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당사자 사이에서 서로 대립하는 의사표시가 내용상 합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법률행위를 계약이라 한다. 쉽게 풀면 두 명 이상의 사람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표현해서 그 의사가 서로 맞을 때 계약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연애도 계약의 일종이 아닐까? 서로 감정 표시를 하고, 그 감정이 서로 맞을 때 연애가 이루어진다. ‘썸 타기’는 계약 교섭 단계에 비견할 만하며, 사귀기 전에는 등기부등본 열람하듯 상대의 연애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무엇보다 도장을 찍었다고(사귀자고 했다고) 끝이 아니다. 갑에게도 을에게도,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권리가 있다.
모두가 연애를 꿈꾸는 만큼 연애와 관련한 강의는 늘어나지만, 연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해진 공식은 없다. 데이트 폭력, 불법 촬영, 스토킹 등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잘못된 만남’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탈연애, 탈결혼’을 외치는 사람마저 나오는 이때, 박수빈 변호사는 연애 당사자들이 원하는 방식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교섭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박수빈 변호사는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덜 잔인한 사회가 되고,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사는 일에 기여하고자 글을 쓴다. 변호사가 된 첫해에 재단법인 진실의힘에서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함께 썼고, <경향신문>에 ‘연애는 계약이다’를 연재하며 연애 관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계약법의 관점에서 조언을 던졌다.
계약은 사람마다 달라요
계약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어요.
최대한 출판부에서도 잘 읽히게 쓰자고 했었어요. 쓴 뒤 교정도 많이 보고요.
이전 책이 공저였다면, 『연애도 계약이다』 는 변호사님 이름을 달고 나온 첫 책이에요.
첫 번째로는 나름 변호사인데 연애 책을 써도 될까 하는 심리적 부담감이 있었어요. 두 번째로는 기본적인 법리를 설명하는 아주 기초적인 내용인데, 이렇게 쉬운 글을 변호사가 써도 되나 싶은 마음이 있었죠.
어려운 걸 쉽게 쓰는 건 더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래도 실력이 없어서 저렇게 쉬운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게다가 기본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 틀리면 안되잖아요. 칼럼 올릴 때마다 SNS에 올려서 로스쿨 교수님이 ‘좋아요’를 눌러주실 때까지 긴장하기도 했어요. 워낙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쓰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대화도 많이 해주고 제가 벽에 부딪칠 때 다들 자기 사연들 하나씩 풀어주기도 하고요. 이 책을 쓰는데 도와준 친구들만 불러서 출간 파티도 했었어요.
연애에 관심이 많았던 편인가요?
굉장한 관심 주제였죠. (웃음)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친해지고 상대방을 알아가는 데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애인이 생기면 그 친구가 좋아하는 취미를 같이 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요. 지나고 보면 그렇게 연애를 열심히 하는 기간 동안 늘 배우고 성장했어요. 사람들이 연애를 대수롭지 않은 것, 가벼운 것, 사적인 이슈, 젊은 사람들이 하는 걸로 낮잡아보는데 저는 그런 시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연애에서 상처를 입으면서 성장하는 사람도 있고, 사랑이라는 거대한 감정을 경험해 봄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확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심지어 플라톤도 향연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사회와 제도에 대한 사랑, 이데아까지 사랑을 확장하는 개념을 이야기하잖아요.
연애 코칭 책은 많이 있지만, 계약법으로 연애 관계를 설명하는 책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저도 연애지침서 좋아해서 많이 읽었어요. 보통 성관념을 강화하는 데이트 코칭을 하거나, 핵심 없이 ‘여자/남자가 사랑에 빠질 때’ 라면서 그 사람의 특수성을 보는 게 아니라 선입견과 통념에 비춰서 상대방을 짜맞추는 방법을 제시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는 연애가 성립되지도 않고, 상대방에게 억압이 될 수도 있어요. 계약도 사람들이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백이면 백 모든 게 다 다르거든요. 각자의 특수성에 집중하는 연애를 하는 게 요즘 세대에도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계약을 설명하려고 연애를 소재로 쓰셨다고요.
의뢰인을 만나면 대개 계약법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손해를 보거나, 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인데 분쟁할 때가 있어요. 의뢰인에게 계약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또 공익적 입장에서 다른 분들도 계약 관련 분쟁에 휩싸이지 않도록 제일 쉬운 비유를 찾아봤더니 모두에게 적용될 만한 사례가 연애였던 것 같아요. 연애로 비유하면 계약이 결국 관계라는 게 쉽게 이해되고, 예의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다 연애가 주제가 되었어요.
계약법의 이론을 써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에피소드가 들어가는 과정에서 연애 쪽으로 기울게 되더라고요. 저도 페미니스트로서 주변을 보면 생각보다 잘못된 연애와 로맨스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거든요.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면 다른 연애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줄까 하는 고민이었던 것 같아요.
연애와 계약, 둘다 친근하지만 어려운 주제에요.
사람들이 계약에 대한 오해와 연애에 대한 선입견이 모두 있어요. 계약을 떠올리면 갑을 관계나 갑질을 생각하고, 연애는 무조건 감정적이고 재지 않고 따지지 않아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해타산적이고, 교류 없고 예의 없이 계약을 하면 결국 감정이 틀어져서 계약이 깨질 때도 되게 많아요. 그래서 두 가지 잘못된 오해를 풀면 갈등이 해소되지 않을까, 그런 거대한 목표를 가지고 쓴 책이에요. (웃음)
처음 쓸 때도 두 가지 목표가 있었나요?
어느 정도는 있었어요. 다른 것보다 동등한 사람끼리 연애를 한다는 주제를 끝까지 가지고 가보고 싶었고, 처음부터 잘 알아보고 연애를 시작하지 않으면 큰일 날 수 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쓰면 쓸수록 연애는 ‘내 것 네 것’ 하는 관계가 아니라 ‘너랑 나’라는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계약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정확하게 설명이 되더라고요.
연애가 소유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법 덕후만 이해하는 농담이지만 “연애는 물권법이 아니라 채권법”이거든요. 저도 연애 상대에 대해 소유의 영역으로 생각하려는 걸 계속 극복해왔어요. 어떻게 보면 자신을 꾸며주는 화려한 액세서리처럼 생각하는 거죠. 생각보다 여자분들도 남자에 대해 소유 관점으로 연애를 많이 하는데, 결국 그런 관점을 서로에게 허용하는 순간 여자가 피해자가 된다는 걸 어릴 때는 잘 인식하지 못했어요.
변호사님 나이대가 결혼의 ‘프라임 타임’이라고 표현되는 나이잖아요. 스스로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은 게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연애에 대해 썼다면 두 번째는 결혼에 대해 쓰려고 했어요. 저한테도 중요한 이슈였죠. 우리 사회에서 정상 연애의 결말은 당연하게 결혼으로 귀결되잖아요. 그렇지 않고 연애라는 관계 자체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청소년기가 그저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듯이, 연애도 결혼을 위한 과정이 아니고 그 자체로도 조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연애는 쌍무계약
계약의 대전제로 동등한 입장에서의 연애를 설명해주셨어요. 더 사랑하는 쪽이 을의 관계에 있다고 흔히 이야기하는데요, 사랑 안에서 평등이 가능한 걸까요? 누군가 더 자신을 을의 위치에 놓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완전한 동등함은 불가능할 거예요. 어떤 불균등한 위치에서든 계약을 체결할 자유는 있지만, 계약법에서는 그 한계를 정해놓고 있어요. 지나치게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는 권한을 남용하거나 상대방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계약을 맺어도 안 되죠. 사기를 쳐서 계약을 맺어서도 안 되고요. 마찬가지로 연애에서도 물론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방이 원하는 걸 다 받아들이는 게 연애는 아니잖아요. 나는 저 사람을 너무 사랑하는데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황에서 맺어진 게 과연 연애일까요? 상대방이 자신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걸 알고 그걸 이용하는 관계가 연애일까요? 말로만 우리 사귀는 사이라고 이야기해서 다 내용상 연애는 아니죠.
실효성이 있는가 보자는 거군요. (웃음)
그런 연애라면 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고, 연애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적인 이야기이기도 해요. 실제로 갑을 관계는 당사자를 이야기할 때 A나 B처럼 호칭의 용어인데 사람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갑질로 바로 연결하고, 을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자신을 권리가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계약은 기본적으로 쌍무계약이기 때문에 을이라고 해도 갑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이행이 안 될 때는 계약을 깰 권한이 있고요. 자신이 상대방에게 항상 권한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좋겠어요.
실제 위계가 있는 상황에서의 연애도 이야기했어요. 상사나 부하 관계도 그렇고 연상 연하나 경제력 차이 등 우위를 점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에 있는 사람, 권력이 강한 사람은 착각하기 쉬워요. 상대방이 자신의 권력에 의해 예의를 차리는 건지, 호의를 보인 것인지 항상 혼란을 느끼고 자신이 매력이 있어서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되더라고요. 연애가 누군가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간택하는 관계가 아니잖아요. 서로 선택하는 관계에서 권력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게끔 매력을 드러낸다면 몰라도, 자기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쟁취하려는 태도로 상대방에게 어필할 때 상대방이 자신을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죠.
최근 밝혀진 수많은 성폭력 사건이 떠오르네요.
상대방에게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고백을 했을 때 상대방이 거절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말로는 알고 있다고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다른 상황일 수 있어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한다면 고백을 들었을 때 지위적인 문제 때문에 거절을 못하는 상황이 있진 않은가 관심을 가져야 하잖아요. 관심이 없다면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고르는 거죠. 만약 권력자를 좋아하게 된 사람이면 본인이 위계를 뚫고 당연히 대시를 하겠죠. 요즘 세상에 누가 좋아하는데 고백을 안 하겠어요. 권력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고백을 기다려야 하는 것 같아요. 상대방이 거절 못 하는 상황이 분명 있을 수 있으니까요.
‘썸’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어요.
보통 사귀자고 확정하기 전의 모든 단계를 ‘썸’이라고 불러요. 몇 번 만나서 호감이 있는 상황, 데이트 하고 섹스도 했는데도 사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상태, 연애하듯 매일 연락하고 모든 생활을 다 공유하면서도 사귀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관계도 있어요. 연인이 아니라면 다 그 단어로 통칭하는데, 어떻게 보면 단어가 오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계약 교섭 단계로 ‘썸’을 설명하면서 계약 교섭 단계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하셨어요.
책임이라고 했지만 보통 사람들이 사회생활 하면서 지키는 예의에 가까워요. 관계가 조금씩 성립되어 가고 어느 정도 생활을 공유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후 어떻게 할 건지 정도에 대한 합의를 해야 하거든요. 너하고 사실 사귈 마음까지는 없다고 이야기한다든지, 조금 더 진지한 관계로 넘어가고 싶은데 급한 것 같으니 차근차근 알아가고 싶다든지, 앞으로도 모호한 관계를 유지하자든지 하는 합의요. 성관계가 연애의 성립 요소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성관계도 맺고 주변 사람들도 둘이 만나는 걸 알고 제법 오래 만났는데도 단지 사귀자고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연애가 아니라고 말하는 상황은 어느 정도 기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계약법에서도 보면 거기가 책임을 인정하는 지점이에요. ‘썸’이라고 모두 책임이 있다는 게 아니라, 말만 계약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계약상의 의무가 어느 정도 이행된 상태일 때, 계약이라고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이 전부 없어지진 않는다는 거죠.
‘썸’을 탔다고 책임을 지라는 게 아니라는 거죠.
사람들이 손해배상 비유가 나왔다고 해서 책임 지라는 거냐, 손해배상 하라는 거냐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그런 맥락은 아니에요. 연애 하자고 말만 안 했지 사실상 사귀는 사이였으면 그에 따른 책임이 분명 있어야 한다는 거고, 이제까지 깊게 만나놓고 ‘너랑 나랑 언제 사귀었어’ 하면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전부 부정하는 발언으로 상처를 주는 건 비겁하지 않냐는 거죠.
묵시적 합의라는 게 계약에서도 중요시되는데, 연애에서 묵시적 합의의 선이 모두 달라서 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계약에서도 묵시적 합의가 바로 인정되지 않아요. 온갖 정황과 주고받은 내용, 즉 간접 사실을 토대로만 인정이 되죠. 한 쪽은 합의가 되었던 상황이라고 하고, 한 쪽은 아니라고 주장을 할 때 문제인 거잖아요. 연애에서도 누군가 묵시적 합의를 부정했을 때 둘의 관계에서 연애로 볼 만한 충분한 행동들이 있었다면 그게 묵시적 합의가 있었다는 정황적 증거가 되겠죠. 단계는 모두 개인적이지만 어느 정도 관계의 정형성은 있으니까요.
연애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문제는 서로 대화를 충분히 하지 않아서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계약도 도장을 찍는 게 끝이 아니라 계약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이 더 본질에 가깝듯이요.
맞아요. 사회가 정해놓은 틀에서는 사귀기로 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해줘야 한다는 것처럼 이야기해요. 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사회적 역할이 다 다르고 요구사항이 다 다르기 때문에 소통하고 이야기하고 맞추지 않으면 둘의 관계가 같은 목적에 의해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화가 매우 중요하죠.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이에요. 상대방이 알아줄 때까지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방이 알아주는 게 의무인 것처럼 구는 건 연애 관계 당사자로서 상대방에게 책임 범위를 넘어가는 요구예요.
남성에 대한 새로운 매력의 기준을 발견해야
마지막 챕터에는 스토킹이나 성폭력 관계에 대해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용 팁이 들어 있어요.
부록으로 쓰려고 했던 내용이에요. 주변에서 연애 이야기도 좋지만 변호사로서 들고 다닐만한 법적 실용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고요.
실제 소송을 맡기도 하시나요?
제게 오는 분들은 가벼운 단계나 소송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선의 상담을 많이 하세요. 그래서 범용으로 미리 알고 있는 정도의 법률을 실었어요. 미리 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처가 좀 되거든요. 나에게 이런 피해가 생기면 나는 이런 방법을 쓸 거라고 생각만 해도 사람이 기가 있어서 상대방이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해요.
불법 촬영이 한창 이슈에요. 실제 피해를 볼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요.
일단 영상의 존재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실체가 있다는 걸 확인한 이후로는 찍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의사에 반한 행동이기 때문에 처벌 가능하고, 민사적으로는 유포하지 못하게 가처분을 할 순 있어요. 심증만 가지고서는 대처하기가 조금 어려워요. 결국 법은 예방적인 측면에서 처벌할 거라고 말하는 거지, 어떤 사람이 실제 그 행동을 저지르기 전에 그 사람을 완전히 제압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게 우리 사회가 가진 한계면서도 다른 의미로는 다행스러운 부분이기도 하죠. 범죄가 예상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결박하거나 구속할 수는 없으니까요.
스토킹도 신체적 위해 상황이 아니고서는 처벌할 수가 없다고요.
차라리 협박하거나 범죄적인 행동이 첨가되었다면 다른 범죄와 엮어서 처벌할 수 있는데, 그저 사랑한다면서 쫓아다니는 행위는 경범죄 처벌법으로 벌금 8만 원에 그쳐요. 요즘에는 경각심이 높아져서 신고를 하면 특수 코드를 부여해 순찰을 강화해 준다고 알고 있어요.
‘탈연애’ ‘탈결혼’이 화두예요. 스토킹과 각종 데이트 폭력에 노출되면서 사람들이 연애를 기피하는 풍조인데요.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한다면, 그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애를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전에 위험한 행동을 최대한 안 할 것 같은 사람을 고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애초에 조심하라는 말이 그 사람이 소위 페미니즘적인 연애, 대등한 위치의 사람으로 보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계약적 관점에서 나와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에 대해 물건처럼 휘두르려 하지 않는 사람, 폭력적인 행위를 하려 하지 않는 사람,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 확인된 사람과 연애를 한다면 그런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겠죠.
개인적으로도 위험을 피하고자 했던 경험이 있나요?
어떻게 보면 저는 계약을 배우기 전부터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남성이라든지, 저에 대해 계속 평가하고 판단한다든지 하는 사람을 피하려고 노력해온 것 같아요.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친구들에 비해 안전한 연애를 해왔다고 생각하고, 결국 남성에 대한 새로운 매력의 기준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가 정해놓은 틀에서 매력적인 사람을 고르면 결국 그 사람이 하는 역할 수행은 사회에서 정해놓은 틀 안에서 하게 되거든요.
페미니즘으로 인해 연애 상대에 대한 재고도 시작된 것 같아요.
탈연애가 이슈지만 정상 연애의 도식을 벗어나자는 거지 연애나 사랑 자체를 하기 싫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자 독자 분들에게도 생각보다 반응이 있어요. 정말 연애를 하고 싶은데 배운 적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이제까지 우리가 알았던 연애 관계가 동등한 게 아니었을 때, 이제야 동등한 연애 관계 롤모델이 조금씩 보이는 상황에서 시작을 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고요. 연애를 책으로 배운다고 하면 회의적인 시선이 많지만, 성교육도 학교에서 하듯이 법적인 교육이 사회에 부재하기 때문에 일상 생활을 살 때도 사랑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몇 번씩 강조하지만 계약법은 관계 맺기의 형식이거든요. 관계 맺기의 형식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것들이 주먹구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터져 나왔던 거고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노력한 게 보였어요. 혼전순결주의 대신 혼후관계주의라고 쓴다거나, 연애가 이성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고 언급한 부분이라든지요.
그 부분은 확실히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연애는 이성 커플의 전유물이 아니잖아요. 성소수자 분들도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을 텐데 연애관계에서 조언을 들을만한 책이 없으니까요. 저 나름대로는 사회 운동적인 관점에서 책을 썼어요. 책을 본 분들이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는 상대를 찾아서 연애를 하고 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꾸려나가는 걸 보면 연애하고 싶은 남성들은 반성을 할 거고, 관계는 이렇게 되어야 하는구나 깨달을 수 있을 거예요.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성 역할에 매몰되어 불만이었지만 뭐가 문제인지 몰랐던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뭐가 문제였는지 깨닫고 조금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면 좋겠죠.
법을 소재로 글을 쓰는 데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요. 다음 계획이 있나요?
어릴 때부터 작가까지는 아니어도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마 소재가 있고 쓸만하면 쓰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법조인이 많아지는 것에 비해 아직 법조인의 혜택을 못 누리는 것 같아요. 너무 무거운 내용보다는, 법의 세계와 일상 세계를 잇는 번역가처럼 법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요.
연애도 계약이다박수빈 저 | 창비
연애와 사랑을 뒤집어본다. 그에 더해 변호사답게 데이트폭력, 불법영상물 유포 등의 디지털 성범죄, 스토킹 등의 ‘연애가 아닌 것’에 법적으로 대처하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