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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뇌과학자 정재승의 새로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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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정재승 박사의 신작 『열두 발자국』을 읽다 보면 인간이란 어쩌면 복잡계 행성에서 떨어진 가장 흥미로운 객체 같다. 정재승은 책 제목을 궁리하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을 올렸다. 인간이라는 미지의 숲을 탐험한 과학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싶었다. 지금까지 20가지 주제로 1,000회 이상의 강연을 진행한 그는 10년 전부터 모든 강연을 녹취하고 있다. 과학을 구술 문화의 한 형태로 소통하고 싶었다. 2001년 첫 책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를 쓴 후 17년 만의 단독 저서. 독자들이 책을 읽다가 막히는 순간이 없도록 수십 번 퇴고했고, 읽는 맛을 살리기 위해 강연 분위기를 담은 추임새도 곁들었다. 의사 결정, 창의성, 놀이, 결핍, 습관, 미신, 혁신, 혁명이라는 키워드를 들었을 때, 단 하나라도 귀에 콕 박히는 단어가 있다면 정재승이 권하는 ‘미지의 인간 숲’으로 탐험을 떠나보자.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상상하는 일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일종의 탐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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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10년간의 뇌과학 강연 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12편을 선별했다. 책을 하나로 묶는 큰 주제는 ‘뇌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내 인생의 화두 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나이 마흔이 넘어가니까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뇌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미래는 예측하기 어려울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지?’ 이건 비단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 전 연령대가 가진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말하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들에 관해 생각해본 책이다.

 

첫 발걸음부터 거슬러 올라가보자. '선택하는 뇌'를 첫 번째 키워드로 꼽았다.

사람들은 선택 자체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다. 선택했으니까 반드시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움직이는 과녁을 맞히는 것처럼 분명한 답이 없다. 잡았어야 할 기회를 놓쳤다면 쉽게 털어버리는 편이 낫다. 시도했는데 실패했다면 결과를 받아들이고 빠르게 대응하는 편이 현명하다. 이건 신경과학자들의 의사 결정법에서 배운 것이다. 그동안 내겐 정말 많은 기회가 왔다. 돌이켜보면 ‘이걸 왜 했지’ 싶은 것도 있고, 정말 잘한 선택도 있었다. 수많은 기회를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앞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면 좋을지 알게 됐다. 물론 내 선택이 옳지 않았을 때도 있다. 스스로의 동력에 의해 엎어지는 일도 있으니까. ‘이건 절실하게 꼭 해야 한다, 안 해야겠다’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의사 결정 자체에 큰 부담감을 갖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일이면 하되, 다만 적절한 시기에 선택하고자 노력한다.

 

‘결정 장애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두 번째 키워드다. 신념 체계가 확실하지 않아서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책을 많이 읽고 고민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책의 전반에서 강조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자기 객관화’다. 흔히 우리는 우유부단해서 선택을 미루거나, 결정했지만 완수하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결정 장애가 있다’고 말한다. “난 원래 성격이 이래”라고 단정지어버리면, 그 사람은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 남에게 항상 결정을 미루는 사람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배려일 수도, 확신의 부재일 수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따른 후회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선택을 빨리 한다. 자신이 선택을 못하거나 굼뜨다면 자기 밑에 있는 이야기를 들춰낼 필요가 있다.

 

의사 결정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새로운 환경이 놓이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집에서 키우는 개와 들에서 자란 개 중에 누가 더 의사 결정을 잘할까? 정답은 후자다. 들에서 자란 개는 집에서 키우는 개와 달리 다양한 상황에 놓이고, 그때마다 해야 하는 의사 결정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반면 안전한 집에서 편하게 자란 개들의 의사 결정은 제한돼 있다. 결과가 어떨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정해보고, 이것이 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경험을 많이 해보면 의사 결정에 자신감이 생길 수 있다.

 

세 번째 챕터 ‘결핍 없이 욕망할 수 있는가’를 읽으니 ‘정재승에게도 결핍이 존재할까’ 궁금해졌다.

 

글쎄, 지금 내 삶을 돌아보면 너무 많은 기회가 몰아닥치고 있다. 강연 요청도 너무 많고, 세종시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도 수행해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하고, 학생들 상담도 하다 보니 중요한 일과 급한 일 사이에서 자꾸 급한 일만 처리하게 된다. 지금에서야 책이 나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 우리의 뇌는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이 있으면 급한 일에 먼저 반응한다. 그러다 보면 중요한 것들이 계속 밀리게 되는데, 급한 일이 항상 중요한 건 아니라서 나도 종종 반성하곤 한다.

 

“어떻게 노느냐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했다.

 

‘인간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챕터를 쓰면서 생각한 문제의식이 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모든 질문의 초점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까’에 있느냐였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나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까’를 생각하며 삶을 준비한다. 정작 사람은 하루의 1/3을 자는 일로 보내는데도. 한 사람을 이해하고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즐기며 사는가에 있다. 놀이가 갖고 있는 속성을 살펴보자. 첫째, 자발적이고 평가에 민감하지 않다. 둘째, 좋은 사람과 함께할 때도 재밌고 혼자 해도 즐겁다. 이런 마음으로 놀이를 즐기다 보면 우연히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정재승은 어떤 놀이를 즐기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인터뷰, 사진 촬영도 나에겐 일종의 놀이다. 단순히 책을 홍보하는 일을 넘어 내겐 매우 즐겁고 흥미로운 시간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닐 때 사람은 즐거운 감정을 느낀다. 인터뷰를 예로 들어보자. 내가 매우 자발적으로 즐겁게 했는데, 심지어 결과물도 근사하고 생산적일 때 이보다 더 좋은 놀이가 있을까? 나는 일과 놀이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취미가 나에겐 어떤 생산물로 탄생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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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

 

다섯 번째 발자국 ‘새로 고침’ 편은 직장인에게 특히 도움이 될 이야기가 많았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1월 1일이 되면 다양한 새로 고침의 욕망들을 담아 ‘새해 결심’을 한다. 그리고 설날에 한 번 더 한다.(웃음) 인간은 습관을 쉽게 고치지 못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 하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특성은 장점이기도 하다.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진행된다는 것, 그 자체로도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 챕터는 뇌 과학자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쿨하게 들여다본 이야기다.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자고 강조하지도, 습관이 갖고 있는 힘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 삶에 있어서 반드시 바꿔야 하는 그것조차 바꾸지 못하고 있다면 죽음을 앞둔 때를 상상해보라는 이야기다. 나는 종종 ‘내 삶이 3개월 남았다면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를 상상해보곤 한다.

 

‘20%쯤 열어두는 삶’을 권했다.

 

사람은 과거의 경험과 학습 내용을 갖고 삶을 꾸려가는데, 10~20% 정도는 새로운 탐색을 하는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다. 과거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면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예측 가능한 수준의 결과를 얻겠지만, 새로운 시도가 주는 뜻밖의 수확은 얻을 수 없다.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 아니라 성숙이라면 새로 고침이 주는 예상 밖의 즐거움을 만끽해봐도 좋지 않을까.

 

1부의 마지막 챕터는 ‘미신’ 이야기다.

 

학생들이 사주, 타로점, 손금을 보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미신은 우리 사회의 정말 큰 사회 문제다. 미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결혼을 못하고, 낙태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과도한 부를 축적한다. 미신을 믿는 사람이 무조건 나쁜 사람이고 한심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빨간색으로 내 이름을 쓰지않았다. 우리는 수많은 미신 속에서 살고 있다. 사소하게라도 계속 지키고 있기 때문에 미신은 아직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미신이 말도 안 되고 비이성적이고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미신을 따를까?

 

‘믿어서 손해 볼 건 없다’는 태도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미신에 친화적이다. 우리가 잘 아는 ‘도파민(dopamine)’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은 무작위적인 패턴 사이에서 어떤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는 역할을 한다. 이 도파민의 분비가 지나치면 무작위적인 패턴에서도 쉽게 특정 패턴을 ‘만들어’ 발견하게 된다. 결국 굉장히 중요한 의사 결정에 비합리적 영향을 끌어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한다.


“결국 중요한 건 삶의 태도”라고 강조했다.

 

과학적인 사고, 이성적인 판단, 논리적인 추론이 우리 일상 안으로 좀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 나는 회의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길 희망하고 그러기 위해 애쓴다. 회의주의적인 삶이란 어떤 것도 쉽게 믿지 않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려 애쓰는 태도다. 근거를 중심으로 현상을 판단하고, 항상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인드를 갖는 삶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리처드 파인먼, 리처드 도킨스, 마틴 가드너 등 많은 학자가 회의주의자였다. 이 챕터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건 균형 감각을 갖자는 이야기다. 모든 걸 깐깐한 눈으로 보되 극단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것, 각각의 시각에서 장점을 갖추되 놓칠 수 있는 것을 경계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뇌과학자에게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바로 ‘창의성’. 창의적인 사람들의 특징이다. 2부를 시작하는 챕터가 ‘창의적인 사람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어지는가’인데, 최고의 창의적 발상으로 ‘은유’를 꼽았다.

 

KAIST에서 학생들의 창의성 워크숍 때 사용하는 훈련 방법이 있다. 어떤 특정한 사건을 설명해준 후, 3시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강의실에서 그대로 앉아 과제를 수행하게 하고, 다른 그룹의 학생들은 내 연구실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들어 무작위로 문장 하나를 고르게 했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문장 하나를 꼽아, 이 두 문장을 넣어 위의 과제를 수행하게 했다. 결과는? 첫 번째 그룹은 무난하지만 다소 뻔한 이야기를 만들어왔고, 두 번째 그룹은 이어지지 않는 두 문장 사이를 메우기 위해 엉뚱한 뇌 영역을 사용하게 되면서 아주 기발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물론 영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나 역시 글을 쓸 때 비슷한 원리를 사용한다. DNA에 관한 글을 써야 한다면 오히려 문학 서적을 뒤적거린다. 기존의 유사한 글들을 쓰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천장이 높아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더라.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천장의 높이가 대개 2.4m, 보통 회사의 사무 공간 천장이 2.7~3m 사이인데, 50년간 노벨상 수상자를 12명이나 배출한 소크생물학연구소의 천장 높이는 3.3m였다. ‘소크연구소는 천장이 높아서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시 전설이 생기면서 연구자들은 궁금해졌다. 그래서 실제 실험 공간을 만들어 천장 높이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천장의 높이가 가장 높았던 3.3m에서 가장 좋은 성과가 나왔다.

 

감성을 나눌 때, 수다 떨 때 좋은 공간의 특징도 있을까?

 

직각으로 나뉜 공간보다는 둥근 형태, 자연과 어우러진 공간에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보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요양원의 경우, 발코니와 창문을 높게 만들었더니 기억력 저하가 점차 줄었다. 또 초록 빛깔이 붉은 계열보다 사람을 더 사교적이게 만들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운동, 수면, 독서, 여행과 더불어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를 꼽았다.

 

창의성이 사회적 맥락으로 길러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 사람이 A라는 나라에선 굉장히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B라는 나라에서는 매우 평범한 유형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굉장히 복합적인 존재라서 어떤 장소에 놓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만나는 사람이 아닌 다른 경험을 한 사람과 만나보려고 애쓰고,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 특히 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는 자기가 직접 물리적 환경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현상과 내 문제를 연결시켜보려고 애쓰다 보면 창의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스타트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일하는 공간을 직접 설계한다면 어떻게 꾸미고 싶나?

 

우선 천장이 높은 공간을 선택하고, 사람들이 뒹굴뒹굴하면서 브레인 스토밍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작은 광장을 만들고 싶다. 물론 혼자 몰입할 수 있는 밀실 같은 공간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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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현재 연구하고 있는 주제가‘인간 뇌를 닮은 인공 지능’이라고.

 

사람처럼 상황을 판단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는, 뇌를 닮은 인공 지능을 만들려고 한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인공 지능이 인간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인간과 상호 작용하려면 결국 인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도 인간처럼 사고해야 우리가 불편을 겪지 않는다. 앞으로 인간의 직업은 사회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역할은 인공 지능에게 넘겨주고, 우리는 데이터 자체를 검토하거나 결과를 해석하는 고등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종이 책의 미래는 어떻게 보고 있나?

 

라디오와 비슷한 운명이 되지 않을까. TV가 등장하고 아이맥스 영화관이 나오고, 블루 레이가 나오면서 라디오의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지 않았나? 하지만 라디오만이 갖고 있는 장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라디오는 여전히 남아 있다. 종이 책 역시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늘면서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부터 전자책으로 된 교과서를 공부할 시대가 머지않지만, 종이 책만이 갖고 있는 장점, 매력은 사라지지않는다. 중요한 건 전자책을 많이 보는 사람에게 종이 책이 하나도 없을 리 없다는 사실이다. 책을 안 보는 사람은 종이 책도 이북도 없겠지만.

 

정재승의 서재가 궁금하다. 집에만 2만여 권의 책이 있다고.

 

책을 위해 집을 지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데, 논문이나 영어책은 주로 전자책으로 보지만, 평소 자주 접하는 건 종이 책이다. 나는 곧 전자책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종이 책을 많이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 때문에 집이 좁아지는 문제만 없다면 삶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종이 책을 소유하고 싶다. 20~30년 후를 내다본다면 아이들이 있는 공간에서 종이 책의 가치가 높아질 거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말하며 “기술 계급 사회가 가장 두렵다”고 했다.

 

과학 기술을 잘 이해하고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람들과 기술을 두려워하고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불평등을 생각해야 한다. 또 인간이 인공 지능에게 의사 결정을 맡기고 결재만 하는 존재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 기계 문명은 우리에게 놀라운 생산성, 효율성을 가져다줬지만, 인공 지능은 이제 우리의 뇌가 되려 한다. 인공 지능의 의사 결정 계산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 값에서 의존한다면 의사 결정의 주체는 인공 지능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다. 기업이 미래의 기회를 잡기 위해선 무엇보다 함께 일해야 한다. 인공지능팀, 빅데이터팀, 서비스기획팀을 따로 운영하지 않고 같이 일하게 해야 한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지라도 인내심을 갖고 시행착오를 넘어서야 한다.

 

이번 책에 저자 사인을 하면서 “인간이라는 미지의 숲으로 탐험을 떠나요”라는 문장을 새겨놓았다. 열한 번째 발자국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에 도전하는가’를 읽는데, 이 문장을 곱씹게 되더라.

 

인간은 영원한 탐구 대상이다. 과학자들이 인간이라는 숲을 이해하기 위해 미지의 탐험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아무런 지식을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인간의 본질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수만 발자국의 탐험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저 세상에 순응하고 산다면 혁신과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 이 살벌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나려면 탐험가의 기질을 소유해야 한다.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두 가지로 나뉜다. 큰 조직 안에 있어서 제 역할을 하는 사람, 조직이라는 우산이 없어도 홀로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조직이라는 우산을 거둬냈을 때도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로 대체되기 어려운 존재로 성장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는 노력도 해야 하고, 현명하게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과감하되 무모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되 실패하지 않기 위한 준비에 철저한 사람이 곧 시대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면 나이 드는 게 두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재승도 그렇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드는 일은 두렵다. 사회적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까. 나도 언젠가는 KAIST 교수가 아닌 인간 정재승으로 세상에 나와야 한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의 직업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는 일이다. 과학자인데 글도 쓰고 강연도 하고, 사회적인 일에도 앞장서는 지금까지 없던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다. 여전히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어른을 볼 때마다 나쁜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르친 학생이 아니더라도 작은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는, 뭔가를 나눠주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한 독자의 질문을 대신해 묻는다. 정재승에게 인생 책 3권은 무엇인가?

 

특별한 인생 책이 없다. 책에 너무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옛날에는 별것 아니었던 책이 지금 너무 와 닿을 때가 있고, 어떤 사람이 인생을 바쳐서 쓴 역작인데 내겐 시큰둥하기도 하다. 왜 그럴까 따져보면 내가 계속 바뀌고 있어서지 책 자체가 어떤 완결된 훌륭함을 갖고 있어서 내게 감동을 주는 건 아닌 것 같다. 책은 늘 곁에 있고 매 순간 때에 따라 다르게 내 마음을 건드린다. 올해는 혁명을 많이 말하다 보니 『돈키호테』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열두 발자국정재승 저 | 어크로스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저자의 발자국을 따라 인간이라는 거대한 우주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탐험하는 근사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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