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은 장애아가 태어났을 때, 삶 자체로 손해가 발생했으니 장애를 진단하지 못한 의사에게 손해를 배상하라고 청구하는 민사소송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는 분명 막대한 의료비와 돌봄 노동이 필요하고, 비장애 아이의 육아와 비교한다면 장애를 가진 삶은 손해에 가깝다. 소송의 이유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과연 태어난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손해일 수 있을까? 1급 지체장애인인 변호사 김원영은 한 손에 책이나 커피를 들고 익숙하고 우아하게 휠체어로 이동하는 ‘노련한’ 장애인이지만 늘 이 질문에 맞닥뜨렸다. 의무로 배운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문장 속에서는 잘못된 삶이란 있을 수 없지만, 어떤 삶이든 ‘잘된 삶’과 ‘잘못된 삶’을 구분하는 사회 속에서 당위는 쉽게 효력을 잃는다. 글래머러스하고 마른 몸매, 건강하고 탄력 있는 몸매를 ‘착하다’고 표현하는 세상에서 장애인의 몸은 쉽게 ‘나쁜’ 몸이 된다. 자국에서 전쟁이 나 피난 온 난민, 성정체성을 숨기는 성소수자, 추한 외모를 가진 이와 가난한 이의 삶 또한 쉽게 잘못된 삶의 경계 안에 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은 책 한 권을 오롯이 바쳐 초상화를 그리듯 이들의 고유한 이야기를 그리며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엄하고 매력적이라는 변론을 펼친다. 당위만으로는 그 사람의 매력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이들이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을 가질 때 소수자들 스스로 실격한 존재라는 낙인에 맞서 자신을 변론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313쪽
입체성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노명우 사회학자가 ‘삶으로 쓴 텍스트’라는 추천사를 써 주셨어요. 전작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에서도 ‘온몸으로 쓴 사회과학 에세이’라는 소개가 붙어 있었죠.
그렇게 평가해 주셔서 좋긴 하지만, 저자로서는 윤리성이 중요해지니 또 부담돼요. 책에서 이야기했던 삶의 태도를 온전히 제가 구현했거나 구현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거든요.
한 발 떨어져 보려고 한 게 보였어요. 가상의 커플 이야기를 빌려 경험을 각색하기도 하고요.
이번 책은 제 경험 외에도 일부러 조금 더 다른 사례를 많이 가져왔어요. 개인의 고백이 중심이 되지 않고 이론이나 입장을 연구자로서 정리하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어요. 가까운 지인이나 제 경험을 넣어서 캐릭터 설정을 한 이유도, 개인의 서사에만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서울대 출신 장애인 변호사임을 내세워 그럭저럭 인생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이라면 아마도 좀 더 ‘팔리기를’ 기대할 수 있었을”(316쪽) 것이라고 하셨어요.
자기 서사를 더 솔직하고 문학적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저보다 많이 있을 거예요. 제 위치에서 가장 유의미한 책을 쓰고 싶었어요. 한국 사회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교육받기가 힘들어요. 저는 여러 가지 의미로 고등 교육을 받았고 아카데믹한 언어에 접속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글쓰기라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어떤 삶의 길을 가든, ‘잘못된 삶’에 대해 한 번은 제대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12쪽)고 하셨는데,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제 장애인 친구 혹은 저 자신의 입체성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경험이 단순히 부정적이기만 하거나 단순히 낭만적이지 않고 입체적인데, 그 경험 자체가 인간의 중요한 부분인데 누구도 경험을 적절하게 드러내지 못한다고 느꼈어요.
책을 읽으며 ‘잘못됐다’고 표현되는 삶은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종류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죠. 인간이 가진 고유하고 입체적인 면모가 장애나 특정한 표지를 갖는 순간 장애인이라고만 보아죠.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규범적 명제로는 그 상황이 드러나지 않아요. 규범으로만 정체성의 가치를 낭만화하는데, 실재에 가까운 게 드러나지 않아서 그걸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들어요. 그래야 하니까 그래야 한다는 규범에 기대지 않고 보이고 싶었어요. 변론이라고 제목을 붙여서 논증적 글쓰기의 외형을 띄고 있지만, 책에서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가진 입체적인 면모를 묘사하고 싶었던 거죠.
장애는 어떤 면에서는 문화일 수 있다
품격과 존엄을 대비해서 설명한 부분이 있어요. 존엄이 지위나 역할, 신분과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권리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신분과 지위에 맞게 행동해야 ‘존엄’을 가지게 된다고 여겼다고요.
품격이 꼭 나쁘다고 전제한 건 아니에요. 지위와 환경에 부합한 행동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죠. 제가 비판적으로 본 건 품격주의인데, 자신의 품격을 유지하려고 타인을 오로지 수단으로 삼는다거나, 자신의 품격을 연출하는 데 몰입하는 게 품격주의죠. 과거에는 존엄이 명예의 개념이었는데 점점 분리되면서 품격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을 대조시키고 싶었어요.
누구든 품격을 내면화하려는 태도가 있는 것 같아요. 시위할 때도 준법시민으로서 품격을 지켜야지만 주장하는 말이 가닿을 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검열하잖아요.
품격은 결국 질서와 규범에 부합하기 때문에 항상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행위와 떨어질 수 없어요. 항상 요구받는 규범대로 행동하지 않는지 검토하는 거죠. 다른 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편한 방식으로 움직이면 주류적인 규범과 다르게 움직이게 되고, 그게 추하게 보일까 봐 항상 경계하고 사회적으로 손가락질받을까 걱정해요. 그게 품격주의적 시선의 내면화라고 볼 수 있어요. 반면 존엄은 서로 존중하는 과정에서 순간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규범과 내가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어떤 장애인이 곤경에 처해서 이상하게 행동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저도 비슷하게 행동해서 그 사람이 혼자 창피하지 않게 할 수도 있잖아요. 다수자의 시선에서 보면 그건 품격 있는 행동이 아니죠. 하지만 저는 그 순간 이 사람을 충분히 존중하는 행위를 한 거고, 존중하는 행위와 품격에 부합하는 행위는 굉장히 달라져요.
제목의 실격이라는 단어가 장애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항상 장애 경험에는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소수적 경험이 집약된 상태거든요. 아쉽지만 사람들이 실격이라는 단어에서 특수한 집단의 어려움에 대한 내용이라고 접근하는 것 같아요. 실격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보편적인 경험이거든요. 모두가 일부분은 겪을 경험인데, 노인도 자신의 경험을 장애인과 구분하려고 하고, 자신의 경험을 다른 집단과 분리하려고 하죠.
정체성 정치의 함정도 언급하셨어요. 특정 정체성을 가진 집단만이 자신의 존엄과 아름다움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서는 걸 우려한다고요.
정체성 정치를 어떤 시점까지는 긍정해요. 우리가 우리의 속성을 자각하고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데 있어서 정체성 정치는 필요하고,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에요. 하지만 어떤 시점에 가서는 보편적인 인간적 경험과 윤리로 확장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는 특정한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될 수도 있어요.
정체성만을 맹목적으로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여러 사례를 들어주셨어요.
아주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을 때 그 부모를 비난할 수도 있고, 그 정체성을 가진 아이를 낙태하는 것이 곧 나에 대한 부정이라고 연결할 수도 있고요. 어떤 청각 장애인이 인공 와우 수술하는 걸 비난하거나,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퀴어에게 퀴어함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어요. 각자 개인이 자기 속성을 가지고 인생을 비판적으로 써 내려가는 작업을 다 무시하고 그 속성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그건 정치의 종말인 거죠. 하지만 정체성 정치를 우려하는 건 어느 정도 고민한 사람들의 이야기고, 적어도 장애 문제를 잘 모르고 경험이 적은 사람들이라면 장애라는 부정적 경험이 항상 없애거나 제거하고 싶은 게 아니고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경험일 수도 있다는 걸 먼저 공유해주셨으면 해요. 그걸 공유한 바탕 위에서 정체성 정치의 폐해를 이야기할 수 있겠죠.
말씀하셨듯 독자마다 공유하는 인식이 서로 달라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 같아요. 장애에 대한 인식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장애를 감춰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면, 정체성 정치를 이야기하는 게 와닿을 수 있을지 고민이 되고요.
책을 쓰면서 상정했던 독자는 두 집단이었어요. 하나는 장애 당사자이거나 적어도 장애 문제에 상당한 관심이 있어서 장애를 정체성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분들에게는 정체성을 수용하더라도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고요. 장애가 부정적이라는 또 하나의 집단에게는 장애가 어떤 면에서는 문화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오래 볼 가능성
책의 핵심 중 하나는 ‘매력차별 금지법’은 가능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기회 평등법’은 가능하다고 변론하는 부분이었어요.
아름다움과 매력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장애인이 기회를 얻어서 시설을 나오더라도 대부분 외롭거든요. 본인이 신체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이 사람의 캐릭터가 다른 사람에게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고, 대부분 비공식적인 인간 네트워크에서 소외되어 있어요. 어느 정도는 엄연히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맞아요.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거죠. 외모의 매력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초상화처럼 오랫동안 이 사람을 바라볼 때 외적 매력이 그 사람의 여러 요소와 통합될 수 있을 거예요. 스냅 사진처럼 단편만 본다면 왜 존엄하고 왜 가치 있는지 대답할 수 없어요. 적어도 오래 볼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이 존엄하고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그려나갈 수 있어요.
오랜 시간 보이려면 여러모로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할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의 장애의 모습이 거리에 많이 나와야 하고요.
그 내용의 핵심을 『커버링』에서 가져오기도 했어요. 어떤 개인이 자기의 고유성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세상에 나와야 우리가 그 사람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주류 세계에 나오기 위해 그 사람이 고유성을 항상 숨기거나 혹은 소거하길 요구받는다면 그 사람은 고유한 속성과 조건을 유지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회는 그걸 너무 쉽게 요구하잖아요. 모두가 자기 고유함을 100% 유지하고 등장할 수 없다면 어떻게 법적이고 규범적인 제도로 이 사람이 고유한 속성을 최대한 드러내도록 도울 것이냐, 굉장히 어렵지만 그래도 하나 가져올 수 있다면 논증의 부담과 입증 책임을 전환하는 거죠.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요.
소수자가 자기 속성을 감추거나 버려야지만 어떤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다수자가 상당히 높은 근거로 정당화해야 해요. 대부분 다수자가 장애인에게 극복하거나 입증할 것을 요구하잖아요. 그걸 바꿔보자는 거죠. 입증 책임이 제도화된 게 장애차별금지법의 ‘정당한 편의 제공’이라는 규정이에요. 자기의 조건 자체로 사회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다수자에게 있고, 그 의무를 제공하는 것이 안 된다면 안 되는 사정을 다수자가 입증해야 하죠. 실질적으로 입법화되면서 그래도 일부 현실에서 적용되고, 실제 장애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잘못된 삶’ 소송의 법리 판결은 어떻게 났나요?
부모가 제기한 ‘잘못된 출생(wrongful birth)’의 위자료는 인정했어요. 법원도 아이 자체가 손해라고 판결할 수 없으니 미처 장애아의 출산을 대비하지 못한 정신적인 충격에 한해 보상하라고 한 거죠. 양육비는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걸 인정하면 출생 자체가 손해가 되는 거니까요. 아이의 이름으로 제기한 ‘잘못된 삶’ 소송은 대체로 다 인정하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법에서는 평등을 보장하고 존엄을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편의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법률적 한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거칠게 추상적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법이 상정하는 법령의 주체는 일정한 나이대의 의사결정력이 있는, 대체로 남성인 표준화된 인간으로 상정되어 있어요. 그런 표준화된 인간을 제약하거나 방해하는 건 곧바로 헌법상으로 침해가 되는 데 표준이 아닌 사람은 국가가 열심히 ‘배려’해야 할 의무 정도로만 다루죠. 지금은 표준을 상정하고 거기에 예외를 붙이는 식으로 법을 만드는데, 앞으로 법이 상정하는 인간 자체가 훨씬 다양해질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코스모폴리탄을 희망한다
장애운동에서 선구자들이 활약하면서 이동권을 쟁취해나가는 과정이 있었어요. 법이 바뀌려면 자기 품격이 상하더라도 운동을 해야 하는 맥락이 있는데, 지금 지하철 점거 운동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아마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엘리트라고 부를 수 있는 소수자라면 다 가지는 부채감일 거예요. 워낙 지난 10여 년간의 현장 투쟁이 힘들었잖아요. 대학 다닐 때 저는 사실 참여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집회와 시위는 탈규범적 공간을 만드는 거잖아요. 어쩔 수 없이 주저하게 돼요. 최근에 한 번씩 투쟁 현장에 가보려고 노력하고, 뭔가 제 위치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나름의 것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쓰기도 하지만 부채감이 많이 남아요.
경찰들 입장에서는 시위에 나온 사람들은 변호사이든 뭐든 상관없이 휠체어를 탄 시위자라고만 받아들일 거예요. 그런 면에서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요.
예전에 경찰과 과격하게 대응할 때는 물리적인 두려움이 컸어요. 뼈에 장애가 있다 보니 골절 위험이 항상 있었고요.
어렸을 때 작가님이 불편해할까 봐 물놀이를 가지 않고 눌러앉은 친구와의 일화가 인상 깊었어요. 자신을 정체화하는 데 주변 분들의 영향도 많았을 것 같고요.
그 사례가 굉장히 강렬해서 여러 번 언급했었어요. 워낙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거든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나 민감한 면이 있어요. 상대방은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닐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저를 모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감각을 항상 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저를 존중하는 행동도 잘 보이고요. 그래서 때로는 오해도 하겠죠. 누군가는 아무 의도 없었는데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고요.
‘코스모폴리탄을 희망한다’고 자기소개를 쓰시더라고요. 무슨 뜻일까요?
지리를 좋아해요. 새로운 공간을 점유하는 느낌이 좋아서 여행을 가면 아무도 안 가는 북쪽 끝까지 가보기도 하고요.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에서 제가 가진 관심사와 경험이 소수에 국한되어 있고, 책을 써도 이 책의 내용을 깊이 공감하고 읽을 독자가 많지 않을 거예요. 멀리 봐서 다양한 문화권과 공간에서도 저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일을 도모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물론 생업 때문에 못 하고 있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아직은 대학원에 소속되어 있고요, 법무법인에 들어가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변호사 업무를 하고 있진 않아요. 법정에서 싸우기보다는 이 책처럼 근본적인 변론을 더 선호해요.
앞으로 관심을 가지는 주제가 있나요?
학술적으로는 정신적 장애인의 자기 결정과 자율성에 관심이 있어요. 이런 분들의 자율성은 개인의 정신 능력보다는 다른 상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자율성을 가져갈 것인지 깊이 있게 써보고 싶어요. 개인적인 욕심은 책에 나온 현오와 선우 같은 인물들을 소설이나 희곡 같은 픽션으로 확장해서 표현해 보고 싶어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저 | 사계절
어떤 특징과 경험과 선호와 고통을 가진 사람인지를 드러낼 무대가 주어진다면, 소수자들 스스로가 ‘인간 실격’이라는 낙인에 맞서 자신을 변론할 수 있으리란 전망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