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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가 최태섭 “왜 대한민국은 잉여사회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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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좇을까, 현실에 순응할까를 묻는 청춘에게 문화비평가 최태섭은 말한다. “어차피 뭘 해도 망하니까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이 같은 자조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이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스며든 잉여라는 존재를 탐구했다. 왜, 잉여들에게도 존재하는 흐릿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잉여로 만들고 있지만, 잉여들은 나가는 문이 없는 자본의 시대에서 그 자본이 예측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있다. 과잉, 각성, 깨달음, 분노, 뒤섞임 등이 그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의 탈락자, 즉 잉여들이 생겨난다. 한 순간 경쟁에서 이겼다고 해도 그들이 잉여로서의 삶과 영원한 이별을 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히 잉여로만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도 확신할 수 없다. 어떤 시대에도 잉여는 존재했지만, 스스로를 잉여라 일컬으며 자조적 고백을 늘여놓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잉여라는 주제가 오늘날의 세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말하는 저자 최태섭. 88만원 세대, 취업마저 포기한 ‘사포시대’를 논하는 세대 담론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청년들이 잉여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분석하고 잉여들이 유일하게 고개를 들이미는 인터넷 문화 행태를 해부했다. 그는 “잉여가 가진 에너지가 미래의 또 다른 가능성이 되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미한 잠재력을 보았다”고 말했다.

물론 이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약하다. 우리의 20세기를 수놓았던 수많은 가능성들이 힘을 잃고, 일부는 자본의 너른 품에 안겨 우리를 더 큰 절망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편협하고, 미약하고, 쓸모없고, 비루한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능성의 조각들이라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뭔가의 번데기들이 부화하여 나비가 될지, 독충이 될지 알지 못한다. 아니 그것이 과연 부화하기는 하는 건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가능성 역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잉여사회』 p.27)


잉여, 시대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2011년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집필하고 2년 반만의 저서다. “네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라는 노동 착취 행위를 분석했는데 지금도 대한민국 사회는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계속 같은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최근에 이슈가 됐던 <뉴스타파> 인턴 공고 문제도 그렇고 ‘그게 그거’라는 생각을 못할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그렇지만, 본인들은 먹고 살 것까지는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인턴을 지원해야 하는 사람은 먹고 사는 걱정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인턴 3개월 동안 편집, 촬영을 가르쳐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수련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실질적으로 인력이 필요해서 모집하면서, 옳은 일을 하는 거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세상의 수많은 노동쟁의가 뭐가 되는 것인가, 싶었다. 너무 나이브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사실 나도 비슷한 경험도 많다.

비슷한 경험이라면 무슨 경험인가.

원고 청탁이 들어와서 원고료를 물었더니, 준다고 했다가 안 주는 데도 있었고 턱 없이 짠 원고료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는 마감 압박이라는 것 없이 너무 편하게 지냈지만, 왕왕 어이 없는 일들이 여전히 있다.

자기소개서를 명명한 글이 인상 깊었다. ‘너무 자신만만해도 안 되고, 너무 풀 죽어도 안 되고, 너무 오버해도 안 되고, 너무 건조해도 안 되고, 너무 뻔해도 안 되는’ 적절한 자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 자기소개라고.

온라인 취업 카페들을 보면 자기소개서를 올리고 서로 봐달라고 한다. 그 때 조언하는 시선들은 다들 면접관의 눈이다. 대부분의 댓글을 살펴보면, 이건 이 기업의 입장에서 메리트가 없고 여기 부분은 이렇게 고치라고 말한다. 이게 참 서글픈 이야기다. 웃긴 이야기다. 자기소개서라면 나를 소개하는 글이어야 하는데,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의 의도에 맞게 쓰는 글이 자기소개서가 되어버렸다. 지원자들이 너무 똑같은 포맷으로 쓰면 기업에서는 또 포맷을 바꾸고, 지원자들은 또 콘셉트를 바꾸고. 그 꼴이 웃긴다. 채용과정 자체가 서바이벌 아닌가. 좀 더 효율적인 절차로 지원자들을 빨리 탈락시켜 최소한의 몇 명을 채용하려는 행위다. 결국 따지고 보면 사람들을 빨리 걸려내려고 하는 거다. 마지막에 시험 잘 보는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고. 그런데 막상 입사를 했는데 일을 못하면 대학에서 잘못 가르쳤다면서 대학을 때려부수고 그런다.

주변에 취업에 성공한 케이스는 없나.

많지 않다. 내가 학교생활을 제대로 안 했으니 잘 모르는 걸 수도 있고. 다만 아직도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많고 마음 편히 잘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 또래들을 보면 아직도 불안정하다. 시험 보면서 취업 준비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저자는 『잉여사회』에서 스스로 잉여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진짜 잉여와 가짜 잉여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우리 시대가 더 많은 잉여들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아직도 기성세대는 사람을 두고 ‘잉여’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나.

대학원에서 ‘잉여’를 주제로 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나이든 교수님들의 반응이 그랬다. 파르르 떠는 분도 있었다. 예전에는 나이 많은 노교수들이 ‘대학생이면 지식인인데 너희가 그러면 쓰겠냐’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 어떤 대학생이 지식인이라는 생각을 하나. 이런 생각을 가진 학생이 있으면 주변에서 놀릴 거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잉여사회』를 쓰게 된 계기가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스스로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잉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 단어를 듣고 빵 하고 터지는 게 있었다. 내가 잉여가 아니면 뭔가, 라는 지점이 있었다. 진짜 잉여를 가려내는 일은 일종의 불행 경쟁, 혹은 소수자 되기 게임 같은 양상을 동반한다. 지금 이 세계에서 스스로를 잉여라고 자처하는 사람에게 ‘너는 진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공격이다.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데에 힘을 쏟는 이유는 막연한 불안감의 실체를 마주하고 나와 그것 사이의 명확한 선을 긋고자 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이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를 때는 괜찮지만, 타인에 의해서 ‘잉여’라는 평가를 받으면 멈칫하게 된다. 유희로 사용했던 단어의 실체가 사실로 인정되니까 당황스러운 거다. 자의에 의한 명명은 허용되지만 타의에 의한 명명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잉여라는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놀 때, 다른 하나는 진심으로 욕할 때 경멸하는 의미다. 그런데 이 두 의미가 멀리 떨어진 게 아니다. 어떤 공간에서는 그냥 즐기며 자학하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또 다른 공간에서는 ‘야 잉여들아’라면서 진심으로 욕을 하면서 쓴다. 똑같은 단어를 공간마다 다른 의미로 쓰는 사람이 결국은 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이 사람에게 일종의 불안 같은 게 보일 때가 있다. 진짜 잉여들이 커밍아웃을 할 때다.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신을 잉여라고 말하며 놀던 사람이 갑자기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준다면서 과거를 털어놓는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당황한다. 사실 온라인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 말들이 모두 진짜인지는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숙연해지는 느낌이 있다. 불안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기재가 되는 것이다. 가령 쌍용차 문제도 그렇고, 용산사태를 이야기할 수 없는 핵심에도 이런 종류의 불안이 있지 않나 싶다. 철거 투쟁도 성격이 애매하지 않나. 80년대 상계동 철거하듯 빈민가에서 쫓겨 나는 게 아니고, 상업지구를 철거할 때 그런 것들이 보인다. 이 사람들이 분명히 용산 사태 때는 움직이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자기네들이 비슷한 입장에 서게 되면 용산을 소환한다.

스스로 ‘청년 필자’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언짢음이 있다고 했다.

『88만원 세대』이후 한국사회는 새로운 시선으로 20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불쌍한 20대를 위한 동정 여론과 지원이 일어났고 20대 당사자 운동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생겨났다. 세대론을 표방하는 책들, 언론들은 2030칼럼을 만들어 청년 필자들에게 펜을 쥐어줬다. 하지만 갑자기 불러 나온 청년들은 어른들의 성에 차지 않았고,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제대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어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리지만 기회를 준다’의 의미인 줄 알았는데, ‘네가 어리니까 네 이야기는 안 듣겠다’라는 의미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청년필자라도 자기가 청년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착각이다. 가령 청년필자를 섭외해서 이야기를 듣는다고 할 때, 자기가 아는 청년을 데리고 와서 듣는 거다. 이용 당했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의견이 의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20대를 불쌍히 여기던 여론이 2008년에는 ‘20대 개새끼론’을 불러왔다. 20대가 과연 선거에 적극적이었다면 세상이 바뀌었을까. 386세대는 20대를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깃발에 20대들이 달려들어 자신들의 대업을 완성시켜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언젠가 그들도 한낱 기성세대가 되어 뒷방으로 밀려나지 않겠나. 지금 시대는 모든 세대가 생존을 위해 달려간다. 20대만 힘들다고 징징댈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한국 노년층의 빈곤율, 비정규직의 비율, 자살률이 세계 최상위권이다. 20대가 실업 문제를 겪는 건 비단 3,4년 안에 생겨난 일이 아니다. 이미 10여 년 전, 아니 더 오래 전부터 시작된 어떤 변화들의 결과다. 오늘날 20대 문제는 몇 년 후 지금의 10대 문제가 될 것이다. 내가 20대 때 ‘열정노동’을 말했고 30대가 된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듯이. 실업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대공황시기의 20대와 지금의 20대는 자라온 환경과 흡수해온 문화적 자양분이 다르다. 결국 다른 해결책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20대 문제는 오늘날의 20대가 살아온 특수한 환경과 그보다 더 큰 구조적 변화가 겹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베, 과격한 언술을 걷어내면 어떤 상처들이 있다

저자는 잉여의 정서와 문화를 인터넷 문화 속에서 발견했다. 일베를 두고 ‘잉여가 갖고 있는 가능성이 가장 부정적인 방식으로 치닫고 있는 예시’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다소 주춤하지만 최근까지 많은 언론에서 ‘일베 논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당했다.

일베가 본격적으로 광주를 다루면서 언론의 이슈가 됐는데, 사실 이건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 사이에 뭔가 일베에서도 상승 작용이 있었던 거다. 한참 전에 일베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광주를 가지고 모욕적인 사진을 만들어놓은 게시물에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는 댓글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다른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일들이 생기면서 이런 광주에 대한 표현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거다. 내부 결속이 생긴 거다. 일베의 광주 비하 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디씨를 비롯해서 많은 사이트에서 훨씬 더 막장 같은 일이 많았다. 일베의 주장들은 지난 10여 년간 인터넷상에서 언제나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들이다. 일베 광주 사건이 이슈가 된 것은 언론이 아는 사건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일베의 주장 자체는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일베 사용자들을 살펴보면 평범한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이들이 어째서 이런 극단적인 말과 생각들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들은 깊은 박탈감에 빠져 있으나,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매우 비겁한 방식으로 해소하는 이들이다.

현대인의 박탈감과 분노, 고독 같은 것들이 잉여문화, 곧 일베와 같은 현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인가.

일베가 잘 알지도 못하는 광주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게 된 것은 이들에게 광주가 큰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광주를 욕하면 적들이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금기를 깨자 관심을 받고, 그것을 영향력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일베는 자본주의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비슷한 상황들 중에서도 얌전한 편에 속한다. 2011년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7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테러를 두고 언론은 알카에다의 테러라고 보도를 했지만, 멀쩡해 보이는 백인 청년이 범인이었다. 이 청년은 자문화주의를 반대하고 이슬람을 혐오하는, 여성혐오적 성향, 성적 박탈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테러의 이면에는 최근 유럽과 미국 등지의 신보수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이민자에 대한 불관용의 증대와 같은 배경들이 있지만 범인의 개인적인 프로필을 들여다보면, 결국 그를 테러로 이끈 건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박탈감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는 일베의 발전된 버전 재특회(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도 있다.

병맛 웹툰, 키보드워리어, 악플러와 어글러 현상에서도 잉여 감성을 찾아볼 수 있다. 자기 비하를 서슴없이 해대는 글들을 보며, 자학하며 즐거워한다. 왜 이런 감성에 쾌락을 느끼는 걸까.

병맛 웹툰의 핵심은 만화가 아니라 병맛이다. 병맛은 ‘쩐다’라는 유행어와 함께 ‘병맛이 쩐다’라는 식으로 많이 사용하게 됐는데 이 말은 분명히 함량 미달에 무식해 보이고, 소위 ‘병맛’ 같은데 뭔가 불가항력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견딜 수 없다는 거다. 법과 상식, 예측 가능성과 뻔함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평소 같았으면 혐오해 할만한 이야기에 굴복한다. 사회가 갖고 있는 규범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순간, 이상하고 은밀한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주어진 숙제와 경쟁 속에서 10대, 20대 청소년, 청년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자기 비하, 독설, 분노와 답답함을 남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 기괴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보잘것없고 쓸모 없지만 어쨌거나 동류의식, 일종의 연대감을 느끼는 것이다. 병맛 웹툰이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게 될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것이 하나의 시대적 감정으로 읽히는 것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나타나는 일상적인 통찰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점점 독해지고 있다. 병맛 웹툰에도 예전만큼 독자들이 자지러지지 않는다. 뭔가 스스로 창조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웹툰이 장르화되면서 병맛 웹툰이 서서히 줄고 있다. 병맛이라는 단어도 요즘에는 많이 쓰지 않는다. 병맛 웹툰을 볼 필요도 없이 현실 자체를 깨고 논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 심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일베 현상은 언제까지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나.

지금 언론에서는 많이 다루진 않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일베가 치고 나오면서 분리수거가 된 경향도 있다. 일베 회원이라고 하면 사람을 이상하게 보고 있지 않나. 책에 “알고 보면 일베가 요정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민주주의, 민주화를 이야기하고 광주를 막 수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국방부, 새누리당이 나서서 5.18의 정당성을 인증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웃긴가, 코미디다. 일베 사용자들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파괴적이지만 저 과격한 언술을 걷어내면 어떤 상처들이 있다. 현실에서는 극도의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누군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었다면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들도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고민하자 ‘우리 삶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결론이 다소 평이하다. 잉여에게 생존과 성장, 만남을 제안했다. 그냥 살아남는 게 아니라 ‘잘’ 살아남기, 처절한 생존 투쟁 속에서도 성장하기, 타의에 의해 정의되지 않은 자신과 만나기를 권했다. 가장 공감한 부분은 “적어도 스스로의 모습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에는 가장 기본적인 걸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기본적인 게 안 되고 있으니까 가장 기본적인 걸로 돌아가보자는 뜻이었다. 빨리 뭘 만들어서 연대를 하려고 88만원세대가 나왔는데, 왜 깨졌는지 살펴보면 자기네들끼리 싸운 결과다. 뒤심이 부족해서다. 누구 하나는 올인해서 가야 하는데, 다들 손해는 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이기적이라는 평가는 알맞지 않다. 그럼 왜 이렇게 됐냐를 물을 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어떤 분들은 결론이 좋다고도, 약하다고도 하는데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결론이었다. 살아남는 건 중요하다. 지탱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는 비굴한 선택을 해야 하고 불의에 눈을 감기도 하겠지만 이 모든 것이 생존 때문이라고 정당화하지는 말아야 한다. 기억하고, 반성하고, 최소한의 양심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어보자는 작은 다짐 정도는 해야 한다.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면 우리의 억울함과 자의식을 잠시라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 거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고민하지 않으면 그냥 이 사회가 명명하는 존재로밖에 살 수 없다.

어찌됐든 지금 사회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쓰일 곳을 못 찾고 방황하고 있는데, 개선될 여지가 없다. 사회가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더 많은 기회도 주고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돌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스스로를 돌보는 삶을 포기하는 순간, 세계는 멸망한다. 삶을 돌본다는 게, 정신 잘 차리고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다. 세계가 우리를 잉여로 분류했다 쳐도 쓰레기를 모아서 핵융합을 만들 수도 있는 거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삶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를 끊임 없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끊임 없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곧 칼럼집 『모서리에서의 사유』 도 출간 예정이다. 군 입대 전 마지막 저서일 텐데.

계간지나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팀블로그 ‘리트머스’ 등에 썼던 5년치 글들을 모았다. 급하게 내는 이유는 아무래도 시효성이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이 때 말했던 것들과 지금을 비교해보았을 때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는 걸 느꼈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도 글쎄, 한국 사회가 많이 달라져있을까에 대한 기대는 솔직히 크진 않다.

군대에서 겪은 일들을 글로 적고 싶다는 생각도 있나.

나이를 먹으면 그래도 조금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군 입대를 미뤄왔는데 30대가 된 지금도 아직 나약한 것 같다. 게다가 군대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암울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은 군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지 않나. 그래도 다녀오면 말할 수 있는 자격? 같은 건 생기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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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사회최태섭 저 | 웅진지식하우스
잉여라고는 하지만 한편으로 청춘인 그들은 왜 인터넷 안에서만 자신을 표출하는가? 그들은 왜 긍정과 도전을 외치는 세상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모니터 앞에 앉게 되었나? 이 책은 댓글놀이, 병맛 웹툰, 키보드워리어와 일베 논란을 들여다보며 잉여들의 심리와 행태를 추적한다. 자기 자신도 ‘잉여’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회학도이자 문화비평가인 최태섭은 어른이나 선생의 눈이 아닌 잉여 스스로의 눈으로 이 현상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무엇보다 《잉여사회》는 잉여를 낳게 된 현대 자본주의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는 데 그 의의가 크다. 현대인이 말려들 수밖에 없는 ‘대잉여시대’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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