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포크가 박물관 안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달리는 기차 안에 있어야지.” 연한 파스텔 톤의 음악 감성과는 다르게 박학기는 소탈하고도 분명했다. 자신의 음악적 신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확신이 있었고, 가족과 친구를 추억할 때도 막힘이 없었다. 그 말들은 그러나 동시에 딱 그의 음악들처럼 투명했다.
통기타가 젊은이들의 품에 다시 안기고 포크가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의 한 부분으로 부활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요즘, 박학기의 존재감은 어느 때보다 남다르다. 포크 역사의 산증인이면서 그처럼 현재를 누비고 있는 뮤지션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는 10월 26과 27일 이틀간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앞두고 박학기를 만났다. “음악도 스트레칭과 같아요. 계속 해야죠. 쉬면 안 돼요”라는 그에게 비치는 건 포크의 과거가 아닌 포크의 미래였다.
얼마 전 발매한 미니앨범에서 이것만은 보여 주겠다 하는 게 있었다면?
포크 안에서도 대중적인 장르와 아닌 게 있잖아요. 포크라고 하면 (김)광석이나 (안)치환이로 대표되는 대중적인 장르가 보통 먼저 떠오르는데, 사실 저는 퓨전적이면서도 기타의 맛을 내는 노래를 원래부터 하고 싶었어요. 5집의 「나의 길」 처럼요. 그런 게 진보적인 포크라고 생각했고, 이번에도 그런 걸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Yellow fish」 같은 곡도 그렇고 핑거스타일이 강조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왜 핑거스타일을 내걸었는지?
우선은 제가 좋아하니까요. ‘박학기는 지금 이런 걸 좋아하고 있구나’를 보여 주기 위함이 첫째 이유예요. 그리고 사실, 과거에는 선배들이 저더러 ‘기타소리가 달라’라고 그랬어요. 예전에 한창 다운타운에서 노래할 때, 거기서 보사노바 주법을 제가 제일 먼저 했었거든요. 「안토니오 송」 으로 유명한 마이클 프랭크스(Michael Franks)란 가수를 좋아했는데 그가 쓰던 주법이 당시엔 신기한 것이었어요. 재즈에서는 많이 했지만 포크에서는 잘 안 쓰는 주법이었는데, 저는 그걸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 하모닉스도 많이 했고. 어쩌면 그때 가지고 있던 걸로 지금까지 해 왔는지도 모르죠. 데뷔 전에는 레퍼토리 팝송이 200곡 정도 있었으니까요. 그때 해 놓은 것으로 지금까지 그냥 우려먹었던 걸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뜨고 보니까 제가 모르는 게 있더라고요.
변화가 절실했던 거네요.
그러니까 기타를 잘 치고 못 치는 걸 떠나서 어떻게 치는지 모르는 게 있다는 것. 그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기타라는 게 이만큼 있는데 저는 그 일부만 갖고 살았다는 거잖아요. 늘 하던 것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습관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습관! 줄을 다르게 맞추고,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고. 그러니까 또 제가 잊고 있던 열정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런 게 좋아서 이 직업을 택했는데 이걸 안하고 있었구나. 남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러면서 제 자신이 즐거워지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거죠.
핑거스타일의 매력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든 나 혼자서도 기타 한 대만으로 음악이 해결된다는 느낌이죠. 내가 노래를 만들고 거기에 어울리는 기타를 치면서 그 모든 게 어우러진 걸 한다면 얼마나 재밌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또 비주얼의 시대잖아요. 우리(포크)가 밀리는 게, 보여 주는 게 너무 없어요. 그런데 핑거스타일로 멜로디 잡고 바디도 치고 반대로 튜닝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면 또 비주얼이 괜찮잖아요. ‘포장이 뭐가 중요해’라고도 하는데, 사람 외모도 실은 포장이잖아요. 저는 포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면 더 잘 치겠죠? ‘핑거기타를 연주하는 박학기’라고 소개할 때 부끄럽지 않을 때가 오지 않겠어요? 그때 제2의 음악 인생이 올 거 같아요.
올해로 가수 경력 25년의 오랜 커리어를 쌓아 온 입장에서 가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기능적인 건 아니에요. ‘나가수’적인 노래가 있고 아닌 게 있잖아요. 에릭 클랩튼이 나가수 나가면 단번에 떨어질 거라는 우스개도 하는데, 음정 피치 그런 것보다 그 사람의 개성이랄까. 남들과 비슷하게 그저 잘하는 것보다는 한번 들었을 때 ‘이건 누구야’라는 생각을 줄 수 있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raits)나 에릭 클랩튼 노래 대부분이 그래요. 아무나 부를 수 있는 노랜데 다른 사람이 부르면 책 읽는 것 같거든요. 그런 건 자기만이 낼 수 있는 맛이잖아요. 그런 건 타고나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가수에게는 존재감 있는 목소리, 다시 말해 개성.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자신의 노래 중 그런 자기만의 맛이 가장 잘 나타난 노래는 뭐죠?
「향기로는 추억」 이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저만의 스타일이 가장 드러난 것 같아요. 노래 창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호흡을 많이 섞은 소리를 잘 쓰거든요. 그게 잘 나타난 것 같아요.
호흡을 많이 섞는 것도, 기교적인 측면보다는 가진 힘 자체가 있어야 할 것 같네요.
그렇죠. 힘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 돼요. 버리는 호흡이 많아서 호흡 자체도 많이 필요하고. 성대가 이만큼 열려 있으면 열린 만큼을 다 써야 해요. 그런데 음악이란 게 결국 들어서 좋아야 하는 거거든요. 거기에 자기 스타일이 있어야 하는 거고. 결국은 내 기분이 우울하면 그런 정서를 나타낼 수 있도록 창법을 가져가야 하는 건데, 저는 입자가 보이는 것처럼 노래하려고 해요. 전 입자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데뷔 때 제가 ‘파스텔 톤 같은 목소리’라고 스스로 얘기한 게 있는데, 어쩌다 수식어가 됐어요.(웃음) 저는 빨간색 파란색의 차원이 아니라 파스텔 톤 같은 목소리이고 싶어요. 은은하고 입자가 있는 것 같은.
관리의 측면에서 박학기의 목소리는 과거와 지금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미성을 간직하는 비결은 뭔지…
먼저 피지컬한 부분을 신경 써요. 호흡도 결국엔 근육을 쓰는 것이라 힘이 달리면 안 되거든요. 달라지지 않으려면 우선 체중이 달라지지 않아야 하죠. 무대에 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멋스러워야 하거든요. 옷도 스타일이 나야 하고, 또 스타일을 내려면 체중 유지를 해야 하죠. 저는 노래를 하기 위해 해야 하는 1순위가 체격 관리라고 생각해요. 음. 또 하나는, 어릴 때는 잔소리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근데 나이가 들면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어요. 뭔가 잔소리할 만한 게 있어도 나한테 말을 안 해요. 노래는 계속 바뀌고 뭔가가 잔디처럼 계속 생겨나요. 내 상태를 유지하려면 그걸 계속 뽑아줘야 해요. 그러려면 거울을 계속 봐야 하죠. 그런 관리가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과거에는 노래를 오래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버릇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주위에서 그걸 말을 안 해 줘요. 좋다고만 봐 주고. 그래서 더 자기를 객관적으로 못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 노래를 잘 안 믿어요. 마음에 안 들어 하고 늘 불안해해요.
스스로 과거 「자꾸 서성이게 돼」를 부를 때랑 현재 「아직 내 가슴속엔 니가 살아」 같은 신곡을 비교했을 때 가수로서 변했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똑같겠어요? 하지만 많이 안 변하려 노력해요. 특히나 제가 하는 노래들이 부드럽고 섬세해서 더 그래요. 임지훈 선배는 술을 마셔야 노래가 잘 된대요. 그 노래를 표현하려면 걸걸한 목소리가 어울리니까. 그런데 저는 그 전날 조금만 놀거나 그러면 노래가 안 돼요. 술을 잘 안 먹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다음날 지장이 있기 때문이에요. 필드에 있는 동안은 노래를 하기 위해 그 정도의 생활은 관리하려고 해요.
자신의 음악 중 최고로 꼽는 음반이나 곡이 있다면?
「비타민」 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예요. 왜냐면 결과가 중요한 요소지만 음악이라는 건 원초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볼 때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고 그 상황을 제대로 표현한 게 비타민이에요. 딸과의 추억이 그대로 담겨서 그 노래를 부를 때면 아직도 기분이 좋아요. 가사를 부를 때마다 그때의 상황이 그대로 기억나거든요. ‘여우비 내리던 여름 하늘을 구르던 너의 웃음’ 같은 가사도, 아이랑 서울랜드 놀러갔을 때 맑은 하늘에 여우비가 내리고,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더해져 파란 하늘에 맑은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눈 내리던 겨울 밤 우리가 남겨 놓은 그 발자국’같은 가사도 마찬가지로 일산 살 때 공원에 새벽 3시에 실제로 아이들과 눈 밟고 발자국을 비교한 일을 담았죠. 그 추억들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기억하잖아요. 이게 지나치면 잊어버릴 수도 있는 일인데 그 노래 하나로 나와 딸은 평생 기억을 할 거 아니에요. 아이들이 아빠와의 추억 중 기억에 남는 단어들을 쭉 쓴 것도 그렇고, 비타민은 있는 그대로의 가사를 담았어요. 노래로 사진을 남긴 것이나 다름없죠. 음악을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념이라고 만든 건데 사람들이 다 좋아해 주니 더 좋죠.
그러고 보면 박학기씨의 기력을 회복한 계기도 「비타민」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노래가 여러모로 고마워요. 경제적으로도 제 노래 중에 인풋 대비 아웃풋이 가장 큰 곡이에요.(웃음) 홍보랄 것도 없었고, <윤도현의 러브레터>한 회 나간 것밖에 없는데 노래가 여러 광고에 쓰이면서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저도 몰랐어요. 내 노래가 포괄하는 세대가 커진 계기도 되었고요.
음악 인생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모멘트가 있다면 언제인가요?
바로 「비타민」 을 부르게 된 그 시기가 음악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 같아요. 화사해지고, 상큼해지고.
박학기하면 오버랩 되는 인물이 어쩔 수 없이 김광석인데 먼저 그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궁금합니다.
김광석! (한숨을 쉬더니) 그냥 우울하죠. 너무 많은 물음표와 아쉬움과 미안함과 야속함이 다 섞여 있어서 어떤 때는 가끔 떨쳐 내고 싶을 때도 있어요. 박학기 그러면 김광석을 같이 떠올리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고, 그렇다고 그 친구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러가는 것도 싫어요. 사실 태어나서 걔만큼 오래된 친구는 없었어요. 세 살 때 옆집에서 만나 놀았던 애가 평생을 같이 가는 게, 보통 인연으로도 쉽지 않잖아요. 게다가 광석이가 가기 전 몇 년은 너무 가까워졌거든요.
같은 음악인으로선 어떻게 보나요?
지나고 나서 깨닫게 된 건데, 광석이는 대중을 너무 잘 아는 애였어요. 가장 보편적인 대중의 일반 정서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 그때는 몰랐어요. 그 시절엔 남의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해하는 경우도 많았잖아요. 그런데 광석이는 판단이 서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해 버려요. 그런 곡이 지금 같은 반응을 얻고 있고. 걔가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거예요. 가장 보편적인 대중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그때는 광석이의 음악보다는 텐션이 많은 스타일 음악에 더 환호하던 때였어요. 광석이 음악이 ‘바게트 빵’ 같은 존재라면 그때는 ‘크림치즈 빵’, ‘소시지 빵’ 같은 걸 더 쳐 줄 때였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바게트 빵이 물리지 않아 이렇게 오래 남은 거 같아요.
김광석이 그 당시 음악적으로 갖고 있던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걔는 노래를 어떻게 하고 기타를 어떻게 가져가지 하는 식의 고민을 잘 안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 것보다는 솔직히 ‘마케팅을 어떻게 할까’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았죠. 굉장히 ‘디지털한’ 애라니까요. 당시 저랑 CD-롬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얼마나 했었는데요. 그때는 시디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던 때였어요. 저랑 콘서트를 하기로 했었는데, “이번에 콘서트를 하고 그걸 찍어서 사람들이 언제든 볼 수 있게 시디롬으로 내자”라는 약속을 했었죠. ‘얼리 어댑터’였어요.
박학기 인생의 결정적인 음반을 꼽는다면?
‘시인과 촌장’이요. 「사랑일기」 가 담긴 2집이나 「가시나무」 가 있는 3집 <숲>보다는 하덕규 형이 오종수씨와 낸 첫 앨범이요. ‘시인과 촌장’의 전 음악이 저의 가요 감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죠. 특히 (하)덕규 형의 가사는 하나하나가 가슴이 와 닿아요. 가수 데뷔 전 화실에 있을 때 형이었는데 그가 써놓았던 시화(詩畵)는 충격이었지요. 염천교에 살고 있는 거지 부자(父子)에 대한 이야긴데, 표현 하나하나가 절절히 다가오더라고요. ‘시인과 촌장’ 노래의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한 폭의 그림이 눈앞에 그려져요. 나도 저렇게 노래하면 그림이 그려지도록 하고 싶었죠. 형이 또 기타치고 노래하는 모습도 어린 눈으로 볼 때는 정말 멋있었어요. 기타 하나로 노는 모습이 참 폼 난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사람 또한 (하)덕규 형이었으니까. 외국 가수는 「Longer」 의 댄 포겔버그(Dan Fogelberg)나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를 많이 좋아했고, 사이먼 앤 가펑클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앞으로 지향하는 음악은?
이 음악 듣다 보면 이거 해야 할 거 같고 또 저 음악 듣다 보면 저거 해야 될 거 같고 그래요. 요즘 와서는 공간이 많은 음악을 하고 싶어요. 여백이 있고, 꼭 필요하지 않는 걸 다 빼고 남은 것만 가지고 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기타 하나로도 할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인터뷰, 정리 : 윤은지
사진 : 이한수
사진 : 이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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