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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섭 “당신 학교의 교훈은 뭐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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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  『대리사회』의 저자 김민섭의 이야기는  『훈의 시대』로 이어졌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무엇으로 존재해 왔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던 그는(『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 대학을 나와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면서 “나를 포함한 모든 개인들이 대리인간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끊임없이 대리인간으로 만들며 존재해 왔음을” 깨달았다( 『대리사회』 ). 그리고 삶에서, 거리에서, 마주쳤던 훈들을 수집해  『훈의 시대』에 담았다. 한 시대를 지배해 온 언어가 종말했음을 알림으로써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자고 제안한다.

 

교훈, 가훈, 사훈, 훈화, 훈계, 훈시... ‘훈(訓)’은 언제나 우리 곁을 맴돌았다. ‘순결, 정숙, 배려, 겸손’을 배우며 자란 여학생과 ‘단결, 용기, 명예, 열정’을 되뇌며 자란 남학생. 그들은 사회에 나와 ‘고객만족’과 ‘남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맨’이 되었고, ‘어디에 사느냐’는 물음에 ‘○○동 ○○아파트’로 답한다. 우리를 거쳐 간 교훈과 사훈과 아파트의 브랜드에는 누구의 욕망이 깃들어 있었을까. 그 결과 우리 몸에는 어떤 욕망이 주입되었을까. 김민섭 저자를 만나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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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더 행복할 예정이에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잘 지내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은 두 가지가 궁금하실 거예요. 첫째는 대학을 나와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느냐는 건데요. 대학에 있을 때는 내일도 변함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대학을 나와서는 하루하루 어제보다 더 행복해요.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행복할 예정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삶이 너무 행복해요. 둘째로는 아직 대리운전을 하는지 궁금하실 텐데요. 지금은 생계를 위해서 대리운전을 하지는 않아요. 제 삶에 맞춰서 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대리운전 콜이 나오면 그걸 잡아서 어디로든 가요. 거기에서 맛집 찾아서 아침도 먹고 글도 쓰고, 그러다가 집으로 오는 콜이 있으면 잡아서 돌아와요. 그냥 돌아다니면서 먹고 글 쓰고 했을 뿐인데, 집에 와보면 그날의 수익이 플러스되어 있는 거죠. 굉장히 즐거운 일이에요.

 

대리운전을 계속 하고 계시네요.


얼마 전부터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을 정해놓고 대리운전만 하고 있어요. 노동이라는 게 주는 것이 있거든요. 그렇게 했을 때 쓸 수 있는 글이 더 늘어나요. 단순히 소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요. 글을 쓸 수 있는 몸으로 변하게 돼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서도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든 어느 정도의 육체노동을 반드시 하면서 살고 싶다’고 썼는데요. 노동은 사람을 되게 겸손하게 해줘요. 제가 대리운전의 이용자만 됐을 때보다 노동자도 되었을 때, 겸손한 몸으로 며칠을 더 살 수 있어요. 그런 몸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계속 하고 있어요. 물론 돈도 되고요(웃음).

 

부럽네요.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할 거라는 확신을 갖고 계신다는 게.


대학에 있을 때는, 누군가 저한테 행복의 점수가 몇 점이냐고 물으면 0점이라고 대답했었어요. 물론 강의하고 연구하는 건 즐거운데 내일 내 위치가 바뀌지 않을 것 같았고, 바뀐다면 강의 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으로 지위가 바뀌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 불안감만 있었죠. 그래서 그때는 행복 지수라는 것 자체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되게 행복해요.

 

『대리사회』가 출간됐을 때 <채널예스>와 인터뷰를 하셨어요. 그때 이미  『훈의 시대』를 구상하고 계셨던데요?


맞아요. 사실  『대리사회』  를 쓸 때 다음 책을 구상한 건 아닌데요. 대리운전을 하면 정말 온갖 곳을 다 가보게 돼요. 여기저기 다니다가 사람들의 언어를 발견했어요. 우리 주변에 있는 언어들 있잖아요. 제가  『훈의 시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언제였냐 하면, 분당에 있는 어떤 건물의 화장실을 갔을 때였어요. 그 건물에 있는 한 회사의 문 앞에 사훈이 쓰여 있었는데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일한다’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일찍 출근한다’ 등등 다섯 가지가 쓰여 있었어요. 그걸 한참 보면서 서있었어요. ‘이게 뭐지? 내가 이 회사에 다닌다면 어떨까? 이걸 매일 보면서 출근하고 퇴근해야 되는데... 나중에 이게 익숙해지면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때의 경험이  『훈의 시대』를 쓰는 계기가 되었군요.


이런 문장들과 언어들이 우리 주변에 있으면서 우리를 통제하고, 그렇게 우리 몸을 ‘두 배 더 열심히 일하는 몸’으로 만들어가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거예요. 그런 게 일시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 계속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보다 보니까 ‘우리는 정말 ‘훈’이라는 언어에 포위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시대의 언어들이 지방대 시간강사들과 대리인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해서 『훈의 시대』를 쓰게 됐어요.

 

‘훈’의 다양한 사례들을 조사하셨어요.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되게 재밌었어요(웃음). 제일 먼저 아내한테 물어봤어요. ‘당신 학교의 교훈은 뭐였어?’ 물었더니 ‘착한 딸, 어진 어머니’였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언어들이 다 사라진 줄 알았어요. 적어도 우리가 드러내놓는 공간에서는 소멸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여전히 그 학교의 교훈은 바뀌지 않았을 거잖아요. 그러면 공립 여고들의 교훈과 교가를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시니 어떻던가요?


아내한테 사과할 뻔 했어요(웃음). 그런 교훈이 일반적이더라고요. 제가 두 번째로 찾아본 곳이 강원도에 있는 모 여고였는데, 교훈이 ‘성실, 순결, 봉사’였어요. 세 단어를 조합해 보니까 너무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더 찾아보니까 여성의 몸이 아담하다는 걸 교가에서 노래하고 있고, ‘순결한 조선의 여인이 되자’ ‘정숙한 엄마가 되자’ 이런 것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요즘 젠더 이슈가 많이 있는데,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누군가를 비난하고 구속시키고 승리를 선언하는 것보다도, 이런 언어들을 찾고 바꿔나가는 게 먼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의 언어를 폐기할 때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열리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요.

 

그래서 공립 여고의 교훈, 교가를 다 찾아보셨죠?


네, 그리고 지금 이 내용을 가지고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생애 주기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학교라는 공간을 12년 동안 거치잖아요. 12년 동안 하나의 정해진 ‘훈’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노래하는 거죠. 사실 ‘훈’들은 교가에 다 박제되어 있어요. 계속 불러야 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훈이라는 걸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하고 생각하고,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의 훈이 뭔지도 모르고요. 저부터도 그래요. 아직 저희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갔지만, 이 책을 쓰지 않았다면 저도 모를 예정이었을 거예요.

 

남고의 사례는 굉장히 달랐죠?


너무 달랐죠. 교훈의 키워드도 달랐지만, 여고의 경우는 여성을 젠더로서 호칭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아름다운 꽃송이’ ‘여인’ ‘어머니’ ‘딸’ 같은 거죠. 그런데 남자는 ‘사람’ ‘인간’ ‘국민’ ‘아들’ 등으로 호칭되는 거예요. 의외로 아들이라고 호칭되는 경우도 별로 없더라고요. 아들이라고 하면 몸을 가정에 귀속시키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고 ‘세계와 미래와 조국을 선도해야 하는 몸’이기 때문에 가정을 벗어난 몸으로 계속 확장되는 거예요. 남성들의 몸이 비대해지도록 언어에서부터 이미 규정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째서 여성은 공부하는 몸이 될 수 없는 건가’라는 의문도 들었고요.

 

‘공부하는 몸’이라고요?


남성은 ‘학도’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는데, 여성의 경우는 한 건도 없는 거예요. 정말 놀랍게도 단 한 건도 없었어요. 남성은 공부해서 미래와 조국을 선도해야 할 몸이 되는 거고, 여성은 공부해서 여성으로 남아야 되는 거잖아요. 사실 저는 그렇게 섬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제 아이들이 그런 몸으로 자라기를 원치 않아요. 제 아들이 그렇게 비대해진 몸이 되길 원치 않고, 제 딸이 그렇게 아담하고 왜소해진 몸으로 자라기를 바라지 않아요. 같은 몸으로 자라길 바라죠. 그런 몸이 형성되는 데 부단히 관여하는 게 언어들이라는 걸 인식하게 됐어요.

 


익숙하지 않은 언어, 오염되지 않은 언어


책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이죠. 이제 그것들을 어떻게 바꿀지 고민해야 할 텐데요. 강화여고의 경우에는 학생회의를 통해서 교가의 가사를 바꿨죠? ‘여자다워라’라는 후렴구를 ‘지혜로워라’ ‘은수되어라’로 바꿨어요.


오늘 강화여고의 교장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여자다워라’라는 문구가 적힌 바위를 치우시겠다고요. 강화여고에  『훈의 시대』를 보내드렸는데 교장 선생님께서 책을 읽으시고, 어차피 바위를 치우려고 했는데 내년에 치우기로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냥 버리기보다는 학교에 전시해두기로 하셨대요. 학생들이 보면서 ’우리 선배들은 이런 걸 보면서 학교에 다녔구나‘ 생각하면 산교육이 될 것 같다고요. 정말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세요(웃음).

 

반대되는 사례도 있었죠. 원주여고는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라는 교훈을 바꾸지 못했잖아요.

 

학생들과 교사들은 압도적으로 찬성을 했는데, 총동문회에서 만장일치로 반대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굳이 강행을 하지 않으셨대요. 그런데 사실 저는 교훈을 바꾸지 말자는 의견이 이해가 돼요. 저 같아도 그랬을 것 같아요. 나에게 익숙한 것이고 전통이잖아요. 언어로 인해 개인의 몸이 형성된다고 했을 때, 그런 개인들은 그 언어들을 수호하는 쪽에 서는 거죠. 누구나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를 지키려고 하잖아요. 가장 큰 문제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건데요. 제가 책을 쓰면서 가장 희망적이었던 건, 2000년대 이후에 설립된 많은 학교들은 젠더적인 언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1950~1970년대까지 설립된 학교들은 심각한 정도고요. 시대의 언어들이 정말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훈’이라는 게 한 번 정해지면 잘 안 바뀌잖아요.


그렇죠. 예를 들면 1960년대에 설립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여전히 순결, 성실, 봉사 같은 언어들을 보면서 등교하는 거죠. 2000년대에 설립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다르겠지만요. 그런데 결국은 똑같은 아이들이잖아요. 왜 서로 다른 몸으로 형성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죠. 우리는 ‘훈’이라는 것을 박제해 놓고 잘 고치려고 하지 않는데, 사실 언어는 전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시대에 맞게 바꿔나가야 하는 것이죠. 특히 중요한 건,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익숙한 언어로 바꾼다는 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게 아니라 시대를 반복하는 일이잖아요. ‘새로운 시대의 다음 세대들은 이런 언어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의한 오염되지 않은 언어들을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보통은 자신을 형성한 언어들을 수호하려고 하잖아요.


누구나 그렇죠. 특별한 개인들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에게 익숙해진 언어들을 계속 반복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에 반발하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해야 될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익숙한 것들을 의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낯선 것들이 보이면 ‘이거 이상해’라고 할 게 아니라 ‘저건 어떤 것일까?’ 하고 공부도 해보고 자신의 삶에 적용도 시켜보는 거죠. 익숙한 언어들을 계속 사용하다 보면 보수화된 개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요즘에는 ‘사훈’도 여러 언어로 바뀌고 있죠?


이제 ‘사훈’이라는 용어는 거의 실종됐어요. 뭔가 힙하지 않고, 쿨하지 않고, 혁신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 같아요. 대신 ‘경영 철학, 경영 이념, 창업주 정신, 비전, 인재상, 소명’ 등등 많은 말들로 분화됐더라고요. 비유하자면, 예전의 언어들은 강력하고 딱딱한 고체였던 것 같아요. 마치 몽둥이처럼 때리는 거죠. 사람이 맞다 보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여러 가지 언어로 변형이 됐어요. 고체가 아니라 액체 같아요. 물뿌리개로 뿌리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몸이 젖어 있고, 그런  몸이 되어가는 느낌이에요.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한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가 ‘훈’이라는 개념에도 잘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층 더 교묘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눈치 채기 어려워진 거죠.


네. 누가 때리면 ‘아프니까 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마치 분사된 물처럼 나오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같이 유동하게 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 철학이나 이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단어들이 있었나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요. 하나는 회사 자체에 대한 사훈이고, 또 하나는 회사원들에게 요구하는 사훈이었어요. 회사의 사훈은 거의 ‘고객만족’이었죠. ‘우리는 고객을 만족시키는 회사가 되겠습니다’라는 건데요. 저는 ‘고객’이라는 언어부터 돌아봐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객이라고 할 때 ‘돌아보다’라는 뜻의 ‘고(顧)’를 사용하는데 ‘방문하다’라는 뜻도 있더라고요. 이게 정체불명의 단어인데, 산업화시기에 많이 쓰이기 시작했어요. 사용빈도가 높아지면서 언제부턴가 손님을 높이는 언어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고요. ‘고객만족’이라는 훈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천박하게 바꿔놓았는지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 만연한 갑질도 결국 소비자의 지위를 전에 없이 격상시켜 놓은 데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싶어요.

 

회사원들에게 요구되는 사훈은 어땠나요?


그게 ‘인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누구나 생각하는 단어들이 있었어요. 도전, 열정, 노력 같은 것들. 그게 꼭 있더라고요. 우리가 몇 년 전부터 ‘노오-력’이라고 하면서 조롱한 것 같은데, 여전히 ‘노오-력’, ‘도오-전’, ‘여얼-정’ 같은 것들이 회사의 훈에 박제돼 있는 거예요. 그 언어들을 이제 폐기하자라는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하는 공간에 당당히 박제돼 있는 거죠.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회사가 고객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지만, 사실상 ‘우리’에서 상층부의 사람들은 빠져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고객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상대해야 되는 건 회사원들이잖아요. 고객이 된 사람들은 조금 더 많은 소비를 하고 그 이익은 회사가 가져가지만 감정 노동, 감정 소비를 담당하는 건 일선에 있는 우리들이죠. 결국 우리가 돌고 돌면서 서로를 다치게 하는 건데 ‘그렇다면 이런 훈을 만들어 놓은 건 누구인지, 그 훈은 과연 누구를 위한 건지’ 계속 생각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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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학교, 회사, 그 다음으로 거주 공간과 관련된 ‘훈’이 나와요. 아파트와 빌라의 브랜드에 관한 내용이죠?

 

브랜드 아파트가 생긴 지는 불과 20년이 안 됐다고 하는데요. 그 이름들이 우리 삶을 너무 잠식해버린 것 같아요. 어디 사는지 물어보면 ‘캐슬에 살아’ ‘래미안에 살아’ ‘자이에 살아’ 하고 대답하는 식이죠. 그런데 요즘 생긴 아파트들은 그 뒤에 또 뭐가 붙어요. ‘래미안 첼리투스’ 같은 거죠. ‘왜 서브 브랜드가 또 붙는 거지?’ 싶어서 친구랑 같이 조사를 했어요. 아파트 브랜드가 생긴 이래 대형 건설사 세 곳이 지금까지 분양한 아파트 이름을 정리해 본 건데요. 서울의 강남과 강남 외 지역, 전국, 이렇게 세 개로 나누어서 통계를 내봤어요. 그랬더니 명확히 보이더라고요. 이런 움직임이 강남에서 시작됐다는 것과, 강북과 전국이 따라가기 시작한 순간부터 강남에서 서브 브랜드를 붙였다는 게 보이는 거예요.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 자신의 공간에 언어를 덧입게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서브 브랜드를 붙인 이후에 오히려 강남에서는 서브 브랜드가 줄었어요. 오히려 지방에서 서브 브랜드가 늘고 강남은 줄어드는 느낌이었는데요. 그걸 붙이지 않는 것도 하나의 권력이 된 것 같아요. 저희가 전수 조사를 다 한 건 아니라서 흐름 정도만 짐작하는 것이지만, 서브 브랜드라는 것조차도 특별함을 덧입기 위한 욕망에서 시작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빌라의 경우는 어땠나요?


저는 아파트보다 빌라의 경우가 더 흥미로웠어요. 가끔 불광천을 산책하는데, 천변에 있는 큰 빌라 이름이 ‘래미안 아파트’더라고요. ‘삼성이 여기에 아파트를 지었나?’하고 봤더니 조금 규모가 있는 빌라였어요. ‘정말 래미안 아파트에 살고 싶었거나 짓고 싶었던 빌라 주인이 이름을 래미안으로 짓는 것으로 타협을 봤구나’ 싶어서 친구랑 한참 웃었어요. 그러다가 근처의 빌라 이름을 찾아 봤는데, 휘황찬란한 이름들이 많더라고요. 아파트 이름을 갖다 붙이는 건 옛날에 지어진 빌라들이고, 요즘 빌라는 ‘아트빌’ ‘하이츠빌’ 이런 이름들이 많았어요. 아파트를 따라가지 못한 빌라와 다세대 주택들이 우리 시대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욕망을 손가락질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어떤가 싶고요. 그래서 다세대 주택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도 해봤는데, 그런 욕망들이 보이더라고요.

 

마치 고등학교의 이름이 ‘서울대 고등학교’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웃음). ‘서울대를 꿈꾸는, 서울대에 진학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잖아요.


그렇죠(웃음). ‘명문 서울대 고등학교’ 이런 식인 거죠.

 

“단절의 선언”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을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그 이면에 ‘단절의 선언’이 있다는 건 씁쓸하게 느껴져요.


예전에 과외를 하러 고급 아파트에 가본 적이 있는데요. 2단계 인증을 거쳐서 들어갔어요. 그때 ‘나는 정말 이곳의 이방인이구나, 빨리 과외하고 집에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에 대리운전을 하면서도 느꼈지만, 요즘은 대리운전 기사들뿐만 아니라 노동을 하기 위해 아파트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아파트에 들어갈 수는 있는데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출구를 못 찾겠다는 거죠. 요즘 생기는 아파트들은 단절과 폐쇄로써 자신들의 특별함을 덧입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 공간에 살지 않는 타인에게 불친절해진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책을 쓰면서 여러 사례를 찾아보니까, 요즘은 2단계가 아니라 3단계 보안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아파트 전체를 둘러싸는 거죠.

 

아파트 정문에서부터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건가요?


네. 제가 검색 허용이 되어 있는 입주자 카페에 들어가 봤는데, 한 입주자 대표가 ‘우리 아파트를 폐쇄형으로 바꾸는 것에 찬성하십니까’ 하는 글을 써놨더라고요. 입주민이 아닌 사람들로 인해서 소음 피해도 생기고 아이들이 범죄에 노출될 위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써놨냐 하면 ‘이로 인해 우리 아파트의 총 자산 가치는 얼마가 상승할 걸로 생각됩니다’라는 거였어요. 그 밑에 수십 명이 찬성한다고 썼더라고요. 어째서 아파트를 성처럼 둘러싸고 외부와 단절하고 폐쇄를 선언하는 게 자산 가치로 이어지나, 싶었어요. 모든 연결의 가능성을 차단해 두고 그 안에서 어떤 특별한 가치를 선언하고 있는 건데, 거기에서 ‘훈’으로 제시되는 건 ‘안전’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많이 안전해요. 과잉된 안전으로 인해서 모든 연결을 차단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특정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끼리 비밀번호를 공유하고 그들끼리만 폐쇄된 특정 공간에서 산다면, 그 아이들은 단절과 폐쇄성 안에서 그 내부에서의 연결만 감각하고 자라는 거잖아요. 그건 아주 나쁘다고 생각해요.

 

책과 ‘훈’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요. 올해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의 제목을 살펴보기도 하셨죠. 거기에서는 무엇을 보셨나요?


올해 서점에 가면 전에 없던 감정을 받게 됐어요. 베스트셀러 책의 제목들이 이전과 다르다는 거예요. 이전의 베스트셀러들은 ‘관심 있으면 한 번 펴 봐’ 이런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지금 나의 감정을 써놓은 느낌이에요. ‘오늘 나한테 무례했던 사람은 왜 그랬던 걸까’ 하고 우울해서 서점에 들어갔는데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이 있어요. 그러면 당연히 사야죠(웃음). 힘들어 죽겠는데 ‘서점 잠깐 들렀다가 떡볶이 먹으러 가야지’ 생각했던 사람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봤어요. 그러면 사야죠, 당연히(웃음). 그 제목들이 마음을 위로해주는 거예요. 책에서 “15,000원의 오늘의 훈”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요즘 책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제목을 하나의 ‘훈’으로 삼아서 위로를 받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해요.

 

책꽂이를 보면 그 사람의 욕망이 보인다고 하셨어요.


거주 공간에서 사람이 온전히 내 공간으로 둘 수 있는 게 책꽂이밖에 없어요. 저는 책꽂이가 모든 개인들에게 허락된,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훈’의 전시 장소라고 생각해요. 책의 제목이 ‘훈’으로써 사람을 위로할 수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요.

 

올해 출간하신 에세이  『고백, 손짓, 연결』의 경우, ‘죽을 만큼 힘든데 죽고 싶은 건 아니야’라는 제목으로 나올 뻔 했다면서요?


그 책에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요. 친구랑 술을 마시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그 친구가 회사를 그만뒀을 때였는데 ‘내가 진짜 죽을 만큼 힘든데 죽고 싶은 건 아니거든’ 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소름이 돋았어요. ‘다 그렇게 사는데’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책 제목으로 쓰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쓰기 한 달 전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나왔어요(웃음).

 

『훈의 시대』  마지막 부분에서 ‘욕망으로 남은 말들’에 대해 쓰려고 하셨죠?


이 책을 쓰는 동안 너무나 많은 막말들이 나오는 거예요.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고 반응하는데 며칠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막말들을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겠다, 누가 어느 맥락에서 어떤 막말을 했는지 적어놓으면 이런 짓들을 덜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결국 언어라는 건 우리가 기억할 때 바꿀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시대를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욕망으로 남은 말들’이라는 아카이브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결국은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 이야기로 시작하셨어요. 끝은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맺으셨고요.


‘욕망으로 남은 말들’을 마지막 챕터로 하려다 보니까 너무 절망적인 거예요. 그래서 저의 ‘훈’을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예전의 저는 타인이라든지 연결이라든지, 이런 단어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최근의 여러 경험들을 하면서 -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 책을 쓰는 과정, 대리운전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그것이 정말 중요한 단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만든 ‘훈’이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거거든요. 그 ‘훈’을 전하는 걸로 책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는 하나의 마음에서 시작됐더라고요. 항공권을 환불하면 80% 이상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여행사 직원의 말을 듣고, 화내고 따지는 대신에, 항공권을 양도 받을 ‘김민섭’을 찾기 시작하셨잖아요. “‘나를 닮은 사람들’에게는 화를 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요.


사실 ‘수수료를 너무 많이 떼어가는 거 아니에요?’라는 말이라도 할까 싶었는데요. 그 말조차 안 하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저랑 통화하는 그 여행사 직원이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거든요. 나를 닮은 사람일 거고요.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양도할 수 있나요?’ 하고 바로 물어봤어요. 그래도 된다고 해서 프로젝트가 시작된 거고요. 그런 태도에서 많은 것들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저도 항상 그렇게 사는 건 아니에요. 그때 갑자기 착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지(웃음), 그렇게 못 살아요. 그런데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조금 더 행복할 것 같아요. 

 

살면서 영향을 많이 받은 ‘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일 크게 미친 건 ‘노력’이에요. 저는 이승엽 선수를 좋아하는데, 이승엽 선수가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었어요. 그걸 듣고 저도 ‘아, 그렇구나. 노력해야 되는구나’ 생각했고, 노력이라는 단어가 저한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훈’인 것 같아요. 그런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꼭 그 ‘훈’을 따르는 건 아니에요. 저도 노력을 ‘훈’으로 삼았을 뿐이지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나름의 노력을 했던 건데, 그 노력이 저를 배신할 때가 많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했는데, 왜 나는 이것을 이루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늘어나면서 지쳐가고, 자신을 혐오하게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 ‘나는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나의 모든 실패가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로 귀결될 때가 있었고, 그때 그 ‘훈’을 버리게 됐어요.

 

버렸더니 편해지던가요?


그 ‘훈’을 버리고 마음이 되게 편해졌어요. 그리고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를 하고 김동식 작가를 만나면서, 누군가의 잘됨은 우리의 잘됨이 되고 사회의 잘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누군가 잘됐다고 할 때 ‘저 사람만 잘 먹고 잘 살겠구나’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잘됐으니까 나도 잘 되겠구나’ 하는 거죠. 저는 계속 그렇게 살아가고 싶고 ‘저 사람의 잘됨이 우리의 잘됨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계속 찾아보고 싶어요. 그 사람을 잘되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김동식 작가가 잘 돼서 저는 너무 너무 좋아요. 올해 가장 좋은 일이 뭐였냐고 하면 김동식 작가가 잘 된 거예요. 그 사람의 잘됨은 우리의 잘됨이 될 게 확실하니까(웃음).


 

 

훈의 시대김민섭 저 | 와이즈베리
일상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강요되는 훈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한 개인의 몸을 만드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본다면 훈은 결국 한 인간의 격格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회적 기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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