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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 “요리사는 '성공'보다 '도덕성'을 갖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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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틴조선호텔 서울 총괄 조리팀장, 대한제국 황실 한식 연회음식 재현 헤드 셰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담당 헤드 셰프, 청와대 국민 연회담당. 화려한 호텔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유재덕 셰프는 27년 전, 처음 요리의 꿈을 꾸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식품공학을 전공하고 호텔에 사무직으로 입사했던 그는 업무로 오가던 호텔 주방에서 음식 만들기에 몰두하는 요리사들을 보았다. 희고 높은 토크(Toque)를 머리에 쓰고 춤을 추듯 음식을 만들어내는 그 모습을 보며  “저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유재덕 셰프는 이제 “좋은 요리사란 진정성을 가지고 먹는 그 사람에게 맞는 음식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파블루머(pabulum-er, 음식가)’가 되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먹고 온 사람에게 아무리 정찬을 갖다 준다 한들 그에게는 좋은 요리가 아니죠. 그 사람의 상태를 보고 서로 교감하면서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요리사예요. 그래서 요리에는 정답이 없어요.”

 

『독서주방』  은 유재덕 셰프가 지난 4년 동안 혼자가 되는 일상의 틈에 책을 펼쳐 들면서 쌓은 생각을 적어 내려간 글이다. 소설가의 음식 에세이를 보면서 한여름 불 앞에서 소스를 끓이는 요리사의 일상을 떠올리고, 음식의 문화사를 다룬 책을 보며 역사성을 담은 나만의 요리를 꿈꾸기도 한다. 책이 중년의 요리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책을 읽는 행위와 음식을 만드는 행위는 얼마나 닮아 있는지 담담하게 말하는 글이 새로운 공명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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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요리를 고민하는 ‘음식가’


30년 가까이 명절을 가족과 보내지 못하셨다고요. 요즘도 무척 바쁘시죠?


10월부터 12월이 제일 바쁜 시기예요. 가을부터 모임이 많아지니까 가장 바쁘고요. 신학기 때도 바쁘죠. 옷 만드는 디자이너분들도 마찬가지지만 저희는 계절을 앞서서 메뉴를 내야 하기 때문에 계절이 오기 직전이 항상 바빠요. 

 

소개글에 ‘셰프’라는 호칭보다 ‘음식가’, ‘파블루머’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고 적어놓으셨는데요.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파블루머는 음식과 요리를 고민하는 음식가라는 의미예요. 호텔 주방에서 27년 동안 일을 했고,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는데요. 20년쯤 지나니까 문득 ‘최고의 요리란 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꽤 깊게 그 생각에 매달렸던 것 같아요. 매너리즘에도 빠졌고요. 그러다 ‘요리’와 구별되는 ‘음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죠. 요리는 맛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음식은 생명을 위하는 것이지 않나 생각하게 된 거예요. 이런 고민을 하면서 친구인 김성신 평론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줬는데요. 얼마 뒤 친구가 이 말을 선물로 줬어요. 라틴어에서 ‘pabulum’이라는 단어가 음식이고, 숙어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을 할 때 사용한다면서 여기에 영어식으로 ‘-er’을 붙여 파불루머라고 하자고요.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고, 친구의 마음이 무척 고마워서 그때부터 사용하고 있어요.

 

김성신 출판평론가는 이 책의 기획자로도 이름을 올렸잖아요. 두 분의 인연과 처음 책을 기획하던 때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고요. 36년 만에 동창회에서 다시 만났어요.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오래 나눴는데 그 친구가 제 생각을 글로 쓰면 좋겠다는 거예요. ‘너처럼 건강한 생각을 하는 중년 남자를 본 적이 없다’면서요.(웃음) 처음엔 사양을 했는데 며칠 후에는 책을 잔뜩 가지고 왔어요. 무조건 읽기만 하라고요. 그런데 그 책들이 새로웠어요. 여태껏 요리 관련 전문 서적만 봐왔거든요. 친구가 준 책은 음식에 관한 인문학이나 요리를 모티프로 한 에세이, 식재료를 다룬 사회학처럼 아주 다양했죠. 요리나 음식에 관한 책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 우선 놀라웠고요. 모든 책이 흥미진진했어요. 한마디로 신세계가 열렸던 거예요. 그렇게 꼬박 1년을 책만 읽었어요.

 

1년을 읽고 글을 쓰신 거예요? 그 전까지 글을 써본 적은 없으셨던 거죠?


보고서 정도나 써봤죠.(웃음) 책을 읽기 시작한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 김성신 평론가가 <스포츠경향>에서 지면을 내주기로 했으니 칼럼을 써야 한다고 했어요. 겁이 나더라고요. 부끄럽기도 하고요. 과연 내 글을 사람들이 읽을까, 망설여지기도 했는데요. 친구가 많이 도와줬어요. 글을 써서 보여주면 논술수업 하듯이 첨삭하며 가르쳐 주기도 했죠. 그렇게 한 달에 한 편 글을 써나가니까 의외로 재미있었어요. 제 이름으로 글이 세상에 나가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요. 김성신 평론가는 지금도 제 칼럼에 대해 조언해주고 있어요. 4년 동안 칼럼을 썼고, 그것을 모아 책으로 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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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꾸는 사람


읽고, 쓰는 생활을 뒤늦게 하면서 변한 것도 많았을 것 같아요.


다시 꿈꾸는 사람이 된 것이 제일 크게 바뀐 점이에요. 책을 통해 지금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훨씬 크고 멋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중년의 나이지만 책을 읽으니까 저도 새로운 꿈을 꾸게 되더라고요. 처음 품었던 꿈도 떠올랐고, 그렇다면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읽고 쓰기 전에도 꿈이 없진 않았을 텐데 신기하죠. 어떤 차이가 꿈을 더 선명하게 했나요?


30여 년 동안 요리사로 살면서 꿈을 꾸는 건 잡생각이라고 여겼던 것 같아요. 꿈이 있다고 해도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보진 않았죠. 요리사로서 직업적인 부분에만 몰두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진짜 파김치가 돼서 집에 들어오고, 가족들과 잠깐 이야기 나누다 잠 자기 바빴고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죠. 그런데 책 속에는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하더라고요. 자꾸 자극을 받았어요. 그것을 보면서 나는 오직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반성하게 됐어요.

 

여러 대목에서 요리를 시작했을 때의 ‘초심’을 깊이 생각하더라고요. 초심을 재차 떠올리는 이유도 있었겠죠?


한참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도 그랬어요. 과연 내가 초심을 가지고 있나 싶더라고요. 처음에 가졌던 마음대로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너무 바쁘니까요. 저희들은 누구나 고객을 위해서 최고의 음식, 깨끗하고 정성스런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때로는 잊히니까 초심을 자꾸 생각해보려고 하는 거죠.

 

책을 읽으면서 그 마음을 더 많이 상기하게 되던가요?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네? 나는 뭐지? 자꾸 생각하게 되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는데 나는 어떻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있고요. 그럴 때마다 초심을 생각하게 됐어요. 사실 자신의 직업이 가지는 목적을 질문하면 악당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세상에 악당이 많아진 이유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초심을 자주 떠올리고 생각하라는 것은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고요. 이건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결심이기도 한 것 같아요. 사람이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것은 식재료가 요리되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고인 물처럼 썩는 것이고, 그건 부도덕이에요.

 

일상의 많은 순간 책을 손에 들어요. 셰프님은 책 읽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화장실에서(웃음) 읽어요.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도 읽고요. 단 20분이라도 짬을 내서 많이 읽어요. 습관이 되지 않았을 때는 어려웠어요. 특히 인문학 서적 같은 어려운 책은 읽기 힘들었죠. 너무 두꺼운 책은 그래서 그냥 베고 잤어요.(웃음)

 

그 두꺼운 책은 무슨 책이었나요?(웃음)


제목도 기억이 안 나요.(웃음) 그 책을 선물한 김성신 평론가한테 전화를 해서 도저히 못 읽겠다고 했어요. 글은 읽는데 머리에 전혀 안 들어오니까요. 그랬더니 그러면 다른 책을 먼저 읽으라고 하더라고요. 즐기면서 읽어야지 책에 얽매여서 읽을 필요 없다고요. 거기서 마음의 짐을 덜고 눈에 들어오는 책, 편한 책 위주로 읽었어요. 그러면서 독서에 재미를 붙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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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는 연예인이 아니다


마음의 양식인 음식을 만드는 ‘음식가’로서 갖고 있는 요리에 대한 철학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는데요. 창조적인 동시에 우직해야 한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맞아요, 창조와 우직이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둘 다 필요해요. 우직함은 끈기가 있다는 의미인데요. 그래야만 새벽부터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일을 해낼 수가 있고요. 매번 같은 것을 드릴 수는 없으니까 새로운 것을 계속 개발해야 하는 창조성도 필요하죠. 더구나 요리사는 타인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거잖아요.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서 싸구려 재료를 쓴다거나 다른 것과 타협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요리사는 타인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도덕적인 직업”(207쪽)이라고 하신 부분이죠?


음식이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거든요. 그런 사람이 도덕적이지 못하면 진짜 사회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어요. 음식은 1차원적으로는 맛이라는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다음 차원에서는 타인의 건강과 생명에도 관여하는 것이니까요. 최종적 차원에서는 누군가의 마음과 영혼에도 영향을 미치죠. 저는 요리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바로 도덕성이라고 생각하고요. 돈이나 명예, 성공을 원하는 사람은 요리사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도덕적 감수성은 초보 요리사들을 가르칠 때 제일 중점적으로 보는 부분이기도 해요.

 

요리를 얼마나 공부했고, 얼마나 잘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이 도덕성이라고요.


얼마나 공부했고, 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사람의 태도, 진정성 그리고 도덕성이 중요하죠. 아무리 똑똑하고 잘하는 사람들도 순간 반짝이는 거라면 의미가 없잖아요. 친구 중에도 그런 친구가 있어요. 처음 요리를 배웠을 때나 이름을 날리면서 대가로 인정 받는 지금이나 한결 같아요.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엄청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은 오너 셰프로 지내고 있거든요. 그런 것만 봐도 진정성과 끈기, 우직함은 셰프의 필수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간혹 강연할 기회가 있는데요. 그때도 꼭 하는 얘기는 셰프는 연예인이 아니다, 라는 말이에요. 정말 요리를 좋아하고, 평생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선택하라고 말하죠. 화려함만 따라서 하게 되면 금방 지치는 일이에요. 요리는 꾸준히 해야 나중에 결과가 나오는 일이니까요.

 

셰프님의 경우 언제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순간을 기억하세요?


지금도 생생하죠. 베이커리 쪽 주방이었어요.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서 봤는데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후광이 보였을 정도예요. 나도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내놓는 일을 하면 정말 좋겠다,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곧바로 담당자 분에게 가서 요리사를 해보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씨도 안 먹히죠.(웃음) 그래도 계속 찾아 갔어요. 그랬더니 6개월 안에 자격증을 따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시작이 된 거예요.

 

 

음식을 먹고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


요리사의 삶에는 남다른 희열도, 남다른 힘듦도 존재할 것 같아요. 언제 가장 기뻤는지, 언제 힘든지 듣고 싶어요.


손님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가 가장 기쁘죠. 저는 칭찬의 말보다 손님의 표정을 좋아해요. 표정이 훨씬 정확하게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의사인 친구 말이, 자기는 맨날 아픈 사람을 봐야 해서 진료를 보고 나면 자기도 아픈 것 같대요. 제가 부럽다는 거죠. 실제로 제가 만나는 분들은 대부분 웃으면서 음식을 먹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주시거든요. 병을 고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음식을 드리고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힘들 때는 별로 없어요. 초보 요리사 시절엔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3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은 별로 힘들지 않고요. 글 쓸 때가 가장 힘들어요.(웃음)

 

여전히 요리가 어려우신가요? 셰프님이 ‘요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지금도 던지고 살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뭘까요?


요리를 하면 할수록 모르겠어요. 남보다 스프도 잘 끓이고, 맛도 잘 낸다고 해도 요리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말문이 막혀요. 가장 좋은 소설, 가장 좋은 그림 같은 게 존재하지 않듯이 요리도 그런 것 같아요. 답이 없는 질문을 끝없이 던져야 하는 일이라 어렵고요. 다만 힘들다고 질문을 멈추는 순간 나의 직업적 정체성도 끝난다고 생각해서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니까 계속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독서와 요리의 닮은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오히려 닮지 않은 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좋은 책은 또 다른 책을 읽고 싶도록 만들잖아요. 좋은 요리도 그래요. 또 먹고 싶게 만든다는 것도 닮았죠. 사람의 마음과 진정성이 가장 정확하게 전달되는 매체라는 측면에서도 독서와 요리는 닮은 것 같아요.

 

앞서 구체적인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그 꿈이 어떤 것인지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삶은 유한한 거니까 은퇴를 한다면 이후에 남은 시간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더라고요. 저는 요리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카데미든 학교든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요리를 가르치고 싶은데요. 그걸 그냥 꿈이 아니라 현실로 만들어보자고 해서 지금은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어요.


 

 

독서 주방유재덕 저 | 나무발전소
‘파타고니아 이빨고기’가 ‘칠레산 농어’로 이름을 바꾸고 판매량이 10배 늘었다든지, 요리의 맛은 식재료의 질에 달려 있을 뿐 요리사의 역할은 얼마 안 된다는 것 등등 미식의 안목을 키울만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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