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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걸 “갑도, 을도, 청년도, 버스 운전사도 시를 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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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기자생활 31년, 줄곧 경제 현상을 쫓아온 기자 임병걸은 KBS 보도본부 경제부장과 사회부장을 지낸 바 있는 베테랑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자신이 또한 10여 년 째 시를 쓰고, 읽어온 시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는 시인과 경제 베테랑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정체성을 가진 저자가 시에서 경제를, 경제에서 시를 발견하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결과물이다.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지구 바깥에서 봐야” 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에서 그는 시와 경제에 대한 독자의 가시지 않은 낯섦을 간단히 무너뜨린다. 상인의 고단함을 노래한 시부터 라면과 국수를 이야기한 시, 생명의 탄생을 감탄하는 시를 소개하며 시 안의 경제를 읽는다. 경제는 그로 인해 거대 담론이라는, 수치와 통계라는 가면을 벗고 친숙한 모습을 드러낸다. 임병걸은 시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내 삶의 문제를 지켜보고 있음을, 그로 인해 위로 받고 성찰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누구에게나 시심은 있으므로, 이 바람은 실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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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다 겹치고, 넘나드는 것


시와 경제, 두 단어가 한 곳에 만나서 일으키는 파열이 재미있습니다. 시, 그리고 경제라는 말을 꺼낼 때 갖는 평균의 생각이 있는데요. 책은 이 둘을 연결하는 것으로 어떤 생각의 전환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 같아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다른 것을 얘기하고 있지 않아요. 그동안 흔히 접한 시는 전형적인 시, 서정시죠. 하지만 시는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시인이 어디 진공 상태에서 사는 게 아니니까요. 시인도 생활인이고, 의식주의 문제를 고민해요. 이들도 생활이 주는 고통이나 도단, 혹은 기쁨을 느껴요. 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많은 시들이 그런 삶의 문제들을 소재로 삼고 있죠. 경제 현상도 마찬가지예요. 경제 현상이란 숫자, 통계, 거대한 트렌드이기도 하지만 실은 인간의 감정, 희노애락이 굉장히 많이 작용하는 영역이에요. 결코 거창한 담론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것들이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요.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지구 바깥에서 봐야 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경제와 시를 서로의 바깥에서 보자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양자가 각각의 접점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테마를 정했던 겁니다.  

 

바깥에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요.


경제 현상도 경제가 아닌 것 같은 외부에서 볼 필요가 있어요. 스티브 잡스는 경제를 인문학 관점에서 본 것이고요. 예술의 관점, 혹은 이런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 현상이 입체적으로 보여요. 경제 안에서 성장이니 고용이니 조세니 하는 것들만 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요. 그건 시도 마찬가지죠. 시 안에서만 보려면 한계가 있죠. 시를 예술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저처럼 전혀 다른 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시의 지평이 넓어질 거예요.

 

하지만 역시, 그 접점을 발견해냈다는 게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에요.


사실 늘 접점에 있어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식주이고, 그것의 총합이 경제인 것이니까요. 시도 그것을 테마로 삼고 있는데 다만 서술하는 방식이 다른 거죠. 표현하는 방식이 경제를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과 다를 뿐이죠. 미술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화가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굉장히 탈경제적인 것 같지만 영향을 많이 받아요. 참여미술은 더더욱 그렇지만 생활 속의 여러 가지들이 모티프가 되는 거죠. 요즘 흔히들 ‘가로지르기’라고 많이 하는데요. 그 양자들을 함께 읽어보고 싶었어요. 이것들은 편의상 나누어둔 것이지 실은 다 겹치고, 넘나드는 것이죠.

 

본질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네요.


자본의 욕망이라는 문제에 대해 써놓은 글이 있어요. ‘끝없는 소비로 쌓아놓은 바벨탑’이라는 이야기였는데요. 그런 것들을 단순히 수요, 공급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감정의 문제가 많아요. 유행도 마찬가지죠. 과시욕 같은, 어떻게 보면 파토스에 연결이 되어 있는 거예요. 요즘의 경제학들은 그런 부분을 감안해서 분석해내는 것들이고요. 신고전경제학 이론만 가지고 분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시와 경제, 어느 쪽에 방점을 둔 글인가 하면 선뜻 어느 한쪽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요. 고르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거든요. 시가 경제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죠.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기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설정한 주제, 의도가 그렇기 때문에 양자 간 균형이 굉장히 중요하죠. 이것이 저것을 설명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양자가 대등한 거예요. 한쪽은 문학, 한쪽은 사회과학이지만 말이에요. 시인이라고 시만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요. 역시 시인이 밥만 먹고 사는 것도 아니에요. 반대로,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가 왜 나오겠어요. 경제 현상도 인문학적 요소, 인간의 욕망이나 예술적 요소를 무시하고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양자 간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텍스트 상에서도 양자를 그런 건강한 대립관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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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시인이 되는 세상


서점, 최저출산율, 기차, 소주 등 다양한 요소가 글의 시작이 되지만 공통적으로 읽히는 주제들이 있었어요.


제가 쓴 글을 자세히 보시면 일관된 결론들이 있어요. 자본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자본의 약점들, 자본의 폐해들을 조금은 시 혹은 시라고 말하여지는 것들로 극복해내자는 뜻이 있거든요. 거기에 사실은 방점이 있어요. 단순히 현상을 설명하는 것만은 아니죠. 가령 돈이라는 게 세상의 군주처럼 되어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송경동 시인의 시 「화폐」를 소개한 거예요. 떨어지는 낙엽들, 아름다운 열매가 왜 화폐가 아니겠는가, 하는 거죠. 어려운 문제지만 말이에요.


돌아가신 김현 평론가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문학의 효용은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통해 쓸모 있는 것의 쓸모없음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요. 굉장히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흔히 시심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통해 과도한 욕망, 물질, 쾌락, 소비의 문제를 제어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들이에요. 

 

‘집짓는 목수도, 거리의 노점상 아저씨도, 우유를 배달하는 아주머니도, 자동차 정비를 하는 청년도 한 줄 서정시를 쓰는 세상을 꿈꿔봅니다’(41쪽)라고 적은 대목이 있었잖아요. 중요한 메시지예요.


누구나 사실은 그런 시심들을 가지고 있어요. 단순하게 표현하면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고요. 사랑하는 사람을 봐도 그런 것이죠. 다만 이런 시심들이 과도한 물질에 압도된다고 할까요. 혹은 왜곡되어 있어서 발현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거예요. 과도한 물질, 돈이 들어가는 데에서는 절대로 시가 나올 수 없어요. 골프장 가서 시 쓰는 거 보셨어요?(웃음) 결국 모든 이, 버스 운전하시는 분이든 마트 점원이시든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은 두 가지 함의를 갖는 건데요. 하나는 과도한 물질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들도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는 수준의 복지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지나친 욕망이나 지나친 물질도, 지나친 궁핍도 시를 못 쓰게 만들기 때문에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은 그 양자를 지양한 어느 균형점 같은 것이죠.

 

그 균형점에서 시심을 찾아내는 일이 여러 면에서 중요하겠어요.


농부도 마찬가지죠. 생명을 키워내는 일을 하는 분이, 땅을 다루고 물을 다루는 분이 어째서 시심이 없겠어요. 다만 너무 농업이 피폐하고, 당장에 빚더미 때문에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판이니 말이에요. 한 평 공간에 종일 서서 일하는 마트 점원이 어떻게 시를 쓰겠어요. 그러나 그분들이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게 되면 거기서 시가 나오지 않을 리 없겠죠. 이것이 제가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해요. 그래서 모두 다 시인이 되는 세상, 이게 가능하면 좋겠죠.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 1」에 보면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라고 했잖아요. 좁게는 최소한의 복지가, 더 넓게는 모든 형태의 권력 분산이 되어야만 갑도, 을도 시를 쓸 수 있는 거죠.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예요.

 

시인이라고 시만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역시 밥만 먹고 사는 것도 아니라고 한 방금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되네요. 


가끔 놀랄 때가 있어요. 제 주변에도 보면 시인이 아니지만 말씀드린 그런 조건이 되었을 때 나오는 몇 마디 이야기가 다 시가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과도한 쾌락과 과도한 궁핍이 없으면 제가 보기에는 모두 좋은 시들을 써내지 않을까 생각이 들죠.

 

아마 그것은 경험이기도 할 거예요.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했고, 10년 넘게 시인으로 산 경험이 이런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 거겠죠.


조심스럽긴 한데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있잖아요. 빈부의 문제, 폭력성의 문제, 지역 간 균형이나 갈등 문제, 고령화 문제라든지 노인 빈곤이라든지 말이죠. 이처럼 굉장히 중요한 문제들이 있는데 시를 읽는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치유되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선은 이 이야기가 그런 본질을 덮는 부작용을 낳으면 곤란하다는 대전제가 있어요. 그 문제들은 그것대로 해소해야죠. 여기에도 일관되게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요. 다만 그렇다고 그 문제들이 다 해결되면 인간이 평화롭고 행복해지느냐 질문한다면 역시 그 또한 필요조건이라는 의미예요. 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지만 위로의 기능은 분명히 있다는 거고요. 또 하나는 위로를 받는 도중에 욕망을 줄이는 기능을 분명히 한다는 거예요.

 

과도한 욕망을 계속 언급하셨지만 사실 내 욕망이 과잉이라는 점을 스스로 깨닫기는 쉽지 않아요.


내가 큰 아파트에 살고 싶고, 부와 명예도 쌓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현실에서 겪는 좌절이 있죠. 그걸 시를 읽음으로써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요. 시를 읽다보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 너무 과도한 욕망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통해 욕망 자체를 줄이게도 되거든요. 비록 욕망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다른 소중한 것들도 있다는 사실, 인간의 삶에서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요. 그러다보면 자기 목표가 과도하게 물질 지향적, 세속 지향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성찰을 하게 되는 거죠. 이것은 시만이 갖는 고유한 기능은 아니지만요. 다른 것보다 강렬한 기능이라고 봐요. 언어 중에서도 가장 밀도가 높은, 가장 추상 수준이 높은 시는 강렬한 사유와 성찰을 필요로 하니까요. 시를 잘 읽다보면 엄청난 울림이 있어요.

 

더 많은 욕망을 이야기하고 이 가치를 젊은이들에게 요구하던 사회에서 점차 욕망의 적정화를 이야기하는 수준으로 한국 사회가 변화하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우선 과연 젊은이들이 수년 전에 비해 정서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삶으로 가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아요. 몇몇 현상은 나타나고 있죠. 직장을 관두고 제주도로 간다든가 말이죠. 그러나 그런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기에는 여러 통계나 조사가 여전히 과도한 물질에 휘둘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다만 시를 포함한 문학과 예술들이 그런 것들을 제어한다고 할까요. 견제, 완화하는데 분명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요. 시집을 많이 사지는 않지만 모바일이라는 장치가 일상을 지배하다보니까 시가 많이 읽혀요. 시야말로 이런 환경에서 유통, 가공, 활용되기 제일 좋은 장르죠. 그래서 과거에 비해 좋은 시들을 많이 보고 있다고는 생각해요. 블로그, 페북 등에 가보면 좋은 시들이 엄청 많이 인용되고 퍼 날라지고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는 그 좋은 시를 쓴 시인들이 그에 상응하는 어떤 대가를 받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 공동체의 고민이 필요할 거고요. 일단 이런 현상 자체는 바람직하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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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억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일상과 시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 같아요. 어떠세요?


저는 이런 저런 모임에 가면 꼭 시를 읽어요. 동창회, 동아리 모임 같은 곳인데요. 처음엔 이런 자리에서 시를 읽어주면 우습지 않을까 했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이 사람도 감동을 받을까 싶던 사람조차 굉장히 좋아해요. 제 오만한 생각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저는 시가 갖는 강력한 힘에 대해 확신을 하는 겁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피에타’ 같은 인간이 빚을 수 없을 것 같은 조각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조각한 게 아니고 돌이 가진 원래의 것을 발현시킨 것이다’라고 답을 했어요. 저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해요. 이들은 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시에 감동할까. 시심이 원래 있는 거예요. 돈 버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그 사람 안에 있는 줄을, 녹슬어 있지만 완전히 끊어지진 않은 줄을 시가 건드려 준 것이라고 봐요.

 

그러니 이 책이 갈 수 있는 곳도 많을 테고요. 지금의 시, 현실을 이야기하는 시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이런 시들을 보며 시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으면 좋겠죠. 이걸 계기로 시를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만 한다면 바랄 것이 없어요. 시 외에 인용한 텍스트들도 그런 것이 대부분이고요. 저는 어쨌든 시의 외연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시의 본령이 누가 뭐래도 서정인 건 틀림없는데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아요. 그림도 마찬가지잖아요. 여러 가지 추상 표현, 설치, 팝아트 등으로 분화하잖아요. 시도 매우 다양하다, 시가 현실과 유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사람이 자기 생활 속에서 공감하는 것이라면 훨씬 더 감동을 받을 수 있거든요. 장사를 하는 분들이 김연대 시인의 「상인일기」를 보시면 정말 공감할 거예요. 여기에 인용된 시인 분들은 모두 훌륭한 분들이죠. 이 책을 계기로 그런 분들의 시들을 재조명하는 기회가 된다면 바랄 게 없어요.

 

하늘에 해가 없는 날이라 해도

나의 점포는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중략)

 

상인은 오직 팔아야 하는 사람
팔아서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
그러지 못하면 가게 문에다
묘지라고 써 붙여야 한다
(김연대, 「상인일기」 일부)

 

주제에 딱 맞는 시를 고르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십 년 동안 꾸준히 갈무리해 온 거예요. 그래서 이 책을 쓰겠다고 생각한 것이기도 해요. 이런 테마로 쓰겠다고 하고 시를 찾았다기보다는 말이죠. 시를 쭉 갈무리 해두다보니까 이런 시는 저널리스트로서 소개를 해봐야겠다 생각을 한 것이죠. 다만 저는 정말 우리나라의 시인들의 시는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탁월하고 빼어난 시들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비록 시가 세상을 주도하는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고 지금은 참 어려운 시절이지만 말이에요. 시인들이 갖고 있는 표현력이라든지 철학적 깊이, 고뇌 등은 결코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아요. 보석 같은 시들이 정말 많구나, 하고 느끼니까 쓰는 것이죠. 공부도 많이 되고, 위로도 많이 됐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시는 어떤 시들인가요?


현실을 집약한 경제 분야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구체적인 것들을 담아내는 시들이 좋아요. 시인으로 말하자면 함민복 시인, 복효근 시인, 정일근 시인, 고재종 시인, 이런 분들이 좋죠. 아주 쉬운 언어로 시를 써요. 오세영 선생이 세상에 네 종류의 시가 있다고 했거든요. 말하고자 하는 뜻도 어렵고 표현도 어려운, 뜻은 깊은데 표현이 쉬운, 뜻은 별 게 아닌데 표현이 어려운, 뜻도 별 게 아니고 표현도 별 게 아닌(웃음). 저는 그 중에 꼽자면 두 번째, 뜻은 깊은데 표현이 쉬운 시들이 좋아요. 물론 제가 아주 난해한 시를 읽어낼 힘이 없어서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어쨌든 지금 언급한 분들의 시들을 읽을 때 저는 아주 흐뭇해져요.

 

시를 꾸준히 갈무리해두셨다고요?


정몽주 선생의 시 중에 ‘하인 딸려 놀이 나가서 술 한 잔 먹고 돈도 다 떨어졌는데 돌아올 때 보니 그 안에 시어(詩語)가 수북이 담겨 있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어요. 저는 그런 기쁨 때문에 시인들이 시를 쓴다고 봐요. 시어 하나를 찾아내느라 몇 년을 고민하죠. 그것이 무슨 돈이 되겠어요. 그러나 시인에게는 엄청난 것이죠. 그런 것처럼 지금 저에게 무엇이 가장 큰 재산인지 묻는다면 내 블로그에 갈무리해둔 수만 편의 시와 수만 개의 텍스트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건 아무 환금성이 없어요. 하지만 금덩이가 주는 즐거움과는 전혀 다른 거예요.

 

다시, 시가 주는 강력하고 놀라운 힘이네요.


너무나 유명한 일화지만 ‘길상사’가 예전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이었잖아요. 그 주인이 백석 시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인데요. 당시 천억도 넘는 것을 쾌척했거든요. 기자들이 물었어요. 아깝지 않느냐고요. 그때 김영한 보살이 이렇게 얘기해요. “천억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요. 저는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고 봐요. 저는 큰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책에 경제라는 장르로 풀어놓은 것은 지극히 일부고요.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불교에 관한 것도 많이 있어요. 음악, 미술, 무용에 대한 좋은 시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런 시도 소개할 계획이 있으신 거죠?


순차대로 글로 풀어놓고 싶고요. 시를 매개로 음악이든 미술이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정말 빛나는 사유의 보석 같은 시들이 많아요. 그것에 비하면 아까 얘기했듯이 시인들의 사정이 너무 열악하죠. 그런데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좋은 시가 많이 나와요. 대단히 존경스러운 일이에요. 최근 최영미 시인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가슴 아픈 일이죠. 그게 현실인데요. 그걸 계기로 많은 분들이 시인들의 삶에도 관심을 가지고, 시집도 많이 사서 읽으시고, 이런 저런 시 낭송회도 많이 만들어 시인들도 초대해서 강의도 들어보시고 하면 좋겠어요.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임병걸 저 | 북레시피
삶의 애환과 본질을 꿰뚫어보는 고통스러운 아름다움, 시 속의 경제, 경제 속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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