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쌓여있는데, 만사태평인 누군가가 밖에 나가 놀자고 꾄다면 당신의 선택은? 김중석 작가의 그림책 『나오니까 좋다』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룻밤 캠핑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뭐든지 어설픈 고릴라와 툭툭 신경질을 내면서도 고릴라의 곁을 살뜰히 지키는 고슴도치. 마치 우리 아빠, 엄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다가,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림책 속 고릴라는 코를 후비다 “날씨가 좋다”며 일이 많은 고슴도치에게 캠핑을 가자고 부추긴다. “바람 쐬고 오면 더 잘될 거야”라고 고릴라의 말에 고슴도치는 잠깐 고민한 후 따라 나선다. 막히는 도로를 달리며 고릴라는 “나오니까 좋다”고 말하고, 고슴도치는 “집에 가고 싶다”고 투덜댄다. 가는 내내 티격티격하다가 마침내 도착한 숲 속. 모습도 성격도 정반대인 두 주인공은 과연 무사히 캠핑을 마칠 수 있을까?
그림책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중석 작가는 오랜만에 만든 그림책을 앞에 두고 “책 쓰니까 좋다”고 말했다. 그림책 수업, 전시 기획 등으로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떠올랐던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던 캐릭터 ‘고릴라’. 우여곡절 끝에 『나오니까 좋다』로 고릴라에게 안부를 전한 날, 작가의 후배는 작품 속 고릴라와 고슴도치를 똑 닮은 인형을 선물했다.
술렁술렁 읽어도 괜찮은 그림책
『나오니까 좋다』 , 표지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책입니다.
제목이 특히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웃음)
정말 어딘가 나가야 할 것 같고요.
제목이 빨리 나온 책이에요. 예전에 혼자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에코백을 만들었는데요. ‘나오니까 좋다’라는 문구를 무심히 썼는데, 나중에 보니까 제목으로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제목을 마지막에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일찌감치 정해졌어요.
오래 전에 계약하셨던 작품으로 들었어요.
햇수로는 4년이 걸린 것 같아요. 제가 그림책 작업을 전집으로 시작했거든요. 동물이 주인공인 책이 있었는데 그 중 고슴고치도 있고 고릴라도 있었어요. 그림책 디렉팅을 하시는 분이 고릴라 그림이 좋다고 하시길래 사무실에 고릴라를 붙여 놓았었는데요. 어느 날 사무실에 들른 편집자분이 “고릴라를 주인공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주셨어요. 처음엔 고릴라가 꽃집을 하는 이야기를 생각했어요. 외모는 거칠어보이지만 마음은 여린 고릴라 이야기. 그런데 그 사이에 그 편집자는 퇴사를 하셨고. (웃음) 원고는 오래 묵혀 있다가 이제 빛을 보게 되었어요.
이 책은 고릴라와 고슴도치가 캠핑을 떠나는 이야기인데요.
일본 책 중에 고릴라가 빵집을 하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서사가 다르긴 하지만 구조가 비슷할 수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다가 캠핑으로 소재를 잡았어요.
평소 캠핑을 즐기세요?
아이들이 어릴 때 많이 다녔어요. 저는 고릴라랑 비슷해요. 일을 벌리는 걸 좋아해요. (웃음)
그림책 치고 서두(?)가 좀 길어요. 본문에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장치일 텐데, 꽤 재밌습니다.
호흡을 천천히 해도 좋을 것 같았어요. 전체 줄거리를 설명하는 약간의 암시인데요. 편집자와 상의하다가 나온 아이디어죠. 여백의 미가 있는 책이에요. 글밥도 많지 않고요. 술렁술렁 읽어도 괜찮은 그림책입니다.
왠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셨을 것 같기도 해요.
더미북을 완성한 건 작년 초였어요. 채색을 해야 하는데 바빠서 못하고 있었는데요 이번 겨울에 일주일 동안 제주도에 갈 일이 있었어요. 오랜만에 혼자 있으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제주도에 그림책을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 이분이 함께하는 모임에 에어비앤비를 하는 회원이 계시더라고요. 소개를 받아서 그곳에서 채색을 했어요. 장소가 좋아서인지 금세 그렸어요. 원래 그림을 좀 빨리 그리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리면서 힘들었던 장면은 없었나요?
밤이 되어 고릴라와 고슴도치가 차를 마시는 그림이 있는데, 중요한 장면이라서 고민을 많이 했죠. 원래는 ‘나오니까 좋다’라고 대사를 쓰려다 나중에 빼 버렸어요. 이 장면은 그냥 그림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서요.
글자가 말풍선처럼 날아가는 느낌이라 재밌더라고요. 작가님 글씨도 예쁘고요.
글자 부분이 재밌다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선호하는 재료가 있나요?
오일 파스텔을 자주 써요. 이번 작품에는 연필, 크레용, 잉크도 썼는데요. 오일 파스텔이 특히 색이 예쁘게 나왔어요. 하지만 섬세한 표현을 하려면 여러 도구를 잘 사용하는 게 좋아요.
고릴라가 고슴도치에게 저녁으로 카레라이스를 만들어주잖아요. 왜 하필 카레였을까요?
음식을 그렸을 때 시각적으로 예쁠 것 같았어요. 고기를 굽는 장면도 생각해보았는데, 고기를 굽긴 좀 숲에게 미안하고. 숲이랑 잘 어울리는 메뉴를 생각하다가 쉽게 해먹을 수 있는 카레를 생각했어요.
뱀 두세 마리가 계속 두 주인공을 따라다녀요.
숲 속 친구들 개념으로 그렸는데 무섭다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웃음) 사실 처음에 스토리를 짤 때, 고릴라와 고슴도치가 잠들면 뱀들이 나와 자기들만의 캠핑을 즐긴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야기가 좀 흩어질 것 같아서 숲 속 친구들 정도로만 그렸어요.
예술가가 못 되더라도 일상은 잘 유지하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책 작가, 전시 기획자로도 활동 중이세요. 하나의 타이틀만 고른다면 첫 번째는 그림책 작가일까요?
원고 청탁이 왔는데 하나의 직업을 쓰라고 하면, 그림책 작가로 쓰죠. 그런데 글, 그림을 같이 한 작품이 너무 오랜만에 나온 거라서요. (웃음) 이제는 좀 자신있게 써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 되게 후련해요.
강연, 전시 등의 일정이 많으시죠?
기획 쪽 일이 좀 많아요. 작년부터 순천 할머니들과 그림책 수업 ‘내 인생 그림일기 만들기’를 하고 있는데요. 올해 3월에 전시회를 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곧 남해의봄날에서 책이 나올 예정이에요. 지금도 매주 순천을 가서 할머니들과 수업을 하는데, 가는 데만 3시간이 걸려요. (웃음) 그래도 참 좋고요. 할머니들의 그림 실력이 정말 일취월장 하고 있어서 저도 매번 놀라는 중이에요.
기사를 본 적 있어요. 할머니들의 그림이 굉장히 통일성이 있으면서도 섬세하더라고요.
전시회 때 700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는데요.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분들이 특히 더 놀라시더라고요. 우리 같은 경우 그림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많이 생긴 거예요. 할머니들의 작품을 보면서 왜 우린 이런 게 안되지? 생각했어요. 그림은 꼭 많은 걸 알아야 잘 그리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작년에 쓰신 에세이 『잘 그리지도 못하면서』를 읽었는데요. 만화 대사 중에 이런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나는 예술가가 아니고 가장이야.” 지금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물론이죠. 저는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좀 부족한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도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하면서 자기의 일상은 잘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싫더라고요. 예술가가 못 되더라도 일상은 잘 유지하자, 그런 주의예요.
그림책 작업은 어떤 계기로 하게 되셨나요?
대학 때 추상미술을 주로 그렸는데요. 졸업한 후에는 그래픽디자인을 하고 대학에서 강사 일도 했어요. 그러다 북디자인에 관심이 생겨서 2002년에 서울에 올라와서 출판사 일을 하게 됐어요. 전집 삽화를 그리다가 서른 일곱 살쯤인가 회사를 그만 두고 개인 작업을 시작했죠. 전시 기획도 하고 글도 쓰면서요.
요즘 눈에 띄게 그림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느는 것 같아요. 체감하시나요?
종종 느껴요. 지역 도서관이나 동네책방 등 그림책 수업을 하는 곳이 많이 늘고 있고요. 저도 최근까지 파주 땅콩문고에서 그림책 수업을 했는데요. 수강생들을 보면 처음엔 열심히 그리다가 나중엔 재밌는 그림을 그려요. 재료를 여러 가지 드리면 많이 흥미로워 해요. 식물 그리기도 하고, 동물 그리기도 하고 소재를 다양하게 그려요. 사물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면 훨씬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예전에 드로잉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초코파이부터 그리니까 영 재미가 없더라고요.
(웃음) 저는 연필로 스케치를 하지 않고 바로 그리도록 하는데요. 그림책 수업을 들을 정도면 기본적으로 그림에 흥미가 있는 분들이잖아요? 초보적인 단계부터 시작하면 흥미를 오래 못 갖더라고요.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는 무엇인가요?
풍경 그리는 거 좋아하고요. 아내의 말로는 동물과 풍경을 잘 그린대요.
동료 작가들의 전시 기획은 어떤 계기로 하게 되셨나요?
파주에서 매해 어린이 책잔치를 하는데요. 전시회를 열었다가 얼결에 기획도 하게 되었어요. 하나의 책으로 집을 만드는 전시인데요. 책으로 볼 때랑은 다르게 입체적으로 장면을 볼 수 있어서 아이들이 상당히 좋아해요.
『나오니까 좋다』 를 어떻게 읽으면 더 재밌을까요?
부모와 아이가 읽는다면 서로 역할 놀이를 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이 작품은 대화로 이뤄진 책이니까 딱딱하게 글을 읽기 보다는 연기를 하면서 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최근에 인상 깊게 본 그림책이 있나요?
릴리아 작가의 『파랑 오리』라는 작품을 읽었는데요. 전시를 같이 하면서 알게 된 책인데 참 좋더라고요. 릴리아 작가님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셨는데요. 한국으로 건너와 그림책을 만들고 동화책에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어요. 단순한 선으로 그린 작품인데 기억에 계속 남네요.
오랫동안 좋아하는 ‘인생 그림책’과 같은 작품이 있다면요?
『뛰어라 메뚜기』라는 그림책이 있어요. 일본 작가 다시마 세이조의 작품인데, 제가 그림 공부할 때 그림책 디렉팅을 하시는 분이 제게 “너는 이렇게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림이라면 되게 예쁘게 그려야 한다고만 관념이 있었는데, 이때 이후로 개념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그림책 수업할 때, 특히 강조하시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결국 이야기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은 정말 많거든요? 문제는 자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이죠. 프로 작가가 되려는 사람에게 “편하게 그리라”는 말만 할 순 없겠지만요. 마음가짐이 편해야 하는 건 맞아요. 그래야 좋은 그림이 나와요.
“( )까 좋다”의 빈칸을 채워보신다면요?
책 나오니까 좋다?! 정말 좋아요. 제 책이 나오니까요. (웃음)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우선 책을 계속 내고 싶고요. 우리 그림책 작가들을 소개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림책협회 차원에서 준비하는 일들도 많은데요.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만나야 저변이 넓어질 것 같아요. 우리 작가들이 전국의 지역 도서관을 많이 다니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 마니아들도 많아졌어요. 모든 작가가 그렇지만 누군가가 읽고 봐줘야 힘이 나잖아요?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고 싶어요.
『나오니까 좋다』를 읽은, 앞으로 읽을 독자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큰 스토리, 교훈이 있는 책은 아니기 때문에 즐기면서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림책을 보면서 우리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거운 책도 읽어야겠지만 가벼운 책들이 주는 감흥이라는 게 분명히 있거든요?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데, 떠나지 못할 때 보셔도 좋을 것 같고요. 그림책은 어린이 책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즐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나오니까 좋다김중석 글그림 | 사계절
우리 일상도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일 없어도, 아주 가끔 예쁜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를 말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