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하고 탄탄한 세계관, 유려한 문체로 사랑받으며 한국 판타지를 견인해 온 작가 전민희. 그가 새로운 이야기로 돌아왔다. 이번에 출간된 『룬의 아이들-블러디드』는 『룬의 아이들-윈터러』 (이하 『윈터러』 ), 『룬의 아이들-데모닉』 (이하 『데모닉』 )의 뒤를 잇는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3부다. 『데모닉』이 완결된 지 11년 만에 들려온 반가운 출간 소식. 작가의 오랜 팬들은 ‘써주셔서 고맙다’는 말로 뜨거운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어느덧 20년. 1998년 PC통신 나우누리에 『세월의 돌』을 연재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전민희 작가는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1세대 작가’라는 수식어는 빛이 바래지 않았고, 이른바 ‘전민희 월드’는 깊이를 더하며 널리 퍼져 나갔다. ‘룬의 아이들 시리즈’를 비롯해 ‘아룬드 연대기(『태양의 탑』 , 『세월의 돌』 )’, ‘아키에이지 연대기(『전나무와 매』 , 『상속자들』 )’가 탄생했으며, 지금까지 완결된 모든 장편소설이 해외에 번역 수출되며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룬의 아이들’ 시리즈는 야후 재팬(Yahoo Japan)이 선정한 ‘2006년 10대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에 이름을 올렸고, 2013년 기준 ‘역대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 소설’로 발표됐다. 작품의 스토리와 세계관은 게임 ‘테일즈위버’가 만들어지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아키에이지 연대기’로 불리는 두 작품 『전나무와 매』 , 『상속자들』은 동명의 게임 ‘아키에이지’의 원작이다.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온 작가는 여전히 ‘변화’를 고민하고 있었다. 『룬의 아이들-블러디드』는 출간 전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됐고, 같은 방식으로 『윈터러』와 『데모닉』 의 개정판도 공개됐다. 20년 전 첫 작품을 연재했던 PC통신 환경과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이번에도 작가는 ‘독자들과의 접점’을 모색했다. 그곳에서, 전민희 월드로 통하는 또 하나의 문이 열렸다.
3부는 언제 나와요?
살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룬의 아이들 3부는 언제 나와요?’였다면서요(웃음). 이번 책이 마음의 숙제처럼 남아있었을 것 같아요. 어떠셨어요?
숙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기대하고 상상해왔는데, 그에 맞는 작품이 나와야된다’라는 생각이요. 그 분들의 기대에 충족되는 소설이 나와야 되는데, 또 예상한 그대로의 것이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 두 가지 생각을 하면서 썼던 것 같아요. 그동안 저한테도 독자분들께도 많은 시간이 흘렀잖아요. 사인회에 오셨던 분들이 ‘언제 처음 이 시리즈를 읽었는지’ 많이 이야기해주셨어요. 그 분들도 저도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대를 충족하되, 예상 밖으로 충족되는 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의 작품을 읽으면서 성장한 독자들이 있잖아요.
맞아요. 정말 그 느낌이었어요. 많은 분들이 오셔서 ‘써 주셔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데... 보통은 제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려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써주셔서 고맙다고 하시니까, 저도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같이 인사하게 되는 거죠(웃음).
독자들과 같이 나이 들어간다는 느낌도 드세요?
그렇죠. 평균적으로는 저보다 조금 어린 세대가 주류인데, 저랑 나이가 비슷한 분들이 계속 오시기도 해요. 예전에 사인 받으셨던 책을 가져와서 보여주시기도 하고요. 고등학생이거나 20대 초반인 분들도 계시는데, 그게 되게 기뻤어요. ‘그때 재밌었던 우리끼리의 이야기’로 끝난 게 아니라, 제 소설을 새로 보시는 분들이 계시는 거잖아요. 그 분들이 재밌게 보실 수 있었다면 너무 좋죠. 십여 년 전의 작품을 지금 보면 어색할 수도 있고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될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읽을 만하니까 읽으신 거 아닐까요(웃음). 낡은 느낌이라고 생각되면 못 읽는 거니까요.
이번 작품의 부제가 ‘블러디드’잖아요. ‘피 흘리는’의 뜻이 아니더라고요. ‘어떤 성향을 타고난’, ‘순혈의’라는 뜻인데요. 1권을 읽으면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죠(웃음)?
전작들도 약간씩은 그랬던 것 같은데요. 『윈터러』 같은 경우는 검의 이름이니까 초반부터 바로 이해를 하는데, 엔딩까지 읽은 다음에는 또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는 거죠. 『데모닉』은 주인공의 별명인데 끝까지 갔을 때는 해석이 바뀌고요. 장르소설은 편수가 많기 때문에 완결되는 데 시간이 꽤 걸려요. 몇 년 이상 걸리기도 하는데, 완결 때까지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에는 너무 먼 거죠. 그래서 처음에 이게 무슨 뜻인지 알려드릴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권수도 많기 때문에 끝까지 그 이야기를 계속 하지는 못해요.
출간 전에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됐어요. 『세월의 돌』 이후 20년 만의 첫 연재였는데, 그때와는 환경이 많이 달라졌죠?
진짜 20년 만이었죠. 1998년에 PC통신 나우누리에 연재를 했었으니까요. 그때는 PC통신에 사람이 굉장히 많다고 느꼈지만, 생각해 보면 유료 서비스였기 때문에 한정적이었어요. 지금의 웹 환경에서는 조회수가 수십 만이 찍히는데... 그때하고는 갭이 크죠. 그때는 한 화의 조회수가 천이 넘으면 굉장히 큰 거였거든요. 진짜 인기가 많으면 몇 천 정도였던 것 같아요. 오래 돼서 기억이 정확치는 않지만요. 『세월의 돌』도 당시에 누적 조회수가 꽤 많다고 했었는데, 요즘은 접근하기가 굉장히 편리해졌잖아요. 예전에는 PC를 마련해서, 유료로 나우누리나 하이텔에 가입을 해서, 게시판을 찾아가서 봐야했고 또 집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휴대폰이나 포터블한 기기로 보잖아요.
『윈터러』 , 『데모닉』의 개정판도 연재하셨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맞아요, 진짜 고생했어요. 일단 PDF가 안 도와줘서 너무 고생을 했고요(웃음).
PDF 파일의 원고를 변환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죠? 띄어쓰기도 안 맞고...
틀린 곳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결국 다 봐야 했어요. 일일이 보면서 찾아야 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굉장히 꼼꼼하신 성격일 것 같은데, 어떠세요?
모든 면을 꼼꼼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돼요(웃음). 그런데 지금의 웹 환경에 오기 전에도 글이 어디에 실리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똑같은 글도 화면으로 볼 때랑 그냥 출력해서 볼 때, 교정지로 볼 때, 종이책으로 볼 때, 계속 느낌이 달라지는 거예요. 이번에도 휴대폰에 넣어 보니까 너무 다르더라고요. 게다가 카카오페이지는 글자 크기가 조정이 안 되기 때문에 그 모양 그대로 보게 돼요. 마치 책과 같은데, 책에 비하면 글자가 훨씬 적고 작은 화면으로 보게 되는 거죠. 처음에는 어느 정도가 최적인지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카카오페이지에서 가이드라인을 주기는 하는데, 글의 성격에 따라 편집이 다르더라고요. 어떤 게 최적일까 생각하면서 넣어보고 잘라보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제 눈도 바뀌었잖아요. 다른 분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고. 그래서 저는 글을 볼 때 지금 봐서 아닌 것 같으면 그냥 다 고칩니다.
작품을 쓰실 때도 스스로 만족하실 때까지 고치시잖아요.
그때는 분명히 만족해서 냈는데 또 이러고 있는 거예요(웃음). 그러니까 볼 기회가 없어야 되는데, 이번에는 PDF가 저한테 볼 기회를 만들어준 거죠(웃음). 『데모닉』 은 한 번도 개정을 안 하고 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개정하게 됐어요. 내용적으로도 약간 보완하고 싶은 면이 있었어요. 그래서 『윈터러』보다 변경점이 많았다고 할 수 있죠. 새로운 장면도 조금 있는 편이고요. 『윈터러』는 그렇게 많이 변경된 건 아니에요. 포맷에 대해서 생각을 하느라 달라진 부분이 있고요. 이번에 종이책으로 나오면서 한 번 더 교정을 하게 됐어요. 엊그제 교정지가 왔는데, 올 겨울에 또 열심히 교정을 봐야 됩니다(웃음).
언제쯤 책으로 볼 수 있을까요?
내년 봄 아닐까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내년 상반기에는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장르소설, 읽힌 뒤에 의미를 획득한다
작품을 읽다 보면, 작가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를 세세하게 그리고 계시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창작 작업을 하시는 모든 분들이 그러실 텐데, 일단은 다른 것들을 많이 본 거죠. 거기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게 다른 창작물일 수도 있을 거고, 판타지 같은 경우에는 과거의 세계를 그린 경우가 많아서 역사에 관련된 것들이 그럴 거예요. 저는 어떤 나라의 역사를 보다가 재밌는 부분이 있으면 ‘나는 여기가 왜 재밌을까’ 하면서 모아놨어요. 그때는 이게 나중에 소설에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한 일이 아니었고요. 저희 학창 시절에는 인터넷이 없었으니까 그냥 연습장에 적어놨던 거예요. 영어 사전을 찾다가도 뭔가 재밌어 보이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있으면 적어놓고, 책을 읽다가도 재밌는 게 있으면 모아놓고요.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지금도 남아있어요.
작품 쓰실 때, 예전 연습장을 보기도 하세요?
지금 그것들을 기억하거나 다시 끌어내서 쓰는 건 아니에요. 아마 그때 옮겨 적는 과정에서 한 번 더 머릿속에 떠올렸겠죠.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걸 찾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걸 깊게 들어가 보면 나중에는 어딘가에 남아 있잖아요. 그 순간을 다 외우고 있지 않아요. 그렇게 내가 좋았던 걸 큐레이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취향들이 모여서 세계관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고요. 소설을 써야겠다고 했을 때, 일단은 제가 제일 재밌어했던 것들이 와요. 그 다음의 것들이 사이를 채우기도 하고, 최근에 읽었던 것들이 채우기도 하는데요. 최초의 얼개는 예전에 정말 재밌어했던 무언가에서 와요, 항상. 장르소설이라는 건 ‘내가 무엇을 제일 즐거워하는가’를 찾은 결과물인 것 같아요. 재미로 보는 오락물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취향에 맞는 걸 찾으면 잊을 수 없고, 몇 번 또 보게 되고, 너무 사랑하게 되잖아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어야죠. 그걸 찾으려면 내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려고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올해가 데뷔 20주년이었어요.
그런 셈일까요. 연재를 한 시점부터 생각하면...
생각 안 해보셨어요?
별로 안 했네요(웃음). 그냥 ‘ 『세월의 돌』 연재한지 20년 됐네’ 이런 생각은 했는데, 그것도 이번에 연재를 하면서 처음 깨달았어요.
지나간 20년을 돌아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처음에는 너무 좋아하는 게 많아서 꽉꽉 채워 넣으려고 하다 보니까 약간 미숙한 면도 있었을 것 같아요. 비유하자면 요리를 내놓는데 맛있는 걸로 상을 꽉 채우려고 했지만, 조화가 안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 거죠. 그래서 개정도 하는 걸 거예요. 이제는 메인 요리가 있고 서브 요리가 있고 코스가 있다는 걸 생각하기는 하는데,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해요. 균형이 생긴 반면에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꽉 채우려는 그 마음이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고요. 그러려면 다시 저를 채워야겠죠. 지금까지 했던 걸 반복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런 요소가 있다면 어쩌면 제가 좋아하는 핵심적인 취향일 거예요. 독자 분들이 많이 찾아내기도 하세요(웃음). 저도 모르는 공통점을 찾아내실 때가 있거든요. 또 두 번째로 하는 생각은 글이라는 게 사람의 내면을 너무나 잘 반영한다는 거예요. 예전에 쓴 글을 보면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잖아요.
그렇죠, 당장 없애버려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웃음).
그때의 자신을 너무 잘 반영해서 그래요. 나의 못난 부분도 반영하고 좋은 부분도 반영하고. 내면과 관계없는 글을 쓴 것 같은데도 그래요. 제가 쓴 소설이 곧 저는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내면이 반영돼요. 쓰는 순간에는 잘 몰라요. 조금 지나고 나서 다시 보는 순간 ‘내가 쓴 냄새가 난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거죠(웃음). 그때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그래서 이렇게 썼겠구나, 싶고요. 그걸 나만 아는 게 아니고 남도 알아요. 독자 분들이 책을 보시고 저에 대해서 추측을 하시는데, 일상의 저를 추측하시는 건 거의 맞지 않지만, 제가 모르는 저는 잘 추측해내세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작품을 계속 썼다는 게, 저를 엄청나게 전시한 거예요(웃음). 동시에 ‘내면을 잘 유지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죠. 사람이 나이가 들다 보면 내면을 예전 모습 그대로 간직하기가 어렵잖아요. 예전의 모습에는 미숙한 면도 있지만 동시에 순수한 면도 있고 좋은 요소도 있는데, 그걸 유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러면 아마 사람들이 알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작가에게는 심신 수양이 필요하군요(웃음).
필요할 것 같아요. 글을 쓰면서 나의 좋은 면이 반영됐는데 다음 글에서 그걸 유지하지 못하면, 그 글은 다른 냄새일 거예요. 그래서 그걸 유지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 판타지 소설의 1세대 작가’로 손꼽히시는데요. 그동안 판타지 소설의 트렌드나 문법, 인기 요소가 바뀌었다는 걸 체감하세요?
그럼요. 사실 최근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어요. 제 작품을 쓰려고 할 때는 묵은 것들을 읽는 게 좋거든요. 최신의 것을 읽는 것보다.
왜요?
물론 데뷔하려고 노력하시는 신인 분들은 최신 소설을 열심히 보실 거예요. 최신 트렌드를 읽으려고. 그런데 저는 20년 동안 묵은 게 있잖아요. 거기에 최신의 양념을 뿌리면 이상하게 안 맞을 수가 있을 것 같고, 서서히 변해가야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약간 묵은 걸 보면서 계속 쓸어내듯이 해가야 될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트렌드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는데, 약간 먼 곳에서 바라보면 결국 한국인의 내면을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마음이 바빠져서, 글을 읽을 때도 길이가 길면 끝 부분을 확인하고 바로 넘어가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트렌드에도 같이 반영되는 것 같아요. 예전의 우리는 영상 매체가 발달하면 사람들이 글자로만 되어 있는 건 별로 안 볼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쉽게 빨리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을 지속적으로 소비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지금 웹소설은 굉장히 잘 되고 있는 분위기인 것 같아요. 저는 한 번 연재를 해봤을 뿐이지만요.
변화에 맞춰서 도전하시는 데 주저함이 없으신 것 같아요.
저는 변화라는 걸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장르소설이라는 건, 어쨌든 독자가 안 읽어주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읽혀야만 의미가 있는 분야거든요. 사람이 아프면 먹기 싫어도 쓴 약을 먹지만, 음식은 맛이 없으면 먹을 필요가 없잖아요. 약이 아니니까요. 그런 거죠. 장르소설이라는 건 읽힌 다음에 의미를 획득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 명만 읽어줘도 된다는 느낌은 사실 장르소설과는 맞지 않아요. 여러 사람이 읽어줬을 때, 그렇게 읽히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의미가 생겨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지금의 트렌드나 읽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면, 저는 그걸 알 필요가 있는 거죠.
그래서 『룬의 아이들-블러디드』 를 새로운 포맷으로 선보셨고요.
『룬의 아이들-블러디드』 1권이 기존의 책들과 느낌이 비슷한 데도 있고 달라진 데도 있는데, 이것들을 디테일하게 이야기하시면서 호불호를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것 자체가 잘 된 일인 거예요. 어쨌든 기존 독자로서 읽고 비교하고 계신 거잖아요. 이런 분들이 계셔야 처음 읽는 분들도 그걸 보고 계속 이어가는 거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할 거리가 되잖아요. 이런 말들이 생각을 발생시키는 게 되게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장르소설이 계속 살아나가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여러 사람의 말이 필요하거든요.
계속 재밌어야죠
잠시 휴재 기간을 가지신 뒤에, 2권도 연재하실 계획이죠?
네.
작품을 쓰시면서 연재하시는 건 처음이지 않나요?
사실 저는 한 권 다 써놓고 연재했습니다(웃음).
2권도 그렇게 될까요?
네, 그럴 거예요.
『태양의 탑』 이전에는 미리 정해놓은 결말을 바꾼 적이 없으시죠?
네.
2권 연재가 끝난 후에, 독자들 반응을 보고 3권의 내용을 바꾸실 수도 있을까요?
지금까지 그런 적은 별로 없었어요. 『룬의 아이들-블러디드』 1권 같은 경우에는 기존 인물을 약간 소개하는 부분이 있어서 더 그럴 텐데, 뒷이야기를 예상하기 어려운 상태로 끝이 났어요. 이후의 이야기를 추측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생각하시는 부분들이 있겠지만 1권에서 예고되지 않은 사건들이 벌어질 거예요. 그리고 테일즈위버라는 게임과 연계가 되어 있다 보니까, 스토리 작업하시는 분들한테 뒷이야기를 조금 해드렸어요. 내년에 업데이트될 스토리챕터를 작업하셔야 되거든요. 어느 정도 비슷한 분위기로 가면 게임하는 분도 재밌고 책 읽는 분도 재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드렸어요. 아마 그와 비슷하게 흘러가겠죠.
『태양의 탑』은 7권을 쓰셨다가 폐기하셨잖아요. 이제 그 부분은 완전히 사라진 건가요?
네. 쓰다 보면 부분적으로 폐기할 때는 많이 있어요. 장면을 꽤 길게 썼지만 도저히 들어갈 데가 없는 경우도 있고요. 특히 소설 첫 머리를 쓸 때는 많이 버려요. 그래서 첫 머리를 여러 종류로 써보고, 어떤 때는 그 중에 하나가 뒷부분 어디에 들어가는 식으로 살아남는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가 많아요. 대부분은 버려지거든요. 『태양의 탑』은 다음 권을 거의 마지막 권으로 하려고 했는데 제가 조금 납득이 안 되는 느낌도 있었고... 하여튼 저한테는 『태양의 탑』이 큰 숙제예요. 본의 아니게 중간에 세월의 갭이 들어가게 됐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어떤 걸 100%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갑자기 전환할 수는 없어서, 제 안에서 타협을 해야 되는 거예요. 옛날의 저와 지금의 제가 타협점을 찾아야 되는 큰 숙제가 있는 것 같아요.
첫 머리를 쓰는 게 제일 힘드세요?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나요?
예를 들어서 반 권쯤 썼는데 처음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장면으로 갈아 봐요. 그러다 보면 뒷장면도 그에 맞게 변해야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초반은 마치 부품을 갈아 끼우듯이 꼈다 뺐다 하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편이에요. 장르소설이라는 게 순간순간 계속 재밌어야 되잖아요. 읽는 분은 어떠셨는지 알 수 없지만, 제 목표는 그래요. 힘들고 슬픈 장면이 나오면 재밌게 읽지 않겠지만, 그래도 긴장감을 가지고 계속 페이지를 넘길 수 있어야죠. 그래서 쓰다가 이야기가 늘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플롯상으로는 그 부분이 그대로라고 해도, 어떻게든 바꿔서 재미없지 않게 흘러가도록 해야 되거든요. 쓰다가 좋은 생각이 나서 앞부분을 바꾸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룬의 아이들-블러디드』는 몇 권으로 완결될까요?
『윈터러』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제 마음은 그런데, 어떻게 될지는 사실 모르겠어요. 『윈터러』 도 7권이 될지 몰랐고 『데모닉』도 8권이 될지 몰랐고, 다 몰랐습니다(웃음). 반쯤 가면 알게 되는데, 1권일 때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앞으로 있을 중요 사건들을 미리 플로우차트처럼 써놓거든요. 그 흐름이 다 존재해요. 그런데 소설로 풀어보면 어떤 장면은 너무 재밌게 풀려서 길어지고 어떤 장면은 그렇지 않아요. 풀어 쓸 때 쫙 펴지는 게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게 있어요. 『데모닉』 같은 경우에는 중간에 주인공이 공연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제 예상은 반 권 정도였는데 한 권을 채워버렸어요(웃음). 처음 플롯에는 공연으로 돈을 벌어서 다시 떠난다는 컨셉이었는데, 쓰다 보니까 이야기가 너무 풀 게 많아져서 쫙 풀린 거예요.
손끝에서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순간이겠네요. 쾌감이 느껴질 것 같아요.
그럴 때는 정말 엄청 빨리 써요.
글 쓰시면서 가장 흥분되고 짜릿한 순간인가요?
그렇죠. 막 찍었는데 다 작품 사진이 된 기분이라고 할까요(웃음).
매니아 팬이 많잖아요. 2차 창작물도 많다고 들었어요. 소설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를 상상해서 쓰거나, 뒷이야기를 이어서 쓰거나, 팬 아트를 그리는 건가요?
네, 많이들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한테 보내주시는 분들도 가끔 계신데, 보통은 ‘조금 창피한데?’ 하고 저한테는 안 보내주시는 분들이 많죠(웃음).
작가님도 어린 시절에 소설의 뒷이야기를 상상해서 쓰셨다면서요? 팬들을 지켜보시는 마음이 어떠실지 궁금해요.
어쩌면 사람 마음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 재밌는 이야기가 끝나면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이어서 쓰거나, 내 마음에 들게 결론을 바꿔보거나, 또는 그 월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내가 거기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새 캐릭터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 같아요. 그런 요소들이 지금 팬픽에 거의 다 있는 것 같고요. 사실 팬픽을 쓴다는 건 거의 창작의 시작이잖아요. 저도 『소공녀』를 읽다가 뒷이야기를 썼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최초의 소설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완결을 짓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런 마음이 발전해가면서 아예 월드를 새로 만들고 인물도 스토리도 내 마음대로 만드는 식이 됐어요. 팬픽을 쓰시는 분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마음에 몰입해서 쓰다 보면 실력도 많이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물론 팬픽을 쓴다고 반드시 창작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것은 없지만, 저의 개인적인 의견은, 직업적으로 작가나 창작을 하는 사람이 안 되더라도, 해보는 것은 굉장히 영혼에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굉장히 좋게 생각해요.
팬 아트도 그렇지만, 게임을 통해서도 작가님이 상상하시던 이미지가 눈앞에 재현됐는데요. 직접 보실 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처음에 테일즈위버를 작업할 때는, 약간 뭐라고 할까요, 제가 컨셉을 드리면 그 분들이 알아서 만드신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아키에이지 같은 경우는 사실상 제가 제작에 참여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일러스트든 월드든 제가 드린 컨셉 대로 나왔는지 검수하는 과정도 있었고요. 그러니까 즐겁게 누리는 게 아니라 그에 맞게 나오도록 미리 정보를 잘 드려야 되는 거죠. 아키에이지의 경우는 게임 제작을 해야 되다 보니까 소설 형태로 쓰지 않고 먼저 줄거리 형태로 썼거든요. 원래는 그렇게 작업을 하지 않아요. 플로우차트 정도는 만들지만 줄거리를 길게 쓰지는 않거든요. 그게 구현되는 걸 바라보는 게 재밌기도 했고, 특히 처음에는 너무 신기했는데, 나중에는 내가 생각한 그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걸 납득하는 것도 배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임 같은 경우는 다수가 만드는 공동작업이잖아요. 모든 분들이 다 비슷하게 고스란히 숙지하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어느 선에서는 게임 전체가 나의 작품은 아니라는 걸 알 필요는 있었던 것 같아요. 알게 되어갔죠.
게임과 관련해서는 ‘원작을 정말 전민희 작가가 쓴 것이 맞느냐’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아요.
게임사에서 설정을 받아서 소설을 써주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어요. 사실 그 오해가 많이 저를 힘들게 해요. 그런 적이 없는데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최초에 ‘룬의 아이들’ 시리즈가 소설화되기 전에 포리프(4LEAF)라는 커뮤니티 브라우저 형태의 서비스가 있었는데, 그 서비스가 먼저 나오고 나서 『윈터러』 1권이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포리프 서비스가 먼저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그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서 제가 설정을 만들어줬던 거였어요. 아마도 이런 형태가 별로 없어서 오해를 하시는 것 같아요. 영화의 경우도 영화가 먼저 있고 그걸 소설화하거나, 반대로 소설이 먼저 있고 그걸 영화화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저처럼 처음 시작하는 시작에서 같이 만나서 작가가 세계관과 월드를 만들고, 그걸 가지고 게임사에서 게임을 만들고 동시에 출시하는 경우가 흔치 않으니까요. 그래서 오해가 있는 것 같기는 해요.
『룬의 아이들-블러디드』의 독자들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건넸어요. 작가님은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세요?
이런 반응을 받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단한 행운이고 복이죠. 그 분들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보답의 형태 자체가 그 분들이 생각하신 것과 같지 않을 수 있지만, 어쨌든 제가 최선을 다하는 걸로 보답을 드리겠습니다.
룬의 아이들 - 블러디드전민희 저 | 엘릭시르
캐릭터의 생각과 행동에 반응하며 공감하고 이입한다. 캐릭터의 역사가 쌓이면 독자와 세계의 친화도는 높아지고,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역사는 곧 세계의 역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