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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막장 소설, 기대해도 좋다 - 최민석 『능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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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쿠르상은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원칙적으로 한 작가에게 두 번 이상 수여하지 않는다. 1975년, 이 원칙이 깨진다. 콩쿠르상을 주관하는 아카데미 데 공쿠르는 에밀 아자르(Emile Ajar)의 『자기 앞의 생』을 수상작으로 정한다. 알고보니 에밀 아자르는 1956년에 이미 콩쿠르 상을 받은 로맹 가리(Romain Gary)였다. 당시 프랑스 문단에 충격을 준 이 사건은, 어쩌면 2012년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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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능력자』의 작가 최세속. 시상식 현장에 나타난 최세속은, 2010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한 최민석 작가였다. 최세속은 최민석 작가의 필명이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문단에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수상작을 발표하기 위해서는 필명이 아니라 본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필명 라인과 본명 라인, 두 가지로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는 최민석 작가, 예사롭지 않은 소설가다. 필명으로 발표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본명으로 낸 『능력자』, 어떤 소설일까.

 

이 소설은 주인공 남루한이 전직 세계 챔피언 공평수의 자서전을 대필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렸다. 등단은 했으나 마땅한 수입원이 없어 야설로 연명하는 남루한, 과거에는 세계 챔피언이었으나 지금은 동네 이상한 아저씨로 전락한 공평수. 최민석 작가는 특유의 해학적인 문장으로 세상을 묘사한다.

 

망치 네놈이 코 흘리던 시절 나한테 얻어먹은 밥이면 대한민국 김밥천국 전 체인점이 동시에 김밥을 말고도 남을 것이고, 그 남은 밥을 냉동시켜 바닥에 깔아 놓으면 설 땅 잃은 북극곰들이 평생 굴러다녀도 끝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얻어 마신 술이면 에버랜드 워터파크를 채우고도 남고, 그 남은 물을 얼려 바다 위에 띄워 놓으면 아까 그 북극곡이 북극에서 부동산 투기를 하고도 남을 정도라고 옛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능력자』 라운드3 중에서)

 

단순한 말장난으로만 보이지만, 저 문장으로 작가는 생태계를 걱정하고 부동산 투기를 조롱하며, 대기업이나 프렌차이즈가 골목상권과 놀이문화마저 장악한 한국사회를 비꼬고 있다, 고 생각하는 건 필자뿐일까. 어쨌든 유머와 진지함을 겸비한 작가, 최민석. 그를 만났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망원동 DKNY다. 망원동 나이불명의 독거노인이다. 나이를 공개한 적은 없다. 어디에 써도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지 않은, 이라고 쓰거나 70년대 태어났다고 쓴다. 그랬더니 누군가는 70년에 태어났다고 오해를 하더라. 그런데 편집자가 내 나이를 공개했다.

 

B급 작가를 지향한다고는 했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학력도 그렇고, 상을 받은 곳도 한국에서 유명한 문예지거나 출판사다.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패자의 아이콘이다. ‘B급 문학’이라는 말에 대해 말해보겠다. 내가 스스로 정한 문학적 기대치가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정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B급이라고 했다. 블로그, 책에서 이런 말을 썼는데 B급 문학이라는 말이 퍼졌다. 졸지에 내 글을 읽는 사람도 B급 독자가 되었다. 독자가 나중에 상처를 받더라. 독자에게 실례가 되는 듯하여, B급 정서를 지향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이제는 버렸다. 앞으로는 막장 작가로 거듭나겠다. 문학적 자아가 성숙했고, 2기로 접어들었다.

 

막장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 달라.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지금 남자 둘이 만나서 인터뷰를 하는데, 이 눈빛을 어디서 본 것 같다. 내가 17세기 프랑스에서 봤던 눈빛이다. 갑자기 왜 17세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나는 500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장광설을 펼치면서 소설을 전개한다. 막장 드라마를 보면 경계가 없지 않나. 막장 소설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 소설에서만 가능한 대구라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판타지라고 볼 수 있나?

 

판타지는 아닌데, 환상적인 면이 있다. 주인공이 환생을 많이 한다. 러시아의 작가로 태어나서, 필명으로 통속 야설을 쓴다. 환생해 보니 자기가 썼던 소설의 주인공인 것이다. 돈 후안 까사미아라는, 한국으로 치자면 변강쇠로 말이다. 그 다음에는 막부 시대 일본에서 환생한다. 이후 내용은 스포일러라서 공개하지 않겠다

 

그럴 듯한 허구로 쓰기 위해서는 취재를 열심히 해야겠다.

 

취재 안 할 거다. 취재에 관한 글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 2가지 결심을 했다. 취재 안 하겠다, 인터뷰 안 하겠다가 그것이다. 인터뷰를 하면 작가에 대한 환상이 무너진다. 그런데 지금 인터뷰 하고 있지 않나, 이 결심은 무너졌다. 취재 안 하겠다는 결심도 무너졌다. 나는 에세이를 쓰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가가 되었고, 소설을 위해 취재하는 작가보다는 일상에서 느낀 점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결심과 달리 소설을 쓸 때마다 취재를 했다. 『능력자』를 쓰기 위해 복싱을 배우고, 추도라는 섬에 직접 갔다. 지금 쓰고 있는 『쿨한 여자』도 소설을 쓰려고 나가사키에 다녀왔다. 취재 안 하겠다고 매번 결심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에 갈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면 돈 너무 많이 드는데......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는 블로그에 올린 내용을 모은 책이다. 지금도 블로그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하고 있더라.

 

이런 에세이는 2년마다 한 번씩 낼 계획이다. LG 트윈스가 내년 가을 야구에 실패했을 때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의 경험치와 통계로 보기에, 내년도 실패할 것 같다. 참고로 나는 LG 트윈스 팬이다. 내년에 가을 야구 실패하면 ‘여전한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라는 제목으로 내겠다. 1주일에 1번씩, 2년 쓰니 책 한 권 분량이 나오더라.

 

등단작인 「시티 투어 버스를 탈취하다」와 『능력자』가 정치, 사회 문제를 다뤘다. 전작은 외국인 노동, 후자는 자본주의에서 경쟁. 그러면서도 심각하지 않게 풀려고 하는데, 시사적인 문제를 의도적으로 다루려 노력하나?

 

그렇진 않다. 나는 원래 메시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걸 안 좋아한다. 독자가 책을 다 덮고 났을 때, 아 이런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막연하게 추측할 수 있는 작품을 쓰려 한다. 순수문학은 주제가 있는 편이 좋다. 한국에서는 젊은 작가가 4,50대다. 5~10년까지는 신인으로 본다. 나도 신인이다. 초기작의 분위기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이 단계를 넘어 서면, 주제를 드러내 놓지 않아도 문장이나 단어 속에 잘 녹여낼 수 있을 듯하다.

 

최민석 작가의 작품 세계에는 두 라인이 있다고 한다. 필명 라인과 본명 라인이 그것이다. 출판사는 알려지지 않은 필명보다는 알려진 본명으로 출간하기를 선호할 테다. 개인출판을 생각한 적은 없나.

 

고민을 깊이 했다. 출판사를 통해 내는 게 이점이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서로 논의를 해서 접점을 찾는데 이 과정에서 작품이 조금씩 변경된다. 때로는 책으로 안 내 주는 원고도 있다. 그래서 그냥 1인 출판을 해 버릴까 생각도 했다. 다행히 아직은 내 책을 낼 수 있는 출판사가 있기 때문에 출판사를 통해서 낸다. 만약 내 책을 내 줄 출판사가 없거나, 생산하는 양과 출판 속도가 맞지 않으면 개인 출판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망하는 거지. 내가 홍보하고, 보도자료 쓰고, 서점에 유통까지 챙기면, 집필은 못할 거다. 악순환에 빠지겠지.

 

『능력자』에서 전지 훈련 장면에 바다가 나온다. 단편인 시티버스도 주인공들이 바다로 향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고향도 바다가 있는 곳인데, 고향이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바다가 나오는 장면이 많다. 바다가 다른 소설에도 등장한다. 바다를 좋아한다. 바다 가는 것도 좋아하고. 다른 사람 소설이나 영화에서 바다가 나오는 장면도 좋아한다. 얼마 전 취재 간 나가사키도 항구다. 도시 등장시킬 때도, 바다가 있는 항구 도시일 때가 많다. 독자가 내 글을 읽고 시원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래서 바다가 자주 등장한다.

 

에세이에서 아버지에 대한 장이 등장한다. 아버지나 가족은 블로그 자주 보나?

 

안 본다. 내가 블로그 운영한다는 걸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에세이에 등장한 아버지 꼭지는 아버지가 잘 안다. 아버지가 독자로서 불만이 많다. 『능력자』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조폭으로 나오는데, 곤혹 속에 살고 계신다. 소설가 아버지의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라고 했더니, 제발 다음에 나를 죽이지만 말라고 하시더라. 특히 단명하는 아버지.

 

독자 리뷰를 자주 읽는다고 했는데, 기억에 남는 악평이 있나.

 

내가 써도 이것보단 낫겠다, 21세기에 이런 교조적인 소설이라니, 라는 평. 보면서 반가운 게 악평이다. 독자 중에서 나도 글을 써야겠다는 사람을 좋아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이건 나도 작곡하지. 소설, 이러면 나도 소설 쓰지. 이런 작품을 만드는 작가나 예술가가 좋다. 나도 누군가에게 만만해 보이면 기쁘다. 만만한 작품, 논쟁적인 작품이 오래 산다. 이런 작품은 독자가 뭔가 쓰고 싶고, 계속 들춰 보게 된다. 어떤 작품은 독자에게 좌절과 패배감을 주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떤 작품은, ‘에이 이 정도면 나도 쓰지’ 하는 작품이 있다. 이런 작품이 친구다.

 

박민규 작가의 작풍(作風)과 비슷하다는 말은 못 들었나.

 

많이 들었다. 4명을 주로 이야기하더라. 박민규, 성석제, 이기호, 천명관. 이 작가들이 다 비슷한 라인이다. 다 구라파다. 유머를 구사하는 구라파. 성석제를 얘기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작가가 성석제인 거고. 박민규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자기가 읽은 작가가 박민규 작가다. 다 같이 읽은 독자는 동시에 3명씩 이야기한다. 가뭄에 콩 나듯 마르께스도 이야기해준다. 영광이다. 실제로 내가 쓴 대사는 『백년의 고독』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에세이는 또 하루키 풍이라고도 말한다. 독자는 자신이 이전에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을 투영해서 읽는다. 아직 나는 신인작가고 10년이 지나면 ‘최민석 작가는 이런 풍이구나’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민규, 성석제, 이기호, 천명관. 팬층이 다 뚜렷한 작가다. 그래서인지 최민석 작가 팬카페가 있더라. 신인작가인데 팬카페가 있는 건 이례적인 현상 아닌가.

 

나도 당혹스러웠다. 주인장 이방인 블루스는 몰랐던 사람이다. 원래 ‘이방인 블루스’는 단편 소설 제목이다. 팬미팅도 한 번 했다. 지금은 안 한다. 요즘 팬카페 회장님이 뜸하다. 직장일로 바쁜지 사인회도 안 왔다.

 

향후 팬미팅은 안 할 생각인가?

 

그건 회장님이 추진해야지. 계획에 없다. 내가 나서서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인회 포스팅을 봤다. 진짜로 사인 받으러 온 사람이 없었나.

 

이제 사인회 안 할 거다. 어떤 테러집단이 위협하지 않는 한, 안 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사인회를 안 하더라도 사인을 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낭독회라든지, 북콘서트를 한다든지, 이런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사인회가 이어진다. 사인회에서는 다른 이벤트 없이 사인만 한다. 사인만 받으려고 사람들이 과연 모일까? 사인회의 시대는 죽었다. 김연아라면 모를까, 웬만한 아이돌도 사인회만 하면 사람 많이 안 모일 거다. 노래도 있고 해야지. 이제 사인회는 사라질 것이다.

 

에세이를 보면 외로움이나 빈곤 등이 느껴지는데, 엄살이 좀 있는 거 같다. 독자를 웃기기 위해 과장하지는 않나?

 

불쌍하게 보여야 독자가 책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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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얘기를 해보자. 시와 바람의 보컬이다. ‘오빤 알아’ 뮤직비디오가 신비주의 컨셉이다. 밴드 구성원 중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데, 이유가 있나.

 

등장은 한다. 손은 내 손이다. 책에 내 얼굴이 등장해서 둘 다 판매 실적이 안 좋다. 뮤직비디오까지 등장하면 자살 행위다. 밴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연습은 안 한다. 보컬 연습을 하면 우리 고유의 색채를 잃는다. 우리는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팀이 아니다. 그렇게 가면 우리는 존재 자체가 불가하다. 틀리고 뭔가가 안 맞아야 한다. 공연하기 전에 한 번 맞추기는 한다. 합주할 때 너무 잘 맞으면, 실망한다. 주류 밴드처럼 가면 안 되는데, 하면서. 그럴 때는 내가 다른 멤버에게 좀 틀리라고, 제대로 하지 말라고 소리도 친다.

 

 

다음 앨범은?

 

EP 앨범이 여름쯤에 나올 거다. 요즘은 음원으로 많이 듣지만 CD로도 낼 계획이다. CD가 좋다. CD보다는 LP가 좋다. LP보다는 축음기가 좋고. LP보다는 라이브가 좋으면 좋을 텐데, 우리 음악은  라이브로 듣는 것보다는 음반으로 듣는 게 낫다. 라이브를 지양한다. 자선 공연 빼고는, 라이브는 수입이 짭짤한 행사위주로 한다.

 

음원보다는 CD, LP가 좋다고 했는데 책은 어떤가. 전자책이 좋나, 책이 좋나.

 

둘 다 장단점이 있다. 환경오염이 있고 하니 전자책이 대안이 될 거다. 현재까지는 종이책이 가져다 주는 물성과 읽기 편한 면에 끌린다. 책은 아직까지 종이로 많이 읽는 편이다. 그럼에도 아까 본 크레마 터치는 매우 호감이 간다. 여기에 깊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앞으로 전자책 세계에 좀 더 심취하지 않을까 싶다.

 

월드비전에서 3년 일했다. 회사원, 직장인으로서의 모습이 상상이 안 되는데, 직장생활은 어땠나.
 
직장생활은 못했다. 퇴사하기 전 10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각했다. 하루는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당장 나오라고. 시계를 보니 11시 반이더라. 그 이후로 그렇게까지 지각은 안 했지만 10분, 20분씩 찔끔찔끔 지각했다.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에 들어갈 내용을 모으기 위해 취재는 정말 열심히 했다. 1년 동안, 회사 본부에 출근 안 한 날이 105일이더라. 그만큼 밖으로 돌아다녔다. 설사병, 피부병, 시차, 고산병으로 시달렸다. 지각을 계속 했던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오면 시차 적응이 안 되니까. 다른 사람 기준에서 본다면 회사 생활 정말 못했지만, 나름대로는 몸이 상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공동체를 위해서, 젊을 때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나에게 소중한 기회였다.

 

 

회사생활 3년 하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이야!"라는 결정의 순간이 있었나.

 

『너의 눈에서 세상을 본다』에 이 내용을 쓴 적이 있다. 긴급홍보 활동가라고 있다. 츠나미나 이런 게 발생하면 대륙별로 홍보전문가가 투입된다. 48시간 내. 언론사 기자가 취재현장에 바로 못 들어가니까, NGO에서 보낸다. 대륙별로 선발한다. 아시아에서 1명 뽑는데, 아시아 후보로 내가 뽑혔다. 이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이수하면, 3년 동안 회사를 관둘 수 없다. 그런데 교육 받고 몇 달 뒤,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났다. 3년 동안 관둘 수 없다는 짐이 있었는데, 그런 의무가 사라졌다. 이 순간 확신이 섰다. 하늘이 내게 글을 쓰라고 확실한 신호를 주는구나. 사표를 썼다. 사표 쓰면 말릴 줄 알았는데, 바로 수리되더라. 회사에서는 “아, 그래. 작가가 되어야지. 좋은 글 많이 쓰게”라고 말하면서 보내줬다.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가 된 느낌도 든다.

 

창작도 하고, 독서도 하고, 번역도 틈틈이 한다. 활자 보기 싫을 때는 어떻게 하나.

 

독서는 별로 안 한다. 활자 보기 싫을 때는 안 본다. 쓰고 싶은 걸 써야 템포가 유지된다. 쓰기 싫은 걸 써야 할 때 활자가 보기 싫어진다. 그럴 때 달리기를 한다. 정신적으로 지칠 때는 몸을 쓰면 밸런스가 맞춰진다.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친구 만나 맥주도 마신다. 평일은 술 거의 안 마신다. 어릴 때는 술 먹어도 다음 날 머리가 맑았다. 요즘은 일어나는 게 힘들고, 일어나도 머리가 무겁다. 숙취 때문에 글 못 쓴다. 이럴 때는 글을 써도 문제다. 애매하게 써진다. 버리기도 아깝고 새로 쓰자니 아깝다. 마셔도 평일에 조금 마시려고 한다. 평일은 집필하고, 주말에는 책을 읽으면서 쉬려 한다. 영화는 개봉 영화 1주일 1편 보고, 소설은 1달에 1편은 보려고 한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시대의 그늘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한 비운의 명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늦었지만, 꼭 사 달라. 앞으로 장편, 『쿨한 여자』를 출간할 예정이다. 도회적인, 재즈풍의 소설이다. 그리고 소설집  『시티 투어 버스를 탈취하라』 도 나온다. 많이 사랑해 주길 바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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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
최민석 저 | 민음사
201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민석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신선함을 물론이고 독창성, 매력, 그리고 탄탄한 필력과 서사에 대한 집중력이 괄목할 만한 작품이다. 한때는 세계 챔피언이었으나 지금은 스티커를 파는 전직 복서인 '공평수', 전통과 권위 있는 문예지로 등단하였으나 야설을 쓰는 삼류 작가인 '남루한', 이 두 인물에게 포커스를 맞추며 '추락과 회복'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인물들의 삶은 위태롭고 흔들거리고 아슬아슬하기까지 하지만, 작가의 필담은 이를 유머러스하고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또한, 삶에 대한 치열한 자세로 고통, 위기와 정면 대결하는 작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하버드 법대 종신교수 석지영, “한국인들의 관심 이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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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매서운 한국의 겨울 날씨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익숙함이 묻어나왔다. 비록 추억조차 많이 만들지 못한 어린 나이에 떠난 조국이지만, 그래도 성장기에는 2~3년에 한번 꼴로 한국을 찾았다는 그녀. 더구나 최근에 들어서는 2년 동안 세 번을 방문했다. 바로 자전적 에세이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가 출간됐기 때문이다.

대개의 성공한 미주 한인 2세의 경우가 그렇지만, 그녀의 삶은 유난히 남다른 과정을 거쳐 왔다. 한때는 발레리나를 꿈꾸었던 시절도 있다. 미국 예일대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기도 했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꽤나 드라마틱한 선택이지만 그 다음이 더 놀랍다. 법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법대 교수, 다시 종신 교수로 임명 된 것. 이 모두가 채 나이 마흔도 되기 이전에 이룩한 것들이다.

그런 그녀의 삶은 한국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동경, 세계적 명문인 하버드를 향한 선망과 맞물려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그런 관심을 보이는 이들 중에는 그녀를 향해 ‘엄친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는 것을 일종의 예의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잔잔한 호수 위 백조의 여유가 수면 아래 끊임없는 발길질 덕분이라는 것을 간과한 편협에 불과하다. 지금의 삶을 살아가기까지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전혀 다른 세상과 직면했던 두려움, 부모의 선택에 의해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 했던 시련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하버드 종신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단순한 성공 지향이 아닌 학문과 인간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 덕분이다. “자서전을 쓰기에는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전적 에세이를 발표한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동기 때문이다. 성공의 진정한 목적을 알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고 싶었다는 그녀. 이를테면,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는 그녀가 자신의 삶과 철학을 가감 없이 담은 설명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의 관심, 이해하지만…

나의 하버드대 종신교수직 임명은 한국에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인들의 문화적 상상 속에서 하버드가 차지하는 매우 독특한 상징적 중요성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라면, 학자에게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다.『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프롤로그 中
처음 자신을 향한 한국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에 직면했을 때 그녀는 어리둥절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전역의 한국인들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게 되면서, 또 남다른 학문적 성취에 대해 큰 의미를 두는 한국적 정서를 알게 되면서 그 감정은 감동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책을 출간하고 만난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질문은 여전히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했다.

한국 방문 중에 다양한 질문을 받으셨을 것 같은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대부분이 성공을 할 수 있었던 요인, 성공 공식에 대한 질문들이었어요. ‘당신은 천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솔직히 당황스러웠죠(웃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를 통해 한국인과 한국 사회, 그들의 가정에서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한국인의 의식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어떤 시사점을 주기 때문에 흥미롭기도 했고요. 사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성공에 대한 비결이나 비법은 없는데 그런 질문이 많다는 것이 좀 의아했어요. 한편으로 한국 사람들이 어떤 해법을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책에서도 말씀하셨지만 이번 책 집필은 교수님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이 영향을 줬다고 알고 있는데요. 집필 과정에서 새롭게 느낀 감정적 경험은 없으신가요.

제게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해서 석지영 개인의 방식으로 대답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고민 끝에 제대로 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에 이야기를 담은 책을 써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하지만 단순히 교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제가 경험한 삶에 대해서 담담하게 기술함으로서 그 안에서 독자들이 스스로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기를 바랐죠.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특별했어요. 자서전을 쓰는 것은 제가 자주 쓰는 법학 논문이나 신문 기고와는 다르게 사적인 이야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요. 또 어떤 면에서는 강제적으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떠올리는 과정이기도 했고요. 성장 과정을 다시 복기하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기 때문에 재미있기도 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어린 시절에 느꼈던 고립감과 쓰라린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단순히 되새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경험의 느낌이 다시금 현실화되는 수준으로 다가오기도 하더군요.




부모와 갈등 경험하며 성장한 유년기

그녀의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것은 한국이 민주화가 되기 이전이었다.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외국계 제약회사 사장의 특별비서관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지만 엄혹했던 시대에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민 초기, 어린 그녀가 직면한 미국사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 중에는 교수님 세대와 부모 세대가 미국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 꽤 달랐다는 점인데요.

맞아요. 부모님이 적응하신 방식과 제가 적응한 방식은 굉장히 달랐어요. 직면한 상황 자체가 달랐죠. 물론 언어장애와 문화적 충격은 다르지 않은 경험이었을 테지만, 같은 시기에 부모님의 동료나 친구 분들이 많이 이민을 오셔서 한인사회를 형성했기 때문에 한인들 간의 유대가 남달랐어요. 그런 점이 부모님 세대 이민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낯설고 두려운 경험이지만 친구, 지인들과 함께한다는 의식이 부모님을 강하게 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제 경우는 모국에서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경험이나 추억 없었어요. 또 자의와 무관하게 모국에서 새로운 나라로 가게 된 상황이었어요.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나는 누구인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환경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경험은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정도였죠. 어린 나이에 미국의 학교 시스템에 편입한다는 것 역시 힘겨운 경험이었고요. 익숙한 문화에 편안함도 얻지 못했고, 어린 시절에 엄청난 변화를 감당해야 했다는 점이 부모님 세대와 큰 차이점이죠.

힘겨운 과정이었지만 책을 통해서는 꽤 완만하게 표현을 하셨는데요. 많은 이민 2세들이 인종차별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교수님의 경우는 어떠셨나요.

그런 생각을 눈치 채 주시니 고맙네요(웃음). 하지만 똑같은 일을 당해도 받아들이고 걸러내는 것은 각자 상황이나 배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제 경우는 상황적으로 화가 나거나 짜증스러웠던 경험은 그다지 없었어요. 인종차별이라기보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면서 소수 인종이 경험할 수 있었던 감정적인 어려움은 다 겪었지만요. 심한 차별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 그녀의 부모님은 꽤 깨어있는 지식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관습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아이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으로 간주하는 부모의 교육방식에 적잖은 저항감을 느꼈다.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시절, 탈출구가 됐던 것은 다름 아닌 발레였다. 그러나 조심스레 키워온 첫 번째 꿈은 다시금 부모와의 의견차로 인해 좌절되고 만다.

삼십대가 될 때까지 나는 링컨센터의 공연을 눈물 없이 볼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무대 위의 몸짓들이 내 안에서 순간 살아났지만, 영혼의 환상통에 불과한 운명을 깨닫고 이내 사그라졌다. 계속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무너질 것만 같아 나는 인터미션 때 극장을 떠나야 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유년기 시절 가장 큰 상처로 무용을 관둔 것을 꼽으셨는데요. 지금의 의지를 가지고 그 시절로 돌아가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무용을 선택할 거예요. 도중에 막히는 것은 절대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니까요. 적어도 스스로 ‘충분히 경험했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는 지속했을 거예요. 지금도 부모가 자녀의 꿈을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머니와의 일화를 어머니께서 약간 타이거마더 경향이셨던 것 같은데요. 꿈이 좌절된 상실감을 털어놓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좀 복잡해요. 제가 처한 상황은 한 문화에서만 사는 게 아니었거든요. 두 가지 문화의 가치관이 공존했고 상황에 따라 한쪽의 가치관에 따라야했어요. 그래서 더욱 부모님에 대한 제 감정을 명확하게 감지하기 힘들죠. 사실 한편으로 부모님이 이민을 와서 겪게 되는 심정적인 혼란에 대해 동정을 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성공은 달랐어요. 내가 생각하는 성공은 부모의 말을 따르자면 불가능한 것이었죠. 그런 점에서는 부모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고, 접근을 거부하게 되더군요. 그런 뒤섞인 양상을 띠기 때문에 부모님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이에요. 보통 자녀들은 ‘부모가 모든 것을 안다. 부모가 옳다’고 믿어야 하는데, 이민자 가정의 상황은 좀 다르기도 했고요. 자녀가 부모 보다 언어도 빨리 익히고 상황을 빨리 파악하기 때문에 가끔은 내가 부모보다 더 많이 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것이 어린 나이에는 문화적인 충격으로 다가 왔어요. 조금 힘겹기도 했고요.




‘엄친딸’ 지칭은 난감, 비결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는 것

종신교수가 된 뒤 한국에 온 그녀에게 가장 익숙지 않은 지칭은 ‘엄친딸’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출중한 엄마 친구의 딸’이라는 의미다. 낯선 단어에 어리둥절했지만 그 의미를 알게 된 후 전혀 기쁘지 않았다는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 ‘모든 면’에서 출중한 것도 아닐 뿐더러 누군가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비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대단한 삶은 아니라고 겸손한 표현을 하셨지만 교수님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은 대단한 삶, 놀라운 성과로 보고 있는데요. ‘엄친딸’이란 지칭에 대해 난색을 표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엄친딸’이라는 말이 사실 부모가 자녀를 비교를 하는데서 나온 말이잖아요. 내 아이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느꼈어요. 제가 ‘엄친딸’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른 분들의 딸들이 저와 비교되면서 부모에 의해 저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되는 건데 왜 부모가 자녀에게 그렇게 대하는 거죠? 사실 저 자신도 어머니에게 다른 친구 분의 딸과 비교를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웃음) 그런 것이 상처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욱 좋아하지 않죠.

두 아이를 키우고 계신데, 교수님 스스로 자녀를 키우시면서 적용하는 방식이 궁금하네요.

자녀 양육 방식은 한순간에 결정하기보다는 발견의 과정을 거쳐 자리를 잡는 것 같아요. 제 경우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는 어머니처럼 개입을 많이 하고 엄격하게 훈육을 하는 부모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한국에서는 ‘극성’스러운 엄마라고 하죠(웃음)? 그런데 막상 자녀를 키우다 보니 제가 그런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런 차이는 한국과 미국의 양육방식 차이라기보다는 세대차인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지금 현재 한국의 부모들 역시 제가 적용하고 있는 양육방식과 비슷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양육을 하는데 집중하는 것은 자녀와 보다 밀접하게 관계를 가지며 생각과 감정을 교류하는 거예요. 제가 자랄 때 부모님과 저는 상대적으로 그런 경험이 적었거든요.

교수님을 엄친딸로 칭하는 부모들 중에는 그러한 성취를 추구했던 근본적인 취지, 즉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간과한 채 ‘성공’에 대한 동경만 가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데요. 아마 서두에서 교수님이 느끼셨다는 시사점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모들이 정말 생각해야 하는 건 '자녀 성공을 위한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에요. 제가 성공을 통해 성취하고 싶은 것은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었어요. 일종의 자유의 확대를 통해 주변 사람에게 좀 더 베풀고,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제 목표에 부모님들이 동의하신다면, 어떻게 해야 자녀들이 좀 더 폭넓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그에 맞춰 자녀를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는 지금 세대 간의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 심화돼 있습니다. 정치적인 견해차를 비롯해 사회전반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큰데요. 부모 세대와 의견차 혹은 다른 인생관으로 힘겨워하는 젊은이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점에 대해 단호한 편이에요. 물론 부모의 역할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것은 자녀가 성인이 됐을 때 끝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따질 필요 없이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어요. 부모의 방식은 과거의 방식이니까요.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젊은 세대잖아요. 부모의 방식에 대해 답답해하고 고민하지 않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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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석지영 저/송연수 역 | 북하우스
‘세기의 수재’ ‘엄친딸 종결자’ ‘최고의 여성법학자’…. 거기에 아메리칸발레학교, 줄리아드 예비학교, 예일대 학부, 옥스퍼드대 대학원, 하버드법대 대학원 학력까지. 한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도 화려한 이력이다. 이 모든 수식어가 석지영 교수 한 사람을 가리킨다. 북하우스에서 펴낸『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는 석지영 교수의 삶의 과정과 생각, 열정을 담고 있는 첫 에세이다. 석지영 교수가 한국 독자들을 위해 처음으로 쓴 에세이집인 이 책에는, 인문학ㆍ예술ㆍ 법 등 석지영을 만든 지식과 교양의 커리큘럼이 가득 담겨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뭐가 걱정이야? 엄마가 옆에 있는데! - 인순이 『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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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엄마 인순이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

『딸에게』정식 출간을 하루 앞둔 주말 오후, 가수 인순이를 만났다. 화려한 무대 위의 디바가 아니라 평범한 한 아이의 엄마로 <채널예스>와 만난 그녀는, 책으로 먼저 만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딸 세인이를 떠올리기만 해도 슬며시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집을 떠나 먼 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며 금세 침울해지는,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엄마였다.

한 번이라도 엄마와 멀리 떨어져 지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분주하게 오가며 가방 한 가득 짐을 꾸리는 엄마의 손길을. 이건 가자마자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그건 어디에 넣어 놨다, 도착하면 전화부터 해라, 좀처럼 그칠 줄 모르는 엄마의 신신당부. 아마 『딸에게』를 써내려간 엄마 인순이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거리도 거리이거니와, 이제 막 대학교 신입생이 된 세인이는 새로운 삶의 출발선 상에 서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떠나려는 아이에게 엄마는 일러줄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지날 때마다 아이만큼이나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이가 바로 엄마다.

『딸에게』를 통해 엄마 인순이는 딸에게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스스로를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이 힘들 땐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사랑과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하고 일과 사랑의 딜레마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딸에게』가 작가의 딸 세인이만을 위한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엄마의 충고는 언제나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다. 동시에 냉철하다.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그 무엇도 아닌 나를 위해서 건네는 충고라는 점에서 다른 누구의 충고보다도 값지다. 『딸에게』안에서 작가는 정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정답에 가까이 가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들, 잃지 말아야 할 무게 중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삶의 지혜들이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엄마는 항상 자식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딸에게』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세인이를 키우면서 일기를 쓰듯이 메모했던 것들이 있었어요. 버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느낌들을 적은 거죠. 그것들을 한 데 모아서 엮었어요. 그 때의 제 감정과 생각들을 풀어 쓰는 과정을 거쳐서 책이 나오게 되었어요.

세인 양이 책을 받으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합니다.

곧 미국으로 보내줄 생각이에요. 책이 어떤 모습이든 응원할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딸하고 엄마는 다 그럴 거예요. 무한정 응원이잖아요. 이유 없는 응원이고(웃음).

엄마들은 언제나 딸에게 언제나 정답을 알려주기 위해 고심합니다. 늘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려고 하고요.

엄마 입장에서 보면, 엄마는 항상 자식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내가 부족하더라도 무릎 꿇는 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죠. 항상 강하게 ‘엄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얘기하는 거죠.

하지만 결국 엄마도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상처받는 연약한 한 사람일 뿐이죠. 때로는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을 때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많죠. 하지만 한 번도 내색하고 싶었던 적은 없어요. 난 그 아이가 걱정하는 게 더 싫은 거예요. 그게 더 가슴 아픈 거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 일은 내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내 아이가 가슴 아파한다면, 그건 미칠 것 같은 거죠. 부모라면 다 그럴 거예요.

엄마가 되고 보니 이해하게 된, 어머니의 모습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딸에게』는 세인이에게 쓴 책이지만 세 모녀가 썼다고 보시면 돼요. 세인이를 키우면서 ‘우리 엄마는 어땠을까’ 생각이 들 때가 있었죠. 가끔씩 세인이 때문에 속상할 때는 ‘우리 엄마는 나를 얼마나 혼내주고 싶었을까’ 싶기도 하고요(웃음). 제가 세인이를 키우는 동안 풍족하게 해주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참 많이 들었어요. 학교에 잘 찾아가지도 못하고 공부도 제대로 못 봐주고, 너무 미안하죠.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나한테 제대로 해주지도 못했는데 얼마나 미안해할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전까지만 해도 ‘사는 게 다 그런 거니까’ 라고만 생각했지 엄마가 갖고 있을 미안한 마음, 절절한 마음까지는 상상을 못 해봤거든요.

딸의 모습 속에서 작가님의 모습을 보기도 하나요?

세인이가 저와 닮은 건 굉장히 독립적이라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열심히 일하면서 열 한 식구를 부양하는 걸 보고 자랐기 때문에 저도 그렇거든요. 자식들은 앞에 걸어가는 부모의 등을 보면서 걸어간다고 하잖아요. 제 딸은 저를 보면서 걸어오겠죠. 그래서 그런지 우리 딸도 굉장히 독립적이에요. 어떨 때는 그게 섭섭해요. 우리 엄마도 그걸 섭섭해 하셨거든요. 그 마음을 이제 알겠어요. 나한테 부탁도 하고 떼도 쓰고 했으면 좋겠는데, 어렸을 때도 그런 적이 없었어요. 엄마로서는 그게 더 미안한 거 있죠.




지나간 일, 교훈은 되지만 교육은 안 된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이방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들이 존재합니다. 다름에 대한 차별 때문에 아파하셨던 지난 시간들도 『딸에게』안에서 이야기하셨는데요. 그 때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진 않으셨나요?

힘들죠. 이 책을 쓰면서도 힘들었고요. 그런데 제가 다문화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을 하려고 생각하다 보니까, 지금까지 숨기고 싶어 했던 이야기들을 앞으로는 해야 될 것 같아요. 과거는 잊어버리고 정말 열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어요.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가보고 싶었어요. 먼저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 그 다음부터 내가 싸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야 내 인생을 치열하게 싸우면서 갈 수 있는 거죠. 나는 뭐지, 어디에 서야 하나, 우리 엄마는 나를 왜 낳았어,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에너지가 다 떨어져 버리는 거죠. 남들이 뭐라고 해도 ‘두고 봐, 난 끝가지 살아남아서 뭔가 해낼 거야’ 라는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어요. 오기라고 할까요. 남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저는 그렇게 긍정으로 바꿔버렸어요. 지나간 일은 교훈이 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교육은 안 되는 것 같아요. 과거를 붙잡고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거죠.

가정을 갖게 되었을 때, 그 때의 감격이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내가 가정을 가져도 될까, 아이는 낳아도 될까’ 그런 생각들이 많이 들었죠.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컸지만 ‘내가 과연 이런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인가, 또 다른 무슨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아이가 외가 쪽을 너무 닮아서 태어지는 않을까’ 이런 것들을 많이 고민했어요. 고민 끝에 외국에 가서 세인이를 낳았고 다녀와서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말씀드렸죠. 그렇게 얘기한 것으로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계속 드러내려고 해요. 그게 더 제 스타일과 맞으니까요.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이해와 연민, 그런 것들이 세인 양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펄벅 재단(다문화 아동 지원 기관)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다문화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TED(미국의 비영리재단 TED에서 주최하는 정기 강연회)에서 다문화에 대한 스피치도 했고요. 펄벅재단은 제가 자라면서 도움을 받았던 곳인데, 제가 다문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 세인이도 동아리를 만든 거예요. 학교들마다 그런 동아리들이 있는데 학생회장을 맡아서 도왔던 거죠. 세인이에게 고마운 건, 자기 스스로가 1/4을 그냥 받아들인다는 거죠. 엄마가 1/2이고 네가 1/4을 받은 거야, 이렇게 얘기 안 해도 알아서 받아들인 거예요. 저는 그게 가슴 아프고 미안하죠. 그 아이가 다문화 아이들을 싫어하면 제가 어떻게 그 아이들을 돕겠다는 생각을 선뜻 할 수 있겠어요. 가슴 아프지만 못할 것 아니겠어요. 성공한 자의 오만으로 그 아이들을 잊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세인이가 알아서 받아들이고 생각해 주니까 너무 감사한 거죠. 제가 가장 콤플렉스라고 느끼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아이가 인정해 주고 보듬어주는 거잖아요.


『딸에게』에서 인용한 글을 보면서 평상시에 책을 많이 읽는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주로 언제, 어떤 책들을 읽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관심 가는 책들을 사서 어디든 가지고 다녀요.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몇 페이지라도 읽으려고 하죠. 『무탄트 메시지』처럼 오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또는 인디언들의 이야기들을 좋아해요. 인디언들만이 가진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와닿는 것 같아요. 자연에 대한 이야기도 너무 좋고 소설책도 좋아하고요. 『너무 밉다, 사춘기』같이 사춘기에 관한 책들도 읽죠(웃음).

딸과 함께 책을 읽기도 하시나요?

최근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같이 읽었고요. 『릴케』도 함께 읽었어요. 저는 요즘 대안학교에 대한 책들을 읽고 있어요. 세인이는 아마 저보다 더 많이 읽을 걸요. 제가 관심 가진 분야니까 자기가 먼저 읽더라고요(웃음). 덕분에 저는 공부해서 시험도 봤어요. 다문화 상담사 자격증이랑 다문화 케어 자격증을 땄어요.

책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이 그에게 가 닿으면 그의 눈에도 내가 보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딸에게』를 통해서 작가님의 바람이 독자들에게 전해질 때, 독자들은 어떤 모습의 인순이를 보게 될까요.

무대에서 화려하게 있는 인순이가 아니라 ‘나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한 여자이고, 한 아이의 엄마구나’ 라는 걸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느껴지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못 다한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사랑하고 표현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소중함을 아는 우리가 되었으면 해요.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잖아요. 저에게 세인이가 그렇듯 우리 엄마에게도 나는 그런 존재겠죠. 엄마도 할머니한테는 그런 존재였을 테고요.”『딸에게』를 통해, 그리고 엄마 인순이와의 인터뷰를 통해 ‘엄마와 딸은 어떤 관계일까’ 궁금해졌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너무 어렵다’는 답 아닌 답을 찾았을 뿐이다. 아마도 엄마 인순이는 이미 자신만의 정답을 찾았는지 모른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기자에게 “엄마에게 꼭 전화하세요”라며 느낌표 같은 한 마디를 남긴 것을 보면 사랑하고 표현하고 소중함을 아는 것, 그 시작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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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인순이 저 | 명진출판
『딸에게 희망엄마 인순이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가수 인순이가 하나뿐인 딸 세인이의 대학입학을 앞두고 세상에 내보낼 준비를 하며 가슴으로 써내려간 편지다. 1978년 데뷔 이래 지난 34년간 정상의 인기와 동시에 여러 역경을 겪었지만 묵묵히 가수 외길인생을 걸어오며, 자신의 꿈과 희망을 노래해온 인순이, 그녀는 어떻게 바쁜 일상 속에서도 친구들의 카운슬러 노릇을 하고 때로는 엄마의 모든 것을 공감해주는 속 깊은 딸, 공부까지 잘 하는 딸로 키워낼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밤 10시 이후에 음식이 더 맛있어지는 식당,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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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가 낸 책, 보통 홍보를 위한 목적이 많다. 더욱이 저자가 오너 셰프일 때, 흑심이 보인다. 대단한 레시피를 공개하지 않으면 독자로서 살짝 억울하고, 내용이 빈약하면 그냥 홍보물을 읽은 느낌이다. 『맛있는 위로』의 저자 이유석을 만나기 전, 살짝 오해가 있었다. 꽤 매끄러운 문체였고 내용도 풍부했기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슬쩍 떠보았다. 대답은 아래와 같다. “예전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일기처럼 끄적거리다가 여자친구한테 보여줬는데 책 한 번 써보라고 권하더라고요. 막상 세상에 꺼내 놓으니 얼떨떨하고 어쩔 줄 모르겠어요. 5개월 동안 틈틈이 썼는데, 1년 정도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이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새벽 1시에 식당 문을 닫고 2시에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나면 3시. 아침 8시까지 원고를 쓰고 4시간쯤 수면을 취한 뒤, 점심시간에 레스토랑 도착. 시장을 보고 재료를 준비하면 루이쌍끄가 문을 여는 시간 오후 6시는 금세 찾아온다. 5개월 동안 하루 중 눈 감고 있는 시간이 단 4시간이었다니!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스케줄이다. “책을 쓰다가 두 번이나 그만둘 생각을 했어요. 레스토랑 경영도 해야 하니 육체적으로도 힘든데 정신적 노동까지 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주변에서 많이 도움을 주셔서 가능했죠. 책을 쓰면서 가장 걱정했던 게, 책 속에 내 자신을 너무 미화하지 않을까, 하는 거였어요. 저는 주방에서 소리 지르는 셰프인데, 책에선 너무 따뜻한 사람으로만 비쳐진 것 같아서 걱정돼요.”『맛있는 위로』을 읽고 루이쌍끄를 찾아오는 독자들에게 이유석은 경고한다(?). “책에서 거짓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제 인상에 대해 너무 기대하지 말아주세요.”아, 이토록 정직한 셰프라니!




손님 차별하지 않는 식당, 루이쌍끄입니다

식사 손님뿐 아니라 술 손님도 적지 않다 보니, 바(bar)에서 다양한 계층의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 한잔, 맥주 한잔씩 같이 마시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사람과 더불어 다양한 이야기, 다양한 인생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책 『맛있는 위로』는 바로 그들과의 이야기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가게를 찾은 손님들과 그들에게 위로가 돼준 음식들의 이야기다. 나는 심리치료사나 의사도 아닌데다 그다지 살갑지 않은 무뚝뚝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내가 만든 음식이 때로는 그들에게 위로가 돼주는 일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그 순간 순간의 감동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이 책은 그간 요리를 하면서 만났던 손님들을 음식으로 위로했던 과정에 대한 흔적이며, 앞으로 더 많은 손님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각오이기도 하다.(p.7)

『맛있는 위로』를 읽고 오는 손님들이 많나? 환상을 갖고 오지 말라니, 독자들이 서운하겠다.

저자 소개에 ‘음식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건네는 푸드 테라피스트’라고 적혀 있는데, 사실 조금 부끄럽다. 책 보고 왔다는 손님이 있으면, 왠지 더 따뜻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고 책 속 이미지에 맞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있다. 알고 보면 나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데 말이다. 사실, 나는 주방에서 소리도 막 지르고 화도 내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고, 생각보다 무뚝뚝한 사람이다. 제발 그 점을 알아 주길 바란다(웃음).

2년 동안 루이쌍끄를 운영하면서 만난 손님들이 이 책을 만들어준 것 같다. 책 속 주인공들이 책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 책이 나왔다고 특별히 말씀 드리지 않았다. 책이 나온 사실을 아예 모르는 손님들이 더 많을 거다(웃음. 책 속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오랜 단골들이 책을 읽었다고 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요리를 하면서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도 아닐 텐데.

평상시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는데 요리를 하면서 성격이 좀 변한 것 같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생긴 직업병이 바로 ‘이야기 중독’이다. 손님들 사연이 궁금하고 그 사연을 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웃음). 가끔 음식이 아닌 대화를 목적으로 오는 손님들도 있다. 내가 만든 테린을 좋아하는 60대 노부부 손님이 있었는데, 그 분들은 내 프랑스 유학시절 이야기를 듣는 걸 참 좋아했다. 그래서 올 때마다 파리에서 생활했던 이야기,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했던 에피소드들을 열심히 들려 드렸다. 알고 보니, 남편 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는데, 아내와 여행 한 번 함께 가지 못한 게 미안해서 프렌치 레스토랑을 찾는 걸로 미안함을 대신하려고 했던 거였다. 아내 분이 언젠가 프랑스 여행을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며. 최근에는 건강이 더 안 좋아지셔서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그 때 더 많은 이야기를 해드릴 걸 후회된다.

대화에도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가 존재한다.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상대에게, 나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을 사람은 없다.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혼자서만 이야기를 늘어놓자니 머쓱해지기도 한다. 마음을 터놓고 나를 보여주는 일은, 상대가 들어올 문을 열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듣기 위해선 말해야 하고, 말하기 위해선 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솔직히 보여주고 이야기한다. (p.193)
맛있는 요리와 함께 맛있는 대화도 할 수 있으니, 정말 손님들에게는 ‘맛있는 위로’가 되었겠다.

난 내가 만든 정성스러운 요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위로 받길 원한 거지, 내 스스로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원 교육할 때, 늘 하는 말이 몇 백만 원 매상을 올려주는 테이블과 맥주 한 병에 안주 하나 시키는 테이블을 절대 비교하지 말고 똑같이 응대하라는 말이다. 손님은 계급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의 철학은 반드시 지키려고 한다.

보통 식당에서는 기다리는 손님이 있으면, 주인이 눈치를 준다. 그러면 손님들은 당연한 듯 일어서야 하고. 이 같은 상황이 루이쌍끄에는 전혀 없나?

주방과 이어지는 바에 앉는 손님들과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딱 봐도 별로 배고프지 않은 것 같은데 이것 저것 시키는 손님들이 있으면, 예의상 많이 시키시지 마시고 간단하게 드셔도 된다고 말한다. 손님들에게 부담을 주는 식당은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도 좋은 식당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현 루이쌍끄의 지배인인 선배로부터, 최근에 초심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변한 내 모습을 보게 됐는데, 사업가로서는 노련해질 필요가 있지만 셰프로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심야식당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온 건가? 일본 만화 『심야식당』을 좋아했나?

드라마 <심야식당>을 봤다. 굳이 그 식당에 오마주를 갖고 있진 않았지만 나 역시 손님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장기적인 계획을 미리 세워 놓는 편인데, ‘루이쌍끄’라는 이름은 이미 5년 전에 정해놓았다. 식당을 하게 된다면, 일단 규모는 작게 하고 싶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왔을 때, 6개월간 부동산만 다녔다. 몇 백 곳을 다녀보니 상권이 보이더라.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와인바가 무지 많았고, 레스토랑들은 보통 9시에 라스트 오더를 받고 10시가 되면 웨이터가 시계를 보더라. 주방장들은 보통 10시 반이 퇴근시간이니 웨이터에게 눈치를 준다. 웨이터들은 마지막 손님이 나가기 전에 사복을 갈아 입고. 손님들은 당연히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고 2차를 어디로 갈지 고민한다. 사실 난 꼭 2차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게 귀찮았다. ‘한 군데에 대여섯 시간 있으면 안 되나?’ 라는 생각도 있었고. 그래서 오후시간에 식당을 열고 늦게까지 하면 그 틈새시장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루이쌍끄는 라스트 오더를 몇 시에 받나?

보통 11시 반~ 12시까지 받는다. 내가 오너 셰프이기 때문에 직원들은 퇴근해도 나 혼자 남아서 충분히 요리를 할 수 있다. 루이쌍끄 오픈 초반에는 “천천히 있다 갈게요”라고 말한 손님들도 10시가 되면 후다닥 나갔다. 아무리 늦게까지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줘도 습관처럼 일어나더라. 1년쯤 지나고 나니, 9시에 오는 손님들이 많아졌고 10시 넘어서도 자연스럽게 주문을 한다. 개인적으로 10시 넘어서 오는 손님들과는 여유롭게 대화도 할 수 있다(웃음).

사실 오너 입장에서는 무조건 손님이 왕이지만, 직원들 입장에서는 마음이 어렵지 않나.

예전에 직원 한 명이 큰 실수를 했다. 한 테이블이 6시간을 내리 차지 하고 있는데, 홀 직원이 불편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남아 있을 테니 먼저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그 사이 직원이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로 가서 손님에게 계산을 하라고 했다. 단골이었는데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 일 이후로 그 손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휴대폰 번호를 저장해놓았는데 너무 죄송해서 차마 연락을 못했다. 직원들의 불만, 당연히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식당에서는 손님이 직원 눈치 보며 일어나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루이쌍끄가 2012년 영국 로이터통신, 미국AP통신에 강남 대표 레스토랑으로 선정됐다. 맛집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하다. ‘루이쌍크’는 어떤 의미인가?

프랑스 유학시절 사용하던 이름 ‘루이’에 숫자 5를 의미하는 ‘쌍끄’를 붙여, 오감을 만족시키는 요리를 선보인다는 의미다. 루이쌍크는 프렌치 레스토랑이지만 여느 파인다이닝과는 다르다. 와인, 맥주와 함께 프랑스음식을 단품으로 먹을 수 있는 프렌치 가스트로 펍이다. 격식 없이 누구나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셰프들이 즐겨 찾는 식당으로도 유명한 걸로 알고 있다.

많이들 온다. 나랑 아는 사이라서 오는 경우도 많고 탐색하러 오는 외식업계 분들도 많다. 후자는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첫눈에 눈치챌 수 있다. 모를 수가 없다. 우선 들어오자마자 주방 먼저 살피고, 셰프의 동선을 파악하고 오븐, 식기의 상태까지 훑는 게 바로 보인다. 메뉴판을 몇 십분 정도 분석하면서 보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다. 우린 경쟁 외식업계 분들이 와서 뭘 여쭈어 봐도 웬만하면 다 알려드린다. 그런데 처음부터 자기 소개를 하지 않고 손님인 척 하다가 나중에 나가면서 질문을 쏟아내는 경우는 조금 언짢다. 좋게 좋게 이야기하면 동료가 될 수 있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이유석의 소울 푸드는 ‘마늘수프’

1999년 겨울. 딱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이나 여타 분야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열아홉 살의 내겐 이렇다 할 꿈이 없었다.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꿈을 고민해볼 시간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이 요리였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가끔 집에서 음식을 만들면 꽤나 재미있었다. 어차피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나마 재미를 느끼는 일을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전문기술을 익히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로 어머니에게 ‘요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p.151)
요리를 좋아하더라도 주방 일이라는 게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힘들지 않나.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오너 셰프가 되기 전엔 어땠나?

요리한 지 13년이 되어간다. 내가 요리를 시작했을 때는 도제식 시스템이 강해서 무조건 선배 말에 복종해야 했고 부당한 처우도 많이 받았다. 손이 느리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실컷 얻어맞은 적도 있다. 신기한 건 힘들 때마다 어머니가 내 방에 들어와 기도를 해주셨는데 그 힘으로 지금까지 온 게 아닌가 싶다.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힘들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요리가 쉽지 않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장 보고 식당 오픈 전까지는 재료를 손질해야 하고, 오픈하면 요리하기 바쁘다. 손목이 뻐근하다 못해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칼질을 하다 보면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래도 행복한 건, 내 요리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때, 그 힘으로 요리를 하는 거다.

지난주에 루이쌍끄에서 예스24 독자들과 브런치 만남을 했는데 후기가 좋더라.

메뉴 중에 가지그라탕이 있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원래 가지를 절대 못 먹는데, 예의상 포크를 들었다가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다음에 가지그라탕을 먹으러 꼭 오겠다고 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셰프로서 가장 기쁘고 뿌듯하다. 그 분이 ‘가지’에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그 걸 내가 풀어준 셈이니까.

혹시 이유석 셰프에게도 못 먹는 음식이나 트라우마가 있는 요리가 있나.

바게트다. 지금도 못 먹는다. 프랑스 유학 시절, 도착하자마자 이민 가방 세 개를 잃어 버렸는데 덕분에 빈털터리로 생활했다. 한인교회에서 음식이랑 옷 모두 얻어다가 생활했다. 그 때 바게트가 0.6유로였는데 하루에 바게트 두 개로 끼니를 때웠다. 몇 달 동안을. 바게트가 딱딱해서 매일 먹다 보니 입에서 피가 났다. 바게트 명장이 만든 바게트를 줘도 잘 안 먹는다(웃음).

26살에 무작정 떠난 유학, 프랑스 파리부터 시작해 스페인 바르셀로나, 라만차 등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실력을 쌓았다. 맨 몸으로 부딪힌 건데 힘들지 않았나. 용기가 대단하다.

도착한 날 짐을 잃어버린 것부터 시작해서 정말 힘든 일이 많았다. 유학 생활 이야기만 써도 책 몇 권이 나올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3년 반 정도 유학을 마친 뒤 서울에 와서 레스토랑을 차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뭔가 조금 아쉬워서 견문이나 좀 더 넓히고자 해서 떠난 곳이 스페인이었다. 미리 근무하기로 정해진 레스토랑에서 숙소를 제공했는데 웬걸, 묻고 물어 도착한 곳은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허름한 아파트촌이었다. 스페인은 날씨가 평소에는 맑다가 어느 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곤 했는데 예고도 없이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배꼽까지 올라온 물을 헤치면서 출근한 적도 있었다. 유학 시절은 내내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컴퓨터도 없고 TV도 없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집에 오면 밤 11시. 위안이 된 건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이국적인 음식들이다.

유학시절 맛본 음식 중에 이 셰프의 소울 푸드는 무엇인가?

지금 루이쌍끄에서도 만들고 있는 마늘수프다. 스페인에 있을 때 엄청 아팠던 적이 있다. 정신 없이 잠에 취해 있는데 동료 필리프가 마늘수프를 끓여 줬다. 알싸한 마늘의 맛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몸을 따뜻하게 했다. 그 때 이후로 마늘수프는 내게 최고의 보양식이자 유일한 감기약이 됏다. 한국에 귀국해서도 한동안 그 맛을 잊지 못해 루이쌍끄 겨울 메뉴에 마늘수프를 넣었다.

2호점을 낼 계획은 없나?

브랜드로 크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지금 예약을 30팀을 못 받는다. 30분씩 기다리다가 돌아가는 손님들이 있다. 아쉽지만, 시스템적인 측면이나 소프트웨어가 더 강해졌을 때 분점을 내고 싶다. 길게 보고 갈 생각이다.

요리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있나?

『젊은 요리사를 위한 14가지 조언』이란 책이 있다. 지금은 절판돼서 굉장히 귀한 책이 됐다. 뉴욕 외식계의 왕이라고 불리는 ‘다니엘 뷜루’라는 사람이 젊은 요리사들에게 건네는 충고와 조언이 담긴 책인데 유학생활 중에 정말 힘이 됐던 책이다.

음식점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단 하나의 조언을 한다면?

상권에 맞는 콘셉트가 중요하다. 음식 맛있는 곳 정말 많고 웬만한 곳 다들 친절하다. 중요한 건 콘셉트다. 청담과 압구정이 다르듯이 내가 고른 상권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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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위로이유석 저 | 문학동네
이 책 『맛있는 위로』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가게를 찾은 손님들과 그들에게 위로가 돼준 음식들의 이야기다. 옷 갈아입듯 여자를 바꿔가며 만나다 ‘진짜 사랑’에 빠진 플레이보이와 그의 연애에 달콤함을 더한 ‘수플레’, 뜨겁진 않지만 따뜻한, 그래서 더욱 오래가는 60대 노부부의 사랑과 오래 씹을수록 고소해지는 ‘테린’의 공통점, 하루종일 음식을 만들면서 정작 자신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 셰프들의 소울푸드 ‘감자튀김’ 등, 저자가 요리를 하면서 만났던 손님들을 음식으로 위로했던 과정에 대한 흔적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내가 음악을 한다는 의미는… - 장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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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라디오 DJ, 예능감 넘치는 종합 방송인까지 장윤주를 수식하는 단어는 갈수록 화려해진다. 2~30대 여성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몸매와 세계가 반한 워킹의 소유자지만 그녀의 노래는 놀랍도록 수줍고 여리다. 싱어송라이터 장윤주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떤 심장으로 호흡하는 사람일까. 추위가 매서운 어느 밤, 한적한 카페에서 이야기는 시작됐다.


4년 만의 앨범이다. 그동안 음악 활동이 없었던 이유는.

방송 활동이나 다른 일도 많았고 사람을 알아가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부담도 있었고요.

2집 < I'm Fine >을 어떻게 소개하고 싶은가.

이번 2집 같은 경우에는 제가 지향하는 삶의 신조처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앨범이에요.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담았고 또 스스로에게 전달하는 힐링의 음반이 아니었나 싶어요. 「I'm fine」이라는 앨범 이름이 가진 의미죠. 주위에 사인 해 줄 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I'm fine, you're fine」이라고 써요. 그 말 속에는 지난 일에 얽매여 억지스럽게 아프고 싶지 않은, 그냥 흘려보내고 싶은 서른 넘은 여자의 방어기제가 담겨 있죠. 두 번째 앨범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팬들에게 죄송해요. 계속 관심을 가져 주셔서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집에 비해 더 차분해진 느낌이다. 스스로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

20대는 왔다 갔다,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히피처럼 살았어요. 서울에 있기 싫어해서 매번 짐 가방 싸서 떠났죠. 현실에 만족하지 못 하고 멀리 있는 걸 찾아가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현재에 안주하지 못 해서 떠나고, 또 못 떠날 때는 우울해하고. 그렇게 살기에 그나마 좋다는 느낌이 1집 때에 있었던 것 같아요. 여자라는 사실보다도 젊음이라는 즐거움이 더 많았죠.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가까이에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또 내가 여자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그런 변화들이 2집에 반영된 것 같고요.

앨범에 대한 만족도는?

1집은 만들고 나서 정말 안 들었어요. 오히려 데모 버전에 대한 미련이 더 많았어요. 물론 「Fly away」는 데모보다 훨씬 좋게 녹음되었지만 다른 곡들에 대한 미련을 당시에는 정말 못 버렸죠. 그래서 당시에는 앨범을 많이 안 들었는데 공연을 준비하며 최근에 다시 들어 보니 또 좋게 들려요. (웃음) 2집 같은 경우는 프로듀서가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의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만의 온전한 색깔이 아니에요. 프로듀서 김정범의 작품이라고도 얘기하고 싶어요. 전체적인 사운드 디렉팅이나 가이드 작업이 있었기에 내가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고 또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이 있었죠. 최선의 선택을 모아서 한 앨범이라고 생각하기에 만족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인지도나 피드백에 대한 우려는 남아 있지만.

4년의 공백기 동안 음악 시장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2집은 발매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았어요.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이나 음악 시장의 측면에서나. 만들어도 잘 몰라주는 인지도도 그렇고 음반 제작에 대한 지식이 없던 기획사도 그렇고 제가 부딪혀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랬기에 프로듀서를 기용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죠. '내가 해야 돼, 해야 돼'하는 마인드만 있던 1집 때와 비교하면 2집은 의지할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프로듀서를 기용하면서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었나?

1집 < Dream >에는 보이싱을 편곡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막상 들어보면 내 노래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정말 많이 받았죠. 2집을 작업할 때는 보이싱이나 코드 진행 같은 부분을 안 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장윤주만의 느낌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려고 했어요. 작업도 다 원 테이크로 했고요.


프로듀서 김정범은 어떤 사람인가.

푸디토리움(Pudditorium)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는 실력 있는 사람이에요. 우선 서로 감성이 잘 맞았어요. 원래 슬프면서도 따뜻한 감성이 있는 음악이나 영화를 좋아하고, 그래서 잔잔하면서도 포근한 그런 애잔함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이런 부분에서 잘 통하지 않았나 싶어요. 예를 들어 정재형 씨 같은 경우는 예전 음악들을 보면 어둡고 슬프기만 한데 김정범 씨 음악에는 슬픔과 아련한 행복이 동시에 존재하잖아요. 감정 코드가 비슷하죠.

프로듀서를 직접 고른 것인가.

직접 골랐어요. 정재형 씨나 이적 씨 혹은 정원영 씨 등 주위에 음악 하는 분들이 많아 음악들을 다시 들어보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 사람은 어떨까 해서 김정범 씨의 음반을 접하게 됐어요. 후에 라디오 게스트로도 초대했었고. 장윤주라는 사람이 음반 프로듀서로 자신을 기용한 것에 대해서 김정범 씨 스스로는 상당히 실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나얼과도 작업한 곡이 많다.

1집 「Fly away」 때도 직접 보컬 디렉팅을 해 줬어요. 당시에 음반 작업은 같이 안 했는데 2집을 제작하면서 디렉팅을 해 준다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어요. 곽윤찬 씨 < I Am Melody >라는 가스펠 앨범을 만들 때 나얼 씨와 같이 작업했는데 그때 목소리에 생명력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당시에는 이게 뭔 소린가 했는데 (웃음) 의미를 모른 채 지내다가 조금씩 깨닫게 된 건 한참이 지난 뒤였어요. 화려하진 않지만 생명력을 품고 있고, 또 싱그럽고. 나얼 씨라면 제 목소리를 더 멋지게 해 줄 것 같아서 같이하게 됐죠.

나얼의 보컬 디렉팅은 어땠나?

나얼 씨와 작업하면 보컬 톤이 한 톤으로 유지돼요. 노래를 길게 부르다보면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데 이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죠. 억지로 어렵게 가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움을 끌어내는 사람이라 그 덕분에 호흡이 길어진 것 같아요. 「오래된 노래」와 「The field」, 「가을바람」에서 디렉팅을 받았고 나머지 곡은 김정범 씨와 작업했어요. (김정범 씨 디렉팅은 어땠느냐는 질문에) 김정범 씨가 오히려 더 기술적이고 테크닉적인 부분에 집중했어요. 결과의 측면에서는 1집보다 훨씬 만족스러워요. 더 잘 불렀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웃음)

「아침이 오면」 Part 1과 Part 2는 상당히 실험적인 트랙이다. 재즈로 시작해 록으로 끝나는 전개도 독특한데 어떠한 기획으로 출발했나?

「아침이 오면」 같은 경우는 사랑에 대한 분노의 사운드를 넣고 싶었어요. 처음 만들 때부터. 데모의 경우에는 파트 1과 파트 2가 합쳐져 있는데 나중에 녹음하면서 나눴어요. 김정범 씨 의견이었어요. 다른 곡들에 비해서 더 세죠. 실험적이고. 다른 사운드들과 같이 묻힐까 하는 고민보다도 조금 더 갈 거면 아예 가 보자는 생각이 강했어요.

타이틀 곡 「I'm fine」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난 톱 모델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여자이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어요. 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소소한 걸 좋아하고, 당신은 뭘 더 해 줘야 될까 생각하는데 난 이 정도로도 좋다는 솔직한 마음이죠. 연애를 하면서도 인간 장윤주를 좋아해 주는 사람보다도 모델로서의 어떠함 때문에 더 끌렸던 사람들이 많았던 거 같아요. 만나보면 그렇게 좋지는 않았어요. 모델은 연기에 불과한데 그 모습을 더 좋아한다는 게 상처와 충격이었죠.

그게 장윤주 그 자체이지 않나?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보이는 것은 싫어요. 모델은 인간 장윤주의 한 부분일 뿐이죠. 나는 더 평범한 사람이고 보통의 사람인데 자꾸 모델의 이미지로만 바라보는 거잖아요. 모델이기 전에 나도 한 사람인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여자로서 서러운 느낌도 많이 받았어요. 직업적인 영향이 강해지니 ‘나는 없다’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요. 그건 나의 일부지 전부가 아니에요. 일부를 전부로 해 달라는 것은 못 할 짓이에요. 사실 전 아무거나 다 잘 먹는데. (웃음)


그렇다면 장윤주에게 음악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모델의 이미지를 벗기 위한 것인가?

모델 이미지를 벗기 위한 생각이라고는 절대 해 본 적이 없어요. 뮤지션으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도 결국 모델의 이미지로 깊게 남겠죠. 주위에 이소라 씨나 홍진경 씨를 봐도 방송인으로 사업으로 성공했지만 결국에는 모델 이소라나 모델 홍진경이라는 이름이 많잖아요. 그래도 이 정도는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단 모델로 유명해진 케이스고 그 유명세로 방송에 올랐으니까. 주위의 톱 배우 출신 방송인들 보면 모델의 이미지를 벗으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벗어야 배우로 성공하고 못 벗으면 성공 못 한다는 그런 강박관념들이 분명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억지로 벗으려면 오히려 부작용이 나올 것 같아요. 모델로 얻었던 이미지는 계속 가져가려고 해요. 전에 차승원 씨도 제가 여기저기 나오는 걸 보고 ‘네 정체성은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 때도 모델이라고 대답했죠.

어렸을 때부터 음악이 꿈이었나.

먼저 언니에게 음악을 배웠어요. 교본 말고 코드부터 배우고 음악도 따라듣고 혼자 쳐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대학교 가서는 영화과였는데도 정원영 교수님 음악 수업을 들었죠. 20살에는 토이 뮤직비디오 촬영하면서 유희열 씨를 만났고 그러면서 이적 씨, 정재형 씨 또 메이트의 임헌일 씨도 알게 됐어요. 그렇게 주위에 계속 음악이 있었던 것 같네요. 피아노 교습도 1년 정도 배웠고요.

앨범의 피아노 파트는 혼자 다 연주한 것인가.

합주는 세션이고 혼자 하는 것은 다 스스로 쳤어요. 데모는 직접 치면서 녹음했고.

뮤지션 장윤주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음반을 꼽으라면?

원래는 초등학교 때부터 언니가 듣던 공일오비(015B) 테이프. 근데 직접 산 앨범은 스탄 게츠(Stan Getz)예요. 어렸을 때 스탠다드 재즈를 들어보고 싶어서 테이프 가게 아저씨한테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주셨던 게 < Getz / Gilberto >였죠. 처음 듣는 앨범이었는데 어딘가 익숙하고 좋았어요. 그 다음에 갔을 때는 보컬 없는 앨범을 부탁드리니 쳇 베이커(Chet Baker) 연주 앨범을 주시더라고요. 돈을 주고 직접 샀던 앨범이 재즈 보사노바라 그 장르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싶어요.

뮤지션으로서 롤 모델은?

정말 많아요. 최근에는 김정범 씨에게 소개받은 타니아 마리아(Tania Maria)라는 브라질 뮤지션에게도 관심이 많고 미국 재즈 뮤지션 칼라 블레이(Carla Bley)도 멋있어요. 음악뿐만이 아니라 룩(look)도 그렇고. 제인 버킨(Jane Birkin)도 좋아요. 올해 내한 공연을 갔더니 음악이 좋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심수봉 선생님이나 양희은 선생님 등. 20대 초반에는 심수봉 선생님 정말 좋아했어요. 얼마 전에 같이 공연했던 조원선 씨도 롤러코스터 때부터 좋아했고. 깊이가 있는 뮤지션이잖아요.


첫 앨범은 어떻게 내게 된 건가?

처음에는 앨범을 낼 마음이 없었어요. 「Fly away」를 책이랑 같이 냈던 것처럼 원래는 책에다 넣을 앨범을 만드는 거였는데 주위에 이적 씨 정재형 씨한테 들려주니 왜 이걸 책으로 내느냐고 막 그러는데. (웃음) 준비가 안 돼서 지금은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분들이 나중에 다시 하려면 못 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아니면 못 한다고. 1집은 그렇게 주위의 조언으로 낸 앨범이죠. 만들고 나니 그 말이 맞더라고요. 그 곡들을 지금 냈으면 또 언밸런스한 부분이 있지 않았겠나 싶어요. 그 때 내기 적절한 앨범이었죠.

장윤주라는 뮤지션의 인지도에 대해 고민이 많을 것 같다.

뭔가 섭섭한 마음이 들죠. 앞으로도 계속 할 건데. 모델로서의 이미지가 덮여 있기에 음악 전문 프로에 나가도 날 뮤지션으로 봐줄지 의문이에요. 조급하게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고민이죠. 사람들이 내가 스타일 강의를 한다면 많이 올 텐데 음악 공연을 한다면 그것보다는 덜 하지 않을까라는 식의 생각도 해 봤고요. 공연할 때도 관객석 반응이 두 가지예요. ‘와, 모델 장윤주다’하는 식의 신기하다는 것 하나랑 ‘네가 음악을 한다고? 곡을 네가 다 썼다고?’하는 식의 다른 하나. 그런 반응 때문에 1집 때는 무대 위에 있다가도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확 들 정도로 당황했죠. 아무래도 나라는 사람만이, 장윤주라는 사람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야 될 것 같아요. 뮤지컬 같은 건 아니고 진짜 나만의 공연.

이번 앨범에 대한 반응은 어떤 것 같나.

앨범이 한 번에 팔렸던 1집보다는 반응이 늦어요. 1월에 방송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서울이랑 부산 공연을 시작하면 반응이 어떻게 올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크게 기대 안 해요. 그래도 계속 우려는 되죠. 어떻게 봐줄까. (웃음)


인터뷰 : 임진모, 조아름, 윤은지, 이수호
정리 : 조아름, 이수호
사진 : 이한수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사람, 마키아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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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의 마키아벨리는 진짜가 아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사람이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는 말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씌워진 누명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이름에서 파생된 단어 ‘마키아벨리안(Machiavellian)’과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그가 남긴 이름이 결코 명예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안은 ‘권모술수에 능한’이라는 형용사로, 마키아벨리즘은 ‘정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상’을 의미하는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누구라도 억울함을 호소할만한 가혹한 평가다. 김상근 교수가 생각하기에 문제는 가혹하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이 철저하게 왜곡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이런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진짜 마키아벨리를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원래 목적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진짜가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정수를 이해하지 못하던 신학자들, 사회과학자들, 처세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를 해석해왔고, 그의 심오한 사상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해 온 것이다. (p. 6)

마키아벨리를 ‘악의 교사’로 규정짓는 오류를 범한 사람들, 물론 그들에게도 나름의 근거가 있다. 마키아벨리의 대표적인 저서 『군주론』이 그것이다. 『군주론』안에서 그가 이야기한 ‘바람직한 군주의 상(像)’은 시민 위에 군림하는 냉혹한 지배자의 모습이다. “대중이란 머리를 쓰다듬거나 없애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군주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낫다”와 같은 말들로 오랫동안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에게 ‘권모술수의 대가’라는 불명예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군주론』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이유로 쓰였는지, 그 커다란 맥락을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 책(『군주론』)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권모술수로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직에서 쫓겨난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정치 실세로 복권된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일자리를 얻기 위한 일종의 자기 추천서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특별한 목적으로 썼기 때문에 『군주론』은 권력 집중을 강조하고, 군주의 처세가 극단적이어야 한다고 애써 강조한다. (p. 22)

정치 사상가였던 마키아벨리가 공직을 얻기 위해서는 메디치 가문으로 하여금 책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야 했다. 그러한 이유로 『군주론』은 군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숨은 의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피렌체는 공화정이 붕괴되면서 힘의 공백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했던 메디치 가문에게 당시의 혼란을 진정시킬 의무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지 모를 피렌체의 시민들을 바라보면서 마키아벨리는 바로 지금이 군주가 위엄을 보여야 할 때임을 알아챘다. 악한 군주라는 인상을 준다 할지라도 따끔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 이유다. 이렇듯 『군주론』은 그것이 집필될 당시 피렌체의 역사적 상황과 마키아벨리 개인이 처해있던 현실, 그의 국가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올바로 읽을 수 없다.




약소국의 가난한 시민, 그가 진짜 마키아벨리다

『군주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권모술수의 대가라는 마키아벨리의 오명을 씻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김상근 교수는 마키아벨리 개인의 삶에 주목했다.

“사실 글은 자기를 약간 숨겨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먼저 봐야 해요. 가장 좋은 인문학의 텍스트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을 먼저 깊이 보고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겠구나’ 이해한 다음에 텍스트를 읽어야지, 텍스트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가 속이고 싶어 했던 것들에 넘어가는 거죠.”

마키아벨리는 철저하게 약자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살다 간 인물이었다. 지방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한평생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삼류 법률가였다. 세금조차 내지 못하는 시민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마키아벨리 역시 지독한 가난을 경험하며 성장했다. 그의 나이 아홉 살, 피렌체는 나폴리 왕국의 침략을 받았고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는 프랑스의 왕 샤를 8세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피렌체를 점령했다. 비극은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1527년, 이탈리아는 또 한 차례의 침공을 받게 된다. 이번에는 스페인 군대였다. 쉰여덟의 마키아벨리는 생애 세 번째 전쟁을 겪어야 했다.

“마키아벨리를 연구해 보니까 이 사람은 진짜 불행한 사람이었고 약자였고, 전쟁의 공포에 시달렸던 사람이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한국 전쟁이라는 엄청난 전쟁의 경험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그런 전쟁을 세 번이나 겪은 사람이에요. 그것도 제2서기장으로서 국가의 미래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었던 그가 겪었을 트라우마와 고민을 생각해 보면, 아마 심각했을 거예요.”

가난한 이들 안에서 살아가며 강대국의 침략 앞에 무력한 자국의 모습을 지켜봤던 마키아벨리는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왜 우리는 늘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강자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가? 해답을 찾기 위해 마키아벨리는 강자의 힘과 권력의 속성에 주목했다. 그들의 움직임과 생각을 읽는 것이 생존하는 길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다수의 힘없는 자들과 소수의 권력자 사이의 대립과 투쟁이 계속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피렌체가 외국의 침공을 받기 시작하면서 마키아벨리는 ‘어떻게 하면 강대국의 횡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한 거예요. 결론은 군대를 만들어야겠다는 거였죠. 자기 나라의 국방은 자기가 해야 된다는 거죠. 왜 남의 힘에 의해 보호 받냐는 거예요. 결국은 시민들이 나와서 자발적으로 해야 된다는 거였어요. 그러다가 그 세계관이 개인사로 바뀌는 거예요. 공직에서 쫓겨나 체포되고 고문 받고, 이후에는 실업자로 살죠. 그러면서 ‘내가 살아남을 길이 뭘까’ 생각해 보니까 결국 강자에게 붙는 거예요. 그래서 『군주론』을 쓰는 겁니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어요. 그래서 환상이 깨지는 거죠. ‘내가 국가를 바라보는 시각,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렇지 않았는데 왜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행동했을까’ 반성하면서 생각을 바꾼 겁니. 그래서 『로마사 논고』를 쓰고 약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로마사 논고』 안의 마키아벨리와 만나다

『군주론』안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정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마사 논고』에서 그는 공화정을 이상적인 국가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대중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없애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군주의 역할이라고 조언했던 그가 입장을 바꾼 것일까. 『로마사 논고』의 그는 “대중은 군주보다도 훨씬 은의에 돈독하고, 총명함과 부동심에 대해서도 군주보다 훨씬 신중하며, 변덕도 적고 정직하다”고 말하고 있다. 『군주론』이라는 하나의 텍스트만으로 마키아벨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섣부른 판단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상근 교수 역시 『로마사 논고』를 통해 마키아벨리의 감춰졌던 모습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10년 동안의 르네상스 연구를 끝내고 로마 연구로 넘어가려고 했어요. 르네상스가 다시 로마 시대로 부활한다는 의미인데, 그러면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로마를 어떻게 보았을까 알아야했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책이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에요. 그런데 『로마사 논고』를 읽다 보니까 내가 아는 『군주론』하고 다른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마키아벨리하고는 전혀 다른 마키아벨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연구를 시작했고 『마키아벨리』를 쓰게 된 거죠.”

지난 10년간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하며 김상근 교수가 지켜왔던 ‘보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는 원칙은 『마키아벨리』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모두 답사했다. 16세기의 마키아벨리가 거닐었을 그 길 위에 서서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시뇨리아의 정청에서 마키아벨리 동상을 마주했을 때, 김상근 교수는 마키아벨리의 슬픔을 보았다고 했다. 비열한 눈빛과 미소를 머금은 협잡꾼을 상상했던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키아벨리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 마키아벨리의 모습은 무엇일까, 교수는 그를 살려내는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시공간을 초월한 두 남자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긴 대화를 마친 지금 김상근 교수는 말하고 있다. 당신이 알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진짜가 아니라고.

마키아벨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착한 심성을 가진 선량한 사람이었고, 르네상스 정신의 근간을 제공했던 인문학의 정수에 도달한 탁월한 인문학자였으며, 무엇보다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을 품에 안으며, “울지 마라, 인생은 울보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위로하고 격려하던 약자들의 진정한 수호성자였다. (p. 6~7)




『군주론』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진짜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수록 한 가지 의문이 짙어졌다. 왜 그는 오랜 시간 누명을 벗지 못한 것일까.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군주론』을 오독한 것일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군주론』안에 담긴 마키아벨리의 인문학적 지식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것이기에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고, 그 결과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해 가능한 부분만을 선택해서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에 ‘마키아벨리는 권모술수를 가르친 악의 교사’라는 선입견까지 더해지면서 보다 큰 맥락에서 『군주론』과 마키아벨리를 읽어낼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는 강자들의 의도된 왜곡과 은폐다. 『군주론』이 강자들이 가진 권력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는 까닭에, 마키아벨리의 지혜와 통찰력을 두려워한 권력자들이 그에게 악의 교사라는 오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후 5세기가 지나도록 누명을 벗지 못한 채, 마키아벨리에 대한 재해석이 기존의 견해를 뒤엎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아하다.

『군주론』에 대한 사회과학자들의 얄팍한 독해가 정설이 되어버린 거예요. 학문은 권위자가 해석을 해버리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역사의 가장 큰 매력, 혹은 학문의 사명은 그 해석에 대해서 부정하는 거예요. 누군가 그런 사람이 나와야 해요. 역사를 재해석하는 거죠. 이런 것들이 계속 나와야 역사가 발전해 가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구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약육강식 혹은 진화론적인 입장, 사회과학자들의 얄팍한 책읽기, 고전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지식, 이런 것들이 결합되면서 마키아벨리를 계속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던 거죠.”

김상근 교수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마키아벨리 개인과 그의 저서들에 대한 오해가 단순히 지나간 역사에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시카고대학의 레오 스트라우스 교수가 쓴 『마키아벨리』책은 네이콘(neo-conservatives, 미국의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신보수주의)의 모델이 됐어요. 조지 부시 밑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레오 스트라우스 교수의 제자들이거든요. 그들의 논리가 뭡니까. 미국이 세계를 재패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라크가 석유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면 그것을 타도해야 된다는 거거든요. 그게 마키아벨리의 이론이라고 말하는 건데, 내가 읽어보니까 아닌 거예요. 마키아벨리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거예요. 그래서 마키아벨리를 다시 살리자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마키아벨리즘의 다른 이름 ‘함께 살자’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은 역사가 죽어있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역사 안에서 지나간 시간의 기록은, 오늘을 비추어보는 거울이자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보는 나침반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나침반의 바늘을 잘못 읽는 것은 분명 중대한 실수다.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김상근 교수는 거울을 새롭게 닦고 나침반의 바늘을 점검하고 있다. 김 교수는 왜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한 걸까. 그가 마키아벨리의 목소리가 되어 주겠노라 자청하고 나선 것은, 어쩌면 두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놀랍도록 닮아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저는 우리 시대의 약자들을 보면서 ‘마키아벨리라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생각했어요. 그걸 이야기해 주고 싶어서 마키아벨리를 이용한 거예요. 『마키아벨리』를 쓰는 데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어요. 그동안 총선도 있었고 대선도 있었죠. 그럴 때 ‘정치가로서 마키아벨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어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마키아벨리』를 쓴 거예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너무나 내몰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약자들에 대한 조언이나 위로가 강자들이 의도적으로 하는 이야기거든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취직 못해서 힘들어하고, 등록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하면서 힘들어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시대의 약자들이 강자들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죠. 그 길 위에서 마키아벨리를 만났고, 그를 통해서 약자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거예요.”

만약 16세기의 마키아벨리가 지금의 21세기에, 이탈리아가 아닌 대한민국에 되살아온다면 『군주론』은 어떤 내용들로 채워질까. 어떤 모습의 군주와 시민을 이상적이라고 말할까. 마키아벨리를 대신해 김상근 교수로부터 대답을 들었다.

“마키아벨리가 이렇게 얘기할 거예요. 내가 두 권의 책을 썼다고. 하나는 『군주론』이고, 하나는 『로마사 논고』죠. 권력을 가진 사람은 『군주론』을 읽고 약자들은 『로마사 논고』를 읽으라고 할 거예요. 왜냐하면 예상되는 독자가 다르고, 그래서 글 쓰는 방식도 달랐거든요. 과연 마키아벨리는 우리 사회에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것이 다음 프로젝트의 주제에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은 누군가와 제가 가상의 대화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거예요. 『군주론』을 쓴 자신의 의도를 독백하는 마키아벨리의 목소리가 이어지고요. 『마키아벨리』를 통해서 일으킨 반전을 다시 뒤집어서 우리 삶 속으로 다가오도록 쓰는 게 새로운 과제에요.”

『마키아벨리』를 집필하며 김상근 교수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마키아벨리, 그의 진실에 대해 말해주겠다’는 것.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그의 오래된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달려온 긴 여정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누구인가, 김상근 교수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물었다. ‘마키아벨리안’과 ‘마키아벨리즘’은 어떻게 재정의 되어야 할까.

“콘비비오(convivio)라고 할 수 있어요. 단테의 작품 『향연』의 라틴어 제목이 콘비비오에요. 플라톤이 제자들과 모여서 토론한 ‘심포지움’을 단테가 번역한 거죠. 해석하면 ‘같이 살자’는 뜻이에요. 단테도 마키아벨리와 거의 비슷한 삶을 살았어요. 쫓겨나고 떠돌아다니면서 죽을 고생을 했어요. 그런데 그런 단테가 했던 말이 ‘함께 살자’는 거예요. 그게 잔치고 향연이라는 거죠. 단테와 같이 질곡의 삶, 추방의 삶을 살았던 마키아벨리가 진짜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 함께 살자, 강자와 약자가 함께 살자’는 거죠. 콘비비오,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즘을 대신할 단 한 가지 단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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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김상근 저 | 21세기북스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과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데 정평이 나 있는, 저자는 책에서 수백 년간 강자들에 의해 철저히 왜곡되어온 마키아벨리의 진면목과 인생철학을 복원하여 10년의 르네상스 연구를 완성했다. 그는 기존 『군주론』에 국한되어 있던 마키아벨리에 대한 편견과 한계를 뛰어넘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마키아벨리의 역사적?인문학적인 면모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또한 이탈리아를 포함해 마키아벨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럽 곳곳을 누비며 직접 확인한 마키아벨리의 행적과 그의 사상을 이 책에 고스란히 펼쳐놓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글쟁이 되라고 추천하고 싶진 않지만, 결국 내 선택은…”–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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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그 사람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아니, 글이 그 사람을 반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글은, 어떤 사람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단, 단서가 붙습니다. 글쓴이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을, 문장 안에 굴절 없이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문장 안에는 글쓴이의 어린 시절, 글쓴이의 성격, 글쓴이의 성격적 취약점 등까지 미묘하게 배어있어 독자들은 어느덧 그 사람을 상상하게 됩니다.
<채널예스>는 그런 글을 쓰고 있다고, 또는 쓰게 되리라고 여겨지는 남자 몇 명을 여러분께 소개하려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오직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 파워 트위터리안이라면 허지웅의 트윗을 한 번쯤은 관심 있게 보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을지라도 누군가의 리트윗을 통해 허지웅의 글을 읽었거나, 허지웅과 관련한 논란을 목격한 일이 있다. 최근 영화<26년> 관계자와의 트윗 공방이 있었고 이후 한 일간지 기자와 설전도 오갔다. 종편 채널 영화 프로그램에 출연해 뭇매를 맞았고 나꼼수를 비판한 트윗으로는 그들의 팬들로부터 꾸준히 공격을 받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은 허지웅에게는 무척이나 예사로운 일이다. 공방을 즐기냐고? 그저, 말을 걸어오면 할 말을 할 뿐이고 속내를 숨기지 않을 뿐이다. 팔로워 3만여 명에 트윗 2만 여건. PC통신 시절부터 컴퓨터 관련 동호회에서 활약했던 허지웅은 질문게시판에서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달아주는 유저로 유명했다.

2004년부터 10년간 꾸준하게 블로그(http://ozzyz.egloos.com)를 운영하고 있고, 매일 수십 개의 트윗을 자신의 트위터(@ozzyzzz)에 올리고 있는 그를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상태가 좋지 않다며, 정신을 차려야겠다며 담배를 한 대 태우고 들어온 허지웅. 초췌해서 죄송하다고 자꾸 구시렁거렸지만,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견결한 모습이었다. 껄렁한 표정을 지으며 투박한 말투로 “나는 성격이 모났다”고 말했지만, 단단한 소신이 배어 있었다. 지금은 영화, 사회를 주제로 비평서를 쓰고 있는데 집필 막바지 단계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세 네 번, 마감을 치르는 날이면 늘 열패감과 조바심에 휩싸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내가 만난 최고의 편집장, <필름 2.0> 이지훈

<주간경향>, <한겨레21> 등 고정적으로 쓰고 있는 칼럼 8개, 가끔 영화제작사의 부탁으로 GV행사에 나가기도 한다. <오마이뉴스> 사회부 인턴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은 <필름2.0>, <프리미어>, 기자를 거쳐 현재 ‘영화평론가’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보통의 일상은 대개 술을 마시거나 글을 쓰거나 누군가와 싸우고, 돈이 생기면 피규어를 사는 취미를 갖고 있다. 2008년에는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 2009년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고, 서른이 되던 2009년에 『대한민국 표류기』를 펴내 대한민국 20대의 고단한 삶을 이야기했다. 이유는 20대들이 너무 얌전하게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게 답답해서! 어찌하다 보니, 아니 어쩌면 필연적으로 프리랜서의 삶을 3년째 살고 있는 허지웅은 “직장을 나와서 일하는 것, 사실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오마이뉴스> 사회부 시절은 어릴 때였고 <필름 2.0>이 처음 직장이라고 할 수 있죠. <필름 2.0>에서 이지훈 편집장님을 만났는데 내 생애 가장 완벽한 편집장이 아니었나 싶어요. 초반에 너무 좋은 편집장을 만나서 그런지 그 후에는 ‘편집장들이 나랑 안 맞나’라는 생각을 했죠. 편집장은 ‘장’으로서의 동물적 감각이 있어야 하는 거 같아요. 능력, 인성 이런 거 다 떠나서 자기 밑에 있는 기자들이 취재하고 글 쓰고 섭외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다른 걸 다 커버해주는 게 편집장의 역할인 거 같아요. 이지훈 편집장님이 커버를 참 잘해주셨죠. 어느 날 갑자기, 한 주의 기획을 통으로 다 바꾸는 일도 있었는데, 이게 자신감이 없으면 못 하거든요. 자신감 있고 능력이 있는 분이었으니 가능했던 거죠.”

고 이지훈 편집장은 대학생 시절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해 28살이 되던 해 월간지 를 창간하고 이후 <필름 2.0> 창간멤버가 되어 편집장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함께한 영화기자였다. 뇌종양으로 2011년 아쉽게도 세상을 떠났지만 그를 추모하는 선후배들은 생전에 이지훈이 쓴 글을 모아 유고집 『내가 쓴 것』, 『해피-엔드』를 펴내기도 했다. 허지웅은 “한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니고 술도 너무 많이 마셨지만, 천재적인 면이 많았던 선배다. 딸을 엄청 사랑하셔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좋은 편집장을 경험하긴 했지만 제가 좋은 편집장이 될 깜냥은 없는 거 같아요. 저에겐 그런 능력이 없어요. 리더로서 자질이 있는 사람을 칭찬하는 입장이지,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타입도 아닐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주변에 잡지 중독자들이 많지만, 전 잡지에 대한 애정이 많이 식었어요. 어디를 가서나 ‘생활형’ 글쟁이라는 걸 어필해야 하는 게 피곤하지만 프리랜서인 지금이 마음은 편해요. 조직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글쟁이로 사는 건 분명 녹록지 않은 일이에요. 말리고 싶은 일이죠(웃음).”


똥종이에 그림 그리던 어린 시절

어릴 때부터 꿈은 작가였다. 학교에 다니시는 아버지가 갱지를 가져다 주시면, 한 장 한 장에 그림을 그리고 낙서를 하는 게 취미였다. <터미네이터 2>가 나왔을 무렵에는 기체 터미네이터가 나오는 허지웅 작 <터미네이터 3>를 구상하기도 했고, 제본을 해서 책으로 만들어 어머니한테 조근조근 읽어 드리기도 했다.

“똥종이라고 많이 불렀잖아요. 그 종이에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게 저만의 오락거리였어요. 언젠가 할머니께서 ‘너 커서 뭐 될래?’라고 물으셨는데, 제가 ‘작가’라고 대답하니까 한 숨을 길게 쉬시더니 ‘대통령은 되기 싫으니?’라고 하셨어요(웃음). 커서 꼭 뭐가 돼야지 라는 생각은 안 한 거 같아요. 막연하게 작가 아니면 컴퓨터에 관한 일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고등학생 때 『윈도우98 길라잡이』 공저로도 참여했던 허지웅. 군 제대 후에는 용산 전자상가에서 꽤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박스 나르는 일만 6개월을 했고 컴퓨터 조립하는 일에 취미를 붙였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건 순전히 IMF때문이었다. “평소 가깝지도 않은 아버지가 꼭 경영학과에 가야 한다”는 말에 덜컥 경영학과에 들어갔고, SWOT 분석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돌파하는 인간형, 매력적이다

평범한 20대를 살았다고 말하는 허지웅은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고 40대를 기다린다. 나이를 먹는 일이 고단하기는커녕, 어른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고 말한다. 30대를 마주하는 첫 해에 펴낸 에세이 『대한민국 표류기』는 허지웅의 대표작이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의 『영화, 감독을 말하다』에 서평을 쓰게 된 일을 계기로 출판사와 인연이 닿아 세상에 나오게 된 책이다.

“필요 이상으로 나를 너무 드러내서 쓴 책이었어요. 그 때는 내가 경험한 일이나 일상, 사생활을 완전히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솔직하다’라는 말이 듣기는 좋은 말인데, 필요 이상이 될 때는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떤 글을 후회되기도 해요. 가끔은 그 책을 아예 없애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고…. 대한민국 20대들이 너무 자기 이야기를 못하고 안 하고 있다는 게 안타까워서 쓴 책인데, 세대에 심취했던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세대론 자체에 흥미가 없고 나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에요. 세대 담론이 우리 사회의 불필요한 논쟁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확히 말하자면 세대를 팔아 멘토질을 가장해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악용되고 있다는 건데, 되려 자조감만 부풀리고 있으니 문제죠.”

허지웅은 20대를 주제로 한 대학교의 강연을 갔다가, 정작 청중석에 앉아있는 대학생들은 88만원 세대와는 거리가 먼, 엘리트 코스가 이미 준비 된 중산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질문을 받다 보니, 그들에겐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다가 내려온 것이다. 허지웅은 “당시에는 욕을 먹더라도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계급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단순히 대중문화 이야기로 끝나서 아쉬웠다. 모든 운동은 자기 필요에 의해 참여해야 생명력이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새로운 플랫폼이 생기면 ‘이것이 세상을 바꿀 거야’라는 환상을 갖는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하지 매체, 도구에 대한 환상은 옳지 않아요. 제가 트위터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룰 같은 건 없어요. 룰이 없기 때문에 하는 거 같아요. 가끔 누가 자의대로 설정한 룰을 예의랍시고 강요할 때가 있는데 피곤할 따름이죠.”

한국 언론은 대한민국에 직업 기자들만 있고 정의로운 기자들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허지웅, 반기를 든다. 그가 보는 대한민국 기자들은 너무나 정의롭지만 직업 마인드가 없다.

“진영의 윤리가 제공하는 ‘정해진 해답’을 근거에 두고 판단하는 정의로운 기자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직업적 기자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판단과 행동의 뿌리는 다를 수 있지만, 최소한 기자라면 실체적 진실을 정해놓고 스스로를 판관으로, 기사를 재판으로, 지면을 법원으로 여기는 혈기 대신에 사실관계와 그 사실관계가 입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더불어 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절대악을 설정해두지 않고)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화평론가 허지웅이 보는 멋있는 인간은 ‘윤리나 정치적 올바름으로 스스로를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돌파하는 인간형’. 영화로 따지자면 <피와 뼈>의 김준평 같은 무시무시한 인간이 나약하고 모순적인 인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결국은 글쟁이

많은 누리꾼이 허지웅의 트위터,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두고 비판을 하고 댓글을 단다. 무작정 일반화해 해석한 댓글을 맞닥뜨릴 때, 허지웅은 ‘인터넷시대 이전의 글쟁이들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반면 허지웅의 직설적인 화법, 뚜렷한 주관, 신랄한 문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는 “3,000자 이하의 칼럼일 때는 대강의 구조를 종이에 쓰고 난 후, 글을 써내려 간다. 그 분량 안에서는 서사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을 쓴 뒤 소리 내서 꼭 읽어 보는 습관이 있다”고 말했다.

“고종석과 김훈, 박민규를 좋아해요. 한글 문자를 모아 구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장을 쓰는 문필가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쓰는 좋은 문장의 형태는 서로 매우 다르고,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닮은 점을 찾기 어려워요. 하지만 오직 한글 문장만이 가질 수 있는 호흡과 간결함의 아름다움, 동시에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서사의 파격을 보여주기 때문에 기간을 두고 종종 반복해서 읽어보는 편이에요.”

최근 허지웅이 흥미롭게 읽은 책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와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그는 『노인의 전쟁』은 로버트 A. 하인라인 소설의 약점, 혹은 오해 받는 지점들을 훌륭히 넘어서면서도 그 만큼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최고의 이야기다. 『모래의 여자』에서 ‘희망이란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기는 해도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1월 24일에 개봉한 <더 헌트>라는 영화를 봤는데 정말 좋은 작품이에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처리하는 절차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양 행동하면서 가능한 재빠르게 판단해 단죄하고 눈 앞에서 서둘러 치워버리려는 경향이 있잖아요. <더 헌트>는 주관의 정의에 심취한 공동체의 폭력과, 그러한 공동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개인의 나약함을 효과적으로 다룬 작품인데, 꼭 보세요.”

기자로 영화평론가로 살아가고 있는 허지웅에게 직업의 선택이 주어진다면, 다른 직업을 경험해보겠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결국 글 쓰는 일을 할 거 같다.”저자 소개란에 하나의 타이틀을 보탠다면? ‘소설가’. 결국 그도 창작을 하고 싶은 글쟁이였다. 과거 허지웅은 소설 <개포동 김갑수 씨의 사정>을 한 대학 주간지에 연재한 적이 있다. 신문사 오너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연재가 중단됐지만. 허지웅의 완결된 신작 소설이 기다려지는 건 비단 필자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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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표류기허지웅 저 | 수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저자가 대한민국에서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 ‘버텨낸’ 기록이다. 대한민국에서 20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 보통 사람으로서 삶을 이끌어나간다는 게 하루하루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주며,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를 격려하고 응원한다. 또한 우리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라는 부표(浮標)를 돌아보며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뜨겁고 격렬하게 발언하기도 하며, 저자의 밥벌이이자 주요한 글쓰기의 한 분야로서 영화에 대해 쓴 글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고종석 “『해피 패밀리』는 내 막내자식이고, 그래서 특히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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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이 바라보는 특별한 지점,
고종석이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지점에 대하여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을 그는 내켜하지 않겠지만, 그의 바이오그라피를 들여다보며 몇 가지 상상을 해본다. 그가 만약 『엘리아의 제야』가 동인문학상 심사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그가 만약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의 원고 청탁과 인터뷰 요청 등을 거부해 오지 않았다면?(고종석은 2000년에 지식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안티조선운동의 지지자였으며, 조선일보와 안티조선운동에 대한 그의 입장은 『서얼단상』의 <조선일보 문제 재론>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아무런 소속 없이, 아무런 소속이 없어서 고정 수입도 없이, 그나마 약간의 돈을 벌어다줄 글쓰기마저 하지 않겠다고 절필을 선언한 채, 하지만 아무런 소속이 없어서 누구의 눈치도 받지 않고, 그야말로 신나게 자신이 생각하는 옳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었을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저 자신의 이성과 합리성에만 기대서 세상을 판단하는” 그 지점을 위하여, 고종석은 어쩌면 “모 아니면 도” 중 하나를 부단히 선택해왔는지도 모른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라고 고종석이 창조한 『해피 패밀리』의 한민형이라는 인물은 말하지만, 고종석이라는 이 탁월한 언어학자이자, 언론인이자,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는 ‘글이 사람’일 수도 있는 그 지점을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다.

이 인터뷰는 아마도 새로 쓰여진 글로 만든 책으로서는 그의 마지막 책이 될 『해피 패밀리』를 출간을 계기로 이메일로 이루어졌다. “너와 내가 깊이 소통하고 연대하고 있음을 확신케 하는 상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필자의 질문에 대하여, 어쩌면 그는 “사랑”이라고 답할 수도 있을 거라, 아니 그렇게 대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낙관과 희망일지라도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이 행복에 가까워지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그의 답변은 “완전한 소통과 연대는 불가능하다.”였다. 실망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를 더 신뢰하게 된다. “완전한 소통과 연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제 둘레의 세계를 정교하게 표현”하여, “큰 왜곡 없이 담”기 위해 그는 더 애를 쓸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진실화”되기 위해, “완전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누군가의 마음을 아마 모른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이 글마저도 말이다.




“누이들에 대한 제 감정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결핍으로서의 애정일 겁니다. 다시 말해 그리움이요.”


누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제망매』, 『엘리아의 제야』에서 누이에 대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종석의 여자들』에서, 최진실의 죽음을 유난히 애도한 것도 최진실이 ‘만인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해피 패밀리』도 이야기의 주요 동력이 한민형과 누이들간의 애정이다.

누이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애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예전에 어떤 문학평론가가 제 소설들과 에세이들을 읽고 나서 고종석에게는 ‘누이콤플렉스’가 있다고 쓴 적이 있어요. 원래 그 말은 돌아가신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이 초기 고은 시인의 작품들을 두고 한 말인데, 제가 알기론 고은 시인에겐 누이가 없습니다. 그 분의 시에만 등장하는 상상 속의 누이들이죠. 제겐 실제로 누이들이 있습니다. 손아랫누이들만 셋이에요. 사산한 손윗누이가 하나 있었다고 부모님께 들었는데, 어쩌면 그 얼굴도 모르는 누이에게 그리움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손아랫누이들과도 어려서부터 정이 도타웠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친가쪽으로나 외가쪽으로나 사촌누이들도 많아요. 한 번 헤아려볼 게요. 음, 사촌누이가 열일곱 사람이나 되는군요. 지금이야 서로 왕래가 별로 없지만, 어려선 자주 어울렸지요. 말하자면 저는 누이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셈입니다. 그이들 모두와 사이가 좋기도 했고요. 고백하기 쑥스럽지만, 사촌누이들 가운덴 어려서 제가 애틋한 감정을 가졌던 이도 있어요. 물론 그 누이들은 이제 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지요. 어려서 누이들과 나눴던 좋은 추억이 세상의 모든 누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확산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제 소설 속 누이들 가운데 제 실제 누이들에게서 모델을 그대로 취한 캐릭터는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그 누이들의 어떤 부분이 어떤 캐릭터들에게 슬그머니 흘러들어갔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니까, 제게 그렇게 누이가 많지만, 소설 속의 누이들은 세상에 없는 누이들입니다. 결국 고은 시인이 시 속에서 그린 누이들과 마찬가지죠. 그 누이들에 대한 제 감정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결핍으로서의 애정일 겁니다. 다시 말해 그리움이요. 낭만주의의 연료가 되는 그리움 말입니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러니까 제 소설 속의 누이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누이들이거나, 먼 과거 속에서 희미한 잔상만을 드러내고 있는 누이들이죠.

자살이라는 죽음의 특별한 방식 때문에 내가 얼이 빠진 것일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신문지면을 탔던 유명인들의 자살을 나는 덤덤히 스쳐 넘겼으니까. 그러면 최진실은 내게 다른 자살자들과 어떻게 달랐을까? 곰곰 생각 끝에 나는 그 다름을 찾아냈다. 최진실은, 다른 자살자들과 달리, 내 가족이었다. 내 안쓰러운 누이였다. 그녀는 ‘만인의 연인’이었다기보다 ‘만인의 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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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우리 푸른 별의 주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은, 동물은, 식물은 원래 하나였고, 서로 이어져 있다,라는 입장 또는 자세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작가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

저를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었죠. 한때 저는 대단한 휴머니스트였어요. 뭐, 진짜로 대단한 휴머니스트라기보다 휴머니스트 코스프레를 했다고나 할까요? 이를테면 제3세계에서 노예노동을 하고 굶어죽고 총맞아 죽는 어린이들에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동네의 길고양이들이나 반려동물들에게 정을 주는 사람들을 경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내가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날아갈 형편이 어차피 안 되는 이상, 골목길에서 먹이를 찾아헤매는 고양이들한테, 또 제 집 근처 양재천변의 잡초들한테 정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나한테 이런 관점을 가르쳐준 이는 가까운 친구인 시인 황인숙인데, 그 친구가 참 고맙더군요. 저는 이제 지구생태계에서 인류가 특별한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 이렇게까지 말하면 과장이겠죠. 인류가 특별한 종이기는 하죠. 지배적 종이니까요. 그러나 인류가 우리 푸른 별의 주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지구 전체의 역사에 견주면, 인류의 탄생과 멸종은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할 겁니다. 어떤 천재지변이나 마지막 대(大)전쟁이 일어나 혹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태양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지구에는 생명체들이 남겠죠. 그 생명체들은 크게 보면 인류의 식구들이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먼 과거의 어떤 단백질덩어리로부터 우리 인류와 함께 진화해 왔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제 인류의 멸종이라는 걸 그리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아닌 생명체들도 우리 인류의 식구니까요. 그 식구들이 다 멸종해 지구가 죽은 별이 되는 날도 언젠간 오겠죠. 그렇지만 그게 무슨 큰 일이겠어요? 그 까마득한 옛날 이 행성에 생명체라는 게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엄청난 기적인데요.

“응, 따지고 보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 식구지.”
“그게 무슨 말이야?”
“위로 위로 올라가보면 조상이 똑같을 테니까.”
“단군 할아버지 말하는 거야?”
“단군 할아버지도 그렇고, 또 더 위로 위로 올라가면 세상 사람들 모두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있을 거 아냐?”
‘응,그렇구나. 사람들은 모두 식구구나. 그럼 저기 경비 할아버지도 식구고 만둣집 아줌마도 식구고 응, 응, 다 식구네?“
“그렇지.”
“유치원 선생님도 식구고 은미도 식구고 봄이도 율이도 식구네?”
나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사람들만이 아니란다. 원숭이, 고양이, 개, 사자, 참새, 꽁치, 소나무, 대나무, 장미꽃 이런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식구란다.”




나는 쾌락주의자

한민형에 대해 동생 민주가 ”허무의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허무주의자”라고 묘사하는 문장이 있다. ‘허무의 제스처’는 무엇이며, ‘진짜 허무주의자’는 어떤 사람인가? 작가는 스스로를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하는가.

허무의 제스처는 허무주의자인 척하는 거고 허무주의자는 허무주의자인 거지 달리 뭐가 있겠어요? 제게 허무주의적 기질이 꽤 있기는 하지만 허무주의자는 아닙니다. 만약에 제가 허무주의자라면, 현실정치에 대해서도 교우관계나 가족에 대해서도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겠죠. 저는 그렇진 않거든요. 그런 한편, 그런 세속적 관심사가 다 허망해보이는 순간들이 자주 있긴 해요. 그럴 땐 허무주의자에 가까워지죠. 허무주의자는 쾌락주의자를 겸하기 쉬운데, 제가 쾌락주의자거든요. 술이든 담배든 맛난 음식이든 예술작품이든 책이든 놀이이든 바다풍경이든 저녁노을이든, 그것들이 주는 쾌락의 유혹에 잘 저항하지 못합니다.


“완전한 소통과 연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구성원들의 독백으로 소설이 구성되어 있다. 누가 누군가를 오해하고 있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못미치기도 하고, 원망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 그것이 우리들이 사는 모습일 것이다. 본인의 생각과 마음을 타인에게 온전하게 전달하는 것도, 또 타인이 나에게 표현한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내가 깊이 소통하고 연대하고 있음을 확신케 하는 상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완전한 소통과 연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소통과 연대가 불가능하기때문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들(individuals)이라고, 그러니까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라고 부르는 거죠.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완결된 독립체라는 뜻이고, 완결된 독립체가 또다른 완결된 독립체들과 온전히 합체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완전한 소통과 연대를 향해 끊임없이 접근할 수는 있겠죠. ‘리미트, x, 화살표, 완전, x’인 상태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연대의 완전함이 불가능한 건 소위 이기적 유전자 탓이기도 하겠지만, 언어의 불완전성 탓이기도 합니다. 우리 언어는, 자연언어든 손짓 발짓 표정 같은 몸언어(body language)든, 불연속적이죠. 반면에 자신과 타인들, 곧 인간을 포함하는 객관세계는 연속적이죠. 그러니 불연속적인 언어로 연속적인 세계를 고스란히 재현해낼 수는 애초부터 없어요. 그렇지만 인간은 또 그 언어를 되도록 정교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죠. 문인들도 그렇고 학자들도 그렇고 공연예술가들도 그렇고요. 돌아가신 김현 선생님을 또 인용하자면, 그분 말씀 중에 “진실이란 결국 진실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완전이라는 것도 완전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작가는 본인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문장으로, 글로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온전히 담을 수 없지요. 방금 말씀드린 언어의 불연속성, 불완전성 때문에요. 그렇지만 되도록 제 둘레의 세계를 정교하게 표현하려고 애는 씁니다. 그러다보면 고스란히 담을 수는 없어도, 큰 왜곡 없이 담을 수는 있지요. 이건 사실 쓰는 사람 문제만이 아니라 읽는 사람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언어의 세계 재현능력이 불충분하니까, 쓰는 사람만이 아니라 읽는 사람도 어떤 텍스트를 대할 때 꼼꼼하고 섬세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오독을 피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닌 텍스트가 세상에 과연 많은가는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합니다.


“모든 글은 위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라고 한민형은 말한다. 글이 사람을 100% 반영하지 못한다, 라는 말은 필자나 저자에게 하고 싶은 말인가, 아니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인가? 예를 들어 노동자나 소수자를 옹호하는 글을 자주 발표하며 진보주의자로 불리는 사람이 있는데, 정작 자신은 돈과 권력을 지닌 사회의 기득권층이고, 가끔 청탁을 받기도 하며 자기 아이들은 조기 유학을 보내거나 특목고를 보내는 모습. 이 경우에 작가는, 그 사람은 노동자나 소수자를 옹호하는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글이 사람을 반영하진 않으니, 독자들은 이 부분을 염두하며 글(메시지)만 취하라고 얘기하는 것인가?

그건 일차적으로 한민형이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죠. 그건 또 한민형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제가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저 자신이 문필가들을 포함한 세상사람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질문자께서는 방금 어떤 사람의 글과 행위의 괴리만을 말씀하셨는데, 더 근원적 괴리는 글과 생각 사이에 있어요. 우리는 머리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지요. 누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 누구를 파멸시키고 싶다는 생각, 세상이 금지하고 있는 연애에 빠져서 누구와 자고 싶다는 생각, 무언가를 훔치고 싶다는 생각. 그러니까 사악하고 음란한 생각을 누구나 자주 할 겁니다. 이건 인간이 상상력을 지닌 동물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 뇌는 온갖 깨끗하고 고귀한 생각들만큼이나 온갖 더럽고 비천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더럽고 비천한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건 고사하고 글로 쓰지도 못해요. 사실은 입밖에 내지도 못하죠. 그것들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이성적 판단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글은 위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을 수는 없지요. 어쨌든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신이 판단한 원칙들을 내세우며 남들과 어설프게나마 소통을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자기 본능이나 생각이나 행동과 유리된 글을 절대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글이라는 것의 그런 자기미화적 성격을 고려해서 독자들이 그 메시지만 취하라는 겁니다.

책 만드는 게 일이다보니, 저자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그러면서 글과 사람의 차이에 대해 자주 놀란다. 아니 처음에 자주 놀랐다. 이젠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어, 으레 그러려니 한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서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거의 예외 없이 실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제 고작 서른을 조금 넘겼을 뿐이지만, 사람이라는 종(種)에 대한 신뢰가 점점 옅어진다. 물론 나 자신에 대한 신뢰 역시 마찬가지다.





“이유와 목적이라? 그런 건 없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금기라고 여겨지는 것 중 하나를 주요 소재로 다루었다. 이 소재를 다루고자 한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제가 소설이라는 데 발을 담근 얼마 뒤부터 꼭 써보고 싶은 게 둘 있었어요. 하나는 로베르트 무질 식의 극단적 관념소설이에요. 무질의 소설만큼은 아니지만, 세 해 전에 낸 『독고준』이 그런 관념소설이죠. 서사보다는 관념의 줄타기에 더 관심을 보이는 소설. 거기엔 저 자신의 아주 위태롭고 고립된 정치적 입장이 반영돼 있어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저 자신의 이성과 합리성에만 기대서 세상을 판단하는 캐릭터의 머리속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선 그런 사람들을 회색인이라고, 다소 부정적 뉘앙스를 담아 부르죠. 저는 스스로 회색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회색인의 초상이 『독고준』입니다. 사실 그 소설 자체가 최인훈 선생님의 『회색인』과 이어지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소위 문명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사랑 얘기를, 그러니까 금지된 사랑 얘기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게 『해피 패밀리』죠. 그러니까 저는 이제 더 이상 소설쓰기에 대해 욕심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얘긴 다 했거든요. 이유와 목적이라? 그런 건 없어요.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저 자신도 알 수 없는 거구요. 그냥 제 내면의 욕망이었겠죠.

또 이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한 것인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아무튼 이건 단편으론 쓰기 부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장편거리로 남겨둔 겁니다. 단편으로 썼다면, 이런 추리소설 형식을 취하긴 어려웠겠죠. 사실 『해피 패밀리』에는 다분히 추리소설적 성격이 있잖아요.


“어쩌면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 여자의 모습”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다루기가 어려웠던 인물이 누구인가? 왜 어려웠는가?

한민희라는 인물이에요. 이 사람에게 일종의 이중인격, 또는 다중인격을 부여해야만 했으니까요. 소설 속 다른 캐릭터들은 죄다 제 나름대로 일관성을 띠고 있는데, 한민희는 그렇지 않죠. 퇴폐성과 순정을 함께 지닌 여자죠. 사실 제가 일부러 그런 성격을 한민희에게 부여하기도 했고요. 어쩌면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 여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도 이 소설의 인물들 가운데 한민희에게 가장 정이 갑니다. 소설 속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민희는 여러 형태의 위험한, 그러니까 세상에서 위험하다고 여기는 감정들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현실 속의 사람들은 대개 한민희처럼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성격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질 않아요. 그러니까 한민희는 가장 부자연스러우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현실성의 현실성이라고 말해도 되겠죠.

유럽 신화의 요정 같은 아이. 탐미 속에 윤리를 감추고, 윤리 속에 탐미를 숨기던 아이. 천사의 육체에, 사시미의 와사비처럼 악마의 쏘는 맛을 살짝 묻히고 다녔던 아이. 그 쏘는 맛 때문에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

“눈물은, 정말 불행한 사람들과 숨탄것들을 위해 아껴둡시다.”

트위터 등을 통해 작가는 자기 연민이 없음을 종종 밝히곤 한다. 역으로 자기 연민이 많은 사람을 싫어하고 경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자기 연민이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흉한 연민이 자기연민이죠. 자기연민은 자존감의 대척에 있는, 아주 비루한 자기애이기 때문이에요. 연민이 향할 자리는 자기 바깥의 인간 세상이나 온갖 숨탄것들이지 자기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엔 자기연민을 지닌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그런 자기연민은 대개 팔자타령으로 드러나는데, 설령 팔자라는 게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그걸 바꿀 수 없다면, 자기연민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팔자라는 건 ‘바꿀 수 없다’는 걸 전제하는 건데요. 이와 비슷하게, 저는 자기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도 흉하다고 생각합니다. 눈물은 남들을 위해, 정말 불행한 사람들과 숨탄것들을 위해 아껴둡시다. 물론 남들을 위한 눈물이라는 것도 그 남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흘리는 거겠지요. 우리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아이들에게 투사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 동일시의 대상이 포악한 권력자라면, 그러니까 사실상 흉악범죄자라고 할 수 있는 권력자라면, 아주 보기 흉할 것 같아요. 김일성을 위한 눈물, 히로히토를 위한 눈물, 박정희를 위한 눈물 같은 거요. 우리가 과거에 봐온 눈물들이죠. 그 사람들이 죽었을 때 말입니다.

민형 형에게는 세상에 대한 연민이 있다. 꼭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꼭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숨탄것들에 대해서 말이다....세상과 숨탄것들에 대한 그의 연민이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에게 자기 연민이 거의 없는 듯하다는 점이다. 때때로 그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 같다. 그의 연민은 오로지 그의 몸 바깥으로만 향한다.

“어떤 상처는 저를 자살 직전으로까지 몰고 가기도 했지요.”

한진규는 사법시험에도, 행정고시에도 합격하지 못해 “내 인생이 항상 뭔가 모자라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아마, 이런 식의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아니, 아마 대부분이지 않을까? 작가는 어떠한가.

자격지심이라는 말은 정확한 것 같지 않군요. 제 경우, 삶이 그리 평탄치는 못했던 터라 이런저런 상처를 많이 입었어요. 고등학교에서 떨려나 어린 낭인 생활을 하기도 했고, 대학엘 아주 어렵사리 들어가기도 했고, 이런저런 병치레를 하기도 했고, 집안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기도 하고요. 또 좀 끔찍하고 대단히 사적이어서 이 자리에서 밝힐 순 없지만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준 경험들을 적잖이 했습니다. 어떤 상처는 저를 자살 직전으로까지 몰고 가기도 했지요. 그런 상처들 중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도 있고요. 그렇지만 바로 그 상처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기도 합니다. 제가 아무런 상처 없는 삶을 살아왔다면,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그 상처 덕분에 제가 불행한 사람들의, 그러니까 상처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아, 그런 상처들의 근원에는 또 제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사실도 있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기는 귀찮고요, 그냥 간단히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만약에 전라도 사람이 아니었다면, 세상의 약한 것들에 대해 연민을, 연대감을, 사랑을, 존중심을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그 점에서 저는 제가 전라도 사람인 걸 다행스럽게,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민형을 저 자신과 포개지는 말아주세요.”

서현주의 밝음, 튼튼한 낙관주의, 불가사의한 생기가 한민형을 서현주에게로 이끌었다. 실제로 작가는 밝고, 낙관적인 사람에게 끌리는가?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민형을 저 자신과 포개지는 말아주세요. 제 자신의 일부분이 그 캐릭터에 투사돼 있기는 하겠지만, 저는 그런 무책임한 허무주의자는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한민형이 본인에게 한 질문이다.
 작가가 실제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네, 있습니다. 다섯손가락을 다 접을 수 있겠는데요.


작가의 마지막 소설, 아니 마지막 책이 될 것이라고 한단다. 정말 그럴까? 만약 작가가 글이라는 것을 다시 쓰게 된다면 어떤 경우일까?

다시 책을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해서 답변하는 건 내키지 않아요.


“『해피 패밀리』는 제 막내자식이고 그래서 특히 정겹습니다.”

작가에게 『해피 패밀리』는 어떤 책인가?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따지고 보면 그리 길지도 않은 글쟁이 생활을 마감하는 책이죠. 책을 정신의 자식이라 말하는 상투적 표현을 빌려온다면, 『해피 패밀리』는 제 막내자식이고 그래서 특히 정겹습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나마 일종의 과격한 일탈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잊을 수 없는 책이 될 겁니다.


『감염된 언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 독창적인 언어관 때문

마지막으로 작가가 꼽은 작가의 대표작(3권에서 5권 정도)과 그 책의 소개를 부탁한다.

글쎄, 뭔가를 선택한다는 건 다른 것들을 배제한다는 뜻이죠. 세 권을 뽑으라면, 거기 선택되지 못한 책들이 서운해할 것 같군요. 그래도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씀 드릴게요. 첫째, 『감염된 언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제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 그 책이 드러내는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언어관 때문입니다. 다른 언어학자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어요. 주류 언어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견해들이 많이 개진돼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군요. 이 책은 영어와 태국어로 번역돼 있어요. 둘째, 『모국어의 속살』이라는 책이 있어요. 한국 현대 시인들의 시집 쉰 권을 리뷰한 책인데, 이 책에 묶인 텍스트들 역시 시인들에 대한 대다수 문학비평가들의 합의된 평가를 많이 거스르고 있습니다. 예컨대 저는 정지용 시인이나 고은 시인이 너무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머지 한 자리는 저의 다른 책들 전부를 위해 남겨둡시다. 그 책들 모두가 후보작이 되도록. 그래야 그 책들이 서운함을 덜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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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패밀리고종석 저 | 문학동네
고종석의 신작 소설, 세 번째 장편소설 『해피 패밀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친근하고 가깝다 여겨온 ‘가족’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날카롭고 서늘하게 파헤친다. 소설은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한민형의 목소리부터 시작해, 아들이 일하는 출판사의 사장인 아버지 한진규, 고등학교 역사교사이자 어머니인 민경화, 한민형의 처이자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서현주, 한민형의 동생인 한영미와 한민주, 대학 후배인 이정석, 장모인 강희숙, 딸 한지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한민형의 누나 한민희까지 모두 화자로 나서 각자의 사연과 감정 들을 토로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지구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소멸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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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록의 대모’, ‘여성 로커의 전설’로 불리지만, 로커로 한정짓기에 패티 스미스의 예술 세계는 더 크고 방대하다. 시인, 미술가, 사진가로 표현 영역을 아우르며 예술가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현재의 그를 보자면, ‘여성 아티스트들의 대모’로 명칭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다. 실제로 음악가, 연기자, 작가 등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젊은 아티스트들이 패티 스미스를 롤 모델로 꼽고 있다. 그는 ‘예술가의 예술가’다.

패티 스미스가 단독 공연차 지난 2월1일 내한했다. 2009년 지산 록페스티벌 무대에 선 후 3년 반 만의 방문이다. 세계적인 명성과 음악사에 끼친 역할에 비해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은 편임에도, 지난해에는 서점과 음반 매장 한 편에 패티 스미스의 사진이 조용히 걸려 눈길을 끌었다. 12집인 < Banga >앨범과 2010년에 출간했던 회고록 『저스트 키즈(Just kids)』의 번역본이 한국에도 나온 까닭이다. 그러한 문화적 접촉이 공연으로까지 이어졌다. 2일 공연을 몇 시간여 앞두고 강남 한 호텔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인터뷰 내내 집중했고, 의욕적으로 대화를 즐겼다. 평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때때로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특유의 시선을 내비치며 다정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따금씩 지어보이는 소녀 같은 수줍은 미소는 무대 위에서의 강렬함과 대비되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할 때는 마치 노래 속의 시를 읊는 음성이 겹치기도 했다. 음악과 글을 통해 느껴 온 패티 스미스의 맑은 파워풀함이 실제로도 고스란했다.


반갑습니다. 우선 로버트 고 사진예술가 메이플소프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 『저스트 키즈(Just kids)』에 대해 묻고 싶은데요, 이 책은 2010년 아마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고 내셔널 북 어워드에서도 상을 받았습니다.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습니까?

아뇨,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한 책에는 골드 마크가 붙어 있는데요, 어릴 적 서점에서 일할 때 그 마크가 찍힌 책을 볼 때마다 ‘우와~’ 했었어요. 제가 그런 걸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죠. 정말 영광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이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원하는 방식대로 쓰자는 거였어요. 그가 죽기 전, 제게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래서 책을 쓰게 된 첫 번째 동기가 로버트라면, 두 번째는 그의 예술 세계를 사람들에게 소통할 수 있게 소개하는 기능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전 이 책이 몇몇 사람들만 좋아할 컬트 북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될 줄은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한국어판까지 나왔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내 인생의 아티스트!”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1989년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책이 2010년에 나온 거면 좀 늦은 감이 듭니다. 그를 회고하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요?

죽은 직후에 친구의 죽음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쓴다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Coral Sea」라는 시집만을 냈죠. 이후에 제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심장 질환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 다음엔 남편이 많이 아파서 돌봐야 했고, 그가 죽은 후에는 남동생도 심장이 안 좋아서 또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고… 몇 년 사이 로버트, 내 남편, 피아니스트, 남동생을 다 잃었죠. 제게 남은 건 두 아이와 얼마 있지 않은 돈이 전부였어요. 아이 둘을 키워야 하니 여유가 전혀 없었죠. 그런 것들을 견뎌내야 하는 과정에서 책을 쓰기는 힘들었어요.
죽음을 이겨내고 강해져야 책을 쓸 수 있는데, 당시 제 마음이 충분히 단단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시간을 보냈죠. 아이들 데리고 뉴욕으로 이사를 가고 제 인생에 많은 변화를 줬어요. 결국 제 중심(center)을 찾았고, 그리고서야 집필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부담은 있었죠. 로버트가 저한테 “패티~ 패티~ 우리 책은 어딨어?”라고 하는 게 들렸거든요.(웃음)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기다린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책이 43개 언어들로 번역돼 나오고, 백만 부 이상 팔렸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로버트도 지금쯤 행복해하고 있지 않을까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Ok~ Ok~ Ok~”하면서.(웃음)



이 책은 우리에게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다시 한 번 알게 했습니다. 메이플소프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요?

만약 이 질문을 로버트에게 한다면 그는 우리의 관계를 ‘마법(magic)’이라고 했을 것 같아요. 그는 우리를 두고 자주 ‘마법’이라 말하곤 했었으니까요. 내게 로버트는 ‘내 삶의 예술가(artist of my life)’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러브 오브 마이 블라블라’식의 표현을 많이 하는데 전 ‘아티스트 오브 마이 라이프’예요.


“적게 가져서 더 행복했다!”

1960, 1970년대 뉴욕의 첼시호텔에 살던 시절은 당신이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을 좀 소개해 줄 수 있을까요?

그 당시 내 친구들은 그 누구도 돈이 없었어요. 신용카드도 없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사야 할 때는 외상도 하고 그랬죠. 물질적 소유가 지금처럼 중요하지 않은 때였어요. 당시의 로버트와 내겐 핸드폰, 텔레비전, 컴퓨터, 팩스 같은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우리에게 있는 거라곤 작은 레코드플레이어, 몇 권의 아트 북, 미술 도구들 정도였죠.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오직 창조적인 작업들뿐이었어요. 어떤 옷을 사 입고 어떤 새로운 기계를 갖고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가장 중요한 건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어떻게 나를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때의 우리가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적게 가져서 더 행복했지요.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일을 통해 만들어진 내 창조물들이지, 고급 아파트와 멋진 차, 고성능 컴퓨터 등등 내가 뭘 갖고 있느냐가 아니었어요. 소유가 중요해진 지금의 문화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단지 제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자면, 그때는 물질적인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로버트는 나의 성공을 정말 대놓고 기뻐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 우리 서로를 위해서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멋지게 뿜어내더니 내게만 쓰는 말투로, 어정쩡하게 혼내는 그런 말투로, 질투라고는 조금도 없는 감탄을 담아, 우리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느릿느릿 말했다. “패티, 네가 먼저 유명해졌구나.” - 『저스트 키즈 Just Kids』

패티가 로버트를 얘기할 때마다 예술에 모든 삶을 집중하며 자신을 끌어올렸던 책 속의 어린 두 예술가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패티 스미스는 인터뷰에서 한국어판 책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특히 표지의 사진을 언급하며 22살 때 파리에서 여동생이 찍어준 것이라며 반가워했다.) 난 이 책이 대개의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60대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책을 쓸 때 나타나는, 나르시시즘을 통해 길어 올린 주입적인 교훈과 권위가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 예술가의 과거를 훑는 필체는 특별함을 과장하거나 겸손을 가장하며 자신을 교묘하게 치켜세우는 법이 없다. 열정을 향한 확신적 몰두로 내달렸던 그날을 그저 아이들(just kids)이었다고 소개할 뿐이다. 꾸밈없는 태도는 인터뷰에서도 여전했다.

작년 < Banga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에이미 와인하우스’, 프랑스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와 ‘조니 뎁’, 작가 ‘니콜라이 고골’, ‘미하일 불가코프’,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 등 예술가나 그들의 작품에서 얻은 영감으로 태어난 곡들이 다수입니다. 앨범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저 제 방식대로 하는 거였어요.(웃음) 이번 앨범에서 뿐만 아니라 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앨범을 만들어 왔어요. < Horses >앨범에서도 짐 모리슨을 생각하며 만든 곡(「Gloria」)이 있고 「Land」는 지미 핸드릭스를 위한 곡이었죠. 저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은 뉴스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로부터 항상 영향을 받아요. < Gung ho >앨범의 주된 영감도 호치민이었어요. 「Radio bagdad」는 조지 부시가 바그다드에 폭탄을 터트린 뉴스에 영향을 받아 만들었고요. 저는 러브 송은 못 써요.(웃음) 이번 앨범에서도 「Seneca」는 손자를 위한 곡이고, 「Nine」은 조니 뎁을 생각하며 만들었죠. 제 친구였던 마리아 슈나이더를 담은 곡이 「Maria」고요.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생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지만 예술가로서의 죽음이 안타까워 「This is the girl」을 썼고요. 「Fuji-san」은 지진과 쓰나미로 재난을 겪는 일본 친구들에게 바치는 노래예요. 저는 늘 나를 움직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써요.

< Banga >앨범의 마지막곡이 닐 영의 커버곡인데요, 닐 영의 「After the gold rush」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After the gold rush」 바로 전 트랙인 「Constantine’s dream」이 대재앙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노래여서 어둡게 끝이 나요. 그런데 전 앨범이 어둡게 끝나는 걸 원하지 않았고, 마지막은 좀 밝은 느낌을 주고 싶었죠. 어떻게 갈까 고민하던 차에 카페에 앉아 있는데 「After the gold rush」가 들리는 거예요. 들으면서 ‘아, 이 노래다’ 했어요. 그래서 결정했죠. 심플한 버전이에요. 딸이 피아노를 연주했고 아들이 기타를 쳤죠. 함께 노래를 부른 어린이들은 친구인 토니 사나한(베이스 연주자)의 조카들이에요. 아주 단순하고 순수하죠. 아이들이 세상의 희망이니까요. 이제 모든 것들을 자연에게 돌려주고, 아이들에게 돌려주자는 뜻이죠.

1978년 히트했던 「Because the night」은 브루스 스프링스턴과의 협업으로 유명한데요, 브루스 스프링스턴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브루스가 「Because the night」을 만들다가 그만두고서 완성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자기도 러브 송은 못 쓴대요.(웃음) 코러스는 완성했는데 버스(verse) 부분은 미완 상태였죠. 저는 앨범을 만들고 있었고요. 저한테 곡을 완성해 볼 의향이 있냐고 브루스가 그래요. 당시 전 프레드 스미스랑 사랑에 빠져 있었어요. 그는 디트로이트에 있고 나는 뉴욕에 있는 데다, 내가 돈이 없었기 때문에 연락을 잘 못했죠. 디트로이드에서 뉴욕으로 일주일에 단 한 번만 전화를 할 수 있었어요. 어느 날 밤 프레드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그 노래를 듣고 있었어요. 평소에도 전화가 늦으면 마음이 답답하고, ‘그가 늦어? 또 늦어?’ 그러면서 괴로워했죠. 화로 흐트러진 제 자신을 브루스 스프링스턴 노래를 들으며 거기에 담았어요. 러브스토리를 못 쓰지만 프레드를 생각하며 가사를 썼죠. 노래를 들어보면 ‘Have I doubt when I’m alone / Love is a ring, the telephone.‘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프레드가 제게 전화를 주길 기다렸기 때문에 나온 가사예요. 이 노래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시크릿이죠.(시크릿 정도가 아니라 ‘탑 시크릿’이라고 하자 크게 웃었다)




“지구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소멸되어야!”

1979년에 < Wave >앨범을 낸 뒤 1988년이 되어서야 「People have the power」가 수록된 앨범 < Dream Of Life >가 나왔습니다. 9년 동안의 공백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앨범 발표가 늦어진 건가요?

1979년에 은퇴가 아니라 은둔 생활에 들어갔어요. 사랑에 빠져 있었고, 프레드가 제게 청혼을 했었죠. 남편도 음악을 통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때문인지 FBI가 계속 남편을 감시하고 쫓아다니는 문제들이 있었죠. 남편은 조용한 삶을 원했어요. 아이 키우면서 둘 다 좀 조용히 살자는 이야기를 했었죠. 그러다가 첫째가 크고 여건이 돼서 다시 음악을 만들고 나오려 하는데 또 임신이 됐어요.(웃음) 그래서 또 미뤄졌죠. 남편은 정말 조용한 사람이지만 아주 정치적이었어요. ‘People have the power’는 프레드가 잘 쓰는 문구였어요. 그는 제게 ‘Patricia, People have the power, write the song’이라곤 했죠.(패티 스미스의 풀 네임은 Patricia Lee Smith다.) 그래서 프레드의 꿈을 담아 그의 문구를 썼어요. 「People have the power」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의 주제곡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그 노래가 불리는 걸 결코 보지 못했죠. 하지만 저는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니면서 데모나 행진을 할 때 그 곡이 사람들에게 불리는 걸 봐요. 브루스 스프링스턴, 에디 베더, 조니 뎁 등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공연이나 음반에서 이 노래를 다시 쓰고 있죠.
프레드는 지구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여기서 사람이란 개개인의 인간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로 뭉쳤을 때의 ‘연대된 인간’을 말하죠. 연대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하나가 돼야 환경문제나 핵문제에서 인류가 승리할 수 있고, ‘전 국가적 연대’가 되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구할 수 있어요. 깨끗한 물과 공기, 그리고 아이들은 국가주의로 지킬 수 없어요. 결국 지구촌 전체가 하나가 되는 방법은 국가주의의 소멸인 거죠. 그래야만 인간의 삶의 질이 상승할 수 있어요.


꾸준한 앨범 활동을 펼쳐 오며 ‘펑크 록의 대모’로 일컬어집니다. 이에 대해서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그게 웃긴데, 어렸을 때는 퀸이었어요.(웃음) 나이가 드니까 사람들이 대모라고 부르네요. 그럴 때마다 “흠~ 대모? 예전엔 여왕이었는데”(웃음) 여기서 더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펑크 록의 공룡’으로 부를지도 모르겠네요.(웃음) 저는 제 자신을 그냥 ‘worker’라고 생각해요. 시를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고, 또 나는 엄마고, 공적인 일을 하는 ‘worker’죠. 그 모든 분야에 동등한 에너지를 쏟으면서요. 창조적인 일을 할 때 모든 것 똑같이 최선을 다 해요. 그런데 좋은 주부는 아닌 거 같아요. 노력은 하는데(웃음)


『저스트 키즈 Just Kids』를 영화화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나요?

현재로선 없습니다. 모두가 하자고 하는데 내가 준비가 안 됐어요. 현재 능력 있는 프로듀서들, 하겠다는 여배우, 엄청난 돈들이 줄을 서 있는 상태예요. 제가 나중에 영화화를 한다면 각본은 직접 쓸 계획이에요.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단순(simple)하며 유니버설(universal)했으면 해요. 패티와 로버트가 꼭 미국 아이들이 아니라 한국 애들이어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현재 그 책의 영화 제작권은 당신 손에 있는 거군요.

맞아요. 지금까지 내가 만든 모든 작품의 권한을 내가 다 소유하고 있어요. 자기 작품의 권한을 다 팔아치운 아티스트들도 있는데, 나는 돈을 덜 번다하더라도 내 창조물들에 대한 권한은 누구에게도 내놓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까지 내놓은 자신의 앨범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앨범이 있다면요?

너무 어려운 문제예요. 모든 앨범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제겐 기억할 만한 이유들이 다 있어요.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녹음할 때 이루어진 다양한 즉흥연주(improvisation)의 경험들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 Horses >에서의 「Birdland」, < Radio Ethiopia >의 타이틀 곡 등은 모두 스튜디오 녹음 때 즉흥연주로 완성된 곡들이에요. < Gung ho >의 타이틀곡, < Trampin' >의 「Radio Baghdad」, 이번 앨범에 수록된 「Constantine's dream」과 같은 곡들은 러닝타임도 굉장히 길고, 스튜디오에서 즉흥연주 방식으로 녹음될 때 고도의 집중과 많은 에너지 소모를 요하는 곡들이죠. 「Constantine's dream」은 구성도 복잡하고 가사도 없어요. 전 이런 즉흥연주들을 완성한 것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모든 앨범은 완성되는 과정이 모험(adventure)이에요. < Easter >앨범 전 큰 사고를 당해 목 깁스를 한 채 5개월 이상 누워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 「Rock'n' roll nigger」를 녹음할 때 폭발적인 괴력을 발휘했던 경험은 아직도 내 마음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죠. 「Gung Ho」를 녹음하기 전에는 호치민의 삶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어요. 녹음 직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는데 호치민도 심장이 나빠 죽었어요. 스튜디오에서 그 곡을 녹음할 때 호치민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온힘을 다해 즉흥연주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 끝 부분에서 갑자기 내 마음 속에서 아버지의 심장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녹음할 때는 마음 속 매우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신비스러운 경험을 가끔 하곤 합니다.
질문에 딱 맞는 대답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매 앨범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뭔가 독특한 걸 창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제 스스로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전 솔직히 좋은 팝송을 쓰는 재주는 없어요. 내게 모두가 행복해 할 팝송을 만들 재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예요. 댄스곡도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런 곡을 만드는 재주는 없어요.





“누구도 지미 헨드릭스를 추월하지 못했다”

다른 아티스트 앨범 중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앨범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단연 지미 헨드릭스의 < Electric Ladyland >예요! 엘비스 프레슬리도 훌륭했지만(God bless Elvis!), 제겐 지미 헨드릭스예요. 그 누구도 지미 헨드릭스를 추월하진 못했어요. 공연할 때 가끔 그를 생각하며 에너지를 얻으려 해요. 구성으로 봐도 그는 < Electric Ladyland >녹음 때도 즉흥연주 방식을 많이 했었고 「1983... (A merman I should turn to be)」와 같은 긴 곡이 그 사실을 잘 입증하죠. 앨범 전체가 존 콜트레인 음악처럼 영적으로 충만하고 사악하기도 해요. 순수한 로큰롤이에요. 지미 헨드릭스의 방식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제 앨범들도 구성 면에서 그의 작품과 많이 닮아 있죠. 긴 즉흥연주와 같은 형식 말예요.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창작을 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었다. 인터뷰 내내 나는 시간의 파고에 침식되지 않은 순수한 예술가의 영혼을 대면했다. 첼시 호텔에서 미래를 꿈꾸던 시크한 소녀가 그의 안에서 여전히 영롱하게 숨 쉬고 있었다. 67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아니 나이라는 시간적 관념으로 사람의 한 부분을 이해하려는 관성적 태도가 무안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시간과 장르에 엮일 수 없는 패티 스미스라는 정체성 자체로 온전했다. 그 예술혼이 끝나지 않는 한, 아무리 세월이 그를 휩쓸고 간다 해도 세상을 향한 그의 외침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아티스트의 진정한 정의였다.

예술적 정신이 지켜지기 힘든 시대에 패티 스미스 같은 예술가는 분명 순수를 염원하는 세상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통역을 맡은 이무영씨도 ‘패티 스미스 같은 사람이 있어서 외롭지가 않다’고 말했다. 가난하게 사는 것에 대해 스스로 민망해하지 않고, 이익보다는 가치를 위해 투쟁을 마다않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안이다. 패티 스미스를 만나고 돌아오며, 그처럼 늙을 수 있다면 노인이 되는 일도 근사하리란 오래된 믿음에 확신을 더했다.

인터뷰 : 임진모, 이무영, 윤은지
통역 : 이무영
사진 : 이한수
정리 : 윤은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음악평론가를 꿈꾸신다고요? 얼른 다른 꿈을 찾으세요 - 차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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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그 사람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아니, 글이 그 사람을 반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글은, 어떤 사람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단, 단서가 붙습니다. 글쓴이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을, 문장 안에 굴절 없이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문장 안에는 글쓴이의 어린 시절, 글쓴이의 성격, 글쓴이의 성격적 취약점 등까지 미묘하게 배어있어 독자들은 어느덧 그 사람을 상상하게 됩니다.
<채널예스>는 그런 글을 쓰고 있다고, 또는 쓰게 되리라고 여겨지는 남자 몇 명을 여러분께 소개하려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오직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편집자 주

차우진.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2001년부터 비영리 음악웹진 <weiv>의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고 <씨네21>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차우진의 음악다방’ 등의 칼럼을 연재하며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음악평론가, 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로 한국대중음악상, 네이버 뮤직 이주의 발견(국내편) 선정위원 등으로도 활동했으며, 『한국의 인디레이블』, 『아이돌-H.O.T.에서 소녀시대까지, 아이돌 문화 보고서』공저를 비롯해 2011년 산문집 『청춘의 사운드』를 통해 대중음악이 청춘을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금, 언제든지 늦잠을 자도 되는 자유로운 영혼,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다.

차우진의 블로그(http://blog.naver.com/nar75)를 보고 있자면 그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평론가라는 사람이(?) 은어를 매우 자주 사용하고 맞춤법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오죽하면 ‘ㅆ’받침이 제대로 쓰여진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단순한 오타로 여겨지지는 않는데, 그렇다면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는 걸까? ‘거참, 알 수 없는 캐릭터’라는 생각을 하고 차우진을 홍대 카페에서 만났다. 푸근한 인상에 도무지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가 ‘진짜 평론가 맞아?’라는 의심을 갖게 했다. 다짜고짜 왜 맞춤법을 제대로 쓰지 않냐고 물었다. 대답은 “Shift 키를 누르는 게 귀찮아서요. 제가 독수리 타자거든요(웃음).”보태는 말은 ‘철자법에 강박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변이다. 간혹 ‘글 쓰는 사람인 것 같은데 맞춤법 좀 제대로 쓰라’는 면박성 댓글을 목격하기도 하는데 괘념치 않는다고 한다. 점점 궁금해지는 캐릭터, 글 쓰는 남자 차우진과 초면이 아닌 마냥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20대에 등단하겠다는 목표 있었어요

지극히 평범했던 고등학교 시절, 유일한 취미는 밴드 활동이었다. 본 조비, 윤상, 김현철, 넥스트 음악을 들으며 가끔 강수지의 노래도 몰래(?) 귀 기울였다. 보컬과 키보드를 담당했던 차우진의 플레이 리스트는 언제나 ‘중구난방,. 록, 발라드 등 장르의 구분 없이 플레이를 눌렀다. 그렇다고 음악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은 없다. 어릴 때부터 영화 글을 좋아해서 자연스레 작가의 꿈을 갖게 됐고 “무조건 20대에 등단하자”라는 필사적인 목표를 가졌다.

“고등학생 때부터 소설, 시를 썼어요. 투고도 많이 했죠. 대학 때는 계간지나 문예지에 응모를 했는데 최종심까지는 올라가는데 막판에서 떨어지더라고요. 그 땐 우울한 분위기의 SF 소설을 썼어요. 평가는 초현실주의다, 냉소주의가 어쩌고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열심히 쓰긴 했어요. 길 가다가 아무데나 앉아서 쓰기도 했고 버스 뒷좌석에서 이어폰을 꼽고 끄적거리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군대를 갔다 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세상이 변해 있더라고요. 친구들이 갑자기 토익 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거예요. 저는 4학년 때까지도 취업을 할까, 증단 준비를 할까, 대학원에 갈까 그런 고민을 했던 거 같아요.”

먼저 졸업한 선배들에게 상담을 요청하자, “공부를 더 하는 건 위험하다”라는 공통된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취업. 차우진은 졸업 후, 모바일로 책을 구입하는 나름의 혁신적인 사업 시스템을 구축한 회사에 들어갔다. 벤처기업의 붐이 일었던 때였는데, 어느 날 사장은 먹튀를 하고 날랐다. 덕분에 몇 개월 치의 월급을 받지 못했다. 그 후에 차우진이 자리를 잡은 곳은 네이버 (뉴스/책) 서비스팀. 2년간 새로운 서비스를 구축하는 일을 했고 다시 소설을 쓰자는 마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지금의 네이버가 가진 영향력을 느낄 때면 간혹 후회가 되지만, 어느새 차우진은 틀에 박힌 조직생활이 어려운 체질이 되어 버렸다.

“네이버에서 나온 후에는 몇 개월 동안 쉬면서 위성DMB 작가도 했고 NGO 일도 잠깐 했어요. 경력이 애매하니까 어디에 취업하기도 어려워서 고민이 많았죠. 틈틈이 청탁이 오는 원고를 썼지만, ‘이걸 전업으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어요. 그러다가 지금의 <10아시아> 전신인 <매거진T>에서 기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력서를 냈는데 덜컥 붙더라고요. 창간 웹진이라서 초기 작업을 같이 했어요. 딱 2년 동안 일했는데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매체에 대한 자부심은 있었지만, ‘기자’라는 직업에 회의감이 들었죠. 자기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배우가 됐든 제작자가 됐든 인터뷰 대상자의 말을 옮겨주는 사람일 뿐이고, 분석을 하더라도 깊게 들어가지 못한다는 데에서 한계를 느꼈죠. ‘차우진’이라는 이름을 쓸 때, ‘매거진T 차우진 기자’가 아니라, 내 이름이 앞으로 나오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매거진T>를 나오고 음악웹진 <weiv>의 에디터 활동을 재개하면서 곳곳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담당 편집자가 “바이라인에 뭐라고 쓸까요?”라고 물으면, 차우진은 “편한 대로 하세요”라고 대답했고 음악평론가,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라는 이름이 자연스레 따라붙게 됐다. 그리고 올해로 벌써 5년차 프리랜서, 글 쓰는 차우진으로 살아가고 있다.


잘 쓰는 평론가들을 모범으로 삼는다

“일이 떨어지면 ‘취업할 걸 그랬다’는 후회도 해요. 친구들이 여름휴가를 떠난다는 소식을 전하면, ‘어디라도 불러준다면 당장이라고 들어가겠어’라고 자책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욕심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이 잘 나갈 때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때도 있는 거잖아요. 초밥이 먹고 싶어서 초밥집에 갔는데, 그릇 수를 일일이 세보지 않아도 될 만큼만 벌자라고 결심했죠.”

글 쓰는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차우진은 필자 이외의 활동도 다양하게 경험했다. 2009년에는 KT뮤직 도시락(현 올레 뮤직) 뮤직브런치 콘텐츠를 기획, 운영하는 일을 맡았고, 아이패드용 음악앱 ‘비트윈’ 사이트도 설계했다. 네이버 미투데이 ‘요즘 뭐 들어’, 현대카드 뮤직 서비스 컨설팅은 차우진의 주요한 경력이다.

“기자 생활을 하고 나니, 그래도 어느 정도의 대중문화 전반적인 지식을 쌓았고 또 포털에서 경험도 있으니까 음악서비스 기획과 관련된 프로젝트에서 제안이 오더라고요. 평소 음악 콘텐츠 서비스에 대한 관심도 있어서 흔쾌히 합류하게 됐죠. 사실 저는 학창시절부터 느린 인간이었거든요. PC통신이 한창 떴을 때도 관심이 없었고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야 메일을 사용했어요. 리포트를 쓸 때도 손으로 썼으니까 내 인생에 컴퓨터를 쓸 일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요즘에는 웹진에 글을 쓰고 음악 서비스를 컨설팅하고 있으니, 가끔은 새삼스럽기도 해요.”

요즘, 차우진의 관심사는 ‘싸이의 인기를 K팝의 성과로 볼 수 있나,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 등의 이슈다. 유튜브가 바꿔놓은 미국 팝 시장, 그리고 K팝의 한류 열풍에도 집중하고 있다.

“사람들이 음악,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다양한 콘텐츠를 원하는데 음악비평만 봐도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가 거의 없어지고 있거든요. 오히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창작하는 사람들, 기획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어요. 전통적인 느낌의 비평이 아니라면 ‘새로운 걸 찾아야 하나’, ‘모범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닥치는 대로 읽고 있어요. 비평집뿐만 아니라 창작 에세이, 자기계발서도 읽고 예전부터 좋아했던 문학비평 글들도 다시 찾아 읽고 있어요.”

차우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잘 쓰는 평론가’들을 모범으로 삼고 있다. 요즘, 정성일, 허문영, 신형철과 김현의 책을 거듭 읽는 중인데, 문장도 문장이지만 ‘그들이 던지는 질문’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모범적인 비평집으로 조영일의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김영민의 『영화 인문학』, 손민정의 『트로트의 정치학』, 최유준의 『음악 문화와 감성 정치』를 꼽았다.

“평소에 책을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편인데, 요즘에는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일본의 검은 안개』,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을 보고 있어요. 이 중에 가장 인상적인 건, 유신시절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이 대거 등장하는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인데, 개인적으로 최근에 1960-70년대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서 재밌어 하면서 보고 있어요. 또 만화도 좋아해요. 닐 게이먼의 『샌드맨』시리즈와 『강철의 연금술사』의 작가인 아라카와 히로무의 『은수저』를 추천해요. 『샌드맨』은 이야기가 정말 매력적이고 『은수저』는 농업고교를 배경으로 기른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 총체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심지어 웃겨요(웃음).”




글의 존재가 내게 더 본질적이다

음악비평집을 내고 싶었던 차우진은 2011년 산문집 『청춘의 사운드』를 펴냈다. 원래 제목은 ‘너와 나의 21세기’라는 다소 로맨틱한(?) 이름이었다. 책 서문에는 아래와 같이 밝혔다. “대중음악이 청춘으로만 소화되진 않는다. 다만 동시대의 음악이 이들을 겨냥하는 건 사실이다. 대중음악이 청춘으로 수렴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힘껏 겨누는 곳이 바로 청춘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한다.” 음악, 청춘에 대한 글을 쓰면서 차우진은 이 시대 청춘들이 ‘어른’에 대한 강박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는 20대로 돌아가고 싶을까? 자문해보았다. 대답은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에게 20대는 너무 가난했고 복잡했고 무엇보다 어중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참 애매한 20대였어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정작 손에 쥔 건 거의 없었죠. 대부분의 20대는 ‘어른이 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내 멋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른이 되고 싶어서 경험과 지혜를 찾아요. 자기 계발하는 주체와 잉여로서의 주체가 대립하게 되는데, 이런 강박과 분열이 대중음악에서도 드러나죠. 『청춘의 사운드』에서 담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고요. 쓸 때는 몰랐는데 다시 쓰라고 하면 못 쓸 것 같아요.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쉽지만은 않은 거 같아요. 만약 자전적인 에세이를 다시 쓰게 된다면 적어도 10년 정도는 흐른 뒤가 되지 않을까요.”

등단의 꿈을 가졌던 청춘을 보낸 차우진. 그는 아직 같은 꿈은 꾸고 있을까? “한 달에 한 번씩 소설 쓰는 모임에 나가요. 4,5년 정도 된 거 같아요. 하지만 등단이 목표는 아니에요. 쓰고 싶어서 그냥 쓰는 거죠.”하루의 많은 시간을 음악과 함께 보내지만, 차우진은 ‘음악보다 글’을 좋아한다는 걸 얼마 전 문득 깨달았다. 음악을 정말 좋아했다면 음악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글은 어릴 적부터 언제나 곁에 있었고 동경했고 훈련했다. 차우진은 “글의 존재가 내게 더 본질적”이라고 표현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어요. 제게 좋은 글이란 답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글이에요. 그건 평론의 역할이라고도 생각해요. 질문을 던질 것. 다시 말해 내 고민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것. 세상의, 혹은 음악의 비밀 따위, 제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어요. 단지 저는 계속해서 뭔가를 궁금해하는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죠. 그런 과정이 잘 드러나는, 잘 전달되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어요. 글을 쓸 때 솔직하게 쓰려고 해요. 저한테 집중해서 쓰되 그것이 너무 지나치면 산만하거나 오만한 글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죠. 글은 객관적인 과정에서 나오고 공적인 공간에서 쓰일 때 더 의미가 생기는 거잖아요. 비평이라는 것이 창작 에세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창작자 즉 아티스트들의 시간과 노력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작품과 사람을 분리해서 쓰려고 노력해요. 때때로 음악인들과 사적인 공간에서 만나게 되고 친해질 수도 있는데 친분이 쌓이면 부담스러워지니까 되도록 가깝게 지내지는 않아요.”


독자는 가장 어렵고도 복잡한 구애의 대상

차우진은 현재 상상마당 아카데미에서 ‘차우진의 음악이 숨긴 이야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음악 콘텐츠로 시작하는 취향의 재발견’이라는 부제 하에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방법, 음악 주변부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때때로 음악평론가를 꿈꾸는 학생들은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먼저 그 길을 걷고 있는 선배 차우진의 대답은? 다소 학생들을 헷갈리게 한다.

“음악평론가를 꿈꾼다고요? 다른 꿈을 꾸세요(웃음). 음악 평론이라는 건 이제 막 체계화되는 분야라고 봅니다. 언젠가 오랫동안 평론가로 알려진(누구나 알만한) 분과 사담을 나눌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분께서 ‘한국에선 평론가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란 얘길 하셨어요. 그때 수긍이 되면서도 ‘아 망했다’ 뭐 이런 기분이었는데, 해외 저널 같은 데 달리는 댓글을 봐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웃기죠? 평론가는 무언가의 부업 같은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기도 해요.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는 개인적인 책임이죠. 저는 고료가 적어도, 지면이 적어도, 제대로 '비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음악평론가가 되고 싶다면 평론가 말고 다른 걸 목표로 하세요.”

차우진에게 독자는 ‘가장 어렵고도 복잡한 구애의 대상’이다. 또 무서운 존재이며 실망스럽기도 하고 언제나 놀라운 대상이다. “여러분이 어떤 생각으로 제 글을 읽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쓰는 글들이 어떤 질문이 되면 좋겠어요.”차우진은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그만의 노동요(샤크라, 오렌지카라멜 앨범)를 들으며 밤을 지새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독자들에게 부탁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영화를 보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가기를.”그 와중에 당신의 그래프와 차우진의 포물선이 교차되는 일이 있으면 다행일 것이고, 삶의 여러 지표들 가운데 윤리적이면서 문화적인 요컨대 성찰적인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된다면 차우진은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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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운드차우진 저 | 책읽는수요일
1999년부터 대중음악과 관련한 글을 써온 대중음악평론가 차우진. 검정치마, 얄개들과 같은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ㆍ옥상달빛ㆍ브로콜리 너마저ㆍUV 그리고 카라ㆍ샤이니 등과 같은 아이돌에 이르기까지 인디와 메이저 전반에 걸친 30여 팀의 앨범과 곡들을 소개하고 설명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현재의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저변을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저자가 선택한 노래들과 이에 얽힌 이야기들을 통해 저마다 갖고 있는 청춘과 음악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되살려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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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왜 항상 화난 표정이죠?” - 김선영 『특별한 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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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에 대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그 경중을 떠나 다사다난하고 막연함이 이어지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설렘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외부의 자극에 대해 극단적으로 반응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에서 뭔가 해보려하지만 매번 부족함과 모자람을 경험한다. 그리고 결국 ‘인간은 원래 불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특별한 배달』은 그러한 이해의 과정을 거치는 10대들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주인공인 ‘태봉’과 ‘슬아’, ‘근수’는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태클을 걸어오는 외부의 자극에 대처한다. 때로는 서툴거나 극단적으로, 때론 넉살좋게 대처하지만 어쨌든 그 과정을 통해 삶이란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 10대들의 마음을 김선영 작가는 현실감 있는 어법과 문체로 표현했다. 지난해 『시간을 파는 상점』으로 청소년 문학에 천착하기 시작한 작가의 메시지는 『특별한 배달』로 이어지면서 아이들은 물론 기성세대에까지 더욱 강한 공감을 얻고 있다.




소설이 희망을 이야기하면 안 되나요

작가는 청소년들이 처한 문제를 그 누구보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열린 형식이 유행하는 최근 문단의 경향과 달리 뚜렷한 목적의식이 담긴 작품을 쓰게 된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특별한 배달』을 통해, 작가는 아이와 어른의 마음을 두루 다독거리고자 했다.

특별한 배달은 지난 1월 라디오 소설로 먼저 연재를 했습니다. 작가님께서 느끼는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힐링적인 요소가 많다고 얘기를 하세요. 『특별한 배달』은 ‘나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란 질문을 담고 있거든요. 라디오 연재를 통해 작품을 접하신 분들 중에 요즘 유행하는 힐링 서적들의 직접 화법에 비해 훨씬 강한 메시지를 받았다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재밌었단 말씀도 하시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는 굉장히 기분이 좋죠.

연이어 청소년 소설에 천착하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또 주인공인 슬아와 태봉, 근수 등이 쓰는 말투는 사실 그 또래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말들인데요. 어떻게 그리 생생한 어법을 쓰실 수 있었나요.

우선 제가 그 또래 아이들의 엄마로 아이들을 키웠으니까요. 또 한편으로는 제가 청주에서 중고등학교 아이들하고 주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을 이어가고 있기도 하고요. 아이들과 함께 책을 만들거나 토론을 하는 과정을 오랫동안 거쳤죠. 오히려 어른들 만나는 것보다 그 친구들 만나는 게 훨씬 잦았고요. 청소년 소설을 쓰게 된 것도 아마 그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아이들의 갑갑한 심정을 많이 들으면서 그 말투에 쉽게 젖어들었죠. 그런 말투가 아이들이 직면한 고민에 대한 메시지 담기도 좋았어요. 또 그렇게 청소년 소설을 써오면서 일반 문학과의 차이점도 발견하게 됐죠. 소설이라는 장르는 다르지 않더라도 문장이나 분위기, 밀도 같은 것들이 굉장히 다르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두 작품의 청소년 소설을 써오면서 저한테 맞는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제 경우는 밝은 이야기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청소년 소설이란 장르를 택하면서 힘들었던 부분도 있어요. 사실 일반 소설의 기준으로는 직접적으로 희망을 이야기를 하면 좀 촌스러운 구도가 되니까요.

너무 작위적이기 때문인가요.

그렇죠. 우리나라 소설에서 늘 이야기하는 병폐가 교훈 같은 것은 제외시키고 열린 구도를 선호해요. 어떤 메시지를 강하게 주는 것보단 그냥 던지는 식이 일반 문학이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저는 희망도 얘기할 수 있고 메시지도 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장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마침 청소년소설이 된 거고요. 제가 찾고 추구하고자 했던 것에 청소년 소설이 더 적합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전작인 『시간을 파는 상점』의 연작이라고도 하셨는데 두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의 고민은 무엇인지요.

대부분 청소년들을 만나 같이 이야기 나눠보고 고민해봤으면 하는 테마들이에요. 『시간을 파는 상점』을 통해서는 시간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고 공감해 보자는 게 굉장히 컸거든요. 청소년들은 억울한 게 많아요. 자발성, 주체성을 발휘하기보다 누군가의 강요를 받는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고 해요. 그러다보니 타의에 대한 원망이나 책임전가 같은 현상도 많아지고요. 『특별한 배달』의 경우는 선택에 따른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어쨌든 두 작품 모두 청소년들이 갑갑해 하는 부분들을 주제화 시켜서 이야기해보고 싶은 부분이 컸죠.

청소년들이 어른과 대화에서 그런 생각들을 표출하지 못하고 방어적인 태도 보이는 건 어른들의 잘못도 있겠네요.

엄마들하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생각보다 많은 엄마들이 아이들과 대화가 잘 안된다고 해요. 개중에는 중?고등학교 때 집안에서 원수처럼 지냈다는 이야기도 하고요. 하지만 부모와 자녀는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존재잖아요. 내 유전자의 반이 섞인 거고, 나로 인해서 생겨난 존재가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이라면 뭔가 방법을 바꿔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가장 일반적인 문제 중 하나는 엄마들이 자녀와 이야기할 때 끝까지 다 듣지 않는다는 것이죠.

내 자식이기 때문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네. 중간에 재단을 해버리는 거예요. 사실은 아이들이 엄마한테 뭔가를 얘기할 때는 고민을 상담하고 대안을 제시하라는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걸 풀어내는 게 더 주목적이라고 볼 수 있죠. 더구나 엄마들은 청소년들이 갖고 있는 고민을 해결해주진 못해요. 또래끼리의 고민을 어떻게 엄마가 해결해 주겠어요. 그런데 그걸 들어주는 건 할 수 있거든요. 잘못 또래한테 얘기했다 와전이 되면 왕따도 될 수 있지만 엄마는 어쨌든 죽어도 내편이라는 생각에 아이들은 말문을 열어요. 그런데 내 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거죠. 중간에 말을 자르며 ‘그건 이래서 그래’, ‘그건 네 탓이지’, ‘네가 이래서 잘못된 거야’ 하는 식으로 재단하는 게 아이의 입을 닫게 하거든요. 『특별한 배달』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이해의 과정을 밟아주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크면 안다’라던가, ‘몰라도 된다’는 식의 말들은 폭력과 다르지 않아요.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를 더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죠.




어른들이 더 많이 읽는 청소년 소설 되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감정 표현에 서툰 어른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어른도 완벽하지 않다’는 이해를 구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로 아이들과의 소통에 서툰 어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급변하는 사회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채 쩔쩔 매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작가님의 작품은 어른에게도 특별한 메시지를 던진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주인공인 태봉이의 아버지와 슬아의 어머니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듯 하고요.

그런 것도 있죠. 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표현을 하지 못했고, 사랑을 잘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이거든요. 사실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들 역시 성장기에 집안에서 지금 아이들이 겪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폭력을 많이 경험했어요. 신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단지 어리기 때문에 존중받지 못한 기억들이죠.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주체는 부모라고 생각하지만 그 주체들의 행동이나 선택으로 인해서 희생당하는 아이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어쩌면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이 요즘 아이들에게 접근 방식을 모르는 듯합니다.

그렇죠. 어른들은 자신들이 자라온 방식대로만 생각하고 아이들을 대하는 습관이 있어요. 보통 지금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에 세대 차이를 30년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300년 차이는 나는 것 같아요.

독자들 반응 중 기억에 남는 ‘어른’의 이야기는 없었나요?

지금까지 리뷰는 청소년들보다 어른들의 리뷰가 많더라고요. 그 중에 방황하는 태봉이 아버지를 통해 자신이 학창시절에 아버지한테 대했던 것을 생각했다는 분이 계셨어요. 책을 읽으면서 당시 아버지 고뇌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어른이 됐다고 해서 성숙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청소년이라고 해서 미성숙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고요. 18살이라면, 사실 그 나이 수준에서 본다면 성숙한 게 아닐까요. 30대, 40대의 어른들이 봤을 때는 미성숙일지 모르겠지만 18살에서는 성숙이거든요. 그렇게 아이들을 봤으면 좋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 외에 다양한 리뷰들이 있었지만 보통 어른의 입장에서 생각해 온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더라고요. 사실 책 속에서 ‘입양’이라는 극단적인 소재를 건드렸지만, 사실 입양이 아니어도 그 보다 더 하게 부모와 자식 간에 벽이 있는 집이 많아요. 아이들한테 요구만 하는 거죠. 물론 사랑을 전제로 한 요구지만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고요. 엄마 독자들 중에는 아이들한테 공부 잘해야 되고, 예뻐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그런 걸 요구해 온 자신의 본 모습을 봐서 굉장히 힘들었다고 쓰신 분도 있어요.




화를 분출하는 사회, 해법은?

김선영 작가는 어린 시절 산골짜기에서 살았던 감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철부지 아홉 살 인생이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된 것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였다. 도시의 가난과 처음 마주해야 했던 충격은 아직도 작가의 심상 한 언저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녀시절부터 문학에 꿈을 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작가가 펜을 들게 된 것은 결혼한 이후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꿈을 유보했지만, 환경을 탓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선택의 결과였고 작가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끝내는 꿈을 이뤘다. 그런 작가의 눈에 비춰진 요즘 우리 사회는 모두가 화나 있는 상태, 남의 탓을 하는 상태에 처해있는 듯하다. 『특별한 배달』의 메시지가 다시 한 번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듯 한데요. 선택에 대한 책임을 말씀하시는 작가님의 눈에 보이는 원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자기 탓보다 남 탓을 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다만 성장하며 어떤 멘토를 만나고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에 따라 바뀌는 것뿐이죠. 사실 저도 이제까지 경험을 돌이켜 보면 남 탓이라고 생각할 때 화가 더 많이 났어요. 그러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 자리, 그 상황에 내가 있는 것은 나의 탓도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죠. 그것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듯해요. 화가 많이 나있으면 될 것도 안 되요. 특히 타인과의 생활에 있어 일은 자꾸 꼬이게 되죠.

어떻게 보면 모두가 굉장히 모두 화나있는 상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맞아요. 전철을 타고 가다보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정말 왜 이렇게 화가 나있는 것처럼 보일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외국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자유롭고 표정이 밝잖아요. 티베트 같은 지역은 우리보다 물질적으로 정말 가난하죠. 그러나 항상 스마일이에요. 행복지수는 우리보다 훨씬 높죠. 우리 같은 경우는 그들에 비해서 생활수준은 높지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렇게 표정이 무서울 수 없어요. 그 원인으로 사회구조나 경쟁사회의 탓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것은 엄청난 변화가 있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아요. 그보다는 개인의 생각을 조금 달리하는 것이 훨씬 빠르죠.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데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요. 태봉이 아버지를 통해서 그 얘길 했던 것 같아요. 태봉이 아버지는 자본주의 체제에 산업구조 속에 싸워 왔죠.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대항하기엔 거대한 괴물이라는 것을 느껴요. 죽지 않은 이상은 이 체제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지만,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죠. 그저 한 개인만 사라질 뿐이니까요. 아니 어쩌면 사라진 것조차 모를 수 있어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각도를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꼭 그 체제나 제도에 맞출 필요는 없잖아요. 사실 맞추지 않고 사는 사람도 굉장히 많아요. 그렇게 해보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마도 표정이나 그 주변을 생각하는 마음도 훨씬 여유가 생길 것 같아요. 우리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인해 불행하다는 것을 느낀다는 거예요. 남들이 잘되는 것을 보며 불안과 불행을 느끼는 과정을 달리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나’라는 존재는 우주 속에 독보인 하나잖아요. 유일하면서도 독보적인 존재인데 삶을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죠.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이 시대 어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나의 유전자 반, 배우자의 유전자 반으로 자녀가 생겼다고 하지만 전혀 다른 개체라는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엄마, 아빠는 지구에 살고 있지만 아이들은 화성인이라는 거죠. 우리 세대랑 부모님 세대를 비교해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살았던 잣대로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교육시키면 오류가 생긴다는 거죠. 아이들의 삶은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서 펼쳐질 거예요. 지금 변호사, 의사가 최고의 직업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개인의 삶의 질을 조금 더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요. 아이들한테 지금 사회가 바라는 인간상을 제시하지 말고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찾으라는 얘길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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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배달
김선영 저 | 자음과모음
『특별한 배달』은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김선영 작가의 『시간을 파는 상점』의 후속작이다. 지난 12월 말부터 EBS 라디오 연재소설에서 탤런트 이민우 씨의 낭독으로 연재되며 재미있다는 호평을 얻었다. 태봉의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사업에도 실패하여 전 재산을 날린다. 점점 존재감이 희미해지며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남편 보기가 두려운 아내는 집을 나가버린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아버지는 태봉에 대한 부정(父情) 때문에 사는 것을 선택한다. 아버지는 폐휴대폰에서 금을 체취해내며, 버려진 것에서도 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태봉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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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대충 살아야 꿈이 보인다 - 하상욱 『서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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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시를 왜 읽을까? 감동받기 위해, 문학적 감수성을 얻기 위해? 누군가 “웃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웹툰이나 코믹소설을 읽으라고 말해야 할까? 하상욱의 『서울 시』를 읽다 보면 “웃고 싶어서”라는 대답이 정답일 수도 있다. 5초만에 읽을 수 있는 ‘서울 시’는 깔깔깔은 아니지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며 피식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문구를 마음에 새기며, 맺음말에 멈칫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지난해 여름에 발간된 하상욱의 전자시집 『서울 시』는 출간 10일 만에 3만 건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10만 명 이상의 SNS 유저들이 1,2권을 소장했다. 10~25자짜리 단문 ‘서울 시’는 일본 고유의 문학 장르인 ‘하이쿠(俳句)’와 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시』의 표지를 살펴보자. 지하철노선도를 형상화했다. 정차하는 역은 도시, 현대인, 관계, 공감시집, 페이스북 등이다. 두 번째 페이지를 열면 작가 소개가 나온다. 그런데 작가 하상욱의 전신 사진, 소 사진, 개 사진 뿐이다. 작가의 출생지, 학력, 경력은 찾아볼 수 없다. 텍스트 자체가 부재다. 그렇다면 세 번째 페이지 ‘작가의 말’을 펴보자. 헛헛,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가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잘생긴 말 사진’ 하나를 투척해놓는 뻔뻔한 작가다. 하물며 목차는 제대로 실었을까? 역시, 작가의 목을 누군가가 발로 차는 사진이 독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서울 시』는 왜 ‘서울 시’일까? 하상욱 작가는 “시인의 특별한 감성을 느끼는 글이 아닌, 당신의 평범한 감성을 꺼내는 글이 서울 시”라고 말했다. 도시와 서울 시 중, 고심 끝에 고른 제목이다.


현재 전자책 서비스기업에 다니고 있는 작가 하상욱은 마케팅팀 소속으로 서비스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범상치 않은 외모답게 회사에서도 ‘튀는 후배, 튀는 선배’로 유명하다. 『서울 시』가 화제가 되며 회사 내에서 스타가 되었겠다고 물으니, “글쎄요. 워낙 평소에 이상한 일들을 많이 하고 다녀서 그렇게 놀라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라고 말한다. 지인들도 썩 놀라는 반응은 없었다고 한다. 과연, 물건이다! 우연히 페이스북에 올린 네 줄의 시로 ‘작가’라는 호칭을 얻게 됐지만, 크게 놀랍거나 기쁜 일은 아니라는 시큰둥하고 시니컬한 하상욱에게 ‘서울 시’의 탄생 비화를 물었다.




웃기려고 쓰는 글 아니다. 나는 진지하다

평소에도 글 쓰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나? 『서울 시』는 어떻게 탄생하게 된 건가?

새로운 매체가 생기면 관심을 갖지 않나? 페이스북이 처음 나왔을 때 이것저것 올리면서 지인들의 정보를 공유했는데, ‘서울 시’도 그냥 우연히 올린 건데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회사 단체 메일로도 한 번 보내봤는데, 직원 한 분이 전자책으로 내도 좋을 거 같다는 피드백을 줬다. 사실 처음에는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실현됐다. 아무래도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전자책을 유통하는 회사니까 어렵지 않았던 거 같다. 나 혼자 집에서 만들어서 그날 바로 등록하는 절차로 진행됐다(웃음).

이렇게 단행본이 출판될 줄 예상했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어떤 계획을 세우는 성격도 아니고 욕심도 없었다. 무료로 이미 공개된 전자책을 누가 과연 사서 읽을까 라는 궁금함이 있을 뿐이었다. 사실 사람들이 살 만큼 좋아해야 그걸 사는 것 아닌가. 『서울 시』가 콘텐츠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출판사 측 말로는 괜찮게 팔린다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직 모르겠다.

글자수를 맞추고 띄어쓰기를 변형한 것을 보면, ‘서울 시’는 시를 디자인했다는 느낌이 든다. ‘서울 시’를 어떻게 쓰고자 노력했나.

기승전결을 생각해서 썼다. 영감이 떠오르면 한번에 쓰고 그런 게 아니라, 제목을 정해놓고 생각한 후 퍼즐 맞추기 식으로 채워 나갔다. 단어를 집어넣었다가 뺐다를 반복했다. 지금까지 150여 편을 썼는데, 영감이 떠올라서 한번에 쓴 작품은 몇 개 안 된다.

웃음, 유머를 주는 시이지만 가끔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하는 시들도 있다. 이를테면 ‘효도’ 같은 작품은 꽤 먹먹하다. 웃음을 장치로 두되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진지하게 다가온다.

‘효도’는 의도하고 쓴 글이다.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신 글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 시’가 재밌다고 평가하지만 나는 웃기려고 쓰는 게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슬픈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는데, 99%가 웃음이라면 나머지 1%는 남겨 놓고 싶다. 웃기는 글에서 끝나길 원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1%의 가치인데 내 능력에 달려있는 거 같다. 물론, 웃음을 잃고 싶지 않다. 중요한 가치니까.

요즘 웹툰이 대세다. 『서울 시』를 읽으면서 웹툰으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웹툰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이말년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나와 성향이 조금 비슷한 것 같다. 이말년의 웹툰은 가볍게 스토리를 이어가지만 깊게 들어가면 포장을 가볍게 했을 뿐, 진지한 내용들도 많다.

『서울 시』에 대한 기억에 남는 서평이 있나?

가끔 ‘서울 시’를 깊게 분석하시는 분들이 있다. 내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서평을 읽을 때 감사하다. 가장 기분 좋은 댓글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 최근에는 어떤 독자 분이 “재밌고 신선한데 책으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써놓은 글을 읽었다. 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남의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대학교 특강 연사로도 활동 중이다. 기업들로부터 『서울 시』를 활용한 제안도 많이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광고를 위한 글이 아니라, 내가 재밌게 쓸 수 있겠다 싶은 건은 수락을 하고 싶은데 아직까지 그런 곳으로부터는 제안을 받지 못했다. 일이라는 느낌이 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고 내가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대학교 특강을 가는 건, 대학생활을 제대로 누리지 못해서 후회가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대학생들이 한 번 만나 보고 싶다고 연락이 오면, 웬만하면 다 만나줬다. 대학생들과 함께 일했던 적도 있고. 그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회적인 요구에 휩쓸려 너무 힘들게 살지 말라”는 이야기다. 요즘 대학생들을 만나면 오히려 제일 꽉 막힌 세대인 것 같다. 기회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거 같아서 슬프다.




꿈을 이룬 건 아니다. 내 인생의 이벤트일 뿐

이야기를 나눠보니, 주관이 매우 뚜렷한 성격인 것 같다. 굉장한 달변가이고.

말싸움, 완전 잘한다(웃음). 논쟁도 즐기고…. 하지만 싸움으로 이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논쟁은 좋지만 싸움이 되는 건 싫어한다. 내 이야기만 하고 내 이야기만 강요하면 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에 조심한다. 평소에는 재밌는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지만 한편으로는 차갑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시니컬하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은 아니다. 그래도 요즘엔 많이 부드러워진 거다(웃음). 사람들의 속마음을 잘 접근하는 편이라서 지인들에게 연애상담을 많이 해준다. 특히 여자들이 잘 찾는다. 내가 딴 생각을 품었다는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호감이 있으면 대놓고 표현하는 스타일이다(웃음).

연애상담, 어떻게 해주나? 독설가인가?

솔직하게 말해준다. 배려 이런 거 없다. 정확하게 이야기해준다. 현실적으로 착각할 만한 이야기를 위로랍시고 해주지 않는다. 그게 맞다고 본다.

평소 취미는 무엇인가? 왠지 독서는 아닐 것 같다.

책 읽는 거 어릴 적부터 정말 싫어했다. 누군가의 생각을 주입하는 것, 그것을 그대로 학습하는 것 싫어했다. 책 안 읽는다고 글을 못 써야 하나?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 읽기 싫어한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하다. 괴짜였나?

외동으로 자라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누군가의 간섭 하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던 거 같다. 주변에 빨리 일탈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절대 휩쓸리지 않았다. 쟤는 쟤고,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방황한다고 나도 꼭 방황하라는 법은 없다. 어릴 때 게임을 엄청 좋아했는데 대화집, 공략집을 보면서 실력을 올리는 게 너무 싫었다. 누가 방법을 알려주는 것에 대해 미친 듯이 거부했다. 포토샵도 책 없이 그냥 습득했다. 게임 좋아하는 사람들을 오타쿠라고 부르곤 하는데, 나는 그들이 무조건 오타쿠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타쿠가 나쁜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상욱의 대학생활은 어땠나? 평범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보통 대학생들처럼 영어공부도 하고 인턴도 하고 공모전도 하고 그랬다. 학점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좀 더 대충 살지 못했던 게 아쉽다. 좀 더 대충 살았다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더 일찍 찾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더 많은 기회가 있을 수 있었는데 대학생으로서 해야 할 것 같은 일들을 하다 보니, 그걸 놓치진 않았을까. 지금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좀 더 맘대로 살 고 싶다. 일탈하고 싶다 이런 게 아니라, 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디자이너가 될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어릴 때 꿈은 만화가였다. 만화를 포기한 건 만화가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다. 요즘 웹툰 작가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화를 그리지만, 예전에는 유명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만화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난 골방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시각적인 훈련은 돼있다고 생각했고 개성과 아이디어를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디자이너가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변 반응은 어떤가? 대학 졸업 후에 계속 직장생활을 해왔는데 갑자기 작가로 데뷔했으니 놀라지는 않나.

워낙에 튀는 스타일이고 이상한 짓(?)을 많이 하는 걸로 유명하기 때문에 반응이라고 할 것도 없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웃음). 학창시절부터 사회도 많이 보고, 여기 저기에서 노래도 부르고 무대에 자주 올라갔다. 성격이 뭔가를 엄청 노력하고 그러는 성격은 못 된다.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안 하는 스타일이다. 『서울 시』가 출간되어 기쁘지만,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책이지만, 내 인생 가운데 이벤트 같은 일일 뿐이다.

‘서울 시’의 업데이트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에 따른 부담감도 생길 것 같다.

사람들이 내게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 기대를 하면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무리수를 두는 일도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 때문에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내게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가 실망해서 떠나는 일, 달갑지 않다. 반가운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초심 같은 건 원래 없었고, 지금 이렇게 화제가 된 상황이 ‘되게 좋다’ 이런 것도 아니다. 흥분감 보다는 걱정이 많다. 이런 상황이 자연스럽게 끝나길 바랄 뿐이다.

현재 하상욱의 목표는 무엇인가.

지금처럼 ‘서울 시’를 꾸준히 쓸 건데, 독자들도 언젠가는 재미없어 할 거라 생각한다. 난 시한부라고 생각한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관두고 싶은 게 내 목표다. 사람들이 ‘서울 시’를 식상해 하고 기대하지 않을 때 불쾌감 없이 떠나고 싶다.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고, 아니 있으니까 빨리 평정심을 갖고 돌아가는 게 나의 목표다. 물론 슬프고 안타깝겠지만 연연해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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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하상욱 저 | 중앙북스(books)
단 두 줄의 짧은 글을 통해 SNS 10만 유저의 머리와 가슴을 관통한 『서울 시』 종이책이 출간됐다. 이 책은 무료로 출간되어 전자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2권이 10만 건 이상 다운로드된 컨텐츠다. 하상욱의 시는 짧지만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찰나에 관통하는 순간적인 심상은 읽는 이들에게도 명료하게 다가간다. 본 책은 전자 시집에서 발표된 시와 번외편을 포함해 시는 총 119편, 번외편으로 알려진 카피 같은 산문은 총 5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책 10권 분량에 달하며, 짧은 전자책을 읽고 아쉬웠던 수많은 독자들을 위한 선물과도 같은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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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못 알아듣게 일본어로 랩 했다” - 롸마(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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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 라마(RAMA)는 국내에서 믹스테잎의 최초 전파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2013년 느닷없이 < 죄송합니다 >라는 앨범타이틀과 함께 ‘라마’에서 ‘롸마’로 개명한 채 컴백했다. 이름을 바꾼 것도 그렇지만 죄송하다니, 도대체 무슨 연유였을까. 겨울비 내리는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대담하는 내내 롸마는 솔직한 입담을 뽐냈고, 인터뷰어들은 죄송하다는 앨범타이틀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의 유쾌한 에너지를 한껏 선물 받을 수 있었다. ‘겨울비’는 내렸지만, 우리는 슬프지 않았다.


레이블 STGworld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레이블이지만 급여를 지급하거나 영업 활동을 하는 회사 개념은 아니고요. 제가 2009년부터 활동이 정지되어 있었던 만큼 지금의 STGworld는 롸마와 제 4금융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에스코(Esco)는 결혼해서 잘 살고 있고요.

해외 아티스트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레이블 소속이라기보다는 ‘월드’에 포함되는 관계에요. STGworld안에서 레이블과 모임은 별개로 두거든요. 원래는 다른 아티스트의 앨범도 STGworld에서 내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교섭이 있었다가 지금은 중지된 상태에요.

왜 제4금융인가요?

제3금융, 제4금융은 최후의 수단으로 많이 쓰이잖아요. 저도 마지막 수단이라는 의미를 더하려고 써 봤어요. 이름으로 고민을 많이 해 봤는데 RAMA의 약자를 Rama And Money Angels로 넣어도 뜻이 통하더라고요. 대부업 광고 이미지도 나고.(웃음) 대부업체들 광고를 보면 굉장히 친근한 느낌을 사람들에게 어필하잖아요. 역설적인 효과를 노렸죠. 멤버들 콘셉트를 최근의 대세인 섹시함과 거리가 있는 귀여운 느낌으로 잡은 것도 역설의 연장이에요.

7주 연속으로 싱글을 내셨는데, 작업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원래 시작은 ‘7번 승부’라는 프로젝트였어요. 일곱 번째가 앨범 발표였고 여섯 곡을 연속으로 싱글로 냈죠. 하나씩 밟아나가는 단계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활동을 쉬다 보니 이름도 사라진 것 같아서 나름의 잊히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죠. 힙합 커뮤니티 뉴스 란에서의 잦은 노출을 노린 것도 있고요. 사실 그게 제일 크긴 한데(웃음)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 같긴 합니다.


「스타탄생」 싱글 커버에 쓰인 스티커사진은 어떻게 찍게 된 건가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을 많이 하다가 옛날에 유행했던 90년대 스티커 사진을 생각해봤어요. 그 사진은 자기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가공된 모습이잖아요?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일본에서나 여고생들이 하는 키치한 사교활동정도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걸 소재로 해도 재밌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스타탄생」이니까 커버에도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전에 한창 힙합 아티스트들과 음악 팬들을 떠들썩하게 했던 < Show Me The Money >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송래퍼를 불렀는데, 이 친구가 지금 스나이퍼사운드와 계약이 됐거든요. “형님 제가 뭐든 다 해드리겠습니다” 하던 녀석이 이제 이런 사진은 자기 스웩(Swag)과 안 맞는다고 발을 빼서(웃음) 그래서 그냥 저 혼자 찍었어요.


「스타탄생」의 가사를 통해 보면 요즘 오디션 풍조에 대해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일단 한 쪽에서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생각할 여지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싶었어요. 저는 앞으로 이런 현상이 더 늘어날 거라고 생각해요. 제 주변에도 자기가 어디 나왔다 어디 나왔다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고요. 냉소적으로 읊기는 했지만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곡이에요. 폭소보다는 ‘이게 뭐야!?’ 이러면서 입꼬리가 (손가락을 갖다 대며) 이 정도로 올라가게 만드는 그런.

세 번째 정규 앨범인데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아티스트는 대중의 관심과 피드백을 통해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도로변의 잡초처럼 무관심 속에 음악을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힘이 빠지더라고요. 생계활동을 위해 취직도 해보고 레슨 활동도 해보고 했는데 마음이 못 견뎠어요. 결국 다시 한 번 음악으로 승부를 보려고 앨범을 발매했죠.

앨범명이 < 죄송합니다 >입니다. 누구에게 어떤 점이 죄송하다는 건지 궁금한데요.

사람들이 짐작은 하게끔 하면서도 생각의 여지를 줄 수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었어요. 앨범에 넣은 얘기처럼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올해에도 랩 음악을 계속합니다.”일수도 있고요. “죄송합니다. 라마가 아니라 롸마입니다.”일수도 있고요. 기타 등등 여러 가지로 생각하셔도 좋아요. 죄송합니다. 또 나왔습니다. (웃음)

곡별로 주제와 소재가 다양한데요. 앨범에 대한 콘셉트를 생각하고 잡는 것인가요?

콘셉트라기보다는 이번 앨범은 누적의 결과에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여러 시기에 작업한 곡들을 모은 앨범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3년에 걸쳐 세곡을 만들고 2개월에 걸쳐 나머지 열곡을… (웃음) 시기도 각각 다르고 콘셉트도 다르고. 「시간여행」의 경우는 랩 스타일에서도 차이가 있고 해서 트랙을 배치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한곡이지만 사실은 세곡짜리 곡이다 보니 작업량은 믹싱도 세배였거든요.

「거 참 잘한다」는 원곡이 무려 1938년 김종조 님의 것인데, 어떻게 찾게 되신 건가요?

빅터 유성기 원반 시리즈라고, 유성기 원판을 나중에 다시 복원한 LP가 있어요. 거기에서 추출한 음원으로 만든 곡이에요. 중구 황학동에 가면 지금도 많아요. 복원에 복원에 복원을 거쳐 만들어진 거죠. 이북 출신에 연고도 없는 분의 곡이라 저작권 협회에 전화했더니 쓰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을 거라는 답변이 와서 쓰게 됐어요.

들어보니 랩이랑 비슷한 형식이더라고요. 운율도 맞고. 박자를 좀 맞추고 리듬도 새로 찍어보고 LP의 다른 트랙에서 추출한 비트를 또 넣어보고 하면서 만들었어요. 힙합이 아무래도 융합의 상징이잖아요. 항상 그 때의 트렌드와 융합하며 발전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과거와의 융합도 담아보고 싶었어요. 앨범에서는 쉬어가는 느낌으로 배치했고요.



앨범에 참여한 알파(Alpha)와 지미 핌프(Jimmy Pimp)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일단 둘 다 프랑스 사람들이에요. 동료 중에 에스코(Esco)가 언어에 일가견이 있어요.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 일본어 불어까지 다양하게 구사할 줄 알아요. 에스코가 당시 마이스페이스에서 활동을 하면서 지미 핌프를 만났거든요. 글로벌 콜라보레이션을 해보자고 2009년 당시 지미 핌프한테 ‘이런 콘셉트의 곡이 있는데 같이 해보자’라고 제안을 한 게 녹음으로 이어진 거죠. 그러면서 지미 핌프가 알파도 같이 데려오고.

앨범 속지에 지미 핌프와 알파가 참여한 부분은 ‘프랑스어라서…죄송합니다’라고 써져 있고 가사가 생략되어 있던데요.

가사 좀 보내달라고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안 와서…(웃음) 에스코가 해석해보려고 하긴 했는데 랩 언어상 불분명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더라고요. 관련학과 교수님들도 은어들이 섞여있다 보니 100% 기술은 힘들 것 같다고 해서 아예 넣지 않는 방향으로 갔어요. 그래도 아는 사람이 들으면 상당히 재미있는 가사에요.

롸마 본인도 일본어 랩을 한 곡이 있습니다. (「Viper music」) 어떻게 넣게 된 건가요?

그게 사실 부끄러운 얘기인데요. 음악계에 데뷔했다가 이제는 망했고 (웃음) 이런 과정들을 랩으로 하려고 했는데 부끄럽고 죄송해서 한국말로는 못하겠더라고요.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게 일부러 일본어로 한 거예요. 그래도 라임에 신경을 쓰면서 일본 본토 래퍼가 들어도 ‘이정도면 꽤 하는데?’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했어요.

가사 내용은 ‘믹스 테잎을 발표해서 맨날 놀고 여자 만나다 열심히 작업도 안 하고 망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왔고 이제 너의 맘에 은밀하게 침투하겠다’ 뭐 이런 내용이에요.(웃음) 일본 래퍼 지브라(ZEEBRA)의 스타일도 오마주했고요.


「시간여행」은 가사의 수위가 상당한데요. 시국적으로도 그렇고 내보이며 마지막으로 고민한 점은 없었나요?

이 곡의 경우는 대선 시즌에 만든 곡은 아니고, 실제로는 2010년에 제작된 곡이에요. 랩 스타일로만 단순히 옛날 스타일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힙합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를 동시에 담는 융합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랩 스타일과 비트에는 힙합의 역사가 담겨 있고 가사에는 한국의 역사가 담겨 있죠. 좀 더 소스를 붙여서 과거의 느낌을 더 내보고 싶은 그런 아쉬움은 있어요.

「웃는 남자」는 속된말로 ‘기승전병’의 구조 같은데요. 의도한 건가요?

네 맞아요. 서사 구조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스토리텔링 랩에 있어서의 서사구조를 소위 ‘덕후 문화’적으로 표현한 거죠. 2집의 ‘달콤한 데이트’에서도 비슷한 진행이 있었어요. 이번에는 한 발짝 더 나간 거죠. 우려가 되는 건 랩적인 스킬을 좀 더 보여줬어야 되는데 너무 문학적으로만 접근한 것 같아서… (웃음) 청자들이 생각하는 테크닉은 이런 테크닉이 아니라 다른 테크닉이니까요. 반성하는 중입니다. (*그는 이 ‘랩적인 스킬’을 ‘후루룩짭짭훅짭짭’이라고 표현했다.)


1980~1990년대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개인적인 애착이 담긴 것인지요?

네. 정말 그렇죠. 우리 30대들이나 20대 중후반들이 요즘 소비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잖아요. < 응답하라 1997 >도 그런 것 때문에 반향을 일으킨 바 있고요. 「93년」같은 경우는 그 세대들에게 편지를 보내듯이 가사를 만들어 봤어요. 가사에 ‘블랙죠 초코바’ 같은 것도 나오고요. 그런 세부적인 설정들이 제 또래들에게 ‘아 그 때 그거!’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면 했어요.

가사들이 매우 현실에 가깝습니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주 소재로 삼는 이유가 있나요?

저도 몰랐는데, 제가 리얼리즘적인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고 서적은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좋아해요. 상황을 열거하며 세밀한 묘사를 하다가 마지막은 휴머니즘으로 끝내고 그런 구조가 와 닿더라고요. 모티브를 많이 얻었죠. 메시지를 넣더라도 ‘이게 이렇게 됐으니 이건 이렇게 돼야 해. 일어나라 스탠드 업!’ 이런 게 아니라 ‘이런 현상이 있었고 어떠어떠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 쩜쩜쩜’하면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수도 있고 다시 들어보게 할 여지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메시지도 교조적으로 보이지 않고요.

한편으로 사회의 큰 부분을 겨누던 예전에 비해 이번에는 일상에 가까운 느낌이 더 큰 것 같기도 한데요. 시선이 바뀐 이유가 있나요?

사회적 메시지도 담겨져 있지만 그걸 판단하는 건 청자들의 몫이라 생각해요. 이번 앨범에서는 여러 표현을 담아 보고 싶었어요. 향후에는 모더니즘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I don't like’하는 것도 해보고 싶어요. 아무래도 제가 오랫동안 힙합 신에 몸을 담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최근의 경향에 소홀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오는 길에도 최근 음악들 열심히 들으면서 왔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며 오셨나요?

치프 키프(Chief Keep)를 많이 듣고 있어요. 결국에는 부자가 된다(< Finally Rich >)라는 앨범인데, 이런 식으로도 랩이 가능하구나 싶을 정도로 표현법이 독특해요.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는 리얼하게 랩을 하는 편이잖아요. 치프 키프 같은 경우는 켄드릭 라마와는 상대적인 느낌이 있어요. 그림으로 치면 거칠게 채색됐는데 어디서도 못 보던 그런 그림을 보는 기분. ‘치프 키프는 무조건 구리고 켄드릭 라마는 무조건 최고다’라는 흐름에도 저는 반대에요. 그렇게 말하는 친구들 보면 “와 영어 진짜 잘하나 보네” 싶은 느낌이랄까. (웃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켄드릭 라마도 상업적으로 굉장히 영민한 장치들을 많이 사용했거든요. 닥터드레(Dr. Dre)와 애프터매스(Aftermath) 쪽에서 지원사격을 받는다든지 레이디가가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한다든지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있잖아요. 그런 장치가 없었다면 저는 성공을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평단에 대한 호평도 일종의 현상이었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좋은 앨범이에요. 그렇지만 이 앨범이 2012년 최고의 앨범으로 맨 꼭대기에 있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이 있어요. 왜냐면 저는 롸마이기 때문에 라이벌인 라마에 대해서는 항상 비판적인… 죄송합니다. (웃음)


프랭크오션(Frank Ocean)은 어땠나요?

엄청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런 시대에 이런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놀랐어요. 역시 SNS의 힘은 위대하고 (웃음) 잘하려면 트윗도 잘해야 하고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이런 걸 컬트적인 현상으로 보거든요. 문화예술 종사자들이 돌파구를 만드는 방식이죠.

과거만 해도 인기 있던 앨범의 방법론은 백화점식 앨범으로 당시 핫한 래퍼들 다 피쳐링으로 넣고 그런 거였잖아요. 이것저것 다 나열하고 여성 보컬도 들어가고.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간 거 같아요. 그것보다는 팬덤을 구축하는 게 더 중요해진 것 같아요. 레이블 중에서는 일리어네어가 그래서 부러워요. 더 콰이엇이 맞팔해줘서 고마웠어요.(웃음)


켄드릭 라마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롸마로 철자를 바꾸었다고 하는데, 순수하게 켄드릭 라마 때문에 바꾼 건가요?

사실 검색어에 오르고 싶었던 이유도 있고요. 켄드릭 라마가 너무 핫하다 보니까 이 상태로는 ‘라마’라고 하면 더 이상 사람들이 나를 떠올리지 못하겠다는 위기감이 있었어요. 인터넷에서도 사람들이 ‘켄드릭 라마 쩐다’, ‘켄드릭 라마 대박’ 이러다가 나중에는 ‘라마 4번 트랙 말이야’ 이렇게 줄이더라고요. 이런 거 보면 저는 굉장히 기대를 하고 클릭을 하는데 막상 보면 그게 켄드릭 라마 이야기고. 이제 라마의 고유명사는 켄드릭 라마가 됐구나 싶었어요. 그럼 내가 롸마로 바꿔야겠다. 그런 거예요.

지금의 롸마를 만든 아티스트나 앨범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 Fear Of A Black Planet >이죠. 힙합 좋아하던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95년? 1996년? 즈음에 들은 앨범이에요. 어릴 때 뭣도 모르고 들었죠. 1990년 작품이니까 당시에도 올드한 앨범이었어요. 당시 천호동에 미화당 레코드라고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정보가 많은 시대가 아니다 보니까 커버만 보고 끌려서 골랐죠. 뒷면 커버도 굉장히 독특했어요. 멤버들이 무슨 비밀회의를 하는 그런 느낌?

듣고는 깜짝 놀랐어요. 아무리 힙합이어도 멜로디가 너무 없는 거예요. 시끄럽고 확성기 나오고 (웃음) 스크래치만 1분 내내 하는 곡도 있고. 「Fight the power」라는 곡이 있는데, 선동적이고 노이즈도 강하고 해서 록음악처럼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어요. 앨범을 같이 음악 듣는 친구들한테 들려줬더니 아는 척 하는 친구가 ‘퍼블릭 에너미는 정치, 사회적인 이슈를 담고 있는 노래를 하는 팀이야’라고 말해서 한동안 짱박아 뒀던 앨범을 나중에 다시 꺼내서 듣기도 하고 그랬죠. 힙합 장르라고 해서 화롯가에 불 때워 놓고 ‘내가 짱이다, 내 스킬을 아느냐’ 이런 식은 아닌 거 같아서 더 좋았고요.

저한테는 굉장히 의미가 깊은 앨범인 게, 나중에 훌륭한 형이 되면 나도 이런 가사를 써야겠다 했었거든요. 게다가 이 앨범에는 가사집이 있었어요. 교과서 역할을 톡톡히 했죠. 「Burn Hollywood burn」을 들어보면 빅 대디 케인이 구사하는 라임도 상당했어요. ‘Spike Lee’와 ‘Strike me’를 라임으로 배치하는 그런 것들. 이런 건 상당히 수준 높죠. 당시만 해도 어린 마음에 ‘송파구 랩 짱’ 뭐 이런 노래를 쓰고 그랬었는데 (웃음) 3년 즈음 지난 후에는 저도 그 정도로 고난도의 라임을 구사할 수 있었어요. 앨범을 유심히 들어보시면 여러 부분에서 그 시대를 오마주한 부분이 들릴 거예요.


인터뷰: 여인협, 이수호
사진: 윤은지
정리: 여인협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스트레스 해소에는 술보다 독서가 좋아요! - 뚜루 『카페에서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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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독서는 드라마 시청이나 음악 감상보다 힘이 많이 드는 행위다. 상대적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게 수동적이라면 독서는 보다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대부분에게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활동에 비해 활자를 읽는 활동이 더 집중을 요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직장인의 1년 평균 독서량이 14.8권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독서에도 힘이 많이 들지만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기는 일은 더 어렵다. 후기를 쓰는 것은 독서보다 한 차원 더 능동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6년 동안 매주 1편 이상 카툰 서평을 쓴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얼마나 부지런한 사람일까. 필명 뚜루. 뚜루는 채널예스에 ‘뚜루와 함께 고고씽’이라는 코너에 자신의 독서 후기를 카툰으로 연재했다.

 

⇒ 뚜루와 함께 고고씽 보러 가기

 

 

최근 그녀가 그린 카툰이 『카페에서 책 읽기』라는 책으로 나왔다. 출판계에는 다양한 독서가로 활동하고 있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이현우 씨, 감성적인 문체의 소유자이자 CBS 라디오 PD인 정혜윤 씨, 청춘 독서가 김애리 씨, 다독이 아니라 정독을 강조하는 광고 전문가 박웅현 씨가 그들이다. 이들의 무기가 글이라면 뚜루는 카툰으로 책을 소개한다. 『카페에서 책 읽기』는 카툰 서평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책이다. 활자가 아니라 그림이다 보니, 독자가 읽기에는 부담도 덜하고 재미있다.

 

이미 채널예스에 연재한 내용이기에, 책으로 출간하기가 쉬웠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평범한 원고라면 키보드로 수정하면 끝이지만, 카툰은 이미지를 다시 그려야 한다. 책에 넣을 카툰을 고르는 작업도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절판이나 품절된 작품은 뺐고, 뚜루가 좋아했더라도 인지도가 낮은 소설은 제외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베스트 컬렉션 39. 이중에서도 뚜루는 장은진, 천명관, 줄리언 반스의 작품에 특히 애착이 간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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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책을 많이 읽는다. 1년에 어느 정도 책을 읽나. 신간 소식은 어디에서 접하는지.

 

100권 정도? 권수를 세어가며 읽지 않아서 정확한 수량은 모르겠다. 초반에는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신간도 있었다. 그렇게 받다 보니, 부담 되더라. 꼭 해야 하는 숙제 같은 느낌. 받아도 한 두 번 안 하다 보니, 끊겼다. 신간 소식은 이웃 블로거가 쓴 리뷰에서 확인한다. 주로 예스24 블로거다. 오프라인에서의 내 친구들은 책을 거의 안 읽는다. (웃음) 도서관에도 자주 간다. 현실적으로 보고 싶은 책을 모두 살 수는 없으니, 도서관에 매입 신청해서 한꺼번에 본다. 좋아하는 작가 책은 산다.

 

채널예스에는 어떤 계기로 연재하게 됐나. 6년 연재하면서 마감을 지켰다. 비결이 있는가.

 

블로그 축제 1회 때 대상을 받았다. 그 후로 예스24로부터 웹툰 연재 제안이 왔다. 마감 지키는 비결은 간단하다. 재미있으니까. 재미 없다면 어떻게 6년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 중에는 1주일에 3편이나 4편 리뷰 쓰는 블로거도 있다. 그런 사람에 비한다면 내가 대단하지는 않다. 글보다 이미지가 더 간단하게 나올 수 있다. 다만, 떠오르는 이미지가 안 나오면 그리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책은 하루만에 읽어도 몇 주일 동안 결과물이 안 나올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가.

 

다른 책을 읽는다.

 

그림을 배운 적이 있나.

 

공예과를 졸업했다. 20대 초반까지 그림에 몰입하다 20대 중후반까지는 직장인 모드라 그림과 멀어졌다. 다시 그림에 재미를 붙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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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서 본인을 노출하는 걸 꺼려 한다. 이유가 있나.

 

개인적으로, 이 인터뷰가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였으면 한다. (웃음) 나보다는 캐릭터가 부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캐릭터가 아니라 캐릭터를 그리는 작가가 알려지면 작품이나 캐릭터에 대한 환상이 깨진다. 뚜루를 인터넷에 존재하는 나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일상의 나보다는 뚜루에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

 

뚜루는 무슨 뜻인가.

 

집에서 부르는 애칭이다. 특별한 뜻은 없다. 지인 중에서는 불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더라. 채널예스에서 연재하기 이전에 뚜루가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덜 정돈된 모습이었다. 연재를 시작하고 좀 더 귀엽게 보이도록 동글동글하게 그렸다. 귀인지 머리인지 모호한 모양인데, 귀에 가깝기는 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도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뚜루의 카툰 서평을 보면, 대부분 호평 위주다. 혹시 좀 더 독하게 그릴 생각은 없나.

 

그러고 싶긴 한데 어렵다. 책을 낸 입장에서 독해질 수 없더라. 작가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만든 책이지 않나. 여기에 대놓고, ‘이따위밖에 못 쓰니, 나무가 아까워.’, 이렇게 말하면 상처 받겠더라. 친구들과 개인적인 자리에서 뒷담화를 하긴 하지만 공개적으는 악평 카툰을 그릴 생각은 없다. 나는 책을 추천하는 입장에서 카툰을 그린다. 그리고 다른 블로거도 그렇지 않나. 나 이 책 정말 별로야, 라고 생각하고 말지 그 내용을 굳이 리뷰로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신 건강에도 안 좋다.

 

카툰에 밝혔지만, 책을 읽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많이 읽었다. 계기가 있나.

 

어렸을 때 많이 읽었다. 중학교 때까지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책을 놓았다. 20대 중반까지 책을 거의 안 읽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무료하더라. 놀러가는 것도 한 두 번이고. 스트레스도 쌓이고. 스트레스를 풀려고 책을 읽었다. 스트레스 풀려고 술 마시는 것보다 책 읽는 게 훨씬 낫다. 대학 때 나도 많이 마셨다. 술도 안 마시면 주량이 준다. 20대 초반까지는 스트레스를 술로 풀다, 그 이후에는 책으로 풀었다. 술 한 번 마시면 2만 원에서 3만 원 아닌가. 몸도 못 견디고. 독서가 스트레스 풀기에는 가장 싸게 먹히고 안전한 방법이다.

 

부산에 살고 있다. 다른 문화 산업도 그렇지만, 출판 역시 서울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부산에서 작업하기 어려운 점은 없었나.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출판사 분들이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내고 보니 지역적인 거리감이 느껴지긴 하더라. 인터뷰라든지, 독자와 만남, 출판 기념회 등이 서울 쪽으로 편중되었으니까. 그 외에는 만족한다. 부산에서의 작품 활동은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고 신나게 걷는 기분이다.

 

출판 쪽에 많은 사람이 활동한다. 서점, 출판사, 작가. 이 많은 사람 중에서 뚜루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책 추천하는 사람.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등,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낼 자신은 없다. 보는 눈은 있지만 쓸 줄은 모른다. 다만 나에게 맞는 책을 고르는 능력은 어느 정도 길렀다.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책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면서 보람도 느낀다. 요즘 책이 정말 많이 나오지 않는가. 채널예스 댓글에서 ‘뚜루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됐다.’는 내용을 보면 뿌듯하다. 
 
차기작 계획은?

 

늘 계획은 있다. 이 책이 많이 팔리면 뚜루 카툰을 다른 책으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뚜루 카툰 외에 그림책 작업도 해보고 싶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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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책 읽기
뚜루 저 | 나무발전소
어느 날 책이라는 신세계에 사로잡혀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머릿속 상상의 세계를 카툰에 담아 서평을 올리다가 책 읽기의 고수가 된 뚜루! 그림이라는 시각적 효과의 장점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현저하게 미흡한 글발(?) 때문에 카툰 서평을 시작한 그가 6년여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채널예스 ‘뚜루와 함께 고고씽’에 올렸던 최고의 서평만을 골라 묶은 책이다.

지리산은 나를 자꾸 반성하게 만드는 산 - 박원순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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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깨달음을 얻었다.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타는 것’이었다. “조금만 가면 종착지가 나타난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런 날은 결코 없었다. 무조건 걸어야 했다. 정량을 이행하지 않으면 절대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조건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내디뎌야 했다. 고통스럽다. 스스로 고통을 선택한 것은 운명이다. 산 위로 돌을 굴려 올라가면 다시 떨어지고, 그것을 다시 굴려 올라가야 하는 시시포스의 운명처럼 봉우리를 걸어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고, 또 다시 올라가야 한다. 계속되는 이 고난을 ‘운명’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 기분 나쁜 축축함, 가쁜 호흡과 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대간 길. 쉬지 않고 걸어야 하는 것은 내 운명의 일부가 되었기에 이제 도망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희망을 걷다』 p.98~99)

박원순 서울시장, 그는 왜 백두대간을 종주해야겠다고 결심했을까. 박원순 시장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휴식이 필요한 전환기를 맞이했을 때, 박원순 시장은 어김없이 휴식을 가졌다. 그 시간이 자신을 변모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1,92년 유학생활을 통해 인권변호사에서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서의 변화가 이뤄졌고, 1998년 미국 아이젠하워재단 초청으로 떠난 여행과 2000년 세 달 동안 머물렀던 독일여행, 2005년 방문 교수 자격으로 머물렀던 미국 스탠포드대학 생활이 박원순 시장으로 하여금 ‘희망제작소’를 만들게 했다. 그는 “전환기의 휴식은 아주 정직하다”고 말한다. “억지로 의미 부여를 하거나 거짓으로 멋진 일정을 만들어 꾸며댈 수가 없어요. 그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결과도 뜻도 만들어내지 못하니까요. 사람의 전환, 휴식이라는 것은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게 됩니다. 백두대간 종주도 그러했습니다. 제게는 신체적으로도 큰 도전이었지만 당연히 그렇게 해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서울시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기 전, 박원순은 백두대간 종주에 앞서 일기장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두 달 간의 이 백두대간 종주도 또 다른 전환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는다.”그리고 종주 41일째가 되는 날, 그는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박원순에게 산이란, ‘최후의 막후’였다. 시장 출마를 결심하고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실존적인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고 그 일이 가능하게 해준 배경이 산이었기 때문이다.




꼴찌로 걸으니 저절로 명상과 성찰이 되더라

전환기를 맞아 특별히 ‘백두대간 종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민족의 삶을 의탁해온 이 땅의 등줄기가 백두대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했습니다”라고 멋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지만(음) 제가 워낙 산을 좋아하고 지리산은 아내와도 여러 번 올랐습니다. 주변 분, 최창남 목사님으로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권유를 받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게 주말마다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욕심에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말처럼 쉽지를 않더라고요. 주말에만 오르는 것,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았고 성에 차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뭐든 한 번 하면 집중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 희열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휴식이 필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백두대간 종주를 통해 또 다른 전환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떠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리산 종주를 많이 하셨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산이 지리산인가요?

가장 좋아하는 산이 맞을까요? 익숙하고 만만하게 생각하여 7개월 된 둘째 아이를 태중에 둔 아내를 데리고 갔다가도 크게 혼쭐 난 적이 있습니다. 책에도 나와 있는데 새삼 되짚어 말하려니 아내에게 또 미안해지네요. 지리산이 좋은 산은 좋은 산인가 봅니다. 자꾸 반성을 하게 만드니까요(웃음).

가장 어려웠던 구간, 심리적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곳은 어디였나요?

모든 구간이 샅샅이 힘들었고, 돌아보면 힘들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의 거리 계산을 믿고 한참을 걸어가 닭계장 한 그릇을 먹을 때도 그랬죠. 그 작은 가게에 TV에서 뉴스가 나오는데 외국 주주들과 기관 투자자들이 64조를 빼내 주식 대공황이 왔다는 소식과 연이은 자살한 개인 투자자들의 아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예전부터 우리나라는 소기업 천국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안정된 경제와 삶을 누릴 수 있다 주장해왔던 것도 떠올랐습니다. 백두대간 종주 시작 무렵, 가장 큰 화두가 사회적 경제에 관한 것이었으니 더욱 그러했지요. 그런데 백두대간 안에서만 용을 쓰고 있는 제 모습에 제 스스로가 힘들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밤엔가는 아버지 생각에 힘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마당에 평상을 펴고 누워 있으면 아버지는 왕겨에 약쑥을 넣어 불을 피우셨거든요. 그러면 모기들이 도망을 갔습니다. 하늘에 총총한 별을 헤다 잠들었지요. 그 때는 왜 그렇게 별이 많았는지. 백두대간을 베고 누워 또 많은 하늘의 별을 보자니 마음이 힘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하나도 힘들지 않지요. 그런 것입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떠나기 전, 다섯 손가락 대원들과 한 약속이 있었나요?

특별한 약속은 없었습니다. ‘다섯 손가락’ 대원들 서로가 마음속으로 한 다짐은 ‘함께 걷자’는 것이었겠지요. 모두 약점이 많은 사람들이었고 그것은 산행에 익숙한 석대장도 마찬가지, 보급 대장을 맡은 신 팀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함께 걷자’는 것이 가장 큰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종주를 하면서 대원들과 꼴찌 경쟁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시장님께서 1등을 했던 구간은 없나요?

거의 꼴찌였습니다(웃음). 그런데요. 아주 꼴찌로 가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일등만큼이나 부담이 심한 일이지요. 하지만 종종, 혹은 주로 꼴찌로 가면 느긋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일행과 크게 안 떨어지면서 맨 뒤로 걷다 보면 명상과 성찰을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종주를 했다면 실패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함께 걸어준 대원들에게 어떤 마음이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연히 실패했을 겁니다. 아니, 시작도 못했을 테니 실패도 없었겠네요. 함께 걸어준 대원들에게는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여전히 생생히 갖고 있습니다.




산이 마음을 움직여 서울시장 출마 결정

종주 41일째, 출마를 결정하셨습니다. 김수진 교수님의 설득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데 교수님의 이야기 중에 마음을 움직인 말은 무엇이었나요?

말보다는 친구의 우정이, 시대를 그냥 둘 것이냐는 학자의 호통이 함께 다가왔습니다. 친구는 마치 진지의 좌장처럼 제 곁에 든든한 사람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소중한 친구, 동료, 선후배와 급물살을 탄 듯 만났습니다. 윤석인 부소장은 ‘모든 정치 세력이 힘을 합해 도와줄 꽃마차’같은 것은 애초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도 하였습니다. 언감생심, 꽃마차가 웬 말이겠습니까.

백두대간에서 받은 정치 참여 권유는 서울에서 받은 권유와는 사뭇 달랐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의 권유였다면 그 때도 어렵더라도 물리쳤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산이 저를 그렇게 움직인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운명이 빙 도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산에서 받은 권유는 멀리서 쏜 화살이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정치에 참여하겠다. 무엇을 이루든 나를 버리겠다, 결심하고 나니 이제는 방향이 바뀌더군요. 운명의 활시위는 당겨졌고 저라는 실존은 화살이 되어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며 몇몇 사람들과 산신각이나 성황당의 음식을 나눠먹었기에 산신령이 벌을 내리셨다는 농담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삶을 의탁해 사는 우리 국토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산신령 아닙니까? 벌도 대단한 벌이었지요(웃음).

대원들에게 바로 결심을 말하지 않으셨는데, 종주에 영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설명하기 힘든 마음이지만 미안한 생각이 컸습니다. 그냥 가능한 끝까지 함께 걷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한 명의 대원으로서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종주 중에 많은 분들을 만나셨는데 그리운 사람들도 많겠습니다.

모두 차고 시원한 석간수 같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가끔씩 유독 아이들이 눈에 삼삼합니다. 선생님들과 산을 오른 영주 중학교 아이들도 생각이 나고, ‘백두대간 자연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슈퍼마켓 사장이 되면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을 줄 알고 있던 영길이나 꿈이 아주 많았던 미영이 생각도 납니다. 떠날 때 ‘왜 허락도 없이 떠났느냐’ 전화도 했던 기특한 아이들. 산에 있을 때는 산에 없는 사람이 그립고, 산에 없으니 산에 있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희망을 걷다』에서 신충섭 팀장을 이야기하면서 셰르파를 언급하셨습니다. 지금 시장님에게 셰르파 같은 존재는 누구입니까?

그런 존재,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울 시장이라는 자리는 엄청난 조직의 수장입니다. 그 수많은 동료들이 서울 시민의 행복이라는 목표를 두고 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생각해보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도 전부 시장의 이름으로 나옵니다. 실상은 공동 작업인데 말입니다. 시장은 일단 잘 얻어먹고 다니고 맨 앞자리에 섭니다. 시장이 움직이면 카메라가 따라오고 사람들이 깍듯이 대하여 줍니다. 때로는 참 공정하지 못하다 제 스스로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힐러리경보다 그의 세르파였던 텐진 노르게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지요. 신충섭씨라는 세르파가 없었다면 저는 백두대간 종주를 못했을 것입니다. 3일이 멀다 하고 과일과 영양가 있는 식사, 심지어 가끔은 아이스크림이라도 챙겨다 준 최고의 동료였습니다. 함께 종주한 다섯 손가락 동료 모두 마찬가지이고요.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셨던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저의 제일 가는 세르파는 우리 서울시 직원들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새로운 전환과 답이 필요하다면, 백두대간 종주를

서울시청산악회와 도봉산도 오르셨는데, 요즘에도 가끔 산행을 하시나요? 산행을 할 때 백두대간 종주 생각이 많이 나실 것 같은데, 그 때와 지금. 어떻게 다른가요?

요즘은 북한산 둘레길 산책 정도가 생각해볼 수 있는 계획입니다. 한 번, ‘현장 시장실’ 운영으로 매우 바쁠 때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금요일 밤에 10시에 출발해 밤새 올라 일출 보고 내려오는 일정이었지요.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그 맛이 어찌나 달든 지요. 백두대간 종주 생각은 많이 납니다. 큰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도 합니다. 마음은 다릅니다. 그 때는 전환기의 휴식이었다면 지금은 짧은 산행이라도 또 다른 동력이 됩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한 선배로서, 앞으로 떠날 계획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

계획과 준비를 철저히 하십시오. 그리고 초행일수록 동료를 잘 만나셔야 합니다. 산을 만만히 여기지 마시고요. 모든 태산준령으로부터 잘 허락을 받으십시오. 그럼 큰 선물을 받으실 겁니다 (웃음). 뭔가 새로운 전환과 답이 필요하신 모든 분께 백두산 종주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2011년 12월, 예스24 독자들이 선물한 책(http://ch.yes24.com/Article/View/18877) 중에 어떤 책을 가장 인상 깊게 읽으셨나요?

『꾸리찌바 에필로그』는 이전에도 감명 깊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꾸리찌바’를 방문하면서 더욱 새롭게 내용들이 살아났고요. ‘사회적 기업 창업 교과서’는 서울이 사회적 경제 생태계를 꾸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으니까요. 더 반갑게 내용을 기억하며 읽었지요. 『도시의 승리』같은 경우도 도시에 대한 시각을 폭넓게 하는데 새롭게 읽었습니다. 50권을 또 선물해주시면 더욱 새롭게 읽겠습니다(웃음). 이건 농담입니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은 무엇인가요?

제가 답답한 것 중에 하나가 산에 갈 시간, 책 읽을 시간이 많이 안 납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의 『행복의 경제학』을 모 지면에 추천해드린 적도 있었는데요. 최근에는 사회적 경제에 관한 책들을 모아서 읽어보고 있습니다. 주제를 정하고 여러 권을 집중해서 읽으면 사고의 틀을 정립하고 응용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지금, 시장님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신년, 개인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최대 관심사는 ‘서울’, ‘서울 시민의 삶의 행복’, ‘시민의 삶에 구체적으로 시행정이 힘이 될 수 있는 다양하고 종합적인 방법’입니다. 개인적인 목표도 같습니다.

『희망을 걷다』저자로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 책이 나오기까지, 백두대간을 걸기 시작할 때와 마칠 때에도, 돌아보면 제 생의 전부에 걸쳐 ‘함께 걷는’ 동료가 가장 소중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걸음도 서로가 서로의 걸음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었고요.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걸음을 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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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걷다박원순 저 | 하루헌
이 책은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박 시장과 그의 동료들이 흘린 땀 냄새가 가득하다. 발톱이 빠지고 신발은 닳아 해지며 어렵사리 걸은 여정의 기록이다. 이 힘든 여정을 통해서 박 시장이 본 것은 한반도의 역사와 민족의 운명과 우리 앞의 현실이었다. 한 발자국, 하루, 한 문장, 한 페이지에 그 생생한 기록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독자는 책 속의 문장을 통해 박 시장이 느꼈던 백두대간의 자연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가장 생생한 백두대간 종주 안내서이며, 현실에 대한 냉정한 기록서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잘 다니던 직장 잃고 선택한 것은 ‘떠남’ - 김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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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그 사람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아니, 글이 그 사람을 반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글은, 어떤 사람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단, 단서가 붙습니다. 글쓴이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을, 문장 안에 굴절 없이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문장 안에는 글쓴이의 어린 시절, 글쓴이의 성격, 글쓴이의 성격적 취약점 등까지 미묘하게 배어있어 독자들은 어느덧 그 사람을 상상하게 됩니다.
<채널예스>는 그런 글을 쓰고 있다고, 또는 쓰게 되리라고 여겨지는 남자 몇 명을 여러분께 소개하려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오직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편집자 주

영감은 슬픔에서 나왔어요

김동영 작가가 생선이라면 지금껏 한 번도 포획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팔딱팔딱 수면을 차고 오르는 생선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작품 밖의 그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뿌연 눈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수족관 안의 생선을 연상했다. 슬픔에 걸맞은 접혀진 지느러미로 천천히 유영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데 눈앞의 작가는 달랐다. 그는 수족관이 아닌 넓은 바다에서, 힘껏 지느러미를 세우고 경쾌한 속도로 질주하는 생선이었다.

“책에 담긴 우울의 정서가 저에게 없다고 할 수는 없죠. 조울(躁鬱)의 기복이 있다고 하면 지금은 우울한 것보다 조(躁)의 기운이 더 강한 걸 거예요.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나만 위로할 것』두 권의 책은 슬픔이 영감이었던 것 같아요.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들, 고민들, 그런 저의 얼룩들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죠.”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는 30대의 문턱에서 작가가 자신에게 선물했던 230일간의 미국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지독한 외로움과 상처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시간들로 기억되는 그 여행은 ‘반갑지 않은 소식’에서 시작되었다. MBC 라디오의 음악작가로 근무하던 그에게 해고 통보가 내려진 것이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던 봄날이었다. 멀쩡하게 잘 다닐 줄 알았던 직장을 잃게 된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무엇일까. 김동영 작가는 ‘떠남’을 택했다.

“세상의 소모품처럼 교체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체스판 위의 왕들의 말이 된 느낌이랄까요.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정사각형 안에서 정해져 있는 길로만 움직여야하는 말들이요. 그래서 생각했죠. 내가 동경했던 길을 떠나야겠다고. 가진 걸 다 팔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미국 여행을 떠났어요. 여행하는 동안 죽을 만큼 외로웠어요. 중간에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상처를 느꼈어요. 혼자 남겨질 수도 있다는 상처요.”


외로움은 숨길 수 없는 것 같아요

그에게 어머니는 각별한 존재였다. ‘어떻게 될지 모를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때도’ 언제나 작가를 지지해주셨던 분이었다. 어쩌면 그런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작가는 미국의 한 가운데, 네브라스카 주를 지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까, 걸음을 멈추고 주춤하는 그의 등을 슬쩍 떠민 이는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아들이 예정대로 여행을 끝마치기를 어머니는 바랐다. 어렵게 앞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작가를 덮쳤고, 짓눌렀다. 미친 듯이 걷고 쓰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야윈 어머니와 마주했을 때 그림자처럼 죄책감이 따라붙었다. 하루빨리 책을 출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는 그렇게 어머니의 사랑과 응원 속에서 세상으로 나왔다.

첫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할 즈음 어머니의 병환이 차도를 보였다. 다시 한 번 어머니는 아들의 등을 힘껏 떠밀었다. 다음 여행을 위해 떠나야할 때임을 작가도 어머니도 알고 있었다. 아이슬란드로 떠난 180일의 여행이었다. 외로움과 상처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고 공황장애와 우울증도 좀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여행 에세이에 실리는 모든 글들은 그 때 그곳에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그이기에, 쓰는 것을 끝마치기 전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여행이었다. 어머니께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비로소 여행은 끝이 났다. ‘퇴각하는 독일 병정처럼’ 한국으로 돌아 온 작가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신 어머니와 마주했다. 어느 때보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에 이어 『나만 위로할 것』의 편집을 맡은 출판사 달의 대표인 이병률 시인도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시인은 김동영 작가와 어머니를 위해 『나만 위로할 것』의 정식 출간에 앞서 스무 권의 책으로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엮어 주었다. 그것이 김동영 작가가 어머니께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두 책은 그런 시기에 쓴 글이기 때문에 밝을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슬픔은 제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이지, 읽는 사람의 몫은 아니잖아요. 개인적인 아픔이기 때문에 드러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아픔이 묻어난 글들은 편집 과정에서 모두 들어냈죠.”

김동영 작가는 홀로 떠난 두 번의 여행을 통해 자신의 몸에 밴 외로움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가난과 배고픔, 나약함은 숨길 수 있고 아닌 척 할 수도 있지만 외로움만큼은 예외인 것 같다고 했다. 슬픔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일까. 작가가 내비치지 않으려했던 외로움과 슬픔이 두 권의 여행기 안에서 묻어나는 걸 보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은 작가라기보다는, 글 쓰는 생선이죠

김동영 작가를 생선이라 부르는 것은 수월한 측면이 있다.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탓에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한 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 사진가, 작사가, 음악 작가, DJ, 뮤지션 중 하나만을 골라 그를 설명한다는 것이 쉽지도 않을뿐더러 결코 충분치 않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정체성에 대해. 그는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로 무엇을 선택할까.

“글이요. 작가라기보다는 ‘글’이에요. 저는 작가라는 표현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제 소설이 나왔을 때 작가라는 호칭을 받고 싶어요. 지금은 글 쓰는 생선? 이 정도가 나은 것 같아요.”

결국 글이었다. 그렇다면 시작도 그러했을까.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를 출간하기 전에 김동영 작가는 라디오작가였고, 그 이전에는 음반사에서 공연 기획과 뮤지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었다. 음악과 글의 경계에 서 있는 듯 보였던 그가 글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이병률 시인과의 인연이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김동영 작가의 선배였던 이병률 시인은, 그가 퇴사 후 미국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출간 제의를 했다. 어쩌면 김동영 작가는 이병률 시인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 원석일 지도 모른다.

“저는 너무 평범했고 재미없는 삶을 살았어요. 하지만 늘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특별함을 발견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음악과 책이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이 갖고 있는 패턴을 따라 연기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것이 인생 속에서 묻어나고 행동으로 나타났죠. 마흔 살 전에 한 권의 책을 내는 게 꿈이었어요. 구체적으로 계획한 책은 없었지만, 스무 살 때 처음 대학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글을 쓰면 내가 원하는 원대한 꿈, 갖고 싶은 이상, 그런 것들을 다 내 안에 품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현실의 나는 평범하지만 글 안에서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잖아요.”


독자들은 빈틈이 많은 글을 좋아해요

김동영 작가에게 책 속의 세상은 자신의 판타지를 실현해 줄 ‘꿈꾸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서 새로운 자신으로서 허구의 이야기를 쌓고 변주하는 것이 얼마나 짜릿하고 멋진 일인지 이야기하는 작가는 상기되어 보였다. 이로써 그의 정체성은 확실해졌다. 음악도 아니고 사진도 아닌 ‘글 쓰는’ 생선. 그 이야기를 더욱 더 파고들었다.

“저는 책을 읽는 것에서 글을 배운 것 같아요. 그래서 미친 듯이 읽었어요, 대학교 내내. 장르나 내용은 상관없어요. 주로 남들이 읽지 않는 책을 선택해서 읽게 되는 것 같아요. 비트제너레이션에 관련된 책들은 거의 다 읽었고요, 역사소설 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소설들을 좋아해요. 헤밍웨이나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카버 같은 스타일의 문체를 좋아하는데요. 헤밍웨이는 시카고리뷰지 기자로 근무하면서 처음 글을 배웠다고 해요. 복잡하게 쓰지 않는 것,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 길게 쓰지 않으면서도 정확한 단어를 쓰는 것, 이것을 통해서 글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하는데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굳이 길게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김동영 작가는 좋아하는 작가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잭 케루악을 꼽았다. 가끔 인터넷을 보면 그를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빠’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작가는 그런 반응이 좋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김동영 작가에게 있어 열쇠이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되고 싶은 건 아니죠. 제가 좋아하는 건 50~6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비트제너레이션이라는 문학의 흐름이에요. 지금 미국에서 그 계보를 잇는 작가가 없는데 70~80년대에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등장한 거예요. 그의 초기 작품들을 읽어보면 비트제너레이션 작가들이 썼던 소설 작법들을 많이 차용해서 썼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간결하고 리드미컬한, 쿨한 문체들이 그렇죠. 장면 전환이나 대화체가 일상적이면서도 모든 걸 포괄하고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모두 비트제너레이션에서 나온 것들이에요. 제가 볼 때는 『해변의 카프카』, 『스푸트니크의 연인』부터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문체를 찾아간 것 같아요. 대성을 이룬 거죠. 저는 후반의 작품들도 인정하지만, 모든 걸 빨아들인 듯한 초반의 작품들을 더 좋아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필사하면서 단어를 바꿔보는 연습도 했다는 김동영 작가. 그에게는 글에 대한 철학이 있다. 길면 안 된다는 것. “사람들은 빈틈없는 글은 존경해요. 작가가 글을 논리적으로 완벽한 짜임으로 써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때요. 하지만 제 글은 바늘이 아니라 주먹이 들어갈 만큼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요. 독자들은 그 구멍을 자기의 감수성으로 채워 넣고 싶은 것 같아요.”김동영 작가의 글에는 3인칭이나 2인칭이 나온다. 정확하게 상대가 없이 그와 그녀가 있고, 당신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독자들은 그것을 작가가 그들에게 던지는 화두나 하소연으로 듣기 때문에 빈틈을 다 채워준다. 김동영 작가는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은 문장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요즘 블로그만 보더라도 저보다 훨씬 더 글을 잘 쓰는 분들이 정말 많잖아요. 제가 그 분들과 다른 점, 출판사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이 있다면 저 역시 똑같은 선상에 서 있다는 거죠. 제가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뭔가 이뤄놓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화두나 문제를 던졌고,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이 공감을 해서 제 책에서 위안을 얻었던 것 같아요. 제 이야기를 들려주면 독자들이 자기 이야기라고 받아들인 거죠.”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가보고 싶어요

김동영 작가는 최근 『소립자』라는 책을 최근에 읽었는데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들, 그것이 허황되지 않는 것, 그런 부분들 때문이다. 『새벽의 약속』은 책의 서사 구조가 참 좋았다. 헤밍웨이 같은 경우에는 몸에 폭탄을 안고 자폭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라고. “잭 케루악은 틀 안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쓰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지고요. 그리고 김연수 작가를 존경하고요(웃음). 문장이 안 써질 때는 김경주 시인, 마종기 시인 책을 많이 읽어요.”

그는 좋아하는 글을 필사하면서 문장의 구조를 배운다. 직접 메모한 노트만 약 40권이 넘는다. 작가가 쓴 글도 있고,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적어놓기도 한다. 좋아하는 글을 적으면서 공부하는 것이다. 필사를 하다보면, 작가가 어떤 식으로 문장과 문장을 나누고 장면이 전환되는 지를 알게 된다고. 요즘에는 러셀 셔먼의 『피아노 이야기』를 읽으면서 논리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에세이는 100% 리얼리티지만 소설은 논리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행 에세이는 안 쓰겠다고 혼자 절필 선언을 했어요(웃음). 만약 쓰게 된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 한 권 정도 쓸 것 같아요. 지금은 중장편을 쓰고 있는 중이에요. 인류의 평균 수명이 120살이 되었을 때 인간이 과연 120살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존재인가에 대한 내용이에요. 어두운 이야기죠. 거의 마무리 단계인데 탈고 작업은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소설은 감성만으로 되지 않고 논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써야 할 것 같고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이 끝나면 로드 무비 시나리오를 하나 써 볼까 생각하고 있고요. 이후에는 두 권의 에세이를 계획하고 있어요. 한 권은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 될 것 같고, 또 하나는 음악에 담긴 저의 추억에 대한 에세이가 될 거예요.”

한 자리에서 보통 7~8시간 글을 쓰는 김동영 작가는 집에 오면 온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반드시 행운의 양말(?)을 신고 글을 쓰기도 했는데, 요즘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나를 믿고 글을 쓰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건 의심하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스스로 끊임없이 의심이 되거든요. 내 재능이라든가 능력에 대해서 의심을 되게 많이 하게 되는데, 그게 대가가 아닌 이상 의심이 돼요. 저 같은 경우에는 징크스는 많이 벗어났고요,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은 거죠. 그런데 저는 뮤즈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저를 돌봐줄 뮤즈. 저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모든 걸 던져버리고 써서 먹는 것, 자는 것, 이런 것들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리거든요. 온기를 나눠줄 사람이 필요한 거죠.”

“글만 안 쓴다면 작가는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웃음). 아이슬란드에서 글을 쓸 때는 치아가 빠지기까지 했다니까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든 일이죠. 하지만 끝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저한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재치가 있는지, 논리가 있는지, 글을 쓸 만한 그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지치지 않고 쓰고 싶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찾아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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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위로할 것김동영 저 | 달
‘항상 엔진을 켜둘게’와 같은 노래를 작사하기도 하였으며 MBC에서 음악작가로 일한 경력을 지니고 있는 작가. 김동영이라는 이름보다 ‘생선’이라는 이름으로더 많이 불리는 그의 새로운 여행 에세이다. 전작 『너도 떠나보면 알게 될거야』가 미국에서의 230일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면 이 책은 눈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보낸 180일 간의 기록이다. 세상에 맞설 용기도, 그냥 주저앉기도 싫어 방황하던 청춘이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는 자신의 여행과 인생, 그리고 사람과 사랑에 관한 생각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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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한국 기술로는 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 어렵다 - 전민희 『전나무와 매』, 『상속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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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돌』, 『태양의 탑』,『룬의 아이들』그리고 최근 출간한 『전나무와 매』『상속자들』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표 판타지 작가 전민희가 쓴 소설은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며 널리 사랑받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대만, 태국 등에서도 그녀의 작품이 번역되었다. 아마존 재팬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1위, 야후 재팬 선정 '2006년 가장 많이 읽힌 소설'등에 오르기도 했다.

 

판타지라는 특성상, 전민희 작가의 작품은 RPG 게임과 인연을 맺어왔다. <4leaf>, <테일즈위버> 시리즈의 배경 세계와 캐릭터 설정을 맡았고 최근에는 리니지와 바람의 나라를 개발한 송재경 대표와 함께 ‘아키에이지’라는 게임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장르 소설은 종종 있었지만, 게임 개발 초기부터 유명 작가가 직접 참여한 경우는 많지 않은데 ‘아키에이지’가 바로 그러한 게임이다. 전민희 작가의 근작, 『전나무와 매』『상속자들』은 아키에이지 연대기 시리즈로, 게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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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에이지’ 게임 개발 처음부터 참여했다. 정식 서비스를 한 지 1개월인데, 근황이 궁금하다. 게임이 출시되었으니, 조금은 한가해졌겠다.

 

한가할 일은 한동안 없을 것 같다. 조만간 아키에이지 종족을 추가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4종족의 메인 히스토리를 작업했다. 새로운 종족을 추가하려면 내가 먼저 작업해야 한다. 그리고 기존에 쓰고 있는 『태양의 탑』집필 작업을 했다. 중국 출간 발표회에 다녀왔고, 기타 홍보 관련 일정도 소화하고 있다. 경복궁 옆 서촌마을로 이사왔다. 이 동네에 3년 살았다. 그 전에는 여기 저기 이사하는 걸 좋아했다. 여기 오고 나서는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아이를 낳아서일 수도 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이웃분이 예뻐 한다. 마을에서는 전민희 작가가 아니라 누구 엄마로 더 유명하다.

 

아키에이지’는 송재경 대표의 복귀작이라는 점, 전민희 작가가 시나리오를 맡았다는 점 등으로 출시 전부터 화제였다. 게임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워낙 방대한 게임이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흔히 말하는, MMORPG다. 세계가 있고, 그 안에서 유저들은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캐릭터를 키운다. 기존 MMORPG와 다른 요소는, 생활과 관련한 활동이 많다는 점이다. 가령,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게임 속에서 귀농한다는 표현을 하는데, 농사를 지어서 농작물을 거래할 수 있다. 기존 게임에서는 보통 전투로 레벨업을 했는데, 아키에이지에서는 이러한 생업만으로 레벨업이 가능하다.

 

 

유저가 할 수 있는 활동이 많으니,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라 볼 수 있나.

 

그렇지는 않다. 자유도가 높은 게임은 옛날 게임이다. 울티마 같은 게임은 월드만 주어지고 나머지는 유저가 알아서 해야 한다. 요즘 유저들은 게임을 그렇게 만들면 싫어한다. 최근 게임은 테마파크형 게임이 주를 이룬다. 학교에서 1학년을 마치면 2학년, 3학년, 4학년으로 이어지듯 게임도 그렇게 설계한다. 이러한 요소에 자유도가 높은 옛날 게임의 장점을 결합했다고 보면 된다.

 

게임 시나리오 작업을 여러 차례 했다. 아키에이지 작업은 어떤 계기로 참여했나.

 

기존에 작업한 게임인 <테일즈위버>도 마찬가지인데, 나는 내 작품이 원작인 작업만 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게임을 먼저 만들고, 이후에 스토리 붙이는 경우도 많다. 나는 오리지널 세계를 먼저 만든 뒤, 게임을 만든다. 게임 시나리오와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다르다. 아키에이지 송재경 대표는, 원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만들어줄 작가가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개발자다. 송 대표가 만든 리니지도 만화가 원작이었다.

 

오해하곤 하는데 나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아니다. 그분들 전문 영역이 있다. 메인 스토리는 내가 만들지만 나머지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들이 직접 만든다. 월드 하나를 만드는 작업은 매우 방대한 일이다. 영화는 2시간이고, 보이는 부분만 신경을 쓰면 된다. 게임은 유저가 들어 와서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이런 디테일한 면을 책임지는 게 게임 시나리오 작가다.

 

 

아키에이지 연대기 중 『전나무와 매』,『상속자 상』이 나왔다. 어떤 인터뷰에서는 아키에이지 연대기만으로 40권은 나올 분량이라고 밝혔다. 이 두 권을 읽어 보니 무슨 말인지 알겠다. 두 권은 아키에이지 연대기의 주인공인 진과 로사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이야기한다. 본격적인 모험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소설로는 어떻게 아키에이지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가. 정말 40권을 쓸 생각인가.

 

우선, 40권 쓰는 게 쉽지는 않다. (웃음)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전나무와 매』『상속자 상』사이에 시간이 뜬다. 그 사이 이야기를 일부러 비워놨다. 아키에이지 연대기에는 진과 로사, 12명 원정대 일원이 등장한다. 그 이야기를 다 쓰자면, 너무 많다. 주요 사건만 스포트라이트 할 것이다. 『상속자』는 하권으로 끝난다. 나머지 이야기는 1권, 혹은 2권 이런 식으로 짧게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각 편의 이야기가 완결이되, 인물은 계속 나온다. 영화로 보자면 어벤져스 1이 나오고 어벤져스 2가 나오는 방식. 12명 중 진과 로사가 중요 인물이다. 다른 인물을 진과 로사 비중으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장르소설 쪽으로 입문한 계기가 궁금하다.

 

글쎄. 다른 작가에게도 계기라는 게 있을까 싶다. 처음 소설을 쓴 기억은 초등학교 2, 3학년쯤이다. 4학년 때 기존에 쓰던 걸 모아 단편을 썼고 담임 선생님께 가져갔다. 직접 전달하지는 못했고, 선생님 책상 고무판 밑에 숨겼다. 당시 선생님은 아무런 이야기도 안 해 주더라. 그즈음에 뭐든 쓰려 했다. 발명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때도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재미있게 읽었는데,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든지, 이어서 더 쓰고 싶다든지 하는 경험.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들 때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생각했다. 내가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뒷이야기를 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써 보자는 인식이 생겼다. 누군가에게 글 쓰는 법을 배우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내가 즐거우면 됐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 가장 문제는 노트가 부족한 것이었다. 새학기가 되면, 기존에 썼던 노트는 안 쓰지 않나. 그런 노트 뒷면에 글을 썼다. 삼촌과 함께 살았는데, 대학생이었다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중에는 학생을 가르쳤다. 리포트를 당시에는 원고지로 받았는데, 보통은 굳이 다시 돌려주지 않는다. 그 리포트 뒷장에도 썼다. 당시 썼던 흔적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잘 썼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냥 즐거워서 썼다. 처음에는 친구에게 안 보여줬다. 중학교 때부터 보여주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친구 중에 팬도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쓸 때는 이대로 써서 명작이 될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모두 연습이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책이었다. 나 자신이 발전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내 글이 출간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판타지가 외국에는 있었으나, 한국에는 생소했다.

 

어릴 때부터 쓸 때 자료조사를 많이 했다. 제일 많이 참고한 게, 영한 사전이다. 거기에 이야기가 참 많다. 단어를 찾으려 펼쳤는데, 엉뚱한 걸 찾는다. 그럴싸해 보이는 지형, 식물이 나오면 연습장에 다 기록했다. 그렇게 자료집을 만들었고 지금도 조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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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부터 주변에 팬이 있었으니 나중에 작가가 되겠다는 예상을 어렴풋이 했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장르 소설만의 문법이 있고, 그것을 즐길 토양이 갖춰졌지만 당시만 해도 내가 쓰는 이런 소설은 출간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다른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썼다. 예를 들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있다고 치자. 내가 러시아에 가 보기 전까지는 미완인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아예 사람이 갈 수 없는 세상을 쓰게 되었다. 기이하게 쓰는 방법을 완성한 것이다.

 

PC 통신에서 포털, 모바일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이 즐기는 콘텐츠 형식도 달라지는 듯하다. PC 통신에서 대세가 장르 소설이었다면, 포털과 모바일에서는 웹툰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웹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이미지보다는 텍스트가 친숙해서 웹툰이나 만화책은 잘 안 본다. 이런 흐름에 대해서 고민은 많이 한다. 유행이라는 게 있긴 하겠지만 독자마다 취향은 다를 것이다. 나도 다음에서 연재 제안을 받았고. 나뿐 아니라, 다양한 작가가 네이버와 다음에 연재하고 소설로 출간하기도 했다. 방식은 바뀌겠지만, 내용이 바뀔까 하는 생각은 든다.

 

웹툰은 모바일 시대를 맞다 더 흥행하는 듯하고, 장르소설은 이북 쪽으로 많이 출간한다. 그런데 아직 전민희 작가의 작품은 전자책으로 나온 게 없더라. 전자책에 대해서 혹시 거부감이 있나.

 

한국이 시작은 매우 빨랐다. 잘 안 됐다. 초기에 전자책을 만들던 몇몇 회사가 사라지면서, 파일이 돌아다니는 사태도 있었다. 많은 작가가, 특히 장르 쪽 작가가 불법복제로 피해 받았다. 나도 싫었다. 금전적인 문제, 이런 게 아니라 옛날에 쓴 『세월의 돌』 연재본이 돌아다니는 거다. 뭐 이렇게 못 쓴 게 돌지, 하는 부끄러움 때문에 싫더라. 지금은 그런 것 하나 하나에 집중해서 분노하고 있지는 않으나, 당시 경험 때문에 이북에 대해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작년부터 시장이 많이 커진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나라가 오히려 전자책 시장에서 뒤처진 느낌이다. 다른 나라 전자책 시장이 오히려 한 발 더 앞서지 않나. 한국에서 앞으로 전자책 시장은 더 좋아질 것이다. 당연히 내 작품도 전자책으로 나올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표준화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순수문학과 장르소설을 구분하고 싶어 한다. 문학관을 얘기해 달라.

 

문학이라든가 예술이라든가, 이런 개념이 확장될 필요가 있다. 순수문학, 이러한 개념은 굉장히 정교화되고 다듬어진 개념이다. 여기에 맞는 소설이 순수문학 작품인데, 이제 사람들은 점점 이런 소설을 덜 읽는다. 이제는 위대한 명작만, 좁은 정의의 문학만이 존재하는 시대는 지났다. 문학의 의미, 용도가 달라졌다. 이걸 실용적이라 비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초의 문학, 이야기가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만든 것이다. 지금 정교하게 발전한 문학은 예술품이고, 누군가가 지속해서 해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 표현의 양식으로써, 장르소설이든 웹툰이든 다양한 창작물이 생겼다. 예전에는 소수만이 창작했지만 지금은 수많은 사람이 창작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표현하고 싶어 한다. 예전에는 종교가 이 역할을 맡았지만 이제는 종교 힘이 약해졌다. 창작이 그런 역할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창작함으로써 자신을 치유하기도 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세계가 변했고, 사람들 인식이 변했다. 

 

영화 시나리오 제안도 많이 받지 않나?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해 본 적은 없다. 제안을 받은 적도 있긴 하지만, 한국 영화에서는 아직 내 작품을 만들 만한 기술력이 없다. 반면 게임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게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정말 한국은 자랑할 만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내 작품이 2차 세계를 만들어내는 창작이고, 2차 세계를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온라인 게임 정도다. 독자들 중에도 영화화를 희망하는 팬이 있지만, 아직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청소년이 게임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인, 온라인 게임 셧다운제가 논란거리다.

 

뭐, 예전에는 성인도 밤거리를 다닐 수 없었다. 사회가 퇴행할 때가 있다. 아이를 키우는 처지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부모들이 법적인 조치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많은 부모가 바빠서 시간이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풀어야 한다. 다만, 이런 퇴행이 계속 가지는 않을 거다.

 

소설 쓰는 작업, 게임 시나리오 참여하는 작업 중 어느 게 좋나.

 

소설이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다. 그 분들 영역 배워보고 싶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영역에 발을 뻗치면 나의 독자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일단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 잘 할 것이다.

 

판타지 말고, 다른 글을 쓸 생각은 없나.

 

한국이 배경이 된 연애 소설을 쓰면 드라마화, 영화화 하기도 좋다. 판타지 쓰다, 그런 소설 쓰면 배신이다, 이런 생각은 없다. 다만, 아직 그걸 잘 쓰는 사람의 문법을 모른다. 로맨스에는 로맨스 문법이 있다. 한편으로는 논픽션을 쓰고 싶다. 여행을 했거나, 아이를 키우거나 일상사의 실제 이야기 말이다. 써 보려 해도 잘 안 되더라. 쓰고 블로그에 가끔 올리는데 만족스럽지 않았다.

 

지금 작가가 안 되었다면, 뭘 했을까?

 

정외과를 전공했다. 문학이 아니라 논리적인 글을 써야 하는 학문이다. 논설문 쓰는 게 시험이었다. 대학 때 이런 커리큘럼을 잘 받아들였다. 그래서 대학 친구들이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소설 웬 소설?" 이런 반응이었다. 만약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논리적인 글을 써야 하는 분야에 있지 않았을까. 문학적인 글, 논리적인 글, 둘 다 즐겼다.

 

바쁘겠다. 집필, 게임 시나리오 참여. 가정에서는 가사. 슈퍼 우먼이 되어야 할 텐데.

 

집에 고양이도 키우고 있어서 가사일이 많다. (웃음) 스트레스 안 받으려면 행복하면 된다. 지저분해도 행복하고, 글 못 써도 행복하면 된다. 아니면 스트레스 받는다. 다 잘하고 싶은데, 이런 생각으로 살면 행복하지 않다. 다 잘하고 싶지만, 절대 모두 잘 할 수는 없다, 이런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글 막힐 때,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여행을 좋아한다. 아이 낳기 전까지는 여행을 자주 다녔다. 낳고부터는 여행 한동안 못 갔다. 갔던 생각을 하며 재충전한다. 두브로브니크에 갔는데, 좋았다. 거기에 주황색 주택 단지가 있다. 지금 사는 곳 근처 빌라촌이 비슷한 색이다. 그런 광경을 보며 '내가 두브로브니크에 있군.'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남들 보기에는 전혀 안 비슷한데, 적당히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상상력을 굴리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판타지 작가의 마인드콘트롤, 이라고 해야 할까. (웃음)

 

팬층이 많다. 이중에는 안티도 있다. 안티팬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그분들 서로 분쟁한다. 내가 원하는 뒤편을 써달라, 싸우기도 한다. 일단 그분에게 죄송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렇게도 못한다. 이분들은 아직 와서 내게 욕을 해 주시니, 감사하다. 북경에서였다. 출간 기념회 끝나고 나서 어떤 사람이 『룬의 아이들』 대만판을 내밀며 사인해 달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룬의 아이들 3부는 언제 나오느냐고. 한국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었다.

 

책 많이 읽는다. 요즘 어떤 책 읽나.

 

다양한 책을 읽는다. 한 번에 다 읽지 않는다. 작업하는 테이블 옆에 항상 책이 있다. 컴퓨터 로딩할 때도 본다. 작년에 『열하일기』를 읽었다. 3권 완역판이었다. 굉장히 재밌다. 우리가 중국을 생각할 때, 현재의 중국이나 무협의 중국을 떠올리지, 청나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청나라에 대한 감이 없는 편인데, 나는 이런 책을 읽고세계를 구성해 본다. 아, 이런 느낌의 세계가 있었구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정서가 느껴지더라. 이런 부분이 내가 쓰는 소설에도 많이 반영된다. 논픽션 읽는 게 더 재밌다.

 

주 독자층이 청소년, 대학생이 많다. 이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조언한다면?

 

난감한 질문이다. 나 자신이 현명하다 생각하지 않고, 조언을 할 입장이 아니다. 다만, 뭔가를 만들어 보라는 당부를 전하고 싶다. 그게 작품이든, 아이든. 아이를 낳고 보면, 죽는 게 무서워진다. 그전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아키에이지 연대기 중 주요 테마가, 죽음이다. 어떤 곤충이나, 연어는 알을 낳으면 죽어버린다. 재생산을 하는 순간, 죽음과 가까워진다. 그렇다고 안 낳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없던 걸 만들어냈고, 이제 죽을 운명이다, 이런 느낌을 받아 보면 좋겠다. 아마, 여성 대부분은 아이 낳는 순간 이런 경험을 할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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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자들
전민희 저 | 제우미디어
7년간의 구상 끝에 완성된 『상속자들』은 『전나무와 매』와 함께 ‘아키에이지 연대기’라는 거대한 세계 속의 연작으로 『전나무와 매』로부터 3년 뒤,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몰려드는 ‘위대한 도서관의 도시’로 불리는 델피나드에서 인간이 차지해서는 안 되는 권능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과 우정, 로맨스를 위대한 도서관의 풍경과 뒷골목의 유쾌한 일상사로 다뤘다.

소설가 데뷔한 루시드폴, 이제는 누군가의 약혼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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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쓴 소설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힘주어 키보드를 눌러 쓴 작품도 아닐 거라 짐작했다. 문득 떠오른 상상들이 루시드폴의 손을 통해 문장이 되고 8편의 소설이 만들어졌으리라 추측했다. 예상은 맞았다. 한 편의 소설을 쓰는데 고작 5~6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아니, 이렇게나 빨리 썼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 짐작이 틀렸을지 모른다. 2달에 걸쳐 완성된 루시드폴의 첫 소설집 『무국적 요리』는 조금 싱거울 거라 생각했는데, 맛이 묘하다. 단편들의 제목부터 심상치않다. 탕, 똥, 기적의 물, 행성이다, 싫어!, 추구, 독. 뭔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조합이 아니다. 역시, 루시드폴스럽다.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사진촬영이 가능한지 물었다. 데뷔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설마 소설가로 데뷔했다고 튕기진 않겠지? 설마, 설마, 설마… 역시, 역시, 역시. 사진촬영은 원하지 않는단다. 이유를 물으니, 아직도 콘셉트를 잡고 사진 찍는 걸 무척이나 어색해한다고. 어쩔 수 없이 사진은 받기로 했다. 그러고 며칠 뒤, 사진기자와 동석해도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마침, MBC MUSIC <리모콘> 녹화가 있는 날과 인터뷰 일정이 겹쳐 메이크업한 루시드폴을 만날 수 있게 된 것. 쌩얼 조윤석도 궁금했지만 패션니스타 루시드폴을 만나는 것도 흥미로웠다.

설은 앞둔 날, <리모콘> 녹화가 진행된 성신여대 운정캠퍼스에서 루시드폴과 만났다. 사소한 질문에도 허투루 대답하는 모습이 없었고 젠체하는 표정도 없었다. 기발한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냐는 물음에는 “글쎄요. 우선 감사드리고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다만 길게, 깊게 생각하고 글로 정리하려고 애쓰는 편이에요”라며 겸손해했다. 멋있어 보이는 답을 찾지 않으니, 대화에 속력이 붙었다. 『무국적 요리』를 쓰면서는 ‘과함’을 피하고 싶었단다. 평소 소설 속에서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과하게 늘어놓거나 과한 묘사를 싫어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무국적 요리』를 읽는 내내, 국적 모를 주인공들을 만났지만 그들에게서 짙은 향기가 배어나지 않은 건, 아마 루시드폴의 취향 탓이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가수의 소설을 번역하다가 나도 모르게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산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을 만큼 푹 빠져든다. 루시드폴도 마찬가지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생각의 전부를 차지해버린다. 지난해, 루시드폴은 휴식기를 가졌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 시작한 방송활동이 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마냥, 어색하고 힘들었다. 때론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공연도 앨범 준비도 하지 않은 채, 1년여간 일반인 조윤석으로 살았다. 그리고 때마침, 번역하기로 했던 브라질 가수이자 작가인 치코 부아르케의 소설 『부다페스트』를 꺼내 들었다. 책 속 주인공은 고스트라이터. 남의 이름으로 책을 발표해야 하는 유령작가가 익명성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져들다가 헝가리에 불시착하게 되면서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헝가리어로 시를 쓰는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평소 좋아했던 가수의 소설을 번역하면서 루시드폴은 자연스레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선지 대신 원고지가 그에게 창작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번역 일을 시작한 게 2006년부터였는데 작년에 마침 시간이 여유로워서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래 미뤄둔 숙제 같은 일이었어요. 그러다 출판사 분과 연락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게 됐어요. 사실은 시를 먼저 쓰기 시작했는데 어떡하다 보니 소설집이 나오게 됐네요. 소설을 꼭 써야겠다고 하고 쓴 것도 아니고 시는 지금도 계속 쓰고 있는 상태에요. 시는 저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거든요. 하지만 시집을 내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금처럼 꾸준히 쓸 생각이에요.”

루시드폴의 팬이라면, 그와 마종기 시인이 주고 받은 서신을 담은 책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의 존재를 알 것이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은 2년간 메일을 통해 예술과 과학, 그리움과 일상의 기쁨을 나눴다. 스위스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하던 시절, 루시드폴은 마종기 시인의 『이슬의 눈』을 읽으며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랬다. 클래식을 애호하던 마종기 시인은 이 책을 계기로 루시드폴의 음악을 듣게 됐고, 두 사람은 지금도 가끔씩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2007년쯤인가 마종기 선생님의 신작이 나왔을 때, 한 팬 분이 제 이름으로 사인을 받아서 시집을 선물해주셨어요. 제가 평소에 마종기 선생님 작품을 좋아하는 걸 알고 계셨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에 그 분이 ‘마종기 선생님과 연락을 해볼 생각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알고 보니 출판기획을 하는 분이셨어요. 처음에 책 제안을 주셨을 땐 연구소에 있던 중이라서 고사를 했는데, 마종기 선생님과 함께 쓰는 콘셉트를 듣고는 곧바로 좋다고 했죠(웃음). 그렇게 나오게 된 책이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이에요.”

2008년에도 루시드폴은 15년간 써온 52편의 노랫말을 묶은 가사집 『물고기 마음』을 펴낸 바 있다. 때문에 루시드폴이 세 번째 책을 낸다면 ‘시집’일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짐작했다. 소설가, 아니 책을 내겠다는 생각은 어렸을 때도 해본 적이 없는 루시드폴. 하지만 글을 쓰면서 음악을 하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고 한다. 왜일까.

“피아니스트 혹은 판소리를 하는 사람이면 상관이 없겠지만 저는 싱어송라이터잖아요. 음악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노래, 대중가요를 만드는 사람이고, 가요라는 건 결국 이야기가 있어야 하죠. 그런데 가요라는 포맷에서 구현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여전히 제한이 많아요. 길이의 제약, 멜로디의 제약, 발음의 제약 등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 순 없는 거죠.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꼭 무슨 이야기를 할 때 음악으로 해야 하나?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창작자의 입장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다른 형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통로 하나를 찾은 느낌이에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모호하게 그리고 싶었다

독특한 제목 『무국적 요리』는 루시드폴이 교토 여행 중에 발견한 식당의 이름이다. 원조 대결이 한창인 다른 식당과 달리, 자신감이 엿보였다.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 중에 ‘무국적 요리’를 제목으로 건 작품은 없다. 가제로 언뜻 생각난 게 『무국적 요리』였고, 소설을 쓰다 보니 단편 속 주인공들의 모호한 캐릭터와 배경, 시간이 조금은 연관성이 있게 느껴졌다.

“웬만하면 제목을 바꾸고 싶었어요. 새로운 이름을 창조하고 싶었거든요. 현실에 ‘무국적 요리’라는 식당이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뭔가 조어해봐도 마땅하게 없고 단편 제목 중에 하나를 꼽자니 대표성이 떨어지고…. 그러다 결국 『무국적 요리』로 결정이 난 거예요. 책이 나오고 나서 강풀 작가에게 문자가 왔어요. ‘무국 끓이고 있냐고’(웃음).”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청년이 목욕탕을 찾다가 벌어지는 일을 그린 ‘탕’, 우화의 형식을 빌려 권위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 ‘똥’, 목욕탕을 둘러싼 한 가족의 좌충우돌 여행기를 다룬 ‘싫어!’, 광기와 허상의 허무함을 다룬 ‘추구’ 등 『무국적 요리』에는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파격적인 소설 문법이 다양한 레시피로 요리되어 있다. 루시드폴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그려보고 싶었고 사람이나 동식물도 대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인공의 배경을 설정하는 순간, 사회적 의미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목들이 굉장히 짧은 단어, 문장인데 꼭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은데, ‘탕’의 경우는 ‘탕’이라는 단어가 갖는 중의적인 의미와 소리가 중요하고 ‘독’ 역시 마찬가지에요. 우리 말 중에 한 글자 단어가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말에 많잖아요. 여러 의미가 중첩되면서 울림도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단편의 초고가 반나절 이상이 걸리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수록된 ‘독’의 경우는 마무리를 짓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독’은 몸 안에 쌓인 독을 내뱉는 의식을 치르는 한 마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소설의 결말은 무책임할 만큼 끔찍하다. 어느 날, 독을 받아주던 사당의 독이 사라지면서 결국 마을 사람들이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된다. 하지만 사건의 원인은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두들 독이 있잖아요. 그게 한(恨)일 수도 있고 원(鴛)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람이나 사회에는 항상성(恒常性)이라는 게 있어 유지가 되지만, 그것이 깨지면 병이 들죠. 하지만 사람들은 외부인자에만 관심이 많은 거 같아요. 사실 항상성이 깨지지만 않으면 병은 들지 않을 수 있는데 말이죠.”

작가 루시드폴, 소설에 대한 평가와 반응에 대해서 크게 동요하지 않을 생각이다. 누군가 ‘기적의 물’을 읽고, “소설 속 주인공이 무척 예민한 캐릭터인데 혹시 작가 본인의 모습이 아니냐”고 묻자, “글쎄”라고 대답했다. “캐릭터에 몰입해서 쓰다 보면 작가의 이야기가 투영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 경계가 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물 맛을 다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하진 않아요(웃음).”




하나의 앨범, 천천히 여유 있게 들어보세요

스위스개그의 창시자인 만큼, 언어에 관심이 많은 루시드폴. 평소 다독가이냐고 물으니, “작년에 놀면서 할 일이 없어서 조금 읽었다”고 겸연쩍은 듯 웃었다. 하지만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이 궁금하다고 하자, 서슴없이 책 제목을 읊었다.

“지금은 생태농업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어요. 스피노자의 『에티카』도 읽었고, 윤여일 씨의 『여행의 사고』도 재밌게 읽었어요. 작년에 읽은 책 중에는 『한글의 탄생』,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체홉 단편선』정도가 기억에 남아요.”

루시드폴은 오는 4월 2일부터 ‘목소리와 기타 2013- 다른 당신들’을 타이틀로 한 공연을 펼친다. 따뜻한 봄, 4월 한 달 동안 24회에 걸쳐 관객들을 만날 계획이다. 2011년부터 매년 4천여 석을 매진시킨 ‘목소리와 기타’ 공연은 루시드폴의 목소리, 기타, 건반 연주만으로 채워지는 단출한 무대로 꾸며진다.

“처음 기획했을 때부터 염두에 둔 게 ‘콘셉트 없는 콘셉트로 오래 하자’는 거였어요.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악기가 기타밖에 없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니까 기타 또는 피아노만 하나 놓고 하는 공연으로 가장 기본적인 노래의 골격만 남긴 무대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공연이 길지도 않고 토크가 많지도 않아요. 부담 없이 음악이 듣고 싶은 관객들이 많이 찾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작가가 아닌 가수 루시드폴로 돌아가, 독자 혹은 관객, 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음반이라면 한번쯤은 사서 천천히 읽어보고 들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뮤지션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타이틀곡 한 두 곡 다운 받아서 듣는 것도 좋지만 하나의 앨범, 책을 여유 있게 천천히 들어보고 읽어보면 감동이 다를 거예요.”


『무국적 요리』가 출간된 지 딱 1달이 지난 지금, 루시드폴은 아직까지 마종기 시인에게 책을 보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문인이기에 선뜻 부끄러워서 망설이게 된다고. 혹시나 시집을 기다리셨을 선생님이 서운해 하시진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선생님께서 5월쯤에 산문집이 나와서 그 때 맞춰 한국에 오신다고 하셨거든요. 늦어도 그 때는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선생님의 반응이 걱정됐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는 루시드폴, 과연 이 독특한 소설을 창작해낸 주인공이 맞나? 의심이 드는 찰나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책 날개에 사인을 부탁하자, 커다란 등산 배낭에서 사무실에서나 쓸법한 커다란 인주와 도장을 꺼내 들었다. 예전에 팬이 선물해준 도장인데, 쓸 데가 없어 아쉬워하다가 ‘소설가 데뷔’ 덕분에 사용하게 됐다고 즐거워한다. 루시드폴 사인 옆에 조윤석이라는 이름이 빨갛고 단단하게 찍혔다.

“소설가 다음으로 욕심나는 타이틀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요(웃음).”시를 쓰다 보면 누군가의 약혼자가 되어 있을 것이고, 반려자가 옆에 있으면 어느새 시인이 되어 있지 않을까. 루시드폴의 무국적 언어로 요리된 시집이 기다려진다.




*루시드폴의 ‘무국적 요리’ 궁금하신 분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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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국적 요리루시드 폴 저 | 나무,나무
음악인이자 화학자인 루시드폴이 첫 소설집 『무국적 요리』를 출간했다. 소설집은 「탕」 「똥」 「기적의 물」 「애기」 「행성이다」 「싫어!」 「추구」 「독」등 총 여덟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은 기존 소설문법에서는 읽을 수 없는 독특한 세계관과 스타일로 무장하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국적, 성별 등은 모두 무국적이다. 국적도 알 수 없고, 성별에도 구애받지 않고, 특정한 전통적 영향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모든 관계와 규범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은퇴하지 않았을 것이다 -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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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유시민은 한 출판사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한 책을 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주제가 다소 부담스러워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자격지심에 대한 염려였다.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닐 터, 따분한 이야기만 늘여놓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유시민은 결국 펜을 들었다. ‘내 인생을 관통한 목표와 원칙이 있는지,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과연 나는 내게 맞는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의미가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간 『청춘의 독서』, 『국가란 무엇인가』, 『후불제 민주주의』등 많은 책을 펴냈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처럼 속도가 붙지 않은 책은 처음이었다. 책의 구성도 여러 번 바꾸었고 초고를 여러 번 손봤다. 유시민은 “창피한 일이지만 쉰다섯이 돼서야 처음으로 진지하게 ‘내 삶의 원칙’에 대해 생각해보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정계은퇴를 결심하고 아내에게 결정을 털어놓은 날, 정말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아내 말이 요즘 유시민은 ‘걱정 없는 소년’ 같단다.

지식소매상으로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유시민. 은퇴 선언 후 아직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한 차례도 드러내지 않았다. 책과 관련한 독자와의 만남 행사가 몇 개 예정되어 있을 뿐이다. 항간에는 정치아카데미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떠돌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했다. 지난 2월 27일, 유시민을 파주 출판단지에서 만났다. 은퇴를 선언하고 9일이 지난 날이었다. 정치인의 타이틀을 벗고 글쟁이로 돌아온 유시민은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감추거나 꾸미는 습관과 결별했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나답게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내 인생이지 않나

『어떻게 살 것인가』, 굉장히 무거운 주제다. 책을 쓰겠다고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작년 6월부터 작업을 시작해 11월쯤 초고를 완성했다. 12월은 대선이 있어서 작업을 못했다. 그 뒤 1월 말까지 원고를 많이 고쳤다. 다른 책과 달리 많이 더듬거렸다고 할까, 글은 쉽게 보이지만 쓰는 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에세이지만 철학 교양서 같은 느낌으로 쓰려고 했다. 얼마 전에 나온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같은. 그런데 쓰다 보니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손을 많이 보고 고치다 보니까 이런 괴상한(?) 책이 나오게 됐다. 사람들은 자전에세이라고도 생각하던데 교양서적인 면도 있다.

은퇴 선언을 하기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집필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인가? 이 책을 쓰면서 은퇴 선언을 결심하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처음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제목으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다룬 게 아닐까, 시대적 상황이랑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고치게 되었다. 책을 쓰면서 ‘정작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안 하고 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거랑 내가 쓰고 있는 책이랑 안 맞더라. 그래서 이게 맞나?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하게 됐다. 아마 이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지금 은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마 그랬을 거다.

2월 19일, 트위터를 통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한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1주일간 어떻게 지냈나? 언론사들과 일체 연락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일주일 정도 어디를 좀 다녀왔다. 기자들도 집에 찾아오고 그래서 누가 못 찾아오는 데로 가 있었다. 여행은 아니었고 그냥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에 잠시 있었다. 내가 정치를 하던 사람이라서 그런지 책에 대한 기사가 나갈 때 정치책인 것처럼 보도가 되더라. 일정 부분 그런 내용도 있긴 하지만,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 정도의 오해는 풀리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삶에 대한 모범답안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 내 생을 이야기하면서 나의 사고를 정리한 거다. 어떻게든 피드백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해가 안 간다는 부분도 있을 거고, 공감이 된다, 문제가 있다 등의 반응들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은퇴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은퇴 선언이 정확히 대선 후, 2달이 지난 시점인데 정권이 바뀌었어도 은퇴를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창피한 일이지만 쉰다섯이 돼서야 내 삶의 원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물론 이전에도 조금씩 생각은 했지만 차원이 달랐다. 과거에는 항상 그때 그때 이 일을 해야겠다, 해야 한다는 느낌에 의존해서 살았기 때문에 한번도 ‘이렇게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깊게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할 수 없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참을 수 없다’라는 생각으로 움직인 일이 많았다. 교과서에 보면 ‘나답게 살자’라는 말이 나오지만 정작 나는 그런 소망을 가지긴 했지만 이 원칙을 갖고 내 삶을 바꿔 나가야겠다라는 의지가 없었다. 정치가 힘드니까 회의도 있고 했지만, 책임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도 있으니까 ‘해나가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하는 생각이 있었다. 사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정권도 내가 원하는 대로 서고 그런 상태에서 그만뒀으면 책임은 훨씬 가벼웠을 거다.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그런 문제들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내 인생이지 않나.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건데 ‘내 인생이 중요하니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정확하게 은퇴를 결심한 때는 언제인가? 초고를 다 쓰고서인가, 책을 다 완성한 후인가?

초고는 다 썼는데 책이 완성이 되지 않더라. 독자들한테 이렇게 살자고 이야기하면서, ‘나는 뭔가’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도저히 책이 완성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1월 20일까지 초고가 완성된 상황에서 ‘왜 완성이 안 될까’ 생각해보니, 내 자신의 선택과 책의 내용이 맞지 않아서 완성될 수 없는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대선을 준비하면서 한 달 가까이 책 작업을 중단됐는데 그 때 계속 생각했다. 선거가 끝나고 다시 책 작업에 들어가면 이걸 해결해야겠다고.

출판사 입장에서도 굉장히 놀랐겠다. 처음 책을 제안했을 때는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텐데.

일반적으로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이 책이 굉장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 되었고.

원래 정치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싶어 정치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던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면 정치가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 ‘아래’와 정치 ‘너머’의 변화가 없다면 정치도 더는 바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직업정치를 떠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기쁘게 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눈앞을 가리고 있던 두터운 먹구름이 걷혔다. 해방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p.195)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정치, 계속할 것

책이 굉장히 솔직하다. 정치의 일상이 즐겁지 않았다고 토로했고, 안철수 전 대통령 후보에 대한 평가도 거침없이 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검열을 하기 마련인데, 정치인으로서의 자기검열과 필자로서의 자기검열은 차지가 있지 않나?

물론이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검열을 해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기준에 따라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사실 내 기준에서 보면 바람직할 수 있으나 타인의 기준에서 보면 다를 수 있다. 정치는 51%의 동의를 가지려고 해야 한다. 다수가 받아들여 줄까를 늘 고민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절대 다수가 동의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일에 대해 자기 내면의 소리를 내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책은 그럴 필요가 없다. 굳이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생각을 찾고 고려해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도덕적 자기 검열은 있어야 한다. 글의 진실성, 인간에 대한 예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한 존중 같은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그만두었지만, 정치인으로서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의 정치 참여가 예상된다. 시민 유시민으로서의 정치 참여는 어떤 모습일까.

정치의 개념을 규정하면, 일반적으로 정치학에서 받아들이는 개념이 ‘국가 권력의 기능과 작동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개별적, 집단적 활동’이다. 이건 정치인만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정치를 하는 거다. 선거캠프에 자원봉사로 참여하는 것, 시민단체의 후원회원으로 1인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정치고 촛불을 들고 서울광장에 가는 것,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도 정치다. 우리 모두는 정치할 자유가 있고 또 권리가 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다만 그걸 직업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정치 참여는 모든 시민의 권리고 동시에 의무라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정당에 가입해주지 않으면 사실 민주주의는 없는 거다. 누군가 정당에 가입해주기 때문에 정당정치가 있는 거고, 그게 복수로 있어서 민주주의가 있는 거다. 평소에도 항상 정치캠페인을 후원하고 의견을 내고, 의사 표현할 게 있으면 연대에 나가서 데모도 하는 것이 시민으로서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주장해왔다. 내가 직업인으로서의 정치는 그만뒀지만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헌법적 권리를 가지고 대한민국 국가 권력의 기능과 작동방식에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한 정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할 거다. 구체적인 그림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이 하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시민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행동들을 할 생각이다.

하지만 전직 정치인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지 않나?

물론 다를 것이다. 내가 직업으로서 정치를 그만뒀다고 발표했지만 정치를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한동안은 정치에 관한 질문을 받을 것이고,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세상에 나가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정치인이라고 그러면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본다. 우리랑은 다른 사람으로 보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정치를 10년 하면서, 정치 자체를 비하거나 정치인 자체를 혐오하는 모습을 볼 때 이것이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치는 내 삶의 일부다. 내 삶이 훌륭하려면 내가 속한 국가가 훌륭해야 한다. 그렇다면 훌륭한 국가, 사회는 어떻게 만들 수 있나, 훌륭한 사람들이 참여하면 그런 나라가 된다. 내가 훌륭하게 살고 싶다면 내 몫을 해야 사회가 훌륭해진다. 정치는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고 우리가 가진 헌법적 권리를 통해 영향을 줄 수 있다. 직업인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행동에는 원인이 있는 건데, 그걸 보고 정치 참여 자체를 비하하고 혐오하고 조롱하는 걸 지성의 표현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의 풍토를 볼 때, 정말 안타깝다. 그런 풍토가 훌륭한 사회를 만드는 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일반인으로서 시민의 관점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할 거다.

책 서문에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이론은 모두 잿빛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를 인용했다. 책의 주제가 되는 글인가?

35년 전,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유행했던 문구다. 당시 우리가 본 번역문은 ‘이론은 모두 회색이다. 저 푸르른 것은 영원한 생명 뿐이다’라는 문구였는데 원문을 찾아보니 직역하면 ‘이론은 모두 잿빛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가 되더라. 원작의 맥락을 도외시하고 보면, 인간의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이 속박되거나 재단될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는 문장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보통의 지식인들은 자신이 배운 이론에서 삶을 규정하는 측면이 크다. 하지만 이론으로 삶을 재단하기 전에 우리의 내면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욕망, 충동, 소망, 이상, 감정 이런 게 진짜이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이상 이런 것들이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고 함께 가는 것이고, 그것이 생명력이 아닌가. 내 스스로 인간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 충동 이런 것들을 예전보다 긍정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내 자신과 세상, 역사를 보겠다는 그런 취지로 인용한 거다. 책 전체에서 이런 느낌을 담고 싶었다.

나는 정치의 일상이 즐겁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내가 정치에 뛰어든 것은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낸 책에서 정치를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라고 쓴 적이 있다. 정치로 성공해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데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분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나 장준하 선생처럼, 정치로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성인의 고귀함을 남긴 분들 역시 적지 않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래야 한다거나, 한 번 정치에 몸담은 이상 끝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p.194)




대한민국 50대들이 읽으면 좋지 않을까

요즘 일상은 어떤가? 공식적인 일정은 없나?

책이 나왔으니 보내줄 곳도 많고 출간에 대한 저자강연회나 후속된 일들이 조금 예정돼 있다. 정치를 그만두게 된 데에 따른 이일 저일, 뒷정리도 하고 있고. 연초에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나왔으니 후반기에는 한국현대사에 관한 작업을 계획 중에 있다. 아직 본격적으로는 못하고 짬짬이 자료를 보고 있다. 일부 언론에는 정치아카데미 설립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오보다. 근거 없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다.

은퇴 선언한 후, 행복한가?

책이 나올 시점에 맞춰 은퇴 발표를 한 게 아니라,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한참을 망설이다가 출간 시점에 맞닥뜨려서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타이밍이 와서 발표하게 된 거다. 책을 마무리 지으며 마음의 결단이 섰는데, 아내에게는 빨리 이야기를 해줘야 하지 않나. 그래서 공식 발표 한참 전에 ‘나는 이제 정치를 그만하려 한다’고 털어놓았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걱정 없는 소년’ 같다며, 이렇게 잠을 잘 자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봤다고 했다. 예전에는 항상 뒤척이면서 잤는데 요즘에는 새벽에 일어나지도 않고 그렇게 잘 잔다고 한다. 나는 잘 몰랐는데 그동안 내가 많이 억눌러있었나, 싶다.

트위터를 통해 꾸준히 시민들과 소통해왔다. 정치인 유시민의 홈페이지는 사라지게 될 텐데, 인터넷에서의 활동은 어떻게 계획하고 있나?

트위터는 사적인 대화를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좋은 통로라고 생각한다. 글이 길어지면 이야기가 복잡해지는데 140자 안에 표현해야 하니, 글이 압축될 수 있지 않나. 우리가 살면서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은 정서, 느낌을 공유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 이야기에 대한 반응도 궁금하고. 트위터는 개인적이 이야기를 교감할 수 있는 좋은 매체이기 때문에 계속 사용할 생각이다. 그 외의 다른 사이트는 모두 닫을 것이고, 지식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공적인 소통을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홈페이지를 열 계획이다. 그렇게 두 개의 채널로 단순화해서 소통할 생각이다.

1988년 <창작과 비평>에 중편소설 ‘달’을 발표한 적이 있다. 혹시 소설가로서의 유시민도 만나볼 수 있나?

글 쓰는 장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보통 에세이로 표현하지만 이 장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게 있다. 가끔은 소설로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은 있다. 소재가 잡히면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다만 꼭 써야겠다, 그런 각오는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고 자기 인생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특히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50대들이 많이 읽어줬으면 좋겠다. 20,30대들이 자기 부모한테 선물하면 괜찮은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 독자뿐만 아니라, 모든 분들께 말하고 싶은 건,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거다.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하라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서 봉사를 하든 공적인 자리에 있든지 ‘이 것이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인가, 의미 있는 일인가’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삶은 여러 가지고 사람마다 다른 삶이 있고, 어떤 삶이 다른 사람의 삶보다 훌륭하다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삶의 훌륭함은 ‘그 삶을 대하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일 말고 정말 내가 기쁨을 느끼고 의미를 느끼는 활동을 하는 쪽으로 조금씩 내 삶을 바꿔나가면 좋지 않을까, 싶다.

세상과 민중에 대한 추상적 사랑보다는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고 몸으로 껴안는 실체적인 사랑을 더 많이 나누고 싶다. 놀고 싶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요가를 배우고 싶다.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추자도에서 감성돔을 낚고,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주말 저녁 축구장과 야구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면서 살고 싶다. 사실 누가 그걸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내 스스로를 가두어버려서 그렇게 되었다. 나는 또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더 넓게 연대하면서 살고 싶다. 사명감과 의무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내가 기꺼이 하고 싶고 내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하고 싶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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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유시민 저 | 아포리아
유시민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 시기의 개인적ㆍ사회적ㆍ정치적 경험과 그에 대한 생각을 단편적으로 드러냈다.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의 일부터 대학 시절 야학 교사 활동을 거쳐 소위 ‘통합진보당 사태’와 18대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어떤 감정과 생각이 자신의 삶을 지배했는지 이야기한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두기로 한 이유,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고민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유인이 되어 어떤 삶을 살려고 하는지 솔직하고 소박하게 토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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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청춘은 선택을 강요받아요 - 밴드 '9와 숫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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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0대는 청춘에 목말라 있다. 응당 청춘이라는 나이로 불려야 할 시기에 젊은이들은 돈과 취업과 미래에 대해 끝없이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약 10여 년의 세월 내내 ‘현실’이라는 주제에 대해 싸우는 중이다. 결국, 대부분이 ‘타협’이라는 보기 좋은 결론을 지으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옳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선 타협 이후에도 끝없이 고민한다.

9와 숫자들의 신보가 반가운 건 이러한 세태에 대해 공감해주는 가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직설적으로 ‘힘내’라고 전달한 것이 아닌, 서정적 단어들로 꾸며낸 표현들은 차가워진 마음을 조금씩 위로해준다.

1집 < 9와 숫자들 >(2009)의 성공 이후, 기나긴 시간이 지나 EP를 내놨음에도 콘서트의 매진과 연이은 평단의 정평은 이들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지표다. 방송 촬영과 콘서트 준비가 한창임에도 밴드는 한 카페에서 < 유예 >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냈다.


< 유예 >가 나온 지 시간이 꽤 지났다. 반응은 어땠나? 팬 분의 반응과 평단의 반응은 약간 달랐을 것 같다.

송재경 : 평단 내에서는 한층 좋은 방향으로 변해서 좋았다고 많이 말씀해주셨고, 원래 좋아하시던 팬 분들은 아쉽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앨범을 들으면서 버라이어티한 부분이 조금 떨어진 것 같다고요.

1집 < 9와 숫자들 >이 워낙 평단의 호평을 많은 덕분에 < 유예 >를 제작하면서 많은 부담이 있었을 것 같다.

송재경 : 부담 많이 됐죠. 그래서 오래 걸렸잖아요. 고민을 많이 하기도 했고요. 제일 큰 것은 동어반복을 피하는 것. 그것도 우리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완성도 부분에서는 부담이 조금 덜 했던 게, 사실 1집에서는 그런 고민을 덜 했었어요. 1집은 좋은 아웃풋을 보여 주자라는 생각보다는 그간에 있었던 것들을 정리하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고민을 많이 하고 신중하게 가보자는 생각을 많이 했죠.

색깔을 유지한다는 표현을 했는데, 9와 숫자들의 색깔은 무엇인가?

송재경 : 1집 때부터 항상 했던 이야기는 중용을 지키자는 것이에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옛 것과 요즘 것의 균형. 그리고 저희가 미국, 영국 인디 씬도 좋아하지만, 우리 로컬 씬 만의 색깔도 우리 팀에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기시감을 유발하거나 특정 밴드의 느낌을 떠올리게 하지 않으려고 저희는 많이 노력하고 있고요.

중용이라고 했지만 9와 숫자들은 대체로 복고적인 느낌이 많이 난다는 반응이 많다.

송재경 : 그것은 어떻게 보면 실패라면 실패일 것 같아요. 이번 앨범은 모던한 면으로 가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는데. 제가 봤을 때는 보이스 컬러라든지 가사라든지 그런 게 소위 말하는 향수를 자극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스타일이라서 복고적인 느낌을 많이 받나 봐요. 그런데 이번 앨범에서는 지난번에 비해서 편곡이나 복고적인 점을 부각하지는 않았거든요. 듣는 분들이 그렇게 반응하셨다면 중용이라는 점에서 실패했는지도 모르죠. 일부분들께서는 1집에 비해서 모던한 사운드가 가미된 것 같다고 이야기도 해주세요. 여전히 복고 이야기를 많이 하시기도 하고요.

앨범 분위기 자체가 약간 우울해지고 톤 다운된 느낌은 있다.

유병덕 : 원래는 처음 앨범 들어갈 때 뭔가 더 채우지 않은 스타일로 가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쿠스틱한 스타일로 출발하다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있었던 것 같고, 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잖아요? 작업하고, 곡을 늘려가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았나…

송재경 : 저희가 생각이나 감성이 변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고. 기획하면서 다른 밝은 노래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감성적으로 통일성을 가져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 EP에서는 미뤄둔 밝은 노래도 있고요.

편곡의 측면에서 1집과 비교했을 때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하는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송재경 : 기본 방향은 멤버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실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했어요. 첫 번째 앨범은 저 혼자 작업이라고 보시면 되고요.

유병덕 : 개인적으로는 기본에 충실해지고 싶었어요. 앞으로 나가지 말고 뒤에서 밑에서 있고 싶었고요. 그런데 그걸 하는 작업이 오히려 더 힘들더라고요.


가장 반응이 좋은 곡은 어떤 곡인가?

유병덕 : 워낙 인디 씬이 넓지가 않아서 피드백이 많이 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엄청나게 쏟아지지는 않지만 「눈물바람」 이야기가 가장 많았던 것 같아요.

송재경 : 「유예」도 많았어요. 앨범의 타이틀이잖아요. 가사가 시대상황과 맞는지 SNS에서 많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유예」라는 단어 자체가 요즘 청년세대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긴 하다. 생계를 위해서 소중한 가치들을 유예해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지 않나. 「유예」는 어떤 생각에서 시작되었나.

송재경 : 대단한 건 아니고요. 만들었을 때가 나이가 28~29살이었는데. 그때가 한국 남성들이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무렵이잖아요. 팍팍하더라고요. 여유 있게 고민을 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살 수 있는 여력이 없더라고요. 선택을 강요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살기도 하고. 꿀버섯이 예전에 ‘그림자 궁전’ 했을 때 저에게 한 이야기가 “생각하는 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어버린다”였어요. 그게 저에게 항상 기억되는 말인데, 그게 나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 자체의 고민인 것 같아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일찍이 원하는 방향으로 성과를 내면서 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원하던 꿈을 펼치면서 사는 게 너무나 어려운 것 같고. 대체로 자기가 뭘 꿈꾸는지도 모르고 성장해서 사회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길들면서 살아가잖아요. “나도 이제 그렇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게 완전히 망했다는 체념이 아니라 지금은 때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 시간을 주자라는 의미에서 만들게 되었어요.

인디 씬에 관심이 그리 크지 않은 일반 대중은 「그대만 보였네」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앨범 내에서는 드물게 밝은 스타일의 곡 중의 하나다. 밴드가 의도한 바에 비춰보면 아이러니한 느낌일 것 같은데.

송재경 : 방송 쪽에서 「그대만 보였네」를 많이 틀어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대부분 사람이 밝은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어두운 게 많아서 (웃음) 노래라도 밝은 것을 들으려고 하는 것 같고. 이질감이 있는 곡이라고 생각은 안 해봤어요. 곡 자체도 메시지 자체가 밝거나 샤방샤방한 건 아니거든요. 요새 말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가사이긴 하지만, 결혼이라는 주제를 만든 노래인데요. 밴드에서 결혼한 사람은 없지만 (웃음) 저한테 있어서는 무거운 주제였어요.

유병덕 : 이질감이 있다기보다 한 템포 쉴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대만 보였네」라는 트랙이 있으므로 앨범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이 들고요.

「눈물바람」은 가사도 그렇고 여성적인 터치가 강한 곡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9와 숫자들에 있어서 작사 측면으로 특유의 필체가 있나?

송재경 : 서정시. 제가 김소월이나 윤동주 시인의 작품 같은 서정시를 많이 좋아해요. 1집 때는 가사가 상투적이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교과서 같다거나, 날림으로 쓴 가사라는 말도 많이 들었고요. 제 딴에는 많이 정제해서 예쁜 말들을 골라서 썼던 건데. 지금은 다르긴 한데 그때는 상투성이 무조건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만큼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관용적인 표현이라고 해야 하나? 꽃이나 새, 노래라는 단어들.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고 싶은데 굳이 복잡하게 더러운 단어나 표현을 쓸 필요 없이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끌어와서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요새 말하는 돌직구 스타일로. 직접적인 말투, 어떻게 보면 상투적인 표현들 좋아하는 편이에요.

조금 전에 가능하면 동어반복을 피하려고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 상투성은 동어반복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상투성을 배척하지 않으면서 동어반복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송재경 : 그럴 수 있죠. 그런데 해결책은 간단해요. 그것은 작사에서 내가 동어반복을 안 하면 돼요. 가사를 쭉 써왔는데 똑같은 단어나 비유가 있었다면 다른 걸 고민하는 거죠. 말투도 마찬가지죠. 어미나 그런 것들이 반복적으로 나오거나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그러다 보니 만들어 놓은 콘텐츠가 많을수록 굉장히 힘들어져요. (웃음)

굉장히 피곤해지겠다.

송재경 : 굉장히 힘들어요. 그러다 보면 다행스럽게도 기발한 표현을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도 있고 그래요.

유병덕 : (송재경) 형 가사 중에 제가 좋아하는 방식이 수미상관이라고 하죠? 그런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요.

송재경 : 고리타분하죠. (웃음) 그런데 요즘 인디 밴드들 음악 한 번 들어보세요.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가사 쓰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매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수록곡 중에 「아카시아꽃」이 있다. ‘서정시’에 대한 추구와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되는가.

송재경 : 저는 「과수원길」을 어렸을 때부터 상당히 구슬픈 노래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구슬픈 노래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씀드리자면 작업 과정이 많이 힘들었어요. 작사가(박화목)분이 돌아가시고 현재 아들 되시는 분이 목사님이신데, 그분한테 저작권이 있어요. 저희가 삼고초려를 해서 취지를 말씀드리고 음악을 들려드려서 허락을 맡았어요. 곡명이 원래처럼 「과수원길」이었는데, 목사님께서 직접 연락하셔서 가사까지는 쓰는 건 괜찮은데 제목은 좀 바꿨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아버님의 동요 한 곡으로 남겨뒀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래서 재킷 인쇄 들어가기 하루 전에 제목을 바꿨어요.


< 유예 >의 주된 테마가 청춘인 것 같다. 30대로 넘어가면서 청춘의 의미가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나.

송재경 : 청춘의 현장을 직접 느끼면서 발산하는 것도 있지만 30대 중반 접어들다 보니 청춘을 말해도 별로 부끄럽지 않다고 느껴요. 들국화나 산울림이나 활동을 하는데 그분들이 노년을 이야기하진 않잖아요. 그래서 그분들이 계속 청춘이기도 하겠고 청춘을 20대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시절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달라졌을 수는 있죠. 청춘을 차갑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청춘을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편인가. 아니면 약간은 거리를 두고 3인칭적인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편인가.

송재경 : 그런 식의 깜냥은 안 되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정서를 이야기하는데.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는 모르지만. “너희는 힘을 내야지, 우리의 청춘은 힘들지만 극복해야지!” (웃음) 이런 식의 이야기를 전달할 만한 깜냥은 안 되는 것 같아요. 아주 특수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니까 다들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비슷한 이야기를 하겠구나 생각은 해요.

2집 앨범도 작업 중인가?

송재경 : 네. 지금 작업 중에 있어요.

구체적인 콘셉트도 정해졌나?

송재경 : 네. 이 인터뷰에서 처음 말하는 건데, 2집의 타이틀을 < 근의 공식 >이라고 지었어요. 9와 숫자들의 언어유희이기도 한데. 근이 루트(Root)잖아요. 그런데 미국에서도 루츠 록이 있잖아요. 컨트리, 블루스부터 해서 쭉 이어온 음악이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밴드 중에 요즘에 윌코(Wilco)라든지. 우리 음악은 그런 부분이 단절된 부분도 많이 있고 음악적 유산도 지금 많이 폐허로 변했다거나 발굴이 덜 된 상황이에요. 체계적으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지 않고 힘들게 구해야 한다든지 괴상한 취향으로 오해를 받는다든지 그런 상황인데. 그런 상황을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이번에는 한국식 루츠 록을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죠. 이전에 ‘그림자 궁전’에서도 해오던 작업이지만 그동안 들었던 좋은 음악들을 가지고 이 시대에 어울릴 수 있는 음악을 해보자는 게 다음 앨범의 콘셉트에요.

EP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다. 왜 그랬나?

송재경 : 일단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고요. 제가 겸업을 하다 보니까 시간이 넉넉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작업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 면이 큰 것 같아요. 1집 때는 사운드 퀄리티에 대해서 별로 무게를 안 뒀어요. 곡이 가진 핵심적인 감성만 전달할 수 있다면 편곡은 컴팩트하게 가자는 주의였는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라 결과물에서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세밀한 부분을 많이 신경을 썼거든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졌죠.

송재경은 2~3개의 일을 겸업 중인데. 음악 활동을 하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당연히 없을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음악적인 고민을 충족시키려 하나.

송재경 : 계속 생각을 해요. 출근하면서도 생각하고 밥 먹으면서도 생각하고. 생각날 때마다 기록하고. 저는 작업하는 방식 자체가 곡이 완결되기 전까지 편곡적인 면에서 손을 안대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서 복기하고 완성되었다고 생각될 때까지는 끄집어내지 않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계속 생각을 해요. 사색도 어디 펜션을 잡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불쑥 번뜩일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을 잘 기록해놨다가 하나의 곡이 완성되는 경우도 많고요. 곡을 만드는 데 있어서 시간의 부족함은 그리 크지 않은데 오히려 같이 해야 하는 작업들. 편곡 작업이나 실제로 레코딩하는 기계적인 작업들은 같이 시간을 맞춰야 하니까 그 점에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죠.

인디 뮤지션들이 생계를 위해서 겸업을 하는 형태를 많이 취하고 있지 않나.

송재경 : 힘들고 짜증이 나는데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진짜로 끝내주는 음악을 만들어서 많이 음반을 팔고 돈을 벌어야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만을 바라거나 어떻게 머리를 잘 굴려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볼까 궁리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저는 떳떳하게 일을 하는 거예요. 아직 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음악을 못 만드니까.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음악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는 것이고요.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유정목 : 뭐가 있을까. 음악 작업을 할 때 아쉬운 게 있으면 그 상태로 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든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취향이 바뀌는 부분일 것 같아요. 사소한 것도 맞추려고 하거든요. 한 번 아쉬운 부분이 들리면 그다음부터는 그 부분밖에 안 들려요. “아 이거 고쳐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거죠. 물론 1년 뒤, 2년 뒤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죠.

9와 숫자들은 곡 작업에서 완벽을 추구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송재경 : 정목이 말이 맞는 게 뭐냐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찾자고 해서 이번에는 많이 노력했어요. 이메일이나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통해서 정말 치열하게 고민을 나눴고요. 한 부분이 아쉬우면 벌떼처럼 몰려들어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그래서 이번에 정말 저는 리더로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거에요. 예전에는 한 멤버가 뭔가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면 “뭔 그런 것까지 이야기하고 그래?”라든지 내 것을 더 주장했을 텐데 이번에는 멤버들의 의견을 서로 많이 들었고 회사 쪽에서도 모니터링을 많이 해주셨고요. 시간이 더 들고 어렵다는 느낌이 들어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방식이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이건 좀 더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은 거의 다 반영이 된 것 같아요.


멤버들 각자 < 유예 >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곡은 무엇인가?

꿀버섯 : 저는 「플라타너스」요. 기타를 제가 쳤기 때문에 (웃음)

유병덕 : 계속 변해요. 원래는 노래스타일이나 편곡적인 면에서 「착한 거짓말들」을 제일 좋아했었는데 계속 연주를 하다 보니 지금은 「유예」를 제일 좋아해요. 감정이나 이런 게 너무 좋게 들리고 연주할 때도 좋고 해서. 그만큼 공감하시는 분들도 많아서 더 좋은 것 같아요. 별로 손 댈 게 없었어요. 제일 처음 곡이 나왔을 때 그냥 이대로 곡이 나가도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고요.

유정목 : 그냥 곡으로만 따졌을 때는 저도 마찬가지인 이유로 「유예」라고 생각하고요. 음악적인 면에서는 「눈물바람」이에요. 개인적으로 음악적인 욕심 때문이죠. 제가 기타라인을 만들어서 노래에 넣은 거잖아요. 어쨌든 노래가 있고 반주를 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입장에서 작업하고 만들어 나갈 때 그 노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제가 치는 습관을 넣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거든요. 곡의 처음부터 기타 솔로처럼 연주했어요. 그렇게 하는 게 재미있어요.

송재경 : 저는 「유예」가 좋아요. 1집 때를 물어보시면 「연날리기」가 되고요. 둘 다 제 개인을 위한 노래이기도 하고요. 스스로 위로할 수 있기 위한 노래거든요. 제가 곡을 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안 아픈 손가락이 없죠.

개인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아티스트나 앨범을 2~3개 정도 꼽을 수 있을까.

송재경 : 저의 절대적인 베스트는 아닌데요. 지금 시점에서 말씀드릴게요. 저는 일단 시인과 촌장 앨범인데요. 보통 「사랑일기」가 수록된 < 푸른 돛 >을 1집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지금은 절판된 < 시인과 촌장 > 앨범은 잘 모르시더라고요. 「꽃을 주고 간 사랑」, 「그대 목소리」가 들어가 있는 앨범이에요. 그 앨범 정말 끝내줘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인과 촌장의 이미지는 목가주의적인 포크잖아요. 그런데 그 앨범은 로큰롤이나 굉장히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요. 서정적인 가사들의 원형도 볼 수 있는 앨범이죠.
그 다음에 외국 밴드들은 스미스(The Smiths). 모든 앨범이 좋지만 역시 < The Queen Is Dead >가 대표적이죠. 나머지 하나는 브라이언 이노(Brian Eno). 묘한 슬픈 사운드가 있는 것 같아요. 대놓고 우울한 감정으로 단조 코드로 절박한 보컬 창법이 아니어도 담담한 어조로 가는데도 슬픈 걸 보면 그런 게 놀라운 것 같고요. 다음 작업을 할 때 기술적으로 음반에 담아보고 싶어요. 아 무슨 숙제 같아. (웃음)


유병덕 :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제가 너바나 시대에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최고였어요. 음악이 세고 좋아요. 워낙 좋은 앨범들이 있지만, 저는 < In Utero >를 제일 좋아하고요. 물론 데이브 그롤이 이렇게 드럼을 쳤기 때문에 저 역시도 그런 스타일로 드럼을 친다는 건 아니에요. 전체적인 음악 면에서 워낙 임팩트가 컸기 때문에 빼놓을 수가 없어요. 그런 분들이 저뿐만 아니라 정말 많아요.
패기 넘치던 어린 시절에는 센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그런 성향을 바꿔 준 아티스트가 요 라 탱고(Yo La Tengo)였어요. 지금도 정말 많이 들어요. 이 음악을 듣고 뭘 느껴야지가 아니라 때가 되면 한 번 들어야 하는 음악이에요. 요 라 탱고 한 앨범을 석 장씩 사고 그랬어요. 너무 많이 플레이해서 CD가 긁힐 정도로 들었거든요.
너바나와 요 라 탱고의 두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거를 변화시키면서 쭉 가고 있는 밴드가 라디오헤드라고 생각을 해요. 진짜 라디오헤드의 한 앨범을 뽑으라고 하면 정말 못 고르겠어요.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는 선들이 예뻐요. 그 중에 한 앨범을 뽑으라면 비교적 최근작인 < In Rainbows >를 말하고 싶어요.


유정목 : 개인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라디오헤드고요. 저도 < In Rainbows >. (웃음) 그리고 이번 앨범 작업할 때 가장 많이 듣고 참고 했던 팀은 스웨이드(Suede)에요. 저는 버나드 버틀러(Bernard Butler) 정말 좋아하는데 앨범 들어보면 유려한 기타 선율이 계속 깔려요. 독창적인 특징이죠. 싱글을 모아놓은 < Singels > 다시 들으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걸스(Girls)요. 걸스는 음악적인 면보다는 전체적인 찌질함? (웃음) 이번에 저희 < 유예 >처럼 1집과 2집 사이에 < Broken Dreams Club >이라는 EP 앨범이 있는데, 그 앨범 좋아해요.

꿀버섯 : 저도 비슷하게 정서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게 1990년대에요.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의 < Jar Of Flies >앨범 좋아했고. 스매싱 펌킨스(The Smashing Pumpkins)의 <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많이 들었어요. 그 때는 학교 다닐 때 그 시끄러운 것을 밤에 불 꺼놓고 풀 볼륨 해놓고 들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죠. 두 번째 CD 정말 시끄럽거든요. 지금 음악 하는 것과는 전혀 연결은 안 되는데요. (웃음) 정서적으로만 영향을 많이 줬고. 그런데 정서적으로 영향을 준 게 정말 안 좋은 것 같아요. (웃음) 요즘 듣는 것은 기술적으로 좋은 앨범들을 많이 들어요. 좋으면 기술적으로 따서 “내가 해볼까? 이렇게 접목해볼까?” 생각을 많이 하고요. 그런 식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스미스고요.

이번에는 2집이 정해진 기간 안에 꼭 나오기를 빌겠다.

송재경 : 앞으로 계획된 공연도 잘 준비하고 열심히 앨범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 : 이종민, 홍혁의
사진 : 윤은지
정리 : 이종민, 홍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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