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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모 “무조건 납작 엎드려서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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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의 이름 뒤에 숨어 말을 건네면서 스무 해를 보냈다. 라디오 작가로 살아온 시간이었다. 마침내, 60년의 세월을 지나,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저자로 하여 책을 냈다.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 그것은 곧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일일 테다. 강의모 작가는 ‘책 이야기’를 택했다.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에는 작가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달콤하고 짜릿한” 독서의 기억, 그것을 붙들고 책과 호흡하면서 살아온 시간들이 담겨있다. 삶의 길목마다 지표가 되어주었던 책들과 책을 통해 만난 사람들, 책이 비춰준 자신 안의 모습들을 말한다. 사이사이 자리를 잡은 독서록에는 ‘읽으며 익어갑니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야말로 ‘읽으며 익어 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책이다.

 

“읽기는 늘 맛있는 기억”이라고 말하는 강의모 작가는 마흔의 나이에 뒤늦게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MBC FM <오미희의 가요응접실>을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의 구성을 맡았으며, 14년째 SBS 러브FM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를 담당하고 있다.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함께 만들고 있으며, ‘2013 SBS연예대상’에서 라디오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은 책으로 『노년에 인생의 길을 묻다』(공저), 『아까운 책 2012』(공저), 인터뷰집 『땡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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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으로 삶을 정리한 것 같아요

 


책에도 쓰셨듯이, 방송작가는 다른 사람의 이름 뒤에 숨어서 살잖아요.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전면에 드러나는 책을 쓰셨는데, 느낌이 어떠세요?


굉장히 두려웠어요.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사회 명사도 아닌데 개인적인 삶을 오픈하는 거니까요. ‘이 책이 누구한테 어떤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되도록 포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잘 받아들여질까?’라는 생각도 했는데요. 지인들이나 가족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어떻게 생각하면 제가 살아온 60년의 삶을 잘 정리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 중에서도 나의 삶을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던 사람들이 ‘책을 읽고 나서 너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참 좋았다’고 이야기할 때가 제일 좋더라고요. 책 한 권으로 나를 설명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 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원래는 에세이를 쓴다는 건 엄두를 못 냈었어요. 누가 에세이를 한 번 써보자고 해도 ‘내가 셀럽도 아닌데, 누가 내 인생에 관심을 가져?’라는 생각으로 못 한다고 했었거든요. 예전에 인터뷰집 『땡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낼 때도 제 이야기는 빼버렸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서울신문>에서 칼럼 제의를 받았어요. 어떤 주제도 좋으니까 편하게 쓰라고 하더라고요. ‘될까...?’ 하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읽어 주는 분들이 계시고, 그렇게 2년을 하다 보니까 ‘내 이야기를 써도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든 거예요. 칼럼 연재는 2년 동안 하고 끝이 났는데, 목수책방의 전은정 대표가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글을 더 쓰고, 그동안 읽어 온 책의 내용을 조금 더 녹여내서 ‘읽으며 익어갑니다’라는 독서록도 넣고, 그렇게 만들게 된 거죠.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의 작가로 14년 동안 일하고 계세요. 상당히 긴 시간이에요. 놀라울 정도로요.


저도 놀라고 있어요. 매일매일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멋모르고 시작했어요. 좋아하는 작가들 만난다는 생각에 무조건 좋기만 했고, 신기함에 빠져있었죠. 하다 보니까 책을 읽는 재미가 조금씩 달라져요. 요즘에는 ‘내가 이걸 계속 하고 있다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웃음). 오히려 갈수록 더 즐겁고 하루하루가 새삼스러워요.

 

이선아 PD(<최영아의 책하고 놀자> PD)는 작가님을 두고 “흐르는 강물” 같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책에서 받은 인상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갇혀있지 않은 분 같았어요.


예전에는 굉장히 갇힌 삶을 살았어요. 40대 중반 이후, 50대에 가까워서야 열리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때부터 뭔가 삶의 전환을 꾀하게 된 것 같은데요. 한 일 년 정도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인터뷰를 하면서 사람 만나는 재미를 알게 됐어요. 주로 시사 다큐를 많이 하다 보니까 어두운 곳도 가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데, 그들에게 배우는 게 되게 많더라고요. 배우려면 일단 내가 열려야 되잖아요. 또 당시에 노인 프로그램을 맡게 됐었는데, 제가 50대에 가까워 질 때였어요. ‘물론 다른 사람의 노후도 생각해야 되지만 나의 노후도 잘 준비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쉰이 넘어서 노인 복지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그런 노력을 하면서 내 삶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 보게 됐죠.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이제까지 살았던 것과는 다르게 나를 확 펼쳐 놓고 살아야겠다, 그러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이제는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나이도 들었는데, 조금 배짱 있게 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예전에는 소심하고 사람들 만나는 걸 힘들어했다면 이제는 반대로도 한 번 살아 보면 어떨까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배짱도 조금 생겼던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어른도 자라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아이들한테만 ‘잘 자라라’ 할 게 아니라 사실은 어른이 더 잘 자라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탁환 작가는 이번 책을 읽고 “책과 사람이 연결되어야지만 삶의 지혜가 다리처럼 놓인다는 점을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썼어요. 두 분은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어요?


제가 이선아 PD와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를 개편하고 기틀을 잡을 때, 처음 떠올린 분이 김탁환 작가님이었어요. 당시에 작가님이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로 계실 때라, 섭외 메일을 드렸는데 같이 하기 힘들 것 같다고 답을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세 번까지 연락을 드렸죠. 진짜 삼고초려 끝에 모신 거예요(웃음).

 

그리고 지금까지 ‘김탁환의 뒤적뒤적’ 코너를 맡고 계시죠(웃음). 김탁환 작가님을 ‘훌륭한 독서 스승’으로 꼽으셨는데, 이유가 있나요?


선생님이 책을 정말 ‘뒤적뒤적’ 읽으세요. 장르가 국한되지 않아요. 존 스타인벡 같은 고전을 읽다가 갑자기 대중과학서, 에세이, 시집으로 옮겨가세요. 처음에는 따라가기가 되게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쭉 따라가다 보니까 독서 편식이 저절로 교정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책을 바라보는 자세, 책을 대하는 나만의 방법 같은 걸 선생님을 통해서 많이 배웠어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선생님, 저는 게을러서 책에 메모도 안 하고 밑줄도 잘 안 그어요. 그동안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도대체 저한테 뭐가 남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딱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딘가에 다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독서록을 정리하다 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고요. 어디에 있는 무슨 구절인지까지는 안 떠올라도 ‘아, 그 책’ 정도는 떠오르더라고요. 책을 꺼내서 다시 들여다보면 내가 생각했던 그 구절이 나오고요. 책을 읽는 건, 나도 모르게 쌓이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새롭게 발견한 부분이에요.

 

작가님의 독서 스타일은 어떤가요?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으시는 것 같던데요.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 병행 독서를 하잖아요. 머리맡에 한 권, 화장실에 한 권, 대중교통 이용할 때 들고 다니는 가벼운 책 한 권... 저도 그런 식으로 하는데요. 예전에는 소설만 좋아했었어요. 스토리 따라가기가 좋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진도가 빠르게 안 나가는 책들도 봐요. 가령 조금씩 생각을 해야 되는 책들은 주로 화장실을 놓으면 좋더라고요. 집중이 잘 돼요. 머리맡에는 스토리가 있어서 빠져들기 좋은 책을 많이 두고요. 되도록 다양하게 읽으려고 노력해요.

 

최근에 재밌게 읽으시는 책들은 어떤 건가요?


대중 과학서도 재밌게 읽고 있어요. 시작은 아마 『이명현의 별 헤는 밤』이었던 것 같아요. ‘과학자가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에요. 김상욱 교수의 『떨림과 울림』같을 책을 봐도 아름다운 글이 정말 많고요. 정재승 교수님도, 저희가 정말 어렵게 게스트로 모셔서 녹음을 하고 있는데, 과학 책만 골라 오시는 게 아니에요. 예술, 문학 등 모든 분야가 다 들어있어요. ‘이래서 모든 지식이 어우러진 과학적 저술이 나오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제가 SF 소설을 잘 안 읽는 편식이 있었는데, 최근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을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평소에 관심 갖지 않았던 분야도 분명히 이런 재미가 있을 거야’ 하면서 마음이 열리게 되죠. 심지어 자기계발서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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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로 산다는 것


책의 제목이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 예요. 앞서 『땡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를 쓰실 때 이런 결론을 얻으셨다고요.


그때 인터뷰한 분들이 거의 다 제가 오랫동안 알았던 분들이었어요. 그렇다 해도 만나서 ‘지금까지 인생을 사시면서 어떤 전환점 있었습니까?’ 하고 물어 보면 본인도 확실하게 언제라고 말하기 힘들어요. 대화를 하다 보니까 나오는 거죠. ‘말을 하다 보니까 그때였던 것 같네요’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가는 게 인생인데, 그 흐름 속에서 내가 중심만 잘 잡으면 되는 거누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린 결말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야겠다고요. 그 책의 마지막에서 그 문구를 썼죠.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라고요. 쓰면서도 ‘아, 이거 너무 잘 쓴 것 같아’ 그랬어요(웃음). 그리고 이번 책의 제목을 정하는데 그 문장으로 하면 어떨까 싶었죠. 출판사 대표님도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읽으며 익어갑니다’라는 말을 꼭 어딘가에서 하고 싶었어요. 대표님이 그 말은 독서록 제목으로 하면 딱 좋겠다고 하셔서 정하게 됐죠.

 

국어 교사로 계시다가 방송작가가 되셨죠. 그 변화가 작가님 삶의 터닝 포인트였나요?


그건 경로가 한 축으로 흐른 게 아니고요. 제가 국어 교육을 전공했는데, 그때는 국립 대학교 사대를 졸업하면 바로 발령을 받았어요. 임용 고시가 없었어요. 그래서 바로 시골 학교에 국어 교사로 갔는데, 저는 대학에 갈 때부터 선생님이 되기 싫었어요(웃음). 학교에서 국어 교사를 하면서도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치는 건 참 재미있고 좋은데 그 시스템이 되게 싫더라고요. 지금하고는 달리 되게 불합리한 게 많았고, 그런 게 저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어서,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는 게 목표였어요. 정말 철이 없는 시절이었죠. 제가 선생님을 그만둘 수 있는 길은 빨리 결혼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둘러서 결혼을 하면서 사표를 냈어요. 그런데 방향을 잘못잡고 결혼을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들어서 결혼 생활 12년 만에 정리를 했어요. 아들하고 한 팀을 이뤄서 따로 독립을 했고, 그러고 나서 방송작가를 하게 됐어요.

 

예전부터 방송작가가 되고 싶으셨어요?

 

그게 아마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기도 할 테고, 제 인생의 정말로 큰 운이 작용한 거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제가 무엇을 해야 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어렸을 때 친구를 만났어요. 그 친구가 방송계에 있었는데, 저를 만나자마자 ‘너는 학교 다닐 때부터 글을 잘 썼던 친구인데 왜 이러고 살아, 너는 내가 아는 가장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네가 이런 인생을 살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뭔가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어요. 나에 대해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일도 세상에 있다는 게. 그때 정말 힘들 때였는데 굉장히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때 방송 구경을 갔는데 친구가 ‘네가 혹시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너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이러는 거예요. 그때가 마흔이었어요. 방송계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정말 너무 해맑게 들어간 거예요.

 

이후에 방송국 생활은 어땠나요?


친구 덕분에 방송계에 진입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홀로 서기가 됐죠. SBS에서 저를 잘 아는 PD들이 ‘자수성가형’이라고 이야기를 해 줄 때, 그때 진짜 행복했어요. 운의 작용으로 방송국에 들어갔지만 중간에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자수성가를 했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는 게 너무 기뻤어요. 그게 아마 첫 번째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한두 번은 아니잖아요. 방송작가가 될 수 있었던 터닝 포인트는 친구가 내손을 잡고 끌어줬던 거고요. 후반부의 터닝 포인트들이 또 있었던 것 같아요. SBS에서 혼자 힘든 시간을 견딜 때 옆에서 지켜봐 준 사람들이 있었고,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많은 걸 배워 가면서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었던 때도 있었고... 아마 그런 게 후반부의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2013년에는 ‘SBS 연예대상’에서 라디오 작가상도 받으셨잖아요.


그때는 진짜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만큼 인정받았으면 됐다고요. 저한테는 물질적인 성취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거든요. 그냥 열심히 한 거 인정받았다는 거, 그거면 된 거예요. 그때부터 마음이 더 넉넉해진 것 같아요.

 

“방송작가란, 듣기 좋은 말로 ‘프리랜서’, 자조적인 표현으로는 ‘일용직’”이라고 쓰셨어요. 방송작가로 사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힘들죠. 방송작가의 세계라는 게 약간 겉멋이 들기 쉬운 세계잖아요. 내 위치를 자꾸 잊어버리게 될 수 있죠.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이나 진행자들의 수준이 내 생활의 어떤 축이 되니까요. 사실은 저도 그래요.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를 하면서 유명한 저자들, 훌륭하신 게스트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할 때 조금 답답해지는 마음이 들 때가 있거든요. 나는 별거 없는 사람인데. 연예인들과 자주 만나는 방송작가도 그럴 수 있죠. 그런 것에서 자기를 지키지 못하면 도태되기도 쉽고, 자기 나름의 실력이나 생존 경쟁력을 쌓는 것에 소홀하면 오래 할 수 없을 수도 있죠.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너무 늦게 시작했으니까 ‘나의 경쟁력은 그냥 죽어라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자수성가형 작가’가 된 비결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나를 조금 낮추면서 일했던 것 같아요. 저보다 어린 PD들은 계속 들어오고, 나이든 작가를 불편해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원고는 일회용이지, 남지 않잖아요. 그때 그 방송만 잘 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방송작가들은 되도록 자신을 지워야 되거든요. 그런 걸 잘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겸손해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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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쁨을 발견하는 한 해가 되길


“돌아보면, 책을 읽는 것도 방송작가로 일을 해 온 과정도 겸손과 비굴 사이에서 균형 잡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라고 쓰셨어요. 책이 작가님을 비굴하게 만들 때도 있나요?


있죠. 작가에 대한 부러움이나 경외감이 들 때 당연히 그렇고요. 그러다가도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무조건 납작 엎드려서 읽는 게 가장 좋은 거다’라는 생각이 들죠. 작가는 나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고, 나보다 먼저 앞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지식을 쌓고 나에게 좋은 길을 알려 주는 사람이니까. 

 

“나이 들어 가장 맛있게 읽은 책은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라고 하셨어요. 어떤 책을 ‘맛있게’ 느끼실까 궁금해요.


잠을 잊게 하는 책이 있잖아요. 이제 자야 되는데 읽는 걸 멈출 수 없는 책들이요. 『스토너』같은 경우는, 처음 앞부분은 ‘이게 뭐지?’ 하면서 읽다가 두 번째 날 멈췄던 부분에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에서부터 몰입이 쫙 되는 거예요. 그렇게 읽다 보니까 해가 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런데 마지막 부분이 주인공이 죽음을 맞는 부분이거든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과정이 몇 페이지 걸쳐서 길게 나와요. 그게 황혼하고 너무 잘 어울리잖아요. 해가 지는 가운데 그 부분을 읽는데, 꼭꼭 씹어서 읽게 되더라고요. 내 인생을 생각하게 되고요. 그 마지막 부분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흐르는 거예요. 그 느낌이 정말 좋더라고요. 제가 그 책을 세 번 읽었고, 주변에도 많이 권했는데, 정말 그 책은 읽는 사람마다 다 느낌이 달라요. 인생관이 드러나더라고요. 물론 저도 읽을 때마다 포인트가 조금씩 달라졌고요.

 

평소 ‘시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으시죠?


시간에 대한 생각은 『싯다르타』를 읽을 때 제일 먼저 한 것 같아요. 그때가 이십 대 초반이었을 텐데 ‘강물은 늘 거기에 있지만 같은 강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시간이라는 건 뭔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시간을 잊어버리고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시간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거니까요. 시간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는지, 시간을 어떻게 감각하면서 사는 게 좋은 것인지, 꾸준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간에 대한 책이 나오면 무조건 읽는 편인데요. 제일 좋아 하는 책은 칼 하인츠 A. 가이슬러의 『시간』이라는 책인데 지금은 절판됐어요. 되게 아쉽더라고요. 그 책이 있으면 선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지금도 그 책은 컴퓨터 옆 책꽂이에 항상 꽂아두고  자주 들여다봐요.
 
시간에 관한 책도 많이 모으셨는데, 당분간은 그림책 『시간은 어디에 있는 걸까』을 가장 앞에 두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유가 뭔가요?


그림책은 글이 적잖아요. 그런데 글 하나하나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요즘은 좋은 그림책들이 너무 많아요. 안녕달의 할머니의 여름휴가』라든지 수박 수영장』이라든지. 얼마 전에는 『기억의 풍선』이라는 그림책을 봤는데,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손자의 교감을 담은 책이에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면서 기억의 풍선을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이 나오는데, 그걸 그림하고 너무 아름답게 엮은 거예요. 풍선 하나에 하나의 추억들이 들어 있는 거죠. 제가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라는 프로그램도 하고 있는데, 노년층을 위한 방송이에요. 지난 추석 때 그 방송에서 『기억의 풍선』을 소개했어요. 그 책이 너무 좋았어요.

 

책과 관련해서 내년에 계획하신 바, 기대하시는 바도 있으세요?


요즘 워낙 책이 많이 나오는데 ‘나도 좋으면서 남들에게도 좋을 책’을 잘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세대를 건너뛰어서, 나도 젊은 세대의 느낌과 맞추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이번에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작품인데요. SBS 라디오에서 PD로 일하던 한 친구가 그만두고 암스테르담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 친구가 소설을 써서 이번에 당선이 됐어요. 『최단경로』라는 소설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다층적인 면을 고루 잘 짜서 소설을 썼는지 ‘이건 한 번 읽고 말아서는 안 되겠다, 여러 번 읽어야겠다’ 싶었어요. 어젯밤에 끝까지 읽고 덮어놓고 왔는데 진짜 재밌게 읽었어요. 그런 좋은 책들, 생각지도 않았던 독서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책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사실 책이 많이 쌓이기 때문에 흘긋 보고 치워놓는 책들도 많은데, 그 중에서 나중에 재발견하는 책들이 있거든요. 그런 실수를 조금 덜 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해요. 그리고 재독했을 때 더 좋은 걸 발견한 책들이 있잖아요. 그런 책들만 따로 모아두는 서가를 마련해야겠다는 마음도 가지고 있어요. 가령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든지  『스토너』, 『데미안』같은 책들.
 
내년에는 동네 책방에서 독서 모임을 진행하실 계획이라고요.


제가 역량이 된다면 독자들하고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요. 옛날에는 수줍음을 많이 탔는데 요즘에는 얘기 나누는 게 좋더라고요. 특히 젊은 친구들하고. 목수책방 대표님이 한번 기획해보신다고 하니까, 저는 시간만 맞으면 얼마든지 하고 싶어요. 아기자기한 동네 책방들하고 같이요.

 

‘책 읽는 귀여운 할머니 되기!’가 꿈이라고 하셨어요. 지금 바라시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요즘에는 경계를 뛰어넘어서 많은 것을 만나면서 잘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요. 이건 정말 큰 욕심인데, 주변 사람들한테 뭔가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우리 손자한테만이라도.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강의모 저 | 목수책방
어렵게 꺼낼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 등을 그동안 읽었던 책 이야기와 촘촘하게 엮으며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고민했을 법한 인생의 문제들을 툭 던져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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