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곧 방언은 사라지고 있는 걸까. 『방언정담』의 저자 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전공) 교수는 “방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 방언을 ‘표준어와 다른 말, 시골말, 오래된 말’로 보면 방언이 사라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방언을 ‘한국어를 이루는 하위의 모든 말’로 보면 방언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교통, 통신, 방송, 교육의 발달에 따라 각 지역에서 쓰는 토속적인 말이 표준어로 대치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렇게 변한 말 또한 방언이다. 그리고 세대, 성별, 계층 등의 사회적인 변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말도 모두 한국어를 이루는 방언이다.
남도에서 두만강에 이르기까지, 한성우 교수는 20년 남짓 방언 기행을 이어오고 있다. 중학교 시절, 국어선생님의 영향으로 국어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대학에서 음운론, 방언학을 전공하게 된 후부터 틈만 나면 방언 조사를 떠날 궁리를 한다. 알 수 없는 부호가 깨알같이 적힌 노트 때문에 서툰 간첩으로 의심을 받기도,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하지만, 그는 방언 기행이 마냥 즐겁다. 사람들은 방언이 종내 사라질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성우 교수는 “방언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시골 사람들만,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만 사투리를 쓰는 게 아니라 서울 사람들도 서울 사투리를 쓴다. 방언에는 우리 삶의 정서와 역사, 사회의 면면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고 말한다. 『방언정담』은 그가 방언 연구를 하며 오간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방언을 통해 바라본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책이다. 방언에 대한 정다운 이야기, ‘방언 인문학’이라는 타이틀답게 글을 읽다 보면 사람이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 버려질 역사가 없듯이, 방언의 정서도 사라질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마음까지 통하는 소통 원한다면, 방언 알아야
점점 방언을 듣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촌스러운 말이라 여겨지고요. 국어학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우리가 일상에서 늘 쓰는 말이 곧 방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언을 마치 저 먼 곳에서 쓰이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죠. 저 먼 곳에 있는 분들은 자신들의 말을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말을 대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낮춰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우리 모두의 말이 방언인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 봤습니다. 결국 방언과 관련된 읽기 쉬운 글을 써서, 잘 모르고 있었거나 무시하고 있었던 우리 모두의 말을 수면 위로 떠오르도록 해 보려 했습니다.
『방언정담』을 읽고 한 편의 단편 소설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개성 넘치는 언변을 가지고 있던데요. 방언은 사람, 사연을 통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20년 동안 방언 조사를 하면서, 제보자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신뢰할 만한 제보자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었을 텐데요.
우리말을 구성하는 모든 말이 방언이라고 본다면, 방언 사용자를 만나기 어렵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조사방법에 따르면 제보자는 3대 이상 대대로 한 곳에 거주했어야 하고, 3년 이상 타지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으면 안 되고, 학력이 높아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처럼 이동이 잦고, 교육수준도 높아진 상황에서 이러한 조건에 맞는 제보자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칠순이 넘은 어르신들도 대부분 일을 하시는 상황이라 이 분들을 몇 날 며칠 붙들고 조사를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방언 사용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제보자가 없는 것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기존의 조건을 완화하거나 새로운 방언 연구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환갑만 지났다면 적절한 제보자라고 봤지만, 평균 수명이 늘어난 요즘은 여든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도 달라진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주 세대와 타지생활 경험 등은 완화를 해야 조사가 쉬워질 듯합니다. 그러나 조사가 아닌 방언을 듣는 것, 혹은 방언 사용자를 만나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 않습니다. 귀를 열고 기울이면 들려오는 모든 말들이 방언입니다.
‘진짜 서울깍쟁이’ 편에 나오는 임귀동 할머니의 사연이 뭉클하더라고요.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무수한 역사가 담겨있지만, 우리가 할머니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소통할 수 없을 텐데요.
임귀동 할머니는 말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사투리가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말과 사람, 말과 삶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박또박 조용조용 말씀을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 속에서 조용하지만 뚝심 있게 당신이 생각하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며 사셨습니다. ‘비가 오신다.’란 말에서 ‘오신다’는 말을 듣지 못하면 간절히 비를 기다리는 옛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총에 맞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몸을 ‘시체’가 아닌 ‘신체’라고 표현하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하면, 생명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사실 ‘오신다’와 ‘신체’는 생소한 말도, 이상한 발음도 아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다만 귀로 들리는 그 소리를 마음으로 받아내지 못하니, 말하는 사람의 참뜻을 잡아내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귀로 들리는 소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방언을 이해할 수 있겠네요.
지역에 따라 다른 말을 쓰거나 세대에 따라 다른 말을 쓰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말은 이상한 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되어 버립니다. 이래서는 올바른 소통이 되기 어렵습니다. 결국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표준어를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마음까지 통하는 더 깊은 소통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말인 방언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방언을 잘 알고 지켜내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중국 단동에서 만난, 따냐 할머니 이야기도 기억에 납니다.
따냐 할머니는 우리 민족의 이산의 아픔과 언어의 통일 문제에 대항 큰 가르침을 주셨어요. 어린 나이에 고향인 평북 의주를 떠나 함북 회령, 러시아, 중앙아시아, 몽골, 중국을 떠돌았던 그 삶은 우리 민족의 이산의 삶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이산과 말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 제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죠.
방언 기행 중에 두 할머니와 함께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두만강변에서 만난 소녀 소매(小梅)를 꼽고 싶습니다. 소매는 방언조사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불렀던 ‘마음 다리 놓자야’는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네가 오고 내가 가는 마음다리 놓자야’라는 가사는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지역과 세대 등에 의한 언어 차이, 이산과 분단으로 인한 언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해답을 주었습니다. 눈과 귀로는 언어의 차이가 보이고 들릴지는 모르지만 마음의 다리가 놓인다면 그러한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하고 하나 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식, 혹은 연변식 창법에 소박한 가사와 멜로디의 노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을 울리고, 거기에 또랑또랑한 소매의 모습이 겹칩니다.
서울 사람도 서울 사투리를 쓴다고 하죠. 특별히 매력적으로 느끼는 방언은 무엇인가요.
방언을 연구하면서 특정 방언에 대한 호불호를 말하는 게 부적절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울말과 육진말이 제게는 특히 매력적입니다. 서울말은 표준말로서의 서울말이 아니라 사투리로서의 서울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토박이들의 서울말을 들어보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습니다. 깔끔하면서도 조근조근한 말투, 풍부한 어휘와 표현 등은 배우고 싶고, 또 할 수 만 있다면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함경도말은 거침없는 말투가 좋습니다. 제 고향말인 충청도말은 무언가 뒤로 감추거나 바닥에 깔고 말을 하는데 함경도말은 그런 것 없이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12살 이후 내내 서울에서 살았지만, 간혹 출신지(충남 아산) 말이 습관적으로 나올 때가 있나요?
‘그류, 그려, 기여’ 이 말들은 제 입에 꽤 붙어 있는 충청도 말입니다. 충청도에서 산 기간이 그리 길지 않고, 대학 입학 이후에는 여러 방언을 접하다 보니 고향말을 잘 안 쓰게 되거나, 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일부러 쓰려고 하지 않으면 충청도 말이 입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높여서 말할 때는 ‘그류’라고 말하고 그러지 않아도 될 때는 ‘그려, 기여’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진심을 담은 긍정의 답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말을 할 때는 이렇게 말하지 못하지만 이런 사투리들이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표준어가 방언을 밀어내는 상황
23년만에 한글날이 공휴일로 재지정이 되었습니다. 국어학자로서 한글날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는 푸근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면을 생각해 보면 서글픈 말입니다. 한가윗날을 뺀 나머지 날은 즐겁지도, 풍요롭지도 않으니 이 날 하루만이라도 기쁘게 보내라는 것이겠지요. 사실 생일을 비롯한 무슨 기념일을 따로 챙기는 것보다는 평소에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 년 내내 관심도 안 가지다가 한글날이 다가오면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넘쳐나는 듯 호들갑을 떠는 게 불만일 뿐입니다. 평소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하니 기념일을 정해서 단 하루만이라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현실이 된 것이 서글플 따름입니다. 365일을 잘해 주고 생일날 특별히 더 잘 챙겨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더 행복할 듯합니다.
표준어에 대한 시각도 궁금합니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표준어는 꼭 필요하지만, 표준어 사용을 강조하면 방언이나 지역문화는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을 텐데요.
표준말에 대해서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표준말이 널리 보급된 것은 누구와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더 넓게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표준어는 방언과 공존하는 존재가 되어야지 방언 위에 군림하거나 방언을 억압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표준어가 우리말의 전부도 아니고, 방언보다 더 우월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표준어 제정과 보급 과정에서 방언이 열등한 말 취급을 받거나 극복해야 하는 말로 대접을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공적인 소통을 위해 표준어는 더 널리 보급이 되어야 하고, 우리말의 소중한 자산의 유지를 위해서 방언도 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방언의 미래는 어떻게 보고 있나요? 표준어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준다는 것을 달리 생각해 보면,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의 원활한 소통을 생각한다면 표준어 사용자가 늘어나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볼 이유가 충분합니다. 가뜩이나 남북으로는 휴전선으로 분단이 되고, 동서로는 지역감정으로 반목을 겪는 상황에서 언어적으로나마 소통이 잘 된다면 분단과 반목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표준어가 방언을 밀어내는 상황입니다. 표준어가 보급되면서 방언은 나쁜 것, 오래된 것,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함께 퍼져나가게 됐는데 이러한 시각이 극복되고 표준어와 방언이 공존하게 된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의 방언 사용자가 줄어들고 방언이 결국 소수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는 염려에 대해서도 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언은 점차 잊힐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습니다.
방언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전통적인 말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을 텐데 이에 대한 인위적인 노력은 반대합니다. 말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에 민속촌에 가둘 수도 없고, 박제해서 전시할 수도 없습니다.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변화라면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 혹은 언어 정책 입안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위치라면 열심히 조사하고 그것을 자료로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글 그리고 우리말에 대해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는 무엇일까요.
글과 말에 대해 동시에 물으셨으니 글, 더 정확히는 글자, 더욱 더 정확하게는 한글과 우리말에 대한 구별부터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묘하게도 우리들은 한글과 우리말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은데 글자와 말은 엄연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인 훈민정음이 창제된 날을 기념하는 한글날에 우리말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합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것은 우리말을 정확히 적을 수 있는 글자이지 우리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한글날이 되면 잘못된 말, 외래어와 외국어 남용, 젊은이들의 말을 비판하면서 ‘세종대왕께서 통곡하신다.’와 같은 유형의 선정적인 말들을 많이 합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우리말을 잘못하는 것에 대해 세종대왕께서는 별 관심이 없으시고, 당신이 만든 글자로 외래어와 외국어를 정확하게 적을 수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실지도 모릅니다.
한글에 대한 과신이나 엄살도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것은 이미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미 공인된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한글을 수출해야 한다든지, 한글을 공용문자로 보급해야 한다든지 하는 주장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실패했고 앞으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한글파괴’라는 식의 엄살도 그만 부려야 합니다. 소위 외계어라 불리는 이상한 표기나, ‘ㅋㅋ, ㅠ.ㅠ’를 보고 한글 파괴 운운하는데 이건 오히려 한글이 가진 장점을 드러내는 것이지 한글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ㅋㅋ’만으로도 웃음소리를 나타낼 수 있는 것도 한글의 장점이고, 한글 자모의 조형미가 뛰어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표현할 수 있는 것도 한글의 장점입니다.
한자 및 한자어, 일본어, 영어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한자 및 한자어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이 공유하고 있는 방대하고도 소중한 자산입니다. 이것을 우리말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동아시아 전체를 품고 동아시아와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불행한 역사 때문에 외래어가 많이 유입되거나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위축되지 않고 포용할 수 있다면 그리 민감한 문제는 아닙니다. 일본말 잔재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고, 영어 간판이 거리에 넘치더라도 우리말이 영어에 밀려날 일은 없습니다. 우리말에 대한 위축된 태도도 극복해야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닌 ‘다른 말’로 받아들인다면
요즘 세대들의 국어 오용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여드름과 감기의 비유를 드는 것이 좋겠네요. 사춘기를 보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드름을 경험하는데 이것이 성장 과정의 호르몬 변화에 의한 것이니 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젊은 세대들의 언어 또한 이런 과정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새로운 말, 남들과 다른 말, 자신들끼리의 말, 자극적인 말이 그런 것인데 이러한 말들은 젊은 시절에 잠깐 나타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말들 또한 세대에 따라 나타나는 방언으로서 우리말의 일부입니다. 세대에 따른 ‘틀린 말’이 아닌 ‘다른 말’로 받아들이면 조금 더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감기의 비유는 어떤 의미인가요?
감기는 의사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치는 것입니다. 주사와 약이 증세의 호전에 도움을 주기는 해도 근본적인 치료는 하지 못합니다. 언어 문제에 대한 교육과 정책 또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의 말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리 지적을 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교육을 하더라도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드름처럼 돋아나는 것이니 막을 수도 없고, 감기와 같은 것이니 이것에 대한 해결은 그것을 쓰는 사람들 스스로가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들이 의식적, 인위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는 언어 자체의 속성과 힘이 있습니다. 오남용으로 보일지라도 언어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언어 자체의 속성입니다.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도 언어 자체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변화, 혹은 새로운 것이 무조건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버릴 것과 살아남을 것이 결정됩니다. 『방언정담』‘옥떨메의 새로운 도전’에도 썼듯이 ‘노찾사, 엄친아’와 같은 것들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세대에까지 퍼져나갑니다. 반면에 해괴한 외계어, ‘흠좀무, 미지왕’과 같은 것들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결국 언어 자체의 속성과 힘에 기대어 정책을 입안하고 교육을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음운론, 토박이말에 대한 책을 비롯해 『미래를 준비하는 글쓰기』 『문제해결력을 키우는 이공계 글쓰기』등의 글쓰기에 대한 서적도 출간했는데, 앞으로의 집필 계획이 궁금합니다.
『방언정담』속의 ‘샴을 프는 법’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제게도 많은 의미를 주기도 합니다. 샘은 채워지지 않으면 물을 퍼 낼 수 없는 법인데 이번 책은 고인 물 중에서 퍼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소재를 방언에 한정하지 않고 우리말 전체로 확장하면 아직도 쓸 얘기가 꽤 있으니 기회가 되면 엮어 볼 생각입니다. 그동안 책의 집필과 출간에 대한 욕심이 좀 있어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에 담긴 비밀을 소설 형식으로 써 놓은 것이 있는데 좀 더 다듬고 청소년 버전으로도 바꿔 출간을 모색해 볼 생각입니다. 글쓰기 분야에서는 이공계열 글쓰기가 먼저 나왔는데 인문계열 글쓰기, 혹은 모두를 위한 글쓰기 책을 내년 중에 출간할 계획입니다.
방언 조사, 방언 기행도 계속 이어지나요?
물을 퍼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조사와 연구도 부지런히 해야 다시 퍼낼 것이 생기겠지요. 국립국어원의 해외동포 언어 실태에 대한 조사를 2012년도에는 했다가 올해는 하지 못했는데 내년에는 다시 할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게 책임이 맡겨진 지역인 충청, 경기 등의 중부 방언과 북한 방언에 대한 조사는 조사를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할 것입니다. 2009년부터 시작한 인천 토박이말 조사, 강화 토박이말 조사, 인천 연안 도서 토박이말 조사와 연구가 올해로 끝납니다.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먼 바다 섬의 조사가 남았는데 어떻게든 기회를 마련해 조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북한 지역에 대한 조사는 통일 이전이라도 조사의 길이 열리게 된다면 가장 먼저 가고 싶습니다.
어떤 독자들이 『방언정담』을 읽으면 좋을까요?
욕심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방언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그 말의 주인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우리말을 아는 모든 분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쉽고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쓰고자 했지만, 그래도 독자를 몇 유형으로 나눠 책에 담긴 몇 개의 꼭지를 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언을 통해 말은 물론 사람의 향기까지 맡고 싶은 독자에게는 ‘진짜 서울깍쟁이, 여쁜 아름다움, 말의 화석, 마음의 화석, 세 여인의 향기’ 등을 권하고 싶습니다. 글의 주인공이 우연히 대부분 여자인데 여성들의 감성과도 잘 어울릴 듯합니다. 방언을 통해 우리말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싶은 독자에게는 ‘뙡밭마을의 비밀, 엄마는 오지 않는다, 국어학자의 직업병, 욕설의 방언학’ 등을 권합니다. 우리말의 표기와 발음, 그리고 어원에 대한 얘기가 재미있게 펼쳐져 있습니다. 새로운 말, 젊은이의 말에 대한 보다 포용력 있는 시각을 갖고자 하는 분들은 ‘된소리 소리의 푸른 바다, 미켈란젤로와 드라이쏠의 대화, ‘옥떨메’의 새로운 도전’ 등을 읽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말들도 나름대로 모두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파악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통일 이후의 언어 문제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읽으면 좋을 꼭지도 있지요?
‘두만강 작은 매화의 노래, 쌤 아즈바이의 고향, 하늘 가매와 밥 가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 요금 2만원, 얼룩말일까? 줄말일까?’ 등을 읽으면 좋을 듯합니다. 북한말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언어의 통합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공유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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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언정담한성우 저 | 어크로스
누구나 사투리를 쓴다. 시골 사람들만,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만 사투리를 쓰는 게 아니라, 서울 사람들도 서울 사투리를 쓴다. 그 다양한 방언에는 우리 삶의 정서와 역사, 사회의 면면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남도에서 두만강까지, 저자가 방언 연구를 하며 오간 길에서 만난 사람들, 머문 풍경들이 우리 주변의 이런 방언들을 깨운다. 방언학을 쉽게 녹여낸 저자의 이야기들은 그저 흘려들었던 사투리를 다시 듣게 하고, 사투리의 행간에 담긴 더 많은 뜻을 듣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