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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돌봄이 가져다 준 빛나는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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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이라는 단어 앞에 ‘우연하고 뒤늦은’이라는 수식어를 써놓은 편집자 김희진은 ‘늦깎이 워킹맘’이다. 내년이면 책밥을 먹고 산지 딱 20년. 누군가의 이름으로 나오는 수백 권의 책을 만들었지만 저자로 참여한 책은 『돌봄 인문학 수업』  이 처음이다. 2015년 초, 직장맘지원센터의 커뮤니티지원사업에 ‘인문학 독서 모임’ 사업계획서를 낸 것이 이 책의 씨앗이 됐다. 실용적인 육아서가 아닌 인문서를 읽는 엄마들의 모임. 전사회적으로 독해력이 낮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모임만큼은 달랐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 중 하나는, ‘돌봄’이 인간의 성장, 자아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매력적인 일임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제껏 나만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디엔가 존재할,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 ‘돌봄’의 어려움, 특히 그것이 성역할로 강제되는 상황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목소리에 우리 사회는 더 활짝 귀를 열고, 더 쫑긋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부족하거나 왜곡된 정보로 ‘돌봄’을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해온 사람들을 참여시키려면 당근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 글이 정직하게 맛있는 당근 역할도 담당해볼 수 있기를 꿈꾼다.”( 『돌봄 인문학 수업』 ,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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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의미와 가치를 알릴 언어가 필요하다

 

독서 모임이 시작이 돼서 책이 나왔어요. 어떻게 구성된 모임인가요?


사업계획서가 채택된 후에 지역 맘 카페에 ‘인문학 독서 모임’을 모집한다는 글을 올렸어요. 정말 순식간에 마감이 되더라고요. 그 후 5년 동안 다양한 기관들에서 지원을 받으면서 가늘고 길게 모임을 유지해오고 있어요. 처음엔 아이들도 같이 모여서 엄마들이 책 읽는 동안 아이들은 숲 체험도 하고 자기들끼리 놀기도 했고요. 모임 시작 때는 아이가 하나였는데 지금은 둘, 셋인 분들도 있고요. 제 딸도 4살부터 모임에 참여했는데 지금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모임 운영의 특별한 원칙이 있다고요.


양육에 관한 책을 읽되 실용서가 아닌 인문서를 읽는 것이고요. 모임 멤버가 만드는 책을 고르진 않아요. 가능하면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금방 읽고 버릴 책을 선정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처음에는 이 모임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연초에 그해 읽을 두꺼운 인문서 6~7권을 한꺼번에 단체로 구입했어요. 책값이 10만 원도 훌쩍 넘었었는데 그렇게 책을 사서 읽을 의향이 있는 분들만을 대상으로 모집을 했고요. 덕분에 초기에 좀 집중력이 생겼던 것 같아요.

 

육아를 하다 보면 혼자서 책을 읽는 일이 버겁잖아요. 함께 읽으면 확실히 동력이 생길 것 같아요.


요즘은 책을 가볍게, 얇게, 쉽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엄마들과 책을 읽으면서 놀란 점은 읽어야 할 목적이 분명하다면 사실 텍스트의 난이도나 빡빡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오랫동안 인문 사회 분야의 책을 읽지 않았던 독자들이라도 적절한 가이드와 동기부여가 있으면 충분히 읽어내시더라고요. 올해는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  『다시 책으로』  ,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을 읽었고 꽂힌 김에 연말까지 계속해서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대한 책들을 읽을 생각이에요. 

 

20개의 장으로 글이 나눠져 있어요. 함께 읽으면 좋을 책, 돌봄 인문학 워크북(아이를 돌볼 때 더오르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도 실렸고요. 사실 책 제목만 봤을 때는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를 너무 따라간 것 아닌가 싶었거든요.


저도 처음에 제목안을 받고 놀랐어요. 뭔가 에세이 풍의 긴 제목을 생각했거든요. ‘아이를 키우며 겨우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뭐 이런 문장을 생각했는데요. 원고의 소재는 실용서에 가까운데 방법론은 인문서에 가깝고, 글쓰기는 에세이에 가까우면서 또 엄마들이라는 특수한 독자층을 향하고 있어서 출판사에서도 고민이 많으셨으리라고 짐작해요. 놀라긴 했지만 되돌아보니, 책 내용에 가장 충실한 제목인 것 같아요. 읽어보신 분들은 유행 때문이 아니라 정말 책 내용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프롤로그 제목이 ‘우리에게 돌봄의 의미와 가치를 알릴 언어가 필요하다’입니다. ‘돌봄’이라는 개념에 굉장히 집중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책을 내고 나서야 ‘돌봄’이라는 말에 대한 요즈음의 보편적인 인식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어요. 20년 사이에 ‘양육’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공적 개입에 ‘돌봄’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되었더라고요. ‘돌봄’이라는 말이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뭔가 관스러운, 재미없는 뉘앙스를 갖게 된 것 같아요. 그 말의 원래 의미를 회복하게 만드는 것도 이 책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글을 쓸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나요?


평소에 너무 솔직하게 쓰는 편이라 조심을 좀 했어요. 아무래도 개인적인 경험을 많이 쓰다 보니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많이 포함이 되니까,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읽힐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고요. 그래도 여전히 라쇼몽스러운 지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도 보였어요.


제 성격이 좀 그런 것 같아요. 사각지대라고 해야 할까요, 맹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제 시선에서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도 최대한 보고 싶어하는 편이긴 한데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글이 점점 허공으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럼 그걸 또 잡아 끌어내려서 경험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하고. 이런 균형을 잡는 데 애를 많이 썼어요.

 

추천사를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소설가 조남주 작가님이 써주셨어요. 재밌게도 두 분의 추천사에 ‘동지’라는 표현이 들어 있어요.


‘동지’라는 표현은 이 책을 엮어준 최연진 편집자님이 알려주셔서 알게 됐어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실제로 이 책뿐 아니라, 저의 육아 과정이, 그리고 나아가 제 삶 전체가 그런 자매애(sisterhood)로 지탱되어온 면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실제로는 여자 형제도 이모도 없지만요. 하지만, 나이에 상관 없이, 혼인과 출산 여부에 상관 없이, 직업 유무에 상관 없이 존재하는 여성들 사이의 근본적인 연대감은 저를 이만큼 키워주고 지켜준 힘이에요. 심지어 저와 딸 사이에도 그런 연대감이 흐르고 있어서 서로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저는 양육이 힘에 부칠 때 아동학대에 대한 기사나 여러 사정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들의 사연들을 찾아 읽으면서 에너지를 보충하곤 했어요. 물론 너무 분노만을 연료로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지만요.

 

두 분과는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


조한혜정 선생님은 제가 대학, 대학원 다니던 시절에 ‘돌봄’에 대해서 참 많이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땐 왜 그러시나 했는데, 이 책 쓰면서 당시의 몰이해에 대해 사죄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추천사를 부탁드렸고요.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돌봄’ 때문에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를 “독립된 여성의 여행기”라고 써주신 대목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또 조남주 작가님은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해주실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예민하고 똑똑한 딸을 키우시는 것 같았어요. 근거는 없지만 저만의 추측, 혹은 촉이랄까요. 엄마들이 처한 말도 안 되도록 부당한 상황에 대한 소설을 쓰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왠지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추천사 받고 보니 심지어 작가님도 저처럼 “억울했던 딸”이라고 하셔서 더더욱 공감했죠.

 

조남주 작가님의 추천사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아동을 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던 시절에 자랐으며 자녀의 마음 읽기가 최우선 과제인 세대. 자유와 방임 사이에 아슬아슬 자랐으나 자녀의 안전과 성장을 온전히 책임지는 세대.” 정말 많은 엄마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거든요.


저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던 책의 핵심을 짚어 주신 문장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사회에서 돌봄과 호혜의 기운을 갉아먹고 없애고 있는 건 엄마들, 여성들이 아닌데, 그 책임은 고스란히 엄마들, 여성들에게 돌아오는,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상황. 그것이 현대의 엄마들이 처한 근본적인 문제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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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숙한 인간이 되면, 다 해결된다

 

책을 읽고 나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되거든요? ‘나의 돌봄은 어떤 서사를 갖고 있을까’ 물어보게 되면서, 돌봄을 하는 주체, 돌봄을 당하는 타자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뒤표지에 실린 “돌봄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가져다주는 빛나는 통찰”, 이 문장도 굉장히 기억에 남는데요. 누군가 “왜 육아는 빛나는 통찰을 허락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많은 사람들이 진짜로 열심히, 진심을 담아서 할 수밖에 없는 활동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너무 뻔한가요? 잘하냐 못하냐와 별개로 진심을 담아서 하는 모든 활동은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또 현대인들이 다른 존재와 이렇게 격렬하게 만날(대면할) 일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책 속에서도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를 인용했어요.(121쪽) 모든 것을 사물화, 도구화하는 시대에 그래도 돌보는 일만큼은 (아무리 돈을 받고 하는 일이더라도) 진심을 담아서 그 사람과 만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230쪽에 “내 아이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관한 이야기하셨어요. 육아를 잘하는 편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부모들이 자주 빠지는 오류인데요. 어떻게 해야, 부모들이 덜 착각할 수 있을까요?


저도 곧잘 착각하는 엄마라, 제가 답을 드릴 입장은 아닌데요. 책에도 썼지만, 양육은 ‘투사’를 주고받는 과정인 것 같기는 해요. “프로이트는 너무나 감동적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너무나 유치하다는 점에서, 부모의 사랑은 마치 자신이 다시 태어난 듯 느끼는 부모의 자기도취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  의 문장을 책 본문 224쪽에인용하기도 했는데요. 아무튼 객관적이기 어려운 관계라는 거죠. 이런 점을 의식화 하려고 노력하면 좀 낫지 않을까요? 인간이 내가 다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이런 사실을 의식화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그런데 솔직히 또 ‘아이를 전혀 모르겠다. 아이가 나와 너무 달라서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이런 상황도 좋은 건 아니잖아요. 이거야말로 투사니까요.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 내 소유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부터가 출발이 아닐까 싶어요.


어렵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긴 해요. 내가 성숙한 인간이 되면, 다 해결되는 것 같기는 해요. 내가 내 문제를 정정당당하게 다 해결해서 딱히 아이를 나와 혼동하며 도취되거나 아이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투사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아이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말하고 보니 말도 안되게 어려운데요. (웃음) 그래도 아이를 키우니까 최소한 이런 지향점은 생기는 것 같아요. 막 살지 않고 내 문제를 덮어두지 않는 일에 있어서는요.

 

책을 읽으면서 크게 울컥했던 문장이 있거든요. 54쪽에 “모든 워킹맘을 응원하고 전업맘은 무조건 존경한다”고 쓰셨어요. 왜 전업맘은 무조건 존경하시나요?

 

진짜 중요한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사실 전업맘들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우리 아이가 이렇게 멀쩡히 자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동네 전업맘들이 한번씩 우리 아이를 봐준다거나 그런 적극적인 활동 때문이 아니라, 그냥 동네 어머님들이 놀이터에서 아이 옷 매무새라도 한 번 더 만져주고, 물이라도 한 모금 더 먹이고,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한 번 더 불러주고, 눈이라도 한번 더 맞춰주고, 아니 그냥 거기 존재하고 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기여를 하거든요. 이게 계량 및 측정 불가능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가까이서 관찰해보지 않은 분들은 잘 모르실 거예요. 자기 부인이 집에서 노는 줄 아는 남편들도 많다고 하잖아요.

 

전업맘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을 텐데요.


그렇죠. 직업은 없지만 뭔가 자기만의 작업을 열심히 하는 분도 계실 테고, 정말로 ‘자기’를 없애고 아이들 먹이고 씻기고 입히는 등의 일에만 헌신하는 분도 계실 테고요. 무늬는 전업맘인데 누구보다 투철한 직업인의 마인드로 육아를 담당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이런 분들은 사실 전업맘이라고 할 수 있을지 애매하긴 해요. 아무튼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다른 경제적 보상이 따르는 일을 포기하거나 거부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층위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이분들이 만들어내는 비슷한 분위기가 있거든요. 저는 본능적으로 그걸 느껴요. 아이들도 그럴 거예요. 뭔가 시간이 길게 늘어나게 만들면서 따뜻하게 감싸 안는 듯한 분위기요. 책에서는 이런 분산된 정신의 은은한 보호를 받을 때 한 사람의 정신이 집중력, 창의력을 최고로 발현시킬 수 있다고 쓰기도 했어요. 사실 이런 분위기야말로 사회적 안전망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경제적인 환산과 보상은 기술적으로 어렵더라도요. 물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정치인들의 몫일 텐데요. 최소한 합당한 사회적 존중은 받아야 하는데. 맘충이니, 팔자 늘어졌다느니, 그런 얘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참 야만적이죠.

 

‘보조양육자에 관한 글’도 매우 인상 깊었어요. 워킹맘이라는 상황 때문에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보조양육자의 도움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계신데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조양육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조양육자라는 개념이 저도 참 부자연스러웠어요. 내가 내 손으로 안 키운 새끼를 내 새끼라고 할 수 있나,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런데 사실 보조양육자는 역사적으로도 항상 존재해왔었고, 앞으로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어떤 보조양육자가 좋은 보조양육자냐?’는 건 제가 조언하기 어렵겠지만요. 이건 말씀 드리고 싶어요.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을 같이 나눠야 하는 사람들이니 사업장에서 직원을 뽑는 것과는 좀 다른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해요. 이분들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해줄 어떤 지표도 없다는 사실을 우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길 바라고요. 심지어 이 부분을 나라에서 검증해서 A급 얼마, B급 얼마, C급 얼마, 이렇게 임금 체계까지 세팅해주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시험으로 등급을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내 계획대로 채용이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고, 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수용하시길 바라고요. 내가 요구할 부분 요구하고 맞출 부분 맞추고 포기할 부분 포기하고. 사업장에서도 이 정도는 하잖아요.

 

너무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운이 더 클지도 몰라요. 좋은 보조양육자를 만난다는 건, 내가 어떻게 열심히 해서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요. 그냥 운이에요. 어쩌면 아이의 복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내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면 좋은 보조양육자를 만나 오래 오래 잘 지낼 수 있다’는 마음은 버리시길 조언해요. 그냥 평소에 아이 복을 위해 기도하시고, 좋은 분 만나면 감사히 여기시고, 잘 안 되어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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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업한 책의 작가들 다 좋아해요

 

베테랑 편집자가 쓴 책입니다. 저자가 되어 보니 어떤가요?


편집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았어요. 저도 그렇고 많은 편집자들이 책을 만들 때 약간 ‘빙의’의 경험을 하거든요. 저자의 책이 곧 내 책이죠. 말, 생각, 느낌처럼 중요한 것을 뒤섞어 공유한다는 건 엄청난 교류예요. 그래서 누군가 텍스트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거나, 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뉘앙스로 얘기하면 기분 상하고 그 책이 안 팔리면 또 기분 상하고. (웃음) 조금 부담스럽고 식상한 비유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편집자는 ‘보조양육자’와 비슷한 존재인 것 같아요.

 

일하는 방식에 관한 고민도 했을 것 같아요.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특히 제가 일해온 방식이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했어요. 저자와 가까워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독자와 멀어지면서까지 그러면 안 되는 거라서요. 그 거리 조절과 균형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해보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양육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사랑하고 아끼니까 분리가 안 되는 어떤 관계라는 측면에서요.


맞아요. 양육의 최종 목표는 아이의 고유한 타자성을 수용하고,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훌훌 날아가게 해주는 일이잖아요. ‘편집’이라는 일에서도 너무 빙의 상태에만 몰입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번 작업에서 제가 편집자에게 지나친 영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어요.

 

대학에서 영문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셨어요. 현재 민음사의 브랜드인 ‘반비’ 편집장으로 일하고 계시고요. 어떻게 편집자의 길에 접어들게 되셨나요?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출판학교나, 출판 과정 전반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편집자가 뭐 하는 건지도 모르고 무식하게 뛰어들었어요. 공부가 재미있기는 했지만, 독립적으로 살자는 게 제 청년기 삶의 모토였는데, 학생으로 살면서 독립적이기는 정말 어렵더라고요.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야 했어요. 사교육 시장이 인문계 학생들을 지원하는 기능을 한다는 걸 몸소 경험했죠. 제가 아르바이트도 참 열심히 잘해서 사교육 시장에 잡혀서 눌러앉을 뻔했어요. 차라리 학교에서 공부하는 걸 포기하고 직업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당시 제가 열심히 읽고 공부하던 책들을 내는 출판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어요. 그 출판사 주간님이 저더러 “아마 너는(너도?) 금방 다시 공부한다고 학교로 갈 것이다”라는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을 하다 보니, 20년 가까이 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린 걸까요?

 

(웃음) 글이 굉장히 역동적이라고 할까요? 생동감이 넘쳐서 쓱쓱 잘 읽혀요. 평소 어떤 문장을 선호하는지도 궁금합니다.


프리모 레비부터 다이앤 애커먼, 리베카 솔닛까지, 제가 작업한 책의 작가들 다 좋아해요. 책에서 많이 언급한 앤드루 솔로몬도 좋아하고요. 그러고 보니 책에 인용된 작가들 중에도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네요. 팔리 모왓은 아직 안 읽어보신 분들에게 추천하고요. 좋아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서 다 적을 수는 없는데, 특별히 유형을 찾아보자면, 영국 작가들의 유머러스하면서 재치 넘치는 문장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인 오스틴의 섬세한 관찰과 유머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이고요. 더글러스 애덤스, 닉 혼비 같은 작가들 좋아했고요. 너무 옛스러운 이름들만 있는 것 같아 요즘 사람들의 이름을 추가해보자면 요 라인에 김혼비 작가님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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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이 가장 좋은 점

 

젊은 부모들이 이 책을 가장 흥미롭게 볼 것 같지만, 연령대와 무관하게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책을 즐겁게 읽은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두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부모와 다른 아이들』  이나  『아동의 탄생』  은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고요. 독서모임에서 어머님들한테 반응이 좋았던 책은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이었어요. 주변의 엄마들, 딸들이 어떤 여신들의 힘의 영향하에 있는지 이야기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 조금씩 더 알게 되고 더 친해진 계기가 되었어요. 얼마 전에 페터 한트케가 ‘2019 노벨문학상’을 받았잖아요. 『소망 없는 불행』  은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라, 돌봄 인문학 독서모임에서도 꼭 같이 읽고 싶었던 책인데, 하필 민음사 책이라 못 읽었어요. (웃음) ‘돌봄’과 ‘양육’과 ‘성장’에 대해서 중요한 통찰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기회에 스웨덴 한림원의 안목을 믿고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한국사회에서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한 부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노산 워킹맘 선배로서요.

 

이 질문은 진짜 어렵네요. 인생에 선배는 없는 것 같아요. 다 각자 다른 조건에서 출발해서 다른 소망을 가지고 저마다의 길을 가기 때문에 앞서 다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줄 수 있는 조언들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에서요. 이미 결정을 마치신 분들은 다른 이야기는 듣지 마시길 바라고요. 혹시 아직 결정을 앞두고 있거나 고민중인 분들에게 뻔한 이야기지만 한번 해보자면, 정말로 자신이, 그리고 부부가 원하는 결정을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경제적인 조건, 외부적인 조건 때문에 타협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심리적으로도 다른 이슈들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정을 하시길 바라요. 이전에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주변의 기대 때문에 아이를 낳는 분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요. 지금은 또 거꾸로 주변의 걱정이나 막연한 불안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수유’ 챕터에서 쓴 이야기가 이것과 비슷한데, 아무튼 정답이 없는 문제인 만큼 어떤 프로파간다나 외부의 협박에 휘둘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질문을 드릴까 말까 망설여졌지만 묻고 싶어요. 나름 육아를 잘한다고 자신하는 아빠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나름’이 아니라 정말 잘하는 아빠들도 많다는 것을 물론 인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전까지는 육아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아빠들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정말로 저보다 나은 아빠들도 보이는 것 같고요. 회사에서도 정말로 살림이나 육아에 재능도 있고 재미도 느끼고, 의미도 찾는 분들이 많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좀 뻔뻔하게 조언을 드리자면, 설거지를 한 번 더 하는 것만큼이나 반려자를 돌보는 마음? 이런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남자 형제들에 비해 그다지 사랑받으며 자라지도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더 인정받으며 살아온 것도 아닌 엄마들이 화수분일 리가 없잖아요.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고통으로 사랑을 짜내서 아이들에게 줘야 하는 경우들 많거든요. 그러다 번아웃이 안 되면 그게 이상한 거죠. 반려자를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돌보는 역할을 아빠들이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경제적인 부분이나 살림이나 육아야 뭐 둘이 잘 나눠서 하는 게 기본이고, 그 외에도 이런 역할도 본인의 역할로 좀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밑줄을 긋고 싶은 이야기네요. 대화를 하다 보니 자꾸 질문이 늘어요. 현재 유치원생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라고 조언하고 싶나요?

 

만일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저는 과감히 휴직을 하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것 같아요. 멀리 놀러 가서 ‘한달 살이’ 하는 것 말고요.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동네 공원, 동네 도서관, 동네 서점, 동네 시장, 동네 놀이터, 하다 못해 동네의 음흉하고 위험한 장소들까지. 그렇게 동네를 열심히 탐험하러 다니고 싶어요. 일상을 좀 단단하게 만들어보고 뿌리내려보는 시간을 아이들도 엄마들도 충분히 만끽해 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저 역시 때때로 괴롭고 힘들지만 육아를 통해 빛나는 통찰을 얻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엄마가 되어, 부모가 되어,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이 가장 좋은 점인 것 같아요. 아이를 낳고 매일 아침 아이가 눈을 뜰 때마다 그게 그렇게 기적이 일어난 듯 감사해요. 제가 언젠가 이렇게 고백했더니 친구가 그건 네가 평소에 너무나 근심이 많은 엄마라는 반증이 아니냐며 촌철살인 뼈 때린 적이 있는데요. 그게 설사 제 병적인 불안의 반영이더라도, 제 걱정과 근심의 반영이더라도, 그렇게 매일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그리고 제 책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초반부와 후반부가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인다고 느끼실 수 있는데요. 실제로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저는 지금의 제가 꽤 마음에 들어요.


 

 

돌봄 인문학 수업김희진 저 | 위즈덤하우스
돌봄을 공부하는 것은, 한때 아이였던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며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일과 사랑, 성취와 돌봄이 양립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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