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여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메르스’가 상륙한 한국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하지만 소설을 읽고, 어쩌면 우리는 메르스의 2015년에 대해 절반도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심지어 거의 모를지도 모른다고도. 첫 메르스 의심 환자 신고가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되었는지, 그래서 처음 이틀 동안 그 바이러스가 어디서 어떻게 퍼졌는지, 바이러스에 무방비로 노출된 줄도 모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하고, 생활을 했는지, 그리하여 이들의 삶이 어떻게 황폐화 되었는지, ‘마지막 메르스 환자’가 어떻게 생을 마감해야 했는지, 살펴보니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법적으로는 설령 지더라도 문학적으로는 이기고 싶다, 생각했”다는 김탁환 작가는 메르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 『살아야겠다』를 쓰면서 피해자들 편을 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염병은 끝났지만 메르스의 그늘 아래에서 피해자의 삶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소외시키는 병원의 운영체제와 관료제 아래에서만 움직이는 정부의 권력이 개인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줬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작가는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하지만 작가가 마주한 것은 놀랍게도 숨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메르스 피해자들은 거처를 옮기고, 취재를 거부하고, 목소리를 숨겼다. 소설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숨는 사람들
2016년 늦봄에 이 소설을 써야겠다, 생각하셨다고요.
당시는 3월부터 『거짓말이다』를 쓰기 위해 인터뷰도 하고, 취재하고 있었어요. 5월정도 됐을 때인데요. 기자들 말이, 메르스 1주기가 돼서 피해자들을 만나려고 하는데 아무도 안 만나준다는 거예요. 우선 많은 숫자가 이사를 가서 연락이 두절됐고요. 그나마 연락이 된 분들도 메르스 관련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한대요. 아무도 취재에 응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기자들이 투덜대고 있더라고요. 그게 아주 낯설었어요. 세월호 피해자 분들의 정당성을 계속 주장하면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메르스 피해자들은 그렇게 숨으니까요. 같은 재난을 겪었는데 왜 다를까 생각했죠. 메르스 피해자들은 지금도 조직이 없어요. 모이지도 않고, 뿔뿔이 흩어져 숨고요.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2016년에는 저도 피해자 분들을 만나지 못했어요. 2017년 넘어와서 보니까 민사 재판이 시작했더라고요. 겨우 소송을 진행하는 분들과 어렵게 만나서 이야기를 듣게 됐죠.
피해자 조직조차 없었군요.
제 창작노트를 찾아보니까 2016년에는 ‘숨는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왜 이렇게 숨는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생각했던 거죠. 사람들이 나와서 메르스 이야기를 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다면 나와서 얘기를 할 텐데 말이에요. 오히려 얘기를 할수록 더 문제가 생기니까 벌어진 일이잖아요. 피해자들이 이렇게 되도록 놓아둔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 것이 이 소설의 시발점이었어요.
취재를 엄청나게 하셔야 했을 것 같아요.
우선 세 가지 어려움이, 제가 해야 할 역할들이 있더라고요. 하나는 기자로서의 역할이죠. 취재를 하고, 피해자와 의료진들을 만나는 일이 필요했어요. 또 하나는 학자로서의 역할이었어요. 공부를 해야 하는 거죠. 의학지식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소설의 권위가 없어지는 거니까요. 그것은 르포로도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피해자들은 그냥 주사를 맞았다고 해요. 그 주사가 무엇인지는 제가 찾아내야 하는 거죠. 그게 아주 어려웠어요. 서너 달을 계속 그 공부만 했고요. 나머지 하나가 예술가로서의 역할이었어요. 독자가 알기 쉽게, 어려운 용어가 나와도 쭉 읽을 수 있게 쓰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죠. 사회파 미스터리니까요. 다른 소설보다 최소한 세 배는 어려웠어요.
감정적인 어려움도 크지 않았나요? 더구나 진행형의 이야기니까요. 이렇게 얼마 되지 않은, 가까이에 있는 이야기를 써야 했던 이유가 뭘까요?
감정노동도 있었죠. 힘들었어요. 물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지금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이 사람들이 다 지치고, 더 고립될 거라 생각했어요. 피해자들이 병원, 지자체, 국가 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우선 진행이 아주 더뎌요. 여러 이유가 있는데요. 병원 기록에 오류가 있다는 걸 피해자들이 입증해야 하고요. 어렵게 병원 기록을 구해서 문제를 찾아내도 그걸 감정해 줄 전문가를 찾기가 쉽지 않아요. 감염병 관련 의사들이 증언을 해줘야 하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죠. 증인 구하는 데 1년씩 걸리는 거예요. 그런 시간, 비용이 모두 피해자의 몫인 거죠. 다른 곳에서도 얘기했는데요. 저는 법적으로는 설령 지더라도 문학적으로는 이기고 싶다, 생각했어요. 피해자들이 더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편을 들고 싶었어요. 편을 들려면 지금 들어줘야 하는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거짓말이다』와 비슷했어요.
메르스, 다 아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몰랐던 내용이 정말 많았어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김석주’의 사례도 그렇고요.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죠. 그게 정보화 사회의 맹점이거든요. 여러 곳에서 많이 떠드니까 사람들은 다 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다음 이슈로 넘어가요.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는 게 거의 없어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
“메르스 피해자의 서사를 쓰고자 했다”(628쪽)고 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죠? ‘몇 번 환자’로만 알고 있던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게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기본적으로 인권의 문제예요. 이런 일이 벌어지면 피해자들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거든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니까요. 그런데 어느 정도나 희생을 해야 하는지, 희생하라고 했을 때 반론권은 없는 것인지, 하는 인권의 문제들이 많은데 2015년에는 그런 것을 하나도 다루지 않았잖아요. 2015년 메르스 피해자들의 인권은 전혀 보장되지 못했다는 것이 제 생각이고, 이 책의 핵심이에요. 가령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라는 말이 그래요. 기자들도 도표를 보고 있으면 은연중에 피해자를 가해자로 생각하게 된대요. 1번이 2번에게 옮겼고, 2번이 4번한테 옮겼다, 그렇다면 옮긴 사람은 가해자다, 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게 되잖아요. 심지어 어떤 사람이 한 명에게만 옮긴 게 아니라 여러 명에게 옮겼다면 심한 가해자다, 라고 생각하고요. ‘슈퍼’전파자, 즉 심하게 나쁜 사람인 거죠.
메르스에 감염되었느냐 감염시켰느냐만 놓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구분입니다. 환자가 메르스에 감염되고 또 감염시킬 수밖에 없었던 병원의 관습과 운영 체계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전염을 몇 명이나 시켰든, 메르스 환자는 모두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메르스 환자를 전부 피해자로 둬야, 그들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를 거론할 수 있고, 법과 제도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습니다.(318쪽)
그렇게 ‘슈퍼 전파자’라고 불리던 시기에 그 사람은 뭘 하고 있었는지 찾아봤어요. 사경을 헤매고 있었더라고요. 죽어가고 있던 거죠. 온 언론이 자기를 ‘슈퍼 전파자’라며 가리키고 있는데 반론 한 번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다 다행히 병이 나아서 뒤늦게 찾아보니까 자기가 그렇게 비판 받았던 거죠. 그러면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요. 트라우마죠. 이럴 때 국가나 의료진, 법률가가 그 사람에게 당신은 죄가 없다, 트라우마 치료를 받아야 한다, 고 했어야 하는데 하나도 안 했고요. 기본적인 피해자의 인권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어느 누구도 말이에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사람 목숨, 생명을 천시하는 시스템 속에서 세월호도 터지고 메르스도 일어나고 했”다고 말씀하셨죠. 한 사람의 생명도 소홀히 여겨지면 안 되는데 말이에요.
메르스 환자가 마지막에 한 명 남게 된 그날, 그날이 어떻게 진행될까 많이 생각해봤어요. 그 하루를 잘 써보고 싶었는데요. 그 사람은 당연히 아침에 질병관리본부 일일 현황을 보겠죠. 나만 남고 다 나갔구나, 알게 되겠고요. 문제는 그날부터 일주일 간 엄청나게 많은 보도가 나왔는데 다 이런 식이었어요. 빨리 메르스 청정국이 되어야 경제가 나아진다, 라고요. 그런데 그걸 마지막 환자는 자기 병실에서 휴대전화로 다 보는 거죠. 어떻겠어요? 나만 없으면 메르스 청정국이 되겠구나, 내가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구나,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 하는 거거든요.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가 고통 받는지 따져봐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죠. 그 환자를 온 나라가 죽음의 절벽으로 내몬 거예요. 그 부분을 잘 쓰고 싶었어요.
돌이켜보니 문제적 장면을 몇 군데 꼽을 수 있겠더라고요. 우선 병원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 서둘러 메르스 종식을 선언한 것, 컨트롤 타워가 없었던 것 등이 그것인데요. 작가님은 무슨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고 보시나요?
여러 층위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피해 받고 있는 사람의 처절함도, 병을 치료하는 전문기관의 속성도, 전체를 통제하는 권력에 대해서도 알아야죠. 그걸 다 쓰고 싶었는데요. 무엇보다 메르스는 100% 인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세월호 때문이거든요. 세월호가 터졌을 때 청와대에서 “청와대는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고 했잖아요. 대통령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럼 누가 책임지느냐, 하니까 그해 가을에 ‘국민안전처’라는 컨트롤 타워를 만들었어요. 군인 출신의 장관이 책임자였고 소방방재처, 해경이 산하기관이었죠. 여기 질병 전문가가 한 명도 없는데 2015년 메르스가 터진 거예요. 보건복지부나 질병관리본부 등을 지휘할 능력이 없었죠. 회의를 하면 엉망진창이 되고요. 만약 세월호 때 통렬히 반성하고 재난 시 대응할 체계를 갖췄다면 19일 동안 병원 이름을 숨기라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짓들을 안 해도 됐던 거예요.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이 받았고요.
메르스 피해자 분 중에 이 책을 읽으신 분이 있어요. 하시는 말씀이 이 책을 읽으니까 이해가 된다는 거예요. 피해자들은 자기한테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알 수가 없어요. 불행이 닥친 것은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기가 어려워요. 피해 당사자들이 파편화되어 있는 거죠. 이게 장편의 힘인가, 생각도 했어요.
각자도생, 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요. 국가가 주는 정보를 믿을 수 없으니 개인들의 공포는 커지고 ‘슈퍼전파자’를 비난하게 되고 혼란이 가중되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전후로 양상이 달라졌는데요. 그 이전에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숫자에 비례했죠. 그런데 사스 이후로는 안 그래요. 한 명이 걸려도 정보가 인터넷으로 확 퍼지니까 천 명이 질병에 걸린 것과 똑같은 정도의 공포를 사람들이 느끼는 거예요. 유언비어도 퍼지고요. 이때 국가나 전문가들의 대응이 굉장히 중요한데 2015년에 그런 게 없었던 거죠. 병원 명단을 숨기니까 밑에서 병원 명단이 돌기 시작하고요. 그 명단이 틀렸다고 하니까 수정된 명단이 돌고 했잖아요. 그러면서 더 공포를 느꼈죠. 어느 병원에 메르스 환자가 다녀갔다고 하면 그 주변 지역에 사람들이 안 갔으니까요.
그때는 달라지기를
책 첫 머리에 ‘29년 후, 우람에게.’라고 적으셨는데요. 이건 어떤 의미였나요?
마지막 환자였던 김석주의 아이가 우람이에요. 29년 후, 우람이 아버지의 나이가 됐을 때 이 사회가 많이 달라져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이 책은 그 아이를 위해서 썼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그때가 되면 사회가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29년 후, 우람에게’라고 적었어요.
“살아야겠다”고 말한, 삶에 대한 의지가 아주 강했던 김석주라는 인물이 마음에 오래 남아요. 실제로도 그렇게 의지가 강한 분이었죠?
네, 김석주의 모델이 된 분은 아주 삶에의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어요. 의사였으니까 자기가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 알았고, 병원에 대한 이해도 높았어요. 그래서 어떤 치료를 받았을 때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를 다 기록해뒀어요. 자기 모습을 찍어둔 거예요. 그분 사진이 많이 남아 있어요. 그런 것들을 다 남기면서 살기 위해 애를 많이 쓴 분이죠.
이분들 이야기를 쓸 때는 카프카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관료주의의 문제거든요. A라는 질병이 돌아요. 거기에는 B라는 검사법을 통해 완치 여부를 확인하자는 합의가 있죠. B라는 잣대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는데요. B로 측정이 안 되는 사람이 나온 거예요. 김석주 같은 사람이죠. 제대로 된 공동체라면 이 사람은 B로는 안 되니까 이 사람만을 위한 새로운 검사법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죽을 때까지 그렇게 안 했어요. 내버려둔 거죠. 성에 사람을 넣어놓고 문을 다 닫아버렸어요. 엄청난 관료제의 폐해죠.
책에 “이름도 모르는 전염병이 다시 이 나라에 도착하면, 그땐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521쪽)라는 질문이 있는데요. 읽으면서도 계속 그 질문을 하게 됐어요. 달라져있기를 바라지만 말이에요.
사람들은 다 실수할 수 있어요. 운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실수를 하거나 운이 나빴다고 해서 죽으면 안 되는 거죠. 실수를 하더라도 사람이 죽지 않도록 사회에 여러 안전망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안 그렇죠. 길 가다가 갑자기 온수관이 터져서 사람이 죽잖아요. 그냥 펜션에 놀러가서 잤는데 죽으면 안 되거든요. 이중, 삼중의 안전망이 있어야죠. 김용균 씨도 그렇잖아요. 일하다가 옷깃이 걸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 옷깃이 걸린다고 그 사람이 죽으면 안 되는 거예요. 실수를 하더라도 살 수 있는 안전망들이 필요한데 없고요. 다만 그런 안전망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폭탄이 돌아가고 있고,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1년 뒤에 메르스가 터졌잖아요. 똑같이 초기 대응이 엉망진창이었고요. 결국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냥 덮고 지나가면 어디선가 또 터질 수밖에 없어요. 지금도 여전한 상황인 거죠.
계속 덮고 넘어가기만 하니까요. 소설에서도 해선이 말하잖아요. 자책하지 말고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제대로 밝히라고요. 하지만 우리 사회는 진상 규명의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아요.
근대적 성찰을 해야 한다는 하잖아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깊게 들여다봐야 하는데요. 그렇게 하지 않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하니까 계속 같은 상황인 거예요.
소설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소설이 법이나 제도를 정비하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문제제기는 할 수 있는 거죠. 메르스 피해자가 병이 완치되었다고는 해도 병에 걸리기 전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거든요. 후유증이 심각해요. 이 질병은 주로 호흡기를 공격하니까 폐 기능이 절반 이하로 줄어요. 폐섬유화가 되어서 평생 회복되지 않죠. 감기가 아주 치명적이게 되고, 작은 질병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거예요. 피해자들이 다 그런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는데 이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어떤 정신적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다 봐야죠.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잖아요. 그러면 다 자본주의 논리로 돌아가요. 폐를 40%밖에 못 쓰니까 100% 쓸 수 있는 사람으로 교체하고요. 피해자들은 벼랑 끝으로 밀리고, 밀리는 거예요.
사회 안전망에 대한 이야기네요.
메르스를 겪기 전에 베테랑으로, 정직원으로 근무했던 사람이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분도 있어요. 그렇게 될 때까지 국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개입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올해 또 메르스가 있었는데 잘 지나갔잖아요. 그러고 나니까 2015년에 메르스 피해를 입었던 분들이 더 분통이 터지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안 했지? 생각하는 거죠. 놀라운 건 질병관리본부 담당자들이 같은 사람들이거든요. 한두 명 징계 받았고요. 2015년에는 다 감추자는 데에 동의했던 사람들이 2018년에는 공개하자는 데 다 동의해요. 전문가 조직인데 전문가로서의 의지 표현을 안 하는 거죠. 사실은 생각이 똑같아야 해요. 그런데 생각이 바뀌잖아요. 그게 위험한 거예요. 정말 말도 안 돼요.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치명적인 것 같아요.
관료주의죠. 카프카잖아요. 네가 죄인이라고 하는데 누가 그 사람한테 죄인이라고 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 없는 상황.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
소설의 역할, 소설가의 역할
트라우마 관리도 중요한 것 같아요. 피해망상을 겪고 있는 분도 있다고요.
특히 이 사람들은 더 위험하거든요. 숨잖아요. 혼자 앓고 있는 거니까요. 더 국가가 적극적으로 접근을 해야 해요. 그런데 그런 게 없어요. 정권이 바뀌어도 그대로인 것 같아요. 이번 정부 들어서 가습기 피해자들도 만나고, 여러 제스처를 취했잖아요. 그런데 메르스 피해자들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재판 중이기 때문일까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피해자들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안 걸려도 되는 병에 걸려서 죽고, 다쳤는데 말이에요. 심각하죠.
세월호, 메르스, 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써오셨잖아요. 개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어려움도 있을 텐데, 어떻게 관리하고 계세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죠. 고통에 대해 쓰는 거니까요. 감정이입 해서 고통을 느껴야 하죠. 어떤 고통인지 알아야 쓸 수 있잖아요. 그러고 나면 후유증이 좀 있고요. 쓸 때는 집중해서 쓰고, 그 뒤에는 많이 쉬어요. 이것과는 상관없는 다른 작품을 써요. 이것만 계속 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이것을 쓴 후에는 내가 쓰고 싶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좀 쓰고(웃음), 그렇게요. 2년이나 2년 반에 한 번씩 사회파 소설을 쓰는 게 맞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회문제가 많지만 그렇다고 막 쓰기 시작하면 내가 못 견디니까요.
다음에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벌써 있으세요?
있죠. 너무 많잖아요.(웃음)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에요. 무엇을 먼저 쓸 것인가의 문제고요. 저는 계속 쓸 거예요. 원래 소설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니까요. 사회의 모습을 기록하고,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갖는 일이 필요하니까 계속 하는 거죠.
작가의 말에서 이 이야기가 소설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적으셨잖아요. 소설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게 되는 이야기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죠. 이게 제대로 된 다큐가 되려면 상대방의 이야기도 들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들을 수가 없어요. 의사, 질병관리본부, 보건복지부, 취재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써나갔던 거예요. 제가 하지 못한 부분까지 다 포함해서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어요. 백서라는 것들이 나와 있긴 한데요. 정말 가관이에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게 써놨어요. 선명하게 쓰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명확해지니까 진짜 모호하게 써놨거든요. 되도록 책임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쓴 거예요. 참 어려워요.
책으로 더 많은 관심과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한 입장에서 이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세요?
질병관리본부(웃음)죠. 공무원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과연 읽을까, 싶기는 하지만요. 전염병과 관련된 국가 재난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보면 좋겠고요. 그와 함께 인권의 문제를 생각하는 분들이 읽으시면 좋겠어요. 타인의 불행이나 환대의 문제와 다 연결이 되는 거니까요. 이 책은 크게 보면 인권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인권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읽으셨으면 해요.
살아야겠다김탁환 저 | 북스피어
김탁환 작가는 누군가 메르스 사태를 불운한 개인의 비극이 아닌, 허술한 국가 방역 시스템과 병원의 잘못된 관습과 운영체계가 만들어낸 사회적 참사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