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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언 시인 “내게 시는 생각의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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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던 덤불을 들고/나였던 불 앞에 서서/잠시 무엇이었던 내가/나 아닌 무엇이 될 때까지//나였던 것들에 가까워졌다가/나 아닌 모든 것이 될’(「나 아닌 모든」 일부)

 

송승언 시인이  『철과 오크』 이후 4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  『사랑과 교육』  을 쓰며 생각했던 것은 “죽음 이후”였다. 시인에게 죽음은 더 이상 종결이 아니라 연결이었고, “뭔가가 계속되”(「이후에」)는 일이었다. “이후의 죽음을 생각할 게 아니라 죽음의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몇 년 전, 장례식 있었던 무렵쯤」)고 말하는 시인은 “우리가 우리의 조상”(「인챈트」)이며 우리는 “우리보다 오래 남아 우리들의 꿈을 꾸고 있다.”(「모닥불의 꿈」)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송승언 시인은 “죽고 싶을 때 이 시를 읽고 살 독자가 딱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어하는 이에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건네는 것은 미안한 일이더라도. 그것이 시인이 자서에서 “죽고 싶어하는 당신이 살았으면 한다. 미안하게도.”라고 적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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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신이 있다면


「사랑과 교육」이라는 시를 표제시로 결정한 이유가 뭔가요?


저는 제목을 정할 때 주변에 의견을 많이 묻는 편이거든요. 가장 저항 없는 제목이 이거였어요. 몇 가지 다른 안이 있었는데요. 주변 의견을 반영해서 결정했어요.

 

첫 번째 시집  『철과 오크』  라는 제목과 느낌이 완전히 달라서 재미있었어요. 물론 「사랑과 교육」을 읽어보면 이것이 어떤 사랑과 어떤 교육인지 알게 될 테지만 제목만 봤을 때는 비교적 부드러운 이미지잖아요.


맞아요, 첫 시집의 딱딱한 부분, 이번 시집의 부드러워진 느낌과도 닿아 있죠. 그런데 제게 나쁜 버릇이 있어요. 시 표면에 감싸고 있는 정서는 부드럽게 하면서도 내용은 잔인하거나 무섭게 하려고 많이 하거든요. 「액자소설」도 그렇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이제 모든 일이 시작될 거라고/말해 주었다/다정하게’라는 마지막 연에서 ‘다정하게’는 사랑이 넘치는, 친절한 다정함이 아니잖아요. 뭔가 뒤에서 싸하게 하는 다정함인데요.(웃음) 「사랑과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보통 ‘사랑’과 ‘교육’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기대하는 바가 있을 텐데요. 그건 인간의 관점이니까요. 만약 신이 있다면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은 인간을 다 데려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또 이 세상을 교육하는 방법은 인간이 남긴 것들을 불태워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죠.

 

아무도 없는 거리/모두 사라진 거리를 산책하며 쏟아지는/이상한 빛을 바라본다는 것/빛의 좋음 때문에/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착각에 휘감기고 있다면//그것은 신의 사랑일 것이다/불타는 이 도시의 꼴이 신의 교육이듯이
(「사랑과 교육」 일부)

 

그래도 이 시의 발단은 인간을 사랑해서였던 건 맞아요. 특히 앞부분 내용은 제 경험이죠. 첫 시집에서는 경험을 거의 안 썼는데요. 이번 시집에는 경험이 많이 있어요. 아침에 여자친구를 어디 데려다 주는 날이었는데요.  “산책하기 좋은 날이다” 하더라고요. 그땐 듣고 흘렸는데 며칠 지나서 그 말이 생각났어요. 그 친구와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은 그 친구가 곁에 없는 상태를 실감한 동시에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나보다, 생각했죠.

 

이번 시집에 시인의 경험을 더 많이 담게 된 이유도 궁금하네요.


반발적이었던 것 같아요. 첫 시집과 똑같이 하면 안 되니까요. 일단 제가 지루하고요. 첫 번째 시집이 저라는 것을 완전히 덜어내고, 시 속에 있는 다른 나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면 이번 시집은 실제 나와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모든 것이 다 경험은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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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문제


첫 시집 이후 4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이에요. 첫 시집과 느낌이 달랐을 것 같아요. 어땠나요?


첫 번째 시집도 주제 같은 것은 제가 다루고 싶은 것이긴 했지만요. 제가 말하고 싶은 내용보다는 구현할 수 있는 기술적인 부분을 더 중심에 두고 전개했어요. 두 번째 시집은 기술적이거나 딱딱하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조금 물렁물렁하게 만들고, 하고 싶은 얘기를 더 많이 넣었죠. 저는 어릴 때부터 사람이 죽는 문제에 많은 질문을 던져왔어요. 글쎄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대여섯 살 때부터 그 문제에 시달렸는데요. 이상하잖아요.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있는데 어느 순간 사라진다는 것이 어릴 때부터 납득하기 힘들었다고 할까요. 그 문제를 계속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내가 사라진 다음의 문제들 같은 것이죠.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있을 테니까요. 그런 얘기를 한 거예요.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긴 하지만요.

 

죽음이라는 게 워낙 거대하고 어려운 질문이긴 하지만, 이런 시들을 써낸 지금의 송승언 시인이 도달한 답은 어떤 것인지도 묻고 싶어요.


일단 죽음이라는 것은 교육되지 않는 것이고, 잘 모르겠지만요. 내 생각이나 정신 혹은 영혼 같은 것들이 있다고 믿고, 그것이 소멸되거나 육신을 떠나거나 다른 세상으로 간다거나 하는 생각 안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죽음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요. 영혼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나를 이루고 있는 다른 상관물이나 기억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나를 누군가의 기억이라거나 내가 만졌던 물건이라거나 한다면요. 그렇다면 내가 죽은 후에도 남아있을 수 있잖아요. 또 그러고자 하는 집념이 강할수록 오래 어떤 것들이 남을 테고요. 이런 식으로 지금은 나의 죽음 이후에 나의 관여물을 어떻게 남길 수 있는지, 생각이나 마음을 어떻게 그대로 전송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고민 중인 것 같아요.

 

시집이 흥미로웠던 부분이 바로 그거였어요.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굉장히 많은데 여기서 죽음은 종결이 아니라 연결인 거예요. 「몇 년 전, 장례식 있었던 무렵쯤」에도 ‘이후의 죽음을 생각할 게 아니라 죽음의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오죠. 죽음을 얼마나 오래 생각해왔는지 알 수 있어요.


그냥 어릴 때부터 제가 죽는다는 사실도 괴롭지만 이런 생각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게 너무 괴로웠는데요. 안 할 수는 없었죠. 생각은 나와 상관없이 계속 이어지는 거니까요. 계속 그랬던 것 같아요. 「몇 년 전, 장례식이 있었던 무렵쯤」은 말하자면 제 안에서 제가 묻고 답하는 내용이에요. 제가 죽을 때 제가 장례식에 남긴 이야기들을 생각해본 거죠. 물론 죽음은 여전히 불쾌하고 찝찝한 것이고요. 저는 죽음을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저는 그 방편을 택하는 사람이지만 이제 그것 때문에 몸서리치거나 두려워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 지난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이 시를 쓰게 한 데에도 영향을 끼쳤을까요? 시인이 되는 데 죽음에 관한 생각이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굳이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 건 아니었어요. 제가 갖고 있는 시에 대한 관점 중 하나는 시가 생각의 피라는 거예요. 여기서 피는 머릿속에 고여 있는 피죠. 고여 있으면 썩잖아요. 병도 들고요. 마찬가지로 생각도 머릿속에 고여 있고, 바깥으로 빼내지 않으면 안에서 썩고, 병 들어버리겠죠. 그래서 어느 정도는 자가치유적인 방법으로, 발버둥으로 시를 전개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쁜 생각들을 빼내서 저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대신 이것은 나의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이니까 누가 읽으면 감염될 가능성이 있어서 미안한 일이긴 하죠.(웃음) 제게 시 쓰기나 문학은 일단 제 자신을 회복하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걸 거창하게 구원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자기 구원과 비슷한 느낌의 수단이었던 것 같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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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들과 연결된 존재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이 타자와의 연대로까지 나아가는 것처럼 읽히거든요. 「나 아닌 모든」 같은 시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나이를 먹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최근 4-5년 사이에 더 많이 하게 된 생각이에요. 점점 더 제 자신이 옅어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어릴 때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내가 존재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정확히 내 것이 있고 그것이 나라는 생각은 덜하게 됐어요.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입장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죠. 너무 당연하게 생각이 이렇게 흘러갔어요. 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생각이나 시각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존재고 나아가 자연이나 내가 관여하고 돌보고, 망치는 많은 것들과 연결된 존재인 거죠.

 

최근 4-5년 사이에 생각을 바꾸도록 한 어떤 계기라도 있었던 걸까요?


사회적인 부분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거죠. 첫 시집을 쓰기 전부터 지속된 것이긴 한데요. 우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저한테는 되게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직접적으로는 모르는 3인칭의 죽음이 슬픈 거죠. 보통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슬퍼도 거리가 멀어질수록 덜 슬프잖아요. 크게 비통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지지자도 아닌데 가까운 사람이 죽은 것처럼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물론 사회가 그 죽음을 겪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진통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왜 이 죽음은 내 옆의 죽음처럼 가깝게 느껴졌을까 계속 생각했어요. 이후 세월호라든지 강남역 살인사건처럼 구조적인 문제로 자신이 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 점점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겪으면서 좀 나에게서 물러나게 된 것 같고요. 삶의 문제가 좀 더 같이 사는 것으로 가려면 결국은 바깥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런 생각을 하게 되겠죠. 

 

같은 제목의 시가 몇 개 수록되어 있어요. 먼저 「커대버」인데요. 두 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해요. 같은 시기에 쓴 시인가요?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썼어요. 이명박 정권 때 독립문 근처에서 모여서 시위를 하던 시기의 정황을 담고 있는데요. 그때 자리에 앉아서 오랜 시간 있었거든요. 우연히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이 인상에 오랫동안 남더라고요.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들이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거기서 처음 만난 것이고, 이후로 다시는 못 만났는데 그 사람을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커대버」는 그 똑같은 소재를 가지고 하나는 운문으로, 하나는 산문으로 쓴 거예요. 그렇게 쓸 때 끝은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해서 쓴 시죠. 그래서 운문으로 쓴 「커대버」는 규칙도 있어요. 과거형과 현재형이 교차하고요. 산문은 그냥 흘러가듯 썼어요. 같은 내용이고, 핵심 표현은 비슷하지만 완성된 시는 읽는 사람에게 다른 감각으로 그려지게 되는 거죠.

 

「인챈트」도 두 편이에요.


시집의 구성적인 부분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시의 제목을 포함해서 시집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을 다 음악적인 리듬으로 생각하는데요. 그런 이유였죠. 사실 발표할 때는 다른 제목의 시였는데 시집을 묶으면서 제목을 바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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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되지 않는 책


제목부터 시의 구성까지, 시집을 한 권 묶는 일이 정말 많은 고민을 담고 있는 거죠.


그런 셈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시인선 형태로 시집을 묶는 건 안 하려고요. 시만 묶어서 시집을 낸다는 게 갑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번 시집으로 시로 하고 싶었던 것을 어느 정도 했기 때문이기도 해요. 내 관념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만한 것이 없겠지만 이야기하고, 바깥에 전하는 면에서는 많이 한계가 있는 장르란 생각이 들거든요. 또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면을 시로 다 담아낼 수는 없으니까요.

 

의외의 얘기인데요. 그렇다면 어떤 형태를 생각하고 계세요?


다음 시집이라고 볼 수 있는 형태의 어떤 것을 낼 때는 시집으로는 안 낼 것 같아요. 시도 들어가겠지만 시의 비중이 엄청 많지는 않을 거고요. 시가 중간 중간에 배치되면서 생각도 적고, 픽션도 적는 형태일 텐데요. 시집이라거나 소설집, 에세이, 하는 식으로 분류되지 않는 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분야가 아니라 그냥 책 자체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이 안 해봤던 형식 실험을 할 수도 있을 거고요. 어디에나 시적인 부분은 담을 수 있는 거니까요.

 

그것이 시의 영역을 확장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시의 영역을 벗어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시의 확장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 저는 시는 그냥 시인 것 같아요. 시 장르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고, 한계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시적이라는 것은 글자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죠. 만화를 보면서도, 그림을 보면서도 시적인 것을 다 느끼니까요. 저도 시 자체보다는 그런 것들에 좀 더 끌리고요. 시적인 것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시니까 그걸 해왔는데요. 그 외의 것에도 더 관심이 생겼고, 살면서 말하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진 것 같아요. 이제는 말에 좀 더 무게를 두겠다는 것이죠.

 

앞서 “바깥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말씀하셨는데 그것과 같은 맥락인 건가요?


맞아요, 말은 어쨌든 전해야 하는 거니까요. 전해지기 위해서, 좀 더 선명하게 닿기 위해서는 시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시를 덜 읽기도 하고요. 읽는 걸 힘들어하기도 하고, 혹은 저마다 느끼는 게 다르기도 하잖아요. 물론 저마다 느끼는 게 다른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령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다면 가끔은 시라는 장르로 그것을 에두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어요.


 

 

사랑과 교육송승언 저 | 민음사
시인은 “인간의 운명으로는 감당치 못”하는 기계장치의 세계 혹은 나라는 주체가 제거된 세계에서의 없는 것들의 정체를 그려 낸다. 이 “창백한 가능성의 공터”(황인찬)에서 없음은 반복되고, 이 반복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당신의 (없는) 영혼에게 나직이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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