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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꿈이 없었다면 며느리 사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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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잘’ 읽어야 할 책을 만난다. 책이 말하는 내용을 곡해하지 않고, 핵심을 잘 이해해야 하는 책. 『며느리 사표』가 그렇다. 책이 나온 과정도 궁금했지만, 출간 이후가 더 궁금했다. 제목만 읽고는 소설로 착각했던 에세이 『며느리 사표』 . 지난 설 명절에 이 책을 읽고는 슬쩍 내 주변의 어머니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삶도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며느리 사표』시작은 이렇다. 대가족 장손의 아내로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며 23년을 살아 온 여자가 2012년 추석 이틀 전, 시부모님께 ‘며느리 사표’라고 적힌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더 이상 며느리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만 있을 뿐이었다. 버럭 화를 낼 거라 예상했지만 시부모님은 사표를 받아들였다. “아무 때든 네가 편안히 오고 싶을 때 오라”는 시부모님의 말을 듣고 여자는 결혼 후 처음으로 명절에 시댁을 가지 않았다. 친정 가족들에게 ‘며느리 사표’를 말하자 원성이 들렸다. 그래도 여자는 남은 인생을 온전한 자신으로 살고 싶었다. 이후 여자는 남편에게 이혼 선언을 했고, 대학을 졸업한 아들과 딸에게는 독립을 요구했다.

 

열렬히 사랑해 결혼했는데 여자는 왜 결혼 생활이 불행했을까. 여자는 스스로 나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혼해서도 여전히 아이처럼 의존적이고 무지해서 부당함이 뭔지 몰랐고, 삶의 문제들을 어떻게 부딪쳐 해결해나가야 하는지 몰랐다.”(53쪽)고 밝힌다. 여자는 꿈 공부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편은 이혼을 거부했고, 대신 여자의 세 가지 제안을 받아들여 2년간 변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이들은 짧은 졸혼 기간을 거쳐 지금,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때를 보내고 있다. 『며느리 사표』단순히 한 여자의 독립 권유서가 아니다. 나 자신, 그리고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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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투고한 책이라고 들었다. 책이 나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2012년 여름, 제러미 테일러 선생의 꿈 워크숍을 수강했다. 내 꿈을 들은 제러미는 내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고 했다. 강한 저항과 강한 울림을 동시에 느꼈고 결국 지금의 책이 되었다. 그 전까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 매일매일 일기를 썼고 2017년 봄쯤 『며느리 사표』초고를 완성했다. 어떤 출판사에 투고해야 할지 찾아보는 중에 딸아이가 ‘사이행성’을 추천해줬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를 출간한 출판사였는데, 책을 읽어본 후 다른 책 리스트를 쭉 보니까 신뢰가 갔다. 물론 다른 출판사에도 투고했는데 사이행성이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지난 설 명절에 <한겨레21>에 기사가 크게 나왔다. 한동안 크게 이슈가 됐다.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간 날, 연락을 엄청 많이 받았다. 인터뷰, 특강 요청도 많이 왔고. 책에 대한 반응이 아직도 조금 믿기지 않다. 2월 중순 이후 정신이 좀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쓸 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50대 주부의 이야기,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기대하지 못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초고 제목도 『며느리 사표』나?


그렇다. 사실 책을 낼 때는 제목을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적절한 제목을 찾지 못했다. 조금 위험한 단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결국 ‘며느리 사표’를 쓰게 된 과정, 계기, 이후를 쓴 책이니까 써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주’는 필명인가?


원래는 가명으로 쓰려고 했다. 사적인 이야기들이 너무 많으니까. ‘꿈로바’라는 이름으로 블로그 글을 써왔기 때문에 ‘로바’로 쓸까 하다가, 성을 제외한 이름으로 정했다. 50년을 살다 보니, 그동안 나는 아버지의 모습 반, 어머니의 모습 반으로 살아온 느낌이 들었다. 본래의 나로 살고 싶은 마음에 이름을 썼다.

 

가족사가 많이 들어갔다. 남편, 두 아이들에게 초고를 미리 보여줬는지.


물론이다.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면 안 되니까. 너무 사적인 이야기는 뺐다. 책이 나온 이후에 아들이 “내 분량이 제일 적다”고 하니까, 딸아이가 “오빠, 이 책은 언급이 덜 될수록 좋은 거야”라고 했다. 남편은 “책에 나온 이야기들이 사실이니까 괜찮다”고 했다.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니까 그냥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대가족 장손의 아내로 수많은 친척, 손님들을 맞이하며 ‘며느리’로 23년을 살았다. 8년을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분가를 한 후에도 매주 주말마다 시댁을 가야 했다. 남편에게 외부 약속이 생기는 날에도 아이들과 함께 시댁을 갔다.


우리 가족 모두 시부모님에 대한 의존이 뿌리 깊게 있었다. 분가했다가 다시 들어간 집은 시부모님의 아랫층이었다. 시댁에 함께 살 때 남편에게 집안일은 다른 행성의 일이었다. 신혼 초 남편이 집안일을 해보도록 여러 번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나는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결혼 생활을 했다.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몰랐기에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던 거다.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나의 결혼 생활은 ‘좋은 시부모님 밑에서 풍족하게 살고 있는 복에 겨운 며느리’였지만, 나는 답답하고 힘들었다. 어떠한 시간, 장소에도 나는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며느리 사표』를 쓰기 전, 이혼을 선언했을 때, 남편은 변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결심을 지켰다. 2년간 부부 상담도 받았고.


1년 약속했던 부부 상담을 남편은 2년을 다녔다. 처음엔 어쩔 수 없다는 듯 응했던 상담이지만, 남편은 차츰 부부 문제만이 아니라 직장의 어려움도 풀어내고 다른 관점으로 상담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다. 1년 정도 상담을 했을 무렵, 평행선을 달리던 우리의 대화에 문이 열렸다. 우리는 상담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주 1회 부부의 날을 가졌고 각자를 존중했다. 상담이 필요한 건, 제3자의 관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요구한 제안(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생활을 존중하고 며느리라는 의무감 없이 살겠다 등)이 일찍부터 이뤄졌다면 ‘며느리 사표’를 쓸 일도 없지 않았겠나.


그렇지만 이 역시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 나도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남편은 내가 이혼하자고 했을 때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거다. 그 전에 했던 이야기들은 귀담아듣지 않다가 그제야 현실로 받아들였다. 남편이 내게 함부로 대한 게 아니었다. 남편은 부부는 한 몸 같은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라고 여겼다. 『며느리 사표』를 읽으면서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아내를 한 개인, 한 사람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는 스스로가 판단하지 않고, 내 입장에 대해 한 번씩 생각해준다. 모든 걸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각자의 모습으로 존중하고 있다.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

 

꿈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꿈 공부를 하게 된 건 우연이었지만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일찍부터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1987년도에 내 발로 성당에 찾아갔고, 부모교육 강의를 하면서 심리 공부도 했다.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치유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부분이 있어야 했는데, 꿈 공부를 해오면서 내 인생을 더 정확히 보게 됐다. 꼭 전문가만 꿈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최소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관계 속에서 힘들어 하는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꿈을 해석하면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긴다. 꿈의 언어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내가 꿈을 몰랐다면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면, 며느리 사표까지 가지 못했을 거다.

 

무의식 속의 나를 아는 것, 꿈이 해답을 줄 때가 있다.


꿈의 목적은 자신의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마음, 영성적 건강함으로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다. 융이 말하는 자기실현, 즉 온전한 본래의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또한 꿈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그림자, 뒷모습과 자신의 내적인 힘을 볼 수 있게 한다. 즉 진정한 나를 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책을 낸 후 꿈을 꿨는지.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내가 어떤 바닷가마을에 은둔하며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문을 열고 해안가로 갔더니 엄청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으니까 친정엄마가 내가 있는 쪽을 알려주더라. 이 책을 통해 내 삶이 드러나게 된 사건을 꿈을 통해 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는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꿈을 안 꾸는 사람은 없다.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 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만큼 꿈이 많이 기억난다.

 

가족꿈심리작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어떤 곳인가?


부모와 자녀,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꿈 심리 강의와 거울 작업을 한다. 꿈 작업은 치유 차원을 넘어 일인분의 온전한 자신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한다. 가족과 인간관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실제적인 작업을 안내한다.

 

6년 전, 작업실을 얻어 개인 공간을 만들었다. 전업 작가가 아닌 이상 어려운 선택이지 않나.


어느 날 신문을 보다 한 작가의 이야기를 읽었다. 작가는 집에 자신의 연구실도 있고 집에 혼자 쓰는 방도 있는데, 고시원을 얻어 글을 쓴다는 이야기였다. 한 달에 16만 원만 내면 고시원을 빌릴 수 있고 그 곳에서 글만 쓰고 나온다는 거다. 당시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내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집 가까이 새로 지은 원룸을 1년만 미친 적 지내보자고 덜컥 계약했다. 3~4평짜리 원룸이었는데 10개월간 매일 집에서 이 공간으로 출퇴근했다. 낮잠도 자고 영화도 보고 책도 뒤적이다가 꿈으로 내면 작업도 하고 글도 쓰기에 이르렀다. 나를 방해하는 것이 없으니 집중이 잘 됐다. 집의 에너지와 나만의 공간의 에너지가 다름을 확연히 느끼게 됐다. 이곳은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시댁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필요한 베이스캠프가 됐다.

 

부모교육 강사는 어떤 계기로 하게 되었나?


결혼하고 3년 만에 아이를 낳는데, 사공이 너무 많았다. 할머니부터 고모님, 어머님까지. 한 아이를 두고 수많은 교육 지침이 흘러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김인자 '부모 효율성 훈련(Parent Effectiveness Traning)’ 강의를 들었다.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둔 후, 30대부터 직업을 가지려고 여러 시도를 했다. 찾아보니 강사 과정이 있었다. 39살에 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부모교육 강의를 시작했는데, 딸아이의 사춘기를 경험하면서 중단했다. 내 삶이 먼저 안정된 후에 교육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심리 공부를 하면서 내 안에 죄책감이 많다는 걸 느꼈다. 내 자식이 나처럼 상처받지 않고 자라길 바랐기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이든 욕구든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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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밀착을 친밀함으로 착각하고 산다

 

두 자녀에게는 어떤 엄마인가?


솔직한 사람? 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말해주곤 한다.

 

미래에 아들이 결혼한다면 어떤 시어머니가 되고 싶은가? 며느리를 어떻게 대하고 싶은가?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식구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문득 아들이 “엄마, 나 결혼하면 아내한테 ‘며느리 사표’ 쓰고 결혼 생활 시작하자고 할 거야”라고 했다. 내가 시어머니가 된다는 상상을 하지 못해 잠시 멍한 느낌이 들었고, “그래, 그렇게 하라”고 했다. 고부 갈등이 생기면 아들이 아내 편을 들 거라고 했다. (웃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서로가 행복해진다. 좋은 며느리, 좋은 시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관계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여줘야 건강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적절한 거리감에서 오는 편안함이 가족 간에도 있다.


물론이다. 거리 두기는 소외가 아니다. 너무 가까운 관계는 예의를 지키기 어렵다. 배려와 존중을 찾기 힘들다. 우리는 밀착을 친밀함으로 착각하고 산다. 서로에게 선을 두면 자연스럽게 존중이 나온다.

 

이번 명절은 어떻게 보냈나?


며느리 사표를 낸 후, 가족 모임을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고민 끝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혼한 것도 관계를 끊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정기적으로 밖에서 가족 모임을 한다. 밖에서의 식사 모임은 누가 누구의 식사를 준비할 것도 없고, 시중을 들어줄 필요도 없다. 함께 모여 함께 먹는다. ‘~해야만 하는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가족의 일원으로 만나고 있다. 불과 1~2년 만에 새로운 관계가 바뀐 것이다. 제사와 명절도 간소하게 지낸다. 제사를 성묘를 가는 것으로 대신하고, 차례상 대신 우리 가족들이 먹을 음식만 한다.

 

“제목만 읽고도 뭔가가 해소된 느낌이 있었다”는 독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을 선택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 얘기를 온전히 혼자 쓴 첫 책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해 준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힘들고 고달플 때 스스로 질문했다. 내가 어떤 부분이 힘든지,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 질문하고, 작은 것부터 바꿔 나갔다. 처음부터 사표부터 시작한 게 아니었다. 하나씩 해결하고 찾아가고 행동할 때, 그만큼의 힘이 내 것이 됐다. 살아보니 가장 가까운 관계가 가장 힘들다. 부부 간, 연인 간, 형제 간 내가 무엇이 힘들고 어려운지 작은 것부터 생각해보면 해답은 멀리에 있지 않다.

 

내 삶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도 됐을 것 같다.


정말 그렇다. 내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고 한편으로는 내 자식들에게 이 책을 물려줄 수 있겠다는 감사함이 있다. 최소한 내 아이들은 내 삶을 되풀이하지 않을 거니까.

 

『며느리 사표』는 잘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시각으로 이 책에 접근하면 좋을까.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자식들에게는 독립을 권하고. 그래서 혼자만 잘 살겠다는 건가? 오히려 반대다. 나 자신을 찾아야 모두가 수평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서로 존중하고 풍요로운 관계가 되려면 내가 행복해야 한다. 나 자신에게 먼저 최선을 다하는 건 이기적인 삶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다. 이 이야기를 독자에게 꼭 하고 싶다.


 

 

며느리 사표영주 저 | 사이행성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힘겨운 결혼생활을 보냈던 대한민국의 어느 평범한 여성이, 어떻게 그 견고하고 두꺼운 벽을 혼자 힘으로 깨고 나와 새로운 삶을 만들어갔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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