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음악사는 한대수다. 대중음악인 가운데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는다. '혼돈'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영사기를 통해 투영한다면 바로 그의 삶. 그를 규정하기 위한 노력들로 잉태해낸 수식어들조차 역설적으로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정보의 바다 속 자신을 다룬 자료들 대부분이 범람하는 페이크 뉴스라며 통탄하던 그가 지난 6월 에세이집 『나는 매일 뉴욕간다』 를 출간했다. 딸을 위해 되돌아온 고향 뉴욕을 '살아가는 곳'이라기보다 아직 '가고 있는 장소'로 관조하며 40년 뉴요커로서 진솔한 자화상을 담았다. 반세기 이상 찬찬히 쌓아올린 그의 모노리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으로 뉴욕에서 이틀간 인터뷰를 부탁했다. 진솔한 일대일 대화에 가깝던 인터뷰, 장소는 첫 날 맨해튼 32번가 브로드웨이, 다음 날 퀸즈에 위치한 한대수 자택이다.
맨해튼 32번가, 브로드웨이에서 한대수를 만나다.
뉴욕에 가신지 3년 정도 됐다. 『나는 매일 뉴욕간다』 를 냈는데 뉴욕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전 세계 대도시에 거의 다 거주해봤다. 뉴욕만의 장점은 지금 여기 공원에서 앉아서 우리가 보고 있는 뷰가 말해주듯 세계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기 누워있는 홈리스들, 벌써 하나, 둘, 셋이 넘지. 반대로 저기 지나가는 억만장자 양복쟁이들. 인종, 나이, 성별, 계층, 계급 구분 없이 다 볼 수 있다. 좋은 건 배우고 나쁜 것에서부터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뉴욕은 전 세계의 수도다. 슬프게도 암살당했지만 뉴욕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레논, 말년을 소호에서 보낸 데이비드 보위 같은 록스타들도 많이 살았고.
단점이 있다면?
단점은 너무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주다 보니 생기는 총기사건 등. 무섭지 않나.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총이 문제다. 미국은 총으로 세워진 국가다보니 총을 없앨 수 없는 숙명이지. 또 하나, 너무 노후된 인프라 문제다. 현재가 내가 50년 전에 뉴욕에서 살 때보다 삶의 질이 떨어졌다. 인구 밀도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고. 그래도 그 때나 지금이나 주위 건물들은 비슷하니 그 추억에 뉴욕에 살아가고. 고향이라 부르는 것이 맞겠다. 인종들 간의 갈등도 트럼프 이후 더 심해진다. 원래 미국을 인종의 용광로라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불렀는데 현재 뉴욕은 이미 끓어 넘쳐 멜티드 오버(Melted over) 된 것 같다.
뉴요커로서 뉴욕의 음악적 스팟을 추천한다면?
예를 들어 앨범커버 배경이라던가.밥 딜런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커버가 웨스트 4번가에서 찍은 것은 알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애인과 4번가에서 동거하던 시절 쓴 곡 'Positively 4th Street'도 있지 않나. 조니 미첼, 제임스 테일러도 아마 아직 여기 살 것이고, 얼마 전에 작고한 레너드 코헨의 'Chelsea Hotel'이 바로 맨해튼에 있지.
혹자는 한대수를 한국의 밥딜런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뉴요커지만 밥 딜런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닐 영이라 불러주었으면 한다. 30여년 전 라이브를 봤는데 그의 공연의 너무 자기 주장이 강한 느낌으로 청중에 대한 배려가 덜하다고 느꼈고 이번 노벨상 시상식 불출석 에피소드도 지나친 오만함을 느꼈다. 이런 사람을 자신이 신이 된 마냥 행동하는 갓(God) 콤플렉스를 가졌다고도 한다. 닐 영과 나는 노래하는 스타일이나 삶에 대한 삐딱한 시선이 비슷하다고 본다. <After The Gold Rush> 앨범은 꼭 듣길.
'나만의 장소'가 있다면?
나는 상처가 많다. 앨범 <상처>도 있지 않나. 이혼 후 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진 53번가 근처 파운탱(Fountain) 공원이었다. 음악가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스트 빌리지 근처 톰프킨스(Tompkins) 스퀘어 공원도 자주 가는데, 지저분하지만 인간 고통의 냄새가 난다. 반스 앤 노블 같은 책가게에서는 편하게 휴식하며 고통을 치유하는 편이다.
인생은 여행이라고 말했는데 그 종착지가 바로 뉴욕인지.
아니다. 뉴욕은 딸을 세계인으로 키우려는 장소이고 나는 여기서 죽을 생각이 없다. 나는 서울이 좋다. 새벽에 값싸게 해장국 먹으러 나가는 낙이 있지 않는가. 한국 사람들의 그 가끔은 지나칠 정도의 정이 항상 그립다. 대중교통도 전 세계 최고고. 가장 중요한 것은, 뉴욕에 비해 서울 생활비가 1/3정도라는 것이다. 딸이 대학교 입학 후 독립하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 그 때까지 살아있어야지.
뉴욕에서 공연 계획은?
뉴욕 뉴저지 코넥티컷 세 개의 주에 한인이 60만명 가량 산다. 워낙 생활력이 뛰어나 거의들 자리 잡았고. 그래서 공연을 하면 6000명은 올 거라 생각했다. 3년 전 뉴욕 도착하자마자 맨해튼에서 규모에 비해 가장 사운드가 좋은 라디오 시티 뮤직홀 디렉터와 대화까지 마쳤다. 문제는 6000명이 모이지가 않는 것, 아니 모일 수가 없는 것. 교포들이 가진 것에 비해 문화생활을 즐기는 분위기가 아닌 환경임을 느꼈다. 보통 7-80년대에 여기 오신 분들이 대부분이라 한국에서 공연문화를 접하기 어려웠고, 이민 와서는 워낙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비콘 극장(Beacon Theater) 2500석은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워낙 절차가 복잡해서 멈춰있는 상황이다.
예전에 “Art is like a fart”라며 예술은 방귀처럼 갑자기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아까 받은 명함을 보니 직함이 사진가와 저널리스트로 기재했고 뮤지션이 써져있지 않더라. '음악'이라는 예술욕은 현재 참고 있는 것인지.
변명처럼 들릴 수 있지만, 내로라하는 대가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새로이 대단한 것을 만드는 일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작곡은 영감에서 오는데 그 한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 창작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있다고 할까. 새로운 자극을 통해 영감을 받는데 이제 웬만큼 살았다 보니 신선한 자극을 느끼기 힘들다.
한대수하면 보통 포크에 기반을 둔 싱어송라이터로 바라본다. 오히려 훨씬 다양한 장르에 손댄 것 같은데. 흡사 끊임없이 욕망하고 갈망하는 개츠비가 떠오를 정도로.
장르라 하니 1989년 3집 <무한대>를 만들 때가 기억난다. 뉴욕에서 겪게 된 이혼의 고통은 상상보다 훨씬 흉악했고 이를 승화한 앨범이다. <무한대>를 녹음할 때, 대중음악인들에 '재즈'를 말하면 보통 떠올리는 장르는 '블루스'였다. 그래서 블루스를 자제한 재즈를 시도했고. 그것이 어떻게 보면 록이기도 하고.
1990년 4집 <기억상실>은 당대 뉴욕에서 유행하던 최첨단의 시각을 접목한 앨범이다. 팻 매스니, 칙 코리아, 찰스 로이드 같은 뮤지션들을 많이 들었다. 지금 우리나라 밖에는 이런 음악도 있고 우리도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소개하고픈 사명감이 넘쳤다. 당시 다행히 잭 리(Jack Lee)라는 재즈 기타리스트가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프리재즈에 가까웠나.
그 다음 1992년 5집 <천사들의 담화> 들어봤으면 알겠지만 미니멀리즘 그 자체다. 왜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3,4 집이 영어 가사도 많고 아방가르드적이어서 대중에 외면을 받았다. 5집 찍겠다는 레코드사가 없었고 괴로운 마음에 그냥 뉴욕에서 출퇴근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 불현듯 욕구가 샘솟고. 어떻게든 풀어야겠기에 피아노 1대와 집에서 녹음했지.
보위의 베를린 3부작과 비슷하게 무한대부터의 3부작의 영감 또한 뉴욕이라는 지역이었는지.
맞다. 저 시기는 힘든 시기였다. 이후 2000년대 앨범들은 비교적 편하게 작업했지. 2000년 <Eternal Sorrow> 만들 때가 기억난다. 아마 번역하자면 영원한 슬픔 정도로 해두자. 기타리스트 손무현이 프로듀싱을 아주 깔끔하게 했다. 이때는 우리나라 최고 세션들이 모였다. 함춘호, 이우창, 신연아 등. 2004년 작 <상처>도 경희대 녹음실에서 깔끔하게 했고. 그 때도 가장 유명한 세션들을 불렀고 지금은 뭐 이제 대가들이지 않나.
퀸스의 저택에서,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2015년 40주년 기념 리메이크 앨범 <Rebirth> 참여진을 잠깐 나열해보자. 조영남 전인권 이선희 신대철 등. 더 말하면 입이 아플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역사다.
그 앨범이 프로듀싱도 잘 되었고 정말 좋은데 특히 10번 트랙 'Run baby run'을 들어보기 바란다. 김목경 신대철 김도균 손무현 이렇게 블루스 기타 잘 치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이를 4g라 하지. 흥겹게 녹음한 기억이 있고 완성품도 정말 만족스러웠다.
그 앨범들이 다 지금 LP로 재발매가 되었다. 이를 LP로 들어보았는지?
집에 턴테이블이 없어서 LP로 들어보진 못했다. 몇십 년 전에 턴테이블과 LP콜렉션을 다 헐값에 넘겼지. 요새는 음악을 들을 때 거의 CD로 듣는다. 최근에는 딸 양호가 유튜브를 연결해주었는데 디지털 음원에는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이나믹 레인지가 너무 얇다. 다시 말해 음폭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요즘에 자주 듣는 음악은? 감동받은 음악이 있다면.
음악이 너무 많다. 예전에는 음악다방에 가야만 DJ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어릴 때 명륜동에 살았는데 퀸 다방에서 비틀스 애비로드 앨범을 들은 추억이 생각나고. 그게 나의 자양분이다. 요즘 문제는 음식점, 옷가게, 책가게에도 다 음악이 나오는 것. 강요되는 음악들의 과잉이다. 음악 청취의 소중함이 퇴색되니 위대한 음악가보다는 엔터테이너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시대의 조류일 수 있지만. 가끔은 음악이 없었으면 좋겠다. 목소리가 듣기 좋은 사람과의 대화, 그 얼마나 좋은가. 지금 공원의 바람소리는 또 어떻고.
어쩌면 음악 과잉의 시대에는 침묵도 음악이 될 수 있겠다. 존 레논 <Mind Games>의 3초 간 침묵하는 곡 'Nutopian International Anthem'처럼.
정확한 지적이다. '침묵'도 음악이다. 나에게도 <침묵>이라는 시집과 5집 <천사들의 담화>에 실린 '침묵'이라는 제목의 곡이 있다. 말 그대로 침묵을 담았다. 침묵과 연관된 곡으로 5집과 묶이는 4집 <기억상실>에서 가장 아끼는 'Headless man'이라는 곡도 있다.
'Headless man'은 어떤 곡인지. 지금 보니 영어 가사가 파격적이다.
아포칼립스에 따르면 지구가 멸망할 때 'Headless horseman'이 지구를 누비며 구도한다고 한다. 내가 대중음악계 'Headless man'이 되고 싶은 열망도 담겨있을 것이다. 또 중의적으로 제목을 직역하면 머리 없는 남자, 다시 말해 머리가 빈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가사 중 'Headless man walking down the 5th ave & 53rd st'이 있다. 이 장소는 뉴욕현대미술관 MOMA와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이 있는 곳으로 누가 뭐래도 지구의 중심이다. 당시 다니던 직장인 사진스튜디오가 그 근처기도 했고.
예전 인터뷰에서 특별히 아끼는 앨범이나 곡은 없다고 했는데 한대수를 처음 접하는 이에게 앨범 감상순서를 추천하자면.
순수하고 오케스트레이션이 많은 2집 <고무신>으로 시작해 <무한대>, <Eternal Sorrow> 후 7집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정도 듣고 2000년대의 <고민>, <상처> 순으로 가는 방법이 좋을 것 같다. 의외로 1974년작 1집 <멀고 먼 길>이 가장 어려운 앨범이다.
예상과 다르다. 대중들은 오히려 '행복의 나라', '물 좀 주소'로 1집이 가장 익숙할 텐데.
맞다. 45년이나 된 앨범이고. 그러나 1집은 편하게 들을 앨범은 결코 아니다. 오케스트레이션도 별로 없고. 들을수록 색다를 어려운 음악이다. 푹 빠져들어보길 추천한다. <천사들의 담화>와 <욕망>은 내가 생각해도 괴짜다. 특히 <욕망>은 장영규가 프로듀싱 했고 달파란, 방준석 등과 같이 작업한 재밌는 앨범이다. <지렁이>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만 하고. 정통 록을 들으려면 프로듀서 존 롤로(John Rollo)와 뉴욕에서 작업한 1999년작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도 추천한다. 당시 말랑말랑한 록이 유행이었는데 너무 카랑카랑하게 때려버려서 망했지만. 즐겁게 듣기에는 40주년 앨범 <Rebirth>가 좋다. 참여한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특히 이상은과 이현도 리메이크는 듣고 놀랐다.
작년 한국에서 <할리우드와 피터의 늑대>라는 극의 내레이션을 맡았는데.
재미있게 했다. 미국 버전에 내레이션은 앨리스 쿠퍼가 맡았다. 앨리스 쿠퍼도 쇼크록을 하고 집안이 목회 쪽이고. 앨리스 쿠퍼는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이지만 좋아한다, 나는 유행하는 아티스트들은 거의 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덜 알려진 뮤지션 중에 추천해주고 싶은 이들이 많다.
가끔은 주류에서 벗어난 이들이 당길 때가 있다.
'I put a spell on you'의 주인공 스크리밍 제이호킨스(Screaming Jay Hawkins)를 들어보라. 할리우드 살 때 150명 들어갈 작은 클럽에서 보고 완전히 팬이 되었다. 1929년생 스크리밍 제이호킨스가 2000년에 죽고 자기가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2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믹재거도 자식이 10명 이하지 않나. 한 수 위인 대단한 아티스트다. 전자음악 계통에서 장 미셸 자르(Jean-Michel Jarre)를 좋아하고 브라이언 이노 솔로 앨범들도 추천한다.
조선일보에서 4년 정도 연재한 칼럼 '사는 게 제기랄' 제목이 인상깊었다.
이혼 후 사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죽는 것도 무서웠다.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이지. 너도 살고 나도 살자 뭐 그런 의미다. 원래 제목은 ‘한대수의 바람과 나’였다. 김민기 김광석이 부른 '바람과 나' 작곡한 게 나다. 사실 원하던 제목은 'Life is bitch and then you die'였는데 편집장이 조금 순화했지. 결국 둘 다 조금씩 양보한 셈이다. 조선일보도 나를 칼럼니스트로 쓴 것도 용감했던 것 같다. 칼럼도 다시 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콘서트든 책이던 오퍼만 들어오면 다 할 준비가 되어있다.
젊은 시절 뉴욕에서 활동한 징키스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뉴요커들이었지. 다들 투잡 뛰었고. 이삿짐을 나르거나 포르노 배우를 하는 멤버도 있었다. 잘 안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마스터테이프도 소실되었다. 그 때 내가 20대 초반.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데 1년 조금 넘게 하고 빨리 포기했지. 주위에서 블론디, 토킹헤드처럼 같이 공연하던 밴드들은 막 잘나가고. 뉴욕을 주도하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젊은 음악가들을 밀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사람들이 유대인=돈으로 생각하는데 유대인=돈=예술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지원이 없던 것이 실패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 당시 록스타가 되고 싶었다. 충분한 백그라운드가 있었다면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실감이 가끔 들었다. 예를 들어 브루스 리가<Enter The Dragon>으로 서양에서 최초로 성공한 동양인이 되었는데, 내가 그 때 음악에만 전념해 첫 번째 동양인 록스타가 되었더라면.
향후 계획이 있다면.
이번에 심장 때문에 응급실에 2번 다녀와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왔다. 지금 내 심장에 달려있는 기계를 보라. 장수하고 싶은데 내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연구해본 결과 록스타들은 대개 일찍 죽는다. 27살 아니면 급사. 믹 재거 같은 전설은 아직 살아있지만 그도 최근에 갑작스레 안 좋아진 건강 때문에 투어 스케줄을 통째로 날렸다. 매카트니 정도가 아직 정정하지. 나도 그처럼 몸 상태를 유지해 가능하면 노래도 계속 하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공연하고 싶다. 건강관리에 힘써서 하늘이 허락하는 한 오래 살아보겠다.
마지막으로 좌우명을 말해달라.아까 말하지 않았나.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하하하.
인터뷰 : 이기찬
사진 : 이기찬
정리 : 이기찬
이기찬(Geechan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