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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 “2인칭 서사 ‘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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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전시해야 하는 사회. 내 고통이 주목받지 못하면 마이크를 얻지 못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듣는 감수성은 우리에게 잊힌 지 오래다. 누군가의 고통을 목도하고 그 곁을 가보려고 하지만, 고통의 당사자로부터 들려오는 대답은 “넌 내 고통을 몰라”, “아무리 노력해도 넌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같은 말이다. 과연 고통은 나눌 수 있는 것일까?

 

“곁에서 쓴, 곁이 있는 글”을 추구하는 사회학자 엄기호가 ‘고통의 곁’을 성찰했다. 그는 왜 고통을 말하지 않고 ‘고통의 곁’에 주목했을까. 엄기호는 오랫동안 인권 참사의 현장에서부터 육체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겪는 이들이 그 곁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보며 당황했다. 고맙다고 말하지만 결국 ‘곁’을 밀어내는 상황. ‘곁’에 있는 사람은 과연 그 ‘곁’에 오래 머무를 수 있을까?

 

“고통을 겪는 이가 자기에게 함몰되면 그 곁도 같이 파괴된다.”(12쪽)

 

꽤 오랜 시간 엄기호는 2인칭의 시선으로 세계를 사회를 사람을 바라봤다. “고통을 겪는 이를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17쪽)이기에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썼다. 표지 그림을 보자. 한 여성이 턱을 괴고 무엇을 곰곰 생각한다. 탁자 위에는 실 전화기가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이는 없다. 작가 이선일의 그림 「여보세요」의 한 부분이다. 고통은 특별한 사건만으로 발생되지 않는다. 엄기호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고통을 들여다보았고, 고통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도 또다른 ‘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모든 말은 응답을 기대하며 응답하기에 말이 된다.”(13쪽)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곁’에 대해 ‘이야기’로 응답해야 한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곁의 의미를 다듬고 곁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18쪽)이라고 말하는 사회학자이기 전에 이야기꾼 엄기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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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2인칭 이야기

 

서문만 서너 번 읽은 것 같다. 고통을 생각한 적은 많지만, 고통의 곁을 생각한 적은 많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나더라.

 

‘고통을 마주 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국제 인권운동을 하면서부터다. 인권이란 늘 피해자를 만나고 그들의 고통을 다루는 일이니까.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의 고통을 강조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증언자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전시하여 소비하지 않되 고통의 절대성에 사람들이 충분히 공명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고통을 겪는 이들의 주변 세계를 주목하게 됐다.

 

언제부터 집필에 들어갔나?


고통과 연대의 문제를 다루고 싶다는 생각은 3,4년 전부터 했다. 책을 본격적으로 쓴 건 7월쯤인데, 다른 책에 비해서 속도가 많이 안 났다. 책 제목을 결정한 것도 인쇄하기 며칠 전이었고. 표지도 막판에 바꿨다.

 

제목과 그림을 함께 보니까 책이 궁금해지더라.


지난해가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이었다. ‘오늘, 인권을 그리다’ 전시회에 갔는데 이선일 작가의 그림을 보는 순간, 책이 생각났다. 이번 책을 쓰면서 많이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너무 고통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였다. 궁극적으로 고통의 핵심, 슬픔의 핵심은 외로움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그림에 너무 잘 표현돼 있다. 절규하는 외로움이 아닌 일상성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2014년에 출간된 『단속 사회』와 연결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고통’과 ‘곁’에 대해 오랫동안 성찰한 것으로 기억한다.


초고를 쓸 때 생각한 제목은 ‘고통의 곁, 곁의 고통’이었는데 좀 어렵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곁’이라는 말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정리된 것도 아니라서 ‘곁’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곁’의 이야기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또 ‘고통’이라는 말이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고.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 의식이었으니까 담백하게 가려고 했다.

 

“고통에 대한 무지가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고통을 성찰하고 쓰는 일이 저자에게도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가장 힘들었던 건, 어떤 방식으로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는지였다.  『아픈 몸을 살다』  같은 경우는 저자가 실제로 질병(고통)을 겪은 1인칭 이야기지만,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고통에 대한 2인칭 이야기니까. 내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해준 사람들을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는가의 윤리가 나의 숙제였다. 또한 글 쓰는 사람으로서 독자들이 읽으면서 얻고 느껴야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문제도 있으니까, 들은 사람으로서의 윤리와 말하는 사람으로서의 윤리, 그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가 고민이었다.

 

‘어떻게 써야 하는가?’의 문제의식을 느꼈겠다.


누군가의 고통의 곁에 있으면서,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 써도 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 고통스러운 장면을 내가 다 쓴다면, 내가 비판하고자 했던 ‘고통의 전시’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 1인칭이 아닌 시점에서 글을 쓰거나 기록할 때의 딜레마이자 간극이었다.

 

1부 ‘고통의 지층들’에서 실제 고통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편과 관계가 어그러진 ‘선아’ 씨, 젊은 나이에 백혈병 진단을 받은 ‘승우’ 씨, 일흔을 넘기면서 온갖 노인성 질환이 찾아와 고통스러워하는 ‘재희 어머니’,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가 신흥 종교에 빠진 ‘덕룡 아버지’. 이들은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독특한 상황에 있는 경우가 아니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재희 어머니의 경우, 한국의 80% 이상의 어머니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거다. 남편과 갈등을 겪는 선아 씨나 질병으로 고통 받은 승우 씨 역시 매우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다. 주변 보통 사람들의 보통 고통, 하지만 그것이 보통 고통이 되는 한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재희는 재희 어머니의 고통을 돌보는 딸이다. 즉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인데, 재희 곁에는 재희의 힘듦을 이해해주는 또다른 ‘곁’이 있다. 그래서 재희는 ‘고통의 곁’에 있으면서도 버틸 힘을 갖는데, 이런 상황은 사실 흔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게 가족 간의 신뢰 문제인 것 같다. 재희의 형제자매는 어렸을 때부터 신뢰 관계가 있었다. 때문에 역할 분담도 가능했는데, 한국의 보통 자식들은 결혼한 후로는 자신들이 꾸린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더 강하다. 사실 재희 가족을 다루기는 조심스러웠다. 고통의 곁에 또 다른 곁이 되어준 가족의 케이스가 많진 않으니까.

 

선아는 남편과의 문제를 집단 상담, 마음 수양으로 고통을 풀고자 했다. 타인에게 공감과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룰 힘을 키우고자 했다.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이며 분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루에 4킬로미터씩 꼬박꼬박 걷는 시간을 갖는다.


선아는 ‘마음과 분리’를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바깥의 발견을 통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떨어진 케이스다. 걷기가 좋은 것은 홀로 걸을 때도 있지만 가끔 동행이 있다는 점이다. 선아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들판을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결국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는 ‘바깥’을 만난 셈이다. 고통을 극복하는 문제는 결코 사회적인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실존적인 힘으로 견디는 것인데, 문제는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여유를 갖고 도를 닦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통의 곁에서 자신의 고통을 극복한 사람을 보면 굉장히 오랫동안 자기 수양을 한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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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이 아닌 경청은 경청이 아니다

 

관종의 시대다. 왜 관종이 될 수밖에 없을까? 왜 관종이 되었나?를 따져보면, 우선 주목을 받아야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 사회경제의 단면 같다. 무슨 막말을 해도 뉴스에 실려야 하니까. 서양에서는 ‘주목’이라고 말하는데, 주목을 받아야만 정치를 할 수 있고, 정치를 할 수 있으려면 또 주목을 받아야 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정 욕구도 있지만, 일종의 경제다. 유튜버를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도 실제로 돈을 벌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주목 받아야 하고 주목을 받으려면 자극적으로 더 세게 말해야 하지 않나.

 

맥락을 읽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다. 긴 글을 읽지 않으니까 자극적인 문장 몇 개, 사진 하나를 보고 사건을 단순하게 판단해버린다.


사람들에게 분별심이 있어야 하는데 선명도, 대비도가 높은 이야기만 소화되니까 점점 문법적으로 가버린다. 즉 긴 글이 필요 없어진 상황이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교양의 가장 큰 역할은 쪼개는 것”이라고 말했다. 언어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차이 없는 것을 쪼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우치다 타츠루는 이를 ‘해상도’로 비유한다. 즉 교양이 있다는 말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한 해상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주목 경제에서는 해상도가 높은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다. 분별력이 높아져야 하는데 공론장 자체가 파괴되어 있으니까 신중한 언어가 나올 수 없다.

 

“자기에게 함몰된다는 것은 타인의 말을 듣고 바로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법을 잊는다는 말(13쪽)”라고 했다. 어쩌면 곁이 파괴되는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고통스러운 상황이 되면 나만 보인다. 옆의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경청하고 응답해야 한다. 여기에서의 경청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경청 역시 돌려주는 것(re-)이 있는 응답이어야 한다. 응답이 아닌 경청은 경청이 아니다.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서 비롯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하기 어렵다. 고통의 곁과 그 곁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만들어진다. 곁에 서 있는 사람의 말에 다른 사람의 말이 보태지고, 그 말에 또 곁에 선 이의 응답이 이어져야 우리에겐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3부 ‘고통의 윤리학 -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곁에 대하여’를 주목해서 읽을 독자가 많을 것 같다. 자기 언어로 자신의 고통을 말하기 전에는 고통이 끝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 언어를 갖는 일은 쉽지 않다.


절규하는 자에서 말하는 자로 바뀌려면, 글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우리는 고통받는 타인의 곁뿐만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다. 중요한 건 ‘신중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글쓰기다. 순간을 포착하고 박제하는 데 집중하면서 우리의 읽는 능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예리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만 늘고 있다. 주목이 정치가 되고 경제가 된 사회에서, 소비자본주의에 맞게 시간을 아끼며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통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고통에 대한 접근에서는 고통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면에 대한 예리한 포착보다 그 지층에 대한 신중한 읽기와 쓰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고통을 겪는 이와 그 곁에 선 사람이 서로의 이야기를 보태고 나누면서 고통에 대한 쓸모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저자가 선아 씨에게  『걷기의 인문학』을 권하자 선아는 “난 이제 책 읽는 게 힘들어요. 대신 그 책 얘기를 나한테 해주면 되겠네요”(122쪽)라고 말했다. 이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다.


선아가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한 건 책을 읽기 싫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주길 바랐던 거다. 요즘 사회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고, 추천만 한다. 이 영화를 봐라, 이곳에 가보라고 추천할 뿐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사람은 없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재밌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이 궁금해지니까. 선아의 이야기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 달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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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을 의식하게 하는 ‘곁’이 있으면

 

2018년에 많이 읽힌 책을 살펴보면 대개 위로하는 책들이다. 올해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 더 지나면 그 위로가 위로가 아니라는 걸 알지 않을까? 시대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참 서글픈 일이다. ‘자기계발의 시대가 가고 위로의 시대가 왔다’는 말, 너무 슬프지 않은가? 자기계발을 했는데 자기계발이 안 됐고, 위로 받고 싶었는데 결국 단 시간의 위로로 끝났다. 지난해 초부터 사람들이 어? 하면서 당황하기 시작하지 않았나? 한국 사회가 바뀔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바뀌었다는 걸 체감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지표와 상관없이 삶의 자리가 더 팍팍해지고 격렬해졌으니까. 사회적 돌파구가 안 열리니까 버티기가 어려워서 위로를 찾는데, 또 위로가 안 되니까 사람들이 더 과격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연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약간 뜬금없는 이야기인데, 한국에서 가장 오해 받는 것 중 하나가 개인과 개인주의라는 말이다. 개인이 성립하려면 ‘나’라는 내가 버티고 있어야 하는데, 자기한테 함몰되면 결국 자기가 사라진다. 지금 시대는 나를 엄청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인데, 나를 너무 강조하면 내가 사라진다. 개인주의자가 되려면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바깥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면 역전된 나르시시즘이 생긴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만 너무 불쌍하게 바라보게 되니까. 나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자신을 죽여버린다. 그래서 곁, 바깥이 있다는 걸 의식하고 사는 게 중요하다. 바깥을 의식하게 하는 ‘곁’이 있으면 고통에 함몰돼 있어도 한번씩 주변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내가 지켜야 할 곁이 있을 때,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생각하면서 나를 찾아갈 수 있다.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까?


고통의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읽지 않을까. 중요한 건 상호성이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건 고통의 당사자일 때보다 곁에 있을 때라고 생각한다. 고통의 곁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누구랑 말할 수 있는가. 2인칭 시점을 회복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나, 고통의 과정에 있는 사람은 삶이 파괴되는 것만이 아니라 재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통을 피해자화해서 바라보는 것 중 가장 큰 문제는 고통 받은 사람이 재건되는 삶을 보지 못하게 차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격렬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조차도 그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남의 고통에 대해 곁의 위치에서 말할 때조차도 격렬한 고통 속으로 발언자를 밀어 넣고 있다. 즉 삶이 파괴되도록 밀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고통을 말하는 힘으로 그 삶이 재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야 비슷한 경험을 겪는 사람이 다음을 볼 수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 곁에 선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책을 쓸 때 원칙이 ‘사회를 폭로하고 사람을 옹호하라’다. 이 문제에 있어 옹호 받아야 하는 사람은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이다. 고통의 자리에 관한 어려움과 별개로 고통의 곁에 선 사람들의 서사를 우리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보통 사람들의 보통 고통을 다루려고 한 건, 우리 모두가 대개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대부분 2인칭의 느낌으로 세상을 살지 않나? 2인칭의 삶이 더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1인칭끼리의 전쟁만 보이는 게 아니라 2인칭이 두꺼워졌으면 좋겠다. 고통을 겪는 이를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엄기호 저 | 나무연필
한국 사회 내부의 깊은 속살을 드러내왔던 사회학자 엄기호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고통의 지층을 한 겹씩 들여다보면서 발견하고 성찰해나간 우리 시대 고통의 지질학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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