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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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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페이지 수 944쪽. 겉표지를 벗기면 사철 제본을 한 책등에 크게 ‘2019-1999’라고 적혀 있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이야기다. 묵직한 분량 안에 1999년 개봉한 <벨벳 골드마인>부터 2019년 개봉한 <기생충>까지,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총 214편의 영화에 관해 쓴 208편의 평론이 실렸다. 이 숫자에는 이동진의 20년 역사뿐만 아니라 영화계의 역사, 독자들의 개별적인 역사가 모두 녹아 있다. “그가 추천하는 영화를 함께 보고 설명을 듣고 대화를 나눠본 관객에게 이동진은 차라리 일종의 영화관”이라는 박찬욱 영화감독의 추천사처럼, 이동진은 국내 영화평론계에 굳게 선 스타다.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안경을 쓰고 그는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활동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결과물을 토대로 관객과 독자는 한층 새롭게 영화와 책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극장 밖에서 다시 시작되는 영화처럼,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는 이동진의 노력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영화의 신비를 손에 쥐어보려고 다시 시작하다가 아득해’진, ‘영상을 문자로 바꾸어 짚어내려고 무망한 투망질을 되풀이’(5쪽) 한 시도가 있었기에 오늘의 이동진이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동진의 눈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영화가 다시 한번 시작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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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의 다양한 형식


블로그에 ‘과격한(?) 분량’이라고 책을 소개했어요. 20년간 쓴 글이 모였으니 당연한 일인데, 실제로 보니 과격하긴 하더라고요. (웃음)


지난 20년간 쓴 제 영화평론을 모두 모은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추릴 수가 없었어요. 줄이고 줄여서 만든 게 이 정도예요. 숫자 강박도 조금 있었어요. ‘2019-1999’ 하면 그럴듯해 보이잖아요. 20세기의 첫 20년이자 20세기의 맨 마지막이기도 하고요. 책이 운때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줄인 기준이 있나요?


영화보다는 글로 골랐던 것 같아요. 앞부분에는 글이 심할 정도로 길고, 뒷부분에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 짧은 글들은 빼게 되더라고요. 지난 20년간 영화 글을 발표해온 매체와 환경, 혹은 저라는 사람이 살아온 궤적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결과 같아요. 일간지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사람이고, 일간지에는 아무리 영화평을 길게 써봤자 책으로는 두 페이지에서 세 페이지 분량이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이렇게 모아 놓은 게 저뿐만 아니라 읽는 분들에게도 의미가 있겠죠.


양에 대한 욕심이 있다고 하셨어요. 이제까지 쓴 글을 다 모아놓고 싶다는 마음이었을까요?


타고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무엇이든 못 버리고 평생 수집하는 스타일인데, 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남들이 읽어서 유익할 수 있는 글만 모은다는 원칙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질보다 양이라고 생각해요. 넓이가 없는 깊이라는 건 불가능하지만, 깊이가 없는 넓이는 가능할 수도 있죠. 그런 점에서 깊이의 전제조건이 넓이라는 생각으로 양을 많이 쌓으면 언젠가는 그 양의 끝에서 질적인 도약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양질전환의 법칙처럼요.


책은 언제, 어떻게 기획하셨어요?


이런 책을 내겠다는 생각은 계속하고 있었어요. 김중혁 작가처럼 마감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저같이 쫓기고 쫓기다가 하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요. 제 책 치고는 빨리 냈어요. (웃음) 편집자님께서 고생 많이 하셨죠. 기본적으로 평론집은 대부분 발표한 글을 모아서 내게 되는데, 저는 비교적 호흡이 짧은 쪽에서 많이 일하다 보니 긴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어요. 이번 기회에 새로 긴 글을 쓸 수 있게 되어서 좋더라고요. 평을 쓴다는 게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라는 걸 오랜만에 새로 깨달았어요. 어떻게 보면 평문의 다양한 방식이 여기에 녹아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어떤 글은 극도로 스포일러를 조심하면서 안내에 충실하기도 했고, 어떤 글은 상대적으로 글 자체의 완성도에 치중한 면도 있어요. 그 영화 자체를 깊게 파고든 글, 심지어 유머 글도 있어요. 평론가로서 썼던 다양한 형식이 모여있으면 좋겠다는 게 애초의 목적이었어요.


20년 전 쓴 글을 보면 부끄러움이 가장 먼저 들기도 하죠. 많이 고치지 않고 내는 데까지는 용기가 있었을 거예요.


첫 번째 이유로는, 고치기 시작하면 이 책은 2029년에 나왔을 거예요. 짧은 글이라고 해서 그 영화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다시 고쳐 쓰다 보면 책이 5000페이지까지도 나왔을 거예요. 불가능한 일이죠. 저는 인생에서 최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차선만 되어도 너무 감사하고 차악만 모아도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관적인 사람인데, 이 책은 차선은 된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사실 90년대 초반부터 비디오 잡지에 필명으로 영화 글을 썼어요. 그 글들은 지금 제 기준으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에요. 그나마 보아줄 수 있는 게 1999년도부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어느 순간부터 부끄럽진 않아요. ‘내 글이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세계 최고의 평론가야’ 이런 건 아니지만, 자부심도 있어요.


그 정도의 자부심은 있어야 20년간 이 정도의 글을 써올 수 있지 않을까요?


스스로 최소한의 믿음이 없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특히 글은 블로그나 SNS를 통해서 누구나 쓰잖아요. 일대일로 손쉽게 비교가 되고, 이 사람이 얼마나 잘 쓰는지 보여요. 그런 상황에서 글쟁이로서 글을 쓰는 데 자신의 성실함이든 재능이든 최소한의 믿음이 없으면 직업적인 글을 쓸 수 없어요. 그런 면에서 저한테 재능이 없더라도 있는 것처럼 믿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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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영화평을 올린 블로그 제목이 ‘Life isn’t cool’이에요.


인생이 ‘쿨’하지 않잖아요. 예전에 사인할 때 ‘흘리지 않는 1인분의 삶’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어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평 중의 일부였죠. 그게 소극적 의미로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해요. 민폐를 끼치는 삶을 싫어하고, 대부분 ‘쿨’하고 싶죠.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요.


반면 ‘Life is cool’이라는 코너도 있어요.


사람이 조가 있으면 울도 있죠. ‘Life isn’t cool’에 글이 더 많지만, ‘Life is cool’에도 꽤 많아요. 역시 ‘생은 쿨하지 않지만, 가끔 쿨이기도 하구나’ 싶어요.


은근히 말장난이나 언어유희가 많았어요. ‘<밤에 혼자>에는 혼자 있는 장면이 없다’, 책 출간 소식을 알리면서 쓴 ‘영화뿐만 아니라, 책 역시 두 번 출간된다’ 같은 문장이오.


기본적으로 책을 내는 사람의 도구는 글이죠. 대장장이에 비유한다면 그 사람이 무얼 만들든 만드는 도구에 대한 능숙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능숙함이 없는 하한선으로는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책을 쓰는 사람의 도구는 언어가 될 거예요. 보통 가장 언어적 예술의 정점이 시라고 하잖아요. 모든 존재하는 예술의 최고 단계에서는 음악적인 부분이 있을 거예요. 언어를 다루는 직업이라면 사운드의 말맛, 모음에 따라 변화가 생기기도 하는 말놀이, 유희, 혹은 ‘드립’ 등 언어의 추상적인 특성을 구사할 수밖에 없어요. 말씀해주신 예 중 두 번째는 완전히 장난이었다면, 첫 번째는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핵심을 일반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언어가 가진 말맛을 잘 살려서 표현하는 게 제가 바라는 영화평의 이상이에요.


‘그러니까’라는 단어가 자주 보였어요. 논리성을 가져가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데요.


일반적으로 작법 수업을 들으면 형용사와 부사를 빼라고 하죠. 스티븐 킹도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고 했고 저도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어요. 하지만 과연 모든 경우에 그런가요? 형용사와 부사를 잔뜩 넣어 충분히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노작(勞作)이라는 느낌이 들죠. 왜냐하면 접속 부사가 하나도 없어요. 하드보일드하게 뼈만 남은 문장을 구사해서 스릴러에 맞는 글을 쓰죠. 반면 오히려 접속 부사를 많이 써서 말맛이나 리듬이 생기기도 하거든요. 일반적으로 ‘그러니까’는 앞말이 있어야 해요. 하지만 저는 ‘그러니까’를 영화평의 첫 단어로 많이 써요. 접속해야 할 앞 절이 없음에도 그 말을 처음에 쓸 때 주는 강렬한 긴장감과 생략의 맛이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도 많이 쓴다고 들었어요.


책에서는 그 단어를 많이 뺐어요. 1000페이지 교정을 보다 보니 제 말 버릇, 글 버릇이 다 나오더라고요. ‘고스란히’라는 말도 많이 썼어요. 그런 말버릇도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제 인생관이자 세계관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평론의 중도를 지키려는 태도라고 보더라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네요. 기본적으로 평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라고 생각해요. 앞의 전제에 대해 인정하거나 인지한다는 걸 전제하잖아요. 그게 작품과 평론가의 관계 아닐까요? 어떤 평론은 작품 자체를 완전히 깔아뭉개고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일단 그 영화가 한 말은 들은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말을 쓰는 거죠. 사람이 다 자기 사연이 있고 할 말이 있어요. 아무리 이상한 사람도 그렇게 행동할 최소한의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 ‘너도 옳고 나도 옳으니까 여기서 끝내자’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러니 상대방을 인정하고 들어준다는 전제 아래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거죠.


책에도 이런 관점이 보이는 것 같아요.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영화에 내레이션이 많으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비영화적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시각적이라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그 말도 맞는데, 어떤 영화는 그것 때문에 특별해지기도 해요. <친절한 금자씨>에서 내레이션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브레송 영화에 내레이션이 없다면요? 영화 글밥을 먹으면서 느낀 건 세상에는 딱 그래야 할 단 하나의 논리도, ‘이즘’도, 영화적인 방법도 없다는 거였어요. 세상에 관한 것이든 문장에 관한 것이든, 단 하나의 원칙은 존재하지 않아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단 하나의 원칙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연극과 소설, 모든 텍스트 중에 영화 평론가가 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책 서문에도 썼지만, 제가 영화를 찾아간 게 아니라 영화가 저를 찾아왔어요. 지금은 당연히 영화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이자 가장 큰 쾌락이자 고통이에요. 하지만 영화만이 유일한 것이고 꼭 그랬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영화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문학을 읽고 음악을 들어요. 살면서 수많은 경험이 있는데 영화평론을 한다고 영화만으로 세상을 보고 싶진 않아요.


영화를 볼 시간, 책을 읽을 시간, 음악을 들을 시간은 어떻게 내나요?


음악은 늘 멀티 태스킹으로 들어요. 초집중해서 무언가 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음악을 틀어놓고, CD를 하루에 다섯 장은 듣는 것 같아요. 책은 어떻게 보면 가장 덜 지겨운, 권태가 없는 오락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한 번 시계부를 쓸 필요가 있어요.


시계부요?


가계부처럼요. 바쁘지만 누구나 여가를 보내는 시간이 있어요. 하다못해 왕복 출퇴근하는 시간에 웹툰을 볼 것인가, 쇼핑할 것인가, ASMR 틀어놓고 잘 것인가, 여러 가지 선택 중에서 그 순간 쇼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책 읽기보다 쇼핑을 좋아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돈이 있고 시간이 있더라도 여행을 가지 않아요. 사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거죠.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 인생이 안 좋은 건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책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훨씬 지혜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겠죠. 어떤 사람이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 건 그냥 다른 일보다 책 읽기를 덜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최근 <이동진의 빨간책방>이 종료됐어요. 오랫동안 많은 책을 소개해 온 대표적인 도서 팟캐스트였죠. 방송이 남긴 게 있다면요.


이것저것 했던 모든 방송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고르라면 <이동진의 빨간책방>일 것 같아요. 시작할 때는 몰랐지만 너무나 얻은 게 많고, 특히 누군지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청취자와의 유대감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별 볼 일 없고 시간 없어서 쩔쩔매는 사람이 매 순간 차선의 노력을 기울여서 책을 잘 전달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어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일상의 일부분이 되었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죠. 사람도 그렇듯이, 제가 누군가와 멀어진다 해서 반드시 떼어 먹힌 돈이 있어서 싸우고 그런 건 아니에요. 좋은 사람이어도 헤어질 때가 있죠. 그런 측면에서 <이동진의 빨간책방>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일단 여기까지구나 생각하죠. 그게 꼭 슬픈 일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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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지 않으면 평론은 불가능하다


이제까지 독자들이 가장 많이 본 이동진의 평은 한줄평이라고 생각해요. 분량에 따라 글 쓰는 방법이 달라지나요?


한줄평이 가진 강력한 효용이 있어요. 가장 중요한 특징을 가장 제한된 언어로 쓰는 게 한줄평일 거예요. 쓰는 사람 입장에서도 지루하지 않게 이전하고 다른 한 줄을 쓰면서 각 영화의 특성을 반영해야 해요. 사람들은 쉽게 쓴다고 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셈이죠. 반면 <버닝>처럼 80매 원고를 쓴다면 훨씬 분석적이면서도 파고 들어가는 스타일의 언어를 구사해야 하잖아요. 80매 평론이 한줄평보다 반드시 모든 면에서 위대하고 우수한 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한줄평이 가장 상업적인 글인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런 면에서 글의 형식과 글을 누가 읽는가에 맞춰 쓰는 게 맞죠.


같은 영화를 두 번 볼 때가 거의 없다고 하셨어요. 평론을 쓸 때, 영화를 어떻게 복기하시나요?


영화는 생각보다 언어가 구조화되어 있고, 처음 5분을 보면 짐작하는 수준을 대부분 맞출 수 있어요. 그건 제가 천재여서 보이는 게 아니라, 영화에 쏟아부은 시간이 많기 때문이에요. 영화 언어에 상대적으로 익숙할 수밖에 없죠. 다른 쪽으로는 어제저녁, 오늘 점심에 뭐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평생 시간을 그렇게 썼으니까요. 아버지가 밤마다 형과 함께 내기 바둑을 두곤 하셨어요. 옆에서 보면 우리 아버지와 형이 천재 같은 거예요. 바둑 한판을 두고 순서대로 다시 보면서 복기한단 말이죠. 확률 문제로 계산하면 어마하게 복잡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바둑을 만 판 둬서 그렇더라고요. 당연히 두 번 보면 물론 좋겠죠. 하지만 인간의 삶은 항상 유한하고 최선은 없어요. 순간순간을 타협하는 거죠.

 

수많은 영화와 책 중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일에 탈력감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작가님은 그런 적 없으신가요?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애드 아스트라>가 훌륭한 이유는 무의미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의 문제를 SF를 빌려서 뛰어나게 묘사하기 때문일 거예요. 뇌가 진공 상태를 견디지 못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일 텐데, 우리는 의미가 없는 걸 견디지 못해서 의미를 발명하기도 해요. 우리 삶이 의미로 가득 찼다는 것은 의미 없음을 견딜 수 없어서 그렇게 믿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의미를 찾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무의미를 견디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론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어떤가요?


평론이 의미를 찾아갈 때가 있죠. 그러나 의미를 재구조하거나, 의미를 발명해내기도 해요. 평론은 감독의 의도를 찾아서 옮겨주지 않아요. 감독이 모르는 의도를 알아채거나, 감독이 만들어내지 않았지만 이미지나 말이 서로를 부추겨 세우면서 저절로 생겨난 의미를 잡아낼 수도 있어요. 소설은 소설가만의 것이지만 영화는 배우의 몫, 시나리오 작가의 몫, 촬영 감독의 몫 등이 있어요. 반드시 감독 머릿속에서만 완전한 의미가 있지 않을 때가 있죠. 어떤 의미에서 평론가는 주어진 영화 재료를 가지고 자기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을 거예요.


나이트 샤말란 3부작 평 중 ‘질문이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평론하는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말일 텐데, 평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


기본적으로 글 쓰는 사람은 다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글쓰기는 글을 밀고 나갈 힘이 있어야 하는데, 글을 추동하는 건 질문이에요. 영화를 보면서 모든 장면에 고개를 끄덕이면 영화평을 쓸 수 없어요. 왜 저랬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해요. 왜 저 영화는 시간순으로 진행하지 않고 마지막에 나올 걸 처음에 넣어서 줄거리를 꼬았는가, 왜 저 영화는 배우가 정면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는가, 왜 저기서는 모두 여자만 죽는가… 질문하지 않으면 평론은 불가능해져요. 그런 면에서 질문하는 사람은 괴로워요.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어 있고 자신이 디디고 선 기반을 스스로 삽으로 파내는 행위잖아요. 그렇지 않고 글을 쓸 방법을 저는 몰라요. 그러니까 괴롭죠.


마지막 작가의 말은 ‘나는 영화를 만져보고 싶다’로 끝나요. 어떤 뜻일까요?


1 다음 2가 오고 차례대로 3과 4가 오는 걸 논리적인 글이라고 한다면, 예술적인 글에는 반드시 비약이 있어요. 1, 2, 3, 4 하다가 갑자기 17이 오죠. 이런 비약을 함부로 만들면 글이 황당해져요. 마지막 문장은 앞 문장과 이어지지 않으니 비약이 맞는데, 앞 문장과 내적으로 희미하게 연결이 되거든요. 저는 서문에 이 비약이 차선적으로 적절했었다고 생각해요. 그게 지금 제 영화에 대한 가장 절실한 마음이에요.

 

영화를 내 삶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극적인 순간 같은 것은 내 어린 날들에 없었다. 그렇지만 영화는 내게 정확히 찾아왔고 나는 그런 영화와 오랜 세월 곡진하게 동행했다. 나는 삶을 살고, 영화로 삶을 다시 한번 산다. 나는 영화를 만져보고 싶다.
- 5쪽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이동진 저 | 위즈덤하우스
지난 20년간 발표해온 평론과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쓴 평론을 합해 총 208편을 모아 엮었다. 2019년부터 1999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세 가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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