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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남은 방황은 쓰면서 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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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현대시사상’을 통해 등단한 27년 차 시인 김소연. 그는 ‘시를 쓰며 살고 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 소개에 사족을 단다면 ‘시와 산문을 쓰며 살고 있다’가 될 것이다. 이제까지 낸 산문집  『마음 사전』 『시옷의 세계』   『한 글자 사전』이 사전의 형식을 빌려 언어와 감정을 임시적으로나마 규정해보려는 시도였다면,  『나를 뺀 세상의 전부』에서는 규정하려는 마음을 비우고 오직 그가 경험한 것들을 모았다. 빨래를 개거나, 더위에 지친 할머니에게 꿀물을 타 드린다. 어머니가 혼자 사는 모습을 지켜본다. 인상과 비평을 최소화했지만 ‘나를 뺀 세상의 전부’를 적는 순간 그것이 곧 ‘나’가 되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므로 완성되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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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만남의 가치


꽤 오랫동안 연재한 칼럼이 모였어요.

 

2014년부터 일간지와 문예지에 연재했던 칼럼이에요. 당시 세월호의 충격이 세상을 뒤엎고 있었고, 기성세대인 제가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그때서야 처음으로 하게 됐어요.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칼럼 연재를 거절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하필이면 시인을 그 자리에 부른다는 건 이 사회를 잘 진단할 수 있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시인의 시적인 입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였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가 다 괴롭게 성치 않은 부위를 계속 세상에 노출시키고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사람한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들은 대개 멋있는 일이 아니라 사소한 일이라는 걸 기록해두고 싶었어요.

 

산문은 잠언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을 때가 많은데,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생활을 말하는 문장에서 힘을 받더라고요. 잠언보다 훨씬 힘이 센 느낌이에요.


산문은 규정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 쉬워요. 그래서  『마음 사전』을 낼 때는 아예 사전이라는 콘셉트를 가져다 썼어요. 마음에 대한 사전이니까 당연히 주관성이 들어갈 거고, 사람들이 그걸 양해해준다는 전제 하에 마음껏 규정하려는 장치였죠. 그렇게  『한 글자 사전』 까지 실컷 규정하고 나니 이번에는 아무것도 규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감응하는 개체처럼 자아를 최소화해서 시로도 잘 안 쓰는 작은 만남이나 대화의 가치를 누적해나가고 싶었어요.


생활에 대한 애착이 느껴졌어요. 청소와 요리 같은 것들이요.


어느 순간 생활이 평생 동안 탐구해도 될 만큼 어마무시한 세계라는 걸 알았어요. 출판사를 만든 친구와 ‘빨래와 요리와 청소’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겠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예전에는 요리책으로 분류되던 이야기가 요즘은 인생의 지혜를 담게 되고, 자기 욕망을 귀퉁이로 접고 단정하게 살기로 했다는 책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전문가를 만난 날’에서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인님 나이에도 늘 배우고 겸손해지는 때가 있구나 싶기도 하고요.


거기에 나오는 전문가는 사실 이 세상에 널린 사람들이잖아요.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전문가보다 숨어 있는 전문가, 자기가 전문가인지 잘 모르는데 그 분야에서는 오래 일한 분들에게 전문가라고 이름을 붙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보면 놀랍거든요.


<생활의 달인>이 떠오르네요. (웃음)


인간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좋아해요. 무언가를 오래한 사람들의 손모양만 봐도 눈물이 고이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반복과 노력, 훈련을 거뜬히 해낸 겸손함이 있죠. 그런 것들을 봐야 제가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과 삶이 많이 나오고 인간이 위대하다는 걸 깨닫는 것 같아요.


최근 새로 배운 생활의 기술이 있나요?


저는 프리랜서라 게을러지려면 엄청나게 게을러질 수 있어요. 예전에는 일어나면 잠에서 제대로 깰 때까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어제 도착했던 잡지 같은 걸 뒤적거리거 활자중독증 환자처럼 굴었는데, 지금은 잠에서 깰 때까지 제자리에서 몸을 움직여요. 그러면 조금 더 기분 좋게 깰 수 있다는 걸, 태어나서 40년이 지난 다음에야 알았어요.


젊을 때는 들어도 잘 몰라요. 나이가 들어야 소화하는 경험이나 지식이 있기도 하죠.


그렇죠. 어떤 지혜는 떠먹여줘도 퉤퉤 뱉게 되잖아요. 이런 사소한 지혜들이 그런 것 같아요.

 

생활을 챙기려고 하는 순간 시간과 공력을 많이 들여야 해요. 직장을 다니면서 가능할까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야근을 하면 안 돼요. (웃음) 생활을 챙기면서 사는 것을 글로 써서 공유할 정도로 우리가 왜 사는지 잊어버리고 획일적인 목표에 자기 시간을 다 쓰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좀더 일찍 알았다면 생활의 달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머니께서 홀로 생활을 정갈하게 가꾸는 모습을 보면서도 많이 배우셨을 것 같아요.


어머니가 혼자 사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진작에 혼자 살아볼 걸 그랬다고 말씀 하셨어요. 자기 자신이 혼자 살아도 되고 혼자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두 가지 가정과 자격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게 가슴이 아파요. 심지어 닭다리도 최근에 들어서야 처음 드셔보셨다고 하고요.


배우는 과정에서 환대의 한계를 깨닫기도 했어요. 이제까지 글이나 간접적인 경험으로 환대의 개념을 배웠다면, 바깥의 어떤 사람들은 몸소 실천하고 있는 걸 본 거죠.


글만 쓰고 사는 샌님들의 바보력이죠. 환대할 줄 모르고요. 환대력이 몸에 밴 사람들을 보면 인간이 원래 저렇게 생겼는데 내가 이상하게 지적인 수련을 하다가 자폐적인 사람이 됐나 싶어요. 그럴 때 정말 슬퍼요.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이만큼 읽고 이만큼 쓰면 똑똑해질 줄 알았거든요. 어느 부분에서는 똑똑해지겠지만 그만큼 다른 무능과 무지함이 비슷한 무게로 생기는 것 같아요.

 

 

 

시의 반기를 다시 든다면


90년대 사회상으로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게 당연했다면, 지금은 절망이 도처에 있어서 절망을 이야기하기도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어렵다고 하셨어요.


그렇다고 지금 시대에서 희망을 말하면 단순하고 멍청하게 되는 거죠. 그래도… <로마>란 영화 보셨어요? 제가 찾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예요. 중산층이었던 주인공의 유년기를 그리는데, 흔히 옛날 우리 말로는 식모나 가사 도우미로 표현했던 노동자가 나와서 그 사람의 감각으로 청소하는 장면을 한참 보여줘요. 지루한 노동일 때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걸 즐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죠. 하여튼 끝내주거든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숨은 기억 속에 복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게 많아요. 제가 생각했을 때 문학은 어떤 허세나 주입 받은 문학성, 부정성에 도취되어서 목소리만 내는 게 아니라 그런 영화와 같은 모습을 찾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까지 이상한 유미주의적인 태도 속에서 나왔던 작가상이라는 게 결국 성폭력을 자행하게 만들고, 친일문학을 가능하게 하고, 지금 상황을 만든 것과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배운 대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저 혼자만이라도 ‘문학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을 끼워 넣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왜 사람들이 지금 시대에 들어서 시를 선물하려고 하는지 궁금하다고요.


지금도 사람들이 시를 좋아하는 동력이 뭔지 궁금해요. 시인이라서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예전에는 시가 힙스터들이 향유하는 문화로 번져가고 있나보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그렇게만 진단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첫 시집이 나온 게 90년대 중반이었는데, 엄청 유명한 대중적 탑 스타만 재쇄를 찍었어요. 누가 팬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없었고 서점도 없고 낭독회 문화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게 정상인 줄 아는 저한테는 이상하죠. 『수학자의 아침』은 만 부가 넘게 팔렸는데, 너무 어마어마한 숫자에요.


한편으로는 평범한 생활을 이야기하는 시가 안 보인다고 안타까워하셨어요. 사람들이 생활이 시로 쓸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전통적인 방식으로 서정시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시를 쓰는 분들은 많아요. 그런 분들의 시에는 생활이 많죠, 주로 어머니가 준 밥상 같은 소재로 쓰였지만요. 하지만 이 시대의 어법과 감수성을 장착한 시에서는 생활 이야기가 거의 배제되고 생활을 홀대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나마 우아하게 설 수 있는 선에서 생활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i에게』 에서는 일부러 친구가 선물한 무쇠팬으로 부추전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라든가, 여행을 가서 구멍가게에 두루마리 휴지를 사러 가는 이야기 같은 시를 쓰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스타벅스에 가서 시를 쓰기도 하고요.


스타벅스요?


시를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볼 때는 ‘스타벅스’라는 단어가 천박해 보이는 정서가 있잖아요. 그런 단어 안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가서 천박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게 사실 제가 원하는 상태거든요. 어떤 구차함이나 천박함이 묻어나오면 묻어 나오는 대로 평범하게, 그게 시의 한 정신이면 좋겠어요. 생활을 소재로 쓰는 게 아니라요. 


“시가 세상의 위엄에 반하는 것처럼 시의 위엄에도 반기를 들었으면 좋겠다”(191쪽)고 썼는데, 여전히 시가 반기를 들어야 할 때가 많다고 생각하나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들이 저마다의 절규를 내지른 게 90년대예요. 당시 20대 여성 화자를 전면으로 내걸은, 어떤 남성들이 봤을 때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처럼 삐딱함을 드러내는 시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이십여 년이 지나고,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왔는지 한번쯤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거죠. 우리가 생각하는 전위성이나 실험성, 시의 방향도 이 시대에 만연한 것이라면 어느 순간 반기가 아니라 시대에 일조하는 깃발일 수도 있잖아요. 90년대부터 들고 있던 이 시의 반기가 지금 보고 있으니 제일 보수적인 게 아니었을까 싶었어요. 이것의 반기를 다시 든다면 무엇일까 싶어요.


시를 쓰지 못했던 기간이 있다고 들었어요. 


2013년  『수학자의 아침』 을 출간할 때까지만 해도 시 쓰는 걸 방황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 했어요. 그 전까지 어디든 달려가서 열심히 쓰고 재미있어했다면,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공간이나 쌍차 투쟁 공간에서 시 낭송을 하면서 우리가 쓴 시가 너무 어렵고 읽기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알던 시와 제가 쓰던 시를 기왕이면 잘 연장해서 투쟁 공간에서도 사용 가능한 시를 쓰고 싶다고 욕망하다 보니 당연히 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고요. 계속해서 그런 시간을 가지다 이제야 좀 쓸만해졌다 싶을 때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어요. 분명 저도 당했었는데 나이가 드니까 잊어버렸던 거예요. 너무 멍청한 사례인 거죠. 어느 순간 아주 깜짝 놀랄만한 사회적 큰 일 앞에서 제가 얼마나 멍청했느냐를 두 번 세 번에 걸쳐 깨달으니까 제 감각을, 판단력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시를 자신 있게 쓰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생활을 담은 시가 나오면 새로운 시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어딘가로 퇴행하는 느낌은 주고 싶지 않아요. 어렵죠.

 

 

이번 책을 쓰면서 생활을 글로 나타내는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아요.


세상에 내던져지듯이, 원한 적 없는 채로 태어났을 때 이 삶을 잘 관통해나갈 자기 수단이 필요하잖아요. 저한테는 글쓰기가 그런 쾌락적인 측면이 있어요. 인간이 동물 중에 유일하게 언어를 쓰고 있으니 내가 왜 인간인지 계속 생각하는 기회로 다루고 싶기도 하고요. 글쓰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사는 이유라서, 아파도 그 아픔을 통과하기 위한 숨쉬기의 방법이 글쓰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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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고꾸라지는 좌절감은 없어요


‘눈치우기’ 시인 모임에서 잡지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실패한 전적이 있어요.


10년 정도 일산에서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어서 운영한 적도 있어요. 현대문학 편집위원을 그만둘 때도 그렇고, 어떤 면에서는 실패한 인생인 건데 좌절감은 없어요.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인성의 일부분을 바꿔놓는 뜨거운 경험이었지만, 실패는 아니에요. 시도도 많이 했고요.


죽어라 반복하고 연습해서 얻은 것들”(126쪽)중 하나가 아닐까요? 실패하고 빙그레 웃는 일이요.


좌절감이 드는 실패도 분명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좌절감이 들 이유가 없었던 실패 같기도 하지만, 이런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이 변덕인 건지 제가 진화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저는 실패가 시도한 자의 몫인 것 같아요. 그건 시를 쓰면서 알게 된 경험이기도 해요. 혼자 쓰고 실패한 시, 무지 많죠. 그중 조금이라도 덜 창피한 건 세상에 발표하고, 또 발표한 것 중에 그나마 덜 창피한 걸 시집으로 엮어서 내는 훈련을 오래 한 셈이니 실패에 대해 인생이 고꾸라지는 좌절감은 없어요.


“말이 아니라 발로써 자신을 증명”(261쪽)해야겠다는 다짐이 마지막에 실렸어요.


그 글을 쓴 게 2017년 말이었을 거예요. 칼럼을 쓰고 한 해 동안 계속 메신저로 안부를 묻는 대신 웬만하면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어요. 사람이 다짐을 해놓으면 되더라고요. 이를테면 세탁소에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 하는데 안 맡긴다, 그럼 SNS에 오늘은 꼭 세탁소에 갈 거라고 남겨 놔요. 그럼 가요. (웃음) 아무도 나를 감시하지 않는 어른이 된 후로 그런 식으로 다짐을 하게 돼요.


 눈빛으로 응원을 보냈던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어른에 대해 생각하셨었죠.


좋은 어른은 사회적 부모라는 생각을 했어요. 실제 부모는 너무 감정적으로 가슴 졸이고 사랑을 듬뿍 주어야 하잖아요. 남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슴 졸이지도 않고 듬뿍 사랑을 주지도 않지만, 항상 믿는 눈빛으로 저 먼데에서 울타리를 쳐 주고 불쑥 찾아가도 기댈 수 있는 사회적 부모요. 저를 스승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구나 어른이 될 거라는 자각 없이 어른이 되어버려요. 어른의 자리가 부담스러워서이기도 하고요.


어린 아이들은 제가 철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덩치가 있다는 이유로 어른 취급을 해주더라고요. 어린이도서관에서는 엄마와 제가 있으면 제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려고 할 때가 있고요. 자기 엄마보다 잔소리를 덜 하는 너그러움 때문인 것 같은데, 가끔은 뜨거운 거리보다 먼 거리를 원하는 거겠죠. 그럴 때 물리적으로 어른이라는 걸 배운 것 같아요. 나쁜 어른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앞으로 계획이 있나요?


사랑에 대한 책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고 곧 나올 예정이에요. 2년 정도 문예지에서 시 청탁이 오면 거절했었는데, 올해부터는 거절하지 않으려고요. 아직 방황이 끝난 건 아니지만 남은 방황은 쓰면서 해보려고 청탁을 많이 받았어요. 다시 시를 쓰는 사람이 될 것 같고…… 모르겠어요. 계획이 없어요. 계획한 대로 늘 살지를 못해서요. 


‘책읽아웃’에 출연했을 때, 젠더와 타인에 대해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저는 사랑의 정수가 궁금한 게 아니라 사랑의 경계지대에 더 관심이 있어요. 시를 공부하면 시의 정수가 아니라 시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시가 궁금해요. 그러다 보니 훌쩍 담장을 넘어 저도 모르게 젠더와 타자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요. 사랑을 이야기하다 보니 제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치밀한 젠더 감수성이라든가 10년 후에 봐도 낙후되어 보이지 않을 안목이 필요해서 그 공부를 하고 있어요. 어찌나 전세계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남성들이 다 독점했던지, 여성 철학자 혹은 여성 작가가 사랑을 포착한 것과 남성이 포착한 게 거의 1대 9예요. 그래서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나를 뺀 세상의 전부김소연 저 | 마음의숲
사소한 것 같지만 제법 사소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관계와 일상을 이야기하며 나와 다르지 않은 시인의 세계를, 우리가 소홀했던 삶의 단면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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