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책부터 찾아보거든요.”라는 백영옥 작가는 자신을 붙잡아 주고, 자신이 붙잡았던 책의 밑줄들을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저마다의 사연과 복잡한 문제를 이 밑줄들로 말끔히 해결할 수는 없을 터. 백영옥 작가는 다만 사람들이 여기에 잠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하고 바랐다. MBC 표준FM <라디오 디톡스 백영옥입니다>를 진행하면서 1년 6개월 넘는 기간, 매일 라디오 클로징 멘트를 썼던 백영옥 작가. “라디오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시기”였던 그때,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 원고를 썼고, 그러느라 청탁 받은 단편은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다. 위로를 건네고픈 간절한 마음과 안쓰러움이 그로 하여금 “방송 직전까지”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치게 했다.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쓰인 원고를 모으니 책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의 다섯 배 분량이 됐다.
읽고 싶어서 쓰기까지 하게 됐다는 백영옥 작가는 전작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과 신작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를 내고 참 좋았노라고 했다. 자신이 꼭 읽고 싶은 책이었다는 말에서 이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소중한 순간을 만끽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기술인지 많이 생각한다는 작가의 현재를 엿볼 수 있었다. 이제는 환대가 너무 좋다는 백영옥 작가는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에서 간절히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고, 기쁘면 마음껏 그 기쁨을 즐기라며 우리를 환대하고 있다.
간절하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
프롤로그에 “책 속의 문장을 약 대신 처방해주는” 책방을 열고 싶었다고 적으셨어요.
너무 앞서간 거죠.(웃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도 실은 십수 년 전부터 내고 싶었던 책이었어요. 실제로 그 책이 나오기 4-5년 전쯤 지인에게 이런 책을 내고 싶다 했었는데 저작권 문제가 해결 안 돼서 잘 안 됐죠. 그리고 저작권이 해결 되자마자 낸 건데요. 보통은 책이 나오면 우울하기도 한데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은 참 좋더라고요. 정말로 제가 읽고 싶었던 책이었으니까요.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도 마찬가지였어요. 워낙 책이 많잖아요. 그 수많은 책 속에서 실질적으로 누군가에게 꼭 맞는 책을 맞춤형으로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책으로 치유를 할 수 있다면, 하고 말이에요.
책 뒤에 인용된 책 목록이 쭉 있는데요. 분야가 꽤나 폭넓거든요. 이것만 봐도 그만큼 다양한 경우의 사람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들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라디오를 하면서 많이 느낀 건 뉴스에 나오는 경제 지표나 단어들, 수치로 읽히지 않는 행간들에 개인의 사연이 정말 많다는 거였어요. 더구나 새벽 2시 라디오에 사연 보내는 분들은 대부분 잠 못 드는 사람들, 야간에 일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때 세상에 너무 힘든 분들이 많다는 걸 정말 많이 느끼게 됐어요. 약간 응급 병동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요. 너무나 응급한 사연들이 많았어요. 살면서 그런 사연을 매일 만나진 않잖아요. 그런데 라디오에서는 매일 그런 사연이 오니까 저도 많이 힘들더라고요. 또 겁이 나서 정신과 선생님들 취재를 진짜 많이 했어요.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도움이 많이 되나, 하고요. 다행히 제가 작가이기 때문에 사연의 숨은 행간을 볼 수 있었던 게 도움이 된 것 같고요. 동시에 가장 많이 배운 건 저였죠.
배웠다고요.
그렇잖아요. 글을 쓰거나 라디오를 진행하거나 누군가를 가르친다고 하면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선생 자신인 것 같아요. 학생들이 아니고요. 정신과 선생님들, 상담소 소장님들 취재하고, 이야기도 듣고 하면서 배운 게 정말 많죠. 치유, 힐링 관련한 책이 너무 많다고, 누군가는 지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그만큼 상처가 많은 사회라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연고를 발라도 계속 긁고 있는 상황이라 상처가 잘 낫지 않는 거죠.
글 전반에 아주 간절한 ‘위로’의 정서가 깔려 있거든요. 나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행복에 대해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 했었는데 그런 이유였군요.
이 글에는 대상이 있어서 더 그럴 거예요. 라디오를 하면서 느낀 것 또 하나는 DJ와 청취자 사이에 라포(rapport, 상호신뢰)가 생긴다는 거였어요. 1:1 매체에 가까워요. 신기하죠? 듣는 사람은 DJ가 나에게 이야기한다고 느끼고요. 심지어 저도 내가 이 사람에게 얘기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진짜 방송 직전까지 원고를 많이 고쳤는데요. 간절하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구체적인 사연을 하나 알게 되는 일은 막연히 아는 것과 분명히 다르겠죠.
대장암 말기인 분 사연이 있었어요. 사실 이분 소원은 죽는 거예요. 너무 힘드니까요. 하지만 가족 때문에 힘든 항암치료를 다 견뎌낸 거죠. 보통 암은 5년 동안 재발이 안 되면 완치라고 하는데요. 그 안에 재발되는 경우도 많대요. 그래서 이분은 진심으로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사연에 하고 계시는 거예요. 편해지고 싶다고요. 이제 안 아프고 싶은 거죠.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생존해 있기는 하지만 나를 제발 놓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거고, 이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사연을 보내셨더라고요. 진짜 힘들어요, 그런 사연 받으면. 얘기하다가 막 울고 그러죠.
만약 누군가 내 앞에서 울고 있다면, 흐르는 눈물은 그 사람이 나를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약함을 내보일 수 있는 게 진짜 용기니까요. 가끔은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맑은 날만 계속되면 사막이 된다죠. 비 온 후,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일 거예요.(95쪽)
예전에는 사람의 고민이란 기출문제처럼 몇 개 카테고리 안에 다 있다고 생각했어요. 고민은 사실 비슷비슷하다고요. 육아 고민, 취업 고민, 결혼 생활 고민 등등 그런 거죠. 심지어 라디오에서 상담 코너를 시작할 때 PD님한테 “오는 사연 다 비슷해서 6개월 이상 못할 거다, 똑같은 얘기만 하게 될 것 같다”라고 하기도 했거든요. 제가 진짜 착각한 거죠. 그 한 개인의 고민은 정말 저마다 다 달라요. 그 사람의 성격, 상황, 살아온 이력,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닌 거예요. 그걸 정말 몰랐어요.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반성하게 돼요.
세월호 때도 그런 칼럼을 썼거든요. 학생 몇 명, 교사 몇 명, 하는 식으로 사람이 숫자로 표기되는 것을 보고 그러지 말자, 한 사람의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주고, 개별적인 고통을 이야기하자, 라고요. 이런 칼럼을 내 스스로 썼으면서도 말이죠. 사람의 고민이 거기서 거기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요. 이런 얘기 흔히 하잖아요. 사는 거 다 비슷하다, 사람 다 똑같다, 라면서요. 하지만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요. 거기서 거기, 절대 아니에요.
나를 지키면서 살 수 있는 방법
특히 걱정하고 있는 것, 위로나 다정의 말을 건네고 싶은 일들은 뭔가요?
심리학자들이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줄이라는 건데요. 나 자신의 안전지대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하게 개방되어 있는 것 같아요.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죠. SNS만 봐도 다 공개가 되어 있으니까요. 타인과의 비교로 자존감을 찾으려 하는데 그러니까 늘 불안한 상태인 거예요. 바닷물 마시는 것과 같은 건데요. 물론 이 구조를 바꿀 순 없어요. 이게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는 별 효용이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우리만의 안전지대를 어떻게 만들지, 이야기 해야겠죠. 내 마음이 덜 황폐해질 수 있도록 내가 나를 지키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저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믿는 사람이에요.
책이어야 하는 이유는요?
개방성의 특징은 처음과 끝이 없는 거예요. 그게 인간을 아주 불안하게 만들어요. 비행기 표를 샀는데 더 싼 표가 계속 나올 것 같으면 늘 불안하잖아요. 여행을 갔는데 같은 장소에서 누가 나보다 훨씬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먹으면 갑자기 내 경험이 너무 초라해져요. 나는 좋았는데 남이 한 걸 보는 순간 내 경험의 가치가 계속 누락돼요. 우울할 일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책은요. 처음과 끝이 있어요. 이게 정말 중요해요. 끝이 있기 때문에 닫힌 상태에서 자신의 정리된 생각을 펼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경험은 끝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해요. 특히 요즘 같은 현대인들은 완결되는 경험을 거의 못하죠. 시간이 단편화, 파편화 된 상태로만 경험하기 때문에 그것이 영혼에 남기는 상처가 정말 많아요. 그런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불안함, 촉박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어려움이잖아요.
일중독자라 늘 시간에 쫓겨 살아요, 라고 말하는 분들에게 줬던 밑줄들이 있는데요. ‘오염된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그 순간에 집중이 되지 않고 여러 가지가 섞여 드는 거예요. 파편화된 시간 경험이죠. 그렇게 시간을 경험하면 시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못 받기 때문에 시간이 점점 더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우리는 끊임없이 스마트폰의 방해를 받죠. 시간이 잘려요. 그래서 늘 바쁘고 불안하고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거예요. 제가 올해 SNS를 끊었어요. SNS의 좋은 점도 분명히 있는데요. 확실한 건 SNS를 안 해보니까 놀랍도록 시간이 늘어난 경험을 했다는 거예요. 심지어 저는 SNS를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아예 앱을 다 지우고 습관적으로 보는 일을 아예 안 하니까 다르더라고요. 내가 내 시간을 보호하니까요.
내 시간을 ‘보호한다’는 개념이 흥미롭네요.
시간을 보호해야죠. 시간을 보호하지 않으면 계속 오염되고 끊어져요. 아주 맛있는 케이크가 나에게 있는데 계속 먼지도 쌓이고, 누가 침도 뱉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커버를 씌워놓아야죠. 그건 정말 중요해요. 꼭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연결이 쉬워지는 만큼 단절도 필요하다는 거죠.
이때 단절은 고립과는 달라요. 지금 얘기하는 단절은 ‘자립’이라는 거고요. 반드시 연결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같이 있음을 전제로 했을 때 혼자는 빛나요. 혼자 있는 시간, 중요하지만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죠. 아무리 나를 알고 싶어서 면벽수련을 하며 자문자답 한다한들 쉽지 않잖아요. 자신을 가장 잘 깨닫게 되는 건 관계를 통해서거든요. 상호적인 거고,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알게 되는 것이고요. 고립되라는 게 아니고 독립하거나 자립하라는 이야기예요. 나와의 관계가 좋아야, 타인과의 관계도 좋을 수 있고요. 그래야 내가 건강해야 잘 살 수 있어요.
또 중요한 것이 ‘평균의 종말’이라는 글이었어요. “평균적 행복이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닌 타인의 취향에 나를 대입한 것일 뿐이에요.”(147쪽)이라고 하셨죠. 평균적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우리 뇌가 착각하는 것이 정말 많거든요. 취준생들의 사연이 많이 오는데요.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매몰비용’이에요. 그동안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건데요. 가령 등산을 정말 좋아하는데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되어 있어서 공연 표를 예매했어요. 그런데 그날 날씨가 너무 좋은 거예요. 등산이 가고 싶은데 공연 표를 예매해뒀으니 공연을 보러 가요. 매몰비용 때문인데요. 이럴 때 실은 공연을 포기하고 즐겁게 등산을 가는 게 이득이에요. 우리가 아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 같지만 감정적이고 불합리한 판단을 내릴 때가 되게 많아요. 이 책에는 행동경제학 관련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요. 이런 이야기를 읽게 되면 생각지 못했던 프레임의 사각(死角)이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기대를 하고 쓴 거예요.
하지만 나와 잘 지내는 게 정말 쉽지 않죠. 변화도 너무 더디고요.
진짜 어려워요. 제가 지향하는 건 ‘미니멀리스트’고, 단순하게 살고 싶은데 그러기가 쉽지 않아요.(웃음) 삶은 너무 복잡하고요. 빠르게 변하죠. 그러니까 나도 그에 맞춰서 흔들려요. 하지만 나침반 바늘이 고정되어 있으면 고장 난 거예요. 계속 흔들려야 해요. 우리도 방향을 찾아 움직여야 하고요. 생각이라는 것도 조금씩 바뀌면서 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안개가 가득한 숲길을 한 시간만 걸으면 온 몸이 젖었다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변화는 그런 것 같아요. 되게 느리고요. 잘되는 것 같다가도 안 돼요.
자신의 활을 쏘는 게 중요합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예요. 삶에는 끝없이 바람이 붑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바람을 멈추는 게 아니라, 거센 바람 속에서도 중심을 잡으려는 자세와 화살을 목표에 명중시키려는 마음일 거예요. 비록 화살이 빗나간다 하더라도 말이죠.(158쪽)
결국 균형 찾기에 관한 이야기예요. 어느 누구도 사는 게 쉬운 사람은 없어요. 마치 정답을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은 사기꾼에 가까울 확률이 높죠. 무엇을 명쾌하게 얘기하기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최대한 근사치에 다가가려는 안간힘과 복잡한 과정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 좋겠어요. 다만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을 소개하고, 읽는 분들이 거기서 하나라도 ‘그렇지’하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기본적으로는 라디오 청취자 분들을 위해서 썼기 때문에 안쓰러움이라는 마음이 있고요. 잘 됐으면 좋겠고, 성공했으면 좋겠고, 고백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그런 거죠.
무용한 것들이 주는 삶의 의미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시겠어요.
엄청요. 한 번은 아침에 일어나서 라디오 원고를 쓰다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짓을 매일 하겠구나’하고요. 우리는 ‘언젠가는’과 ‘나중에’에 되게 많은 것을 보류해두잖아요. 언젠가는 좋아질 거야,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는 괜찮을 거야, 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라는 생각을 해요. 지금 밥을 많이 먹는다고 나중에 안 먹어도 되는 건 아니죠. 매일 닦아도 먼지는 또 쌓이고요. 나는 책을 읽어도 늘 까먹을 것이고, 밑줄을 그어도 늘 잊어버릴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 이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해 나는 늘 허우적거리고 발버둥 쳐야 하는구나, 라는 걸 어느 순간 확 깨달았어요.
“오늘 당장 한 장의 원고를 쓰겠다는 결심이, 노벨상을 받겠다는 원대한 꿈보다 중요합니다.”(247쪽)라고 한 부분과 연결이 되는데요. 그 글의 제목이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였어요.
그게 진실인 것 같아요.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그것을 하는 게 우리 삶이죠, 사실은. 70대 이후에 가장 높은 행복지수가 유지된다고 하는데요. 큰 이유가 노인들의 시간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에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으니까요. 지나온 시간의 빅데이터를 통해 지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축적되어서 손주랑 놀아줄 때도 온전히 그 순간에 집중을 하는 거예요. 부모라면 아이와 단풍을 보면서도 얘가 학원을 가기 전까지 밥을 먹이고, 과일을 줘야 하고, 이런 생각을 하겠죠. 그러니까 결국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꽃이 빨리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시간 시야가 좁아지면 행복해지죠.
발레를 꽤 오래 하셨잖아요. “무용한 세계가 주는 아름다움”(171쪽)을 통해 “원초적 기쁨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요.
발레를 하면서 렌즈 끼는 게 불편해서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라식 수술을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어요.(웃음) 다치기도 많이 다쳤고요. 그런데요. 제가 잡지 기자로도 일했고, 작가로 지내면서도 유명한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났거든요. 이분들이 끝에는 다 ‘공허하다’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돈이 많고, 그렇게 성취한 게 많은데 공허하다는 거예요. 이들에게 부족한 건 생각해보면 ‘의미’예요. 우리에게 부족한 건 의미죠. 의미가 있을 땐 힘들어도 살아갈 만하거든요. 발레가 그래요.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즐거운 행위예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하는 인간)’라서 진짜 즐거운 걸 찾아내면 거기서 의미가 발생해요. 춤을 추는 것, 책을 읽는 것, 하다못해 길가에서 네잎 클로버를 찾는 것이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순수한 즐거움을 경험하면 의미가 만들어지는 거고요.
그 즐거움은 몰입의 시간 동안 채워지는 충만함 같아요. 쾌락과는 조금 다른데요. 저는 그 몰입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궁극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그 의미를 다량으로 발생시키는 것 중 하나가 예술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림을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춤을 보는 것. 더 나아가 책을 쓰면 의미가 더 많이 발생하죠. 춤을 보는 것보다는 춤을 추는 것, 그러니까 뭔가를 하는 행위를 한다면 말이에요. 이런 행위가 내 인생에 실용적인 도움이 되진 않아요. 하지만 이게 필요한 이유는 그런 무용한 것들이 주는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가 자기 인생에서 하나씩 찾아가야 하는 것 같아요.
열렬한 독자로서의 작가님이 많이 느껴지는 책인데요. 예전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북토크에서 “글쓰기는 제 집 같은 곳이에요. 언젠가는 돌아갈 곳”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읽는 나와 쓰는 나, 어떻게 관계하고 있나요?
가능하다면 남이 쓴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싶어요. 읽는 행위는 제게는 정말 순수한 즐거움이고요.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잘 쓰려는 강박만 없으면 정말 즐거운 일 같아요.(웃음) 처음 소설을 쓴 이유도 읽기 위해서였거든요. 동네 만화방 단골이었는데요. 더 이상 읽을 만화와 하이틴 로맨스가 없기 때문에(웃음) 썼어요. 중학교 1-2학년 때 한창 하이틴 로맨스와 할리퀸에 빠져 있었는데요. 더 빌릴 책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바른손 노트에 모나미 볼펜으로 소설을 썼죠. 어떤 일을 너무 좋아하면 그 일을 한 번 해보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사실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하지만 역시 더 본질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책 읽기예요. 읽다가 쓰게 됐고, 소설을 쓰는 재미에 푹 빠진 거죠. 쓰는 일은 조금 더 힘들지만 조금 더 많은 의미를 가져다 줘서 특별한 거고요.
만약 작가님에게 완전한 하루의 자유시간이 있다면 어떻게 보내고 싶으세요?
저는요.(웃음) 되게 재미없는 답인데요. 똑같이 보낼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번쩍 뜨면 커피 한 잔을 마시고요. 창밖을 보면서 ‘글 쓰기 싫다’라고 생각한 뒤에(웃음) 글을 써내려갈 거예요. 그리고는 또 쓰기를 잘했구나, 생각할 거고요. 시간이 되면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낮잠을 자겠죠. 또 산책을 하고, 밤에 책을 읽다가 잠들 거예요. 똑같게 살고 싶은데요. 이 일상이 절대 꾸준히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래요. 그래서 이 순간이 소중하고,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려고 하죠. 그 기술이 정말 삶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환대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요. 누굴 만나도 환대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라디오를 하면 게스트가 많이 오잖아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죠. 온천장 주인처럼 말이에요.(웃음)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백영옥 저 | arte(아르테)
‘밑줄 사용법’이 담겨 있는 독서 노하우이자,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어떤 말보다 포근한 위로가 되는 문장을 처방해주는 ‘밑줄 처방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