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70일 파업’은 MBC의 분기점이었다. 파업이 끝나자 MBC 경영진의 ‘비인격적 인사관리’가 본격화됐다. 파업에 참가한 기자들은 업무에서 배제됐다. 해고나 강제 직종 전환이 빈번해졌다. 2003년 MBC에 입사해 사회부와 정치부 생활을 한 임명현 기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1개월 정직. 정직 후에는 3개월의 교육발령으로 ‘신천교육대’ 라고 불렸던 MBC 아카데미에서 ‘브런치 만들기’까지 해야 했다. 이후 보도국 외곽을 떠돌아야 했던 기자는 2015년부터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잉여와 도구』는 그가 2017년 초 발표한 논문 「2012년 파업 이후 공영방송 기자들의 주체성 재구성에 관한 연구: MBC 사례를 중심으로」가 바탕이 되었다.
임명현 기자는 27명의 MBC 기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 했다. 이중에는 파업 후 경영진에 의해 채용돼 배제된 기자들을 대체했던 시용기자, 경력기자도 4명 있었다. 『잉여와 도구』에 담긴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파업 이후 MBC라는 조직 풍경을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여준다. 상실과 저항 혹은 저항의 유예가 잘 짜인 다큐처럼 펼쳐진다. 이들은 각자가 처한 현실에 따라 발생하는 내밀한 입장차이를 솔직하게 이야기함으로써 바깥으로 손을 내민다. 이것은 그저 MBC라는 어떤 조직의 일만이 아님을 강변한다. 어두운 시간을 견뎌낸 이들의 참담한 증언, 그 목소리를 듣는 일이야말로 사회성 회복의 중요한 한 걸음임을 알게 한다.
예상하지 못한 재난에 가까운
기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책입니다. 책 나오고 기분이 어떠셨어요? 단순한 출판의 기쁨을 느끼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 같거든요.
이 책이 아니더라도 출판은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죠. 막연한 바람은 있었어요. 마흔 살 전에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낸다면 어떨까 했는데요. 올해 서른아홉이에요.(웃음) 우선은 감사한 마음이 있고요. 책은 이 세계와 나를 둘러싼 상황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항적 실천이 아닌가 생각해요. 기본적으로는 힘든 상황을 달래는 목적이 있을 수 있겠고요. 또, 이런 상황이 다시 오지 않도록 고민한다는 부분에서 의미가 있을 거예요. 후에 비슷한 상황을 혹시나 겪게 될 사람들이 참고하거나 반영할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긴다는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일단은 저도 이 시기를 지나오면서 상황을 버텨내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고요. 그것이 제게는 글쓰기였어요. 지난 몇 년 간 MBC라는 체제를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없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실천 중 하나였던 거예요.
기록이라는 목적 외에도 내가 처한 힘든 상황을 달래는, 일종의 치유 목적도 있었다는 말씀이네요.
실은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상하지 못한 재난에 가까운 일이었던 거죠. 경험하지 못한 재난이 왔을 때 그 자체가 주는 심리적 충격이 있었어요. 상실이 주는 경험인데요. 이것은 기자로서의 나, 혹은 PD나 아나운서로서의 나의 상실이 주는 충격,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만들었던 MBC의 상실이 주는 충격이죠. 물론 누구나 상실을 겪어요. 그러나 납득이 가는 상실과 납득이 가지 않는 상실이라는 차원이 있다고 보는데요. MBC 사람들이 느낀 상실은 분명히 납득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실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경우 상실이 주는 상처나 충격은 더욱 컸겠죠.
제 경우 2012년 파업 때 징계를 받았는데요. 정직 사유로 주어진 게 다섯 가지였어요. 그런데 그 다섯 가지는 백 몇 명에게 해당되는 사안이었거든요. 그 중 저만 징계를 받았단 말이죠. 다섯 가지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그걸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아요. 그것이 신천교육대에 가고, 보도국 외곽을 떠돌면서 기자 일을 할 수 없게 된 중요한 이유였는데 말이에요. 삶에 많은 의미를 주던 주요한 정체성 하나를 상실했는데 이유가 납득이 가질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너무 나섰나? 총회 때 그런 발언을 안 했어야 했나?’ 하면서 자기혐오와 주변 혐오로 갔던 것 같아요.
자기혐오의 경험이 뼈아픈 점입니다. 책에서도 이른바 ‘내사화’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잖아요. 많은 당사자들이 그런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저는 표현 욕구가 있는 편이라 SNS 같은 걸 안 한 적이 없거든요. 싸이월드 시절에는 클럽 같은 것도 하고요. PC통신도 했고, 지금은 페이스북도 하는데요. 그 시기, 2013년 봄부터 2015년 여름정도까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제가 삶에서 기록을 남겨놓지 않은 유일한 시기가 그때예요.
무의식에 잠겨 버린, 혹은 익숙해져버린 것들은 일일이 언어화하기 어렵잖아요. 그러다보니 내 상황을 내 말로 설명할 수 없고 그로 인한 답답한 같은 게 있죠. 글을 쓰는 과정은 그런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잉여’와 ‘도구’라는 명명이 그렇죠.
석사 과정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후기 자본주의 저성장 사회에서 청년 실업 같은 것이 구조적 문제가 되어 갈 곳이 없어지는 사람들에 대해 쓴 건데요. 이게 제 이야기 같더라고요. 쓸모가 없어 버려진 것이다, 잉여는 실업과는 다르다, 버려진 존재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는 말들이 계속 남았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는 존재일 뿐 과거처럼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존재감을 확인해가던 삶은 아닌 거예요. 그런 면을 잉여라 표현한 거고요. 도구는 인터뷰에 자주 나오던 단어는 아니었지만 몇 번 쓰인 단어예요.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분석하는 과정에서 주목을 하게 됐죠. 버려지지 않기 위해 이용당하는 삶을 수용해야 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구라는 단어로 개념화했어요.
영화 <공범자들>이나 박성제 기자의 『권력과 언론』도 그렇고요. 겉에서 보기에는 지금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는데요. 사실은 내부에서는 여러 형태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저항도 여러 층위가 있는 것 같아요. <공범자들>에서의 ‘저항한 사람’은 꾸준히 싸운 사람에 가깝지 않나 싶어요. 제가 더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거기에도 못 낀 사람들이었어요. 영화 마지막에 이름이 쭉 올라가잖아요. 하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내 이름은 없더라, 뭐하고 살았나 싶더라’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어요. 그들은 저항을 했다고 봐야하는가, 아닌가. 이것이 제가 가장 관심 있던 질문이에요.
저항의 유예, 유예의 저항
MBC 내부 당사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는데요. 읽다보면 이것이 MBC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잉여와 도구』가 보편성을 가지는 이유기도 하고요. 근본적으로 이것은 구조의 문제, 자본의 문제, 노동의 문제인데요.
보편성은 많이 의식했던 문제였어요. 지금도 느끼는 거지만 공영방송의 파업, 공영방송의 문제라는 것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이전 같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가 아닌 것 같아요. 게다가 이것은 우리가 힘드니 관심을 가져달라, 식의 말 걸기인데 그러기엔 세상에 힘든 사람이 너무 많죠. 반드시 세월호, 쌍용차처럼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러니까 MBC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기는 너무 민망해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권력이란 늘 갈라놓으려 하죠. 순수한 주민과 외부세력,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남아 있는 사람과 밖으로 추방한 사람, 이런 식이잖아요. 그러면 그 안에서 사람들이 파편화되면서 권력의 목표가 관철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MBC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의 표상이고 단면이다, 이 점이 전달되었으면 했어요.
잉여와 도구 사이에도 여러 존재들이 있고요.
원래 제목은 ‘잉여와 도구 사이’였어요. 그러면 ‘사이’가 너무 주목되는 것 같아 지금의 제목으로 결정했는데요. 그 사이도 분명 있을 거예요. 게다가 저는 지금도 낯선 느낌을 가질 때가 있어요. 어떤 경우를 보면 과연 내가 힘든 게 맞나, 어쨌든 MBC에서 월급을 받았으니까 이 정도로 사는 게 아닌가, 싶어질 때가 있거든요. 물론 정서적으로는 굉장히 힘들었지만 말이에요. 가령 MBC 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언론사 지망생들이 있어요. 나이도 있는데요. 이들이 저한테 ‘MBC 정상화를 기원합니다’라면서 이 책도 사주고 그래요. 경제적인 게 다는 아니지만 이런 사람들한테 MBC 문제가 너무 심각하니까 관심을 가져달라는 말을 걸기가 진짜로 너무나 민망한 거죠. 우리는 기자생활을 할 때 이들의 문제에 얼마나 귀를 기울였으며, 혹은 정상화가 되어 기자생활을 한들 이들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진정성 있게 고민할 수 있을까, 싶은 거예요. 책을 쓰면서 정말 많이 고민한 부분이에요.
시용기자, 경력기자를 바라보는 시선 혹은 이들이 MBC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 등 이 모든 복잡한 양상을 이해하지 않으면 체질 개선은 어려운 일일 거예요. 그 하나하나의 문제를 짚는 게 굉장히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문제일 테고요. 책이 이런 면들을 폭넓게 조명했다는 점이 의미 있었어요.
작년 촛불 집회 때 느낀 게 많은데요. 집회에 나간 사람 중에는 박근혜 후보를 찍었던 사람도 있을 거예요. 집회에 나가진 않지만 집회를 지지하는 사람 중에도 박근혜 후보를 찍은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문재인 후보를 찍은 사람들만 집회에 나가고 그들만 지지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 과정에서 누가 ‘박근혜 찍었는데 촛불 집회 올 자격 있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문제적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내 편을 많이 만드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진영을 넓히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람은 약하기도 하고요. 잘못 생각할 수도 있죠. 저는 점점 사람의 판단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전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영토를 넓히려면 ‘너는 2012년에 파업 참가 안 했잖아’, ‘경력으로 들어왔잖아’라는 식의 언어로는 어려울 거예요.
쉽지 않은 문제잖아요.
감정적인 문제도, 원칙의 문제도 있죠. 청산은 어찌 하느냐는 질문도 있을 수 있고요. 다만 저는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숲’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요. 이건 한두 가지의 수종이 숲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거든요. 울창하고 장수한 나무도, 새끼손가락만도 못한 풀잎도 다양하게 있어야 숲이 오래 가는 거죠. 저는 최소한 망설이거나 번민하는, 분노와 부끄러움의 양가감정 사이에서 망설이는 사람들한테는 ‘괜찮으니까 와라’라고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래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정말 나쁜 분들은 망설이지도 않아요.(웃음)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그런 생각을 많이 깔고 있는 책이에요.
그것을 ‘저항의 유예(혹은 유예의 저항)’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어요. 모멸감을 견디면서 버텨온 것도 일종의 저항으로 봐야 한다고요.
이런 거예요. 세월호 기사를 쓰는데 기사에 ‘참사’라는 단어가 10번 나와요. 데스크가 전부 ‘사고’로 바꿔요. 기자가 데스크와 싸워요. 징계 받은 사람들은 그걸 안 해버린 사람들이고요. 징계 안 받은 사람들은 사고라는 단어가 잘못됐다는 의견은 제시했어, 라면서 10개를 다 수용하거나 혹은 끝까지 항의해서 참사라는 단어 3개 정도는 관철한 사람들인 거예요. 밖에서 보기엔 아무 의미 없죠. 알기나 하겠어요? 하지만 내부 사람들은 그 지난한 논쟁을 하는 건데요. 과연 3개라도 참사라는 단어를 지켜냈다면 그것은 저항한 것인가, 아닌가, 라는 물음이 남는 거죠. 이것이 지난 몇 년 간 가지고 있었던 질문들이었어요.
답을 찾은 건가요?
최종 결론은 아니고, 중간 결론쯤 되는 생각은 있어요. 그런 것을 저항인지 아닌지 분류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버티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진 힘이 있다는 건데요. 비유를 해보면요. 부실한 벽돌로 집을 지으라는 거예요. 안 그러면 쫓아내겠다고요. 어떤 노동자는 시키니까 해야지, 부실한 벽돌인지 난 모르겠어, 라면서 열심히 집을 지어요. 그러면 그 집은 지어질 거예요. 언젠가는 무너지겠지만요. 그런데 이걸로 집을 지으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면 잘릴 거고 그러면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이러면서 고뇌하는 사람이 있어요. 좀 느리게 짓고, 그래도 조금은 덜 부실한 벽돌을 가져와보려고 하고요. 이런 것이 가지는 힘.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이 힘을 빌미로 타협하고 현실을 수용한 사람들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네가 한 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요. 이들에게 너는 앞으로 우리가 새로 지을 집에 함께할 자격이 없어, 오지 마, 라고 하는 건 또 아닌 것 같아요.
그 시간을 지나면서 가지고 있던 고민의 깊이가 느껴지는 말이네요.
저도 사실은 그 중 하나죠. 쫓겨났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변방에서 혁명을 주도한 것도 아니고요. 쫓겨난 변방에서 그냥 공부하며 살았던 거잖아요. 하지만 어쨌든 그런 시간을 버텨낸 힘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꼭 MBC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을 살아온 한국 사람들도 그렇죠. 현존하는 권력을 바꾼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했을 때 답답한 시기에 마음속에 눌러 두고 버텼던 것, 그 힘들이 갑자기 뚫고 나온 게 아닐까 하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명료하게 말씀드리기에는 공부가 조금 덜 되었어요.
죽을 걸 알았지만 열심히 싸웠다
한 대목에서 ‘유사한 인사관리를 경험해 온 내부 행위자의 입장에선 매우 쉽게 이해되는 답변’이지만 제3자 입장에서는 의문이 남는다면서 기자가 이렇게 질문해요. 더 강도 높은 저항을 하지 않았느냐고요. 이것은 스스로에게도 많이 한 질문이었을 텐데요.
스스로도 명료한 답이 안 나왔기 때문에 주변에 집요하게 물었던 질문인데요. 아마도 기자를 준비할 때 특정 미디어를 정해두고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냥 기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러 곳에 지원하고, 붙는 곳에서 일을 하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기자가 되고 싶었고, 기회를 준 곳이 MBC였던 거죠. 한 사람의 기자로서 MBC라는 미디어를 이용하는 입장이었던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기자라는 게 우선이고, MBC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면 기자를 할 수 있는 다른 곳으로 가야겠죠. 여전히 기자를 기다리는 많은 현장들이 있고요. 그런데 안 그러고 있는 거죠. 왜일까? 대답은 잘 못하겠어요. 책에는 세 가지를 썼는데요. 그것은 저도 해당이 됐던 것 같아요.
세 가지라면?
하나는 경제적인 측면이죠. 연봉과 처우가 비교적 되는 회사니까, 이건 반박할 수 없어요. 쉽게 말해 연봉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없는 언론사인데 김재철 같은 사람이 왔다면 그 연봉을 감수하면서, 스케이트장 관리하면서 다닐까요? 당연히 옮기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20년 동안 이런 뉴스만 하며 살 수는 없어요. 그래도 기자로서 가졌던 의미와 계획이 있었을 텐데 그건 아무리 돈을 줘도 아닌 거거든요. 결국 이 상황이 언젠가 끝나리라는 희망이 있었던 거죠. 마지막 이유는 MBC 구성원들이 형성하고 있는 의식인데요. MBC는 사주가 없는 회사다, 사장은 월급 받는 사장이고, 이 회사의 주인은 우리다, 라는 주인의식이 있다 보니까요. 현재 경영진이 주인이란 생각을 당연히 안 할뿐더러 내가 나가면 진짜 저들이 주인이 된다, 누구 좋으라고 나가냐, 하는 생각이 있었죠. 대략 이런 생각들이 얽혀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도 명쾌한 답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2012년 파업 직후 정직 1개월 징계를 받은 후 교육발령을 받아 브런치를 만들러 신천교육대로 갔잖아요. 그러면서 이걸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아주 인상적인 기자적 태도였는데요. 이 또한 지난 시간 MBC에서 버텼던 하나의 이유이자 결과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브런치를 만들러 가나? 가서 뭘 만들어야 하나?(중략) 가지 말아버릴까…… 그러나 나는 우산을 펴고 있었다.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모멸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을 느끼는 것이 왠지 오늘의 나에게 주어진 숙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 2012년 파업에 참가했던 언론 노동자들이 어느 날 회사의 명에 의한 교육으로 브런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한국 언론사에 남을 수도 있는데, 당사자로서 그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44쪽)
브런치 챕터는 책 때문에 새로 쓴 부분이에요. MBC 사람들이 고생한 사건의 상징으로 많이 보도된 건데요. 어디를 뒤져도 그날 구체적으로 그 사람들이 뭘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기록이 없더라고요. 하다못해 동영상, 사진 하나도 없어요. 저도 기록하겠다고 영상도 찍고 했는데 잃어버렸어요. 사실 그날 느꼈던 감정 문제는 좀 심했어요. 기록하려고 갔지만 막상 그날의 기록은 아무 데도 안 썼거든요.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요. 이번에 기억을 더듬어 쓴 거죠. 아무튼 기억이 나요. 그날 굉장히 복잡한 기분으로 집에 와서 글을 쓸래야 쓸 수 없었던 게요. 그런 날이었어요.
한 인터뷰이도 기록해두지 않은 걸 후회해요. 모두들 이게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던 거죠. 그러니까 2012년이 중요한 분기점인데요. 2012년 파업 종료 당시는 이후 5년 동안의 시간보다는 희망이 더 많았던 시기 같아요. 이후에는 그야말로 ‘비인격적 인사관리’를 통해 본격적으로 내부 갈등도 심화되고요. 개인적으로는 어땠나요?
희망으로 치면 파업 직후가 2014년, 2015년보다 훨씬 많았어요. 정확히 언제부턴지는 모르겠는데요. 저는 어느 순간 다 보기가 싫더라고요.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은 만나봐야 답도 없는 얘기만 하고, 점점 그런 얘기도 안 하게 됐어요. 서로 처지가 빤하니까요. 더 분노할 힘도 없고요. 그러니 결이 다른 사람들과는 더 얘기를 안 하게 됐죠. MBC는 커뮤니티가 강한 조직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조금씩 달라졌어요. 경영진과 조금이라도 협력한 사람들, 협력해서 해외 연수 갔다 오는 사람들, 특파원 가는 사람들, 승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그렇고요. 심지어는 제가 성공회대를 간 이유도 우리 회사 사람뿐 아니라 다른 회사 사람들도 보기가 싫었기 때문이었어요. 기자를 만나고 싶지가 않은 거죠. 제 일상을 설명하기도 어렵고, 굳이 언어화해서 설명한들 상대가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식이었어요.
지인이 기자를 ‘고문 피해자’ 보는 것 같다고 말한 대목도 있잖아요.
아무도 보기 싫다, 내 삶이나 챙기자, 라는 생각이 사측이 원하는 사고방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됐죠. 섞이려고 하는 순간 번뇌가 몰려오기 때문에 그걸 감당하지 못했어요. 각자의 내상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때 삶이 나와 내 주변의 것으로 굉장히 줄어들었었죠.
최승호 PD는 이런 문제가 재발할 수 없도록 구조와 제도를 정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는데요. 기자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파업 이후,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제도적으로 정비할 부분이 있고, 개인적 차원에서 변화시킬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소유 구조를 바꿔야 하는 면이 분명히 있죠. 다만 제 생각에 제도란 최선을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최악을 막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쪽이어야 한다고 보고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사람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포용해서 우리 쪽 지형을 넓혀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이질적인 존재를 한쪽에 남겨두면 상황이 변했을 때 또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잖아요. 이게 무슨 탁구도 아니고, 그러다가 MBC라는 조직 자체가 쇠락해갈 거란 우려가 사실 있거든요. 우리에게 제도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은 없지만 연대를 선택할 수는 있지 않나 해요. 고민하고 망설인 사람들에게 손 내미는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으니까요. 사실 이것도 조심스러운 이야기예요. 부역자 청산, 과거 청산 여론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요.
사회적 분위기의 중요성도 짚지 않을 수 없어요. ‘빙산에 얹혀 있는 빙조각’이라는 표현도 쓰셨는데요.
지난 5년간의 경험이 제게 도움이 됐다고 느끼는 몇 가지 측면이 있어요. 그 중 하나가 미디어와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 조금 다른 사고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미디어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라는 질문이 우리한테 훨씬 익숙하죠. 한편 사회가 미디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라는 질문은 조금 어색한 것 같아요. 그런데 15년 남짓 MBC라는 곳에 있으면서 관찰한 것들은 물론 미디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있지만 그만큼 사회가 미디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거예요. 종편이 노인의 보수화를 가속시킨 측면이 있겠지만 저는 그만큼 보수화 된 노인 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종편이 등장,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JTBC도 마찬가지고요. 사실은 그게 위로가 됐어요.
위로요?
파업에서 지고 몇 년 간 겪은 것들이 꼭 우리가 잘못해서, 더 열심히 싸우지 못하고 전략적으로 치밀하지 못해서인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뭘 잘못했을까 하는 질문을 많이 던졌어요.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면서 자신을 향해서나 당시 집행부를 향해 화살을 던지고 서로 싸우고 갈등도 했는데요.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파업에서 진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 중에는 빙조각 밑에 깔린 빙산의 움직임, 흐름이라는 게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세에 따르고, 무저항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 저널리스트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위로가 되더라고요. 잘못 싸워서 죽었다고 생각하면 잘못 싸운 자신이 후회될 텐데 죽을 걸 알았지만 열심히 싸웠다고 생각하니까 싸운 우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보면 5년 전보다는 마음이 편안한 측면이 있어요.
논문을 발표했을 당시 한겨레 고명섭 기자가 칼럼에서 ‘비정상이 철거되는 날 잉여도 도구도 주체다운 주체로 돌아올 것’이라고 적었어요. 희망하세요?
‘탈식민이론’에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식민지 트라우마』에 나온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생각을 보니까 정말 비슷하더라고요. 이전까지는 한반도를 차지해온 국가가 일본에 있던 국가에 비해서 문화적이라는 우월감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역전이 된 거죠. MBC도 똑같아요. 그동안 무시했던 사람들이 MBC를 장악했으니까요. 탈식민 이후에 대한 프란츠 파농의 말이 와 닿더라고요. 우리 목표는 독립 자체도 아니고 당한 만큼 돌려주기 위함도 아니다, 흑인들이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서다, 이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요. 김장겸 일파에게 빼앗긴 MBC를 찾아오는 독립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건 기자로서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기 위해, 되찾아서 사회적으로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명섭 선배가 쓰셨던 ‘주체다운 주체’라는 표현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고요. 잃어버렸던 전문직주의, 잃어버렸던 기자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될 거예요
잉여와 도구임명현 저 | 정한책방
2012년 파업 이후 파업 참가자들은 보도국에서 배제되어왔는데, 평조합원으로 참여한 후 말과 글의 힘을 빼앗긴 내부인이자 저널리스트로서 공영방송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내부인들의 증언을 통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