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생각보다 재빠르게 훌훌 넘어갔다. 새내기를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서른 살이 훌쩍 넘어버렸다. 지갑에는 현금과 신용카드가 제법 그럴싸하게 채워졌다. 이도 저도 아닌 탐욕에 빠져 허우적대며 긁어댄 할부 결제로 빚진 인생이 시작되긴 했지만, 더 이상 종이컵에 소주를 마실 일은 없어졌다. 그렇게 지나버린 가난의 행복을 잊고 술을 마시게 되었다. 행복을 잃어 가난해진 기분이었다. (하련, 29쪽)
우울할 때 술은 약인데, 우울함의 정체를 모르니 술이 독이 됐다. (재은, 189쪽)
취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아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 취하고, 한참을 취하고 나서야 늦게, 보고 싶다는 말을 짧게 남겨요. 올여름 비가 내리는 날에 함께 술 한잔 기울이면 좋겠어요. 이번엔 조금만. 또다시 여름이네요. 곧 봐요. (현경, 224쪽)
술과 글을 참 좋아하는 세 사람이 우연히 만났다. 당연히 술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취하지 않고서야』다. 우울증 수기집 『아무것도 할 수 없는』을 쓴 김현경, 『유통기한이 지난 시간들을 보냈다』의 장하련, 『모든 순간의 너에게』의 재은, 세 필자가 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2018년 초여름에 독립출판물로 발간된 이 글은 같은 해 10월에 흔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당신이 젊은 사람들과 술자리에 끼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부장님이라면, 술이라곤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해서 대체 저렇게 맛도 없는 술을 왜 부어라 마셔라 취하는지 모르겠다면,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다면, 『취하지 않고서야』에서 답을 찾기를 바란다.
김현경
궁금하다, 술의 매력
독립출판물로 먼저 나온 뒤에 흔 출판사에서 나왔는데요. 어떤 게 바뀌었나요?
하련 : 분량을 각자 추가로 했고요. 그거 말곤 특별히 바뀐 건 없어요. 표지도 그대로 갔어요. 판형이 좀 더 커졌네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펴낸 흔의 두 번째 책이 이 책이 되었는데요. 사연이 궁금합니다.
재은 : 흔님이랑 커뮤니티에서 만나 알던 사이였는데, 연락을 받았어요. 술 좋아하는 자기 같은 사람이 많이 읽으면 좋겠다면서 내자고 했죠. 이 책의 독자가 내고 싶어하니까 좋았죠.
하련 :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만큼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도 있었죠.
정보보다는 감성이 주인 에세이잖아요. 이 책에서 어떤 정서를 담고 싶었나요.
재은 : 같이 마시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누구에 관한 이야기, 다정함에 관해 썼어요.
하련 : 정해놓고 쓴 건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그리움이 많이 들어갔네요. 나이 들어서 못 만나는 친구도 있고, 20대 함께 했던 친구에 관한 기억이 많더라고요.
현경 : 저는 이 두 분과 다른 게, 기획자 입장에서 썼거든요. 두 분에게는 마음대로 써주세요, 했고 저는 겹치지 않게 다양한 걸 쓰려고 했어요. 몇월의 어떤 술, 이렇게 맞춰 썼어요. 계절별 술과 사람, 이렇게 다양하게 쓰려 노력한 거라 어쩌면 재미 없을 수도 있어요.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할 텐데요. 술이 지닌 매력은 뭘까요?
현경 : 술을 안 마시면 말을 잘 못하겠어요. 지금 인터뷰도 술을 안 마셔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매개?
재은 : 교환학생으로 외국 갔을 때, 처음에 영어가 안 나왔어요. 술 들어가면 잘 나오더라고요. 한국인에게 영어는 용기의 문제인 거 같아요. 맥주 한 잔 하고 하면 잘 나오거든요. 우울할 때 마시기도 하고요. 또 술 마시는 이미지가 있다보니, 안 마시고 싶어도 마시기도 하고요.
『취하지 않고서야』는 어떤 독자가 읽으면 좋은 책일까요?
재은 :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내가 술 마시고 했던 생각이 다 여기 있구나.” 하는 공감이 들 것 같고요. 술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읽어봤으면 좋겠어요. 술 마시면 사고 치고 나쁜 짓 한다, 이런 술에 관한 나쁜 이미지만 갖고 있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아요. 맨정신으로는 못하면서 술을 마셔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낫지 않냐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저는 꼭 그렇지 않아요. 쑥스러워서 못하는 이야기도 있고,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잖아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들,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과 술 마시러 가면 좋겠어요. 딱 이 책을 건네면서 “내 마음이야!” 하면서요.
하련 : 재은 생각과 비슷해요. 저는 처음에는 생각 없이 썼어요. 쓰다 보면서 술 마시고 있었던 이야기를 저희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경 : 술 좋아하는 분은 혼술하면서 “나도 이런 일이 있었지.” 했으면 하고요. 처음에는 저도 재은 생각처럼 술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술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요. 책이 나오고 읽어봤는데, 이해하기 힘들겠다, 그냥 술 좋아하는 사람이 읽겠구나, 싶네요.
재은
편집 방향 없는, 세 사람의 솔직한 음주기
책 만들기 위해 편집회의 하지 않았나요? 기본적인 편집 방향, 이런 게 있을 거 같아요.
재은 : 전혀 없어요. 알아서 다들 혼자 썼어요.
표제작은 어떻게 정했나요.
현경 : '취하지 않고서야'가 표제작은 아니고요. 이렇게 제목을 정했는데, 아무도 이 제목으로 쓰지 않더라고요. 표현 그대로 정말 술에 취해서 쓴 글이에요.
독립출판물에 실렸던 에필로그가 빠졌더라고요. 독립출판물로 나왔을 때는 편집 후기가 다소 교훈적이었잖아요. 앞에서는 잔뜩 술 마시고 취한 이야기를 했는데, 마지막에서는 술을 적당히 마시자고 끝내셨거든요. 이 글이 빠진 사연이 궁금합니다.
현경 : 그 글은 제가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 가기 직전에 쓴 유작처럼 쓴 글이었는데요. 빠졌어요? 처음 알았어요.
재은 : 출판사에서 공유를 계속 해줬는데, 체크가 안 됐네요.
공감 가는 문장과, 감성 충만한 표현이 많아요. 우리 모두가 술 마시면 어느 정도는 시인이 되잖아요. 혹시 책에 들어간 글은 술 마시면서 썼나요?
하련 : 저는 술을 마시고 썼어요. 이 책이 독립출판물로 5월에 나왔는데, 그때 퍼블리셔스 테이블이라고 북마켓을 기획하고 있었어요. 회의 끝내고 술 마시면서 밤마다 썼거든요. 피로와 우울과 술에 찌들어서 힘들게 썼던 글이죠.
재은 : 저도 회사 다닐 때 썼는데요. 회사에서 쓴 것도 있고요. 흐흐. 마켓 때까지 책이 나와야 하니까, 그때를 마감으로 정해놓고 기한 내 써야 했죠. 저는 글을 되게 많이 고치는 편이라서 회사에서도 계속 볼 수밖에 없더라고요. 집에 와서도 쓰고요. 술 마시고 쓴 적은 많이 없었던 거 같아요. 글을 쓸 때 마침 사랑니 신경 치료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금주 하면서 썼어요.
현경 : 2~3월에 쓴 글은 아주 맨정신을 썼죠. 일요일 아침에 깔끔한 정신으로요. 이번에 추가된 글은 바에서 쓴 것도 있긴 해요.
이번 책 덕분에 세 사람의 약속은 무조건 술 약속이겠네요?
재은 : 다 업보인 거 같아요. 술 못 마신다고 하면 친구들이 알아서 다음에 보자고 말해요.
요즘 직장 내 회식 분위기라든지 대학 문화를 보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전보다는 술을 덜 마시는 것 같았거든요. 이번 책을 보면서 젊은 사람들도 마시는 사람은 많이 마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현경 : 저는 예전 상사와 술 마시고 싶지 않았습니다.
재은 :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마시고 싶은 사람이 있고, 마시기 싫은 사람이 있고.
녹취록 재밌었습니다. 어떤 사연으로 책에 싣게 되었나요.
현경 : 2016년부터 술자리를 녹취하고, 그걸 책으로 엮어보려고 했어요. 블로그에 하나씩 올리기도 했고요.
재은 : 팟캐스트를 짧게 했는데, 콘셉트가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거였어요. 팟캐스트가 녹취나 다름 없으니, 팟캐스트 내용을 그대로 넣었죠.
이 책이 청춘의 술 이야기인데요. 30년 뒤에 쓴다면 어떤 내용일까요?
현경 : 하련은 모르겠지만 재은과 저는 분명 이런 이야기를 쓸 거 같아요. 30년이 지나도 철이 안 들고 술을 이렇게 마시고 있다고.
장하련
100종 책이 천 부씩 팔리는 세상이 건전한 사회
세 사람 모두 글을 계속 쓰고 있잖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하련 : 예전부터 일기를 썼어요. 친구 통해 독립출판물 알게 되고, 책으로 만들게 되었네요.
재은 : 기록을 좋아해요. 원래는 사진을 많이 찍었고, 거기에 글을 덧붙이다 보니 글을 더 많이 쓰게 되더라고요. 영화도 좋아해서, 영화 볼 때마다 기록했는데요. 기록하는 사람이 글로 뭔가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 같아요.
현경 : 이하동문입니다.
독립출판물이 많이 나오는데, 만드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경 : 한 권의 책이 10만 권 팔리는 것보다 10권의 책이 각 1만 권 팔리는 책이 더 좋다는 인터뷰를 어디선가 읽었는데요. 저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나아가서 100권의 책이 천 권씩 팔리는 게 더 좋을 수 있고요. 예전같았으면, 『취하지 않고서야』 이 책도 책으로 나오기 어려웠을 수도 있죠. 쓰려고 했다면 "니가 뭔데 이런 걸 써? 알콜 전문가야?" 이런 반응이었겠죠. 평범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보이고 읽히는 게 좋은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재은 : 한 명의 입김이 커지는 것보다, 여러 명이 여러 이야기를 읽는 게 건강한 사회죠. 사람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지잖아요. 『취하지 않고서야』도 그런 거 같아요. 술 안 읽는 사람들이 읽으면 술 읽는 사람을 이해할 수도 있고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사람의 손이 필요 없어지는 일이 많아지겠죠. 일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텐데, 글쓰기가 그 중 하나입니다.
어떤 글을 좋아하나요,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알려주세요.
현경 : 저는 작가라기보다는 기획을 좋아해요. 사람들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함께 쓰고, 모으는 걸 하고 싶어요. 거창한 이야이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게 있잖아요. 어,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도 그랬구나, 공감하면서 함께 나아질 수 있는 걸 계속 만들고 싶어요.
하련 : 얼마 전에 저도 책 한 권 냈거든요. '같은 향수를 쓰는 사람'이라고. 저도 기록하는 걸 좋아해서, 기획하는 게 있어요. 지금 준비하는 건 '늙은 내 동네'. 장이동에 살았는데 재개발되고 있거든요. 1회용 카메라로 찍어서, 이렇게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책 만들고 싶어요.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책 계속 만들려고 해요.
재은 : 저는 글쎄요. 현경이 이거 하자고 하면 같이 하게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과 있었던 일을 쓸 거 같아요. 누구랑 어딜 가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이런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취하지 않고서야김현경, 장하련, 재은 저 | 흔
서로의 촘촘한 간격, 따뜻한 눈빛, 헐렁한 표정, 솔직해진 자신과 한껏 진지하거나 가볍고, 쉽게 울고 웃는 그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