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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근 “그때의 청춘들은 누구나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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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속에 잠들어 있던 청춘들의 이야기가 깨어난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여주인공 후지이 이츠키는 한 권의 책을 통해 때늦은 고백을 받게 된다. 중학생 시절 그녀를 짝사랑했던 남학생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안에,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의 대출 카드 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두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랑은 책과 함께 남았고,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그녀에게 가 닿았다. 결국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책이 가진 마법과도 같은 힘이다. 오랜 시간을 견뎌낸 책이 품고 있는, 시간을 붙들어 두는 능력이다. 책은 자신을 읽어 내려가던 눈길과 매만지던 손길을 기억한다. 그리고 빈 공간에 채워지던 새로운 이야기들을 비밀처럼 간직한다. 그 이야기와 마주하는 것은 다른 이의 손때 묻은 책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나보다 앞서 책과 만났던 사람들의 시간과 그 안의 감성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기도 하고, 새로운 화두를 얻기도 하며, 예상치 못했던 해답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가 헌책을 찾는 이유, 헌책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무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바로 그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의 옛 주인이었을 누군가가 남긴 메모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 말에 마음을 뺏겨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순간, 그리고 상상 속에서 이름 모를 그의 지난날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까지. 작가 윤성근은 지난 10년 동안 그 순간들을 기록해왔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의 주인이기도 한 그는, 헌책 속에서 의미 있는 글씨들을 발견할 때마다 직접 사진으로 찍고 자신의 감상을 적어 남겨두었다. 그 메모들 속에서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했고 누군가는 힘겹게 이별을 말했다. 자유와 고독에 대해 물어오는 이도, 현실의 무게 앞에서 이상에 대한 목마름을 토로한 이도 있었다. 작가는 그들의 말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고민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때로는 감추어진 이야기들을 추측해 보기도 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얻은 커다란 즐거움과 깨달음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작가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안에 소중한 만남의 순간들을 담아냈다.

책 속에 남긴 문장이 편지이건 사랑고백이건 내가 보기에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내용이 모두 너무도 솔직하고 진심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때론 아주 짧은 문장을 보고서도 그 글씨를 쓴 사람에게 이끌려 깊은 상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경험을 한 적도 많다. 책 속에 글씨를 남긴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일은 셀 수도 없다. (p.15~16)


헌책방은 생명과 호흡이 느껴지는 공간

책 속에 남겨진 메모들 중에 작가님의 마음을 잡아끄는 글들은 어떤 것인가요?

읽어보고 진지한 내용일 경우에 사진으로 찍고 남기죠. 그런데 2000년대 이후의 책들에는 그런 메모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쓸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으니까요. 블로그나 SNS 같은 공간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쓰는 것과 블로그나 SNS에 쓰는 것은 성향이 무척 달라요. 블로그나 SNS에 남기는 글은 누군가 반드시 읽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쓰게 되잖아요. 그런데 책에 쓰는 글은 혼자서만, 아니면 그 책을 선물 받는 한두 명의 사람들만 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정말 솔직하고 진지한 내용들이 많아요. 남에게 잘 할 수 없는 말들을 적어놓기도 하고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에는 메모들을 보고 작가님이 느끼고 상상한 것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말을 아끼신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느꼈던 바를 쓰면서 ‘나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느끼시나요?’하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마 그렇게 썼더라면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줄어들었을 것 같아요. 제가 상상했던 내용을 봄으로써 독자들의 상상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도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스포일러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죠(웃음). 처음 썼던 원고에서 많은 부분을 덜어내고 짧게 줄였어요.

특히 작가님의 상상력을 자극했거나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글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황지우 시인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 남겨져 있던 메모가 생각나요. ‘밥값으로 책 사다. 이틀간 밥 안 먹기. 책 읽기 두렵지만 그래도 읽고 싶다.’고 적어놨거든요. 그 옆에 ‘서강인’이라고 적어 놓은 것으로 봐서는 서강대학교 앞에 있었던 ‘서강인’ 책방에서 샀던 책이 아닐까 싶어요. 아마 서강대학교 학생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했죠. 당시 서강대학교에 다녔던 분들에게 들어보니까, 문학과지성사 책 한 권 값이면 학생 식당에서 밥 두 끼 정도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글을 쓴 사람의 상황이 상상이 되더라고요. 저도 사실 그랬던 적이 많거든요. 이를테면 밥 먹는 것과 책 읽는 것 두 개 중에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웬만큼 허기가 지거나 죽을 것 같지 않은 정도면 책 읽는 걸 선택할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70년대에 출간된 황석영의 『객지』에 헤어지자면서 보내온 편지가 쓰여 있는데, 책 안에 대여 학자금 신청서가 꽂혀 있더라고요. 책에는 다 싣지 못했지만 서너 장의 면지에 걸쳐서 편지를 써 놨어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경제력이 부족하니까 우리는 만나면 안 되겠다, 헤어지자, 하는 이야기죠. 내용에 알맞게 황석영의 『객지』를 함께 보낸 거예요.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 속에 대여 학자금 신청서와 연대 보증인 신청서가 들어가 있더라고요. 편지랑 같이 그 내용을 읽으면서 가슴이 짠했죠.


그런 순간에는 책의 주인을 찾아서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드실 것 같습니다.

정말 마음이 찡한 메모들이 있어요. 처음엔 그 책들을 다 가지고 있었죠.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게 아깝기도 하고, 메모를 쓴 분에게 미안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제 일이니까, 팔았죠(웃음). 그리고 책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이 메모를 보고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여지를 줄 수 있는 게 또 헌책방 일이니까요. 헌책방을 쓸모없는 책들이 모여드는 쓰레기장처럼 생각하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저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돌아다니다가 헌책방에 다시 돌아온 책들에게서 어떤 힘을 느껴요. 모진 세월을 여행하면서 얼마나 위기가 많이 있었겠어요. 고물상에 넘어가서 파지가 될 수도 있었을 테고, 불타거나 물에 젖어서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결국 살아남아서 다시 돌아왔잖아요. 마치 역전의 용사와도 같죠. 그런 힘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헌책방은 죽어있는 책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엄청난 생명과 호흡이 느껴지는 곳이에요.




헌책방에서는 우연히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헌책방과 작가님의 첫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헌책방을 처음 다니기 시작한 건 초등학생 때였어요. 그때 정릉에 살고 있었는데 저희 집 옆에 국민대학교 학생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어요. 그 형들이 헌책방을 많이 데리고 갔었죠. 그 무렵부터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 일명 빨간책이라고 하는 문고본을 모으려고 했죠. 당시에는 그 전집이 80권까지 나왔어요. 지금은 100권으로 출간됐고요. 그걸 모아보려고 했는데 새 책방에서 사면 한 권에 1500원~2000원이었거든요. 그 가격이 부담스러우니까 헌책방으로 갔죠. 거기에서는 한 권에 300원, 500원에 팔았으니까요. 그렇게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을 모으려고 헌책방을 많이 이용했죠.

‘책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헌책방에 모인다’고 하셨는데, 책과 사랑에 빠진다는 건 어떤 것인가요?

책을 사랑한다는 건, 책을 그냥 물건으로써가 아니라 마치 사람을 대하듯이 생각하는 거죠. 헌책방에 오시는 분들 중에는 예전에 가지고 있다가 없어진 책이나 그 때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 다시 열렬히 찾고 싶은 책들을 구하는 분들이 계세요. 어떤 분들은 몇 달에서 몇 십 년까지도 찾아다니는 경우가 있고, 그 물건을 찾았을 때 정말 헤어졌던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눈물을 흘리시는 분도 있어요. 쿠라다 하쿠조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도 사연이 깊은 책인데, 처음에 그 책은 다른 헌책방에서 일할 때 인연을 맺었어요. 70세 정도 되신 할아버지께서 60년대에 나온 이 책을 찾아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사랑과 인식의 출발』은 유명해서 문고본으로도 많이 나왔는데, 반드시 60년대에 출간된 책을 구해야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유를 알고 보니까, 그 분이 젊었을 때 첫사랑에게 연애편지를 쓰면서 『사랑과 인식의 출발』의 한 구절을 베껴 쓰셨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대부분 그랬죠(웃음). 그래서 결국 몇 달 만에 찾아드린 적이 있었어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헌책방으로 모여드는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책을 찾기 위해서군요.

그런 이유가 크죠. 헌책방의 최대 매력이라고 하면 우연적으로 길을 잃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거예요. 『우연한 산보』라는 일본 작가의 만화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산책이라는 것은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새 책방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의도하는 책을 사러 가는 거잖아요.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도 원하는 책을 검색해서 사면 끝이죠.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책을 정보 습득의 의도로써 대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헌책방에서는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책이 나를 만나는 경우가 있어요. 헌책방에 오는 사람들은 자기가 찾는 책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찾는 책이 서가에 꽂혀있다면 그 책을 찾아서 기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주위에 있는 책들 중에 굉장한 연인이 숨어있을 지도 모르거든요. 그런 게 엄청난 매력이죠. 그리고 책이란 모름지기 그렇게 읽어야 되는 것 같아요. 정보 습득 차원에서 자기가 원하는 책만 읽어서는 지경이 그렇게 넓어지지 않거든요. 책이란 게 얼마나 많아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것을 우연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자기가 원하는 책을 쉽게 찾을 수가 없어요. 일부러 어떤 책을 찾아서 지경을 넓혀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도 있죠.

작가님이 처음 책과 사랑에 빠진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 이후로 사람을 사랑하듯 책을 대하게 되셨나요?

고등학교 올라와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게 됐는데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이후로 ‘제대로 된 독서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좀 진지하게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저에게 책은 사람 이상이에요.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건, 그것이 한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 만나다 보면 또 변하잖아요. 좋아해서 만났던 사람도 시간이 가면 변하기도 하고요. 변화무쌍한 게 사람이죠. 그런데 책이란 건 평생 변하지 않는 거니까요. 변했다면 내가 변한 거죠.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를테면 제가『변신』이란 책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었을 때와 2학년 때 읽었을 때, 대학교 때 읽었을 때가 다른 거죠. 똑같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건 바로 책을 통해서 내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죠. 책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책은 그런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70~80년대에 쓰인 것들입니다. 작가님에게 그 시절 서점 혹은 헌책방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80년대에 저는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을 보냈어요. 당시 저에게 책방이란 꿈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자 삶의 일부분이었죠. 나중에 커서 헌책방 주인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리고 대학교 앞에는 언제나 사회과학 서점이랄지 모임의 장소가 있었잖아요. 딱히 책을 사지 않더라도 그곳에 가서 게시판에 적힌 모임 공지를 보기도 했죠. 제가 90년대에 대학교를 다닐 때도 그런 문화가 남아 있었는데 ‘오늘 어디 술집에서 달리자’ 이런 게 써있는 거예요. 휴대전화나 호출기도 잘 없던 시절이니까요. 그리고 당시의 헌책방이나 사회과학 서점 같은 곳에서는 잡지를 만들어서 배포하기도 했어요. 신입생들이 읽어야 할 책들을 소개하는 팸플릿도 있었고요. 그런 문화적인 일도 굉장히 많이 했었죠. 그 시절에 저는 시간이 날 때면 거의 대부분 책방에 있었던 것 같아요.




헌책방을 찾는 이유는 삶의 여유

책에 쓴 누군가의 긴 편지를 읽을 때, 그것이 마치 내가 쓴 것인 양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손으로 쓴 글씨는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것은 마치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이메일로 연애편지를 쓰는 게 좋으냐, 혹은 손으로 꾹꾹 눌러 쓰는 게 좋으냐 하는 문제와 같다. 누구라도 연인에게서 받는 편지는 손글씨이길 바란다. 이것이 바로 종이책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p.105)
헌책방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IT계열 대기업에서 근무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연봉과 직장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니던 90년대는 벤처 열풍이 불 때였어요. 운이 좋게도 대학을 다니면서도 일할 수 있었죠. 그런데 아무런 가치관도 없었던 젊은 시절에 돈을 만지다 보니까 허랑방탕하게 썼던 것도 사실이에요. 돈을 많이 벌었던 만큼 빚도 많았어요. 많이 벌수록 씀씀이가 커지니까 그만큼 빚도 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영점(zero)으로 돌아가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까지 수집했던 책들도 처분하고, 헌책방을 시작했죠. 결정이 쉽진 않았어요. 특히 헌책방 초창기 시절에는 정말 돈이 없었어요. 저는 문 열어 놓으면 그냥 사람이 들어오는 줄 알았거든요(웃음). 사업이란 걸 처음 해 보니까 잘 몰랐죠. 헌책방을 시작하고 반 년 동안은 진짜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다시 회사 다니던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못 하겠죠(웃음). 몇 백만 원씩 월급을 준다고 해도 못할 것 같아요.

시간이 갈수록 헌책방들이 사라져가고,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기 때문일까요?

경제가 어려워져서 헌책방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 헌책방을 찾는 이유는 삶의 여유인 경우가 많아요. 70년대, 80년대의 사람들은 굉장히 피곤하게 살았고 정치적으로도 구속된 상태였지만, 헌책방에 다닐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월급도 더 많이 받고, 삶도 풍요로워졌고, 책을 볼 수 있는 돈도 많이 있지만 헌책방을 찾지 않아요. 그런 걸 보면서 저는 ‘삶을 살면서 다른 데로 한 눈을 팔 수 있을만한 여유가 많이 줄어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더글러스 러미스가 쓴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이 있어요. 책 제목만 보더라도 얼마나 이율배반적이에요? 경제 발전이 많이 됐지만 지금의 삶은 전혀 풍요롭지 않거든요.

헌책방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필요한 변화는 무엇일까요?

일본의 경우처럼 전문적인 헌책방들이 많이 생겨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전문 헌책방이라는 건 무시 못 할 경쟁력이거든요. 가끔씩 헌책방에 오셔서 책의 가격을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분들이 계세요. 인터넷 중고서점 사이트에서 가격비교를 하는 거죠. 그런데 전문 헌책방에만 있는 책들은 가격 검색을 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사실은 가격 비교를 할 수 없는 걸 찾아야 진정한 승리자라고 할 수 있죠(웃음). 헌책방은 책이 허투루 없어져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로써도 충분히 필요가 있어요. 외국의 경우에는 책이 한 번 태어나서 쓸모가 다하면, 곧바로 고물상에 파지로 팔려가는 경우가 별로 없거든요. 출판사, 서점, 동네 서점, 헌책방, 도서관 이런 곳들이 다 연계되어 있어요. 일본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재고 서적이 많이 발생하면 고서 협회에서 구입을 해요. 그래서 협회원인 전문적인 헌책방들이 모여서 책을 거래하죠. 도서관에서 보관하다가 버리는 책들이 헌책방으로 가기도 하고요.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그런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차차 갖춰나가면 좋겠어요.

헌책방에는 다양한 판본의 책들이 모여 있습니다. 특히 번역서의 경우에는 어떤 버전의 책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이 되는데요. 작가님만의 선택 기준이나 노하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일단은 많이 읽어보는 게 정답인 것 같아요. 『위대한 개츠비』만 보더라도 김영하 번역본이 있고, 김석기 번역본이 있잖아요. 어떻게 번역하든 자기 취향에 맞는 게 좋죠.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려면 많이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막힘없이 잘 읽히는 책이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걸 확인하는 방법은 한두 장 정도 소리 내서 읽어보는 거예요. 눈으로 읽을 때하고 는 다르게, 소리 내서 읽다 보면 버벅 거리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눈으로 볼 때는 글자를 이미지화해서 읽기 때문에 그런 경우를 포착해 내기가 쉽지 않아요. 소리 내서 읽어 보면 문장의 완성도를 알 수 있죠. 뛰어난 번역가들이 번역한 글은 문장이 자연스럽고 쉬워요. 안정효, 이윤기, 김석희 같은 분들이 번역한 책들이 그렇죠. 세 분은 소설가이기도 하시잖아요. 소설가로 데뷔를 하고 소설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문장을 잘 구사하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고수들이 쓰는 방법은 또 따로 있는데요. 진정한 고수는 한두 장 정도는 원서로 읽어봐요. 그러면 실제 원작자가 어떤 식으로 문장을 구사했는지 알 수 있거든요.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지금 출판계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 같아요. 70~80년대만 하더라도 사회과학 책들의 출간이 활발했어요. 그때는 거의 운동의 개념으로 열정을 가지고 출판하시는 분들도 많았거든요. 그 시기에 진짜 좋은 책들이 많이 번역돼서 출간됐어요. 다시금 나와 줬으면 싶은 철학이나 사회학 책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돈이 안 되니까 못 나오는 경우도 많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 ‘너무 돈에 좌지우지하는 출판계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한편으로는 ‘출판사들이 더 이상 독자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 이유는 독자들이 예전보다 주체적인 독서를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대부분 언론에서 소개하는 베스트셀러 위주로 독서가 이루어지잖아요. 예전에는 정말 주체적인 독서를 하는 독자들이 많았어요. 자기가 읽을 책은 자기가 직접 선택했죠. 그렇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도 독자들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고요.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삶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청춘들을 위한 책 『마의 산』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에는 20~30년 전 청춘들의 감성과 시간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시대의 청춘 독자들에게는 어떤 책을 추천해 주고 싶으신가요?

대학생들은 여름 방학이 길잖아요. 이렇게 시간이 많을 때, 평소에는 읽기 부담스러운 분량의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거든요. 제가 추천해 드릴 책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입니다. 한스 카스토르프라는 20대 중반의 청년이 주인공인데요, 여름을 맞아서 스위스의 요양소에 있는 사촌을 만나러 가게 돼요. 원래는 3주 정도 다녀오려고 했는데 병이 옮는 바람에 몇 년 동안 기거하다시피 머물게 되죠. 그러면서 삶에 대해서 성찰해 보게 되는 내용이에요. 배경이 시원시원한 스위스의 요양소이기 때문에, 이 여름에 재밌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 『마의 산』은 을유문화사에서 완역이 나왔고요. 제가 추천해 드리는 건 예전에 삼중당 문고에서 문고본으로 나온 3권짜리 책이에요. 세로쓰기이긴 하지만 갖고 다니기도 편리해서 여행지에서도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마의 산』을 통해서 치열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문제는 어떤 것인가요?

책의 주인공은 별 고민 없이 살았던 청년이거든요. 그런데 요양소에서 병든 사람들과 죽어나가는 사람들, 시니컬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돼요. 그런데 요즘의 청년들은 ‘대학 졸업하고 나서 어떻게 취직해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이 거의 최우선이거든요. 취업에 대한 고민,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물론 해야겠죠. 그런데 사실 그런 고민은 우리의 한 평생이나 인간이라는 것의 커다란 면면을 봤을 때는 극히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사람이라는 게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 것인가, 나의 어떤 철학을 삼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것을 하든지 자기만의 철학이 밑바탕 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그 밑바탕은 확실히 젊었을 때 마련해 두어야 하는 것 같아요. 나이 먹고 나서 철학이 바뀌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요.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서 젊었을 때 많이 고민을 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안에 담긴 20~30년 전의 메모들이 오늘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게 될까요?

책에 실린 글을 남기신 분들은 아마 지금쯤 중년 이상의 나이가 되셨겠죠. 그분들 중에는 이 책에 썼을 당시의 마음과 고뇌를 그대로 간직하고 사시는 분들도 더러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많이 변하셨겠죠. 생각도 많이 달라지셨을 수 있겠고요. 그분들은 이 책을 보면서 ‘내가 그때 이런 진지한 고민도 많이 했었구나, 삶을 이렇게 애틋하게 살았구나’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면서 앞으로의 남은 삶을 다잡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 같고요. 젊은 세대는 ‘그 때는 선배들이 책 하나를 읽더라도 이렇게 진지한 고민을 하면서 삶에 열정을 가지고 살았구나’ 하고 생각해볼 수 있을 거예요. 지금보다도 훨씬 억압받던 시대에 선배들이 가졌던 고민과 고뇌를 들여다보면서, 휘발성 있는 시대에 진지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어떤 의미에서는 세대 간의 격차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책을 통해서 젊은 세대는 선배들을 이해할 수 있고, 선배들은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하고 젊은 시대를 이해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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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윤성근 저 | 큐리어스
[응답하라 1997]에 열광하고 『비브리아 고서당의 사건수첩』에 감동했던 사람이라면 반가워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1980, 90년대의 향수를 듬뿍 담은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가 바로 그 책. 독서 에세이를 출간한 저술가이자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윤성근 씨(39)가 헌책 속에서 찾아낸 옛 주인들의 메모를 모은 책이다. 1980, 90년대를 청년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면 “아, 이 책” 하고 무릎을 칠 만한 책들이 대부분이지만, 거기에 쓴 글씨들은 2013년 오늘을 살아가는 청춘남녀들의 마음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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