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매일같이 쏟아지는 250경 바이트의 정보가 미국 의회 도서관이나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보다 적은 양의 자료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날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정보는 사실 CCTV 화면이나 마찬가지다. (중략)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전송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보다 중요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느냐다.
- 6쪽
심리학자 시나 아이엔가는 마트에서 소비자들에게 스물네 가지의 잼과 여섯 가지 잼을 보여줄 때 구매 의사결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폈다. 소비자들은 여섯 가지보다 스물네 가지 잼의 시식코너에 더 많이 몰려들었지만, 더 많이 구입한 건 여섯 가지 잼 판매대에서였다. 다양한 선택지가 오히려 구매 의욕을 꺾은 셈이다. 선택 사항이 늘어날수록 기회비용에 대한 후회는 늘어난다. 사람들은 적은 후회를 낳는 행위를 선호하고, 더 많은 정보 앞에서 후회를 피하려고 아예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모든 게 과잉인 사회, ‘큐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도 방대한 정보량으로 인한 피로도 때문이다. 큐레이션은 선택지를 줄이고 덜어내는 돌파구다. 기존의 ‘더 많은 생산’에서 벗어나, ‘더 적은 선택’과 ‘더 좋은 생산’을 추구한다. 미술관에서만 사용되던 이 단어는 옷차림, 스타일, TV 프로그램, 책, 영화 등 모든 영역에서 정보를 추출하고 대신 제공하는 서비스로 다시 살아났다.
마이클 바스카는 출판업계에서 일하며 큐레이션이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환경을 목격했다. 모두가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를 남용하면서 의미가 퇴색되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무시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큐레이션만큼 지금의 사회와 경제에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수단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과잉 문제에 맞서서 과감히 덜어낼 것을 주장하는 『큐레이션』은 “21세기 사회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걸 생산하는 게 문제
한국에 온 건 처음이라고 들었다.
매번 오고 싶었는데 마침내 오게 되어서 행복하다. 출판업자로서 많이 여행하는 편이다. 여행하는 것도 좋아하고, 무엇보다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웃음)
『큐레이션』이 많은 국가에서 소개되었는데.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러시아어, 크로아티아어, 페르시아어, 곧 포르투갈어로도 출판될 예정이다.
책을 냈을 때 이 정도의 반응을 예상했었나?
책을 쓰는 사람으로서 전세계에 책이 퍼져나간다는 건 기쁜 일이다. 명성을 얻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잘 되고는 있다. 누구나 자기의 말이 그 의미를 전달하고 사람들과 연결되는 건 자부심이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국가에서도 이 책을 관심 있게 본다는 건, 세계적으로 큐레이션이 주요 트렌드가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전세계가 비슷한 경제적 모델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걸 생산하는 게 문제다. 특히나 데이터와 인터넷 정보를 다루는 산업에서는 큐레이션에 대한 관심사와 중요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큐레이션을 주제로 책을 써야겠다는 계기가 있었나?
10여 년 전부터 디지털 혁명이 출판업계를 강타했다. 이북이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출판업자로서 이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컨퍼런스를 많이 참석했었다. 모든 사람이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걸 보면서, 주로 미술계에서 사용하던 단어가 왜 출판업계에서 나오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멋져 보이고 있어 보여서 사용하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큐레이션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출판업의 문제일까?
출판업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출판 관계자들도 이 문제를 이미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매년 백만 종의 책이 매년 출간되는데, 그전에 출간됐던 책까지 합치면 말도 못 하게 정보가 넘치는 상황이다. 어떻게 선별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줄 것인지 해결책을 찾다 보니 책으로도 묶이게 되었다.
출판사의 역할
지금 시대를 설명하면서 “큐레이션 그 자체가 문화 자본이 되는 새로운 단계(384쪽)”라는 문장이 있었다. 큐레이션 자체가 문화 자본이 된다는 건 어떤 뜻인가?
예전에는 많이 지식을 가졌거나 높은 위치에 있는 특별한 계층이 문화를 전유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달라졌다. 문화가 파급되는 방식도, 예전에는 특정한 곳에서만 특정한 전통의 문화가 퍼졌다면 지금은 전통도 세계화되었다. 어떤 사람이 문화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그 자본은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어떻게 섞고 배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영국 사람은 이제까지 영국 음식만 먹고, 한국 사람은 한국 음식만 먹어왔다면 이제는 전통을 서로 섞어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먹고 있지 않나? 문화자본은 ‘믹스 앤 매치’의 문제다. 어떻게 혼합하느냐에 따라 문화 자본이 결정되는 콘셉트가 기존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편집자와 출판사의 권한이 막강했다. 이후 점차 판매자와 리뷰자가 핵심 중개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힘이 독자에게 이양됐다(271쪽)”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독자가 모든 권한을 다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출판사와 편집자가 추천한 책을 사람들이 읽었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책이 워낙 많다 보니 독자의 리뷰에 실제 독서 시장이 영향을 받는다. 누구나 다 큐레이터가 된 세상이다. 누군가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감상을 SNS 등에 올리면, 그 감상에 의해 다른 누군가가 책을 읽는다. 출판시장에서도 점점 모든 일이 큐레이팅 화 되고, 개개인이 큐레이터가 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서점이나 출판사 자체로도 큐레이션을 하고 있다. 서점에서 소정의 금액을 내면 개인에게 맞는 책을 추천해준다거나, 출판사에서 북클럽을 모집해 선별한 책을 읽는 모임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좋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출판사는 책이 나왔을 때 이 책은 아니라고 말하는 일이 중요하다. 출판사에서 모든 책에 ‘예스’라고 말하면 책이 넘쳐나 감당할 길이 없다. 어떻게 보면 출판업계는 이미 큐레이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게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고.
점점 책이 안 팔리는 세상이다.
출판업계뿐만 아니라 정보를 다루는 업계는 예전부터 쉽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도 항상 과잉의 문제가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건 이 산업에서 연결된 사람들이 파트너십을 맺어서 어떻게 하면 과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큐레이팅 작업을 해서 좋은 정보를 준다면 발전할 만한 미래 방향이 생길 것이다. 이 문제는 전세계적으로 다 가지고 있는 문제기 때문에, 책 큐레이션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큐레이션에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큐레이터를 자청하는 단체와 인물이 많아지면서 큐레이션 자체가 피로도를 높이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큐레이션 역시 하나의 과잉이 되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지적한 부분이 맞다. 좋은 걸 주겠다고 하는 행위가 이미 너무 많아졌다. 하지만 그걸 누군가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현명하게, 자동화된 큐레이션과 함께 사람의 지식으로 세심하게 선별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최근 한국에서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원저작물을 무단으로 리뷰하고 그걸로 광고 수입을 얻으면서 원작자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원작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까.
제대로 답변이 될지 모르겠다. 분명 어려운 문제고, 원작자의 권리가 진짜 문제일 수도 있다. 큐레이터의 역할은 사회에 영향을 끼치거나 중요한 역할을 받는 게 아니라, 중간에서 도와주는 역할이다. 구체적으로, 법적으로 저작권을 보호해야 할 이슈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쉽지 않다. 유튜버나 큐레이터들의 권한이 커지고 사회적 영향력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하는 말에 사용자가 많이 휘둘릴 가능성 또한 커진다. 스타 DJ가 믹싱한 음악이 원 작곡가의 곡보다 더 유명해지는 경우도 많지 않나.
개개인도 자기 정보를 큐레이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조차 정보 관리의 대상이 된 건데, 정보 이용자가 스스로 자기 정보를 관리하고 주체적으로 큐레이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개인이나 회사나 본질은 같다. 큐레이터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남들과는 다른 선별을 하려면 어떤 분야를 깊게 공부하더라도 많은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로 예외는 없다.
원정보를 축약한 걸 읽는 것도 도움이 될까?
많이, 긴 시간 동안 읽어야 할 것이다. 뛰어난 큐레이션을 하는 사람들은 특정 분야에 대해 남들이 안 쳐다본 수준까지 간 장인에 가깝다. 큐레이터가 되려면 빨리 갈 수 있는 짧은 길은 없는 것 같다.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고,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그러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큐레이션마이클 바스카 저 / 최윤영 역 | 예문아카이브
현대 사회에서 “양질의 콘텐츠만을 선별?조합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재창출하는 큐레이션이 미래를 준비하는 최선의 전략”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