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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도 용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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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고, 소설가 임경선은 말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을 뒤흔드는 관계와 상황 속에서도 뒷걸음질 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을 말하는 일곱 편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엮였다. 임경선의 두 번째 소설집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영원히 평행선을 그을 어떤 관계”를 끊어내는 결단을 내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생을 밀고 나간다. 지극한 사랑 앞에서 거침없이 자신을 던지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로 놓아주고 돌아서기도 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가 임경선은 ‘용기’와 ‘정직’을 말한다. 스스로에게 정직함으로써 용기 있는 선택을 하는 것. 그럼으로써 “온전히 내가 주인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집필을 마무리할 즈음, 파킨슨 병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성실한 작가’는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를 떠나 보낸 후 한 달여가 지난 뒤에도, 그녀는 늘 이야기를 짓던 자리에서 우리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작가의 말이, 유독 묵직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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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쭉 잘 써질 때 멈춰요


『어떤 날 그녀들이』 이후로 7년 만에 출간된 소설집입니다.

 

그 사이에 장편을 두 편 썼으니까, 다음에는 단편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계속 장르를 바꿔가면서 쓰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머릿속의 여러 근육을 사용하는 느낌이에요. 독자들에게도 지루하지 않게 느껴질 것 같고요. 의도한 건 아니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는데요.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오히려 장편소설만 계속 쓰시는 분들이 대단한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장편과 단편, 소설과 에세이, 각각의 리듬이 다르잖아요. 호흡을 바꾸는 게 힘들지는 않으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한테 질려요. 그리고 똑같은 화두나 소재라고 하더라도 장편, 단편, 에세이로 쓸 것이 다 다르거든요. 그 용도에 따라서 분리하고 정리하는 것도 재밌어요. 저는 글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틀이 없어요. ‘이건 이렇게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게 아니고 그냥 하는 거예요. ‘이건 이렇게 써야 잘 쓰는 것이다’라고 정해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 심리적으로 구속되면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고, 그렇게 주저하면 쓸 수가 없어요. 기본 형식을 갖춰서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거죠. 저한테는 그걸 제어하는 심리적 방어벽이 없어서,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써요. 그 대신 스스로를 환기시켜주는 의미에서 매번 다른 장르로 바꿔가는 거죠. 

 

1년에 한두 권씩 계속 쓰셨어요. 한동안 쉬고 싶은 생각도 드실 것 같아요.


매번 생각하죠, 안식년을 가져야 된다고. 그런데 쉬는 걸 잘 못해요. 이번 주 초에도 조금 쉬었는데 너무 지루해요. 그래서 다음 책을 기획하고 있어요. 글을 쓰는 것도 일을 하는 것이고 힘들지만, 직장 생활에 비하면 불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직장을 오래 다녔는데, 조직 생활 할 때는 일 외에도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들이 많잖아요. 글 쓰는 건 일만 하는 거고, 그것도 양질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렇다면 ‘직장을 그만두니 이 일을 안 해도 돼서 정말 좋다’고 생각하시는 건 뭔가요(웃음)?


제일 좋은 건 조정하는 일을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 부서와 부서, 내부 팀과 외부 팀 사이의 조정 있잖아요. 부서장 자리에 있다 보니까 내부 상사한테 보고하고, 외부 회사랑 일하고, 다른 팀과 충돌할 때 조정하는 입장에 있을 때가 많았어요. 중간 관리자라는 게 그렇잖아요. 그 일을 잘한다고 해도 조금 버겁더라고요. 두 번째로 좋은 건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전화 통화하는 걸 싫어하거든요(웃음). 그리워하는 것들도 있어요. 회의할 때 아이디어 끌어내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면 팀원들도 즐거워하고, 그런 분위기 자체가 좋았어요. 같이 뭔가를 기획하고 실천해서 그게 잘 됐을 때, 그때 느끼는 희열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조금 그립고, 단체 산행 같은 것도 재밌었어요.

 

협업의 즐거움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은 그리우시겠어요. 작가는 홀로 일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니까요.


직장 생활을 12년 했으니까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못해요(웃음).

 

‘작가의 말’에서 처음 소설집을 썼을 때를 회고하셨어요. “아직 소설 쓰는 방법을 몰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고요. 이제는 “최소한 백지 앞에서의 긴장과 두려움은 사라졌다”고 하셨죠.


이제는 막막하지는 않죠. 특히 단편은 하나의 장면이나 단어가 떠오르면 한 호흡으로 써내려가니까요. 장편은 중간에 막힐 때가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면 솔루션이 생각나요. ‘아, 이거 어떻게 하지’ 하면서 계속 스트레스 받으면서 자는데, 아침에 보면 어떻게든 풀려있어요. 계속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머리를 조금 쉬게 해주거나 물리적으로 나를 다독거려주면 뭔가가 나와요. 희한해요. 어떻게든 앞으로 가게 돼 있어요. 중간에 막혀서 소설을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전체적으로 만들어놓고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건 그냥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쓰다가 막혀서 그만두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분들도 그러시지 않을까 싶어요.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글을 쓰시잖아요.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초조하지 않으세요?


마감이 있는 원고라면 항상 일주일 전에 마감을 해요. 강연 같은 경우에는 한 시간 전에 도착하고요. 지각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지금까지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어요.

 

정말 ‘성실한 작가’이시군요.


그냥 성격이에요. 급하고, 조바심 내고, 남한테 폐 끼치는 거 정말 싫어하고. 빨리 해치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할까요. 별로 좋은 거 아니에요(웃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내일 할 일을 오늘 하는 거예요. 마감이 닥쳤을 때 쓰면 글에 긴장감이 들어가서 더 좋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저는 이해 안 돼요. 그런 사람은 마감 전에 쓴 글이 없을 텐데 어떻게 비교해볼 수 있겠어요.

 

글이 잘 안 써질 때는 어떠세요?


오늘은 잘 써진다, 안 써진다, 그런 거에 대한 감이 별로 없어요. 소위 말하는 ‘영감이 떠올라서 쓰는 스타일’은 아니니까요. 대신에 그런 건 있죠. 장편을 쓸 때 썰매 타듯이 쭉쭉 나가면서 재밌게 쓰는 장면이나 상황이 있잖아요. 그럴 때는 오히려 멈추고 다음날로 미뤄둬요. 그러면 아침에 시작할 때부터 신나게 쓸 수 있으니까, 조금 더 밀고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거든요.

 


관계는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요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을 표제작으로 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곁에 남아 있는 사람’하고 ‘가만히 부르는 이름’이 제목 후보였어요.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소설집에 없기도 하고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더 낫다고 해서 이렇게 정했고요. 편집자와 북디자이너가 제일 마음에 들어 한 작품이기도 했어요. 사실 소설의 주인공에게 저자의 어떤 부분이 투영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데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의 ‘영미’ 같은 경우는 저의 모습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유일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어요.

 

‘영미’처럼 단호한 결정을 잘 내리실 것 같은데요.


이렇게 오랫동안 한 남자한테 매여 있는 건 안 하죠. 저는 ‘준호’의 와이프 스타일이죠. 얄미운 스타일(웃음). 그런데 영미 같은 습성을 가진 여자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정이 많고, 잘 퍼주고, 약간 헛똑똑이 같은.

 

읽으면서 감정 이입이 되더라고요(웃음).


그런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제가 상담 사연도 많이 받았었잖아요. 영미 같은 분들을 보면 속 터지는 것 같고 그렇지만(웃음),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좋으니까. 그리고 남자 쪽에서도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고, 하다 보니까 희망고문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잖아요. 남자들이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고, 의존적이 되고, 기대고 싶어 하는 게 있잖아요. 자기 아내한테 모든 걸 다 받을 수 없으니까 다른 여자들한테 챙김을 받으려는 욕구도 있고요. 또 여자들은 품어주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게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계속 애매한 상태로 끌고 가는 데에도 엄청난 각오가 필요해요.

 

영미는 대학생 때부터 준호에게 마음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준호가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될 때까지도 곁을 못 떠나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까 ‘내가 저 사람을 더 잘 알아’라고 하는 마음이 있어요. 정, 책임감, 연민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있죠. 그리고 자기가 알던 찬란했던 모습의 남자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걸 보는 게 너무 속상한 거예요. 안타깝고. 정말 모든 여자들이 좋아하던 너무 너무 빛나던 모습으로 그 남자를 기억하는데, 현실 속에서는 많이 치이고 머리카락도 조금 빠지면서 나이 들어가는 거죠. 그러면서 날카롭던 사람이 둥글둥글해지고 자기한테도 잘해주는 부분이 있지만, 항상 처음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기도 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복잡해지는 거예요.

 

부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같이 나이 들어간다는 게 무서운 것 같아요. 그 과정을 서로 지켜본 사람들이 헤어지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요. 같이 나이 들어간다는 건, 그 사이에 있었던 모든 희로애락을 서로 안다는 거잖아요. 상대가 마냥 멋있어 보이거나 한 쪽의 단면만 보는 게 아니라, 복합적인 면들을 다 보고 견뎌낸 거예요. 추한 모습까지다 보면서도 그걸 견뎌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죠. 그렇게 되면 웬만한 일로 헤어질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세상도 알 만큼 아는 정말 어른이 되면, 이성 사이에도 말이 너무 잘 통해요.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규정지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오히려 규정지어지는 관계와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도 다 공유할 수 있게 돼요. 얼마나 친밀하고 필요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못 헤어지는 거예요.

 

결국 영미도 결단을 내리는데요.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이, 도망을 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회피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밀고 나가죠. 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으셨어요?


무엇에 대해서 썼냐고 물어보신다면, 정직과 용기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용기가 있으려면 정직함이 바탕이 돼야 해요. 자기 자신한테 정직해야 하는 거죠. 안 그러면 용기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예요. 중요한 건, 용기의 모습이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거예요. 성취하고 정면 돌파하는 것도 용기이지만 무언가를 깨닫는 것, 내가 변하는 것, 아예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것도 다 용기예요. 사람들은 그건 용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딱 끊어주는 것도 용기거든요. 그게 결국은 자기 감정에 충실한 거죠. 그렇게 해야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 수 있어요. 스스로 선택하고 상황을 움직이는 변화의 순간 같은 게 있는데, 그게 인생에서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아름다운 순간 같아요. 그것이 슬픔을 동반하든, 고통을 동반하든, 희열감을 동반하든, 자기가 결단을 내리는 것. 저는 그런 결기가 너무 좋아요. 그래야 자기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것 같고,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씀을 듣다 보니 「나의 이력서」의 주인공 ‘소영’이 생각나요. “항상 관계에서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는” 수동적인 사람이었는데, 나중에는 “먼저 이별을 통보함으로써 자비를 실천하기로” 결심하잖아요. 소영으로서는 엄청난 모험을 시작한 거죠.


소영은 관계에 있어서 자신감이 별로 없는 스타일이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그리고 ‘지훈’이라는 남자가 처음에는 자신을 다 품어줬는데, 그래서 소영도 ‘이 사람이 내 옆에 계속 남아 있을 사람이구나’ 생각했는데, 지훈이 자신의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달라진 거예요. 지훈을 탓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약해지고 바보 같이 굴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래, 내가 예전에 힘들었을 때 네가 나를 많이 품어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너를 품어줄게’라고 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소영은 그렇게 하지 않은 거죠. 소영은 항상 강해지고 싶은 아이였어요. 여자라서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을 초월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아이죠. 그래서 지훈이 약하게 구는 걸 못 참는 거예요.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투영인 거죠. 소영은 자신이 약해지는 것도 용서 못할 스타일이잖아요.

 

강인하지 못한 지훈을 지켜보는 게 힘들었을 수도 있겠어요.


지훈에 대해서 너그러워질 수가 없고 ‘내가 왜 너그러워져야 돼? 자기가 못난 건데?’ 이렇게 된 거죠. 이성적으로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사랑에 소질이 없나? 나는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여자인 걸까?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하면서 그냥 포기해버리는 거죠. ‘내가 사랑이 부족한 건가’ 고민도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지 않기로 한 거예요. 그것도 하나의 방식이죠. 다 품어주고 갈 필요도 없는 거고,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인 건 아니거든요. 소영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그 에너지를 일적으로 쏟아 붓는 거예요.

 

비슷한 고민을 하신 분들도 꽤 계실 것 같아요. ‘상대의 저런 모습까지 다 끌어안아야 하는 건가?’라는.

 

헤어질까 말까 기로에 섰을 때 ‘이걸 참아야 되나 끊어야 되나’라는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저 사람의 최악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되는 건가? 그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닌가?’ 하고요. 그게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거예요. ‘나는 도대체 뭘 원하는가’, ‘내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속 품고 갈 것인가, 아니면 놔줄 것인가’ 생각하는 거죠. 관계는 다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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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음’을 사랑해요


이번 소설집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치앙마이」의 ‘희진’도 좋아하고 「우리 잠든 사이」의 어머니도 좋아해요. 희진은 무모한 일인 걸 알면서도 뛰어 들어가는 열정 같은 게 있어요.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성숙함도 가지고 있고요. 굉장히 강한 여자예요.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데, 희진이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영욱’의 딸 ‘슬아’를 만나는 장면이에요. 사실 그 씬을 쓰고 싶어서 쓴 소설이에요(웃음). 어떻게 보면 서로 안 좋은 관계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일이 꼭 그렇지도 않거든요. 저는 가능하면 모든 장소에 사랑이 있기를 바라요.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모든 종류의 사랑을 향해 열려 있으신 게 느껴져요. 그 점이 참 좋아요.


다른 부분에서는 엄청 스토익하고 범생이스럽거든요. 일과 관련해서는 그런데, 사랑만은 완전히 관대하고 완전히 열려 있어요. 너무 극단적인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부분도 있어서 제가 사는 것 같아요. 어떤 형태든 사랑하면 다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과정에서 남한테 상처를 안 주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어쩔 수 없음’을 너무 사랑하고요.

 

『곁에 남아 있는 사람』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치앙마이」에 있었던 것 같아요. 희진이 치앙마이의 여성 교도소를 찾아갔을 때, 자신이 ‘그저 타인의 불행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곳에 갔다는 걸 깨닫잖아요. ‘이런 마음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고 ‘나는 이런 마음을 가진 적이 없을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누구나 다 있죠. 그리고 우리가 남의 불행을 소비하고 살잖아요. 사실 남의 행운에 기뻐해주는 게 쉽지가 않아요.

 

희진이 교도소를 찾아가게 만드신 이유는 뭐였나요?


감정적으로 바닥을 한 번 쳐야 될 것 같았어요. 그래야 영욱이 돌아왔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끝나도 돼’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끝을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함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지 않으면 적당히 타협할 것 같았어요. 어떻게 보면 희진과 영욱 둘 다 완벽주의자인 거예요. 완벽주의자들끼리 만나서 사랑을 하면 극한의 희열감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결합을 하는데, 또 완벽주의 때문에 다시 못 보게 되는 경우도 생겨요. 그런데 정말 미칠 것 같은 사랑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그 이하로는 타협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혼자 살아도 과거에 사랑했던 기억으로 버틸 수 있는 거고요. 그럴 걸 알면서도 가는 거죠. 불나방이 불길로 달려드는 것처럼. 그렇게 끝까지 치닫는 사람들이 있어요. 적당히 하는 게 안 되는 사람들. 그것도 인생이죠.

 

지난해에 네이버 오디오클립 <임경선의 개인주의 인생상담>을 진행하셨어요. 상담을 재개하신 게 6년만이죠?


그렇죠. <라디오천국> 끝난 후에 처음 한 것 같아요. 그때는 다시는 상담을 안 하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저를 글로 기억하는 것보다 상담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고 ‘이건 조금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6년 동안 할 수 있는 한 책을 많이 내면서 제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이 생긴 것 같고요. 사실 그 전에는 ‘내가 방송 덕을 많이 본 게 아닌가, 정말 내 글을 좋아해서 책을 사서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6년 동안 에세이와 소설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조금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고요. 무엇보다 ‘남들이 나를 찾아줄 때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웬만하면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남들이 잘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해야겠다, 가능한 한 나누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어요. 아마 나이가 들어서 그랬을 거예요. 이 나이에도 날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뭐가 됐든 나의 어떤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고마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시간이 흐른 만큼 변화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떠세요?


사람들의 고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고요. 저도 기본 틀은 같은데, 인생을 조금 총체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는 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시적인 고민에 대해서 미시적인 대답을 해줬다면, 지금은 조금 더 거시적인 입장의 이야기까지 곁들여서 하게 되는 거죠.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 거예요. 조금 뒤에서 바라봤을 때 생각되는 것들을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달에 첫 번째 번역서  『나비』가 출간됐어요. 원작자 에쿠니 가오리와 번역자 임경선의 호흡이 다 들어가 있는 책이에요.


책에 담긴 건 100% 에쿠니 가오리의 호흡이죠. 저는 거기 들어가면 안 되죠. 그런 부분은 고민도 안 했어요. 제가 번역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무조건 그렇게 해야 되는 게 번역자로서의 윤리에 맞다고 생각해요. 긴 글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비』는 짧은 동화이기도 하고, 게다가 아우라가 있으니까요. 에쿠니 가오리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소설은 거의 다 읽었어요. 몇 편의 소설은 굉장히 좋아하고요. 연애의 절절한 감정, 정말 심장이 흐드러지는 것 같고 뜨겁고 부스러질 것 같은 감정은 에쿠니 가오리만큼 잘 묘사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마무리하고 계신 원고가 있죠?


『태도에 관하여』의 개정판이 곧 나올 거예요. 출간된 지 3년이 넘었거든요. 업데이트 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요. 책에 보면 현실에서의 양성평등, 남편과의 가사분담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는데 요즘 현황에 대해서 싣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곁에 남아 있는 사람임경선 저 | 위즈덤하우스
다양한 삶의 조건을 가진 등장인물들은 온전히 자신이 주인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저마다의 고독한 싸움을 한다. 그 과정에서 고립과 고독의 시대에 자신의 곁에 남아 있을 사람을 깊이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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