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프리티 랩스타3>에서 래퍼로 대중에 짧은 첫선을 보인 케이시는 발라드 트랙 '그때가 좋았어'가 음원 차트 순위권에 입성하며 2019년 스테디셀러 아티스트가 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어색한 모습과는 달리 최근 몇 년간 다수의 드라마 OST와 솔로 싱글을 통해 의외의 깊은 감성을 보여주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아티스트의 면모를 보여왔기에, 케이시의 성공을 '준비된 성공'이라 평해도 이의는 없을 것이다. 날씨 좋은 5월, 홍대로 찾아온 케이시는 '성장하는 모습을 음악으로 보여드리겠다'며 수줍고도 당찬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때가 좋았어'의 성공 이후 바빠지지 않았나. 최근의 하루 일과는.
대학가 축제, 봄 축제 등 행사 시즌이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준비하고 바로 공연을 하러 간다. 먼 지방에 다녀오는 경우엔 일정 하나만으로도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대학 축제에서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
처음에는 겁이 많이 났다. 대학 축제는 밝은 분위기라 흥을 띄워야 하는데, 내 노래는 발라드가 많아서 나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고 호응도 잘해주신다. 다섯 여섯 곡 정도 부르고, 앵콜도 많이 요청해주신다. '그때가 좋았어'는 전주만 들어도 호응해주셔서 감사하다.
<언프리티 랩스타 3>이후 다양한 활동을 해왔지만 비교적 짧은 기간에 큰 주목을 받았다.
사실 얼떨떨하다. 늘 꾸준히 음원을 내왔고 활동하던 터에 '그때가 좋았어'가 확 떠오르니까 '우린 하던 대로 했는데?'라는 생각도 들고, 지금까지 한 노력이 이제 빛을 발하나 싶어서 정말 감사하다.
첫 싱글 발매가 2015년 8월 25일이니 3~4년만에 반응이 온 셈이다. 무명 시절 힘들지는 않았나.
오히려 음악을 하는 것 자체가 고맙고 행복했다. 처음 부모님의 반대도 심했고, 음악을 하기까지의 과정도 힘들었기에 시작하고 나서 힘들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애초에 힘들거나 지칠 틈을 두지 않았다. 버스킹 공연도 자주 하고, 작은 공연과 유튜브 커버, 음원 등 다양한 활동을 병행했다. 아무래도 작곡가 분들이 모여 있는 회사인지라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은 어떤 이유에서 가수를 반대하셨나.
아무래도 모든 부모님들이 그런 마음이지 않나 싶다. 보다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시는 것도 있고, 가수라는 직업이 대중 앞에 나서서 평가를 받으니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을까 걱정도 많이 하셨다. 위험한 거 하지 말고 공부 쪽으로 가라는 마음이셨을 거다. 음악 하기 전까지는 정말 말 잘 듣는 예쁜 딸이었는데, 목소리 높여 '나는 음악 할 거야'라고 뜻을 전하니 굉장히 놀라셨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지금 내가 음악하며 행복해하시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열어주신 것 같다.
앞서도 언급했으나 케이시를 대중에게 처음 알린 것은 엠넷의 여성 래퍼 오디션 프로그램 <언프리티 랩스타3>다.
<언프리티 랩스타3>는 래퍼로 완성되어 나간 건 아니었다. 랩과 노래를 병행하면서 주위에 도움 받을 래퍼가 없고 영상으로 찾아 보는 데 한계를 느꼈다. '우물 안 개구리'랄까? 회사가 시켜서 나간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나간 것이다. 기회가 생겼을 때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기로 결정했다.
미팅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라 정말 여러 번 봤다. 스스로 많은 준비를 하면서 '랩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미팅이지만 거의 오디션을 준비하는 수준이었다.
<언프리티 랩스타3>에서 케이시가 배운 것은.
처음으로 현장감을 배우게 됐다. 혼자 음악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비트, BPM과 주제로만 랩을 썼는데 경연 프로그램은 무작위로 주제가 정해지다 보니 다시 처음부터 준비해야 하고 어려운 점이 많았다. 주위 여성 래퍼 분들이 랩을 하는 모습을 곁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그때가 좋았어'와 '진심이 담긴 노래' 모두 같은 회사 소속 조영수의 작품이다. 조영수가 케이시에게서 특별한 점을 발견했다면 그건 무엇일까.
작곡은 조영수 선생님이, 작사는 내가 했다. 조영수 선생님의 곡을 들으면 메시지가 그려지고 이미지가 나온다. 나는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선생님께서 음악을 하고자 하는 열정이나 목소리, 감정 표현을 특별하게 봐주신 것 같다. 데뷔 후에도 꾸준히 연습하고 레슨을 받으며 노력했다.
본인이 '가창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 발라드는 일정 수준 가창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대중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장르다. '그때가 좋았어'에서 케이시가 생각하는 본인의 장점은.
'그때가 좋았어'에서 보여준 나의 장점은 감정 표현이다. 이 곡의 포인트는 호흡이다. 노래하기 전 들이마시는 호흡에도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숨소리에 많이 신경을 썼다. 다이나믹은 부족할 수 있지만 호흡에 신경써서 들어주셨으면 한다. 테이크를 짧게 가지 않고 적어도 1절, 감정이 닿는 곳까지 길게 전개하는 것도 나의 특징이다.
케이시는 랩과 노래를 병행한다. 케이시의 롤 모델 가수가 있다면.
윤미래다. 원래 나는 낮은 목소리가 컴플렉스였다. 그런데 윤미래 선배님을 보고 '중저음 목소리가 매력적일 수 있구나'를 느꼈다. 랩으로 표현하는 감정과 보컬로 표현하는 감정이 다른 것도 인상적이었다. '검은 행복'은 듣고 나서 소름이 돋았다. 노래 속에 가정사나 자라온 환경이 담겨있는데, 직접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완전 내 이야기인 것처럼 들리고 뭉클하더라. 노래가 주는 힘을 느꼈다. 'Memories'도 대단했다. 나도 이런 음악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깊게 들었다.
2016년 이즘과 지코(Zico)와의 인터뷰를 떠올려본다. 당시 지코는 '나는 힙합 뮤지션이 아니라 뮤지션이다!' 라며 노래에 대한 욕심을 비친 바 있었는데.
'케이시는 어떤 장르를 하는 뮤지션인가요?' 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다. 노래와 랩 모두 내가 표현하고 싶은 수단이고 핵심은 나의 감정이라 생각한다.
래퍼로 대중에게 인상을 남겼으나 노래로 대중의 호응을 얻은 건 전 시즌 <언프리티 랩스타2> 출신 헤이즈와 닮았다.
헤이즈도 원래 랩과 노래를 같이 한 것으로 안다. 나의 경우는 음악에 있어 두가지 묘기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노래로 표현하는 것의 한계를 랩으로 확장할 수 있다면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것 아닌가. 두 파트를 통해 내 감정을 더 깊게 표현하고 싶다.
지금은 조영수와 기타 작곡가들의 곡을 받는 입장이지만 싱어송라이터로 본인의 곡을 쓰고 싶다는 욕심도 있을 텐데.
회사에서 작곡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준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음악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노력할 것 같다. 악기도 배우고 있고 작곡 작사도 공부하고 있다.
화성학도 공부했었나.
물론 배웠지만 너무 공부처럼 음악을 접근하다 보면 틀에 갇히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 멜로디를 쓰고 코러스 쌓을 때 감으로 쌓아 올리는 경우도 많았다.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싱어송라이터로 '빨리 내 곡을 써야겠다!'는 조바심이 들법도 하다.
굉장히 많이 든다. 내 머리 속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놓치기 싫어서 스스로 메모도 많이 하고, 이런 곡을 써봐야지 생각하면서 계속 노력을 한다.
일각에서는 차트 역주행 곡들에 대해 음원 사재기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억울했다. 그러나 점차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성공해서 놀랍고 믿기지 않는데 대중도 믿기 어렵지 않겠나. 이와 같은 반응도 자연스럽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2019년의 대성공은 케이시에게 어떤 의미일까.
사실 이렇게 잘 되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때가 좋았어'의 인기는 커다란 파도같은데, 그 다음 후유증도 있을 것 같고 너무 기뻐하다가 이것만 쫓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소소하게 내 노래를 들어주는 팬들이 있고 오랫동안 음악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그때가 좋았어'와 '진심이 담긴 노래'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5년 후의 케이시를 상상해본다면.
지금 같았으면 좋겠다. 상황에 개의치 않고 꾸준히, 꾸밈 없이 순수하게 음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잘되기 위해서 변화하는 모습보다는 열심히 하는 모습을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지금의 이 다짐도 아직은 확실치 않은 내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어제 느꼈던 기분이 오늘과는 완전히 다르지 않나. 데뷔곡을 들어보면 목소리나 말투도 미세하게 다르고 그 순간의 감정이 남아있다. 이때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표현을 썼었구나 하는 것을 돌이켜볼 수 있으면 한다.
인터뷰 : 임진모, 김도헌, 장준환, 이홍현
사진 : 김도헌
정리 : 장준환, 김도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