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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순 “7집에서 가장 표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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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쑥스러워하지만 ‘명반 아티스트’라는 수식은 장필순의 전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난 1988년 첫 앨범이 나온 이후 그처럼 매번 신보가 나올 때마다 팬들과 음악관계자들의 관심과 성원의 집중세례를 받는 가수는, 특히 여가수는 솔직히 거의 없다. 다시 한 번 정서와 지향 그리고 사운드에 변화를 준 이번 7집에도 전문가들과 마니아들의 숭배에 가까운 찬사가 이어졌다.

현재 거주하는 제주에 직접 내려가 평화로 부근의 한 카페에서 장필순을 만났다. 신보의 녹음도 거기서 했을 만큼 제주는 장필순 음악에 암암리에 작용한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제주의 공기가 지켜주는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본인도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11년 전 6집이 나왔을 때 인터뷰보다는 한결 환해진 인상이었다. 나른하면서도 격조를 지킨 버스(verse)에 꽤 명랑하고 다채로운 코러스(Chorus)의 대비와 조화가 압권인 신보에 대해 “재미있게 코러스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지난 앨범 활동 당시 홍대에서 만나서 인터뷰할 때는 부쩍 지친 모습이었는데.

6집할 때는 정말 맘고생이 심했던 것 같아요. (음악을 워낙 힘들게 하는 스타일이라고 덧붙이자) 재미있게 하지를 못해요. 그냥 태생인 것 같아요. 좋고 나쁘고의 선택이 아니라. (조)동익이 형도 그런 스타일인 것 같고. 어쨌든 둘이 5장의 앨범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건 아마 이러한 사이클이 맞았던 덕분이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20년 이상 함께 작업 하기는 힘들었을 거예요.

6집이 비평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대중적, 상업적 결과가 따라주지 못했다. ‘음악 안한다’는 말이 들릴 만큼 음악에 대한 회의가 든 것 같았다.

그게 다는 아니긴 한데 (그 이유도) 없지는 않았어요. 이게 현실적인 문제라기 보단 심정적인 문제인 거죠. 하면서 재미가 없어진다고 할까. 여태까지 해온 게 음악 듣고 이야기 하고 그런 거였는데. 그래도 만든 음악들에 대해서 좋다고 해주시니까 그 낙에 한 거죠.

당시 음악이 아이돌을 비롯한 비주얼로 무게중심이 완전히 이동했던 때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애써 만든 2003년의 조용필의 18집도 참패하지 않았는가.

흘러가는 그런 걸 잘 모르니까. 항상 하던 대로 저 하는 일만 하는 스타일이잖아요. 환경이란 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러한 점도 분명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네요.

그런 와중에 앨범작업을 다시 시작한 데에는 함춘호씨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다.

제가 예전부터 언젠가 좋은 CCM을 해보고 싶었었는데, 자신도 없었고 어설프게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의지가 많이 흐려졌었는데, 뜬금없이 춘호 형이 와서 밀어 붙였죠. 제주도 와서 얘길 하셨는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때도 동익이 형이 힘을 줬죠. 형도 그땐 거의 음악에 손을 안대고 있었는데 의논을 좀 하니까 그러면 정말 100% 네 곡을 가지고 네 음악을 해보라고 하셨죠. CCM이라 조심스러워하는 제게 편하게 하라고, 네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해보라고, 그러면 언젠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나중에 너에게 크게 다가올 것이라고 격려 해줬어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두세 달 만에 10곡을 다 썼었죠. 제주에서 마스터링을 했는데, 동익이 형이 듣더니 너무 좋다고 하더라고요. 철저히 아날로그 음악으로 잘 풀어간 것 같아요. 이틀 녹음 했는데 80% 이상이 동시녹음이었거든요. 노래도 가이드한 걸 다 넣었어요. 터치가 조금 불편한 것이 라이브한 것 같아 더 좋다고 그래서.




앨범에 참여한 면면들을 보니 ‘하나 디아스포라의 부분 집결’ 같은 느낌이다 (앨범은 조동진, 조동익, 함춘호, 박용준, 이규호 등 ‘하나음악’ 식구들이 대거 참여했다)

하나음악과 함께 하기로 계약된 건 5집까지였는데 6집도 하나에서 냈죠. 제가 하나음악을 하면서 좋은 음반들을 만든다고 애썼지만, 아시다시피 대외적으로는 반응이 오질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우린 좋은 음악 한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제 생각에는 10년 동안 신나라 유통도 하나음악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랬는데 결국에는 동익이 형도 저도, 그것에 대해 심적으로 힘들었던 거 같아요.

정규앨범이 11년 만인데, 보컬 부분은 어땠나.

노래 실력은 현저히 떨어졌고요.(웃음) 그 대신 의도하려는 표현은 더 잘되는 것 같아요. 계속 활동하질 않아서 힘이 떨어졌는데도, 정작 녹음할 때는 몇 번 안 불렀어요.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왜 그랬나 생각해보면, 녹음 당일에 목이 좀 잠기거나 상태가 좀 안 좋아서 오히려 최상의 컨디션에서 노래해야 한다는 부담이 덜 했던 것 같아요. 동익이 형도 전달하는 느낌이 너무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더 이상 좋게 할 필요가 없다면서. 거기서 합의점을 찾았죠.

나른함, 건조감, 윤기 등이 노래에 따라 잘 배분이 되었다.

보이스 톤을 잡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이번 앨범을 하면서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왜 샤우팅을 했느냐,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느냐라는 거였는데 사실 아무 의미 없어요. 편곡하고 불러보고 간주를 만들어 연주한 다음 그걸 같이 듣다가 이쯤에서 질러주면 좋겠다는 제안이 나와 한 거지, 특별한 이유가 없죠. 모든 노래의 톤을 다양하게 해야지 이게 아니라, 그 톤이 필요에 의해 딱 정해지는 순간이 생겨요.

음색 자체는 예전보다도 더 좋아진 느낌이 든다. 제주도의 영향인가.(웃음)

영향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톤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첫 곡에서 톤의 변화 없이 부르다가 샤우팅을 하잖아요. 사실 꼭 언젠가 이 노래를 하고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처절한 가사잖아요. 대중, 청자, 그리고 회색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싶었어요. 소리 한번 못 지르는 현대인들을 위해서. 이외수 선생님이 대중예술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나 아픔을 대변해야 되는 책임이 있다고 한 적이 있으신데 굉장히 공감해요. 살면서 평생 그런 것을 표현 못하고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럴 때 그런 사람들이 표출하지 않고 가슴에 가라앉혀 거름을 만들게끔 하는 것이 대중예술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사실 (음악 하는 게) 무서운 직업이죠. 어떤 노래 하나로 어떤 이들의 인생이 뒤집어 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어요. 그래도 어떤 사람의 긍정적인 변화가 나로 인해 생겼다면 그 기운이 다시 저에게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한 곡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앨범 전체적으로 따지면 좀 튀는 곡이긴 하죠. 사실. 5집에는 건반이 없는데, 그 노래 한곡에 건반, 스트링이 있어요. 이게 원래 의도적이었던 게 아닌 게, 마침 용준이가 미국에 가 있길래 괜히 욕심 부리지 말고 올드한 록 사운드 구조로 멋있게 하려고 했던 게 그거였어요, 그런데 동진 형님이 동익아 이 노래 너무 좋다 그러시면서, 그런데 이 노랜 건반을 넣어야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탄생한 노래죠.

전체적으로 신보는 무거운 내용을 코러스로 예쁘게 꾸민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눈부신 세상」 이나 「무중력」 을 들으면 클라이맥스에서 코러스가 강력하게 등장하는데, 그런 것들이 아주 매끈하게 처리된 것 같았다. 오랜 코러스 경험으로 쌓인 내공이 엿보인다고 할까.

코러스를 오래한 경험이 있는데다가 성가대도 알토 파트였었고, 노래를 들으면 어려서부터 음악을 들을 때 멜로디만 듣는 게 아니라 코러스를 듣는 습성이 있었어요. 예전에 김명곤 오빠 같은 경우에는 악보를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제가 코러스를 만들어가야 했어요. 믿어주셨던 거지. 하광훈, 윤상, 김지환씨, 위대한 탄생 (이)호준이 형. 그런 분들 하실 때 한참 막 코러스 하러 다녔었죠. (우)순실이, (신)윤미랑 같이. 악보 보고 몇 년 동안 하다가 점점 ‘이렇게 해보면 어때요’ 하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제가 만들어가게 됐어요. 지금 나한테 결정적인 강점이 된 거죠. 예전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냥 멜로디만 부르는 가수로 남았을지도 몰라요. 그때 시간이 소중했어요.

전자음악적 요소도 두드러지는 부분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렇죠. 6집이 100% 디지털 사운드였다면, 이번에는 음악 자체는 아날로그로 가되 전자음을 필요한 곳에 철저히 집어넣으려 했어요. 그러다 이제 마지막 곡에선 그랜드 피아노랑 트럼펫만 나오거든요. 음반은 하나의 책이나 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예전 아날로그 음악과 디지털 음악이 막 섞여 있다가 마지막엔 성당에서 혼자 노래하는 그림을 그리며 이 곡을 만들었어요. 원래 제가 목소리에 리버브와 딜레이를 걸지 않는데 이번에는 철저하게 걸었죠. 그러다가 맨 마지막 잘 들어보시면 딜레이가 싹 빠지는데, 그렇게 음반을 끝내는, 성당 문 닫고 나오는 느낌으로 마무리했어요.




「무중력」 이나 반응이 좋은 「맴맴」 에서 그렇던데, 나이가 드니 오히려 전자음악과 음색의 궁합이 더 좋아지는 것 같다.

동익이 형이 그걸 10년 전부터 얘기했어요. 디지털에 너의 목소리가 잘 맞을 거라고. 그래서 6집을 더욱 디지털 적으로 제작했었죠. 다들 걱정했었는데, 그래도 엄청난 조력자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어요, 오랫동안 제 목소리나 음악의 변화를 보고 서포트 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게 제일 큰 재산인가 싶어요.

이 대목에서 조동익씨를 짧게 설명한다면?

글쎄요. 전혀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 같은데 사실 주도면밀하게 잘 알고 있어요. 사회에 대한 시선도 그렇고 굉장히 논리정연해요. 집에 가만히 있는 사람 같은데 항상 한발 앞서 있는 느낌이에요. (조동익이 이미지와 달리 미디 음악에도 능숙하다고 얘기하자) 그런 것과 일맥상통하네요. 새로운 음악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옆에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박용준씨는?

갈수록 보물이 될 친구에요. 용준씨도 대학 다니다가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는데, 동익이 형이 먼저 만나고 너무 맘에 들어 하셨어요. 동익이 형 녹음할 때 팀 멤버가 딱 있잖아요. 그런데도 용준이랑 너무 하고 싶었대요. 그래서 일단 열악한 조건에서 할 수 있겠느냐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일단 마스터의 입장이라 멤버가 늘어나면 그 팀 안에서 뭔가가 더 나눠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걸 용준이가 받아들이면서 같이 하게 되었죠. 예전에는 동익이 형이 녹음하다가 “파 한번 쳐봐” 하면 용준이가 의아하다는 듯이 “엥?”이래요. 그러면 동익이 형이 “에이 일단 쳐보고 들어봐”라고 그러죠. 그래서 녹음한 걸 들어보면 너무 좋은 거지.(웃음) 그런데 요즘은 반대에요. 오히려 동익이 형이 용준이한테 느끼는 게 많죠.

앨범의 첫 곡으로 더할 나위 없는 「눈부신 세상」 은 조동진이 이미 발표했던 한 곡이다. 조동진 선배가 이번 곡을 들었는지.

앨범 나오기 전에 들려드렸죠. 중간에 소리를 막 지르니까 “이런~” 이러시던데요.(웃음) 형수님이 음악을 많이 아시는 분인데, 들으시더니 딱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좋다고. 사실 남편의 곡이잖아요.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 리메이크도 참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어쨌든 노래를 들으니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떠있는 그림이 그려진다고 말씀해 주셔서 황송했지요.




7집을 통해 무엇을 가장 표현하고 싶었나.

‘난 아직 살아있다’라는거? (웃음) 뭐 내가 건재하다 이런 것 보다는, 오랜만에 슬쩍 디밀어 놨는데 그게 멋있길 바랐어요. (이 표현이 너무 멋지다고 하자 활짝 웃었다) 그 안에서 세상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고)찬용이나 규호나 오랜 친구지만 처음 혹은 간만에 같이 곡을 작업하기도 했었고, 제주에서 온전히 녹음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하지만 제일 컸던 건 역시 ‘멋있는 것을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이었어요. 교만이 아니라, 그렇게 하려면 그만큼 또 열심히 해야 되는 거잖아요. 나이 먹은 값도 하고 싶었고.

그렇다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글쎄요. 그냥 평화로웠으면 좋겠어요.(웃음)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것을 못 견뎌 하는 것 같아요. 평화로운 걸 심심한 것으로 여겨요. 그 심심한 게 얼마나 재밌는 건데, 그 심심함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걸 찾을 수가 있는 건데. 도심에 있으면 선택권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가는 곳은 정해져 있단 말이죠. 쇼핑몰이나 카페, 영화관 정도. 수많은 연극과 영화, 갤러리와 전시회 들이 있는데 대박 나는 건 몇 개 없잖아요. 저 조차도 서울 올라가면 꼭 쇼핑몰 한 번씩 들러요. 그런 단순한 삶의 패턴이 돌아오는 거죠. 그런데 9년 동안 제주에 살면서 여기 있을 때만큼은 도심에 대한 관심이 싹 없어지더라고요. 트렌디한 것에 민감한 제가요. 여기 있을 땐 그냥 장화 신고 텃밭에 가서 일해요. 자연이 많이 저를 변화시켰죠.

취향으로 따지자면, 어느 곡이 제일 좋은가.

참 가혹한 질문인데 굳이 꼽자면 저는 「1동 303호」 랑 마지막 곡 「난 항상 혼자예요」. 사람들이 제 목소리가 쓸쓸하다고 그러는데, 그게 꼭 허스키해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저 자신이 정말 외로움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껴요. 전에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이제는 그걸 어느 순간부턴가 즐기고 있어요. 외로움은 결국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 중 하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렇게 남들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노랫말을 본다면 「너에게 하고 싶은 얘기」 에요. 어쨌든 세상에 대해 조금은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네가 있기 때문이니까요.

인터뷰 : 임진모 황선업
사진 : 황선업
정리 : 황선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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