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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당신의 환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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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과 ‘바다’ ‘침몰’ 이후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모두 부끄러웠다. 피해를 막지 못해 좌절했고, ‘착하고 애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들이대는 게 참담했고, 약자에게 손을 내밀고는 이 행동이 위선이 아니었는지 혼란스러웠다. 소설가 이기호도 마찬가지였다. ‘유머리스트’ ‘재담꾼’이라는 그의 수식어는 이번 단편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서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모욕을 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고(「최미진은 어디로」), 화를 내야 할 대상이 아닌 사람들에게 화를 내게 되는(「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자신을 볼 때마다 부끄러워 유머를 구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책에 묶인 7편의 단편 제목은 모두 등장인물의 이름이 들어간다. 너무나 평범하고 고유한 인물의 이름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과연 우리는 권순찬에게, 한정희에게, 이웃과 타인에게 완벽한 환대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걸까? 독자를 내내 불편하게 하는 질문은 여전히 소설가 이기호를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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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향한 친절함

 

제목만 봐도 ‘이기호표 소설’이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표제작은 어떻게 정했나요?

 

교정지를 받기 전부터 내심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를 표제작으로 내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편집부에서도 흔쾌히 제 의견을 받아주셨고요. 다른 단편 제목이 워낙 ‘후져서’이기도 했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라는 제목에 제가 이 소설집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좀더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고 있는 ‘강민호’ 포수를 염두에 둔 제목은 아닙니다. 저는 한화 이글스 팬입니다). 방점은 ‘교회 오빠 강민호’보다는 ‘누구에게나 친절한’에 찍혀 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서 전국의 수많은, 선량한 ‘교회 오빠’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서 강민호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요? 작가님의 머릿속에는 그 답이 있겠죠?


제가 소설에 대해서 세세하게 말씀드리면 독자분들께 누를 끼치는 일이 될 거예요.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강민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고, 또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맞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인 것 같지만, 그래서 조금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타인을 자신과 ‘동일화’시켜서 보는 사람의 전형이에요. 그 말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것 같지만, 실은 ‘자신’에게만 친절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친절한’ 사람들의 정서는 대부분 오래가지 않고 일시적으로 끝나고 말죠. ‘강민호’는 ‘윤희’를 볼 때도 자신을 보는 남자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남자죠.

 

이전에 등장인물 이름을 지을 때 옥편과 뜻풀이를 보면서 짓는 편이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책에서는 단편의 모든 제목에 등장인물의 이름이 들어가는데요, 어떻게 나온 이름들인가요?


그동안 제 소설에 나왔던 등장인물 이름이 ‘시봉이’ ‘순덕이’ ‘진만이’ ‘복만이’처럼 좀 촌스럽잖아요? 촌스럽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나름 그 이름들을 옥편 찾아가면서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면서 지었는데, 아무래도 좀 튀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 인물들이 놓인 상황도 특수하고 예외적인 환경이었구요. 너무 특수한 인물이 특수한 상황을 만나 벌어지는 일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이 겪는 사건 또한 일반적이진 않지만, 등장인물만큼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이웃들의 모습이기를 바랐습니다. 특별한 인물이어서 특별한 선택을 하는 게 아니고, 누구나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누구 하나 예외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 마음이 좀 컸습니다.

 

G시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는 이선생(「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안 팔리는 작가(「최미진은 어디로」), 마지막 ‘이기호의 말’ 등 여전히 자기 조각과 이름 일부를 가져다 쓰기를 즐겨 합니다.


소설은 명백히 허구의 산물이지만, 전적으로 그것만 작동하는 세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쓰는 사람의 조각이 틈틈이 새겨져 있죠. 그걸 숨바꼭질하듯 꽁꽁 숨겨두고 감추고 하는 일이 어느 순간 지겨워졌습니다. 작가인 ‘이기호’를 숨겨둔 채 인물들을 다루다 보면 어쩐지 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글을 쓰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고요. 소설 속에 나오는 ‘이기호’는 실제의 이기호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고유명사의 차원에선 ‘최미진’이나 ‘김숙희’나 ‘강민호’와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살아 있는 ‘이기호’를 통해서 소설 속 그들이 좀더 생생한 느낌으로, 허구 속 인물이 아닌 사람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길 바랐습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태도

 

책을 읽고 나면 ‘윤리’와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떠오릅니다. 오랫동안 천착한 주제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언제부터 이러한 주제를 고민하게 되었나요?


아마 저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작가가 공통으로 고민하고 있는 주제일 겁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기본적으로 집단보다는 개인을, 도덕보다는 윤리를 더 깊이 있게 고민해보고자 탄생한 예술이니까요. 문제는 그래서 지금 모두 ‘윤리’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윤리’가 우세종이 되었고, 어떤 집단의 가치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되풀이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거 같습니다. 예술은 반복하고 되풀이하면 그냥 기술이 되고 말죠. 제 문제도 아마 거기 있는 거 같습니다. 또다른 이야기나 낯선 목소리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 손쉬운 방향으로만 가는 것 같아서, 그게 좀 고민입니다. 제 소설 속 인물들이 나름 윤리적이면서도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에 빠지는 이유도, 그 ‘윤리’가 교육받고 어느 정도 ‘뻔한’ 상태에서만 진행된다는 거, 거기에서 오는 부끄러움인 거 같습니다. ‘뻔한’ 게 제일 싫은데, 제 모습에서도 자꾸 그걸 느끼게 됩니다.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은 용산 참사 이후 그 자리에 오지 않았던 크레인 기사를 만나는 소설가의 이야기입니다. 상대적으로 얼마 지나지 않은 사건이기도 하고, 사건에 연루된 실제 사람들에게 영향이 갈 수도 있다는 부담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부담은 있었지만, 무언가를 꼭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참사와 그로 인해 고통 받은 사람들이 뻔히,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침묵하는가? 그런 고통을 볼 때마다 왜 내 소시민적 욕망은 더 강화되는가? 그런 마음들에 대해서 정직하게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정면으로 다루거나 부딪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요. 개인적으론 저 자신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소설이기도 합니다.

 

<월간 채널예스> 2017년 5월호 인터뷰에서 “지금 시대에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게 좋은 삶이 아니”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http://ch.yes24.com/Article/View/30682)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사는 삶을 경계하는 태도가 이번 소설집에서도 드러난 것 같은데, 어떤가요?


맞습니다. 계속 그 지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는 얼핏 보면 쿨한 거 같지만, 타인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타인을 보더라도 타인에게 덧씌워진 자신의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보기도 하지요. 그게 다른 사람들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저 또한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작가로 살다 보면 자칫 그런 태도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작가란 아무래도 혼자 골방에 앉아 자기 자신과 싸우고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요. 타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가 더 많았던 거 같아요. 그 태도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에서 주인공은 김석만씨를 만나고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합니다. 현실에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 사실을 쉽게 알아차리지는 못하겠죠. 그 소설 역시 처음엔 김석만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고, 그냥 권순찬만 소리 없이 떠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자니 소설이 계속 막히더라고요. 후에 소설을 완전히 뒤집어 김석만씨를 등장시키는 것으로 정하고 나니까, 그제야 소설이 조금씩 조금씩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소설의 경우고, 우리들의 실제 삶은 애꿎은 사람들이 애꿎은 사람들과 계속 갈등하고 화내고 미워하는 일들의 연속이지요.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속 ‘착한 사람들’ 역시 처음부터 권순찬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친절했죠. ‘권순찬’이 애꿎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 알았습니다. 하지만 한순간 호의가 적의로 바뀌고 맙니다. 자신들의 호의가 자신들의 생각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우리들의 ‘화’는 대부분 그때 발생하는 거 같습니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일들이 발생했을 때, 그때 우리는 애꿎은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죠. ‘차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그 고민은, 조금 추상적일지 몰라도, 상상만으론 가능하지 않지요. 무언가 ‘노력’이 필요한 지점인 거 같습니다.

 

김형중 평론가의 해설처럼 “환대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불철저한 환대에 대해 부끄러워”합니다. 소설가에게 최선의 환대란 최선의 소설을 펼쳐 보이는 것일까요? 이기호 소설가의 환대는 어떤 의미인가요?


소설가의 환대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 막 들었습니다. 저는 소설가의 환대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의 그것이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환대의 어려움이나 불가능성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는 정도이지요. 하지만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니, 소설가로서의 환대 역시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속적으로 예외적인 인물을, 예외적인 상황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 어쩌면 그게 소설가로서의 최선의 환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중략)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라는 마지막 말을 작가의 말로 대신 읽어도 될까요? 그럼에도 소설과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부터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 인식은 어쩌면 강한 긍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나 불가능하다는 걸 빤히 알지만, 그래도 한번 가보는 거. 그게 제가 많은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배운 유일한 ‘윤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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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을 위해서 쓰진 않습니다

 

등단한 지 20년 차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감회가 궁금합니다.


어후, 감회랄 게 없습니다. 뭐가 좀 늘고 여유 같은 게 생기고, 성숙해져야 감회 같은 것도 생길 텐데, 계속 허우적거리고 당황하고 실수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소설 쓸 때만 그러면 그래도 좀 나을 텐데, 실생활에서도 그냥 똑같습니다. 30년 차에는 좀 나은 모습이 되어 있길 바라지만, 아마 안 될 겁니다.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암울하니까, 그냥 숫자 같은 거 세지 않으면서, 20년 차, 30년 차, 이런 거 의식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좀 괜찮습니다.

 

항상 작품에 유머와 블랙코미디 등의 단어가 수식어로 따라다닙니다. 계속해서 ‘웃긴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 호명되는 것에 불만은 없나요?


불만 없습니다. 제가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죠. 저는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진 거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독자들에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독자 중에는 제 전작을 따라 읽어준 분들도 꽤 많이 계신데, 그분들은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제 소설을 따라 읽진 않더라고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받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위해서 쓰진 않습니다. 제가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그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불만이 있다면 저나, 제가 쓰는 소설에 있지, 다른 거에 있진 않습니다.

 

작가 이기호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 이기호 사이에 차이점이 있을까요?


차이가 좀 크죠. 아무래도 선생 이기호가 문제입니다. 요즘 선생이라는 직업은 가르치고 연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거든요. 숙련된 행정가의 역할까지 해야 합니다. 그 점에선 거의 빵점에 가까운 선생이에요. 재능이 없는 일을 열심히 하면 학생과 학교까지 망치게 될 거 같아서 스스로 자제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재능 없는 선생의 삶을 살고, 밤에는 허우적거리는 작가로 살다 보니, 그 간극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선택을 하진 않죠. 작가가 선생보다 나을 것도 없고, 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소설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으로서의 삶도 그저 노력하고 고민하고 깨지고, 그러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어떤 세계를 그리게 될지 궁금합니다.


경장편 한 권이 곧 나올 거 같습니다. 다 썼는데, 또 한번 뒤집어서 다시 쓰는 바람에, 지금 생고생하고 있습니다. 소설 내용도 ‘생고생’하는 이야기라서…… 그냥 거기까지만 말하고 나머지는 영업비밀로 남겨두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이기호 저 | 문학동네
웃음기를 조금 거두고, 이 세계에서 유머를 잃지 않고 살아가기란 왜 어려워져버린 것인지 특유의 속도감 있고 재기 넘치는 문장으로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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