받으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서울을 뜨자’고 결심한다.

<1박2일> 팀과 함께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평생 할 단체여행은 다했으니, 물론 여행은 ‘혼자’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사람들은 <1박2일> 덕분에 여행 전문가가 됐을 거라 짐작하지만, 구체적인 일정이나 계획을 짜는 건 조연출 몫이다. 나영석 PD는 생각보다(?) 비전문가다. 고백하건대 스태프들의 계획 없이 <1박2일> 멤버들이 주축이 된 자유여행을 할 때가 가장 재밌었다고 한다. 여행지 선택을 두고 고민하기를 며칠, 문득 책상 모서리에 삐죽 나와 있는 여행잡지 『론리플래닛』에 시선이 멈췄다. 『론리플래닛』은 배낭여행자의 바이블과 같은 여행 전문 잡지다. 나영석 PD는 ‘한겨울의 북유럽 여행’이라는 글귀와 ‘검은 하늘 위 녹색의 오로라’ 사진을 몇 초간 뚫어지게 쳐다본다. 평소 관심이 있던 곳도 아니었는데, 무턱대고 ‘오로라나 보러 가볼까’ 생각한다. 이윽고 결정한 여행지는 아이슬란드. 2년 전쯤 화산이 폭발해서 온 유럽 비행기를 스톱시켜버린 패기 넘치는 지역, 영국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쯤 걸리는 섬나라, 자료가 많지 않은 여행지 ‘아이슬란드’로 오로라를 보러 떠나기로 결정한다.

열흘간의 여행. 특별한 목적은 없다. ‘괜히 다녀왔어 돈 아깝게’ 정도의 느낌만 안 들면 된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같은 건 썰매개나 줘버려’라는 생각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릴, 아주 큰 결정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때는 4월이었고, 나영석 PD는 지난 12월 18일 KBS에 사직서를 냈고 내년 1월부터 CJ E&M에서 새 출발을 한다.


내 자신에게는 너무나 불성실했던 12년


“아이슬란드를 검색한다. 영국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쯤 걸리는 섬나라. 크기는 영국과 비슷하고 화산과 빙하의 나라로 불린다. Fire and ice. 이거 멋진 걸? 그 외에는 자료가 극히 없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찾는 이가 거의 없는 듯. 그래 여길 가야겠다. 여기서 오로라를 보자. 오로라 이외에는 뭐가 있는지 가서 알아보지 뭐. 뭐가 있어도 있겠지. 이번 여행은 어차피 버리려고 떠나는 것이다. 뭐가 있든 오로라만 보면 돼.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오로라를 보면 왠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것만 같은 기분까지 든다. 거기서 오로라를 본 후 마음속에 짊어진 편지와 각종 선물과 5년의 세월을 눈밭에 파묻어버리고 돌아와야겠다.” (p.50)
우연히 자연이 만들어낸 현상, 오로라를 보면 뭔가 감흥이 있을 것 같았다. 『론리플래닛』 잡지에는 노르웨이의 오로라 여행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개썰매, 스노모빌 체험, 얼음으로 만들어진 호텔 숙박까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하지만 반발심이 슬쩍 생겼다. 세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는 노르웨이 보다는 자료가 없는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었다. 나영석 PD는 “아무도 안 간 데를 가보고 싶었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떠났지만, 사실 보게 되면 너무 좋은 거고, 못 보면 어쩔 수 없는 거다. 운 좋게 보게 되긴 했지만. 못 봤어도 전혀 상관 없었을 거다”라고 말했다.

“다 알고 가는 여행은 재미 없지 않나요? 일부러 좀 헐겁게 알아보고 갔어요. 어디에 가면 뭐가 있고 무얼 먹을 수 있고, 그렇게 완벽하게 계획한 여행은 편하긴 하지만 의외성이 없으니까요. 원래 계획을 세우고 무얼 하는 편이 아니에요.”

<1박2일>을 마치고 혼자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기행문 같은 걸 써보고 싶어서 나영석 PD는 출판사에 연락을 했다.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 상념 같은 걸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1박2일>을 끝내고 떠난 여행인 탓에 <1박2일> 이야기가 자연스레 담겼다. 여행 이야기는 며칠 만에 정말 빨리 썼다. 하지만 나영석 PD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정리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친한 촬영감독 사무실에 불도 안 들어오는 쪽방에서 썼어요. 사실 여행을 했다고 해서 사람이 뭔가 바뀌는 건 아니에요. 여행을 하는 중에 일상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걸 떠올려보게 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바가 크죠. 당시에는 힘든 것만 생각하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좋았던 것, 배우는 게 많은 것 같아요.”

2년 전, <1박2일> 멤버였던 가수 김C는 나영석 PD에게 독대를 청했다. 이유는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싶다는 것. 그는 “더 늦기 전에 내가 원하는 걸 찾고 그것에 빠져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나영석 PD는 김C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이 말을 듣고는 ‘못 잡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2년 후, 나영석 PD는 김C의 베를린 여행과 다르지 않은 여행을 떠나게 됐다.

“지금 제가 37살이에요. 2001년도에 방송사에 입사해서 쉬지 않고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그 중 5년이란 시간을 <1박2일>과 함께했고요. 그런데 문득, 12년 동안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 생각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나에 대한 고민은 안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자신한테는 너무 불성실했던 거죠. 김C 형이 그렇게 떠났을 때 제 안에 굉장한 울림이 있었어요. 하지만 방송을 해야 하니 금세 그 마음은 사라졌죠. 이번 아이슬란드 여행을 하면서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되면서 그 때 형이 준 울림이 생각나더라고요.”

마흔을 준비하는 100일의 휴가. 책 제목 후보로도 올라갔던 타이틀이다. 나영석 PD는 오늘도 어딘가로 달리고 있는 이 땅의 서른일곱 동지들에게 ‘나 홀로 휴가’의 필요성을 넌지시 던진다.

“제가 예능PD이지만 한 직장의 직장인이잖아요.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해야 하고 직장의 급한 일을 처리 해야 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좀처럼 얻기가 힘들어요. 간혹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떠올려보지만 그 보다 급한 일이 너무 많으니까 고민은 사치가 돼버리죠. 저는 예상치 못한 일의 휴지기를 갖게 되면서 운 좋게 휴가를 보낼 수 있게 돼서, 그 시간을 통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어요. 저처럼 보통의 평범한 가장이 열흘 정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면, 확실하게 인생이 조금 더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더라도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일을 대하는 느낌은 다를 거예요. 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목표를 설정했으니까요.”

쉽지 않은 일이다. 직장인이 갖는 혼자만의 휴가. 그렇지만 어차피 레이스는 길지 않은가. 나영석은 PD라는 타이틀을 떼고 ‘가장 나영석’으로 말한다. 시속 200킬로미터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라도, 조금만 엑셀을 더 밟으면 레이스에서 곧 1등을 할 것만 같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잠시 차를 갓길에 멈추고 시동을 끄고 차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먼지라도 툭툭 털어주자. 앞으로 최소 30년은 더 달려야 하니까.


문제제기는 옳았는데 결론이 엉뚱했다?!


“종영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는 그 생각뿐이었다. 회사를 관두고 뭘 할까 하는 생각. 아무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살 만한 게 뭐가 있을까. 혼자 고민한 결과 네 가지 정도의 안이 나왔다. 제주도에 내려가서 펜션을 하는 게 1번 안. 콧수염을 기르고 술집을 여는 게 2번. 요리학원을 다니고 식당을 여는 게 3번. 지인들과 프로덕션을 차려서 구멍가게처럼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게 4번 안. 뭘 할까. 그 생각만 하며 마지막 반 년을 버틴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나는 아이슬란드로 날아왔다. 오로라의 신이 뭔가 점지를 해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p.325)
최근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나영석 PD의 이적을 두고 사람들의 말이 많다. <1박2일> 시즌2가 방송되면서부터 유독 ‘이적설’이 끊임없이 회자된 주인공이었기 때문. 물론 실제로도 오래 전부터 타 방송사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아왔다. 나영석 PD의 사직에 대한 결심은 <1박2일> 시즌1이 끝날 무렵부터 확고했다. 그는 마음도 몸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이게 끝나면 또 뭘 하지, 또 다른 프로그램을 할 텐데, 그럼 또 욕심에 겨워 다른 사람을 쥐어짜고 내 자신을 쥐어짤 게 뻔한데’ 그런 생각을 하자 진절머리가 났다. 결국 스트레스가 극에 다다른 어느 날, 결정했다. 회사를 관두자고. 더 이상 나나 다른 사람을 학대하며 살지 말자고.

“일단 나가고 싶은 욕망이 강했는데,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게 이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나는 그냥 열심히 프로그램을 많이 만드는 게 좋고, 정말 그게 좋아서 몸부림을 친 건데. 회사를 나와 새로운 일을 하면 과연 행복할까, 확신이 들지 않았어요. 실제로 지인들과 프로덕션을 차리는 건 어느 정도까지 진행을 했어요. 그런데 문득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마흔이라는 나이가 되기 전에 내 인생을 한 번 리셋 하고 싶다’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즐거운 리셋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CJ E&M을 선택한 건 거의 가족 같은 동료들이 그 곳에 있으니까요. 그동안 그 양반들이 없어서 외로웠거든요.”

KBS 파업이 한창일 때, 나영석 PD는 <1박2일>을 함께 만들었던, 최근 <응답하라 1997>를 히트시킨 이우정 작가를 오랜만에 만났다. 예능작가로 잘 나가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드라마를 쓴다고 푹 빠져있는 걸 보고, 그는 “대체 언제 철이 들려고 이러니.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 실패하면 큰일 난다. 화려한 경력에 오점을 남긴다”며 진지하게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실로 심플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성공, 실패 따져가며 일했어? 재밌을 거 같고 꽂히면 하는 거지. 망하면 망하는 거지 뭐.”나영석 PD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뭔가로 얻어맞은 듯 멍해지고 말았다.

“오래된 친구가 무심코 내뱉은 대답에는 뭐 하나 틀린 말이 없었어요. 저도 후배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에요. ‘일은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니고 가슴이 명령하는 것이다. 성공을 좇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두근거림을 좇아서 하는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그동안 잊고 살았던 거죠. 나름 <1박2일>을 통해 유명해지고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는 생각에 다음 작품에 대한 걱정, 가슴으로 두근거리기 전에 머릿속으로 재단하려 들었던 거예요. 문득 저를 둘러싸던 고민의 실체가 뭔지 알게 됐죠. 그리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CJ E&M에는 나영석 PD와 동고동락했던 이명한 PD, 신원호 PD, 이우정 작가 등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없었으면 절대로 안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남아도는 어느 날, 혼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핑계의 껍질을 하다 둘 벗겨가다 보면, 그 안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짜 ‘나’가 숨어 있다. 그제야 깨닫는다. 아아, 어른은 개뿔. 나는 지금까지 ‘어른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구나. 하고. 그래도 그 힘겨운 코스프레의 와중에도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파업이네 뭐네 하고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의 뇌는 끊임없이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 한 마디로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특기인 ‘진짜 나’는 오랜만에 힘주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심심하지? 프로그램이나 하나 만들지 그래? 5년 전처럼 말이야. 지지고 볶고 울고 웃고 하는 그 지긋지긋한 일. 다시 한 번 해보는 게 어떠냐고 나한테 말하고 있는 것이다.”(p.404)

그냥 다 잘됐으면 하는 생각


<1박2일> 시즌2의 메가폰은 선배 최재형 PD가 잡고 있다. 나영석 PD와 시즌1을 함께했던 출연자 중에는 이수근, 김종민만 남아 있다. 나영석 PD에게 물었다. 가끔 시즌2를 시청하냐고, 두 멤버와는 연락을 자주 하냐고.

“한참 시즌2가 시작할 때는 자주 봤는데, 요즘은 그동안 놀아주지 못한 딸아이랑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 중이라서요. 많이 보지는 못해요. 프로그램은 제작진마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 다 다르고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배우는 거니까요. 제가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멤버들이랑은 가끔 연락하지만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안 해요.”

시즌1의 맏형이었던, 나영석 PD가 가장 의지했던 출연자 강호동은 1년간 잠정은퇴 끝에 최근 복귀했다. 오랫동안 진행했던 <스타킹>, <무릎팍도사>의 마이크를 다시 잡고 변함없는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영석 PD는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의 두 챕터에 강호동 이야기를 할 만큼, 그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크다. <1박2일>에만 복귀하지 못한 강호동의 모습이 그립지는 않을까, 나영석 PD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냥 다 잘됐으면 하는 생각이에요. 형이 다시 <1박2일>에 복귀해서 같이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저는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미련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1박2일>이 끝나는 상황이 됐었고, 제게 있어 <1박2일>이라는 프로그램은 끝이 난 거예요. 호동 형이 힘든 시간을 겪다가 컴백하는 프로그램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내가 그 프로그램을 같이 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은 없어요.”

다만 한 가지 꿈꿔보는 일은 몇 년이 지난 후, 시즌1 멤버들과 함께 명절 특집 편이든 특별 편이든, 한 번 다시 뭉쳐보는 상상이다.

“호동 형은 장난끼 있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추상적인 표현을 쓰세요. 명언 같은 걸 말하려고 하고요. 본인 나름대로는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하는 말인데, ‘아 형은 좀 쉽게 말하지’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웃음).”

멤버들의 이야기를 꺼내자, 화색이 도는 나영석 PD. 조금은 그리워하는 듯싶다. 그는 사실 방송사 입사 초기 때만 해도 연예인 울렁증이 심했던 PD다. 리더십은커녕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도 잘 못하는 안면홍조증이 있었다. 그나마 스태프들과는 동고동락하니 금세 친해졌지만, 처음 보는 연예인과 대화를 할 때면 제대로 말도 못하고 웅얼거리다 돌아서기 십상이었다. 입사 1년차 때는 청룡영화상 시상식 MC였던 이병헌, 김혜수에게 스탠바이 요청을 못해 방송사고를 낸 일도 있다.

“<여걸 파이브>를 할 때가 5년차였는데 그 때도 출연자들을 잘 쳐다보지 못했어요(웃음). <여걸 식스>로 바뀌면서 그나마 친해졌죠. <1박2일>도 마찬가지에요. 남들보다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하지만 더디 걸린 만큼 나중에 더 친밀해진 것 같아요. 12년 방송을 하면서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촬영할 당시에는 불만이 생기는 사람들도 많아요. 언제는 조연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가 언제는 출연자가 마음에 안 들고. 싫어하는 사람은 늘 존재해요. 그런데 다 지나고 보면, 모두가 고마워요. 그 때는 내가 잘나서 버티는 것 같았는데 끝나고 보면 저 사람 덕분이구나, 싶어요.”


나영석 PD는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를 쓰면서, “인간 나영석의 속살을 후벼 파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불편해서, 힘들 걸 알기에 하지 않았던 스스로와의 독대를 시도했다. 인정하기 싫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통해 ‘진짜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게, 되게 힘들었어요. 내가 싫어지고도 했고요. 아마 여행을 하지 않고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엉뚱한 결론을 냈을 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제 또래의 직장인들에게 짧은 시간이라도 혼자만의 여행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10년 후 또 한 번의 휴가가 찾아온다면, 그는 어떤 여행지를 택할까. 인터뷰 내내 진지했던 나영석 PD가 세상살이의 재미를 아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디를 가든 아이슬란드를 거쳐 가고 싶어요. 기억에 남는 건 예쁘거나 신기한 풍경이 아니라, 그 곳에서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이 아닐까요.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아이슬란드를 지나쳐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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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레이스는 길다나영석 저 | 문학동네
KBS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을 만든 나영석 피디가 이번에는 '리얼버라이어티한' 에세이로 돌아왔다. 책 속에는 인생에 대한 큰 고민을 안고 떠난 아이슬란드 여행기와 『1박 2일』의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마흔을 코 앞에 둔 남자의 진솔한 속내가 들어있다. 젊은 나이에 '국민프로그램'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1박 2일』을 이끌며 승승장구한 그지만, 그 역시 마흔이라는 화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30대를 오롯이 방송에 바치고 나니 어느새 마음도 몸도 지칠 대로 지쳐있친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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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에서만 용이 나온다고?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 - 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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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특강쇼>의 인기에 힘입어 김미경 아트스피치 원장의 저서 『언니의 독설』이 한동안 베스트셀러에 또 다시 진입했다. 위안, 치유의 글들이 인기를 얻는 가운데,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독설이 2030 여성들의 마음을 훔친 이유는 무엇일까. 김미경 원장은 말한다. “위로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누워있는 사람들을 더 오랫동안 누워있게 할 뿐, 일으키지 못한다”고. 그녀는 치료약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영양제를 먹이면, 진짜 ‘힐링’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들으면 얄밉고 피곤하고 쓰더라도, 분명히 몸에 좋은 ‘독설’이 달콤한 ‘위로’보다 낫다고. 『김미경의 드림 온』은 독설을 달게 들을 줄 아는 독자들을 위한 ‘꿈 전략서’다.

‘국민 강사’라는 타이틀을 떼고 ‘드림 워커(Dream Worker) 전도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2013년을 시작하는 김미경 원장. 그녀가 요즘 가장 애호하는 단어는 ‘꿈’이다. “사랑 없이는 살아도 꿈 없이는 못 산다. 꿈은 성취가 아니라 성찰이고, 성공이 아니라 성장이다. 꿈의 멘토는 없다, 너 자신이 멘토다.” 말끝마다, 문장 하나하나 ‘꿈’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김미경 원장은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강사’라는 꿈과 동행해온 지 14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 꿈 나이 14세인 드림 워커”라고 말한다. 최근 『김미경의 드림 온』를 펴내고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는 김미경 원장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할 때, 빼놓지 않는 질문이 있다. “당신의 드림 에이지는 몇 살인가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즉답하는 사람들과는 반 나절이 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지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 사람과는 긴 시간을 보내기 어렵다. 김미경 원장에게 드림 워커가 되는 법과 꿈을 찾는 노하우를 물었다. 드림 인턴 3년차의 심정으로.




드림 워커들은 ‘결핍 센서’가 발달됐다

김미경의 특강 덕분에 요즘 대한민국이 ‘드림 워커’가 유행어가 됐다. 어떻게 나온 말인가?

3년 전쯤인가, 내가 너무 바빠하는 걸 보고 딸이 묻더라. “엄마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 이 말을 듣는데, 문득 ‘진짜 나 왜 이렇고 살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너무 바쁜 일상이 고통스러울 때도 많은데, 분명 이렇게 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보통 하기 힘든 일을 할 때는 누가 시켜서 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래서 딸의 질문에 “누가 시켜서”라는 대답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랬더니 딸이 “누가?”라고 물었고, 내 입에서 툭 “꿈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 때, 그 흔한 꿈에 대해서 파악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를 끌고 가는 기본의 힘이 ‘꿈’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힘들고 피곤하지만 꿈이 시키는 일을 해서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맞닥뜨리게 된 단어가 ‘드림 워커’다.

‘드림 에이지(Dream Age)’라는 표현도 많이 쓰더라. 꿈을 가진 햇수를 말하는 것인가?

드림 워커들은 귀신처럼 꿈과 동행한다. 나는 처음 본 사람들이라도 그 사람 옆에 꿈이 있나 없나 금방 알아본다. 하도 보니까. 사람들을 만나며 꿈 견적을 내다가, ‘드림 에이지’라는 개념이 나오게 됐다. 꿈이 시작된 시점을 AD(After Dream)라고 보고 그때부터 나이를 계산해보면 드림 에이지, 즉 꿈 나이가 산출된다. 나는 스물아홉에 드림 인턴으로 입문해서 약 6년 만에 드림 워커가 됐는데, 꿈 나이가 열 살 이상 된 사람들은 딱 봐도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나이가 어려도 꿈 나이가 많으면 어른이다. 꿈 선수끼리는 첫 만남에서도 서로를 알아본다. ‘너 몇 년 됐구나’ 하고.

그렇다면 나이는 어리지만, 꿈에 있어서는 선배인 사람들도 만나 봤나?

물론이다. 지난해 한 주간지에서 ‘강사 김미경이 만난 생각을 파는 사람’이라는 인터뷰를 연재했다. 2주에 한 번씩 다양한 분야에서 남다른 콘텐츠를 만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광고기획자 이제석 씨, 뮤지컬작가이자 연출가인 장유정 감독이 나보다 선배더라. 드림 워커 선배들한테는 내가 그들보다 나이가 많더라도 말을 쉽게 못 놓는다. 조심스럽게 말해야 한다. 이제석 씨는 정말 조심스러웠고 장유정 감독에게는 보는 앞에서 ‘네가 선배’라고 말할 정도였다.

대화를 하다 보면, 이 사람이 ‘드림 워커’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인가?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일단 결핍 센서가 어마어마하게 발달되어 있다. 귀신 같이 자신의 결핍 요소를 알아챈다. 자신이 머리는 좋지만 끈기, 열정이 부족하다든가, 하는 결핍 요소를 기가 막히게 찾아서 그것을 발전 시킨다. 장유정 감독 같은 경우에는 일부러 1년에 한 번씩 자신의 콤플렉스를 발견하기 위해서, 익숙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일을 도전한다.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바보 같은지를 깨닫는다고 한다. 드림 워커들은 이런 식으로 결핍 요소를 찾아 부족한 점을 채운다. 두 번째는 소신이 장난 아니다. 나가야 할 때, 멈춰야 할 때를 정확히 안다. 드림 워커들은 꿈과 동행하면서 꿈으로 수행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과 다른 규칙과 원칙이 있다. 소신과 베짱이 장난이 아니다. 60살이 넘은 인생의 대선배도 20살 드림 워커들을 호락호락하게 건들지 못한다. 마지막 세 번째 특징은 대부분 꿈에 미쳐있다. 그래서 일단 시간에 대해서 굉장히 철저하다. 다른 사람이 자기 시간을 가져 가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한다. 시간을 절대 허투루 쓰지 않는다. 꿈이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24시간을 쓰는 기술이 능수능란하다. 그들이 시간을 관리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정말 깜짝 놀란다.

다른 책을 쓸 때보다 『김미경의 드림 온』이 집필 시간이 길었다고 들었다.

『언니의 독설』같은 경우에는 거의 1~2주일 만에 썼다. 그동안 강연했던 이야기를 정리한 거라 빨리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드림 온』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내 꿈을 확실하게 정립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꿈이 무엇인가’라는 것이 엄청나게 철학적인 문제다. 왜 사는가?랑 똑같다. 책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꿈, 성취, 본능, 적성, 재능, 인간의 삶과 죽음 등에 대해 안 읽은 책이 거의 없다. 그렇게 꿈에 대해 정립을 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쓴 책이라 다른 책과 달리 오랫동안 쓸 수밖에 없었다.

음대를 졸업하고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다가, 29세 때 독학으로 강사의 길에 뛰어들었다. 피아노학원도 엄청나게 잘되는 상황이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에 도전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텐데.

젊은 사람이 피아노학원을 열었는데 너무 잘 되니까, 여기저기에서 노하우를 알려달라고 요청을 했다. 강사, 원장들을 상대로 강연을 몇 번 하다가, 내가 강의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또 하나, 나는 피아노학원을 경영하면서 강렬한 결핍 한 가지를 느꼈다. 바로 스승으로서의 자존감이었다. 수개월 동안 열심히 가르쳐서 피아노를 좀 치게 된 녀석들이 어느 날 “엄마가 오늘부터 학원 끊으래요”라는 말 한 마디를 던지고 사라졌다. 학부모들이 찾아오는 건 고사하고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때마다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것이 오랫동안 누적되자 내 꿈을 만드는 양질의 재료가 됐다. 자존감이라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강사라는 꿈을 갖게 된 거다.

“꿈은 강한 동기가 필요하다. 강한 동기만이 쳇바퀴 돌 듯 살아왔던 삶의 관성을 깰 수 있다. 벼랑 끝에 몰려야 꿈에 도전할 수 있다. 작심삼일에 그치지 않으려면 딴 데 한 눈 팔지 말고 내 꿈 하나만 붙잡고 오랫동안 달려야 한다. 사실상 결핍이야말로 꿈을 만들고 실행시키는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 꿈의 밥이다. 그래서 결핍이 없는 자는 제 영혼이 허기져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굶주려 죽어간다. 그래서 나는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야말로 동서고금의 진리라고 믿는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주변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야유, 그게 언제 적 얘긴데요. 요즘은 대치동에서만 용이 나와요.” 그것은 꿈의 메커니즘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대치동 엄마들이 손을 뻗을 수 있는 범위는 기껏해야 대학 정도가 전부다. 그 이후의 인생은 본인 실력대로 간다. 꿈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해서 가진 게 많을수록 꿈의 원동력은 떨어진다. 꿈을 만들고 지탱해갈 에너지가 현저히 부족하다. 반면, 못 가진 자일수록 꿈을 먹일 밥은 부족하다.”(p.111)




누워서 생각하지 말라! 뛰면서 생각해라!

꿈은 있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서 실행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을 뛰면서 해야 하는데 누워서 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다. 누워서 생각을 하면 생각이 뛰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결혼을 해야 해? 말아야 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해? 유학을 가?’ 이런 중요한 문제는 누워서 하면 완전 실패다. 누워서 한 생각을 계속 눕게 될 뿐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계속 생각해야 한다. 일을 그만 두고 외국에 간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다양한 활동에 도전을 하는 것이 뛰면서 생각을 하는 방법이다. 일하면서 생각을 하다가 그 생각이 정리되면, 실행에 이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뛰면서 그 길로 곧장 갈 수 있다.

뛰면서 하는 생각이라. 그렇다면 김미경 원장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했나?

좋은 생각이 실행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실행이 좋은 생각을 만드는 거다. 굳이 나의 비법을 이야기하자면 ‘새벽 4시 30분의 힘’이다. 사실 이건 원래 우리 어머니의 비법인데, 어머니는 살면서 뭔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늘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올렸다. 그 기도로 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나 역시 ‘새벽 4시 30분의 힘’을 믿고 강사의 길에 뛰어들었다. 실제로 나는 강사가 된 이후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결심이 선 서른다섯 살부터 마흔두 살까지 7년 동안 매일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고 강의 준비를 한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새벽 4시 30분은 강력한 염원이 시간이다. 그 시간에는 목사, 스님, 귀신, 그러니까 귀신이거나 귀신과 비슷한 사람만 깨어 있다. 그 정도로 보통 사람은 깨어 있기 힘든 시간이라는 말이다. 뭔가 이루고 싶은 절박한 것이 없는 사람은 절대 4시 30분에 눈이 번쩍 떠지지 않는다. 그것도 규칙적으로 매일 말이다. 난 그렇게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나 자신을, 나는 낮에도 밤에도 믿을 수 있게 됐다.

요즘 멘토만 찾다가 세월을 다 보내는 사람도 있다. 김미경 원장도 멘토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을 것 같다.

강의를 하고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을 쳐달라고 한다.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나에게 묻는다. 그 사람들이 어떤 심정으로 묻는지를 알기 때문에 나름 성의껏 열심히 대답을 해주지만, 솔직히 말하면 ‘너한테 물어봐’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면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도 조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조언 수십 가지를 들은 후, 그걸 종합해서 본인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경험이 있고 부작용이 있고 한계가 있다. 어떤 사람의 정답이 고스란히 당신의 정답이 될 수 있다. 내 책을 포함한 수많은 자기계발서도 적용이 가능한 한계 있는 조언일 뿐, 어떤 사람에게 완벽히 딱 맞는 조언일 수는 없다. 한계 있는 조언 천 개를 모아, 내게 맞는 근접한 정답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내 안에 스승이 있고 제자가 있다”는 말이 있다. 누구에게나 ‘조금 더 똑똑한 스승’이 존재한다. 그걸 활용해야 한다. 왜 나는 제자만 되야 하고, 스승은 찾아야 하나? 스스로에게 있는 스승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가장 훌륭한 멘토는 자기 자신인 것인가?

멘토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가 많은 사람이다. 청춘들이 멘토에 열광하는 이유 또한 지식이 아닌 지혜를 얻기 위해서다. 과외를 받는 데 이숙해진 청춘들은 지혜도 특별 과외로 얻을 수 있다고 믿지만, 지혜는 지식과 달라서 전수가 불가능하다. 지혜는 혹독한 실패의 눈물과 열정적인 실천의 땀이 농축된 한 방울의 엑기스이기 때문이다. 오직 몸으로 정직하게 깨져본 자만이 구할 수 있는 게 지혜다. 내 꿈을 만들고 오랫동안 관리하려면 지혜를 스스로 구하는 ‘셀프 멘토링 시스템’이 필요하다. 내가 나 자신이 스승이 되는 것이다. 과정이 만만치 않지만 누구나 연습하면 스스로 멘토가 될 수 있다. 내 꿈의 방향과 목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나 자신이 멘토가 된다면 얼마나 효과적인 멘토링이 가능하겠는가. 꿈을 이룬 모든 이들의 주변에 좋은 멘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 스스로 멘토가 됐을 뿐이다. 100명의 멘토보다 내 안의 스승 한 명을 만나는 게 더 소중하다. 내가 죽을 때까지 믿고 의지할 스승은 내 안의 스승, 내 꿈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모든 것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같은 상황을 맞아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지나가는 일상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기다려왔던 기회가 된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의 데이터다. 뭔가 해낸 데이터가 많은 사람은 사소한 일상에서 기회를 쉽게 발견한다. 때로 그것은 꿈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실행력이 부족한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가까이 다가와도 무심하게 흘려 보낼 뿐이다.”(p.119)




잘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법

드림 워커가 되고 싶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조차도 잘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좋아하는 것을 찾는 노하우가 있나.

적성은 쉽게 말해서 ‘좋아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질 때 이유 없이 누군가가 좋은 것처럼, 특정한 일을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율성’이다. 그저 내가 좋아서 나도 모르게 자발적으로 몰입하게 되는 것. 자율성은 지속성으로 연결되는데, 좋아하는 여자와의 데이트는 아무리 체력적으로 힘들더라도 마음이 지치지 않는 것과 같다. 좋아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고 남들이 포기할 만한 지점에서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 일로 인해 다른 소중한 걸 포기한다고 해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

재능과 적성이 겹치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어떤 걸 선택해야 하냐’고 묻는다. 만약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드림인턴이라면 좋아하는 쪽으로 가는 게 좋다. 왜냐하면 초보 때는 천재가 아닌 이상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본인은 잘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프로의 세계에 뛰어드는 순간,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10년 혹은 15년 정도 무르익지 않은 재능은 그 어떤 재능이라도 사회에서 자본과 거래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장기 레이스에 더 유리한 건 재능보다는 적성이다. 재능에 집중하면 반짝 빠르게 달릴 수 있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에너지는 적성에서 나온다. 잘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좋아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선택했는데, 막상 뛰어들어보니 아닌 것 같다는 사람에게는 어떤 조언을 하나.

강연에 온 많은 직장인들이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의 실체를 알고 싶으면 세 가지에 대해 검증해보라고 말한다. 첫째는 일주일에 1회 좋아하는 건 취미반이지 선수반이 아니라는 것. 좋아하는 것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보지 않나? 정말 좋아한다면 일주일에 하루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일주일 내내 밤낮없이 생각하고 늘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 난 강사의 꿈을 키워가고 있을 때는 24시간 내내 강의만 생각했다. 두 번째는 정말 좋아한다는 것은 좋아할 수 없는 30%를 참아내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30% 정도 싫고 귀찮은 일들이 포함돼 있다. 특히 조직에서 막내 일 때는 좋아하는 일이 30%, 싫어하는 70%다. 경력이 쌓이면 그 비율이 역전되는데, 그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은 남들이 다 좋아하는 건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갑자기 피겨스케이팅 바람이 불고, TV드라마에 새로운 직업이 나오고 흥행하면 너도나도 그 직업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남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일인데 유독 그 일이 좋아 보이면 드림리소스일 확률이 높다.

<희망특강 파랑새>에서는 주부 팬들이 많았는데, <스타특강쇼>에서는 취업준비생들이 방청객으로 많이 왔다. 이들의 경청하는 태도가 정말 진지하더라.

회사연수원 강의를 가면 끌려와서 듣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타특강쇼>는 정말 꿈을 찾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온 방청객들이라 강의를 듣는 태도나 몰입도가 굉장하다. 웃어야 할 타이밍인데도 다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섣불리 웃지를 못하더라. 가슴이 찡하다. 요즘 토크 콘서트, 강연 전성시대인데 젊은 사람들이 보편적 스승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20, 30대들은 스승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학교, 학원에서 공부를 가르쳐주지만 인생의 스승은 만날 수 없다. 만나는 친구들도 모두 경쟁시대의 라이벌이니, 믿을만한 스승을 찾기가 정말 어렵다. 그래서 멘토 열풍이 부는 것이다.

취업준비생들에게 면접 잘 보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나도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직원들을 뽑을 때 면접을 종종 본다. 가장 눈 여겨서 보는 건 열정이다. 그런데 그 열정을 첫 눈에 파악할 수 없다. 흉내 낼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에피소드 기법을 쓴다. “뭔가 힘든 일을 당했는데 제대로 해결해본 경험이 있냐”고 묻고 대답을 들어보면 열정 요소가 몇 프로인지 바로 안다. 남의 에피소드를 암기하는 건 다 표가 난다. 이야기할 거리, 나만의 스토리를 만드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많은 CEO들의 스피치 교육을 하고 있는데 강연 잘하는 법, 말 잘하는 노하우는 무엇인가.

청중을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청중에 되면 그게 다 보인다. 써준 거를 읽는 건지 그 사람 본인의 말인지. 육체를 통해서 음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누가 써준 원고를 읽더라도 내 속을 거쳐서 나오게 해야 한다. 원고를 그대로 읽는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 굳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글은 읽으면 된다.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당신의 말’을 해야 한다.


누군가는 김미경 원장을 두고, 끔찍이도 바쁘게 산다고 힐끗거린다.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천직이라고 말하니, 스스로도 얼마나 피곤할까 궁금해한다. 김미경 원장은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성격인데 이것 또한 공부해서 얻은 결과란다. 주기적으로 ‘마음공부’를 하면서, 마음속에 침투하는 질투와 번뇌를 버린다. “먼저 가는 자가 있으면 나중 가는 자가 있고, 그 사람과 나의 시간대가 틀릴 뿐”이라고 여긴다. 『김미경의 드림 온』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단다. “책도 읽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다르다. 만 원짜리 책을 가지고 1억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 값도 채 안 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겉만 보지 말고 속을 보고, 제목을 보지 말고 본질을 본다면 당신은 어느 순간 드림 워커가 되어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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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드림 온 Dream on김미경 저 | 쌤앤파커스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꿈을 말하고 꿈 언저리에서 얼쩡거리는 대한민국. 20대 때는 꿈이 없는 게 당연하고, 30대가 되어야 비로소 꿈 앞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과연 꿈이란 무엇일까? 한때 자기계발서의 달콤한 구호에 속아 꿈에 설렜던 적도 있으나, 이제 단물 빠진 껌처럼 씁쓸해진 꿈,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tvN ‘스타특강쇼’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대한민국 국민강사, 김미경 원장의 새 책 『김미경의 드림 온』이 그 모든 궁금증과 불안을 해소하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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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러분, 페미니스트의 진짜 뜻을 아시나요?” - 양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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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양혜원이 월간 <복음과 상황>에 3년간 연재했던 칼럼 ‘대야미 단상’을 묶은 책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를 펴냈다. 제목에 ‘교회’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니, 당연히 크리스찬임을 눈치챌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교회에서 가장 정숙(?)해야만 할 것 같은 ‘사모(師母)’라는 신분을 가졌다. 한국 사회에서 ‘사모’란, 언제나 목사 곁에서 현모양처의 역할을 하는 존재다. 교인들이 보기에 튀어서도 안 되고 목사를 앞서서도 안 되는, 그림자와 같은 임무를 조용히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저자 양혜원은 세상이 보는 ‘사모’의 고정관념을 슬며시 비껴갔다. 회사를 그만 두고 잠깐 동안 백수였던, 그리고 신학대학원생, 전도사였던 남편을 부양하고 가장 역할을 도맡아 했다. 결혼 후 갑작스레 목사의 길을 걷게 된 남편 덕분에 ‘사모’가 되었지만, 양혜원은 사모라는 직함보다는 ‘교회 언니’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둘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사모’는 남편의 의해서 얻게 된 이름이고 ‘교회 언니’는 스스로가 선택한 신앙이 준 이름이다.

기독 출판계에서 양혜원은 꽤 유명하고 유능한 번역가다. 『목회자의 소명』, 『현실, 하나님의 세계』, 『이 책을 먹으라』등 유진 피터슨의 주요 저작을 비롯해 많은 책을 번역했다. 그녀는 대학에서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기독기업 이랜드에서 일하다가,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는 중에 우연한 기회에 번역 일을 하게 됐다. 당시 남편도 함께 일을 그만 둔 상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번역으로 생계를 꾸리게 됐다. 공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기에 가벼운 대중서는 피하고, 번역을 하면서 배울 수 있는 공부가 되는 책을 골라 번역했다. 하지만 직업이 될 줄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녀는 “6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일로 건너가기 위한 임시 직업으로 생각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성친화적인 직업이라고 여겼던 ‘변역’이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가로서의 오랜 갈등

“번역에 대한 오랜 갈등은 번역가가 아닌 저자로 살고 싶은 제 욕망에서 비롯됐어요. 저자에 가려진 번역자로 사는 인생은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요. 번역이라는 직업에 따라다니는 수식어 ‘여자가 하기 좋은 일’, ‘결혼해서도 할 수 있는 일’를 굳이 자처해서 여자가 하기 좋은 일로 제 자신을 제한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여성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새로운 관점의 번역 이론들이 저의 이런 심리적 갈등을 속 시원히 해결해줬어요.”

콘코디아 대학의 셰리 사이먼 교수는 자신의 저서 『번역에서의 젠더』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번역은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른바 여성’과 같다. 번역가와 여성은 역사적으로 각각의 범주에서 약자의 지위를 차지했다. 번역가는 저자의 시녀고,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 원작이 재현보다 우위를 점하는 권위의 위계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미지와 연결이 된다. 원작은 강인한 발생적 남성으로 간주되고, 번역은 연약한 파생적 여성으로 간주된다.” 자기 이름으로 글을 쓰는 것이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먼 과거에 여성들은 글을 쓰는 대신 번역을 했고, 자기 글을 써도 남성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양혜원은 “번역과 여성, 그 어디에도 자기 이름으로 서지 못하는 두 가지 범주의 친화성이 오랫동안 나를 갈등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결혼과 번역은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번역가는 충실하겠다는 자신의 서약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서약 때문에 본분을 다하는 배우자가 아니라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서 충성심이 갈라지는 충실한 중혼(重婚)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모국어와 외국어는 서로 결코 만날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중혼자는 이중적으로 불성실할 수밖에 없지만, 그 불성실함은 충실할 수 있는 능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여야만 하는 불성실함이다. 그런데 번역 분야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이 이중 동맹이 가져오는 제한들이 면밀하게 다 제시되는 오늘날 충실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바버라 존슨 (p.178)

“선배 여성들이 얻어낸 권리에 힘입어 그나마 한 가지 영역에서라도 자기 이름을 얻고 싶었던 욕망은 어떻게 보면, 결핍의 이면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이 둘은 지금 제 안에서 활발하게 화해하고 있어요. 그건 번역의 위상이 높아져서도 여성의 지위가 달라져서도 아니에요. 열등과 우월을 논할 수 없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에요.”




여성의 삶을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인생 플랜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번역가가 된 양혜원은 어느 날, 갑자기 ‘사모’라는 타이틀도 갖게 됐다. 결혼 후 유산과 사산의 슬픔을 겪고, 남편의 공부로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6년의 시간을 보낸 후 덜컥 찾아온 이름이었다. 남편이 신학을 공부했으니, 그녀가 사모가 되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남편에게 붙어다니는 부수적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현실에서 몸으로 부딪힐 때 그녀는 다소 당황했다.

“남편이 사모라는 역할에 대해 특별히 요구한 건 없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넌 여기, 요 자리에서만 놀아’라고 필드를 정해주는 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말 조심을 해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제가 사모라는 자리에 종속되지 않고 제 자리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친 게 거의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건 같아요. 아마, 남편이 교회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여성학을 공부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아요.”

양혜원은 대학을 졸업하고 8년 만에 대학원에 들어가 여성학을 전공했다.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문제, ‘사모’라는 직책이 가진 고질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답을 찾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다. 그녀는 “여성학은 그동안 설명할 수 없었던 나의 경험들을 설명할 언어를 주었다”고 말했다. 아닌 것 같은데도 딱히 반박할 말이나 논리가 없어 그냥 속으로 끙끙댈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이 여성학을 통해 비로소 언어화될 수 있었다.

“똑같이 번역을 해도 왜 나는 남성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지, 내가 돈을 벌면 남편이 살림을 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왜 그 일이 말처럼 쉽지 않은지, 남편이 사역자가 되는 순간 왜 나는 교회에서 내 이름으로 설 자리를 잃었는지 등 그동안 의문으로 남아 있던 많은 문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또 엄마의 삶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줬어요. 결혼 전에는 평범한 주부로 살지 않겠다는 오기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여성들과는 거리를 뒀는데,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나 역시 차별받는 ‘제2의 성’인 여성임을 알게 됐고 그 차별의 뿌리를 공부하면서 엄마의 삶에 공감할 수 있었어요.”


‘여성학이 도대체 뭘까’라고 묻는다면, 양혜원은 “그동안 보편적 인간의 자리를 차지했던 남성의 경험으로 나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여성이자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 학문”이라고 답한다. 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두고, 소위 남자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까칠한 페미니스트’로 단정 짓는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라는 뜻을 알기나 하고 말하는 걸까.

“예전에 읽은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조한혜정 선생님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넌 어떻게 여자인데 페미니스트가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대요. 페미니즘이라는 게 정의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여성이라고 하는 생물학적,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다면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사람들은 여성학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여성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서있는 위치에서 어떤 식으로든 타협과 협상을 하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거든요. 사실 그런 여성의 삶을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여성학이에요. 그동안 남성중심적인 시각으로만 해석됐던 것을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는 게 여성학이죠. 모든 사람이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여성주의적인 시각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방에서 각종 기록을 세우며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사회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노력하기에 따라 보상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력과 상관없이 어떤 구조에 의해서 내 위치가 정해지는 집단이 있다는 걸 깨달았고,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터득했다. 양혜원은 다른 여성들도 여성학의 관점이 있으면 자기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학으로 어떻게 현실을 바꿀 것인가? 하는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것들은 잘 모르겠어요. 여성운동을 하고 캠페인을 펼치는 건 일상 외의 활동이잖아요. 일상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 한시적으로 힘을 모아 펼치는 거죠. 그런데 보통 밖에서는 좋은 발언, 이상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도 실생활에서는 별개인 경우가 많아요. 백 미터 밖에서 보면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인 거죠. 밖에서 페미니스트로서 발언을 하는 건과 현실에서 여성으로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의 사회적인 괴리가 큰 것 같아요. 반대로 생각은 정말 가부장적인데 인격적으로 여성을 대하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이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됐으면 그걸 실제로 표현해야 자기 것이 되잖아요. 생각과 태도의 괴리가 없는 것, 가능한 그것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적으로 건강한 변화가 아닐까 싶어요. 느린 변화라고 할지라도요.”

여성학의 기본 주장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행위 주체라는 점이다.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어내는 것이 초기 여성운동의 주요 과제였다면, 어떠한 상황에서건 여성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행위 주체성을 보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여성학의 주요 과제다. 말하자면 여성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려 하는데, 여성을 구조의 피해자나 희생자로만 보지 않고 어떠한 여건에서든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하려 한다. 구조의 피해자나 희생자로만 여성을 볼 경우, 여성의 행위성이 부인된다. 그래서 여성을 존중하려다가 오히려 여성을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모든 선과 악이 가능한 전인적 존재로 파악해야 하며, 다만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과 차별적으로 대우받는 구조의 문제는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p.52)




엄마인 당신, 충분히 잘해내고 있어요

결혼 8년 만에 낳은 아이는 올해로 초등학교 4학년생이 되었다. 결혼 초기 이미 두 번의 유산을 겪고 사산의 아픔도 가졌기 때문에, 아이 없이 살 생각도 했었다. 아이를 끔찍이 예뻐하지도 않고 당시에는 공부도 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대로 살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낳았을 때의 기쁨은 전혀 뜻밖이었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 한동안은 ‘내가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여운이 꽤 오래갔던 것 같다고.

“요즘 엄마들을 만나면 너무 불안해해요. 자기가 잘하지 못해서 아이가 엇나간다고 생각하죠. 그런 죄책감을 갖고 있는 엄마들이 정말 많아요. 저도 아이가 어렸을 때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어요. 학습지를 언제부터 시켜야 하나라는 사소한 문제부터 많은 일에 갈등이 많았어요.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지나가면 아이는 어느새 성장해있어요. 저는 번역을 계속해야 생계를 꾸릴 수 있었으니까 늘 바쁜 엄마라는 점이 아이한테 미안했어요. 더 잘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제 자신과 싸웠죠. 하지만 체력은 따라와주질 않았고…. 결국 내가 이 이상은 못하고, 내가 살려면 숨통을 트이려면 내 한계를 인정해야겠더라고요.”

그녀는 엄마들이 스스로 죄책감을 갖는 버릇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가 이상적으로 제시하는 모성 역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각자의 성장배경과 개성,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엄마로 사는 방식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어떤 여성들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엄마가 되고 또 어떤 여성들은 그렇지 않아요. 엄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할 수도 있고요. 어떠한 시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엄마가 되건 되지 않건, 그것이 여성 개인의 삶을 지배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문화는 자녀의 운명을 엄마와 묶기 때문에 아이와 엄마 모두가 살기 힘든데, 엄마의 모습에서도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엄마라는 역할에 균열을 가져오는 것, 필요해요.”

이 시대의 여성들, 엄마가 되는 교육만을 받지 않았다. 남성들과 똑같은 학교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육아로 인해 휴직하고 가정 안에서만 생활할 때, 도태되는 느낌을 갖고 사회와의 괴리감을 느낀다. 생계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는 남자들은 경제적 책임만도 부담스러운데, 아내의 상황까지 배려하자니 피곤하다. 그렇지만 아내들은 무엇보다 ‘남편의 이해’를 간절히 바란다.

“남자들도 쉽지 않은 건 알아요. 아내를 배려해야 한다는 게 이중적인 부담으로 느껴지죠.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다 주는 것과 아내가 자기 이름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물론 남자들도 ‘나는 뭐 내 걸 챙기면 살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남자는 그래도 사회활동을 하면서 갖게 되는 네트워크와 직함이 있잖아요. 여성들은 계속 가정에서 지내다 사회에 나갔을 때, 그 갭이 상당하거든요. 남성과 다른 코스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동일한 사회적 위치에 서기까지는 정말 힘들죠. 여건의 차이를 인정해주고 여성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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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양혜원 저 | 포이에마
유진 피터슨의 주요 저작을 비롯해, 묵직한 주제의 책을 번역해내며 최근 기독교 출판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번역가 중 하나인 양혜원이 ‘교회 언니’가 되어 수다 한 판을 선보인다. 바로 엄마, 사모, 번역가로서 살아온 날들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자 보수적이고 경직된 한국 교회를 향한 쓴소리다. 저자는 월간 〈복음과 상황〉에 3년간 ‘대야미 단상’을 연재하며, 개인적인 아픔부터 남편과의 갈등, 번역자의 고뇌,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솔직하게 풀어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노래하는 떡볶이 아저씨 가게 어때요?” - 케이윌 (K.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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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년이 걸렸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감격스러운 2011년 4월 3입니다.”
-‘SBS 인기가요’ 1위 후 케이윌 트위터


음원차트 1위, 가요프로그램 1위, 이제는 ‘1위 가수’ 케이윌이 어색하지 않지만 실제로 그가 공중파에서 1위를 한 것은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운’이나 ‘기획사’에 의해 인기를 얻은 가수가 아니다. 그는 오로지 노력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켜 실력을 신장시켰다. 27살의 늦깎이 데뷔에도 아이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3집 앨범에 와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색도 시작됐다. 하루하루 ‘사람이 얼마나 바쁠 수 있나’의 기록을 갱신하는 기분이라는 그를 한 방송국 음악프로그램의 대기실에서 만났다.


쟁쟁한 아이돌 사이에서도 여전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본인의 노래가 왜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제가 그동안 열심히 노래도 했지만 정작 많이 듣는 이야기가요. “무한도전부터 좋아했어요”에요. 우스갯소리로 하는 얘기지만 사실이기도 하죠. 그게 예능프로그램의 파워기도 하고요. 무대에서 노래만 할 때는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기가 힘들잖아요. 어쩌면 음악도 오래전부터 캐릭터 산업이 된 게 아닌 가 싶어요. 예능은 그 캐릭터를 잡아주는 역할을 조금 하는 거죠.

그리고 음악적으로도 대중가수로서 트렌드를 무시할 수 없고 색깔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둘을 동시에 가져가다 보면 앨범 낼 때마다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아요. 저는 27살에 데뷔를 해서 지금 소녀시대, FT아일랜드, 카라와 데뷔 동기거든요. 나이로 보나 장르로 보나 뒤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가끔은 제가 발라드 가수가 맞나 싶어요. 사실은 변종 발라드라고 생각을 해요. 「이러지마 제발」 같은 경우에도 힙합 베이스를 쓰기도 하고요. 발라드의 큰 프레임을 가져가면서 그 때 그 때 트렌드와 접목시키고 소스를 굉장히 다양화한 것이 잘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장기적으로 보면 예능출연이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한데, 특히 발라드 가수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지 않나?

저도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예능에서의 나의 모습이 노래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면 어떡하나 특히 발라드는 예능과는 색깔적인 차이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결과론적으로는 잘 된 것 같아요. 팬들의 입장에서 보면 멀티하다고 비춰지기도 하고요.

특히 여자 팬들이 많은 것 같다?

여자 분들이 남자 연예인을 생각하는 것은 장동건, 원빈 이런 사람인데, 저는 “쟤 왠지 내가 사귀려면 사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정도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가깝고 어렵지 않게 느껴져서 좋은 쪽으로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저희 회사에 입사한 제 팬인 직원도 친구들과 늘 그렇게 얘기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오랜만에 정규 앨범이 나왔다. < 3집 The 3rd Album Part 1 >는 그 전작들과 많이 달라진 느낌인데?

이번앨범을 하면서는 ‘뻔하게 하지말자’ ‘앨범 색깔을 좀 더 짙게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떤 색깔을 짙게 할 것이냐 하면 전 어렸을 적에 늘 흑인음악을 듣고 자라왔기 때문에 요. 내 안에서 ‘흑인음악을 하고 싶다’ 이런 갈증이 좀 있었어요. 본능적으로 흑인리듬도 좋아하고요. 그런 것들을 조금씩 키워나가면서 실천을 한 것 같아요.

그럼 이번 앨범에서는 발라드에서 흑인 음악적 요소를 더 강하게 표현했다는 이야기인가?

모든 가수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사람들이 좋아하게 만드는 거 아닐까요? 마음만 가지고 있는 것과 하는 것과는 굉장히 달라요. 저는 이번 앨범에서 어느 정도 하고 싶은 걸 시도한 것 같아요. 물론 놀랄 정도로 큰 변화는 아닐 수 있지만 내 안에서는 정말 큰 변화였어요.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프라이머리 형과 작업했던 곡들 중에 「나가면 고생이야」와 「환상속의 그대」라는 곡이 있는데요. 나라는 사람에 비해 예전의 발표했던 앨범은 너무 진지한 쪽의 음악이 아니었나 나는 위트 있고 재밌는 사람인데 재밌고 아이디어로 푸는 곡을 하고 싶다 생각해서 만들게 되었죠. 제가 쓴 「Bluffing」도 네오소울이에요. 아무래도 내가 만드는 노래가 나랑 가장 잘 어울리는 게 아닐까 싶어요.

왜 앨범을 두 Part로 나눴나?

그건 제 마음가짐 때문인 것 같아요. 정규앨범이라는 것은 준비하는 가수의 마음가짐도 그렇고 앨범을 구매하는 분들도 그렇고요. 노래 한 곡 들어볼까가 아니라 분명히 무게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번 앨범은 저에게는 큰 변화이기 때문에 그만큼 이 변화를 진지하게 받아줬으면 좋겠다 이런 느낌이었죠. 그래서 미니앨범은 안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러면 파트를 1,2로 나눠서 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결정하게 된 거죠.

앞으로 나올 Part 2의 구상은 잡혀있나?

그렇죠. 사실 Part 1에서 변화 폭이 컸기 때문에 이게 반응이 안 좋으면 어느 정도 선회도 가능했을 텐데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특히 주변 사람들이 “이제 하고 싶은 거 조금씩 하는구나 이제까지 했던 것 중에 제일 좋았어” 라고 말해줘서 더 좋았어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1집, 2집, 3집을 정의하자면?

1집은 굉장히 좋은 종합선물세트에요. 그러데 그 종합선물세트 같은 옷을 나는 잘 입었나, 소화를 잘 했나하는 생각은 들어요. 그 때는 가요를 처음 시작한 거니까요. 그런데 정말 옷은 너무 예뻤어요. 2집 앨범은 20곡이 거의 다 발라드였어요. 그래서 2집을 통해서 발라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발라드란 옷이 나에게도 맞게 됐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3집은 자아발견의 개시라고 할 수 있죠. 내 옷을 입은 느낌이에요.


27살에 데뷔했다, 늦게 데뷔한 이유가 뭔가?

저는 어렸을 때는 겁이 많았고요. 전형적으로 재미없는, 책상에 오래 붙어있지만 성적이 나오지 않는 학생이었거든요. 원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 하는 건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 당시는 실용음악과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부모님이 “없는 가정환경에서도 미술이나 성악 같은걸 할 생각이 있느냐” 이렇게 권장했는데도 겁이 났어요. “그냥 노멀하게 일반 대학교에 가겠습니다.”라고 결정은 했는데 만약에 내가 이 학교를 졸업하면 내 인생이 좀 윤택해지나, 안개가 좀 걷혀지나 이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아닌 것 같은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 하자” 해서 이렇게 음악을 하게 됐어요. ‘음악해도 돼’ 하는 핑계가 생긴 거죠. 그 와중에도 생각한 게 만약에 내가 자영업을 해도, 혹은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팔아도 그냥 떡볶이 파는 아저씨 보다는 노래하는 떡볶이 아저씨 가게가 훨씬 잘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럼 안할 이유가 없다 싶어 바로 시작했죠.

노래는 어떻게 연습했나?

노래의 기본은 호흡 발성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구조적으로 따졌을 때 어느 부분에서 타점을 내느냐와 어느 파워로 밀어내느냐가 소리를 만드는 큰 요소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학원에서는 보통 밀어내는 힘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음역대를 올리려고 타점을 이동하려고 하니까 그게 잘 안돼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노래를 해서 주변에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 최대한 노래를 작게 부르려고 했어요. 음량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공명점을 자주 이동을 하면서 소리를 내보고요. 결국 그렇게 했던 게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렇다면 자신에게 가장 맛있게 소리가 나는 음역은 어디인가?

저는 중고음대에서 유지하는 부분이 약해요. 제가 얘기하기는 좀 그렇지만 제가 워낙 고음이에요. 저는 A에서 B#을 유지하는 게 더 힘들고요. 3옥타브 C, D 정도가 제 색깔이 확 드러나는 음역인 것 같아요. 실제로 제 노래 중에는 3옥타브를 건드리지 않는 노래가 없어요.

싱어로서 무대에서 가장 염두에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

저는 무대에 섰을 때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노래를 들으면서 분석하려고 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비록 현재 경연프로그램들이 너무 많지만 좋으면 좋은 거잖아요. 바이브레이션이 완벽했어도 지루했으면 지루한 노래가 되고 들었을 때 좋은 노래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1집부터 함께 작업했던 뮤지션이 예사롭지 않았다?

1집에는 같이 작업했던 방시혁 형의 덕분에 백지영 누나와 작업을 했어요. 그리고 제가 god 공연에서 오프닝 공연을 많이 섰거든요. 그래서 태우와는 친해서 부탁했고요. 그리고 제가 한 때 아카펠라 그룹을 했어요. 매니쉬라는 팀이었는데 그 라이벌이 바로 스윗소로우였어요. 그 인연으로 스윗소로우가 1집을 도와줬죠.

방시혁 뿐만 아니라 박진영, 김도훈 등 유명 작곡가와 작업이 많은데 어떻게 작업했나?

데뷔 앨범 때는 진영이형과 함께 했어요. 진영형의 곡에는 자유적인 감성과 임팩트가 이런 게 녹아있고, 도훈이 형은 저랑 색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요. 사람들이 ‘김도훈 노래구나’ 감지는 하지만 곡들이 절대 뻔하지 않아요. 톤도 잘 맞아서 저도 이렇게 많이 작업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저희가 모니터를 중요하게 생각을 해서 저의 색깔을 도드라지게 곡도 짜서 오늘까지 살아남은 거죠.

이번 MNET MAMA에서 세계적인 팝스타 B.O.B와 합동공연도 했는데, 소감은?

아마 케이 팝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으면 굉장히 긴장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B.O.B는) 얼마 전까지 전 세계의 큰 사랑을 받았던 친구고요. 한국 사람이 그런 친구와 한 무대를 선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든 그림이 아니었나 싶어요. 어느 날 「Nothin` on you」의 멜로디를 부를 기회가 있는데 할래? 라고 물어서 예전 같았으면 영광이다 이런 마음이 클 텐데요. 지금은 케이팝이 워낙 큰 사랑을 받고 있어서 재밌겠다. 하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B.O.B도 굉장히 매너 있게 잘 해줬고요.

“한국의 음악이 지금 세계적이다. 이제는 한국음악을 어디에 내놔도 훌륭한 음악이 됐다.” 이번 MAMA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상황이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음악을 사랑해주고 반응이 좋은 것 자체가 어느 정도는 인정받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반면 요즘 가요계에 아이돌과 인디밖에 안 보인다 이런 얘기도 많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가끔은 너무 쏠림현상이 있는 건 아닌 가 싶기도 하고요. 하나가 주목을 받으면 그 쪽으로 시선들이 다 쏠리는 것 같아요. 올해 하반기는 차트가 굉장히 재밌어요. 저는 춘추전국기라고 표현을 하는데 어떤 게 잘된다고 하는 게 없던 상황이에요. 이게 정말 풍성하게 다 잘되려면 노래에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랑얘기, 차인얘기 말구도요. 인생이나 청춘의 이야기도요.


케이윌을 가수로 만든 앨범은 무엇인가?

보이즈 투 멘(Boyz II Men) < II >앨범이에요. 저는 이 앨범 테이프를 두 번 끊어 먹었어요. 1990년대 멜로디와 화성이 너무 좋았어요. ‘언젠가는 나도 이런 노래를 해야지’라고 생각할 정도로요. 그 때는 보이즈 투 멘(Boyz II Men)에 미쳐 있었어요. 그 때 왜 테이프가 끊어질 때까지 들었냐면 여기 나오는 이 애드립을 제가 해야 되는거에요. 저는 여자노래는 안 들었어요. 제가 할 수 없는 노래니까 (웃음) 그러다보니 솔리드도 좋아했고요. 솔리드 2집도 좋아해요. 브라이언 맥나이트도 좋아했어요. (그래서 「One last cry」를 자주 불렀군요?) 「One last cry」는 마치 제 노래인양 많이 불렀어요. 그래서 별명이 브라이언 형나이트가 됐죠. 지금 제 팬클럽 이름이기도 하고요. 제 본명이 김형수거든요.

앞으로 어떤 가수가 되고 싶은가?

나중에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기억에 남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멋들어지는 음악을 해서가 존경받는 선배님들을 보면 노래도 좋았지만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감정을 아우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어떤 할머니가 귀여운지 아세요?” -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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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색 포장지로 커버를 두른, 조금은 촌스러운 다이어리를 든 유인경 기자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이제는 정말 나를 위해서만』속 ‘나의 촌스러운 수첩들’에 등장하는 다이어리구나 싶었다. 명품 브랜드의 세련된 다이어리가 쏟아지고 있지만 그녀는 15년째 똑같은 수첩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비닐 코팅된 국산 양지수첩. 유인경은 “외국산과 달리 우리나라 국경일과 휴일이 정확하고, 주요 기관 전화번호, 지하철 노선도까지 요긴한 생활정보가 들어 있어 나에겐 최상의 다이어리”라고 말한다. 매년 새 다이어리를 구입하면 리모델링(?)을 하곤 하는데, 2013년에는 책이 많이 팔려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황금색 포장지를 선택했다. 신문기자로서 그리고 TV 토크쇼,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대중을 만나고 있는 유인경은 『남자의 물건』저자 김정운 교수의 ‘여러가지문제연구소’를 작명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유인경은 몇 년 전까지는 해마다 그 해에 꼭 이루고 싶은 일들을 첫 장에 격문처럼 적었지만, 요즘은 그냥 담담하게 새해를 맞는다. “희망과 꿈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갈수록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늘어나 적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고. “새로 마련한 다이어리에 아름답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바라진 않아요. 다만 수첩에 기록되는 나의 매 순간이 부끄럽고 치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죠. 부질없는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온순한 시간들이 기록되길 원해요.”나이가 들면 들수록 질투가 적어져 행복하다는 유인경. 기자생활 30년(현재는 경향신문 부국장), 워킹맘 23년차인 그녀는 ‘귀여움과 주책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늘 경계하면서,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야 후배, 자식들이 좋아한다는 진리를 따르며, 일상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나이가 드니, 혀가 깨물어진다

『이제는 정말 나를 위해서만』은 중년 여성들을 위한 에세이이지만, 젊은 사람들도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나이듦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데, 솔직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뤘다.

딸이 26살인데, 친구한테 이 책 엄마한테 선물하라고 했더니 ‘우리 엄마 집 나가면 어떡하냐’고 했다고 하더라(웃음). 제목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사실 집필 초기에는 ‘나는 나이값 하지 않겠다’로 제목을 정했는데 너무 부정적인 느낌이 있다고 해서 바꿨다. 새해가 돼서 그런지 책이 좋은 반응이 있어서 기분 좋다.

그동안 여성들을 위한 책을 많이 냈지만, 50대 여성 그러니까 중년을 상대로 한 책은 처음이다. 예전의 책과는 다른 느낌으로 썼을 것 같다.

개인 블로그에 글을 꾸준히 올리고 있는데, 블로그에 올리듯 가볍게 썼다. 글을 쓸 때 쓰고 싶은 마음이 어금니까지 차오를 때, 툭 쓰기 때문에 한 꼭지당 30분도 안 걸린 것 같다. 대선 이후 본의 아니게 50대가 화두가 됐는데 중년기에 삶을 탄탄하게 해놓지 않으면 몸 따로, 정신 따로 노년기가 위태로울 수 있겠다 싶었다. 나 혼자만의 불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는 거다. 평소에 여성 커뮤니티, 여성 포털을 자주 들어가는데, 요즘은 딸들이 엄마 문제에 대해 그렇게 글을 많이 올린다. 예전에는 젊은 엄마들의 자녀 교육 문제 이야기가 대다수였지만, 요즘에는 ‘우리 엄마 갱년기 어떻게 해결하냐, 우리 엄마 너무 심술궂다’는 이야기가 많다. 어떻게 노화를 받아들이는가가 문제인데,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 같다. 사람들이 내가 히히덕거리고 그다지 우울한 감정을 느끼지 않고 살고 있는 거 같으니까 신기해하더라. 그래서 내 작은 팁을 주고자 쓴 책이다.

내용이 굉장히 솔직하다. 백지연, 전여옥 등 이슈 메이커들에 대한 코멘트도 적나라하게 달았다. 나이가 들어서 용감해진 건가?

뭐 그렇게 비난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 욕 먹는 분들이었으니까 내가 대표해서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뿐이다. 내 지인들 이야기도 모두 실명으로 썼다. 다들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썼는지 궁금해서 직접 책을 사 읽더라. 그래서 몇 권 더 팔았다(웃음).

중년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타인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고 반면 작은 일에도 괜히 역정이 나고 노여움을 타는 나이라고들 하는데.

최영미 시인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를 발표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최근 50대가 되시고서 고백을 하시더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 땐 미쳤나 보다고(웃음). 내가 기자라는 직업으로 오랫동안 살아서인지, 젊을 때는 비판, 직언, 직설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혀가 깨물어진다. 부질 없는 이야기 왜 하나 싶고, 남들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 그랬을까’ 한 번은 더 생각하게 되고 한다. 내가 착해지고 있구나, 싶다. 또 하나 요즘은 부러운 사람이 없다. 내가 잘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아무리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이라도 그 이면에는 다 어려움이 있다는 걸 많이 봤기 때문이다. 재력, 명예는 부러울 지 몰라도 그 사람의 인생에 따라오는 가족, 사생활 들을 다 묶어서 패키지로 보면, 부러운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내 삶이 종종 찌질하고 비참할 때도 있지만 나 있는 상태로 내 모습이 좋다.

“늘 조용히 서재에서 살인 사건을 다룬 책만 쓰던 세계적인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오십대 예찬론자였다. ‘나는 내 삶이 두 번째로 꽃피우는 시간을 즐겼다. 온갖 감정과 수많은 인간관계로 뒤엉킨 삶이 지나간 뒤 50세 무렵, 갑자기 새로운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생각할 것, 공부할 것, 읽어볼 것으로 가득한 삶이었다. 가슴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생각이 솟아올랐다’ 나 역시 삼사십대까지만 해도 항상 남들과 비교하고 스스로를 들볶았다. 남의 꽃밭만 구경하며 그 꽃밭의 장미와 라일락을 부러워하느라 정작 내 꽃밭에 물을 주거나 가지치기는 게을리 했다. 하지만 오십대에 이르러 내 꽃밭에 핀 키 작은 들꽃이며 봉숭아꽃의 소박함에 평화와 위안을 얻는다.”(p.16)




‘질투심이 사라진다’ 내가 행복하다는 증거

책에서 ‘자발적 고독을 즐기라’는 이야기를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 훈련이 필요한 일 아닌가.

나는 혼자 잘 노는 편이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좋지만 혼자 있는 시간도 행복하다. 옷이나 뭘 사야 할 때 꼭 누군가랑 같이 가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꼭 남의 취향에 맞는 옷을 고르게 된다. 취재가 있는데 중간에 시간이 붕 뜨면 서점에 가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고,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자주 걸어 다닌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이 불행한 게 시선을 자꾸만 바깥으로 돌려서 남과 비교하느라, 불행해진다고 말했다. 빈 방에 혼자 앉아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이 ‘당신은 바깥에서 일을 하니까 그렇지 않냐’고 말하는데, 혼자 집에 있다고 내팽개쳤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젊어지고 싶고, 젊은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부모들만 해도 ‘자식들 다 키워줬더니 이제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서운해한다.

나이 들었다고 <열린 음악회>, <가요무대>만 보라는 법 없다. 난 <K팝스타>를 더 즐겨본다. 딸이랑 자주 대화를 나누고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데, ‘귀여움과 주책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겉모습보다 생각이 젊어져야 한다. 자녀들이 고달파하는 건 부모한테 어른스러움을 기대하는데 포용력이나 배려심은 없어지고 취향만 젊어지는 모습을 볼 때다. 자녀들한테 같이 시간을 보내달라고 하고 집착하면 안 된다. 아이가 저절로 나한테 오게 해야 한다.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어야 하는데, 잔소리만 많아지니 아이들이 안 온다. 내 딸이 나랑 자주 놀아주는 게 내가 지갑을 잘 열기 때문이다(웃음).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의 문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 딸이 왜 이러지?’가 아니라 ‘정말?’이라는 시각으로 봐줄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더 철딱서니가 없지 않았나, 이해해주고 경청해줘야 한다.

점점 질투심이 사라진다고 했다. 나이 탓만은 아닐 것 같기도 한데.

질투심에 나를 부글부글 태우는 일이 확실히 줄었다. 다 불쌍하고 안쓰럽다. 안됐다는 게 아니라 마음에 긍휼함 같은 게 생겼기 때문이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다 행복한 게 아니더라. 그 이면에 힘든 모습이 참 많았다. 요즘 생각이 드는 건, 주변이 잘 돼야 내가 덕을 본다는 걸 영악하게 깨달았다. 지난주 토요일 날 많이 친하지 않았던 여고 동창이 밥 산다고 나갔는데, 외제차를 끌고 오더라. “가방 좀 밀어줄래?”라고 하는데 샤넬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얘 뭐니?”라고 했을 텐데 이젠 아니다. ‘얘 요즘 잘 사는구나. 별장도 있다던데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한다(웃음). 힘들게 사는 친구들이 와서 돈 빌려달라고 하면 힘들지 않나? 그 순간 잠깐의 우월감을 느낄 순 있겠지만, 끊임없이 걱정해주고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따르니까.

‘내가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닌 ‘미움을 받는 이유’에 대해 기록했다. 관대해진 건가? 타인의 시선에 대해 자유해진 건가?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본인이 그걸 어떻게 의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인 것 같다. 누가 자기를 싫어해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들은 한 사람과의 관계만 껄끄러워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 중 하나가 타인의 반응에 무딘 감성을 준 거다. DNA 자체도 그렇고 오빠들이 수시로 각종 지적과 더불어 주제 파악을 하도록 훈련 시켜줘서 욕 먹거나 비난을 받아도 크게 상처 받지 않는다(웃음). 러쉬 림보라는 미국의 보수 성향의 진행자는 『내가 미움 받는 이유』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그는 확신적이고 어조가 강해서 항상 구설수에 시달렸는데 자신이 미움 받는 이유를 잘 알아서 더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난 내가 미움 받는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반성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내 말, 행동에 책임지겠다는 뜻이다. 날 미워하고 싫어하는 건 그분들의 권리고 내 설명으로 그 감정이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다. 내가 누굴 짓밟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전제 하에 미움을 받아도 꿋꿋하게 버티자는 게 나의 모토다.

“잭 웰치의 부인이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편집장인 수지 웰치가 쓴 <10,10,10>이라는 책을 보면 ‘내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10이라는 숫자로 판단해보라’고 한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화가 나거나 혹은 흥분되거나, 기쁘거나 혹은 슬프거나)이 과연 10분 후까지 계속 그 감정을 유지할 일인가, 10일 후에 혹은 10년 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차분하게 따져보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죽을 것처럼 괴롭고 미칠 듯 화가 나서 폭언을 퍼붓거나 광분을 했던 일이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보면 ‘아뿔사, 왜 그랬을까’ ‘아, 그때 조금만 냉정했더라면’ 하고 후회되기 때문이다.”(p.111)




귀엽게 늙어가는 것, 나의 모토

<주간 경향>에 ‘유인경이 만난 사람들’ 칼럼을 쓰고 있다. 중년이 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젊었을 때와는 사람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을 것 같다. 멋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전에는 세속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요즘엔 자연스럽게 나이가 든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 그리고 안팎이 비슷한 사람이 멋있다. 진솔한 사람, 귀여운 사람이 좋다. 문정희 시인을 최근에 만났는데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글을 쓰는 것도 멋있지만 이태리로 교환교수를 하러 떠나는데, 뱃사공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보톡스 맞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더라. 귀여우시더라(웃음). 또 최장집 교수, 한승헌 교수도 굉장히 근엄해 보이지만 만나 보면 그렇게 유머감각이 뛰어나다. 멋있으시다. 나의 모토도 이분들처럼 ‘귀엽게 늙어가자’다.

귀엽다는 것, 어떤 의미일까.

딸이 말하더라. “엄마 어떤 할머니, 할머니가 귀여운 지 알아?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할머니야.” 사람들이 대부분 나이가 들면 그런 이야기 못 한다. 아는 척하고 싶어 한다. 나이에 상관 없이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고, 물어보고, 궁금해하고, 물 흐르듯 살면 길이 오는 것 같다. 가수 조영남 씨랑 친한데, 지난달에 집에 가보니 스페인 아티스트가 와서 조영남을 주인공으로 비디오 아트를 만들고 있더라. 피카소 옷도 입었다가 고흐 분장도 했다가, 바니걸스 같은 아이들이랑 사진도 찍고. 내가 “어떻게 나이 70에 화양연화를 누릴 수 있냐”고 물었더니, “꿈이라는 게 노력해서 이뤄지는 것도 있지만 재밌게 열심히 살았더니 꿈이 나를 찾아왔다”고 하더라. 단, 꿈을 가져야 꿈이 찾아오겠지만. 난 재밌게 사람들과 소통하고 꽉 막히고 심술궂은 할머니가 아닌, 귀여운 할머니로 나이 들면 좋겠다. ‘숲해설사’라는 직업이 있는 것처럼, ‘사람해설사’라는 직업을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가만히 나를 돌아보니, 사람들의 전기를 많이 읽고 모으고 있더라. 사람들을 보는 시각을 다양화할 수 있겠다 싶다.

중년, 노년의 특별한 계획이 있나.

한비야 씨는 80세까지의 플랜을 모두 완성했다고 하는데, 나는 무엇을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지금 당장 다이어트도 못하는 나인데 몇 년 뒤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계속해서 경제활동을 하게 된다면 그래도 여유있게 살 수 있을 것 같고, 마음이 즐거우면 몸도 건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의술이 발달했으니, 많이 걱정 안 한다. 중요한 건 내가 재밌게 사는 거다. 내가 재밌게 살고 있으면 친구들이 궁금해서 연락해온다. 그러면 만나서 더 재밌게 놀면 된다(웃음). 친구가 없으면? 케이블 채널이 500개도 넘는다. TV랑 친구하는 거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다. 올해는 역사책을 천천히 읽으려고 한다. 성경공부만 해도 몇 년을 보낼 수 있는데, 앞으로 뭐하지? 이런 걱정은 안 한다.

아직 중년이 찾아오지 않았지만, 곧 마주할 세대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20,30대는 감정이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다. 미리 선행학습을 하진 말자. 부르르 떨어도 보고 질투도 해봐야 내 자신을 알 수 있다. 30대부터 너무 고요한 삶을 살면, 중년에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어질 지 모른다. 누구나에게 고통 총량의 법칙이 있듯이, 젊을 때 철들지 않은 사람이 나중에 보면 더 점잖아지는 경우도 많다. 나도 평탄하게 살아온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남편 사업이 망해서 생계 전선에서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었고 치매 걸린 엄마의 병수발도 들었다. 난 이런 걸 이겨낸 게 아니라 잘 견뎌서, 지금에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병아리와 계란후라이의 차이를 아나? 내가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고, 남이 깨주면 계란후라이가 되는 거다. 계란후라이가 되냐, 장닭이 되냐는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느냐에 있다. 누구나에게 24시간이 주어지는데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누구에게는 100시간이 될 수 있는 거다. 젊을 때 시행착오를 하는 건 당연하니, 타인이 원하고 조정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만들어 가면, 중년이 오는 것이 두렵지 않을 거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50세 이후의 시간이 인생에서 또 하나의 풍요로운 시기가 된다. 오십대에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닫고 실천한다면 남은 인생도 더 멋진 모험과 즐거움의 시기가 될 수 있다. 그 모험이 꼭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인 ‘버킷리스트’처럼 히말라야나 북극 탐험, 이십대처럼 팽팽한 몸매 되찾기 등이 아니다. 기말고사 끝나면 시험공부 하느라 미뤄두었던 소설책 읽기나 영화 관람을 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정말 하고 싶었고 가슴 떨리게 하는 일을 찾는 것이다.”(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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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말 나를 위해서만
유인경 저 | 위즈덤경향
벌써 40대에 접어들어 너무 늦었다고. 50대라 나잇값 못 한다고 흉볼까봐 겁이 난다’는 이들에게 유인경 기자는 삶은 나이 들수록 더 풍요롭게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조언하며 꿈을 펼쳐볼 것을 부추긴다. ‘삶은 살아갈수록, 나이 들수록 아름답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데 그 비밀을 알고 모르고가 인생 후반부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 유인경 기자는 그동안 만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 비밀을 터득하고, 인생 후반부를 더 생생하게, 더 즐겁게, 더 현명하게 사는 법을 이 책에서 풀어내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뉴욕타임스, 2000팀 중에 한국 '갤럭시 익스프레스(Galaxy Express)' 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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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과 4년 만에 만난 그들은 이제 ‘록왕’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거리에서 먹고 자는 고행 끝에 완수한 북미 투어는 < 반드시 크게 들을 것 2>의 필름으로 남겨졌다. 정력가형 록스타로 족적을 굳히는 행동파들. 대한민국에도 이런 록밴드가 있다는 것은 록 불모지의 자랑거리다.

공연 전 인터뷰에서 그들이 말하는 밴드의 개념은 단순하지만 직관적이었다. “노는 일인데, 일은 일이다. (보컬/기타 박종현)”, “가족 개념이다. (보컬/베이스 이주현)”, “연애와 비슷하다. (드럼 김희권)”라고 부연했다. 이 밴드의 넘치는 에너지의 발로가 바로 '팀워크'라는 증거기도 했다.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가 있던 롤링홀 근처는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인터뷰가 있던 장소에서도 그들의 공연을 기다리는 팬들이 함께할 정도였으니, ‘인디 최고의 록 스타’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우리가 만든 최고의 앨범’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신보 < Galaxy Express >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도 강하게 드러났다.


역시 북미 투어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네요. 어떻게 투어를 시작하게 된 건가요?

박종현 : 2011년에 서울소닉 투어를 다녀오면서요. 내년에도 꼭 다시 투어를 하자는 얘기를 했어요. (서울소닉은 한국 라이브 음악을 다양한 경로로 해외에 소개하고 있다) 그 이후에 각자가 돈을 모으기 시작했죠. 사실 서울소닉때는 공연을 많이 못 해서 아쉬움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자체 투어를 하면 공연을 많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물론 로컬 밴드들과 교류도 하고, 친구도 사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밴드라면 그런 로망이 있잖아요. 캠핑카를 타고 미국을 돌아다니는…. 그런 여행을 꼭 해보고 싶었어요.

투어 중에 뉴욕타임스 기사에 소개되기도 했죠? 본인들도 놀랐을 것 같아요?

박종현 : 저희가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에 참여했을 때에요. 그 공연이 2,000팀 정도가 참여하는 페스티벌이거든요. 결산 기사에 브루스 스프링스틴, 피오나 애플 등등 10개의 팀을 언급했어요. 그리고 영미권이 아닌 밴드도 3팀을 소개했는데 그 중 하나로 소개가 된 거죠. 내용도 “엄청난 연주를 들려주었다,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보여줬다”라고 적혀있더라고요. 영광도 영광이지만 신기했어요. 그 와중에는 괜찮은 밴드 많았을 텐데, ‘아니 우리가!’라는 생각이 컸죠.

한류처럼 우리 록의 해외 진출 가능성도 높을 것 같은데요?

박종현 : 저희뿐만 아니고 3호선 버터플라, 크라잉 넛, 옐로우 몬스터즈도 같이 공연했거든요. 그런데 유례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경찰들이 와서 인원 제재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신선하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어요. 미국에서 한국의 록밴드가 공연하는 자체부터가요. 그리고 그만큼 음악적으로 완성도가 있는 밴드들이니까요. 기회와 시간이 충분히 서포트 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주현 : 사실 저희는 일단 놀러 가는 마음으로 갔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어요. 워낙 같이 공연한 밴드들이 훌륭한 팀이라고 보기 때문에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고요.

그동안 북미 외에도 유럽, 홍콩, 대만 같은 많은 나라에 공연을 다니셨잖아요. 다른 나라 반응은 어떤가요?

김희권 : 유럽에서는 한국에 밴드가 있는지도 몰라요. “슈퍼주니어 곡 연주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죠. 가장 인상적인 곳은 일본이었던 것 같아요. 음악 환경 자체가 체계적이고 규모가 커요. 도쿄에만 라이브 클럽이 1,000개가 넘는다고 하니까요. 시스템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죠. 한국 같은 경우는 우리가 엔지니어에게 부탁하는 입장이라면, 일본은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줘요. 약간은 기계적인 느낌이 있긴 하지만요.


다른 나라 인디신은 우리나라와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이주현 : 부러운 것이 많았어요. 일단 큰소리 나는 악기를 공연할 수 있는 장소가 많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악기가 ‘쾅!’하고 울리면 ‘아이고, 귀가 찢어지네’하며 동네에서 전화 오고 난리가 나요.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악기를 거리에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죠. 그리고 그런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그래도 한국 사람이 제일 잘 노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웃음)

투어를 하면서 느낀 점은 뭘까요?

이주현 : 함께 투어를 돌았던 밴드들을 통해서 배운 건데요.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었어요.


[ 1집-Noise On Fire ]
[ 2집 - Wild Days ]
[ 3집-GALAXY EXPRESS ]
투어 뒤에 바로 3집이 나왔네요. 사실 데뷔 작품 < Noise On Fire >< Wild Dayz >는 사실 라이브 앨범 같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사실상 첫 정규 앨범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주현 : 첫 앨범처럼 머리를 싸맸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새기자, 그리고 (앨범)에 너무 연연하지는 말자는 생각이었어요. 한국에서 우리가 앨범을 낸다고 크게 화제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밴드를 한 지 6년 정도 되었는데 초심을 잃지 말자는 마음가짐도 있었고요. 그래서 앨범제목도 < Galaxy Express >로 지었어요.

이번 앨범에서 중점을 둔 것은 뭔가요?

박종현 : 전 앨범들은 우주선이 뜨긴 했는데 덜컹거리고 멀미가 심했죠. (웃음) 하지만 이제는 안정감 있는 비행을 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감성적인 면에서는 1, 2집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에너지나 태도가 바뀐 건 아니니까요. 이번에는 릴 테이프로 녹음해서 따뜻한 느낌도 있고요. 어렵게 안가고 우리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들었어요.

김희권 : 확실히 사운드가 좋아졌어요. 작업하면서 2집도 재녹음하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주현 : 사운드 색이 독특하죠. 특히 저희가 좋아하는 밴드에 대한 오마주를 많이 담아냈어요. 레드 제플린이나 AC/DC, 스투지스같은. 이게 “AC/DC 같으니까 하지 말자”가 아니라, 오히려 “AC/DC 같으니까 해보자”라는 식이었죠. 굳이 숨기지 않고 더 드러내려 했죠.

이번 앨범은 특히 가사가 많이 바뀐 느낌입니다. 더 단순해지고 반복되는 느낌이 드는데요?

이주현 : 가사는 음악의 분위기에 몰입하는 데 주력했어요. 상상력을 저해하지 않는 측면에서요. 들으면 별 내용이 아니지만, 큰 의미가 보이도록 함축적인 의미를 담았죠. 사실 텍스트 자체로는 한국말이 힘들어요. ‘깍두기’라는 단어가 하나만 나와도 갑자기 곡이 촌스러워지기도 하고요. 자극적인 것 빼고, 뻔한 말들도 다 뺐어요.

멤버 각자가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들은 뭘까요?

박종현 :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어요? (웃음) 뭐, 굳이 뽑자면 저는 「언제까지나」에요.
이주현 : 저는 그날그날 다르지만 「호롱불」이 가장 좋아요. 한국의 냄새도 있고 저희의 에너지도 담겼다고 생각해요.
김희권 : 다 좋아하는데, 저는 「How does it feel」의 마지막 절규에서 항상 닭살이 돋아요.


이번 앨범이 음원으로는 들을 수 없지요? 앨범으로만 팔면 음악을 알리는 데는 장애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박종현 : 현재 음원 판매가 부당하게 거래된다고 생각해서 '스탑 덤핑 뮤직(Stop Dumping Music)'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당장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요. 장기적으로 음악가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커요. 음원 사이트들 광고 카피들도 마음에 안 들어요. “가장 싸게 듣는 방법 아니?”같은 광고 문구는 정말 짜증이 나요. 음악을 무슨 물건 팔듯 하는 것에 반감이 생겼어요. 그럼 음악 자체가 너무 하찮게 되는 것 같잖아요. 사실 해리빅버튼(HarryBigButton) 형들이 먼저 했는데, 그 분들 인터뷰를 보고 감명을 받았죠. 생명력을 가지고 넓게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주현 : 사실 저희 음악은 무료로 들려드려도 좋습니다. 우리가 음반이나 음원을 많이 파는 밴드도 아니고요. (웃음) 하지만 계속 이렇게 음원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소비자, 판매자 모두에게 나쁠 것 같아요.

김희권 : (음악 유통 구조가) 말이 안 되는 구조에요. 곡당 33원? 과연 이게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라이브공연도 공짜로 오면 보다가 나가요. 하지만 내 돈 주고 공연 오면 달라지거든요.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롤링 스톤즈의 < Charlie Is My Darling >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그중에 믹 재거가 “무대 위에서는 연기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갤럭시 익스프레스도 항상 격렬한 무대를 선보이고 있는데요. 어느 정도 공감하십니까?

박종현 : 기본적으로 무대 위에서는 연기가 있어요. 생각해왔던 멋진 모습을 그대로 무대에서 잘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열망의 음악’이 록이잖아요. 격렬한 음악은 격렬한 몸짓과 발짓으로, 하지만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초창기 때 김희권은 이등병처럼 공연했어요. (웃음)

김희권 : 연기가 아니면요. 그냥 기계처럼 치게 돼요. 처음에는 진짜 로봇처럼 쳤어요. 많은 드러머들을 모니터링하면서 따라 하고 시도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주현이형이나 주위 사람들이 “너도 코러스 넣고, 이리저리 해봐라. 너는 혼자 왜 심각하냐?” 같은 요구를 하기도 하고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고 무대를 즐기고 있어요.

이주현 : 연기라고 해서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고요. 자연스럽게 “록은 이런 거다”라는 걸 표현하는 것 같아요. 소리를 들려주면서 퍼포머 스스로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거죠. 엘비스 프레슬리가 개다리춤을 추고, 척 베리 오리걸음을 했죠. 사실 이게 주변에서는 놀림거리가 되거나 왜 했냐는 식으로 물어봤겠지만요. 그게 록이죠.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언제나 강성, 어려운 길을 택합니다.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이주현 : 사실 우린 좀 무식한 것 같아요. 남들이 볼 때는 안 가 봐도 알 수 있는 건데요. 우린 굳이 힘들게 가서, 갔다 온 다음에 신나하죠. 물론 미리 걱정하면 못 가겠죠. 하지만 걱정은 자기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일이거든요. 가보자, 가서 생각하자, 그러고 가보는 거죠. 해보고 안 되면 다시 시작하면 돼요. 우린 잃을 게 없거든요.

갤럭시 익스프레스, 앞으로 어떤 밴드로 남고 싶은가요?

박종현 : 오래 밴드 생활을 하고 싶어요.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날 그날 재미있게, 공연도 재미있게 하고요. 스스로 계기를 만들면서 좋은 음악을 내놓고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김희권 : 계속 변화할 수 있는 밴드로 남고 싶고, 주구장창 이 밴드를 하고 싶어요. 롤링 스톤즈처럼 말이죠.

이주현 : 음악을 좋아해서 시작한 것처럼 음악을 계속 좋아하는 밴드가 되고 싶어요. 그게 스트레스가 되면 안 되겠죠. 늙어서도 할 수 있는 밴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셋 좋으려고 하는 것. 그게 갤럭시 익스프레스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 김반야, 신현태
정리 : 신현태
사진 : 김민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방송 출연 계획 묻자 “10년 정도 지나면?” - 브라운아이드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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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Soul Free : #01>로 데뷔. 방송 출연 한 번 없이, 앨범이 나올 때마다 음반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브라운아이드소울이 올해로 데뷔 10년을 맞았다. 최근 멤버 정엽, 성훈, 영준이 방송을 통해 대중을 만났지만, 나얼을 포함한 멤버 전체가 ‘브라운아이드소울’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에 출연한 이력은 단 한 번도 없다. 자주 볼 수 없기에 더 애틋한 연인처럼, 브라운아이드소울은 공연으로 팬들과 만나왔다. 지난해 12월,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 투어 중인 브라운아이드소울은 일산, 대구, 대전, 수원 공연을 마쳤고 현재 부산(1월 20일), 서울(2월 15일, 16일) 공연을 남겨두고 있다. 이번 콘서트는 관객들이 객석에서 놀아주길(Play) 바라는 마음으로 ‘소울 플레이(Soul Play)’라는 타이틀을 걸었다.


2년 만에 전국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공연은 팬들을 만나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한데, 브라운아이드소울에게 공연은 어떤 의미인가?

브아솔에게 공연은 팬들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이다. 음반 이외에는 브아솔 활동은 공연이 유일해 항상 팬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하다. 이번 공연은 2012년 지난해를 정리하는 공연이랄까? 브아솔로는 신곡이 나오진 않았지만 2012년은 맴버 각자가 솔로로 바쁘게 보낸 한 해였다. 성훈이가 <불후의 명곡>에 출연하게 됐고, 영준이가 첫 번째 솔로 앨범을 발매했고 12월에는 결혼도 했다. 나얼도 첫 솔로 앨범을 발매 했고, 정엽도 2집의 파트2를 발매했다. 그래서 이번 공연은 그동안 한층 업그레이드 된 솔로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공연의 제목이 ‘소울 플레이’니 만큼 우리는 무대에서 관객들은 객석에서 play(놀아주길) 해 주길 바란다.

지난해 일본 최대 연예기획사 에이벡스와 계약을 했다. 어떻게 진행됐고 일본에서는 어떻게 활동할 계획인가.

우선, 한류가 드라마나 아이돌에서 노래를 부르는 우리들에게 까지 확대 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다. 이미 보도 된내용처럼 우리도 일본 시장에 관심이 있었고 일본의 몇몇 회사에서도 저희의 가능성을 보신 것 같다. 그 중 에이벡스에서 적극적으로 저희 공연도 직접 보러 와주시고 일본에서의 가능성도 얘기해주셔서, 그리고 저희의 스타일(매체 노출이나 그런 걸 못하는)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게도 계약하게 됐고, 일본에서도 한국과 많이 다르지 않게 음반과 공연 위주의 활동이 되지 않을까 싶다.

평소 일본 음악시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우리보다 훨씬 큰 시장이고 발전한 시장이다.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고 팬들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성숙하다. 그래서 더 많은 음악적 시도가 가능하고 좋은 음악이 나오는 것 같다.

데뷔한 경력에 비해 앨범을 많이 내지는 않았다. 앨범 욕심은 없나? 브라운아이드소울의 앨범 작업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10년 동안 3장의 에디션이 나온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 10년 전 1집을 내놓고 전 소속사와의 문제로 3~4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좀 늦어졌고 많은 에디션을 내지 못했다. 그랬다고 앨범의 욕심이 있어 어느 시기 마다 찍어내는 것도 아닌 듯 하다. 우리는 맴버 네 명의 합의가 있어야 일을 진행한다. 그래서 10년 동안 사이좋게 이어온 것 같다. 브아솔의 앨범은 처음 중창단느낌을 생각했던 팀이라 최대한 그렇게 만들고자 한다. 각자의 욕심은 솔로 앨범에 넣고 브아솔 앨범은 최대한 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브아솔 앨범은 맴버들이 곡부터 노래 앨범재킷 디자인까지 전부 담당한다. 1집에서 3집까지 만들면서 점점 브아솔의 색깔이 짙어지고 있다.


브라운아이드소울이 가장 좋아하는 해외 음악인, 국내음악인은 누구인가?

정엽_ 국내로는 들국화와 유재하, 이승열 선배님을 좋아한다. 들국화는 야생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음악을 들려 주어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게 만드는 것 같다. 유재하 선배님은 남들과 같이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랐고 대중가요를 일깨워 준 분이다. 해외 뮤지션으로는 프린스와 맥스웰을 좋아한다. 두 아티스트 모두 내가 하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그런 이상향을 보여준다고 할까.
나얼_ 봄여름가을겨울 전태관 선배님을 좋아한다. 정말 좋은 분이다. 해외는 Marvin Gaye와 Sam Cooke을 좋아하는데 타고난 감각과 열정이 멋지다.
영준_ Michael Buble의 편안한 목소리와 멜로디를 좋아하고, 국내는 윤상 선배님을 좋아한다. 감성과 멜로디 모두 최고다.
성훈_ 국내는 이장희 선생님. 지금의 시대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시대를 앞선 그런 노래들에 감동을 받는다. 해외 뮤지션은 요새 Bruno Mars를 좋아한다. 신구를 적절하게 조합 잘 하는 것 같다. Treasure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각 멤버들이 꼽는 내 인생의 명반은 무엇인가?

정엽_ Stevie Wonder <Song in the key of life>
나얼_ <Boomerang O.S.T>
영준_ 유재하 1집 <사랑하기 때문에>
성훈_ <Waiting to exhale O.S.T>

각 멤버들의 독특한 취미가 있나?

정엽_ 빈티지 오디오와 악기 수집
나얼_ 장난감 수집
영준_ 플레이 스테이션, 레고 조립
성훈_ 등산과 명상. 몸과 마음이 많이 맑아진다.

가수가 안 되었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을 것 같나?

정엽_ 평범한 직장인이 되지 않았을까.
나얼_ 화가
영준_ 형사
성훈_ 예전에는 책이나 비디오 대여점을 하고 싶었는데 인터넷이 활성화 된 이후 조용히 접었다. 아무래도 서점을 하지 않았을까.

멤버들 중 영준 씨가 가장 먼저 결혼했는데, 다른 멤버들은 부럽지 않나?

정엽_ 부럽지는 않다.
나얼_ 부러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영준_ 많이 행복하다(웃음).
성훈_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나도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다.


성훈 씨가 <불후의 명곡>에서 우승을 했는데, 다른 멤버들은 예상했나?

성훈_ 처음 섭외가 들어왔을 때, 형들에게 먼저 물어봤다. 모두 나가보라고 했다. 특히 정엽이 형이 큰 힘이 되었다. 존재감 없는 브아솔 멤버 성훈에서 이젠 많은 사람이 알아본다. 김건모 형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로 7연승과 435점이라는 역대 최고 기록을 달성한 날은 정말 많이 기뻤고, 그날 이후 사람들이 날 보면 “뻐꾸기다”라고 정도다.
정엽_ 멤버 중에 끼가 가장 많은 친구다. 가진 것도 많다. 음악적인 면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피아노 연주 능력에 우리에게 없는 춤 실력까지 출중하다. 충분히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

멤버 정엽이 MBC 라디오 <푸른밤>을 진행하고 있는데, 다른 멤버들은 종종 라디오를 듣나? DJ로서의 정엽은 어떤 것 같나.

성훈_ 형이 첫 방송을 할 때 처음으로 브아솔 모두가 라디오 게스트를 갔다. 그동안 형이 혼자 열심히 외롭게 활동하며 브아솔을 알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형이 꼭 하고 싶던 DJ를 하게 돼서 기쁘고, 감정이 막 올라와서 형도 울고 나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영준_ 말할 때 목소리가 너무 좋고 재치가 있고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잘하고 있다. 꾸준하게 몇 십년 해서 골든 마우스도 받았으면 좋겠다.

멤버 나얼이 네티즌이 뽑은 <나는 가수다> 출연 희망 가수 1위로 선정된 적이 있는데, 방송 출연은 전혀 계획이 없는 것인가?

정엽_ 지난 광주 공연 때 내가 “우리 내년에 10주년 인데 나얼 씨 우리 방송 한번 나가지요?”라고 농담을 던졌는데 우리 셋이 나가라고 하더라(웃음). 언젠가 나얼이 “우리도 방송 한번 나가자고 한적이 있다. 우리는 신기해서 “언제?”라고 했더니 “나이 50 정도 돼서 머리 희끗희끗해지면”이라고 하더라. 어이 없어서 웃으면서도 진짜 그렇게 되면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브아솔_ 나얼의 방송 출연은 당분간 없을 듯 하다. 나얼이 이제 서른 중반이니까 한 십여 년이 더 흐르면 가능하지 않을까.

멤버들 각자 브라운아이드소울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 한 곡씩을 뽑는다면?

정엽_ Because of you.
나얼_ 내려놔요.
영준_ 그대.
성훈_ 폭풍 속의 주. 녹음할 때 참 많은 힘든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힘들 때 듣는 나의 힐링송이다.


최근, 나얼 씨가 솔로앨범을 냈고 다른 멤버들도 솔로 앨범을 발표해왔는데, 멤버와 같이 작업할 때와 솔로로 할 때랑 어떻게 다른가.

아무래도 솔로 작업할 때가 편하다. 내 음악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함께 작업할 때보다 힘이 들긴 하다 혼자 다 해야 하니. 솔로를 내고 활동(솔로 활동이 많지는 않지만)을 하다가 브아솔로 다시 뭉치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어떤 가수, 어떤 그룹, 어떤 음악인으로 기억되고 싶나?

정엽_ 진정성이 느껴지는 뮤지션으로 기억 되고 싶다.
나얼_ 겸손한 음악인, 사이 좋은 그룹, 착한 가수.
영준_ 좋은 음악을 만들던 음악인으로 기억 되고 싶다.
성훈_ 기억되고 싶은 그런 계획된 이미지 같은 건 없다. 그저 10년 동안 늘 그랬듯 꾸밈 없이 음악하고 또 오래 했으면 한다.


서울 공연이 발렌타인데이 다음날인데, 발렌타인데이는 특별한 계획이 있나.

정엽_ 묻지 마시길! 벌써 외롭다.
나얼_ 아무런 계획이 없다.
영준_ 아내와 집에서 편하게 쉴 예정이다.
성훈_ 별다른 계획이 없을 것 같다. 나에겐 공연장을 찾아 주시는 관객 분들이 초콜릿, 사탕보다 훨씬 더 큰 선물이다. 보답하는 방법은 내가 목 관리를 잘하는 게 아닐까.

공연장을 찾아줄 팬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정엽_ 우리처럼 팬 서비스 못하는 뮤지션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얼_ 항상 감사 드리고 열심히 진지하게 음악 생활 하겠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영준_ 항상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성훈_ 언제나 변치 않고 겸손한 저희 브라운아이드소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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