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필요 없어. 좀 건달처럼 보이면 어때? 작가는 원래 그래야 해.” 『쓸모 인류』를 함께 쓴 빈센트 리가 강승민 저자에게 빨간색 모자를 씌우며 말했다. 거추장스러운 재킷 대신 반짝이는 비니를 써보라고 제안하는 67세 빈센트 리. 얼결에 두 사람은 빨간 모자 쓴 듀오 저자가 됐다. 어떤 책일지 좀처럼 짐작되지 않는 『쓸모 인류』 . 이 책의 시작은 조금 특별하다. 15년간 기자, 편집자로 살다 지금은 대형 마트에서 피자를 굽는 강승민 저자와 서울 가회동에 한옥을 짓고 매일 요리하는 빈센트 리. 두 남자는 몇 개월 동안 아침 일찍 만나 인생의 사사로운 것들에 대해 논했고, ‘어떻게 살면 쓸모 있는 어른이 될 것인가’에 물음표를 던졌다. 삶의 불편함 혹은 불만을 인지하고,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아직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어쩌면 내 인생의 또 다른 쓸모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내 삶에 핑계를 대는 건, 질색이야
특이한 책이다. 공저이긴 하지만 인터뷰집도 아니고. 강승민 저자가 빈센트 리를 만난 후 느낀 단상을 담은 책으로 볼 수 있다.
강승민 : 빈센트 리를 알게 된 건 10년 전쯤이다. 매거진에서 기자로 일할 때, 그의 아내인 주얼리 디자이너 ‘우노 초이’를 인터뷰했는데, 빈센트 리가 내 영어 이름을 지어줬다. 좀 특이한 어른이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이렇게 책을 같이 쓰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빈센트 리의 첫인상은 어땠나?
강승민 : 딱딱하지 않고 권위적이지 않은 잘 노는 어른?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었지만 무엇보다 확고한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비가 오는 습한 날이면 시가를 한 대 태울 수 있는 어른이라고 할까?
강승민 저자가 당신을 소재로 책을 써보고 싶다고 했을 때, 바로 수락했나?
빈센트 리 : 바로라기보다는 조금 의문이 있었지. 나는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내 이야기가 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생겼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서로 마음이 맞고 시간이 맞았으니까. 한번 써봐도 좋을 것 같았지.
『쓸모 인류』라는 제목이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강승민 : 초고를 쓸 때 가제목은 ‘대충 살지 않습니다’였다. 빈센트 리를 인터뷰할 때 ‘맥가이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냐면 그는 생활의 쓸모 있는 많은 것을 스스로 고치는 사람이었으니까. 빈센트는 매일 아침 브런치를 만들고, 사는 공간을 잘 정리 정돈하고, 필요에 따라 집을 뚝딱 고친다. 일만 나불대는 꼰대가 아니라 손을 쓸 줄 아는 인류, 그리고 아내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할 줄 아는 사람.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생기면 Just Do It’하는 성격이라고. 즉각적인 실행이 어떻게 가능한가?
빈센트 리 : 특별할 건 없어. 그냥 하는 거지. 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렇지 막상 해보면 별 거 아닌 일이 많아. 가사 분담도 그래.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과연 따로 있을까? 단지 시도하는 인간의 역할이 있을 뿐이야. 나는 스스로의 쓸모를 찾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게 나의 삶을 응원하는 훌륭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어. 내 삶에 핑계를 대는 건, 질색이야.
강승민 : 빈센트 리는 질문하는 인간이다. 나는 마흔이 넘도록 제대로 질문하는 법을 몰랐는데, 빈센트 리를 알게 된 후, 쓸모에 관해 고민하게 됐다. 우리 나이로 예순 일곱, 은퇴 이후의 삶에 속하는 빈센트 리는 여유가 많아 쓸모를 생각한 게 아니다. 내 삶이 불편해지고 주눅 드는 걸 참지 못해 그 많은 쓸모를 만들었다.
빈센트 리는 동양계 미국인, 사업하던 부모를 따라 홍콩과 미국, 한국을 오가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휴즈항공 등에서 일하다 40대 중반에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LA에서 에너지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다 2017년 은퇴하고, 1년간 가회동의 작은 한옥을 리모델링했다.
빈센트 리 : 휴즈항공에서 일할 때, 직장 동료가 사내에서 인종 차별을 당했어. 회사에 문제 제기를 했지만 내가 오히려 조직적 불이익을 당했지. 이후 회사를 상대로 소송했고 승소했지만, 나는 지금도 이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아. 언젠가 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가회동 한옥이 외국 관광객들의 명소가 됐다. 문고리가 쉴 틈이 없다고. 굉장히 피로한 일이기도 한데.
빈센트 리 : 하루는 아내가 너무 힘들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말했지. “저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 사람들은 어쩌면 평생 한 번 한국을 찾은 건데, 왜 그 행복에 인상을 찌푸려. 좋은 에너지를 주고 간다고 생각해. 잠깐 참으면 돼. 그 사람들이 복을 가져와준다고 생각해.”
집을 구할 때, 3가지 규칙이 있었다. “공간이 소박할 것, 집에 격식이 없을 것, 수다를 피우는 공간일 것.” 지인들에게 집을 오픈할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빈센트 리 : 내가 생각한 집은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어.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모일 수 있는 ‘제3의 공간’. 지금 시대는 모두가 외롭잖아. 그런데 집마저 외롭고 침묵할 필요가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반가운 친구들이 들락거려 활기가 있어야 해. 그래서 함께 요가를 할 수 있는 오픈 형태의 거실을 만든 거지. 우리 집의 최종 목표는 일상에 지치거나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 행복감을 느끼는 아지트야. 좋은 집을 소유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아. 집을 소유하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우리처럼 집을 즐기지 못하는 거지. 나는 소유가 아닌 거주의 편에 서기로 한 거야. 무리해서 집을 살 돈으로 오랫동안 즐겁게 사는 삶을 선택한 거지. 집의 소유보다 집의 생기를 더 고민해야 즐거운 일상이 나올 수 있어.
건축가 입장에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클라이언트였다.
빈센트 리 : 이 집에 계속 살 거니까. 앞으로 20년 이상 집에 손을 안 대려면, 처음에 가능한 완벽하게 손을 봐야지. 좋은 제품에는 다 고집이 있어. 무슨 일에든 핑계를 대지 않는 게 중요하지. 뭔가 잘못되면 결국 하는 사람의 책임이거든. 주인이 핑계를 대고 대충 하면 일을 맡은 사람도 대충하게 돼. 오래 살기 위해선 디테일이 중요해. 대충할 수 없었지.
강승민 : 빈센트 리의 이삿짐을 잠시 도와준 날이었다. 현관 문턱에 짐수레가 이동할 언덕을 만들고, 이삿짐이 지나갈 벽의 기둥 면에는 두꺼운 종이를 붙였더라. 이런 장치가 있으니 일하는 사람이나 집주인이나 서로 인상 붉힐 일이 생기지 않았다. 꼼꼼한 일 처리 방식은 결국 일하는 사람에게 배려였다.
내가 싫다고 “싫다”고 말하면, 꼰대가 된다
강승민 저자는 기자로 오래 일하다 피자를 굽는 일을 하고 있다. 갭이 상당히 큰 전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결정했나?
강승민 : 지금까지 해온 일과 완전히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호기심도 있었을 거고. 나는 비교적 선택을 쉽게 하는 편이다. 버티는 것도 웬만큼 하고. 물론 안 하던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곳은 온전히 몸으로, 내 노동으로 실력을 인정 받아야 하니까. 지금 생각은 내 삶의 경험치가 조금 앞당겨졌구나, 하는 느낌이다.
빈센트 리 : 내가 꿋꿋하다면 어떤 일을 해도 괜찮지. 노동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니까. 사람은 일을 하며 배워. 노동과 예술은 다르지 않지. 머리를 자르는 일도 예술이 될 수 있고, 피자를 굽는 일도 예술이 될 수 있어.
대화를 나누다 합의를 못 본 주제가 있었나? 논쟁이 있었다거나.
빈센트 리 : 없었지. 서로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으니까. 생각이 다를 때는 가만히 놔둬야 해. 고치려고 하면 안돼.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제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누군가를 응원하는 말들을 놓지 않는 것.”(25쬭)이라고 썼다.
강승민 : 내 또래에게 응원 받는 일은 조금 사치가 아닐까 싶다. 밤새 유튜브에서 <The voice>의 출연자가 올 턴하는 장면을 볼 때가 있는데, 나는 노래를 못 부르지만 누군가의 노래가 모두에게 인정 받는 걸 보면 위안이 된다. (웃음)
빈센트 리 :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해. 쉴 때도 많이 쉬어야 하고. 스스로 자신감을 느끼는 게 중요해. 그래야 열정이 생기고 타인에게 봉사도 할 수 있지.
빈센트 리는 요리를 즐겨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음식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빈센트 리 : 나이값의 하나가 음식을 아는 거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집이나 차를 사고 싶어 하지만, 자기가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잖아. 정말 내 몸을 지탱하게 하는 건 음식이야. 자신이 먹을 음식을 직접 요리할 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지. 사람들이 직접 요리를 한다면 이 사회가 더 점잖고 튼튼해질 거라고 믿어. 왜냐면 뭐든 정직하게 만드는 태도를 갖게 될 테니까.
쓸모가 있다면, 꼰대가 되지 않을까?
강승민 : 중요한 건 내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닐까. 30대, 40대, 50대, 60대가 생각하는 문제가 다 다르니까. “내 생각은 이렇지만 네 생각은 이렇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적어도 꼰대는 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싫다고 “싫다”고 말하면, 꼰대가 되기 쉬울 것 같고.
빈센트 리 : 좋은 선생들은 항상 학생들이 나보다 월등할 거라고 믿어.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다 믿는 거야. 어린 아이도 어른이랑 똑같이 보는 거지. 학생과 선생도 마찬가지고. 내가 에순이 넘었지만 아이들한테도 분명 배울 게 있어. 어른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걸 안 주려고 하지만, 아이들은 순진하게 그냥 쑥 주고 말지. 누구에게도 배울 게 있다는 것, 그걸 알아야 해. 알게 된다면 꼰대는 될 수 없겠지.
쓸모 있는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승민 : 대충 살지 않는다?! 적어도 자신의 생에 있어서는 대충 살지 않는 태도가 쓸모 있는 어른을 만들지 않을까? 빈센트처럼 적당히 까칠할 필요도 있고.
빈센트 리 : 인간이 튼튼해지려면 잘 비워야 해. 계속 채우기만 하면 안 되지.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이 오랫동안 실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물론 돈은 좀 더 받아야지. 위로 올라간다고 모두가 일을 잘하는 건 아니야. 자기가 각자 잘하는 부분을 오랫동안 해야지 조직이 튼튼해져. 사회에는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어야 해. 그래야 세상이 굴러가지. 미국 브라운 유니버시티는 입학생이 들어오면 모두를 칭찬해. 공평하게 대우하지. 대학 생활에서 성공하면 학생이 잘한 거라고 생각해. 성공을 못하면 우리가 잘못 가르쳤다고 말하지. 그에 반해 회사는 반대야. 성공하면 회장, 사장이 잘해서고 실패하면 직원을 탓하지. 이런 태도는 사회에게도 개인에게도 손해지.
“한 사람의 까칠한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154쪽)는 문장이 생각난다.
강승민 : 까칠한 생각이 누군가에게 미칠 긍정적인 영향이 분명히 있다. 누군가의 냉정한 평가를 괘씸하게 받아들이는 한심한 타입이 아니라면 다음 번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그렇게 보면 ‘까칠하다’, ‘삐딱하다’는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독자들에게 이 책이 더 쓸모 있을까?
빈센트 리 : 몸을 움직이려고 결심한 사람들에게 유용하겠지. 나는 벌써 알아. 이 책이 1만 명에게 읽힌다면, 그 중 0.1%의 사람만 달라질 거야. 그런데 생각해봐. 책의 10%만 가져가도 인생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어. 이 책이 별난 건 아니야. 한 사람을 바늘로 살짝 찌른 것밖에 안 되지. 그런데 그거 알아? Just do it. 지금 하라는 거야. 그거 하나면 충분해.
강승민 : 내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라는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좋은 질문을 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래도 좀 더 재밌게 읽지 않을까? 어떤 자극을 준다면 더없이 좋겠고.
빈센트 리 : 제목이 무겁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아. 매우 라이트 하지. 가볍게 읽어줬으면 좋겠어. 최종 정산은 생을 마칠 때 하는 거니까. 걱정할 게 아니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는 게 좋아.
쓸모인류빈센트, 강승민 저 | 몽스북
빈센트의 지조 있는 행동력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대화 가운데 나오는 생활 철학을 들으며 우리 삶에 진짜 필요한 ‘어른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