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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드러머 최보미, 앨범을 녹음하며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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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드러머 최보미의 첫 앨범 <보미즈 호미즈 Bomi's Homies>가 처음 나왔을 때 몇몇 사람들은 앨범에 화려한 멤버들 때문에 깜짝 놀랐다. '도대체 최보미가 누구야?' 그런데 얼마 전 발표된 그녀의 두 번째 앨범 <B와 함께 점핑을 Jumpin' with B>은 첫 앨범의 화려함이 단지 일회적인 우연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부드러운 스윙과 함께 탄탄한 작곡 실력과 편곡 능력을 갖춘 드러머. 일류 재즈 연주자들과 녹음한 그녀의 앨범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직접 듣기 위해 비가 쏟아지는 어느 오후, 재즈 드러머 최보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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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음악을 시작했나?


중학교 2학년 때 교회 학생부에 참가했다가 그곳에서 음악 하는 언니, 오빠들을 알게 되었다. 나도 그 음악이 너무나 하고 싶어 부모님을 마구 졸랐다. 음악 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왜 하필이면 드럼이었나?


그때 이미 록밴드를 하고 있는 교회 오빠가 있었다. 너무나 멋있게 보였다. (웃음) 그래서 나도 드럼을 연주해서 록밴드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분당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그곳에서 제일 연주 잘 하는 록밴드가 서현 고등학교 록밴드였다. 서현 고등학교는 공부를 꽤 잘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록밴드가 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원하는 학교에 입학도 하고 록밴드에 들어가는 꿈도 이루었다.

 

도중에 다른 악기로 바꾸거나 보컬리스트가 되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원래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드럼에 관심을 가진 이후로는 다른 악기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록밴드를 좋아했나?


건즈 앤 로지즈, 콘 같은 밴드의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어떻게 재즈로 방향이 흘렀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T-스퀘어, 카시오페아와 같은 일본 퓨전 밴드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타워 오브 파워 음악을 들었는데 그게 너무나도 좋았다. <소울 백신 Soul Vaccination>이란 제목의 라이브 앨범이었다. 너무 좋아서 잠도 오지 않았다. 내가 평생에 할 음악은 이런 음악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타워 오브 파워는 굳이 이야기하자면, 소울, 펑크(funk) 밴드가 아닌가?


타워 오브 파워를 계기로 허비 행콕의 <헤드 헌터스 Head Hunters>를 듣게 됐고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음악이 재즈인지 뭔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음악이 좋았을 뿐이다. 그때도 여전히 고등학생 때였다.

 

그럼 지금과 같은 재즈 취향은 대학에 진학해서 형성 된 것인가?


그때도 아니었다.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재즈를 배우기는 했지만 공부한다는 기분이었지 이 음악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음악 전반이 다 좋았다. 지금도 록, 펑크 모두 다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최보미가 발표한 음반은 모두 스트레이트-어헤드 (Straight-Ahead) 스타일의 재즈다.


그런 음악을 진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석사과정으로 유학 가고 나서였다. 내가 03학번인데 졸업하자마자 07년도에 유학을 떠났다. 뉴욕대학(NYU)에서 공부한 뒤 다시 뉴욕 주립 대학인 퍼치스로 진학했다. 그런데 맨 첫해에는 정말 두려웠다. 언어 문제도 있었고 막상 유학을 와보니 이건 재즈라는 음악에 완전 올인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공부하는 것이 두려웠다는 뜻인가?


그런 점도 있었지만 재즈라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해보니 이건 너무 살벌했다. 그것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경쟁도 너무 치열하고 연주 잘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전 세계에서 재즈 잘 하는 사람들이 이 좁은 뉴욕으로 몰린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느 장소에서 긱(gig)을 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과연 그 길을 갈 것인가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방황하다가 어느 순간이 결심이 서더라. 재즈에 몸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그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매일 잼세션에 참가하고 사람들 만나서 레슨 받고 마구 부딪히며 살았다.

 

조금 전에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언어의 장벽도 큰 어려움이라고 했는데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나?


NYU 다니면서 에이미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 친구와 집을 함께 구해서 같이 살았다. 함께 살면서 영어가 부쩍 늘었다.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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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연주자가 되겠다고 결심이 선 이후로는 순조롭게 일이 풀렸나?

 

결코 아니다. 여전히 무섭고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유학 가서 고생 안 한 사람 없겠지만 나보고 고생한 이야기 쓰라고 하면 책 한 권은 나올 것 같다. 우선 재즈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밤늦게 하는 잼세션에 참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집에서 자정 혹은 새벽 한 시에 나서야 됐다. 밤늦게 동양에서 온 작은 여자 아이가 밤길을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잼 세션이 벌어지는 장소에 가서 구경하다가 “나도 한 곡 연주해도 되겠니?”라고 넉살 좋게 끼어들어야 하는데 그 말이 좀처럼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스몰즈' '팻캣' '클레오파트라즈 니들'과 같은 일급 재즈 뮤지션들이 모이는 재즈 클럽이었다. 재즈란 음악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한계가 있는 음악이다. 현장에 나가서 뮤지션들과 부딪히면서 배워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더라. 동양에서 온 스물 네 살 된 여성이 재즈를 하겠다고 하면 그곳 남자들은 대놓고 무시했다. 어떻게 부탁해서 한 곡을 연주하다 보면 그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드러머가 스틱으로 심벌즈를 치면서 무대 위로 올라온다. 이제 그만 비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NYU 졸업하고 또 퍼치스로 진학하지 않았나?


2009년도에 NYU를 졸업했는데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퍼치스에 다시 입학했다. 그곳에서 명 드러머인 케니 워싱턴(Kenny Washington)을 만났다. 굉장히 엄격하게 가르치시는 분이었다. 하지만 드럼 테크닉뿐만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시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레슨 때 그는 계속해서 음반을 찾으면서 이 곡, 저 곡 계속 들려주셨다. 그러면서 “이 곡에서 드러머가 누구인 것 같아? 한 번 맞춰봐.” “이 부분에서 드럼은 어떻게 치는 것 같아?” 등등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음악 듣는 법, 음악에 대한 관점을 만드는데 초점을 맞췄다.

 

오늘날 최보미의 음악은 그때 형성된 것인가?


(조금 생각하다가)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뉴욕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나의 첫 앨범을 그곳에서 녹음한 적이 있다. 물론 발매는 하지 않아서 비공식 앨범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때 음악을 들어보면 2000년대 초반 당시의 뉴욕의 포스트-밥 사운드를 따라 하느라고 무척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무척 겉멋이 들었던 것 같다. (웃음) 당시에는 그런 음악을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케니 워싱턴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내 나름대로의 음악에 대한 관점이 생겼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으니 그 무렵 나의 음악이 만들어 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최보미의 음악은 비밥인 것인가?


내 음악에 어떤 명칭을 붙이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다고 본다. 비밥, 하드밥, 포스트밥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또한 나는 지금도 록, 펑크, R&B 모두를 좋아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추구하는 음악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며, 나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음악이란 점은 분명하다.

 

이런 음악이 왜 좋았나? 듣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웃음) 그렇다. 연습은 엄청 많이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록 드럼은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면 되는데 재즈 드럼은 음악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계속 끌고 가야 하니까 그것이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런데 어려운 만큼 그것을 이뤄냈을 때 재즈 드럼은 그 어떤 연주보다도 내게 성취감을 줬다. 그리고 어느덧 이 음악이 나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음악이 되었다.

 

재즈 드러머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나?


물론 선생님이시니 케니 워싱턴을 빼놓을 수 없고, 로이 헤인즈(Roy Haynes), '필리' 조('Philly' Joe Jones),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 지미 코브(Jimmy Cobb), 루이 헤이즈(Louis Hayes)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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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미국에 갔다가 언제 한국에 돌아왔나?


2014년에 공부를 다 마치고 돌아왔다.

 

데뷔 앨범 <보미즈 호미즈>는 언제 녹음했나?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곳에서 녹음해서 돌아온 2014년도에 국내에서 발매했다.

 

당시 이 앨범의 멤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보미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일급 음악인들과 앨범을 녹음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멤버들을 모았나?


앨범에서 알토 색소폰을 연주한 빈센트 헤링(Vincent Herring)의 도움이 컸다. 그 당시에 나는 브루클린에 살고 있었는데 역시 브루클린에 살고 있던 빈센트는 그곳의 지역 뮤지션들을 낮에 그의 집으로 초대해서 잼세션을 열면서 신인 뮤지션들을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도 그 잼세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빈센트를 알게 되었다.

 

공부를 마칠 무렵 앨범을 녹음해야겠다고 생각했나?


아니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거라고 하니 빈센트가 먼저 제안을 했다. 여기 와서 고생했는데 뭔가 성과를 남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앨범을 녹음하기로 했다. 빈센트가 많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브루클린 뮤지션이어서 평소에도 잘 알고 지내던 베이스 주자 데이비드 웡(David Wong)과 빈센트가 일단 내가 짠 멤버였다. 나머지 트럼펫 주자와 피아니스트가 필요했는데 빈센트가 누구와 제일 녹음하고 싶은지 내게 물었다. 그때 써 놓은 곡이 하나 있었는데 난 머릿속에 톰 해럴(Tom Harrell)이 그 곡을 불면 정말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빈센트가 해럴에게 녹음을 제안하자 그의 매니저였던 일본인 부인이 너무 높은 금액을 제시해서 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빈센트가 섭외한 뮤지션이 트럼펫 주자 월러스 로니(Wallace Roney)와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키코스키(David Kikoski)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내 연주자의 리더 앨범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정도의 올스타 멤버들이다. 녹음할 때 긴장하지 않았나?


왜 안 하겠는가. 너무 긴장해서 녹음 끝나고서 어떻게 녹음이 진행됐는지 기억도 안 나더라.

 

레코딩 세션비로 얼마를 주면 그 정도 멤버들과 녹음할 수 있나?


월러스와 키코스키에게는 1천불씩 주었다. 그것도 빈센트가 잘 이야기해 주어서 그 정도에 가능했다.

 

그래도 적은 돈은 아니다. 비용을 들인 만큼 성과는 만족했나?


내가 너무 부족했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리허설도 충분히 했다면 내 연주가 더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더니) 사실, 딱 하루 리허설 하고 그 다음 날 하루 만에 녹음을 마쳤는데 리허설 날 월러스가 세 시간이나 늦게 왔다. 다른 사람들이 세 시간씩이나 기다렸으니 리허설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녹음 당일에 만나보니 역시 그는 연습을 전혀 하지 않았더라. 엉뚱한 키로 곡을 불곤 했다. 다른 멤버들은 최선을 다해주었다.

 

역시 동양인 여성 밴드 리더를 무시했다고 본다.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못 알아듣게 한국말로. 웃으면서. (웃음)

 

앨범 대부분이 최보미의 오리지널 곡이고 스탠더드 넘버 편곡도 매우 신선했다. 드러머가 작/ 편곡을 하는 경우는 다른 악기 주자들과는 달리 편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원래 작곡-편곡에 관심이 많다.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유학 와서도 계속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드러머가 드럼을 연주하면 곡의 진행을 이해하고 있으니 그 점이 자연스럽게 연주에 반영된다고 본다. 그래서 난 연주 할 때 피아니스트들의 컴핑(comping)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악기를 하던 밴드 리더는 작/ 편곡가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자신의 악기를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도 밴드 전체의 시각에서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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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앨범 <B와 함께 점핑을>에도 2016년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녹음되었더라.


그 해에 뉴욕의 한국 문화원에서 한국의 재즈 연주자들을 초청해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때 멤버로 참여 했는데 그 기회로 미국에 간 김에 녹음을 한 것이다.

 

이번 앨범에도 게리 스멀리언(Gary Smulyan), 사챌 바산다니(Sachal Vasandani) 등 유명 뮤지션들이 앨범에 참여 했다. 이번 멤버들은 어떻게 모았나?


먼저 피아니스트 제브 패턴(Jeb Patton)은 유학 시절에 내 피아노 스승이었다. 그는 데이비드 웡과 함께 지미 히스(Jimmy Heath) 빅밴드 멤버다. 사실 곡을 쓸 때는 트럼펫 주자를 생각하며 곡을 썼는데 현지에서 적당한 트럼펫 주자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케니 워싱턴에게 트럼펫 주자를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그가 추천해 준 사람은 뜻 밖에도 바리톤 색소폰 주자 게리 스멀리언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악기였지만 평소에 게리의 연주를 좋아했던 터라 함께 녹음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들어보니 역시 트럼펫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트럼펫 주자 윱 반 라인(Jeop Van Rhijin)에게 부탁해서 트럼펫 파트를 더빙으로 녹음했다.

 

첫 앨범에 비해 훨씬 안정감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허설을 많이 했나?


그러지는 못했다. 뉴욕에 머무는 시간에 제한이 있다 보니 리허설 시간을 잡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리허설 때는 데이비드 웡이 오질 못했다. 그런데 녹음 날 그냥 초견으로 연주를 너무 잘 해주더라. 첫 음반 녹음했던 경험이 있으니 두 번째 음반 녹음은 훨씬 심리적으로 편안했다.

 

「비처럼 음악처럼」도 실려 있던데 그 곡도 초견으로 연주했나?


그렇다. 편곡도 현장에서 그냥 이루어졌다.

 

「비처럼 음악처럼」을 넣을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었나?


내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실은 내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내가 연주한 곡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넣었다. 그래도 좀 친숙한 곡이 있으면 앨범 듣기가 편하지 않은가.

 

여러 곡이 있었지만 <무민 댄스 Moomin Dance>에서 밴드 전체의 스윙이 참 좋더라. 그런 포 비트 리듬을 좋아하는가?


재즈를 하면서 어떻게 그런 리듬을 안 좋아할 수 있는가! 그런 스윙을 느끼면 안락한 재즈의 품에 안기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위안을 받는다.

 

왜 미국에서, 미국 연주자들과만 녹음하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가?


미국에서 녹음한 이유는 그곳 스튜디오 임대비가 훨씬 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앨범 녹음한 브루클린의 스튜디오는 한 시간당 70달러였다. 아울러 미국 연주자들과 녹음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있는 음악이 어디에서든 공감을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두 번째 앨범을 이런 저런 사람들과 미국에서 녹음해 왔다고 하자 한 동료 뮤지션이 이렇게 말하더라. 앨범 이렇게 녹음해 와도 국내에 와서 국내 연주자들과 활동 할 건데 뭐 하러 그렇게 녹음 하냐고. 하지만 난 생각이 다르다. 난 나의 음악을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들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연주하는지가 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지금 길을 가고 있는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나보다 경험이 많고 평생 재즈를 연주한 사람들과 연주하면 역시 얻고 배우는 것이 많다. 늘 함께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앨범을 녹음하는 것은 그 배움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미국 연주자 하고만 녹음하는 것이 아니다. 피아니스트 곽정민, 베이시스트 고재규와 함께 '트리오 마인드폴리'를 결성해서 첫 앨범 <미팅 오브 마인드 Meeting of Minds>를 2016년에 발표했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우린 아주 유쾌하게 연주한다. 또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의 작품만을 연주하는 '점프 밍거스'란 국내 밴드에서도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7인조 밴드인데 앞으로 좋은 성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번 앨범 <B와 함께 점핑을>을 보면 녹음한 지 2년 동안 발매되지 않고 묵혀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나?


(잠시 생각하다가) 사실 2014년 새로운 앨범을 들고 한국에 돌아와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한국 재즈의 현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리 공 들여서 음반을 제작하고 활동해도 다음 앨범을 녹음할만한 돈조차 모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또 미국에 가서 두 번째 앨범을 녹음했는데 녹음이 완성되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가 내게 거짓말 하고 있다고 느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첫 앨범을 내고 반응이 좋아서 활발히 활동했고 그래서 또 2집 앨범을 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클럽에서 연주하고, 학교에 출강해서 돈을 모아 한곡씩 믹싱-마스터링을 진행했다. 한 곡이 끝나면 다음 곡을 하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앨범 전체가 다 끝날 때까지 많은 시간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이 앨범의 곡들을 누구와 연주하나?


앨범에도 참여한 윱이 트럼펫을 불고 바리톤 대신 테너 색소폰에 용석이 오빠(이용석), 피아노에 종현이 오빠(박종현), 베이스에 최성환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이 연주한다. 그룹 이름은 '보미즈 호미즈'이다. 이 멤버들과 자주 연주해서 다음에는 이들과 녹음하고 싶다.

 

그래서 고심 끝에 재즈 드러머가 되겠다는 결심은 이제 흔들리지 않는 건가?


현재 박사학위 논문 준비 중인데 그 지료를 모으기 위해 뉴저지 주 러트거스 대학 재즈 연구소 도서관을 이용했다. 하루 종일 그곳에서 자료를 찾으니 너무 좋더라. 그래서 요즘은 도서관 사서가 살짝 당기긴 하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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