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윤대녕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언제나 헤매는 상태로 독자들과 만났다. 존재의 시원을 찾아 헤매고, 정체성을 앗아가는 시류에 떠밀려 헤매는 그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늘 다음 작품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또 어떤 모습의 나와 마주하게 될까.
『대설주의보』이후 삼년 반 만에 다시 이어진 이야기는 삶의 고통 속에서 헤매는 우리에 대한 것이다. 고통 없는 삶이 없듯이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소설은 없다. 다만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사람마다, 소설마다 다를 뿐이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노래한 시인도 있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통이란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고 가능한 멀리 도망치고 싶은 어떤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달음질쳐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도자기 박물관』에는 바로 그 순간, 그 지점에 서 있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무엇일 것인가. 떨쳐낼 수 없는 고통을 꼬리처럼 매단 채 앞으로 내달릴 것인가, 아니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것을 마주볼 것인가. 윤대녕과 그의 인물들은 후자를 택했다. 잔인한 형벌과도 같아 보이는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 선택의 필요성에 대해 물었을 때, 소설가 윤대녕은 그것의 필연성을 이야기했다.
고통 받는다는 건 치열하게 삶을 앓고 있다는 거예요
“과거에 받았던 상처라든가 엉켜있던 매듭이 풀어지지 않으면 타인과 더 깊이, 구체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생명인 이상 누구나 고통을 받고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에 짓눌려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타자의 고통을 감지하고 이해함으로 인해서 가까워지고 삶을 이뤄나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이 소설에 배어있는 고통론은 그런 걸 전제로 한 것이죠.”
살아가기 위해, 지독한 통증 뒤에도 이어지는 생을 살아가기 위해, 또 다른 사람과 공간을 찾아 걸어온 삶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 뒤에 버티고 서있는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딛었던 걸음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그들은 어떤 ‘지울 수 없는 과거의 흔적’ 때문에 고통받지만, 그 치명적인 기억의 상흔에 기대어 살아가기도 한다.”(p.295)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고통이란 것이 삶을 견인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일까.
“고통 받는다는 건 삶을 앓는 거잖아요. 그 상황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간에, 어떤 의미에서는 치열하게 압박해오는 삶을 앓고 있다고 느껴져요. 살아가는 자체가 힘든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인데, 그렇다면 그것을 삶의 역동적인 의미나 힘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저는 이 고통이 타자 긍정으로 잘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잘못하면 타자 부정이 되어 버리거든요. 고통을 통해서 짓눌리게 되면 타인의 탓을 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타자를 부정하다 보면 자꾸 왜곡되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때때로 나를 잃을 정도로 깊숙이 타인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할 때, 그 순간에 그만큼 나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고 내 존재를 뚜렷이 감지했던 경험들이 되풀이됐던 것 같아요. 타인을 나만큼 가깝게 느끼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결국 내 삶이거든요. 나를 위한 삶이고요.”
『도자기 박물관』은 ‘고통’과 ‘관계’ 두 개의 축 위에 쌓아 올린 이야기다. 현실에서의 삶이 그러하듯, 작품 속 인물들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연을 쌓고 무너뜨리고 기쁨과 고통의 절정을 맛본다. 그 이후의 삶 역시 그것들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타인으로 인해 주체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 윤대녕은 존재가 가장 주체적인 순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가 주체적이라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는 순간은, 나를 잊을 만큼 상대한테 몰두하고 상대의 고통이나 상태에 대해서 염려하는 순간이에요. 그렇게 타자한테 깊숙이 개입해 있을 때 ‘내가 굉장히 주체적이었구나, (이 순간이) 내가 이해하고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구나’ 라는 걸 느낄 때가 상당히 많아요. 그것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주체적인 삶은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잘못 이해되면 내 주체를 위해서 주변에서 계속 나를 이해해줘야만 되는 상태가 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삶은 불가능하잖아요, 타자 없는 삶이 불가능하듯이. 그래서 주체라는 건 같이 만들어나가야 되는 것 같아요. 각자의 주체는 서로가 만들어가고 만들어줘야 되는 거죠. 누가 나한테 깊숙이 개입을 해줘야 되고 나도 깊숙이 개입을 해야만 비로소 자기 주체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주체란 고통을 받아들이고 끌어안고 있는 존재임을 지적하면서, 타자를 주체로 만들 정도의 이행력이 있어야만 자기 주체가 발생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자신과 동일한 존재감과 무게감의 삶을 가진 존재로 타인을 대할 때, 그를 통해서 나의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소설이라는 건 사실 주체의 흔들림과 결핍감에서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요. 서로가 만나서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면서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방식이 소설 쓰는 행위인 거죠. 소박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것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영원한 만남이 없듯이 영원한 이별도 없는 거예요
이번 소설집을 펴내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사이 내게는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바로 오십대의 나이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젊음과 늙음의 경계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공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뚜렷이 떠오르는 바가 없다. 다만 고통에 대한 사유와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잦았던 것 같다. 여기에 수록된 소설들은 그러한 시간의 집적이자 흔적이 되겠다.(p.316) | ||
“어느 순간 이런 자의식이 생기더라고요. 어쩌면 혹은 실제로, 지금까지 일관되게 내가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아온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너무 많은 것을 못 보고 가까운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고 살아왔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요. 그런 어쩔 수 없는 회한 같은 것에서 비롯된 인연이 「도자기 박물관」 이죠.
그리고 오랫동안 미감각적인 취향으로 도자기를 쳐다보면서 살았어요. 어느 날 도요지에 가서 불이 타오르는 장면을 봤는데 가슴이 너무 뜨겁게 타오르더라고요. ‘흙이 그릇으로 변할 때까지 그 순간들이 얼마나 뜨거운가’ 생각되면서 ‘매 순간 누구나 자기 삶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 불 속에 앉은 것처럼 뜨겁게 살라는 거겠지’ 싶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도자기 박물관」 은 뒤를 돌아본, 다소 자전적이라고 할 수 소설이고요. 그 즈음에 공허한 의무감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도자기 박물관」 을 쓰고 나니까 다시 삶의 의미를 알겠더라고요. 다시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요. 개인으로서 또 작가로서 자의식이 많이 투영된 소설 같아요.”
고통에 대해 사유하고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통해 인연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윤대녕의 인물들은 스쳐가는 우연인 듯 보이지만 운명처럼 만나고, 영원히 계속될 듯 보이다가도 홀연 스치고 지나간다. 그들 중 누군가는 끊어진 듯 이어져 있는 인연으로 다시 만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끝내 만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것까지도, 이전의 인물들과 다를 것은 없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이제 그는 그 사건들을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것에는 거스를 수 없고 불가해한 힘이 작용하지만, 작가는 그 안에 숨어있는 질서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영원한 만남도 없듯이 영원한 이별도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별들의 운행처럼 각자의 삶에도 자기 운행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개는 가까이 있다가 헤어지면서 순환하고, 멀어졌다가도 다시 가까워지는 순환을 되풀이하면서 늘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헤어진 지 오래됐고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계속 나한테 작용하고 내 삶에 개입한다면 헤어진 게 아니죠.”
각자의 삶이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지고 또 헤어지게 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유일한 ‘인연의 이치’일 것이다. 그것을 아는 존재에게는 다른 존재와 가까워지는 일과 멀어지는 일이 서로 다르지 않다. 곁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곁을 떠난다고 해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 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편지의 수신인-주인공이 사랑했던 옛 남자-이 자신의 아내에게 건네는 말은, 그 사실에 대한 읊조림이라 할 만하다.
그대는 먼 곳에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비록 잠들어 있으나 바로 여기, 지금, 나와 함께 숨쉬고 있습니다. 내 손길이 느껴지지요? 그대는 잠결에 내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꿈에서 나를 보고 있지요? 밖에는 지금 먼 데서 불어온 바람이 우리를 모로 지나쳐 또한 먼 곳으로 불어가고 있습니다. 바람의 소리가 귓전에 들리지요? 이렇듯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p.33~34) | ||
가장 현실적이었던 시간은 글을 쓰는 순간이죠
나의 별이 너의 별과 멀리 떨어져 홀로 궤도를 돌고 있을 때, 그 순간 찾아드는 외로움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 것은, 그리운 너의 곁에 머물 때조차 느껴지는 외로움이 더 지독하다는 사실이다. 결국 모든 존재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 역시 그러한 전제의 당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아스라이 헤어졌더라도 그를 계속 마음속에 갖고 있다면 가까이 있는 것이므로, 작가에게는 그를 그리워할 이유가 없을 뿐이다. 언제나 자신의 안에서, 그리고 옆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으므로.
“예전에는 만나지 못하면 정말 헤어지는 줄 알았어요. 소설도 그렇게 끝났고요. 그 생각이 『대설주의보』즈음부터 변한 것 같아요. 결론도 그렇게 바뀌었죠. 「통영-홍콩 간」 에서처럼 다시 만난 이후의 하루하루가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어요. 서로가 타인을 실천해야 되는 일이 안 보는 일보다 더 힘든 거죠. 그런데 이제 저는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게 삶’이라고 해석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 같아요. 만나는 순간에 얼마나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깊이 개입할까에 대한, 상대를 감지하는 것에 대한, 그런 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타자가 주는 분리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서로가 타인을 실천해나가는 것이 삶이라는 작가의 말은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문학과 한 몸이 되어 걸어온 그의 삶 역시, 끊임없이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이해에 다다르려는 시도들로 채워진 시간이기 때문이다. 윤대녕의 문학은 언제나 조금 더 깊숙이 인간을 이해해가는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 삶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와 그 전제가 되는 것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은 그의 문학을 지탱해 준 뿌리였다. 그는 말한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가 전제되어 있어야만 삶이 비로소 시작된다고. 그래서 자신은 타자에 대한,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문학을 하면서 꿈을 얻고 삶을 잃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소름끼칠 때가 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살아온 게 결국은 다 꿈이었던 게 아닌가, 내가 소설을 쓰는 순간만이 현실이 아니었던가’ 이런 생각도 해요. 그 순간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기억이 몸에 남아있고 의식에도 남아 있지만 거머쥘 수가 없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살아온 과정이 다 꿈같이 느껴질 때가 많아요. 글을 쓰는 일은 허구 속을 헤매는 거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실제적인 삶을 갈급하고 느끼고, 그걸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해왔던 일이거든요. 그 글 자체는 현실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저한테는 매우 중요한 대목인데요. 그래서 앞으로도 글을 쓰지 않는 한 많이 허무할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느끼기엔 적어도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가장 현실적이었던 시간인 것 같아요.”
소설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을 얻었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많은 것들이 허구화된 것 같은 허망한 자각이 찾아오는 순간들도 있었노라고 작가는 말했다. 그럴 때마다 현실로 남은 작품들을 보면서 문학에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아직까지도 어떤 것이 꿈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더러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현존하는 순간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바로 지금 여기의 느낌, 자체의 감각만이 실제 현실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가 현존하고 있다는 감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다른 사람을 공감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을 이해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더 많이 타자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간적으로서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작가로서도 좋은 작가가 되고 싶고요. 앞으로도 독자로 인해서 자꾸 해체되고, 다시 내 삶도 정렬되고,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그게 텍스트를 사이에 두고 제가 독자와 맺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관계인 것 같아요.”
작품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완성해주는 사람은 독자일 뿐이라고,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창작자를 배신하길 반복하며 거듭나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 윤대녕. 이제 독자의 손에 넘겨진 그의 또 다른 이야기 『도자기 박물관』은 어떤 의미로 새롭게 탄생하게 될까. 분명한 것은 그 의미들의 색채가 각기 다르더라도, 모두가 그 안에서 작가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보게 되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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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자기 박물관윤대녕 저 | 문학동네
2013년 가을, 윤대녕의 일곱번째 소설집 『도자기 박물관』 이 출간되었다.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이십삼 년째, 그간 특유의 여로 형식과 시적인 문장을 통해 인간 존재의 거처를 집요하게 탐색해온 그의 신작 소설집에서 우리는 윤대녕 소설세계의 연속성을 느낄 수 있음은 물론, 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깊이를 확보하며 새로운 소설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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