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봉 작가는 인터뷰를 마치고 필자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상부 허락을 받았다고 기사에 꼭 써주세요. 그동안은 인터뷰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얼결에 웹툰작가로 데뷔하게 된 박수봉 작가는 요즘 선임들의 연애 편지에 그림을 그려주느라 바쁘다. 덕분에 예쁨을 받고 있다는 그는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어서 행복한 만화가다. 또 하나, 박수봉 작가는 『수업시간 그녀』를 그리면서 여자친구를 만나게 됐다. 그렇다면 『수업시간 그녀』을 본 독자들도 용기를 내서 연애를 시작했을까?
『수업시간 그녀』 감정이입이 관건이었다
2년 전 개인 블로그에서 연재하다가 네이버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역전! 야매요리』정다정 작가와 같은 경우죠? 언제쯤 나에게도 연락이 오겠지, 하고 예상했나요? 아니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데뷔였나요?
여자친구랑 만난 지 100일이 되던 날, 꽃을 사려고 가고 있는데 문자가 왔어요. 네이버 알림창이 울렸는데, 네이버 만화 담당자 분이 비밀글로 연재를 제안하는 메시지를 남긴 거죠.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못 질렀고요(웃음).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냥 덤덤했던 것 같아요.
『수업시간 그녀』는 어떻게 탄생한 작품인가요? 독자들 대부분이 ‘작가의 경험담이 분명하다’는 반응을 보였는데요.
(웃음) 습작 차원에서 그렸던 작품이었어요. 제가 얼만큼 이야기를 짤 수 있는지도 궁금했고요. 제 주변 몇몇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싶어서 그린 만화에요. 친구들에게 작품으로 인정 받고 싶었어요. 물론 연재를 시작하면서는 독자 분들을 고려했지만 일차적으로 칭찬 받고 싶은 사람들은 제 주변 사람들이었어요. 친구들에게도 인정 받지 못하면 독자들을 만족시키기란 더 어려운 일이니까요.
7월에 군입대를 했고 지금 의경으로 복무 중이잖아요. 연재는 어떻게 가능했나요?
이미 작품은 3월에 완결했었고요. 5월부터 연재를 시작하면서, 6월 말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다시 그렸어요. 7월 4일에 입대했는데, 논산 가는 날, 차 안에서도 편집을 했어요(웃음). 부모님이랑 여자친구가 많이 도와줬죠. 여자친구가 멀티미디어영상을 전공하고 있어서 파일 다루는 법이나 여러 가지 노하우를 많이 알려줬어요.
연애 중이시군요. 혹시 『수업시간 그녀』속 그녀를 닮았나요?
(웃음) 아니에요. 연재를 하다가 알게 된 사이인데요. 안경도 쓰지 않았고요.
연재를 하다가 연애를 하게 되었다니! 『수업시간 그녀』는 정말 행운 같은 작품이네요. 기대하지 않았던 웹툰작가 데뷔에 사랑까지. 여자친구는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블로그에 『수업시간 그녀』를 연재했을 때, 학교 페이스북에 링크가 걸렸는데 그걸 타고 타서 알게 된 사이에요. 같은 학교 친구다 보니까 자주 만나게 됐고, 서로 잘 맞아서 사귀게 됐어요. 물론 고백은 제가 했고요(웃음). 여자친구가 만화에 도움을 많이 줬어요. 좋은 아이템도 주고 결말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죠.
아,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는 왜 안경을 쓰고 있나요? 평소 안경 쓴 여자에 대한 로망이?
지적인 느낌이 있잖아요. 안경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속마음을 불투명하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등장인물 얼굴에 눈을 그리지 않은 이유는?
프랑스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 작가도 눈을 잘 안 그려요. 눈을 안 그린다는 것 자체에 포인트를 잡고 간다기보다는 눈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작가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인물들의 눈빛을 대사로 유추하게 되는데, 저는 그걸 포인트로 잡고 갔어요. 대사를 더욱 농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림의 보여주기를 살짝 눌러주고 간다고 할까요? 저 같은 경우에는 실험적인 면보다는 평범한 해석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마지막에 여자 주인공의 눈이 등장하는 장면에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한 장면에 얼만큼 힘을 줄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고요.
눈이 없지만 인물의 표정, 심리가 읽힌다는 것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이에요.
눈을 그리게 되면 그 한 사람의 이야기로 그치지만, 눈이 없으면 모든 독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잖아요. 공감물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마지막에 눈을 그린 건, 그 순간만큼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글도 적고, 채색도 많지 않아요. 그림도 무척 간결한 느낌이고요.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나요?
어렸을 때 『아빠와 아들』이라는 만화를 보고 자랐어요. 대사 없이 그림만으로 전달되는데 막연히 재미가 있었어요. 『수업시간 그녀』를 그리면서, 그냥 전달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정회라는 친구가 함축의 중요성을 알려줬어요. 함축의 매력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독자가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놓는다고 할까요?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위해서 생략하고, 길을 만들어주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채색은 정말 가끔 등장해요. 26화에서 여주인공이 신문만화를 볼 때, 노란색 배경이 나오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쉽게 말해 노란색은 행복인데, 인물들이 행복을 느낄 땐 주로 노란색이 등장해요. 여주인공이 짝사랑하는 남자와 술을 마실 때는 탁한 노란색이 나오죠. 불안정한, 확실하지 않은 감정이니까 탁한 노란색을 쓴 거예요. 후반부 신문만화를 읽고 나서, 주인공에 대한 마음이 전해졌을 때는 깨끗한 노란색이 나오고요. 마지막 화에 파란 비는 봄비 같은 느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맞이하고 그 전의 것들은 리셋하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만화 속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 카페는 실제로 있는 카페라고요. 커피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특히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유독 많이 등장해요.
예전에는 아메리카노 같이 쓴 걸 왜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언젠가 정말 힘들 때 한 잔을 마셨는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예전에는 ‘있어 보이려고 쓴 걸 마시나?’ 했는데, 아니었던 거죠(웃음). 남자 주인공과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는 카페에서 만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자는 코코아를 남자에게 주잖아요. 아직은 단 걸 좋아하는 순수한 느낌을 전달하려고 했어요.
남자 주인공, 단순한 성격은 저랑 닮았어요
필명을 안 쓰고 본명을 사용하시는데, 되게 정감 가는 이름이에요.
굉장히 여러 사건을 만들어준 이름이에요(웃음). 어릴 적에는 이름 때문에 놀림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외우기도 쉽고 정이 가는 이름이라서 좋아요. 아 그런데, 너무 나이 들어 보이나요?
아니요. 20대에게는 흔한 이름이 아니라서 기억에 남았어요. 독자들은 작품 속 주인공을 작가로 투영해서 보기 마련이잖아요. 『수업시간 그녀』의 남자 주인공과 닮은 모습이 있나요?
단순한 면은 닮은 것 같아요. 일단 저지르고 수습하는? 수를 두지 않는 단순함이 비슷해요. 어떻게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콤플렉스가 하나 있는데, 문제가 생겼을 때 “잘 몰랐어”라고 그냥 넘겨버리는 거거든요. 몰랐다고 용서가 되는 게 아닌데, 이런 걸 『수업시간 그녀』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남자 주인공을 두고 “장점이라곤 순진함 밖에 없는 놈”이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 장점 때문에 연애를 하게 되는 사람이라고. 실제 연애할 때 어떤 스타일인지 궁금하네요.
음.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글쎄요. 상대가 ‘기분이 상했나? 상하지 않았나?’ 이런 걸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좀 안 해도 될 매너들을 지키려고 하는 면이 있어요.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싫어할 수 있는? 당시에는 모르지만요(웃음).
미술을 전공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만화가에 대한 꿈은 정확히 없었는데, 그림 그리는 건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 입시 미술을 준비하다가 저랑은 맞지 않은 것 같아서 도망치듯 나왔는데, 덕분에 영상을 접하게 됐어요. 제가 배운 연출법은 영상 분야이고, 스토리보드 작업이어서 만화를 그리면서, ‘너무 영상 쪽으로 가는 그림은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만화는 만화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너무 문학적으로 만들려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하고 요즘에는 개념을 제대로 잡아보려고 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 어렵지 않나요? 개성 있는 학생들이 많기로 유명하잖아요.
운이 좋았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3D영상을 만드는 형이랑 같이 영상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제가 스토리보드를 그렸거든요. 그게 좋은 점수를 얻은 것 같아요. 입시에 대한 준비를 그렇게 많지 하지 않아서, 자유롭게 말해서 오히려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학교에서 저는 그냥 어울리는 사람들이랑만 어울리는? 그런 학생이에요. 저 말고는 다 튀는 것 같아요. 개성이 강하고 각자 신념이 도드라지니까, 표현하는데 능숙한 친구들이 많아요.
동기나 선후배 중에서 웹툰작가로 데뷔한 사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윤현석 선배님이 네이버에서 <다이스>를 연재했고, 졸업한 김혜원 선배님이 <월남특급>을 연재한 걸로 알고 있어요.
『수업시간 그녀』때문에 박수봉 작가도 학교에서도 유명인사가 됐겠어요.
입대 이후에는 학교를 잘 가지 않아서 확인이 안 돼요(웃음).
군대에서는 유명세를 좀 타고 있나요?
웹툰을 연재했다는 건 알아요. 덕분에 벽화를 그리는 일에 많이 투입되고 있어요(웃음). 선임들의 기념일마다 그림도 자주 그려줘요. 귀찮긴 한데 덕분에 예쁨을 좀 받고 있어요.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개인 블로그가 이렇게나 소문 나기는 쉽지 않잖아요. 파워 블로거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소문이 난 건가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최초로 박재수 작가님이 제 웹툰을 좋게 보시고 이종범 작가님께 말씀해주셨고, 이종범 작가님이 SNS에 소개해주셨는데 그걸 또 주호민 작가님이 퍼뜨려주셨어요. 주호민 작가님의 팔로어가 많아서, 덕분에 제 블로그에 많이 오셨어요.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정말 운 좋게도. 작가님들에게 정말 감사해요(웃음).
스스로 만든 작가성에 빠지지 않는다면
웹툰작가는 댓글 보는 낙으로 연재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기억에 남는 댓글이 많을 것 같아요.
마지막 화에서 다른 분의 로맨스 이야기가 댓글로 올라왔는데, 그게 베스트 댓글로 뽑혔어요. 바로 바로 반응이 올라오니까 연재를 하는 입장에서도 힘이 나죠. 즐거워요.
어린 나이에 웹툰 작가로 데뷔했어요. 애초에 만화가를 꿈꾼 건 아니었는데, 지금은 만화가로서의 앞날은 계획하고 있나요?
학창시절 때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찾아보던 중에 영상을 공부하게 되면서 대학에 왔고, 나에게 맞는 일을 찾고 있던 때에 그림을 그리게 된 거예요. 입대를 하고 나서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만화를 하고 싶다는 결론이에요. 그 전에는 막연한 꿈만 있었거든요. 바스티앙 비베스 작가처럼 스물두 살에 책을 내고 싶다는 꿈만 있었는데, 이렇게 단행본도 내게 되었고. 어떻게 보면 행운인 것 같기도 하고 마냥 좋기도 하고 그래요.
『수업시간 그녀』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와 만남을 약속하고 ‘나 아주 쓸모 없는 인간은 아니었어’라며 환호하잖아요. 현실에서는 언제 스스로의 쓸모를 느끼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음. 되게 간단한 거 같아요.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그리고 제가 한 행동에 대해 누군가가 웃어줄 때가 그래요.
혹시 <응답하라 1994>봤나요? 연애에 숙맥인 만화 속 주인공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드라마였어요.
본방을 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서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요. 짧게 짧게는 봤어요. 주변에서 이야기도 많이 듣고. 김칫국을 마시는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만약에 『수업시간 그녀』가 드라마화가 된다면 <응답하라 1994>를 연출한 감독님께 부탁 드리고 싶어요. 명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내공이 보이더라고요. 스토리 전개나 생각 같은데, 정말 마음에 들어요.
요즘 웹툰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먼저 데뷔한 선배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귀와 눈을 활짝 열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만든 작가성에 빠지지 않았으면 하고요. 유행이나 너무 인기 있는 것만 따라가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성에 빠져버리면 그림 자체에만 몰입해서 스토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고, 연출까지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아요. 창작은 힘들지만 그림과 글을 조율하는 능력이 정말 실력이라고 생각해요. 인기 있는 작품을 보고 시기를 하고 질투를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가장 냉정한 판단을 하는 사람은 독자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내 작품을 독자들이 이해 못한다’는 건, 핑계인 것 같아요.
글, 그림을 나눠서 작업하는 작가들도 많은데요. 앞으로도 쭉 혼자 그릴 계획인가요?
계속 혼자서 할 것 같아요. 정말 하고 싶은 것, 표현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다만 뭔가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제가 그림을 안 그릴 수도 있을 거예요. 이야기에 따라 표현 방법도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감성물로 데뷔를 했는데 앞으로 장르의 변화는 없을까요?
영화는 액션을 좋아해요. 그런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건 다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감성물을 잘한다는 건 아니고요. 그렇지만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건, 『수업시간 그녀』같은 단편이에요. 우선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걸 하려고요.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어서 즐거워요. 행복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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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시간 그녀박수봉 글,그림 | 애니북스
군 입대 전의 스무 살 남짓한 남자 주인공(가운데)이 수업시간에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여학생(왼쪽)에게 마음이 끌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업시간 그녀』는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주인공 승민(이제훈)과 여주인공 서연(배수지) 사이에 오가던 감정의 몇 배는 될 듯 압축된 감정 표현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 여자’만 바라보면서 ‘나를 좋아하는 여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간결한 그림체에 극도로 절제된 표현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건축학 개론〉보다 훨씬 달콤하고 쓰라린 첫사랑의 감정을 되살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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