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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주 “인간의 도리는 관계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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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오랜 시간 인간의 형상과 본성을 투영해 왔다. 화목할 화(和)에는 농경사회에서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의 화목함이 떠오르고, 아첨할 첨(諂)에서는 교묘한 말 속에 함정이 있다는 교훈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반대로 재벌가의 갑질과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한 폭력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어떤 한자를 떠올릴까?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라는 뜻에서 짐승 수(獸)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부끄러운 줄 알라는 뜻에서 부끄러울 치(恥)를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정주 작가는 이처럼  『인간도리 인간됨을 묻다』에서 한자라는 창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았다. ‘나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고칠 개(改)와 어질 인(仁)을 떠올린다. 잘못을 고치는 용기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곧 ‘인간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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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서 인간됨이 시작된다


출판사에서 먼저 ‘한자에서 인간학을 읽는’ 책을 만들자고 제안하셨다고요.

 

한자를 파자(破字)해서 한자에 담긴 의미나 뜻을 가지고 요즘 독자들의 읽는 속도에 맞게 짧게 써보자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다른 전작에 비해 집필하기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얼른 들었어요. 평소에 사람들과 모여 차 한잔하며 나눈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고요. 많이 고민하지 않고 하자고 했죠.


뉴스를 보거나 일상생활에서 감정이 생기면 한자를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고 하셨어요. 예를 든다면 어떤 걸까요?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국정농단 사건이 있었어요. TV를 보면 항상 자기가 잘못했다거나 뭔가 다른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사람이 없었죠. ‘왜 저렇게 당당하지? 왜 아무렇지도 않지?’ 생각해보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구나 싶었어요. 남 앞에 잘못한 게 없으니까 부끄러운 게 없고, 부끄러운 게 없으니까 당당한 거예요.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부끄러울 치(恥)와 고칠 개(改)였어요. 공자와 제자 자로 간의 이야기인 지과필개(支過必改)도 떠오르고요.


그래서 그럴까요? 책의 홍보 문구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전하는’ 교양 한자 에세이에요. 요즘 세상에서 인간의 도리를 경시한다고 느끼시나요?


그런 편이죠. 다만 독자들이 도덕이나 윤리를 훈계하고 가르치는 책으로 읽을까 우려가 돼요.


고전을 이야기하면 일단 교훈적이라고 느끼죠.

그런 의도에서 쓴 건 아니거든요. 도리어 인간됨이라는 걸 제 나름대로 질문을 던진 거였어요. 흔히 고전을 ‘사람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가르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추상적인 개념의 ‘인간됨’은 실체가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예의 바르고 정의롭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례하고 폭력적일 수 있잖아요.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인간됨을 이야기하는 건 상대적이에요. 상대적이라는 말은 결국 관계죠. 개인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에서 인간됨이 오는 것 같아요.


책에서도 관계를 중심으로 한자를 풀어 설명했어요.


예를 들어 흔하게 직장 내 회식 자리에서 상사 옆에 여직원을 앉히는 게 예의 바르다고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어요. 여직원 입장에서는 예의가 아니라 폭력이죠. 인간됨은 결국 관계에서 그 사람이 도리를 다하는지를 보는 게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인간됨 아닐까요?


선생님이 생각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이 담겼다고 해주셨는데, 독자에게 드러내면서 두려운 마음도 있으셨다고요.


사람이 다양하고, 보기에 선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면이 있어요. 자기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요. 그런 면에서 부담은 되죠. 사람들이 바라볼 때 이 책에 쓴 제 생각대로 제가 살았다고 볼 지도 모르잖아요. 사실 그렇게 살아서 쓴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고민이 있었고, 스스로 더 많은 문제제기를 한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닐까 싶어요.

 

 

낡고 오래된 것에서 새로움 찾기


주로 한자를 파자(破字)해서 한자가 어떤 뜻을 가지게 됐는지 썼어요. 강의하실 때도 주로 쓰시는 방법인가요?


독립적으로 한자만 강의한 적은 없고요. 강의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고하는 습관과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많이 이야기해요. 대개 주변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오히려 고전을 이야기할 일이 없어요. 한자 이야기를 잡담처럼 하죠.


파자가 한자 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무턱대고 외우는 방식보다는 의미를 새기니까요. 이미지가 남는 게 기억이 오래가잖아요. 파자해서 구성이나 의미를 새기면 이미지가 남더라고요. 제 나름대로는 한자를 공부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권하고 싶어요.


한자를 보면 볼수록 파낼 거리가 많아 보여요. 그런 면이 고전을 공부하는데도 연료가 되지 않았을까 싶고요.


한자는 한국어의 일부로 봐야 해요. 한글로 된 것만이 한국어가 아니에요. 한자는 오래전부터 우리 말속에 존재했고, 이미 한국어의 일부예요.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근대 이전에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정보,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지식을 어떻게 알겠어요. 한자를 쓰지 말자는 것은 사실 역설적으로 한자를 아는 전문가들의 지식 권력을 키워주거든요.


모두가 모르니까요?


아예 한문을 안 하면 모를까, 우리가 쓴 모든 근대 이전 책은 한자로 되어 있어요. 우리 역사와 우리 문화 자체인데 몰아낼 수 없죠. 한글만 쓰자는 건 한자를 아는 사람들의 지식 권력만 키워주는 거예요. 한자 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는 거죠.


젊은 나이가 지나서 한문 공부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보통 한문을 깨치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한문이나 동양고전을 공부하는 데는 특별한 방법이 없어요. 논어나 맹자로 공부하고 암송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리를 깨친다는 게 시간적으로 보면 보통 10년 걸려요. 전통적으로 공부했던 방식으로 보면 그래요.


통상적으로 천자문 이후 소학을 배우는 등 정해진 방식이 있죠.


제도권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따르는 길이 있죠. 그런데 한문 공부를 하면서 제도권의 길을 거친 사람들이 가진 고정적인 면을 우려했었어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고전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도 정통적이고, 거기서 벗어나면 일탈로 보는 경향이 있죠. 저는 정통에서 벗어나 집필 활동을 했기 때문에 훨씬 더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은 걸 발언하는 편이었어요. 제 나름대로는 고전을 공부하는 이유기도 한데, 단지 낡고 오래됐기 때문에 고전을 보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낡고 오래된 것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으니까 읽는 거죠.


새로운 것이라면 뭘까요?


제가 고민하는 문제, 우리 사회, 우리 시대가 고민하는 문제죠.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없고, 결국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건 과거뿐이에요. 낡고 오래된 것들 중에서도 참조할 가치가 있는 것만 고전으로 살아남는 것 같아요. 『사기』처럼 몇천 년이 흘러도 살아남는 게 있는가 하면 몇백 년 전 것도 없어지기도 하죠. 조선 시대의 『사기』 읽기와 지금의 『사기』 읽기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조선시대 지식인이 고민했던 문제와 우리가 가진 문제는 서로 다른걸요. 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런 것 같아요.


작가 소개를 보면 베네디토 크로체의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과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 철학을 바탕으로 글을 쓰신다고요. 옛것과 새것 사이 균형은 어떻게 잡으려고 하나요?


박지원 선생 시절에도 어떻게 옛것을 배워 익히고 다룰 것인가를 가지고 치열한 고민이 있었을 거예요. ‘법고’를 하는 방식은 두 가지인 것 같아요. 하나는 박지원 선생의 방식이에요. 옛것을 배우고 익히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걸 찾아내는 거죠. 또 하나의 방법은 아예 과거를 부정하는 거예요. 옛것과 낡은 것을 부정하고 거칠고 날 것 그대로라 하더라도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죠. 첫 번째 방법은 반드시 필요해요.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없으면 뭐가 새로운지도 모르고 방향을 잡을 수 없잖아요. 그러나 옛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만 가지고는 안 돼요. 어느 순간 옛것을 부정해야 해요. 그래야만 자기 게 나오는 것 같아요. 제 나름대로도 고전을 그렇게 읽으려고 하는데 그런 수준까지는 아직 못 왔어요.

 

세월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질 것 같아요. 점점 옛 것들이 많이 쌓여서 배우는 데 더 오래 걸릴 테니까요. (웃음)


맞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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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각으로 해석하는 한자


혐오할 혐(嫌)에 담긴 계집 녀(女) 자에서 차별 감정을 비판한 대목이 인상 깊었어요. ‘이제라도 그것들을 들여다봐야 할 때’라고 쓰셨는데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도 있듯이, 언어는 어떻게 보면 그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고나 감정이 표현되어 있어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지배적인 담론과 주류의 사고를 읽을 수 있잖아요. 계속해서 남성이 모든 걸 지배했던 사회였고, 좋은 건 자기들이 다 가지고 부정적인 건 희생양에게 뒤집어 씌운 결과물인 거죠.


한편으로는 계집 녀(女)에 담긴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현대에 와서 잘못됐다는 의식이 생겼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거겠다 싶기도 했어요.


맞아요. 지금 시각으로 계속 해석해야 해요. 조선 시대 사람들은 혐(嫌) 자를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저도 솔직히 한자를 오래 공부하면서도 왜 여기 계집 녀 자가 있는지 안 보였어요.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지고 나라가 망한다는 이야기들을 상식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했던 시절을 지나, 젠더 감성이 확산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니 비로소 이 글자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 거죠. 어떻게 보면 핍박받는 사람들이 자기발언을 계속 해야 문제의식이 생기고, 문제의식이 생겨야지만 당연했던 것들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자기애의 바탕에는 사랑이 아닌 미움이 존재한다’(101쪽)는 말도 흥미로웠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자’는 말이 요즘 트렌드인데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아요. 사람이 같을 수 없으니 구별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차별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같이 쓰고, 개성과 독선을 같이 쓰더라고요. 내가 내 멋대로 살고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는 걸 개성이라고 해요. 그게 남에게 피해를 주고 해꼬지를 하면 독선이죠. 자기애도 비슷한 것 같아요.


『문장의 온도』  독자 중에서 SNS에 책 구절을 올리신 분이 있었어요. 혐오가 담긴 말을 굉장히 많이 쓰시더라고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해도 자신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소신껏 하는 사람이라면서 이덕무 선생 글에서 그 내용을 찾더라고요. 독선을 개성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완전할 완(完)에서는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끌어내셨어요. 자기답게 살라는 말과 자기애는 차이점이 있을 것 같아요.


자기답게 산다는 건 그렇게 사는 다른 사람의 삶도 존중한다는 거죠. 용서할 서(恕)나 너그러울 관(寬)에 그 내용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남과 다른 나와, 나와 다른 남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존중해야죠.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차별하고, 상처 주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건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다들 힘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여유가 없는 거죠.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여유가 없어요.


한편으로 바랄 망(望)에서는 루쉰을 떠올리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박지원 선생, 중국에서 찾으면 루쉰, 서양에서 찾으면 니체, 이런 사람들을 좋아해요. 그런 분들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인간이 갈 수 있는 경계 끝까지 가면 몰락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인간의 가장 추악하고 어두운 면을 봤음에도 삶을 긍정한 분들이잖아요. 루쉰의 말 중에 ‘희망에 의지하지도 말고 절망에 좌절하지도 말라’는 말을 좋아해요. 희망도 절망도 실체가 없으니 자기 갈 길을 가라는 게 루쉰의 삶이나 문학이 던지는 메시지 같아요.

여러 한자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좋아하는 한자는 뭘까요?


두 가지예요. 하나는 고칠 개(改). 누구나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하고 단점이 있죠. 그걸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공자나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도 어떻게 보면 남보다 자기 잘못과 실수를 훨씬 많이 발견한 사람 같아요.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건 자기 단점과 잘못을 고치려고 했던 거죠. 실수나 잘못을 알았을 때 고치려고 했냐 하지 않았냐, 이 차이인 것 같아요.


나머지 한 글자는요?


용서할 서(恕) 자요. 우리가 용서를 그냥 봐준다는 의미로 보는데, 봐주는 건 묵과에 가까워요. 진심으로 그 사람에 대해 받아들이는 게 아니잖아요. 용서할 서 자는 같을 여(如) 자에 마음 심(心)자가 합해 있어요. 내 마음을 살피고 헤아려서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보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아프다면 자신도 아픈 마음이 드는 게 진정으로 용서한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내 마음을 헤아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내 마음을 알면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던지려고 한 메시지, ‘관계의 인간됨’이 용서할 서 자에 가장 잘 담겨있지 않나 생각해요.


최근에는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이덕무 선생과 관련한 글을 계획하는 게 두세 권 더 있어요.  『문장의 온도』가 이덕무 선생의 문장과 소품을 가지고 이야기했다면, 후속작으로 이덕무 선생의 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시의 온도』  탈고를 끝내 놨어요. 그 정도 하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덕무 선생의 글을 다룰 수 있을 것 같고, 하나는 이덕무 선생 평전을 계획하고 있어요. 최근 강의는 주로 사마천의 『사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요. 그것도 탈고해서 곧 출간될 예정이에요. 그게 나오면 본격적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가지고 제가 말씀드렸던 낡고 오래된 것 속에서 우리 시대의 문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문제, 또는 사회 문제, 이런 것들을 통해 지금의 숙제를 질문하고 모색해보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당분간은 사기를 중심으로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아요.


 

 

인간도리 인간됨을 묻다한정주 저 | 아날로그(글담)
인간의 형상과 본성을 본떠 만든 한자를 통해 ‘나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됨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여러 고전과 문헌을 바탕으로 그 답을 성찰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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