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정우가 2011년 『하정우, 느낌 있다』 이후, 7년 만에 두 번째 책 『걷는 사람, 하정우』 를 썼다. 5년마다 책을 쓰고 싶었던 그. 첫 책이 ‘그림 그리는 배우’의 일상이었다면, 이번 책은 ‘걸어서 출퇴근하는 배우’의 이야기다. 영화 <PMC: 더 벙커> 개봉을 앞두고 만난 하정우는 “극장에서만 기자들을 만나다가 북카페에서 간담회를 진행하니 다소 어색하다”며, 출간 소감을 밝혔다.
11월 23일 출간한 『걷는 사람, 하정우』 은 이틀 만에 2쇄, 1주일도 되지 않아 4쇄를 찍었다. 비단 하정우의 팬들만 책을 사지 않았다. 걷기에 관심 있는 사람, 자연인 하정우의 삶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가닿았다. 강남에서 홍대까지, 하루 평균 3만 보, 가끔은 10만 보를 걷는 하정우에게 ‘걷는 삶’이란 무얼까. 친구들로부터 ‘걷기 교주’라고 불리는 하정우를 만났다.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필수품
예상보다 책이 늦게 나왔다고요.
영화 촬영이 이렇게 빨리 들어갈 지 몰랐어요. 작년에 <1987> 촬영을 마치고 짬이 생겼는데, 올해에는 <신과 함께>가 개봉하면서 시간이 촉박했어요. 2010년에 문학동네 출판사와 책을 냈을 때 기억이 참 좋았거든요. 5년마다 한 번씩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정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7년이 지나 두 번째 책을 쓰게 됐네요.
본격적으로 글을 쓴 건 올 해부터인가요?
작년 말에 출판사로 연락을 드렸고요.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한 건 올해 3월부터예요. 휴식을 가질 때, 어떻게 시간을 쓰면 가성비 높은 휴가를 보낼 수 있을까. 이것이 저의 7년간의 화두였거든요? 뭘 쓰면 좋을까 생각해보니 7년간 제가 ‘걷기’에 깊이 빠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책을 쓰게 됐어요. 3월에 유럽 배낭 여행을 떠나기 전에 출판사와 미팅했고요. 본격적으로 쓴 건 4월부터, 마지막 교정까지 보는데 꼬박 8개월이 걸렸네요.
책 부제가 ‘걸어서 출퇴근하는 배우’예요. 오늘도 걸으셨나요?
6시 반에 집에 나와서 한남대교 근처 고수부지를 돌았어요. 만 보 정도 걸은 것 같은데요. 요즘 미세먼지가 많아서 얼굴을 꽁꽁 싸매고 다녀요.
책을 보니, 하와이에서도 자주 걸으셨더라고요. 휴양지에서 걷는 일상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특별할 건 없고요. 대개는 한강 고수부지에서 걸어요. 아마 제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였다면 굳이 하와이까지 가진 않았을 거예요. 하와이에서도 보편적인 일상을 보내요. 다만 좀 더 자유롭게 걸을 뿐이죠.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셨다고요? DVD도 많이 수집한 걸로 알아요.
책을 사 모으는 걸 좋아해요. 제가 영화를 찍으면 DVD가 나오잖아요? 그 DVD를 사는 영화 팬분들이 있고요. 책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SNS를 하지 않기 때문에 팬들과 가까운 소통을 못하는데요. 어쩌면 이렇게 책을 내는 일이 저만의 소통 방식인 것 같아요. 제게 책은 아날로그 감성 같은 이미지가 아니에요.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필수품이라고 할까요? 지키고 싶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메모도 많이 하는 편인가요?
그때그때 일기를 쓰는 편이에요. 제가 배우가 되고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잖아요. 현장 스태프들까지 포함하면 약 1천 명? 그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일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내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지’ 생각해요. 그래서 그때그때 느낀 감정을 기록하려고 해요. 이번에 책을 쓰면서 예전에 쓴 일기장을 많이 들춰봤어요.
책으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뚜렷하게는 잘 모르겠어요. 영화를 찍고 나서, 이 작품이 재밌나? 재미가 없나? 판단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책은 더더욱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로서는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내 일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이것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야기 사이사이, 행간에 담긴 감정을 봐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보편적인 일상을 보내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혀도 좋겠네요.
함께 뛰는 동료 배우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걷기 모임 멤버는 누가 있나요?
배우, 영화 스태프들이 가장 많고요. 같이 일하는 영화제작자 대표, 프로듀서, 정말 어릴 때부터 친구인 직장인들도 많아요. 최근에 영화를 같이 찍은 정우성 형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는데요. (웃음) 주지훈 배우는 저희 팀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가장 뜨겁게 함께 걸었던 시간이 있었고요. 선배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배우는 철들면 안 된다”는 말인데요. 어쩌면 이 말이 초심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의미일 지도 모르겠어요. 우선 바깥 공기를 쐬면 기분이 너무 좋고, 뭔가 입맛이 생기잖아요? 후각도 갑자기 깨는 것 같고. 걸으면 걸을수록 맥주 맛도 더 좋고요. (웃음)
책을 읽은 독자 분들이 궁금할 것 같은데요. 효과적으로 오래 걸을 수 있는 팁이 있을까요?
걷는 건 특별한 기술이나 노하우가 필요 없어요. 오랫동안 걸을 때 꼭 지켜야 할 원칙은 휴식을 반드시 취해야 하는 거죠. 저희는 보통 1교시라고 하는데요. 40분을 걸으면 10분 내지 15분은 꼭 쉬어야 해요. 많게는 10교시까지 걸을 때가 있는데요. 아무리 잘 걷는 사람도 쉬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해요. 관절이나 발바닥, 특히 물집이 잡히는 걸 유의해야죠. 밑창이 좋은 런닝화를 꼭 신고 걸어야 해요. 에어가 충분한 기능성 운동화를 신는 게 가장 좋아요.
어떤 길을 걸으면 좋을까요?
그건 독자 여러분 상황에 따라 다를 거예요. 사는 곳 근처에 고수부지가 있다면 좋겠지만, 집 앞 골목, 아파트 단지를 걸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죠. 처음에는 굉장히 지루할 수 있는데요. 다섯 바퀴 내지 열 바퀴, 하루 작은 양부터 실천해 나가면 나중에는 굉장히 크게 다가올 거예요.
좋은 게 있다면 나눠야 하지 않나요?
걷는 행위에 관한 책이 꽤 많이 나왔어요. 좋아하는 책이 있나요?
한국 독자가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는데요. 작가님이 갖고 있는 루틴이 마음에 들었어요. 뭔가 제가 걸으면서 느끼는 마음을 확인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도 흥미롭게 읽었어요.『최고의 휴식』이라는 책은 마인드풀니스 명상법에 대한 책인데요. 내가 알고 있는 공간을 반복적으로 걸었을 때 일어나는 효과에 대한 내용이 인상 깊었어요.
책을 보니, 독서모임을 하신다고요.
아.. 저는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지금도 잘 어울리고 지내거든요. 대학교 선후배들도 지금도 친하고. 사실 그 밥에 그 나물인데요. (웃음) 이제 40대가 되니까 술자리를 해도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1,2주일에 한 권씩 책을 정해서 이 책을 안주 삼아서 만나자고 했어요. 그런 취지로 시작한 모임인데, 영화 촬영에 들어가면 자주 만나진 못해요.
토니 포터의 『맨박스』 를 읽고 쓰신 글이 인상 깊었어요.
부제가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이었죠? 저자는 남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맨박스’라고 지칭하고, 이 틀을 과감하게 깨부수고 나와야 한다고 지적하는데요. 읽으면서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저 역시 종종 남자답거나 멋진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과연 나는 남자다운가? 남자다운 것은 뭘까? 이런 의문이 들어요. 사실 알고 보면 저는 저음의 목소리 뒤에 집밥을 해 먹길 즐기는 세심한 면도 있거든요. 흔히들 여성스럽다고 말하는 취미도 즐기고요. 저는 ‘남자답다’라는 알쏭달쏭한 말보다는 ‘사람답다’, ‘인간적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 조금 더 기뻐요.
전문 작가가아니라고 하셨지만, “이런 문장을 쓰고 싶다”와 같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내 말투를 그대로 글에서 느낄 수 있게 할까. 이것이 큰 고민 중 하나였어요.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문체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글을 쓰면서 나는 평소에 어떻게 말하는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었어요.
소설이나 시를 써보고 싶은 생각도 있나요?
그런 생각은 아직 안 해봤어요. 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시나리오를 한 편 더 쓰지 않을까요? 『하정우, 느낌 있다』를 쓴 게 2011년인데 지금 읽어보면 너무 오그라들어서요. (웃음) 이번 책은 책 제목 글자 그대로 담백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느낌이나 스토리보다는 그냥 ‘걷는 사람’ 하정우에 대해 썼다고 볼 수 있어요.
요즘 자주하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 관한 생각이죠. 늘 촬영장에 가면 시나리오를 정독하기보다는 어떻게 재밌게 찍지? 이 영화가 재밌어야 할 텐데, 같은 생각을 더 하거든요. 영화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 것 같고. 그 다음으로는 오늘 저녁에 뭐 먹지? 막걸리를 마실까, 맥주를 마실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웃음)
책 34쪽에 이렇게 쓰셨어요.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내 기분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걷기와 그림’ 외에 또 다른 방법이 있나요?
글쎄요. 가끔 어떤 날은 내 감정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감정에 꽂히면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고, 작업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니까요. 그럴 땐 단순해지는 게 방법인 것 같아요. 또 다시 걷는 이야기지만, (웃음) 러닝 강도를 높이거나 반신욕을 해요.
“배우는 신비로운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어떤 선입견이 있잖아요. 비슷한 고민은 없나요?
누구도 저를 신비롭게 생각하진 않지 않나요? (웃음) 저는 제가 신비롭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힘든 것도 있지만 분명 얻는 것이 많은데요. 좋은 게 있다면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나눠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책도 마찬가지예요. 걷는 행위가 제게 너무 좋으니까요. 이 좋은 걸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거나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계획이 있나요?
그건 정말 꿈인데요. 시간이 주어진다면 반드시 가고 싶어요.
책을 쓰면서, 개인 하정우가 얻은 것이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이렇게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어요. 계속 잘 걸으면서 소중한 일상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담백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에요. 어떻게 건강하게 살 것인가를 자주 생각하는데요. 그럴싸하게 살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진 않지만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나아간다면 언젠가 바라는 꿈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도 아침마다 눈을 뜨고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귀찮거든요. 비가 오면 차라리 잘됐다고 좋아할 때도 있고요. 그런데 걷고 나면 뛰고 나면, 찾아오는 행복감이 정말 엄청나요. 그걸 아니까 할 수밖에 없고요.
세 번째 책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배우로서 한 작품 한 작품 만들어가다 보면, 이야기할 거리가 생길 것 같아요. 책을 좋아하니까요. 또 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걷는 사람, 하정우하정우 저 | 문학동네
그가 길 위에서 바라본 노을, 무지개, 하늘, 그의 새벽 걷기 코스의 쉼터이자 카페가 되어주는 한강 편의점, 걸은 후에 그가 직접 조리한 요리 등 그가 모아둔 일상의 단편들이 스냅사진으로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