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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상 화백 “거리 자체가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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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개의 캔버스, 가로 16미터의 대작 <광장에, 서>는 임옥상 화백이 2016년 촛불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담아낸 그림이다. 청와대 본관에 전시되기도 해 큰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을 가리켜 임옥상 화백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담았다고 말했다. 해 같기도, 달 같기도 한 촛불의 이미지는 광장에 들꽃처럼 흐르고, 그 아래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표정은 ‘이게 나라냐’, ‘탄핵’과 같은 거친 언어와는 달리 평화롭고 단정하다. 임옥상 화백은 언제나처럼 가장 지금의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발언했다.


이 <광장에, 서>를 표지에 담은 『벽없는 미술관』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임옥상 화백의 작품을 화백의 글과 함께 담아낸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격랑의 시기, 엄혹했던 시대를 몸으로 살아낸 한 작가의 고민과 분노, 무엇보다 희망을 향한 열정이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독재와 비리에 대한 비판, 사회 그늘을 향한 직시를 당국의 감시와 억압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임옥상 화백의 신념이 따갑게 다가온다. 그리고, 현실을 인식하고 두려움 없이 발언하던 화백의 시선은 이제 대중에게로 향한다. “작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중심 이동을 해야”한다는 임옥상 화백은 이것이 분명한 시대의 화두라고 말한다. 미술관은 거리 그 자체여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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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하나의 들꽃이 되면 좋겠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살아오는 동안 지금처럼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정치과민이라고들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내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스트레스가 제일 컸던 것 같아요. 그런 스트레스가 작업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쳤거든요. 이상할지 모르겠는데, 좀 쪽 팔리잖아요.(웃음) 태어나 살고 있는 자기 나라, 자기 땅이 이렇게 유치하고 불의와 부도덕, 부정이 난무하는 곳이라니 말이에요. 그 속에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에요? 그 창피함이 굉장히 컸었어요. 어디 외국에 나가서도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가 너무 거북하고 창피스러웠죠. 외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응 또한 그랬고요. 연민과 비아냥거림 같은 것도 많이 받았는데요. 그런 데서 조금 자유로워지지 않았나 싶어요. 비로소 말이에요. 아직 어처구니없는 일도 종종 있지만요.

 

책머리에 글에서 ‘촛불 전과 후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는데요. 촛불 이후 1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했어요. 


나도 감히 한 공동체의 일원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공동체 안에 많은 동지들이 있구나, 하는 건데요. 그것은 큰 위안이 아닌가 생각해요. 내가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과 뜻을 같이 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은 큰 위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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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에, 서 Tide of Candles_360x1620_캔버스위에 혼합재료_2017

 

표지에 실은 <광장에, 서>는 바로 그 촛불 당시를 잡아낸 작품인데요. 선생님은 이 작품을 가리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그렸다고 설명하셨잖아요. 현재는 청와대 본관에 전시중이고요.


제가 68학번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세상의 더러운 꼴을 다 겪으면서 지냈다고도 할 수 있죠. 시위를 하더라도 시위가 되질 않았었고요. 최루탄을 비롯해 온갖 폭력이 난무했고, 그런 속에서 시위가 진압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역사였기 때문에요. 그런 것을 체험했던 저로서는 광장에 앉아 촛불을 들 때 느낌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은 정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죠. 모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평화적으로 시위가 됐잖아요. 그처럼 아름다운 광경이 이 지상에 어디 있겠어요. 수많은 다수가 하나로 모이고 그러면서도 각각의 독립성을 가졌던, 이건 정말 아름다운 거죠. 우리가 만발한 들꽃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 그것을 보면서 ‘나도 하나의 들꽃이 되면 좋겠다’는 느낌을 갖잖아요. 그런 느낌을 거의 그대로 받았었어요.

 

그 순간을 작품으로 증언하고자 하셨던 거군요.


증언까지는 아니고요. 현장에 있었으니 작가로서 이런 걸 제대로 못 그리면 내가 작가가 되겠느냐(웃음) 생각했어요. 하지만 작가로서의 자의식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기보다 그냥 솟아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자연스럽게 분출된 것이죠.

 

작업 기간은 얼마나 됐나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구상하는 데 오래 걸렸고요. 사실 어떤 표상, 사건, 경치, 이런 것이 있으면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들잖아요. 하지만 재현해놓고 보면 막상 굳이 왜 저런 걸 재현했는가, 싶어요. 게다가 이 촛불은 얼마나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어요? 아마 전 세계적으로 지금까지의 역사 가운데에도 가장 많은 축에 속할 거예요. 그걸 내가 그림으로 한다는 게 부담이 됐어요. 그래서 아예 영상이나 사진처럼 재현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고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렇게 되면서 작업을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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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발언’


1970년부터 2000년까지, 30년의 시간을 한 권의 책에 묶었어요. 개정판이라고 하기엔 수록 작품수나 내용면에서 전혀 새로운 책이고요.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아주 기분이 좋았었어요. 지난날의 자신을 보면서 오늘의 나를 다시 한 번 되짚을 수 있는 시간이 됐고요.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내가 할 작업들이 아니겠어요? 그런 와중에 저의 예전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옛날에도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것들이 발견이 되더라고요. 그것으로 좀 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됐죠.

 

한 자리에 모인 선생님 작품을 보니 과연 ‘현실과 발언(1987년 발족한 민중미술 동인명)’이라는 말이 그 자체로 작품들을 수식할 수 있겠더라고요. 이에 대해 ‘나는 그림 그린다. 숨쉬기 위해, 살기 위해’라고 하셨죠.


현실 인식, 현실에 대한 의식이 그림 그리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현실 인식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좌우될 수밖에 없거든요. 하물며 예술이야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현실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 작가한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의 가장 큰 전기는 대학원 논문 쓸 때였어요. 이전까지 내가 이상한 것을 했다는 첫 깨달음이 있었죠. 그것을 계기로 제가 추상적인, 소위 현대미술이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돼요. 은유의 은유로 하는 작업이 시대 변혁을 시키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실과 발언’에서 시대 현실을 조금 더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업을 해나갔던 거예요.

 

그렇게 건져 올린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어떨까요?


그때는 엄청나게 돌아가는 때였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조심스럽긴 한데요. 적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적 비슷한 것을 보여주고 그게 적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적을 좀 더 구체화시켜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즉, 시대의 부조리와 독재 권력, 경직된 정치체제, 분단과 분단의 원인을 제공하는 미국 등에 대해서 가급적이면 조금 더 밀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박정희 시절에는 더 위험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그때는 보다 상징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제 자신을 숨겼죠.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서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즉흥성의 작가’라고 평한 성완경 평론가의 글에 공감했습니다. 표지 작품뿐 아니라 성수대교 사고를 보자마자 만든 <자동차 시대>, 광주를 얘기한 <얼룩>, <종이호랑이> 등이 그렇죠. 2016년 촛불 때는 광장 한 복판에 계셨고요. 선생님의 작품에서 ‘현재성’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탁 떠오르면 딱 작업을 해야 하는 거죠. 직관을 통해 얻어진 것을 그냥 나 혼자 느끼고 말면 그건 작품이 안 되잖아요. 바로 할 수밖에 없는, 해야 하는, 하지 않고선 배기지 못하는, 그런 것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것을 한 선배는 ‘임옥상은 번개 치듯 작업한다’고 했는데요. 제가 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많이 한 말도 그런 거예요. “그림이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잠이 오냐?”고 했었거든요. 시작을 했으면 빨리 끝을 봐야죠. 아니면 집어넣든가 말이에요. 특히나 이 작품을 하는 이유에 따라 더 빨라야 하는 것도 있죠. 어떤 건 정말 시간이 급박한 것도 있잖아요. 여유 있게 서서히 하는 것도 있겠지만요.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런 시대에 있지 못했단 말이죠. 그 속에서 여유를 찾는 사람도 많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사는 시대에서 사실상 여유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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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는 마침 아침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식사를 더 이상 못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자동차 시대, 추락하는 자동차! 그냥 입만 벌리고 있을 뿐……. 주위에 있는 이것저것을 주섬주섬 모아 땅 위에 육필로 쓴 비망록이다. 그냥 정신병자처럼 만들어 낸 작품이다.(254쪽)

 

 

격랑 속에 있는 물고기


그런가 하면 아크릴부터 시작해 종이부조, 포스터, 컴퓨터그래픽, 설치까지 선생님은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해오셨거든요. 그건 기존의 것을 끊임없이 깨는 과정이었을 텐데, 계속해서 형식과 내용의 변화를 꾀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러한 나의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보는 각도에 따라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요. 저는 한편 이런 생각도 해봐요. 내가 좀 익숙한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고요. 비슷한 것을 가지고 계속 다듬는 게 아니고 자꾸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서 해야 풀리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본래 작품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작품은 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흘러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시대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니까요. 계속 변하는데 작품이 하나의 목소리로 어떤 한 가지만을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에요. 나는 중심을 도처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심지어는 사람 중심에서 사물 중심, 미물 중심으로까지도 시점을 바꾸어서 대응할 수 있어야 하죠. 그것을 오히려 나는 상상력, 창의력의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보거든요.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계속 쳐다보면 그게 뭐겠어요? 뻔하잖아요. 역지사지로, 계속 남의 입장에서 중심을 바꿔가며 세상을 보고, 그 속에서 또 나를 쳐다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객을 정해놓고 사는 삶은 굉장히 정체적인 삶이라고 봐요. 주객을 계속 바꿔가며 봐야죠.

 

‘시대의 전위에 서야 한다’는 믿음이 도리어 작품 활동을 어렵게 한 적은 없었나요? 붉은 색을 많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을 압류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80년대처럼 엄혹한 시절을 지내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살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신념이라기보다, 저는 약간 푼수기가 있는 거예요.(웃음) 동료들이 다들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고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도 저는 그걸 무섭게 생각하지 않고, ‘할 테면 하라고 해’라는 생각으로 한 거예요. 전들 앞뒤 안 따지겠어요? 따질 수밖에 없는데요. 왜 그렇게 그랬는지 말이에요. 하여튼 저도 좀 미스터리한데요. 한 개인이 활동하는 데 가족의 성원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사사건건 아버지가 불러 야단을 치거나 당국에 본인이 아니라 가족이 끌려갔다면 신념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겠죠.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그렇지 않으셨어요. 지금 102세인데요. 그냥 “조심해라” 정도셨거든요. 그러니까 ‘나 하나 정도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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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조선’이란 말을 써도 관계없다. 귀빈을 모시기 위해 펼친 붉은 카펫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노동자가 두른 붉은 머리띠는 위험하고, 내가 칠한 붉은 황토색은 ‘좌경 용공’이 된단 말인가. 붉은색을 많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은 압류되고 나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저들의 ‘안보적 상상력’을 누가 말리겠는가.(84-85쪽)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너무 힘든 순간도 많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있었죠. 작품 빼앗기고, 재직하던 대학의 총장이 계속 지나가면서 한 마디 씩 하고 그럴 때는 힘들었죠. 이상한 교육에 자꾸 저를 보내고 그랬거든요. 블랙리스트가 되니까 늘 최우선 감시 대상이었어요. 자꾸만 호명되고, 몸으로 때워야 하고, 불편했죠. 하지만 이런 격랑 속에 있는 물고기가 어떻게 보면 더 싱싱하고, 힘도 세고, 건강하고 그렇지 않겠어요? 폭포 밑에서 노는 물고기와 계속 폭포를 치고 올라가려고 도전하는 물고기는 다르겠죠. 누군가는 그러더라고요. 임옥상은 평화로운, 안정된 시기에 있었으면 무슨 그림을 그렸을까(웃음) 라고요.

 

 

모두가 건강한 미적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들


우울하고, 실망스러운 90년대 끝에 인사동 거리에서 ‘당신도 예술가’ 활동을 하며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경험하셨다고 하셨죠.


화랑과의 전속 계약이 끝나고 나서 경제적으로 험난한 시기를 보냈는데요. 그것이 저를 다시 변화시켰어요. IMF 직후였거든요. 공공미술에 눈 뜨게 된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냥 ‘이번 주에는 어떤 것 갖고 사람들과 놀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그럴 때였는데요. 연평도에서 싸움이 또 있었죠. 그 두 개를 엮어서 사람들과 같이 놀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그곳에 온 사람들이 박찬호가 되는 거죠. 그런데 뒤에는 폭탄이 터지는 설치미술을 해놓고 같이 논다든가 하는 식이었어요. 부시가 미사일이니, MD체제니 해서 한글날에는 한글로 사람들과 디자인 전시를 하기도 했고요. 재료에도 항상 변화를 주었어요. 안 써봤던 재료들을 막 쓰는 자유도 느껴봤는데요. 지금 하는 작업도 다 그 경험의 연장이에요. 그때 사람들에게 미술이 굉장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사람들이 미술을 참 좋아하는데 우리가 너무 전문가 입장에서만 보지 않았나 싶었어요.

 

이른바 ‘미술의 대중화’이군요.


우리가 사람들을 찾아가고, 같이 무엇을 해볼 생각 안 하고 미술을 모른다고 했던 거예요. 이런 것들을 반성하면서 사람들과 같이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요. 그때부터 공공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죠.

 

미술의 사회적 가능성을 좀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미술이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보세요?


미술이란 것이 기회가 닿았고, 전공했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미술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또 생활 속에 미술이 존재하고 있고요. 그런 것들 사람들이 재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죠. 그 속에서 모두가 스스로 건강한 미적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어디 가서 사람들이 ‘경치 좋다’고 할 때 반박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대부분은 다 비슷하거든요. 지나가는 사람이 진짜 멋있게 잘 입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알잖아요. 이 미감은 다 같이 공유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의 총화가 잘 정제되어 나오는 것이 작품인데요. 이걸 못한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아예 미적 안목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는 얘기죠. 반대로 이들이 갖고 있는 미감을 토대로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어야 해요.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건강하게 미적 실천을 할 수 있게끔 분위기를 돋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에요.

 

그 토대 위에서 미술 역시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겠죠.


공공 미술이라는 게 그거잖아요. 생활 속에서 미술을 향유하는 거죠. 유통 개념으로, 소유의 개념으로 미술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 예술을 자꾸 집어넣어서 그 안에서만 예술의 가치를 논의하려고 하면 안 돼요. 이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아니, 이걸 가지고 얘기하는 건 예술의 길이 아니죠. 어떻게 보면 예술을 파괴하는 거예요. 오늘날의 화랑 시스템, 경매 시스템은 어떻게 보면 금융 시스템과 똑같거든요. 예술이 이런 시스템을 방조하거나 따라가는, 그런 것으로부터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지켜야 해요.

 

지금 공공미술에 뜻을 두고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작가 개인이 가지는 꿈과 이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죠. 지자체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그런 것들이 거의 안 되어 있어요. 최근에 어느 놀이터 공모에 당선이 되었어요. 그런데 디자인비만 주고 끝이었어요. 시스템이 전혀 받쳐주질 않아요. 그러면서 ‘문화의 시대’라고 하는 셈이에요.

 

그렇다면 앞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공공미술이란 어떤 모습으로 진행이 될까요?


내 작품을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인간답게,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문화적 요소를 갖추게 하는 데에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재작년에 창신동에 ‘소통공작소’라는 것을 공모해서 했는데요. 제 작품으로 동네를 예술적으로 만드는 거였거든요. 그때 공모를 하면서 ‘내 작품을 버린다’고 했었어요. 대신 컨테이너로 집을 지었어요. 사람들이 와서 숨겨져 있던 재능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사람들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창신동이 서울에서 단위 면적당 고용 지수가 제일 높은 곳이에요. 거기에 도시재생이라고 해서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사람들은 다 쫓겨나고 결국 집값만 오르겠죠. 저는 그 창신동의 사람들이 그대로 거기에 살면서 계속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도시재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려면 저 같은 예술가들이 개입해서 그들의 잠든 예술성을 깨우고 북돋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생활로 들어오는 장면, 생각만으로도 참 의미가 깊어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한때 일본에서도 1일 2-3취미를 얘기했었는데요. 이제 우리도 그런 사회로 진입해야죠. 취미 하나 정도가 아니라 취미 두세 개를 가지고 자기를 발현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할 거예요. 예술도 작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중심 이동을 해야 하고요. 저는 이것이 분명한 이 시대의 화두라고 믿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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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로소 출발


책에 담기지 않은 책 이후, 그러니까 2000년대 이후의 임옥상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작품의 공공성’이겠죠. 공공미술이 될 거예요. 제가 1999년에 ‘당신도 예술가’를 할 때만 해도 저를 이상하다고 했었어요. 전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요즘은 지자체마다 그렇게 안 하는 곳이 없을 정도잖아요. 저는 거리가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미술관을 가야하고, 화랑을 찾아 가야 하는 게 아니라 거리 자체가 미술관이 되고, 문화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책 마지막 부분에 ‘새 천년은 시민의 사회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과 잘 조응하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사람의 사회, 시민의 사회예요. 촛불의 사회라 볼 수 있겠죠. 이 책을 관통하는 것도 어떻게 인간으로서 인간 정신을 훼손당하지 않고 나의 자유 의지로 사회에 공헌하고, 더불어 즐겁게 세상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이 촛불로 다소 이루어졌죠. 저는 이제 비로소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두 손으로 촛불을 들었었잖아요. 이제는 한 손에 촛불을 들고, 나머지 손은 또 다른 일을 해야죠. 화가인 저는 그림을 그리고요. 공히 모든 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이라면 나머지 한 손에 책을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즉 인문 사회적인 지식이나 스스로의 철학과 성찰이 없이는 이 촛불은 그냥 타고 말아요. 그런 점에서 책이 촛불과 같이 들려짐으로써 출발점에 선 우리 사회를 앞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고 믿어요. 

 

‘비로소 출발’이라는 게 아주 중요할 것 같아요.


저는 어떤 권력도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반하는 것은 모두가 적이죠. 그렇게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권력이 제대로 가지, 우리가 조금만 놓쳐 봐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거예요.

 


 


 

 

벽 없는 미술관임옥상 저 | 에피파니
암중모색의 1970년대, 광주의 핏빛으로 얼룩진 1980년대, 산업화로 우리 전통들이 희미해져가는 1990년까지, 한 개인의 시선을 넘어 1970~1990년대 대한민국 현대사를 살아낸 이들을 위한 생의 기록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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